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본주의적 경제체계론』(1924)에서: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는 경제 생활의 한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며, 자본주의적 형태에 기초한 국민경제학의 타당성을 다른 조직 형태의 경제 생활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경제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정립하고 '도덕 경제' 개념을 창안한 조직-생산학파의 공동 지도자이다. 모스크바 농업아카데미 교수이자 농업경제연구소 설립 소장으로서 농업협동조합론을 체계화했으며, 네프 시기 농업인민위원부·고스플란에서 농업 정책 수립에 참여했다. 콘드라티예프와 함께 조작된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1930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당했으며, 그의 농민경제 이론은 개발경제학과 농민연구에서 현재까지 영향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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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부하린에게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 우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전부 작은 얼룩일 뿐이야." 10년 뒤, 같은 입이 그를 총살하라 명령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는 스탈린의 책상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해 지하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1918년 5월 체카 간부위원으로 들어가 제르진스키 대리와 반혁명투쟁부장을 맡았다. 1918년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발표해 계급 기반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으며,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 내전기 보안기구를 지휘했다. 1922년 이후 경제·교육 행정으로 전환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훗날 아들에게 "그것이 내 사형선고였다"고 말했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이자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당했으며,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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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 소콜니코프는 1,300명의 대의원 앞에서 스탈린의 총서기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이 말을 연단에서 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 바자노프는 훗날 '그만이 감히 했다'고 기록했다.
볼셰비키 경제학자이자 재무인민위원. 여섯 개 언어에 능통한 당내 최고 지식인 중 하나로, 10월 혁명 직후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 백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붕괴된 화폐체계를 금태환 체르보네츠로 안정시켜 네프 경제의 화폐 기반을 마련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서명자이기도 한 그는 긴축·균형예산·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에 반대했고, 1926년 당 대회에서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실각 후 주영 대사를 거쳐 1936년 모스크바 재판 유죄 판결, 1939년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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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런던 아르코스 사무소 급습 이튿날, 로젠골츠는 7쪽 분량의 항의각서를 영국 정부에 제출하며 증거를 요구했지만, 이틀 뒤 영국 내각은 지하 암실에서 압수한 문서를 공개하며 단교를 선언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활약하고 공군 총책임자로 소련 공군을 조직했으며, 이후 런던 주재 대리대사로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서 첫 5개년 계획 시기 소련의 수출입을 지휘했으며, 동시에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로 편입된 복잡한 궤적을 남겼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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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 보험대리인으로 일하며 지하활동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1922–1924공군 총책임자 — 독일군과 비밀 군사협상 주도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영소 단교에 직면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1937–1938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1935년 덴마크에서 비밀회합이 발각되자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4명의 중앙 간부가 한꺼번에 체포된 GRU 역사상 최대의 작전 실패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24년부터 11년간 소련 군사정보국(GRU)을 이끌며 세계적인 첩보망을 구축한 창설자. 리하르트 조르게, 레오폴트 트레퍼, 얀 체르냐크 등 정예 요원들을 발굴·훈련시켰고, 기술정보 수집 체계를 정비해 소련 방위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으로 활약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1918년 1월 브레스트 평화 협상 중, 레닌이 주재한 당 간부회의에서 메호노신은 "우리에겐 실질적 전투력이 없다. 전선은 벌거숭이다.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콘스탄틴 메호노신은 적군 창설기의 핵심 군사 조직가로,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이어 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포드보이스키·스클랸스키와 함께 신생 적군의 골격을 세웠다. 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으며, 1918년 차리친에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남부전선 사령관을 지지하며 스탈린·보로실로프의 독자노선에 맞서 이들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전 후에는 브세보부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체육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고스플란·오소아비아힘·해양연구소 등으로 옮겨갔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된 후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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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3페름에서 학생혁명조직 참여; RSDLP 입당·볼셰비키; 폭발물 운반·선전물 등사 등 지하 활동
1913–191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두 차례 체포·추방; 카스피해 과학원 해양탐사 참여
1915–1917.2파블롭스크 근위연대 예비대대 사병; 병사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조직 건설
1917.4–10볼셰비키 중앙위 군사조직(보옌카) 지도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7월 봉기 후 크레스티 감옥 수감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참모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진압 지휘
1917.11–1918.9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잠나르콤보옌);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적군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위원
1918.9–1919.7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РВСР) 위원; 동부·남부·카스피-카프카스 전선 РВС 위원 —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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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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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10대에 혁명운동에 뛰어든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 청년으로, 트로츠키와 함께 망명 생활을 거쳐 1917년 메즈라이온치를 통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직접 들어가 협상했고, 그가 약속한 무사 통행으로 방어선이 무너지며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곧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및 중앙라다에 맞서 싸우다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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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체카 심문에서: '나는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나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한다. 나는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지금도 지지한다.'
볼린주 유대인 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파니 카플란은 16세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키예프 총독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의 수감 중 실명과 회복을 반복했으며,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에 합류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을 계기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모이세이 우리츠키 암살과 함께 적색 테러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으며, 그녀는 나흘 뒤 크렘린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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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키예프 총독 수호믈리노프 암살 기도 폭탄 음모로 체포됨
1907–1917시베리아 네르친스크 말체프·아카투이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복역, 복역 중 실명과 부분 회복 반복
1917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사면으로 석방, 사회혁명당 활동 재개
1918.08.30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연설 마친 레닌에게 브라우닝 권총 세 발 발사, 중상 입힘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와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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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페틀류라 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부상당한 채 탈출하여 붉은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은신했다.
야코프 드롭니스는 1906년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유대인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다섯 차례 중앙위원을 지냈다. 내전기에는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맞서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했으며, 폴타바·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가담했고 1927년 제명되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의 피고로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