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Winston Churchill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 (영국계·미국계 혼혈) 1874–1965 ○ 뇌졸중

백분율 합의로 유럽을 스탈린과 나눈 영국의 전시 총리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처칠의 회고록 서술이다.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어 스탈린에게 밀어 보냈다.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해 돌려보냈다." 소련 당국은 1958년 이를 부인했다.

영국의 정치가·군인·저술가. 1874년 블레넘 궁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수단·보어전쟁에서 복무한 뒤 1900년 의회에 입성했고, 자유당 정부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해군장관을 지냈으나 갈리폴리 원정 실패로 물러났다. 1924~1929년 재무장관을 지냈고, 1940년 5월 총리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다. 1945년 선거에서 패한 뒤 야당 당수가 되어 1946년 '철의 장막'을 경고했으며, 1951~1955년 다시 총리를 지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5년 사망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며 인도 자치에 반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갈린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제국과 인도

처칠의 정치적 의미는 반파시즘적 전쟁 지도력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는 영국 제국의 보존을 국가적 위대함의 조건으로 여긴 제국주의자였으며, 인도의 헌정 개혁과 자치 확대에 강하게 반대했다. 1935년 인도통치법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의 반대는 제국에 대한 신념과 보수당 내부의 세력 투쟁이 결합한 것이었다. 이 입장은 식민지 민족의 자기결정 요구를 억누르려 했고, 인도 독립 뒤에도 그의 제국 수호 담론은 지속되었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중 벵골 기근을 둘러싼 그의 발언과 구호 정책은 식민지 주민의 생명보다 제국의 전쟁 수행과 인종적 위계를 앞세웠다는 비판을 낳았다. 기근의 원인은 전쟁, 버마 쌀 공급 상실, 자연재해, 행정과 시장의 실패가 겹친 것이었지만, 처칠의 무관심과 책임 문제는 여전히 역사적 평가의 핵심 쟁점이다. 따라서 그의 유산은 유럽에서 파시즘의 패배에 기여한 지도력과 식민 지배를 옹호한 정치가라는 두 측면을 함께 놓을 때 비로소 온전히 보인다.

냉전과 소련

처칠의 반소련 노선은 냉전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그는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독일군의 해산에 신중해야 한다며 소련에 맞설 방파제로 쓰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시 총리직이 끝난 시기에도 이 노선은 이어졌다. 1945년 5월 처칠은 참모위원회에 소련에 대한 군사 작전 가능성을 검토하게 했고, 이는 '불가능 작전'(Operation Unthinkable)으로 암호명되었다. 한 계획은 독일 주둔 소련군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미국과 영국 제국의 의지를 러시아에 관철'하는 것을 상정했으며, 가상 개시일은 1945년 7월 1일이었다. 1945년 6월 9일 서명된 평가는 '속전속결의 제한적 성공을 거둘 능력이 우리에게 없으며 중대한 열세 속의 장기전에 말려들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공세는 '위험하다'고 판정되었다. 6월 10일 처칠의 지시로 작성된 두 번째 방어 계획은 러시아와의 전쟁 시 영국 본토 방어를 검토했다. 이 계획들은 실행되지 않았고 1998년까지 극비로 남았으나, 당시 간첩 가이 버제스가 소련 정보부에 세부 내용을 넘겼다.

1946년 3월 5일 처칠은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칼리지에서 약 1,500명의 청중 앞에서 '평화의 근육'(The Sinews of Peace)이라는 제목으로 46분 강연을 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했다. 일부는 이 강연을 냉전의 출발로 본다. 당시 그는 총리가 아니었다. 1945년 7월 선거에서 보수당이 패한 뒤 야당 당수였고, 휴가차 미국을 방문한 민간인이었다. 이 점에서 이 시기는 전시 총리직과 구분되는 별개의 국면이다. 강연의 핵심 구절은 '발트해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내려왔다'는 것이었고, 이어 이 도시들과 주민들이 '내가 소련 세력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영역에 속해 '모스크바로부터 매우 높은, 일부 경우 증가하는 통제'를 받는다고 했다. 처칠은 이를 유엔 헌장의 틀 안에서 영연방·제국과 미국의 '영어권 민족의 형제적 연합', 즉 특별한 관계와 결합시켰다. 같은 강연에서 그는 소련의 서부 국경 안보 우려를 인정하고 러시아 민족과 전시 동지였던 스탈린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당시 맥락에는 터키에 대한 소련의 요구, 이란에서의 지연된 철수, 그리스 내전이 있었고, 자유주의·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소련의 요구를 여전히 정당한 안보 문제로 보았다.

1947년 핵 선제공격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FBI 문서고의 한 메모는 처칠이 소련이 아직 원자폭탄을 갖지 못한 시기에 미국에 선제 핵공격을 권고했으며, 상원의원 스타일스 브리지스에게 트루먼을 설득해 '러시아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 선언하고 러시아를 공격'하여 크렘린을 파괴하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치의 모런 경도 1946년 대화에서 그가 핵공격을 주장했다고 별도로 회고했다. 그러나 이는 메모에 담긴 주장이며 문서화된 결정이 아니고,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는 1949년이었다. 한국어와 영어 모두 이 불확실성을 그대로 담아야 한다.

전후 외교에서 처칠은 회고록을 하나의 도구로 썼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은 전후 포로·실향민에 관한 비밀 상호 협정을 낳았고, 이는 1946~47년 '킬홀 작전'을 비롯한 강제 송환의 근거가 되었다. 처칠은 폴란드 문제를 동유럽의 시금석으로 밀어붙였으나 합의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하원 논의에서 보수당 의원 27명이 그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두 총리직 사이에 그는 6권의 《제2차 세계대전》(1948~1953)을 냈고, 여기서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의 백분율 합의에 대한 자신의 서술을 공개했다. 1948년 연설에서 그는 독재자에 대한 유화를 경고한 자신의 발언이 히틀러만이 아니라 스탈린도 가리킨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 그는 소련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했으나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이를 만류했고, 그는 평화의 기초로서 영미 '특별 관계' 협력을 계속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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