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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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봉기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소집하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스크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돈 강변 나히체반 출신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906년 RSDLP에 입당, 바쿠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1919년 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민족 공화국과 모스크바를 잇는 핵심 고리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트로츠키가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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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연단에 오른 모스크바 당 조직 합동 총회. 우글라노프가 4년간 일궈온 모스크바 조직은 그날 중앙위의 '우경 위험' 규탄을 전폭 지지했고, 그는 한 달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다.
농민 출신 볼셰비키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당내 최고 실력자 중 하나로 부상했다.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했고, 류틴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좌익 반대파를 분쇄하는 데 앞장섰다. 1928년 이후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하는 '우익 반대파'의 핵심 지도자로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맞섰으며, 1929년 당 지도부의 경제정책 오류 인정 거부를 공개 비판했다. 같은 해 입장을 철회했으나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복권, 1936년 재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영국 언론인 아서 랜섬이 1919년 슈미트의 인민위원부를 방문했을 때의 인상: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극도로 깨끗하고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독일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운동 조직가였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맡았고, 10월 봉기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지원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소비에트 노동인민위원으로 재임하며 전시공산주의부터 네프까지 소련 노동 정책의 제도적 기틀을 수립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독립된 계급 조직에서 국가 기구로 편입시키는 국가화를 주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으나, 우익 편향에 가담했다가 곧 이탈하였고,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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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제1차 세계대전 공중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 4개를 받은 비행사는 혁명 편으로 돌아서 1920년 옛 부하라 성채 공략을 직접 지휘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용 비행사에서 혁명과 내전의 적군 지휘관으로 변모한 군인이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 반격에서 투르키스탄군을 이끌어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 참여했고, 콜차크군의 진격을 되돌리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군사교육과 공병 지휘를 맡으며 초기 소비에트 군대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8년 2월,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레닌의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수용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도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6년의 감옥 생활과 유형을 겪은 혁명가로, 1918년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내전기 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우파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집중파(데치스트)·46인 성명·통합반대파에 차례로 가담하며 10년 넘게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했다. 1927년 제명·유배 후 복귀하여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으로 일했으나, 1936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는 '유럽 사회주의라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곁길이며 실패할 운명'이라고 보았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모스크바 법대생으로, 니콜라이 부하린·오신스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트리오를 이루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중포병을 지휘했고 1918년 초 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로 물러난 뒤, 민주중앙집권파·46인 선언·통합 야당을 거치며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1921~1927년 고스플란 상임위원,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노동국방회의 이사로 중앙계획 기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를 '유럽 사회주의의 곁길'로 보았고, 제명 후에는 '혁명과 볼셰비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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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볼셰비키 입당
1909–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모스크바위원회 선동가
1914–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준위, 서부전선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 편집, 10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중포병 지휘
1918.02–1918.04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
1918–1921좌파 공산주의자, '군사야당' 지도자, 최고경제회의(VSNKh) 근무
1920–1923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지도자
1921–1927고스플란 상임위원, 노동국방회의 이사,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중앙통계국 이사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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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나온 것은 토지의 사회화가 아니라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었다」 — 볼셰비키가 수정한 토지법을 두고, 1918년 1월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농업인민위원(1917.11–1918.3)으로, 이반 마요로프와 함께 토지 사회화 법안을 공동 입안하여 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통과시켰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사임했으나 1918년 7월 좌파 에스에르 봉기를 거부하고 혁명적 공산주의자당을 창당했으며, 같은 해 11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혁명기 농업 개혁의 핵심 설계자로서 에스에르-볼셰비키 연정을 주도하다 내전기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한 독특한 정치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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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사회혁명당 입당; 하리코프 대학에서 정치활동으로 제적
1909–1916해외 추방; 파리에서 수학하며 좌파 에스에르 그룹 참여
1917카잔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카잔 현 농민대표 소비에트 의장; 에스에르 중앙위원;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
툴라주 빈농 가정 출신 도장공(塗裝工)으로, 1905년 혁명에 참가했고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小)인민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를 이끌며 당내 관료적 중앙집권화에 맞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유배지에서 집필한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에서 스탈린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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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은행 금고 열쇠들을 특별한 섀미 가죽 주머니에 담아 스몰니로 가져와 레닌 앞 탁자 위에 엄숙히 쏟아냈다. 그러나 레닌은 우리의 첫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열쇠가 아니라 돈을 요구했다.
볼셰비키 경제학자이자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공산주의자 그룹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제도적 기초를 구축했다. 니콜라이 부하린과 가까웠고 세계경제 위기론에 관한 실증적 저작을 남겼다. 대숙청기 처형 후 1957년 복권되었다.
그의 성은 코가노비치(Коганович)이고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성은 카가노비치(Каганович)다. 46인 선언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가 누구인지를 두고 혼동이 생기는 까닭이다.
코스트로마에서 태어나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혁명 전까지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17년 코스트로마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했다. 1920년 4월부터 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시베리아혁명위원회에 의결권을 가진 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83인 강령에 서명했다. 1937년 6월 20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17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으며, 1958년 7월 10일 복권되었다. 서명자에 주석을 붙인 46인 선언 판본들은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를 그로 본다. 당시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와는 다른 인물이다.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1926년 지노비예프파가 스탈린과 결별하자 좌익 반대파는 누구와 연합할지 고민했다. 므라치콥스키의 답은 단호했다: '아무와도 안 된다.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
우랄의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내전 영웅으로, 특수북부원정대를 지휘해 토볼스크를 점령하고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초대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그의 딸 조랴는 이렇게 회고했다: "레닌은 한 번 나의 아버지를 '뛰어난 노동자'라고 불렀습니다."
15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프라하 당 대회(1912) 대표를 지냈고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병사 봉기를 이끌었다. 중앙위원회 서기(1920–1921)와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내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로 소련 철도·도로 행정을 담당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고 트로츠키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한 명으로 좌익 반대파를 이끌었으며, 1927년 제명·유배 후 1929년 복당했으나 결국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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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5세에 볼셰비키 입당, 루간스크에서 선동 활동
1908–1916반복된 체포와 유형 (볼로그다·나림), 탈출과 재체포
1912프라하 당 대회 대표
1917코스트로마에서 2월 봉기 주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
1919–1921중앙위 서기, 조직국 위원,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2–1924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장,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
1923–1927'46인 선언' 서명, 좌익 반대파 지도부 — 제명
1928–1937세미팔라틴스크 유형, 복당, 도로·자동차운수 중앙관리국장, 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로 처형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