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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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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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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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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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1924년 미국에서 망명한 옛 친구 피티림 소로킨이 대학 교수직을 제안하며 남을 것을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돌아가 자기 연구를 계속하겠다며 거절했다.
러시아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이다.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설립·이끌며 세계 곡물시장과 소비에트 농업 계획의 방법론을 개척했고, 최초의 농업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1920년대 후반 강제적 집단화와 불균형 공업화를 비판하다 1930년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으며, 사후 두 차례 복권되었다.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