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0

혁명 세대 266명

10월 혁명을 만들고 초기 소비에트 국가를 세운 세대, 다수는 훗날 그 혁명의 이름으로 스러졌다.

미르사이드 하이다르갈리예비치 술탄-갈리예프

Мирсаид Хайдаргалиевич Султан-Галиев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러시아 1892–1940 ✕ 처형

이슬람 사회주의와 민족 공산주의의 창안자, 스탈린의 첫 번째 이념적 희생양

1923년 체포 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술탄-갈리예프 체포를 기억하나? 스탈린의 주도로 이뤄진 첫 번째 주요 당원 체포였네. 불행히도 지노비예프와 내가 동의해버렸지."

타타르인 교사 가정 출신으로, 볼셰비키 내 최고위 무슬림 정치인이자 이론가였다. 1917년 입당 후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분과장과 중앙무슬림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식민지 무슬림 민중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재정의하고 동방 혁명이 세계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를 정립했다. 1923년 스탈린 주도로 체포·출당된 최초의 저명 볼셰비키이며, 그의 사상은 후일 나세르와 벤 벨라 등 제3세계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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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교사·사서·언론인; 타타르어·러시아어 신문에 혁명적 글 발표
  • 1917.7물라누르 바히토프와 함께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카잔) 공동 창설
  • 1917.11볼셰비키당 입당;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 부문 책임자
  • 1918–192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붉은 군대 무슬림 부대 조직, 바시키르 부대 편입 주도
  • 1919–1921동방민족 공산주의 조직 중앙국 의장
  • 1920–1923민족인민위원부 대학 구성원; 타타르 자치공화국 창설 주도,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강사
  • 1923.5'민족 일탈주의'로 체포·제명; '술탄갈리예프주의' 숙청 시작
  • 1928–1934재체포,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솔로프키 수용소 수감
  • 1937–19403차 체포; 1940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총살

마리나 이바노브나 츠베타예바

Марина Ивановна Цветаев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2–1941 ✕ 자살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시를 밀어붙인 은시대의 시인

1939년 귀환은 망명 작가가 스탈린 시대 소련으로 되돌아온 대가를 보여 준다.

러시아 은시대의 시인·산문가·번역가다. 내전 뒤 망명해 베를린·프라하·파리에서 창작했고,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온 뒤 전쟁 피난지 옐라부가에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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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첫 시집 《저녁 앨범》 자비 출간
  • 1922–1939베를린·프라하·파리 망명 생활
  • 1939소련 귀환
  • 1941옐라부가 피난지에서 사망

스테판 막시모비치 페트리첸코

Степан Максимович Петриченко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92–1947 ✕ 수용소 이송 중 사망

크론시타트 반란을 이끈 수병, 소련 스파이가 되어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페트리첸코가 이끄는 임시혁명위원회 기관지는 '여기 크론시타트에서 제3의 혁명의 첫 돌이 놓였다. 노동 대중의 마지막 족쇄를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혁명이다'라고 선언했다.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상급 병기병으로, 1917년 12월 에스토니아 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을 선포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3월에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볼셰비키 독재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이끌며 임시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산주의자 독재를 타도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봉기 진압 후 핀란드로 망명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20년 넘게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송환되어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7년 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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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배속
  • 1917.12–1918.2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 선포, 의장
  • 1919볼셰비키당에 가입했으나 곧 재등록 과정에서 탈락
  • 1921.3크론시타트 반란 임시혁명위원회 의장; 반란 진압 후 핀란드 망명
  • 1922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 핀란드 주재 소련 비밀요원 활동 개시
  • 1927–1937핀란드 케미 제지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첩보 활동 지속
  • 1941핀란드 당국에 체포·구금
  • 1945–1947소련 송환,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0년형 선고,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그루지야 1893–1930 ✕ 자살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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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

미콜라 흐리호로비치 흐빌로비

Микола Григорович Хвильовий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93–1933 ✕ 자살

근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창시자

1933년 5월 13일, 동료 작가들을 자택으로 불러 모은 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이렇게 썼다: '얄로비의 체포는 한 세대 전체의 처형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당 만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기초를 놓은 작가. 바플리테를 이끌며 '모스크바로부터 멀리!'를 외치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흐빌로비즘' 탄압을 받았다. 대표작 「나」, 『멧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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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볼셰비키 지하운동 참여, 적군 합류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하르키우로 이주, 문학 활동 시작
  • 1922–1923『푸른 에튀드』, 「나(로맨티시즘)」 발표
  • 1925–1928바플리테(VAPLITE) 주도, 『체르보니 실랴흐』 편집
  • 1926팸플릿 선언으로 '흐빌로비즘' 공세 촉발
  • 1927『멧도요』(발트슈네피) 출간
  • 1930프롤리트프론트 조직, 곧 해체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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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 복권 1956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처형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토볼스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전형적인 혁명 세대 간부로, 선원과 전기기사를 거쳐 1917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서기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30–1933)를 지낸 뒤 1933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의 당 기구에서 간부 배치를 총괄했고, 이후 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과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역임하며 노동조합과 교통 부문 정치통제의 중추로 활약했다. 11년간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를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총살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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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 니콜라예바

Клавдия Ивановна Николаев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3–1944 ○ 병사

인쇄공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노조 지도부에 오른 프롤레타리아 여성혁명가

1918년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 레닌이 입장하자 니콜라예바는 일어나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고 1,147명의 대의원들이 따라 불렀다.

인쇄공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1917년 《라보트니차》 편집장,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여성부를 이끌었다. 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위원까지 오른 소비에트 체제 최고위 여성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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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RSDLP(b) 입당, 인쇄노조 활동
  • 1908–15반복적 체포·유배, 혁명 선전 지속
  • 1917《라보트니차》 편집장, 10월혁명 참여
  • 1918–19페트로그라드 여성부·선전부장, 제1차 전러시아 여성대회 의장
  • 1924–26오르그뷰로 위원·서기국 후보위원·제노트델 책임
  • 1930–33중앙위 선동대중부장
  • 1936–44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
  • 1942영국 파견, 귀환 중 공습 하 부상자 구조

겐리흐 흐리스토포로비치 에이헤

Генрих Христофорович Эйхе
이론가 소련 라트비아계 러시아 제국 주민 1893–1968 ○ 자연사 · 1954년 재활

콜차크의 후퇴를 끝까지 압박한 적군 지휘관

1919년 말, 에이헤의 제5군은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옴스크와 톰스크를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밀어붙였다.

겐리흐 에이헤는 라트비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의 혁명가이자 적군 지휘관, 군사사 연구자였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에서 제26소총사단을 이끌어 백군 후방을 찌르는 기동을 펼쳤고, 제5군 사령관으로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시베리아 내륙까지 추격했다. 이후 극동공화국의 군사적 통합을 맡았지만, 대숙청기의 허위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54년 무죄로 재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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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제245보병연대 중대장, 참모대위
  • 1917제245보병연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19적군 동부전선 연대·여단 지휘관
  • 1919제26소총사단장
  • 1919–1920제5군 사령관
  • 1920–1921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 1922벨로루시·페르가나 지역 소련군 지휘관
  • 1924–1936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관료
  • 1954–1968군사사 연구자, 내전사 저술가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조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зо
군사 · 국방 소비에트 몰도바 1894–1920 ✕ 일본군에 체포되어 화형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볼셰비키 혁명가

홀로 무장해제한 채 러스키섬 사관생도들 앞에 선 라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러시아 땅을 위해 우리는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몰도바 보야르 가문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1917년 혁명에 합류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끈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자바이칼 전선 사령관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백군과 싸웠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과 유격전을 거쳐 1920년 1월 봉기를 조직해 콜차크의 극동 통치를 무너뜨렸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불태워졌으며, 소련에서 가장 널리 기념된 내전 순교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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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제국군 소위 임관, 크라스노야르스크 제15시베리아소총연대 배속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 군인부 의장; 전러시아 소비에트 제1차 대회 대표
  • 1917–1918이르쿠츠크 군사사령관; 첸트로시비리 위원
  • 1918자바이칼(다우리아) 전선 사령관 — 세묘노프 백군 격파
  • 1918–1919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 극동지역당 위원
  • 1919프리모리예 유격대 총사령관
  • 1920블라디보스토크 봉기 조직; 극동임시정부 군사평의회 부의장

보리스 안드레예비치 필냐크

Борис Андреевич Пильня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4–1938 ✕ 처형

혁명의 혼돈을 쓴 작가

빅토르 세르주가 찾아왔을 때 필냐크는 입을 비틀며 외쳤다. '그가 무려 50군데나 고치라고 했다! 아, 제약 없이 글을 쓸 수만 있다면!'

혁명 이후 러시아의 폭력과 혼돈을 파편적인 문체로 쓴 소설가였다. 『벌거숭이 해』로 명성을 얻었지만, 군 지도자의 죽음을 암시한 작품과 해외 교류는 그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결국 대숙청 속에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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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혁명기 단편소설 발표
  • 1922『벌거벗은 해』 발표
  • 1926『꺼지지 않은 달 이야기』 발표와 논란
  • 1926–1927일본 방문 뒤 『일본 태양의 뿌리』 집필
  • 1929–1930『마호가니』와 『볼가는 카스피해로 흐른다』 발표
  • 1931–1933미국 방문 뒤 『O.K.』(『미국 소설』) 발표
  • 1935–1936미코얀 의뢰로 세르게이 벨랴예프와 『고기』 공동 집필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에두아르트 페트로비치 베르진

Эдуард Петрович Берзи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라트비아 1894–1938 ✕ 처형

콜리마 금광의 굴라그를 설계한 라트비아 출신 체키스트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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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 1918.11RKP(b) 입당
  •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 1931.11달스트로이(Дальстрой) 초대 국장 임명
  • 1932.02나가예바 만에 상륙, 마가단 건설과 콜리마 금광 개발 개시
  • 1935.03금 채굴 계획 달성으로 레닌 훈장 수훈
  • 1937.04사단인텐단트(дивинтендант) 특별계급 수여
  • 1937.12휴가차 모스크바行, 12월 19일 체포

투라르 리스쿨로비치 리스쿨로프

Турар Рыскулович Рыскулов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카자흐스탄 1894–1938 ✕ 처형

통합 투르키스탄을 주장한 카자흐인 볼셰비키 전략가, 민족 획정에 맞선 목소리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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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 1919투르키스탄 공산당 무슬림국(Мусбюро) 의장
  • 1920.1–8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9바쿠 동방민족대회 대표; '동방행동평의회' 간부 선출
  • 1921–1922RSFSR 민족인민위원부(Наркомнац) 전권대표(아제르바이잔) → 부위원
  • 1922–1924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통합 투르키스탄론 주창, 1923년 스탈린과 공개 논쟁
  • 1924–1925코민테른 전권대표로 몽골 인민공화국 파견
  • 1926–1937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투르크시브 철도·카라간다 산업화 주도, 1932–1933년 카자흐 기근 구호 개입

이사크 에마누일로비치 바벨

Исаак Эммануилович Бабель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4–1940 ✕ 처형

너무 많이 보고 너무 적게 쓴 단편의 명수

“나는 새로운 장르의 대가가 되었다 — 침묵의 장르의.” — 제1차 작가대회(1934)

오데사 유대인 지구의 이야기꾼으로, 부됸니 기병대를 따라 폴란드 전선을 달리며 『기병대』를 썼다. 혁명의 잔혹을 너무 정직하게 그려 부됸니가 격노했다. 예조프의 아내와의 인연까지 겹쳐 1939년 체포되었고, 원고를 돌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1940년 총살당했다. 압수된 원고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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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6오데사 이야기와 『기병대』로 소비에트 문학의 스타가 되다
  • 1934작가대회에서 '침묵의 장르' 발언
  • 1939체포 — 원고 전량 압수
  • 1940총살, 1954년 복권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도브젠코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Довженко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56 ○ 심장마비

〈대지〉의 시인: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서정적 몽타주로 노래한 소비에트 영화의 거장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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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 1948〈미추린〉 발표, 두 번째 스탈린상 수상
  • 1950–1956모스필름에서 활동, 유작 〈바다의 시〉 시나리오 집필 중 심장마비로 사망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토도르스키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Тодор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94–1965 ○ 자연사

레닌이 '놀라운 책'이라 칭송한 베세곤스크의 소비에트 연대기 작가

레닌은 1919년 『프라우다』에서 토도르스키의 지방 소비에트 경험담을 두고 "이 훌륭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말들을 돌에 새겨 모든 경제위원회와 공장에 걸어두어야 한다"고 썼다.

『소총과 쟁기와 함께한 1년』(1918)으로 레닌의 극찬을 받은 소비에트 군사교육 지도자.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장을 지냈고, 대숙청 때 15년간 수감된 후 복권되어 투하쳅스키 평전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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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제국군 장교, 1차대전 참전, 대위까지 진급, 6개 전투훈장 수훈
  • 1918베세곤스크 현 신문 편집자 겸 당 선동부장, 『소총과 쟁기와 함께한 1년』 출간
  • 1919–21붉은 군대 사단장, 다게스탄 반란 진압 작전 지휘
  • 1923–24투르케스탄 전선 페르가나 지역군 사령관, 바스마치 진압 작전
  • 1927–33제5소총군단장, 독일 제국군 참관 훈련
  • 1933–3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장 겸 정치위원, 콤코르(1935) 진급
  • 1936–38적군 고등군사교육국장
  • 1955–65복권 후 중장 진급 및 은퇴, 회고록과 투하쳅스키 평전 집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쇼르스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Щорс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95–1919 ✕ 전선에서 전사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로 지목한 전설의 붉은 군대 사단장

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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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 의무병 복무 후 빌나 군사학교 속성과정 수료, 소위로 남서전선 전투. 결핵으로 후송.
  • 1918.3–8고향 스놉스크에서 빨치산 부대 조직, 독일 점령군과 교전. 가을 볼셰비키 입당.
  • 1918.9–11보훈 연대 창설.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 제2여단장으로 체르니히우·키예프·파스티우 탈환.
  • 1919.2키예프 사령관 임명 (2월 5일–13일). 명예 금무기 수여.
  • 1919.3–8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 지토미르·빈니차·즈메린카 탈환, 폴란드군 및 페틀류라군 방어전.
  • 1919.8제44소총병사단으로 통합, 사단장 임명. 코로스텐 철도 교차점 방어로 키예프 철수 엄호.
  • 1919.8.30빌로시치 인근 전투 중 후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사, 향년 24세. 사마라에 안장.

세르게이 예세닌

Сергей Есени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인 1895–1925 ✕ 자살

농민의 기억과 혁명의 균열을 노래한 시인

그는 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나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농민 가정에서 자라 러시아 농촌의 기억과 구전적 이미지에 현대적 서정성을 부여한 시인이었다. 그는 10월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지지했지만, 산업화와 국가 권력이 자신이 꿈꾼 사회주의와 어긋난다고 느끼며 점차 환멸을 드러냈다. 이미지니즘을 이끈 대표적 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혁명기의 해방감과 도시화가 낳은 상실을 함께 기록했다. 1925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은 신경제정책기 문화의 어두운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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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첫 시 「자작나무」 발표
  • 1915페트로그라드 문단에서 등단
  • 1916첫 시집 『라두니차』 출간
  • 1919이미지니즘 선언 참여
  • 1922–1923아이제도라 덩컨과 유럽·미국 순회
  • 1924이미지니즘 그룹 해산 선언
  • 1925『안나 스네기나』 발표
  • 192512월 레닌그라드에서 사망

라리사 미하일로브나 레이스네르

Лариса Михайловна Рейснер
작가·예술가 소련 폴란드 1895–1926 ○ 장티푸스

혁명의 발키리. 시인, 정찰대원,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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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 1925『석탄, 철,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 및 『데카브리스트의 초상』 출간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카민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Каминский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 복권 1955

소련 보건의료 체계를 세운 초대 연방 보건인민위원

«NKVD는 여전히 정직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습니다.» —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에게 항의하다. 스탈린의 답변: «그들은 인민의 적이며, 당신도 같은 무리다.»

유대인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혁명가였다. 내전기 툴라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조직하고 25세에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으며, 이후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의 열성적 추진자로 활동했다. 1936년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말라리아 퇴치, 의약품 생산 기반 확충, 예방의학 체계 구축 등 연방 차원의 공중보건 제도를 설계했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NKVD의 대량 체포를 공개 규탄하고 스탈린에게 '정직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고 항의했다가 당일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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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RSDLP(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모스크바대 의대 중퇴 후 툴라 볼셰비키 서기
  •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임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 추진
  •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 소련 위생총감,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

Семён Петрович Урицкий
군사 · 국방 소비에트 러시아 1895–1938 ✕ 처형 · 사후 복권

소련 군사정보를 확장하고 대숙청에 삼켜진 GRU 수장

실신과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수사관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소비에트 권력의 자비를 받을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는 소련의 군사정보 지휘관으로, 1935년 4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노농적군 정보총국(GRU)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조카이자 외교관 바츨라프 보롭스키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내전기 기병 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대 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을 수행했고, GRU 수장 재임 중에는 스페인 내전 초기 소련의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감독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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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1920오데사 붉은위병 조직, 내전기 기병여단장·제2기병군 여단장
  • 1920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부 정보국 작전과장
  • 1922–1924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
  • 1927–1930제20소총병사단장, 북카프카스 군관구 부참모장
  • 1931–1932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5. 4 – 1937. 6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 1937. 6 – 1937. 11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로샬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Рошаль
정부 수반 러시아 러시아 1896–1917 ✕ 살해

크론시타트 수병을 혁명으로 이끈 21세의 인민위원

10월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를 저지하는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를 이끈 젊은 혁명가로, 발트함대 수병을 혁명 편으로 돌려세웠다. 10월혁명 당일 감옥에서 풀려나 케렌스키 반격 저지에 투입되었고, 연말 루마니아 전선에서 백색장교단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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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10번 김나지움 혁명 서클 활동, 전교생 조직 회의 참가로 퇴학
  • 1914볼셰비키 입당, 나르바 구역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조직
  • 1915북부전선 징집, 전선 선전 활동으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수감
  • 1917.3–1917.7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시당위원장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 — 발트함대 수병 조직
  • 1917.7–1917.107월 사건 후 체포, 트로츠키·라스콜니코프 등과 함께 크레스티 재수감
  • 1917.1010월혁명 당일 석방,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 스타프카 점령 참여
  • 1917.12레닌 파견으로 루마니아 전선 인민위원회 대표 — 체포, 비밀장교단에 의해 살해

레프 세묘노비치 비고츠키

Лев Семёнович Выготский
이론가 소련 벨라루스 1896–1934 ○ 결핵

문화역사심리학의 창시자, 근위발달영역 개념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

마지막 말: "나는 준비됐다" — 젊은 시절 햄릿 에세이에 쓴 구절: "결심이 아니라 준비 — 그것이 햄릿의 상태다."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으로 고등정신기능이 형성된다는 문화역사이론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다. 『사고와 언어』를 남기고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세계 발달심리학과 교육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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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대학 법학부 및 샤냡스키대학 역사철학부 졸업
  • 1919–1924고멜에서 교사·연극 평론가·출판 편집자로 활동하며 심리학 연구 시작
  • 192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루리야·레온티예프와 '비고츠키 서클' 형성
  • 1925–1926『예술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결핵 악화로 장기 입원
  • 1927–1931결함학연구소 과학지도자, 제2모스크바대학·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교수
  • 1932–1934『사고와 언어』 집필, 근위발달영역 개념 제안, 하리코프에서 의학 공부
  • 1934전연방실험의학연구소 심리학 부문 초청받았으나 6월 11일 결핵으로 사망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블라고느라보프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Благонрав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38 ✕ 처형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볼셰비키 군사위원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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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3RSDLP(b) 입당, 예고리옙스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0–1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사령관
  • 1918.6–7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31체카·GPU·OGPU 수송국장
  • 1929–1932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35–1936중앙 고속도로·자동차수송국장 (구쇼스도르)
  • 1936–1937NKVD 고속도로건설총국장, 국가보안 1급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