1917–1940

혁명 세대 266명

10월 혁명을 만들고 초기 소비에트 국가를 세운 세대, 다수는 훗날 그 혁명의 이름으로 스러졌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파르호멘코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Пархом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86–1921 ✕ 마흐노군에 전사

차리친 방어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를 이끈 내전 지휘관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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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먀스니코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Мясников
정부 수반 소련 아르메니아 1886–1925 ✕ 추락사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봉기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소집하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스크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돈 강변 나히체반 출신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906년 RSDLP에 입당, 바쿠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1919년 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민족 공화국과 모스크바를 잇는 핵심 고리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트로츠키가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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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9–1918.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1–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우글라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гл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모스크바를 쥔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기반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연단에 오른 모스크바 당 조직 합동 총회. 우글라노프가 4년간 일궈온 모스크바 조직은 그날 중앙위의 '우경 위험' 규탄을 전폭 지지했고, 그는 한 달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다.

농민 출신 볼셰비키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당내 최고 실력자 중 하나로 부상했다.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했고, 류틴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좌익 반대파를 분쇄하는 데 앞장섰다. 1928년 이후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하는 '우익 반대파'의 핵심 지도자로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맞섰으며, 1929년 당 지도부의 경제정책 오류 인정 거부를 공개 비판했다. 같은 해 입장을 철회했으나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복권, 1936년 재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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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 입당, 볼셰비키
  • 1914–16차르군 복무, 부상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19172월·10월 혁명 참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
  • 1921–22페트로그라드 현당 책임서기, 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2–24니즈니노브고로드 현당 책임서기
  • 1924–28모스크바 현당 제1서기, 중앙위 서기
  • 1926–29정치국 후보위원
  • 1928–30소련 노동인민위원
  • 1932류틴 사건으로 출당
  • 1937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예브게니 알렉세예비치 프레오브라젠스키

Евгений Алексеевич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신경제정책 논쟁의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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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당 중앙 지도부와 경제 이론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46인 선언
  • 1928–1937유배, 재체포와 처형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경제 운영 소비에트 독일계 1886–1938 ✕ 숙청 처형 · 복권 1957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영국 언론인 아서 랜섬이 1919년 슈미트의 인민위원부를 방문했을 때의 인상: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극도로 깨끗하고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독일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운동 조직가였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맡았고, 10월 봉기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지원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소비에트 노동인민위원으로 재임하며 전시공산주의부터 네프까지 소련 노동 정책의 제도적 기틀을 수립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독립된 계급 조직에서 국가 기구로 편입시키는 국가화를 주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으나, 우익 편향에 가담했다가 곧 이탈하였고,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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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세묜 마르코비치 디만시테인

Семён Маркович Диманштейн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비에트 러시아 1886–1938 ✕ 처형

랍비 서품을 받은 볼셰비키 유대인위원장이자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설계자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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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빌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합류
  • 1918민족문제인민위원부 유대인위원회 위원장
  • 1918–1920예브섹치야(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유대인부) 의장
  • 1920–1922투르케스탄 교육·민족문제 인민위원, 부하라 공화국 정치대표
  • 1922–192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조직국 위원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 1926–1938OZET(유대인 노동자 토지정착촉진협회) 중앙이사회 의장
  • 1932–1936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

야코프 흐리스토포로비치 페테르스

Яков Христофорович Петерс
국가보안 기관 소련 라트비아 1886–1938 ✕ 처형

체카 창설 부의장, 명예체키스트 제2호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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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RP) 입당
  • 1907–1908체포·기소, 리가 군사법원에서 무죄 판결
  • 1909–1917런던 망명, 영국 사회당 및 라트비아 SD 그룹 활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준비
  • 1917.12–1918.07체카 부의장 (제1대)
  • 1918.07–1918.08체카 권한대행 의장 — 좌파SR 반란 진압
  • 1918.08–1919.03체카 부의장, 카플란 사건·로카트 음모 수사
  • 1920–1922투르키스탄 전권대표·타슈켄트 체카장, 바스마치 소탕
  • 1922–1929GPU·OGPU 동부국장, 국경군 감찰관 겸임
  • 1930–1934모스크바 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7당 통제위원회 위원

바실리 이바노비치 차파예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апа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7–1919 ✕ 전사

소련 영화와 민담으로 되살아난 내전의 전설적 지휘관

내가 목수였을 땐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 용감했지. 그런데 지금은 좀 더 잘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이제는 목숨이 아까워.

가난한 농민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정규 군사교육 없이 과감한 전술과 카리스마로 내전의 전설이 되었다. 1919년 우랄 전선에서 전사했으나 푸르마노프의 소설과 영화로 소비에트 영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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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326 벨고라이 연대에서 복무하며 펠트페벨까지 승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개 수훈.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니콜라옙스크에서 붉은위병대 조직, 니콜라옙스크 제1·제2연대 지휘.
  • 1918제2니콜라옙스크사단장으로 우랄 코사크 및 체코군단과 교전. 능선을 따라 사마라 방면으로 진격.
  • 1918–1919붉은 군대 참모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로 이탈.
  • 1919제25소총병사단장으로 부활.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서 두각. 적기훈장 수훈.
  • 1919.6–9우랄 전선으로 재배치. 특별집단 지휘관으로 우랄스크 포위 해제. 9월 5일 르비셴스크에서 코사크 기습으로 전사.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지노비예프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Зиновье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7–1934 ○ 자연사

공군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제1차 세계대전 공중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 4개를 받은 비행사는 혁명 편으로 돌아서 1920년 옛 부하라 성채 공략을 직접 지휘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용 비행사에서 혁명과 내전의 적군 지휘관으로 변모한 군인이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 반격에서 투르키스탄군을 이끌어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 참여했고, 콜차크군의 진격을 되돌리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군사교육과 공병 지휘를 맡으며 초기 소비에트 군대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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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서부전선 제2군 제3시베리아소총군단 항공대 비행사
  • 1917제3시베리아소총군단 병사위원회 의장
  • 1918스몰렌스크 주둔군 사령관
  • 1918–1919오렌부르크·악튜빈스크 전선 지휘관
  • 1919투르키스탄군 사령관
  • 1919–1920제1군 사령관
  • 1920–1921투르키스탄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4군사공병아카데미장 겸 정치위원

인노켄티 니콜라예비치 스투코프

Иннокентий Николаевич Стуков
좌익 반대파 소비에트 러시아 1887–1936 ✕ 총살

좌파 공산주의에서 통합반대파까지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한 혁명가

1918년 2월,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레닌의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수용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도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6년의 감옥 생활과 유형을 겪은 혁명가로, 1918년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내전기 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우파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집중파(데치스트)·46인 성명·통합반대파에 차례로 가담하며 10년 넘게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했다. 1927년 제명·유배 후 복귀하여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으로 일했으나, 1936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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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파
  • 1917모스크바 지역국(RSDLP(b)) 의장
  • 1918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9우파 현혁명위원회 의장
  • 1920우파 현당위원회(RCP(b)) 의장
  • 1920–1921『소베츠카야 시비리』 편집자, 민주집중파(데치스트) 참여
  • 1926–1927통합반대파 참여, 당 제명 및 유배
  • 1936RSFSR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글레보프-아빌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Глебов-Авил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비에트 러시아 1887–1937 ✕ 처형

첫 체신인민위원에서 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까지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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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칼루가 인쇄소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
  • 1905–1907칼루가·모스크바·우랄 지하인쇄소 혁명활동
  • 1912–1914볼로냐 당학교 수학, 『프라우다』 협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노조 중앙뷰로 서기, 군사혁명위 노조 대표
  • 1917.11–12초대 체신인민위원 (첫 인민위원회의)
  • 1918–1921흑해함대 정치위원, VTsSPS 간부, 우크라이나 노동인민위원
  • 1923–1926레닌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XIV차 대회 반대파 지도자
  • 1929–1936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스미르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Смирнов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7–1937 ✕ 처형

모스크바 봉기 포병 지휘관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민주중앙집권파로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는 '유럽 사회주의라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곁길이며 실패할 운명'이라고 보았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모스크바 법대생으로, 니콜라이 부하린·오신스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트리오를 이루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중포병을 지휘했고 1918년 초 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로 물러난 뒤, 민주중앙집권파·46인 선언·통합 야당을 거치며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1921~1927년 고스플란 상임위원,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노동국방회의 이사로 중앙계획 기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를 '유럽 사회주의의 곁길'로 보았고, 제명 후에는 '혁명과 볼셰비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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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09–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모스크바위원회 선동가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준위, 서부전선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 편집, 10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중포병 지휘
  • 1918.02–1918.04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
  • 1918–1921좌파 공산주의자, '군사야당' 지도자, 최고경제회의(VSNKh) 근무
  • 1920–1923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지도자
  • 1921–1927고스플란 상임위원, 노동국방회의 이사,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중앙통계국 이사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4–1926《프라우다》 및 《에코노미체스카야 지즌》 편집위원 겸직
  • 1926–1927사프로노프와 '15인 그룹' 결성, 통합 야당 참여
  • 1927.12제15차 당대회에서 제명, 우랄 유형 3년형
  • 1930–1937수감·유형 반복,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감 중 모스크바로 이송
  • 1937.05.26군사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아우구스트 이바노비치 코르크

Август Иванович Корк
군사 · 국방 소련 에스토니아 1887–1937 ✕ 처형 · 복권 1957

제국 장교에서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으로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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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 1918.06붉은 군대 자원입대, 전러시아 총참모부 작전과 근무
  • 1919.02–05에스토니아 적군 (에스토니아 노동코뮌 군대) 참모장
  • 1919.06–08제7군 부사령관 — 페트로그라드 방어, 유데니치 군 격퇴
  • 1919.08–1920.10제15군 사령관 —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 1920.10–1921.05제6군 사령관 — 페레콥-촌가르 작전, 브란겔 백군 최종 격멸
  • 1921–1922하리코프 군관구 사령관, 이후 우크라이나·크림 군 부사령관
  • 1922–1923투르케스탄 전선군 사령관 — 바스마치 반군 진압
  • 1924–1927서부 군관구 사령관 → 캅카스 적기군 사령관 →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27–1928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28–1929소련 주독 무관; 독일 국가방위군 교육 시설에서 연수
  • 1929.05–11붉은 군대 보급국장
  • 1929–1935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35–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정치위원 (2급 군사령관)

안드레이 루키치 콜레가예프

Андрей Лукич Колегаев
좌익 반대파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87–1937 ✕ 숙청 · 총살

소비에트 최초 연정의 농업인민위원, 토지 사회화 법안의 공동 입안자

「나온 것은 토지의 사회화가 아니라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었다」 — 볼셰비키가 수정한 토지법을 두고, 1918년 1월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농업인민위원(1917.11–1918.3)으로, 이반 마요로프와 함께 토지 사회화 법안을 공동 입안하여 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통과시켰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사임했으나 1918년 7월 좌파 에스에르 봉기를 거부하고 혁명적 공산주의자당을 창당했으며, 같은 해 11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혁명기 농업 개혁의 핵심 설계자로서 에스에르-볼셰비키 연정을 주도하다 내전기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한 독특한 정치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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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사회혁명당 입당; 하리코프 대학에서 정치활동으로 제적
  • 1909–1916해외 추방; 파리에서 수학하며 좌파 에스에르 그룹 참여
  • 1917카잔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카잔 현 농민대표 소비에트 의장; 에스에르 중앙위원;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 1917.11–1918.3RSFSR 농업인민위원; 마요로프와 토지 사회화 법안 공동 입안
  • 1918.5–7카잔 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좌파 에스에르 봉기 거부
  • 1918.7–11혁명적 공산주의자당 창당·지도; 11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1–1935교통인민위원부·모스크바 예술위원회 등에서 행정·경제 업무

티모페이 블라디미로비치 사프로노프

Тимоф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апронов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7–1937 ✕ 처형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

툴라주 빈농 가정 출신 도장공(塗裝工)으로, 1905년 혁명에 참가했고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小)인민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를 이끌며 당내 관료적 중앙집권화에 맞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유배지에서 집필한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에서 스탈린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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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3–1925소(小)인민위원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26–192715인파 성명 주도, '국가자본주의' 테제 제출
  • 1927–1937당 제명, 유배,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집필, 체포 및 총살

니콜라이 오신스키

Валериан Оболенский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7–1938 ✕ 처형

최고경제회의(VSNKh)의 첫 의장, 브레스트 평화에 맞선 좌파 공산주의자

은행 금고 열쇠들을 특별한 섀미 가죽 주머니에 담아 스몰니로 가져와 레닌 앞 탁자 위에 엄숙히 쏟아냈다. 그러나 레닌은 우리의 첫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열쇠가 아니라 돈을 요구했다.

볼셰비키 경제학자이자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공산주의자 그룹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제도적 기초를 구축했다. 니콜라이 부하린과 가까웠고 세계경제 위기론에 관한 실증적 저작을 남겼다. 대숙청기 처형 후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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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트베리·하리코프에서 활동
  • 1911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2–1918.3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겸 국가은행 초대 관리자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플랫폼 공동 집필
  • 1920–21민주집중제 그룹 공동 지도자
  • 1921–23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3–24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5고스플란 간부회 위원
  • 1926–28소련 중앙통계국(CSO) 국장
  • 1929–30최고경제회의 부의장
  • 1932–35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정회원
  • 1935–37과학기술사연구소 소장
  • 1937.10체포
  • 1938.9.1처형; 1957년 복권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가노비치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ганович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7–1938 ✕ 처형

이름 한 자 차이로 정치국원과 혼동되어 온 시베리아 식량 책임자

그의 성은 코가노비치(Коганович)이고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성은 카가노비치(Каганович)다. 46인 선언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가 누구인지를 두고 혼동이 생기는 까닭이다.

코스트로마에서 태어나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혁명 전까지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17년 코스트로마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했다. 1920년 4월부터 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시베리아혁명위원회에 의결권을 가진 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83인 강령에 서명했다. 1937년 6월 20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17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으며, 1958년 7월 10일 복권되었다. 서명자에 주석을 붙인 46인 선언 판본들은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를 그로 본다. 당시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와는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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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코스트로마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2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 시베리아혁명위원회 위원
  • 1927좌익반대파 가담, 83인 강령 서명
  • 1937체포
  • 1938최고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 1958복권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바그다체프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Багдатьев
비소련 혁명가 소련 러시아계 1887–1949 ○ 자연사

대중의 급진성을 앞세운 볼셰비키 실천가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에는 전쟁을 끝낼 희망이 없다.”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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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 1908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및 집행위원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실천가, 4월 시위 전단 작성
  • 19176월·7월 시위 참가, 임시정부에 체포됨
  • 1918–1925모스크바와 자캅카스에서 당 활동
  • 1926–1939소련 인민위원평의회 관개위원회 부위원장, 레지노트레스트 의장 등
  • 1940–1949개인연금 수급자로 생활

야코프 모이세예비치 피시만

Яков Моисеевич Фишма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7–1961 ○ 10년형 후 복권, 사망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에서 소련 화학전의 설계자가 된 혁명가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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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대의원 · 오흐타 화약공장 전투대 지휘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 10월 혁명 참가
  • 1918좌파 사회혁명당 전투대장 · 미르바흐 암살 폭탄 제조
  • 1921–1925적군 정보국 요원 · 이탈리아·독일 주재 무관
  • 1925–1937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국장 · 화학방어연구소장
  • 1937–1947체포·10년형 ·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개발
  • 1955복권 · 기술병 소장 계급 수여

표트르 라자레비치 보이코프

Пётр Лазаревич Войков
외교 소련 러시아 1888–1927 ✕ 암살 · 바르샤바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한 볼셰비키 외교관: 바르샤바에서 암살당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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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멘셰비키
  • 1906얄타 경찰서장 겨냥 폭탄 테러 기도 실패, 도피
  • 1907–1917제네바 망명, 제네바 대학교 수학·화학 전공, 멘셰비키-국제주의파 활동
  • 1917.8볼셰비키 합류, 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및 군사혁명위원회 참여
  • 1918.1–12우랄 지역 소비에트 공급위원
  • 1918.7우랄 소비에트 특별회의에서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 황산 공급 서명
  • 1919–1920식량인민위원부 분배국 근무, 첸트로소유스(중앙소비자협동조합) 부의장
  • 1920–1921대외무역인민위원부 이사, 수출위원회 참여
  • 1924–1927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전권대사)
  • 1927.6.7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백계 망명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에게 암살

세르게이 비탈리예비치 므라치콥스키

Сергей Витальевич Мрачковский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8–1936 ✕ 처형

우랄의 붉은 지휘관

1926년 지노비예프파가 스탈린과 결별하자 좌익 반대파는 누구와 연합할지 고민했다. 므라치콥스키의 답은 단호했다: '아무와도 안 된다.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

우랄의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내전 영웅으로, 특수북부원정대를 지휘해 토볼스크를 점령하고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초대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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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우랄 혁명·적군 지휘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과 제명
  • 1935–1936수감,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게오르기 이폴리토비치 로모프

Георгий Ипполитович Оппо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초대 법무인민위원, 고스플란 부의장, 그리고 대숙청의 희생자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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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7–1910모스크바 시·지구 당위원회, 페테르부르크 당비서
  • 1910–1913체포·아르한겔스크 유형
  • 1917.10–11초대 법무인민위원 (RSFSR)
  • 1918–1921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부의장, 연료 공급 책임
  • 1921–1923시브뷰로·우랄뷰로 위원, 시브프롬뷰로·우랄경제회의 의장
  • 1923–1926네프테신디카트(석유 신디케이트) 의장
  • 1926–1929돈우골(도네츠 석탄) 이사장
  • 1931–1933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비에트통제위원회 위원

레오니트 페트로비치 세레브랴코프

Леонид Петрович Серебряков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레닌이 '뛰어난 노동자'라 부른 좌익 반대파 서기

그의 딸 조랴는 이렇게 회고했다: "레닌은 한 번 나의 아버지를 '뛰어난 노동자'라고 불렀습니다."

15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프라하 당 대회(1912) 대표를 지냈고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병사 봉기를 이끌었다. 중앙위원회 서기(1920–1921)와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내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로 소련 철도·도로 행정을 담당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고 트로츠키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한 명으로 좌익 반대파를 이끌었으며, 1927년 제명·유배 후 1929년 복당했으나 결국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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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5세에 볼셰비키 입당, 루간스크에서 선동 활동
  • 1908–1916반복된 체포와 유형 (볼로그다·나림), 탈출과 재체포
  • 1912프라하 당 대회 대표
  • 1917코스트로마에서 2월 봉기 주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
  • 1919–1921중앙위 서기, 조직국 위원,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2–1924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장,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
  • 1923–1927'46인 선언' 서명, 좌익 반대파 지도부 — 제명
  • 1928–1937세미팔라틴스크 유형, 복당, 도로·자동차운수 중앙관리국장, 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로 처형

세묜 세묘노비치 로보프

Семён Семёнович Лоб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 총살

체카에서 출발해 러시아 최고경제회의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산업행정가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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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로젠크란츠 공장 노동자
  • 1917–1918페트로그라드·비보르크 당위원, 공장위원장, 소비에트 대표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9–1920사라토프 체카 의장 → 바시키르 체카 의장 겸 내무인민위원
  • 1921–1923석유신디케이트 연료국장
  • 1923–1926북서공업국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6–1930ВСНХ РСФСР 의장 겸 글라브에네르고 책임자
  • 1930–1932소련 공급인민위원부 부위원
  • 1932–1936소련 임업인민위원
  • 1936–1937러시아 식품공업인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