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관련 역사 사건
- 1915–19215·4 운동과 중국공산당의 창당창사 대표로 창당 대회 참석베이징대 도서관 조수로 리다자오 밑에서 일했고 1921년 대회에 참석했다.
- 1924–1927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1927년의 파국「후난 농민운동 고찰 보고」국민당 농민운동강습소를 운영했고 1927년 농민 폭력을 옹호한 뒤 추수 봉기를 이끌었다.
- 1927–1936징강산에서 옌안까지: 소비에트 근거지와 대장정징강산 근거지 창건자 · 쭌이 이후 군사 지도자농촌 근거지 전략을 세웠고 1935년 쭌이 회의에서 지휘권을 되찾았다.
- 1937–1945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옌안의 당 지도자 · 「지구전론」과 정풍운동유격전과 근거지 건설을 지시했고 정풍운동으로 당을 자신의 사상 아래 통일했다.
- 1941–1945태평양 전쟁항일 유격전 지도자중국 공산당의 항일 동원과 유격전 노선을 이끌어 일본 점령에 맞선 별도의 저항 기반을 만들었다.
- 1945–1949국공내전공산당 주석 · 전쟁의 최고 지휘자충칭 회담에 나섰고 산베이에서 세 전역을 지휘했으며 1949년 10월 건국을 선포했다.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중앙인민정부 주석
- 1950–1953한국전쟁인민지원군 파병 결정유엔군이 북상하자 파병을 결정해 전선을 다시 남쪽으로 밀어냈다.
- 1949–1956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개조로당 주석 · 국가주석, 개조의 가속자중소조약을 맺고 과도기 총노선과 농업 집단화의 고조를 명령했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스탈린 격하 연설에 반발한 중국 지도자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을 사회주의 건설 방식에 대한 부정으로 판단했다.
- 1956–1957백화제방에서 반우파 투쟁으로비판을 초대하고 반우파 투쟁으로 돌아선 당 주석「인민 내부 모순」 연설로 백화제방을 열었고 6월 8일 반격을 지시했다.
- 1958–1962대약진과 대기근대약진의 발의자인민공사와 철강 목표를 밀어붙였고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숙청했으며 1962년 조정을 끝냈다.
- 1956–1969중소분열중국 쪽 당사자소련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대안을 자처했다.
- 1966–1976문화대혁명문화대혁명을 「발동하고 이끈」 주석홍위병을 동원해 류사오치와 당 기구를 무너뜨렸고 1976년 9월 사망했다.
대장정(1934–35) — 1만 리를 걸어 혁명의 중심이 되다
1934년 10월, 국민당의 제5차 포위 섬멸 작전에 직면한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장시 소비에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당시 당내에서 밀려나 있었고 군사 지휘권도 없었다. 그러나 퇴각이 재난으로 변해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1935년 1월,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는 군사 노선을 정면 비판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이른바 '쭌이 회의'는 중국공산당 역사의 전환점이다. 마오는 그때부터 대장정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어진 8개월간 홍군은 걷고 또 걸었다. 강을 건너고, 해발 4천 미터의 눈 덮인 산맥을 넘고, 늪지대를 통과했다. 출발 당시 8만 6천 명이던 병력은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7천 명 이하로 줄었다. 그러나 그 7천 명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략적 핵심으로 정련된 간부 집단이 되었다.
대장정의 정치적 의미를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것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1937)이었다. 마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장정은 선언서다. 중국공산당이 곧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1만 리나 걸었다."
대장정은 군사적 패배를 정치적 승리로, 철수를 신화로 전환시킨 사건이었다. 그 경험은 마오의 농촌 포위 도시 전략, 인민전쟁론, 그리고 대중노선 개념의 실천적 토대가 되었다.
대중노선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마오쩌둥의 이론적 공헌은 중국 혁명을 유럽 산업국가의 경험에 기계적으로 맞추지 않고, 중국 사회의 계급구성과 제국주의 지배 조건에서 출발해 혁명의 경로를 다시 구성한 데 있다. 그는 농민을 단순한 보조세력이 아니라 조직과 정치교육을 통해 혁명의 능동적 주체로 만들 수 있는 대중으로 보았고, 농촌 근거지와 장기적 무장투쟁을 도시 봉기의 대안이 아니라 중국의 구체적 조건에 맞는 전략으로 발전시켰다.
이 전략은 대중노선이라는 조직 원리와 결합했다. 당은 대중의 요구와 경험을 조사하고, 그것을 정책과 구호로 종합한 뒤, 다시 대중의 실천 속에서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7년 국공합작을 다룬 글에서 마오는 항일전선을 양당의 임시 협정으로 한정하지 않고 노동자·농민·병사·지식인·상공인을 포괄하는 전국적 전선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통일전선은 계급적 목표를 버리는 타협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민족적 과제를 대중 동원과 혁명적 조직의 확장으로 연결하는 전술이었다.
옌안 시기에 이러한 경험은 실사구시, 대중노선, 자력갱생이라는 방법론과 함께 ‘마오쩌둥 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1945년 중국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 당의 지도사상으로 공식 채택된 이론은 신민주주의, 인민전쟁, 당 건설, 정책과 전략, 사상·문화 사업을 포괄했다. 동시에 이 전통은 마오 개인의 독창성만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실천과 여러 간부들의 경험이 결집된 결과였다. 1981년 당의 역사결의도 마오의 후기 오류와 이론의 유효한 성과를 구별하면서 이 점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대중노선의 언어가 언제나 대중의 자율성을 보장한 것은 아니다. 당과 지도자의 해석이 대중의 ‘진정한 요구’를 독점한다고 여겨질 때, 동원은 비판과 교정의 통로보다 정치적 복종을 요구하는 장치로 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오의 유산은 식민지·반식민지 조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구체화한 혁명 전략과, 그 전략이 당-국가 권력의 집중 및 후기의 극단적 정치운동과 맺은 긴장을 함께 검토할 때 가장 정확히 이해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공고화(1949~1957): 국가 건설과 진압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톈안먼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임시 헌법에 해당하는 《공동강령》을 채택하고 그를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했다. 공동강령은 통일전선 정부와 국유·협동·사영·공사합영의 혼합경제, 그리고 '토지는 경작자에게'라는 농촌 토지개혁을 규정했고, 농촌 토지개혁은 1953년에 완료되었다. 1954년 9월 20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가 베이징에서 헌법을 채택·공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헌법으로, 공동강령을 기초로 작성되었고, 단일국가·단원제 전국인민대표대회·국가주석 체제를 세우며 중앙인민정부를 새 헌정 정부로 대체했다(이 헌법은 1975년 1월 17일 폐지되었다).
대외적으로 마오는 1949~50년 겨울 모스크바로 가 정치·경제 혁명, 외교정책, 철도, 해군기지, 소련의 경제·기술 원조를 의제로 회담했고, 그 결과 맺어진 조약에는 스탈린의 우위와 마오를 돕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었다. 1950년 10월에는 후퇴하던 조선인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인민지원군을 조선전쟁에 파병했으며, 중국군 사망자는 최소 18만 명에 이르렀고 미국은 무역 금수 조치를 부과했다.
마오는 당에 사회 개조와 통제 확대를 위한 운동을 조직하도록 밀어붙였다. 토지개혁에서는 지주·부농으로 지목된 대규모의 사람들이 대중집회에서 맞아 죽임을 당했고, 그 토지는 가난한 농민에게 넘어갔다. 반혁명 진압 운동은 관리와 관료적 부르주아지를 겨냥했다. 이 진압의 규모는 사료마다 다르게 제시된다. 1976년 미국 국무부는 토지개혁에서 최대 100만 명, 반혁명 진압 운동에서 80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추산했고, 마오 자신은 1950~1952년에 반혁명분자 70만 명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 거의 모든 마을에서 최소 한 명의 지주를 공개 처형 대상으로 고르게 한 정책 때문에 사망 추산은 200만에서 500만 명 사이다. 또한 최소 150만 명, 많게는 400만~600만 명이 노동교화형을 받고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그중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마오는 이러한 살육이 권력 장악에 필요하다고 옹호했다.
1951년의 삼반·오반 운동은 정부·산업·당 관리들을, 이어서 자본가 요소들을 더 넓게 숙청했다. 노동자는 상사를 고발했고, 배우자는 배우자를, 자녀는 부모를 고발했다. 희생자들은 투쟁집회에서 모욕당했고, 이 운동들은 다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압도적 다수는 자살이었다. 마오는 가벼운 위반자들은 비판과 개조를 거치거나 노동수용소로 보내고 "그중 가장 악질적인 자들은 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의 성과로는 1950년대 아편 소비와 생산의 근절이 거론된다. 1천만 명의 중독자가 강제 치료를 받았고 밀매상들은 처형되었으며 아편 재배 지역은 다른 작물로 바뀌었다.
이어서 마오는 제1차 5개년 계획(1953~1957)을 시작했다. 철강·전력·석탄·중공업 기계·건축자재·기초 화학을 우선하는 급속한 공업화가 중심이었고, 많은 공장이 소련의 원조로 지어졌다. 694개의 대중형 공업 프로젝트 가운데 156개가 소련 지원 사업이었고, 약 595개가 완공되었다. 1957년 공업 총생산액은 1952년보다 128.6퍼센트 늘었고, 1956년까지 현대 공업 기업의 약 67.5퍼센트가 국유, 32.5퍼센트가 공사합영이 되어 사영 기업은 남지 않았다. 농업·공업·상업은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조직되었고, 이 시기는 중국 급속 공업화의 출발점이자 큰 성과로 평가된다.
이 국면은 백화운동과 반우파 투쟁의 반전으로 닫힌다. 1956년 헝가리 위기는 마오가 지식인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사회적 불만과 정부 오류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도록 영향을 주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중국에서도 같은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 정책과 마오의 지도력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마오는 진압에 나섰다. 그는 이 운동을 반혁명적 헝가리 혁명에 비유했고, 당을 비판한 사람들과 비판적이라고 지목된 사람들까지 반우파 투쟁에서 박해했으며, 그 결과 최소 55만 명, 대부분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가 박해를 받았다.
중소 분쟁(1956–1966) —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
1956년 2월, 흐루쇼프가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한 순간, 마오쩌둥에게는 경보음이 울렸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칼'을 버렸을 뿐 아니라 '레닌의 칼'마저 내려놓고 있다고 본 마오는, 자신이 모델로 삼았던 스탈린식 사회주의 건설 방식과 권력 스타일이 근본적으로 부정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일보』 사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하여」(1956.4)를 통해 스탈린의 공로를 재확인하며 소련의 탈스탈린화를 '수정주의'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갈등은 이념을 넘어 국가 이익의 충돌로 번져갔다. 1958년 흐루쇼프가 제안한 중소 합동 함대와 장파 라디오 방송국 건설을 마오는 중국 주권에 대한 침해로 간주해 격렬히 거부했다. 같은 해 마오는 진먼·마쭈 포격으로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를 촉발시켰고, 미국을 '종이 호랑이'로 규정하며 소련의 평화공존 노선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1959년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과 중·인도 국경분쟁에서 소련의 중립 선언은 결정적 균열을 낳았다.
1960년 6월 부쿠레슈티 회의에서 양당은 공개 충돌했고, 그해 7월 흐루쇼프는 중국에서 모든 소련 전문가와 기술자를 전격 철수시켰다. 대약진 운동은 기술 공백으로 더욱 파국으로 치달았다. 1963년에는 소련 공산당의 공개서한에 대해 중국공산당이 9개의 평론('9평')으로 응수하며 이념논쟁은 절정에 달했다. 마오에게 이 투쟁은 단순한 외교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승자인지를 가리는 세계관 전쟁이었고, 동시에 혁명 내부의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와의 투쟁의 국제적 연장선이었다. 분쟁은 1969년 전바오(다만스키) 섬 무력충돌로 군사적 정점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마오가 1972년 닉슨을 베이징으로 초청하는 미·중 화해의 반전을 낳았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두 개의 중심(모스크바와 베이징)으로 영원히 분열되었다.
문화대혁명(1966–1976) — '사령부를 포격하라'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른바 '5·16 통지'를 통해 문화·교육·언론 부문의 '부르주아 권위자들'을 숙청할 것을 내부 지시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참담한 실패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실무파가 주도한 경제 회복 노선(사유지 경작 허용, 시장 요소 도입)이 '자본주의 복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문혁은 단순한 문화 정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내에 스며든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재장악하려는 정치투쟁이었다.
같은 해 6월, 베이징의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벽보(大字報)를 통한 교직원 비판이 시작되자 류사오치는 7천 명 이상의 작업팀을 대학에 파견해 운동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8월 5일, 마오는 직접 대자보를 발표하며 "사령부를 포격하라!(炮打司令部)"고 선언했다. 작업팀은 철수했고, 홍위병(紅衛兵)이라 불린 학생 조직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피의 8월'로 불리는 1966년 여름, 베이징에서만 천 명 이상이 홍위병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후일 공식 집계로 확인된다. 이들은 이른바 '혈통론'을 내세우며 '계급 적'의 가택을 수색했고, 사찰·교회·고서·비석 등 '봉건 문화'로 분류된 모든 것을 파괴했다.
마오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당내 정적 제거에 있었다. 1968년 류사오치는 '노동자·농민·병사의 최대 적'으로 몰려 당에서 영구 제명되었고, 감금 상태에서 의료 방치로 이듬해 사망했다. 덩샤오핑도 실각해 트랙터 공장 노동자로 쫓겨났다. 그러나 마오가 촉발한 대중봉기는 곧 당의 통제를 벗어나 각 성에서 무장 파벌 간 내전으로 번졌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마오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했고, 1967년부터 각지에 '혁명위원회'가 수립되었으나 폭력은 계속되었다.
문혁 기간 학교는 폐쇄되었고 대학입학시험은 중단되었다. 1천7백만 명 이상의 도시 청년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정책 아래 농촌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마오의 개인숭배는 『마오주석 어록』(속칭 '빨간 책')이 전 국민의 필독서가 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 헌법에 명기되었으나, 1971년 쿠데타 음모 혐의로 소련으로 도주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마오는 1969년 제9차 당 대회에서 문혁의 종결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종언은 1976년 그가 사망한 직후 장칭·야오원위안·장춘차오·왕훙원으로 구성된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이루어졌다. 1981년 중국공산당은 문혁을 "당, 국가, 인민이 건국 이래 겪은 가장 심각한 좌절과 가장 무거운 손실"로 공식 규정했다. 사망자 규모에 대해서는 학계 추산이 엇갈리나, 모리스 마이스너 등 서구 학자들은 최소 40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 이상의 직접적 폭력 사망을 추정하며, 농촌에서만 약 3천6백만 명이 박해를 받았다는 연구도 있다.
문혁은 마오가 꿈꾼 대로 관료제를 분쇄하고 혁명을 재점화하지 못했다. 대신 그것은 국가를 파탄 직전으로 몰아넣었고, 당-국가 체제의 폭력적 잠재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세대의 교육을 중단시키고 사회적 신뢰를 파괴한 그 10년의 상흔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