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저자, 네프의 "시장과 계획의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을 진단한 역사가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 『계획경제의 기초』(1969)에서.
영국 외교관 출신 역사가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50–1978)를 집필해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정치·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20년의 위기』(1939)로 현실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역사 서술을 사실 축적이 아닌 해석의 과정으로 재정의했다. 네프에 관해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고 진단했으며, 이는 네프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4대 역사학적 입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말년까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소비에트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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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36영국 외무부 외교관, 파리 강화회의(1919) 및 리가 대사관(1925~1929) 근무
버넷 볼로튼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기자이자, 공화파 내부의 권력투쟁과 혁명 억압을 추적한 역사가였다. 그는 전쟁 중 공산당에 우호적이었으나, 1937년 5월의 충돌과 POUM 탄압을 조사하며 공산주의 세력이 공화국의 혁명적 동맹을 억눌렀다고 보게 되었다. 난민 증언과 방대한 신문·문서 자료를 수십 년간 모아 《스페인 혁명》과 유고작 《스페인 내전》을 남겼고, 그의 연구는 내전의 정치사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고든 스킬링은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와 정치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활동한 캐나다 정치학자였다. 그는 《중단된 혁명》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좌절된 실험이 아니라 외부 개입으로 중단된 개혁 혁명으로 분석해, 개혁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에 오래 남을 틀을 제시했다. 토론토대학교에서 동유럽 연구 기반을 세운 그는 학술 연구와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연대를 함께 실천했다.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는 크로아티아계 경제학자이자 인구학자로, 경제개발 자문과 인구 통계를 연구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의 유고슬라비아 인명 손실을 분석한 연구자로 알려졌다. 그는 전후 인구조사와 예상 인구를 비교해 실제 사망자와 인구학적 손실을 구분하려 했고, 1989년 유고슬라비아의 전쟁 사망자를 약 102만 7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수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포함한 여러 세력의 희생과 전후 보복을 둘러싼 기존 서사를 재검토하게 했지만, 자료와 방법을 둘러싼 비판도 낳았다.
피그만 침공 뒤 그는 결정적 회의에서 더 크게 경고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나는 몹시 자책했다"고 회고했다.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는 미국 자유주의와 대통령 권력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가이자 공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특별보좌관으로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연설문을 다루며 피그만 침공에 반대했지만, 결정적 회의에서 침묵한 책임도 훗날 인정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이 아니었으나 유엔 주재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위기 발표 작성을 도왔다. 1965년의 『A Thousand Days』는 케네디의 위기 관리를 정교한 지도력의 서사로 각인시켰고, 이후 연구자들은 그 영웅적 기억이 배제한 쿠바와 소련의 행위, 비밀 합의, 구조적 위험을 다시 조명했다.
『The Great Terror』 개정판은 기록관 공개 뒤에도 그의 핵심 문제 제기가 남았음을 보여 주었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소련의 정치적 폭력과 농업 집산화를 연구한 영국계 역사가이자 시인이었다. 1968년 『The Great Terror』는 공개된 문서와 망명자 증언을 엮어 대숙청을 모스크바 재판만이 아닌 국가적 테러 체계로 서술했고, 영어권에서 그 시대를 부르는 이름을 널리 정착시켰다. 그의 희생자 추계와 전체주의 해석은 이후 기록관 공개와 연구 성과로 일부 뒷받침되었지만, 규모와 인과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는 반공 정보 활동과 문학 활동에도 관여해, 학술 연구와 냉전 정치의 경계가 얽힌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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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39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철학·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영국 공산당에 가입
1940–1946영국 육군 장교로 복무
1944–1948불가리아 주재 영국 공관 및 연합군 통제위원회 연락장교
1948–1956영국 외무부 정보연구부에서 대소련 정보·선전 업무
1962–1963『스펙테이터』 문학 편집자
1968『The Great Terror: Stalin's Purge of the Thirties』 출간
어느 날 오전 11시에 논쟁을 중단해야 했는데, 그가 다섯 시간 뒤 돌아와서는 연결하는 말 한마디 없이 바로 '일곱째로, 레닌은…' 하고 중단된 지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베를린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 시절 시베리아 금광촌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고, 1971년 이후 히브리대학 교수로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했다. 마르토프 평전(1967)으로 멘셰비키 지도부의 전략적 선택을 조명했으며, 『크론시타트 1917-1921』(1983)에서는 페트로파블롭스크호와 세바스토폴호 승무원의 93.9%가 1917년 이전 입대자임을 함대 명부로 입증해 봉기 참여자들이 '농민 복장의 백위파'가 아니라 혁명의 구주역들이었음을 실증했다. 소련사에서 개인과 집단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정착촌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보골류브 코초비치는 사라예보 출신의 세르비아계 법률가이자 통계학자로,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인구와 전쟁 손실을 분석했다. 그는 1985년 저서에서 1921년·1931년·1948년 인구조사를 비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실제 손실을 약 101만 4천 명, 인구학적 손실을 약 198만 5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연구는 국가가 제시한 170만 6천 명이라는 수치와 구별되는 독립적 추계로, 전쟁 희생자 수를 둘러싼 역사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클라우디오 파보네는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기록관리자로, 파시즘과 저항, 국가기구의 연속성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경험은 그의 역사 인식과 연구 주제에 깊이 반영되었다. 대표작 『내전』은 1943~1945년의 투쟁을 애국전쟁, 이탈리아인 사이의 내전, 계급전쟁이 겹친 과정으로 분석해 저항의 정치적 선택과 도덕적 긴장을 학술 논쟁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국가중앙기록보존소의 정비와 이탈리아 국가기록보존소 안내서 편찬에도 기여했다.
게이브리얼 잭슨은 미국의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이자 역사가, 저널리스트였다. 1965년 저서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은 영어권에서 제2공화국과 내전을 종합적으로 다룬 초기 연구로, 공화파 내부의 정치적 갈등까지 분석한 작업이었다. 그는 공화파의 제도적 개혁과 PCE의 전쟁 수행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 반면, POUM과 혁명적 좌파의 전략을 비현실적으로 보았으며, 이 해석은 내전사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매카시즘으로 학문 경력이 지연되었지만 UC 샌디에이고에서 현대 유럽사를 가르쳤고, 은퇴 뒤에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역사에 관한 저술을 이어 갔다.
겨울전쟁의 실제 전사자 53,522명을 최초로 공개하며 소련 공식 기록을 깨뜨린 군사사학자
1989년 『오고뇨크』 22호에 「네즈나메니타야 보이나(빛나지 않은 전쟁)」를 발표하며, 1940년 몰로토프가 공식 발표한 소련군 전사자 48,475명이라는 숫자가 허구임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후 소련군정청에서 복무한 군사사학자로, 평생을 소련의 전쟁사 연구에 바쳤다. 1989년 잡지 『오고뇨크』에 겨울전쟁의 실제 소련군 전사자가 53,522명임을 공개하며 50년간 유지된 공식 통계를 처음으로 깨뜨렸고, 이후 비밀의정서와 카틴 학살 문서를 최초로 출판하는 등 폐쇄된 기록의 문을 열었다. 만년에는 나치 점령지 협력 문제를 다룬 방대한 연구로 소련사의 마지막 금기를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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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군대 징집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돈·스탈린그라드·제3우크라이나·제1벨로루시 전선)
1945–1950독일 주둔 소련군정청 근무
1953역사학 후보 박사 (루자티아인 연구)
1962역사학 박사
1967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연구원, 『제2차 세계대전사』 9권 책임편집, 국가상 수상
그는 ‘Z’라는 이름으로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의 모순을 넘지 못하리라 썼고, 훗날 그 글의 필자를 인정했다.
마틴 말리아는 러시아와 유럽의 지성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가로, 버클리에서 러시아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그는 《소련의 비극》에서 레닌주의 사회주의의 자기완결적 설계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함께 잠식해 소련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에는 ‘Z’라는 필명으로 「스탈린 묘에 부쳐」를 발표해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공산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해석은 소련 붕괴를 설명하는 강력한 한 극을 이루었지만, 사회주의의 역사적 가능성을 이념 자체의 결함으로 환원한다는 논쟁도 낳았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썼다: "소비에트 역사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했지만… 역사의 세부가 선입견과 충돌할 때는 후자가 양보해야 한다… 나는 좌파로 남아 있으며,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국의 경제사가. E. H. 카와 함께 『계획경제의 기초』를 집필했고, 카의 작업을 이어받아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업화』 전7권을 완성했다. 휘트크로프트와 공저한 『기아의 해』(2004)에서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5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계획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조달 우선 정책·흉작·지도부의 뒤늦은 대응이 결합된 결과로 설명했다. 젊은 시절 영국 공산당원이었으나 1956년 헝가리 침공 후 탈당했고, 좌파로서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평생 지켰다.
그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후사크 체제에 이어 1989년 이후에도 다시 매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카렐 코시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의 실천과 구체적 역사성의 철학으로 재구성한 체코 철학자였다. 대표작 《구체성의 변증법》(1963)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현상학을 대화시키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지식인이었고, 정상화 시기에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어 침묵과 저항을 견뎠다. 1989년 이후에는 개혁의 기억이 후사크 체제와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차례로 매장되었다고 비판하며 사건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을 열었다.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번스는 그를 '20세기 미국사에 관한 가장 유능한 소련 전문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전후 세대 최초로 소련에서 미국사 연구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역사가. 레닌그라드대학에서 국제관계사를 전공하고 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에서 평생 연구하며 석유정치, 미국 혁명, 미소 관계를 아우르는 300여 편의 저작을 남겼다. 티머시 나프탈리와 함께 소련 공산당·크렘린 문서고를 처음 열어 쿠바 미사일 위기의 내막을 밝힌 『One Hell of a Gamble』(1997)은 냉전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어진 『Khrushchev's Cold War』(2006)로 영국 왕립연합군사연구소의 올해의 군사사 서적상을 받았다.
그는 1962년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쿠바 협상을 기록했고, 그 문서가 훗날 공개되며 미사일 철수 뒤에도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르고 미코얀은 라틴아메리카와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아들이었다. 1962년 아버지를 수행해 쿠바를 방문한 경험과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공개된 미사일 철수 뒤에도 소련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고 협상 과정이 쿠바 지도부와의 균열을 낳았음을 밝혔다. 그는 학술지 《라틴아메리카》를 이끌며 이 지역 연구를 조직했고, 훗날 소련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 냉전사 연구에 참여했다.
「한 기업에 동시에 두 개의 이질적 규제자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자동차에 두 명의 운전자와 두 개의 핸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회고로 본 계획체제』(2000)에서 코시긴 개혁의 실패를 요약하며.
소련 및 러시아의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우랄공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1965년부터 사망까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해외 경제이론 비판적 연구 분과를 이끌었고, 후기에는 경제체제 전환 이론과 러시아 경제사상사 연구에 집중했다. 2000년 폴 그레고리와 공저한 『회고로 본 계획체제』에서 1965년 코시긴 개혁의 핵심 모순을 지령적 계획과 준시장이라는 두 이질적 규제자의 한 기업 내 양립 불가능성으로 분석하여, 개혁 연구의 '두 규제자' 학파를 열었다.
2002년 「군사역사잡지」에 실은 글에서 그는 역사가의 의무를 이렇게 적었다: "역사가는 자기 민족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는 소련군에서 출발해 총참모부 부총참모장까지 오른 군인이자 군사역사가였다. 그는 1988년부터 군사역사 연구단을 이끌어 비밀 해제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과 러시아 군대의 전쟁 손실을 통계화했고, 그 결과는 1993년 저서로 출간됐다. 이 연구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12만 6,875명으로 제시해 널리 인용됐지만, 후속 연구자들은 누락과 중복 가능성을 지적하며 더 높은 수치를 제시했다.
명예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며 인용된 말,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오데사 출신 유대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퀸스 칼리지에서 평생 러시아와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사를 가르친 개척적 역사가였다. 『크론시타트 1921』(1970)으로 볼셰비키가 그 봉기를 반혁명 음모로 규정한 신화를 실증적으로 깨뜨렸으며, 훗날 게츨러의 명부 연구가 더 정밀한 수치를 내놓자 그 우위를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를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편견에 맞서 그들을 '사회정의의 선구자'로 복원하려 했고, 평생 모은 2만 점의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휴 토머스는 1961년 저서 《스페인 내전》으로 전쟁을 국제 독자에게 널리 알린 영국 역사가다. 그는 외교 자료와 참전자들의 기록, 인터뷰를 바탕으로 공화파의 투쟁과 내부 폭력을 공산주의 진영이나 반공주의 진영의 논리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서술했다. 이 책은 프랑코 독재 아래의 스페인에서 clandestine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사실과 해석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출발점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쿠바와 스페인 제국, 세계사를 연구했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에서 보수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으로 옮겨 갔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실린 그의 논문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은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 대 말렌코프-베리야 그룹'의 파벌 투쟁으로 정식화했다. 이후 30년 넘게 이 틀이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의 역사학자. 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를 우등 졸업하고 토르조크에서 교사와 당 일꾼으로 일한 뒤, 1966년부터 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에서 25년간 봉쇄·전후복구·당 간부들의 정치 전기를 연구했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발표한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에서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과 말렌코프-베리야 그룹 사이의 파벌 투쟁으로 해석하는 틀을 처음 제시했고, 이듬해 빅토르 데미도프와 함께 편찬한 동명의 책은 20만 부 발행으로 대중적 폭발을 일으켰다. 이 작업으로 '레닌그라드 사건' 연구의 포스트소비에트 역사학 전체를 열었으며, 1991년부터 사망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로 후속 세대를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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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칼리닌주 토르조크 출생, 노동자 가정
1952–1957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 우등 졸업
1957–1962르제프 중등학교 교사, 이후 토르조크 시당위 선전선동부 지도원·부장
1965후보학위 취득, 「제1차 5개년계획기 레닌그라드 CCC-RKI 활동」
1966–1991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후일 역사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1987–1989『대화』에 '레닌그라드 사건' 첫 논문 게재, 『CPSU사 문제』에 획기적 논문 발표, 박사학위 취득, KGB상 수상
1990V. I. 데미도프와 『레닌그라드 사건』 편찬, 20만 부 발행
1991–2016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역사학부 러시아현대사 교수, 150편 이상 논문·저서 발표
그가 편집한 체르노빌 연구서는 6,000여 개 자료를 검토해 장기 피해를 추산하며 공식 사망자 수 중심의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동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생물학자이자 환경정책가였다. 그는 체르노빌의 장기적 건강·환경 피해를 강조하며 공공 논쟁에 참여했고, 공동 저술서의 높은 사망 추정치는 재난 피해 규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 극단을 이루었다. 과학 연구와 환경운동, 의회·대통령 자문 활동을 오가며 생태 문제를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
나는 오히려 당의 내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된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당시 대중의 정서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수정주의 학파를 대표하는 미국 역사학자. 1960년대부터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작업한 최초의 서방 연구자 중 한 명으로, 1976년 저서 『볼셰비키 권력 장악』에서 10월 혁명이 소수 쿠데타가 아니라 평화·토지·빵을 요구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밝혀 파이프스의 냉전적 쿠데타 테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분권화된 조직'이었다는 그의 발견은 혁명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결론을 기록 자료에 근거해 기꺼이 받아들인 역사가로서도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