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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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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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Владимир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3–1955 ○ 자연사

소비에트 정부 기구를 설계하고 종교적 반대자들을 연구한 혁명가

1917년 10월, 스몰니에서 물러난 레닌을 자기 아파트에 재웠다. 현관문에 사슬과 자물쇠를 모두 채우고 장전한 리볼버 두 정을 곁에 둔 채, 그는 레닌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새 소파에서 졸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는 척하던 그를 피해 살며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날이 샐 무렵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초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낭독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첫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레닌의 사실상 개인비서이자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1917~20)으로서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기초를 닦았다. 러시아 종파운동의 민족지학자로서 1919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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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92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 입학, 학생운동으로 제적 후 쿠르스크 측량학교 졸업
  • 1895–1903RSDLP 입당,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활동, 1896년 스위스 망명, 「이스크라」 협력, 두호보르 교도 캐나다 이주 조직
  • 1903–1905RSDLP 중앙위원회 원정대 책임자(제네바), 당 중앙기록보관소 설립 참여
  • 1905–1912러시아 귀환, 「노바야 지즌」·「나샤 미슬」 편집, 1908년부터 출판사 「지즌 이 즈나니예」 경영, 1912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7.0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스몰니-타브리다 구역 사령관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 — 소비에트 행정기구 구축,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집행
  • 1919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면제에 관한 법령 초안 주도
  • 1920–1929과학·저술 활동 전념, 모스크바 근교 실험 국영농장 「레스니예 폴랴니」 운영
  • 1933–1945국립문학박물관 창설·초대 관장
  • 1945–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종교·무신론사 박물관 관장

표트르 게르모게노비치 스미도비치

Пётр Гермогенович Смид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74–1935 ○ 자연사

세 혁명을 관통한 이스크라 요원, 비로비잔의 국가건설을 설계한 볼셰비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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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혁명활동
  • 1902–1905이스크라 요원, 우만 지하인쇄소 공동 조직, 세 혁명 참여
  • 1917–1918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VTsIK 간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1안토노프 봉기·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4–1935KOMZET 위원장: 유대인 자치주(비로비잔) 기획·추진
  • 1924–1935북방위원회 위원장: 북방 소수민족 행정·경제 기반 수립
  • 1933–1935VTsIK 자연보호구위원회 위원장

폴리카르프 구르게노비치 므디바니

Поликарп Гургенович Мдивани

레닌의 마지막 싸움에서 스탈린의 중앙집권화에 맞선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나를 총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야 한다! 11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다. 나는 내 민족을 배신했고,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이 변종들이 그루지야를 노예로 만들고 레닌의 당을 무릎 꿇리는 것을 도왔다」 — 1937년 NKVD 재판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캅카스 혁명운동과 내전에서 활동했다. 192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반대하며 그루지야 공화국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고, 이 갈등은 레닌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비판하며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출당·유배 후 복당했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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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캅카스에서 혁명활동
  • 1918–1919제11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 1920북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임무 수행
  • 1921주터키 RSFSR 전권대표,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 1922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 — '그루지야 사건'에서 스탈린에 반대
  • 1923좌익 반대파 합류, 소비에트 최고경제회의 양보위원회 위원
  • 1924–1928소비에트 연방 주프랑스 무역대표
  • 1928–1931반대파 활동으로 출당·유배, 1931년 복당 신청 후 복권
  • 1931–1936그루지야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경공업인민위원·인민위원회 제1부의장
  • 1937체포, '트로츠키주의 첩보-파괴 센터' 혐의로 사형, 7월 10일 총살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트빌리시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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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트빌리시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볼로디미르 빈니첸코

Володимир Винниченко

중앙라다 총서기국과 디렉토리아를 이끈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작가

당신들이 러시아에 노동자·농민 독재를 세웠듯,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우크라이나어의 독재를 세워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작가로 1917년 중앙라다 총서기국을 이끌고 1918년 디렉토리아 초대 의장으로 키예프를 되찾았다. 소비에트와의 협상을 주장하다 페틀류라와 갈라져 1919년 사임했고 프랑스에서 1951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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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 창립
  • 1917중앙라다 부의장 겸 총서기국 초대 의장(내무 겸임)
  • 1918.01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총리, 곧 사임
  • 1918.12디렉토리아 의장으로 키예프 탈환
  • 1919–1920회고록 「민족의 재생」 집필
  • 1920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곧 재망명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1–1938 ✕ 처형

레닌 뒤의 총리, 우파 반대파로 몰리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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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에드바르드 귈링

Edvard Gylling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핀란드 1881–1938 ✕ 총살

적색 핀란드의 재정 위원을 지내고 카렐리야 자치 공화국 정부를 이끈 핀란드 사회주의자

1881년 쿠오피오에서 태어난 통계학자·경제학자로, 1909년 소작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아 사회민주당의 농업 전문가가 되었다. 1908~1917년 사회민주당 의원이자 당 부의장이었고, 1917년 11월 쿠시넨과 「우리는 요구한다」를 썼다. 내전 때 인민대표위원회 재정 위원으로 3월 1일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조약을 협상해 서명했고, 패전 무렵 비푸리 방어를 조직했다. 스웨덴으로 피해 핀란드 공산당 스톡홀름 사무국을 이끌다 1920년 레닌에게 카렐리야 자치를 보고했다. 1923~1935년 카렐리야 자치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핀란드화 정책을 폈으나 「민족주의적 쇼비니즘」으로 몰려 해임되었고, 1938년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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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마르크스주의 잡지 「사회주의 평론」 편집장
  • 1908–1917핀란드 의회 의원(사회민주당), 당 부의장
  • 1918인민대표위원회 재정 위원
  • 1918–1920핀란드 공산당 스톡홀름 사무국장
  • 1920–1923카렐리야 노동 코뮌 지도
  • 1923–1935카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세르게예프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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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뮌니히 페렌츠

Münnich Ferenc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독일계) 1886–1967 ○ 사망

1956년 카다르와 함께 소련 개입을 지지하고 혁명 진압 뒤 총리가 된 헝가리 공산주의자

세레겔리에시의 독일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 포로가 되어 톰스크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해 국제 포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귀국해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 1922~1936년 소련에서 살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오토 플라터라는 이름으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전후 부다페스트 경찰청장과 외교관을 지냈다. 1956년 혁명 중 너지 정부의 내무장관이었으나 11월 카다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소련 무력 개입을 지지했고, 카다르 정부의 군·공안 장관으로 무장 경찰과 노동자 민병대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8~1961년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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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군 포로, 톰스크 수용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당 참여
  • 1919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군사 인민위원
  • 1936–1939스페인 내전 제11국제여단장
  • 1946–1949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너지 정부 내무장관, 카다르 정부 군·공안 장관
  • 1958–1961헝가리 총리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Зміцер Жылунові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7–1937 구금 중 사망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의 노동자 시인으로 소비에트 벨로루시 첫 정부를 이끈 볼셰비키

1887년 코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904년 흐라마다에 들어가 『나샤 니바』에 기고했다. 1913년부터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일하며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 1918년 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로서 빌헬름 크노린과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에 맞서 벨라루스 공화국 수립을 주장해 레닌과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1월 1일부터 2월 3일까지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을 지냈다. 뒤에 출판·문화 기관을 이끌고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나 1931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모길료프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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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페트로그라드 「불칸」 공장 노동자
  • 1918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
  • 1919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 1920–1931벨로루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28벨로루시 과학아카데미 회원

다닐 예고로비치 술리모프

Даниил Егорович Сул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자신이 산업화를 이끈 국가에 파괴된 노동자 출신 러시아 공화국 총리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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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공장 노동 시작
  • 1918–1919페름 시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광산·야금부 간부
  • 1919–1920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첼랴빈스크 현 위원회 의장
  • 1923–1926우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우랄 주 위원회 제1서기
  • 1927–1930소련 교통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0–1937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표도르 콜레소프

Фёдор Коле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1891–1940 ○ 사망

1917~1918년 투르키스탄 소브나르콤 의장으로 코칸트 자치국을 무너뜨리고 부하라를 공격한 볼셰비키

1891년 우랄스크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와 타슈켄트에서 철도 사무원으로 일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들어가 타슈켄트 소비에트 집행위원이 되었고,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으로 뽑혔으며, 11월 타슈켄트 무장봉기를 조직했다. 1917년 11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투르키스탄 소브나르콤 의장으로서 무슬림을 최고 권력 기관에 들일 수 없다며 연립을 거부했고, 아슈하바드와 코칸트의 자치 시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918년 3월 청년부하라인과 함께 부하라 에미르를 무너뜨리려다 실패해 물러났다. 1923~1928년 극동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뒤에 건축가로 일하다 194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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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타슈켄트 소비에트 집행위원,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
  • 1917–1918투르키스탄 소브나르콤 의장
  • 1919제8차 러시아 공산당 대회 대의원
  • 1923–1928극동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29–1933모스크바 건축대학·건축아카데미 수학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2–1938 ✕ 처형

레닌의 개인비서에서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까지 소비에트 과학행정의 설계자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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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서기, 레닌의 개인비서
  • 1918–1919최고경제회의 과학기술부장
  • 1919–1920제14군·제13군 정치위원 (남부전선)
  • 1920–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
  • 1923–1929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
  • 1932–1935타지크-파미르 원정대장
  • 1935–1937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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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트빌리시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9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19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19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19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투라르 리스쿨로비치 리스쿨로프

Турар Рыскулович Рыск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카자흐스탄 1894–1938 ✕ 처형

통합 투르키스탄을 주장한 카자흐인 볼셰비키 전략가, 민족 획정에 맞선 목소리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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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 1919투르키스탄 공산당 무슬림국(Мусбюро) 의장
  • 1920.01–08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09바쿠 동방민족대회 대표; '동방행동평의회' 간부 선출
  • 1921–1922RSFSR 민족인민위원부(Наркомнац) 전권대표(아제르바이잔) → 부위원
  • 1922–1924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통합 투르키스탄론 주창, 1923년 스탈린과 공개 논쟁
  • 1924–1925코민테른 전권대표로 몽골 인민공화국 파견
  • 1926–1937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투르크시브 철도·카라간다 산업화 주도, 1932–1933년 카자흐 기근 구호 개입

데먄 세르게예비치 코롯첸코

Демьян Сергеевич Корот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69 ○ 자연사

흐루쇼프의 충복: 우크라이나 정부를 두 번 이끈 농민 출신 당 관료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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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 1938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주당 제1서기 대행
  • 1938–1939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9–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전시 파르티잔 조직)
  • 1947–1954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두 번째 임기)
  • 1954–1969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이반 세르게예비치 호흘로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Хох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5–197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직조공 출신 총리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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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40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 상임간부회 의장
  • 1940–1943러시아 공화국(RSF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41–1944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모스크바 방어·스몰렌스크 해방)
  • 1944–1945제3벨로루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동프로이센 공세)
  • 1945–1954첸트로소유스 이사회 의장
  • 1955–1965국가무역감독국장 (소련·RSFSR 무역부)

파이줄라 구바이둘라예비치 호자예프

Файзулла Губайдуллаевич Ходж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6–1938 ✕ 처형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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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자디드 운동 참여, 청년 부하라당 창당, 비밀 중앙위원
  • 1918부하라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타슈켄트 도피, 궐석 사형
  • 1919–1920타슈켄트에서 혁명적 청년 부하라인 사무국 조직, 『우치쿤』 편집
  • 1920–1924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
  • 1924–1937우즈베크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 192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우즈베크 SSR 대표 의장
  • 1937–1938전직 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3월 15일 총살

너지 임레

Nagy Imre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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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19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19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19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비밀 재판 후 처형
  • 1989영웅광장 재매장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팜필로프

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Памфи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1–194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행정가, 모스크바 대피 실패의 책임자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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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지원자)
  • 1923스몰렌스크 노동자학교 졸업
  • 1924–192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비에트 법학부 야간과정 수학
  • 1927–1937모스크바 소비에트 근무, 모스크바 주택신탁 관리자
  • 1937–1938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부 주택총국장
  • 1938–1940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
  • 1940–1942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41.09–12소련 인민위원회의 대피위원회 부의장
  • 1942–1943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라주틴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азут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처형된 6인 중 하나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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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체르노우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оу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78 ○ 자연사

레닌그라드 사건 후폭풍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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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8–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당·노조·콤소몰 기관부장
  • 1939–1948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38–1939모스크바 시 스탈린 구당위 제1서기
  • 1955–1957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52–1955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스미르튜코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миртю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9–2004 ○ 자연사

25년간 소비에트 정부의 제도적 기억이 된, 폴리트뷰로 밖의 실세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와 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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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농촌소비에트 서기 · 협동조합 서기 · 클럽장
  • 1927–1931모스크바국립대 소비에트법학부
  • 1930–1941인민위원회의 기구: 선임보좌관·컨설턴트·부문장
  • 1941–1946인민위원회의 사무국 부국장 · 미코얀의 GKO 보급 보좌관
  • 1946–1953각료회의 사무국 부국장
  • 1953–1964각료회의 부업무관리국장
  • 1964–1989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89–1990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고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랴시코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Ляш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우크라이나 정부를 15년간 이끈 도네츠크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관리자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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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 1972–1987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