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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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드미트리예비치 랴베프

Лев Дмитриевич Ряб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3–

체르노빌 직후 핵산업을 넘겨받은 중형기계공업 장관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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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3VNIIEF(KB-11) 기술자·선임 기술자
  • 1963–1967크렘료프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7–1969VNIIEF 생산 담당 부수석 기술자
  • 1974–1978VNIIEF 소장
  • 1978–1984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 중형기계공업 부문장
  • 1984–1986중형기계공업 차관·제1차관
  • 1986–1989중형기계공업 장관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연료에너지복합체 국장
  • 1993–2002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넴초프

Александр Викентьевич Немцов
소련 러시아인 1933–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100만 명이 살았다고 추계한 러시아 알코올 역학의 권위자

"반알코올 캠페인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넴초프가 25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모스크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에서 평생을 연구한 알코올 역학의 개척자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을 계기로 실제 알코올 소비량과 그로 인한 사망 규모를 추계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캠페인이 약 1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해 국제적 논의의 기준점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와 소련 붕괴 이후의 알코올 관련 초과 사망을 추적하며 알코올 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를 실증한 그의 연구는 러시아 인구위기의 핵심적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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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모스크바에서 출생
  • 1977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82알코올 중독 문제 연구 시작, 1985년부터 역학 조사
  • 1987실제 알코올 소비량 추계 방법론 개발
  • 1990알코올 관련 사망률 추계 방법론 개발
  • 1996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 정보학·체계연구부장
  • 2011『러시아 알코올 현대사』 영문판 출간 (쇠데르턴 대학)

캄란 마메드 오글루 바기로프

Kamran Məmməd oğlu Bağırov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3–2000 ○ 자연사

알리예프의 후계자였으나 위기 앞에서 무너진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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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바쿠 가스 사무소 정비공
  • 1957아제르바이잔 공과대학 졸업, 조교·전임강사·건축학부 부학장
  • 1968–197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건설·공공주택부 부부장
  • 1971–1974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도시경제부장
  • 1974–1978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8–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2–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2아제르바이잔 국가산업안전·광산감독위원회 의장

압사마트 마살리예비치 마살리예프

Абсамат Масалы уулу Масали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 1933–2004 ○ 자연사

소련 말 키르기지야의 당 지도자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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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키질키야 탄광관리국 콤소몰스카야 광산의 광산부문 부총공학자, 이어 키르기즈우골 트러스트 부총공학자
  • 1961–1973오시주 당위원회 강사, 알마아타 고등당학교 수학, 당·국가 감독 기관 근무, 오시주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타시쿠미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2–1974프룬제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74–1979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9–1985이식쿨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1991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5년 11월 2일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선출, 1991년 4월 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이동하며 해임).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1990년 4월 10일 제12차 소집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선출, 12월 10일 본인 요청으로 해임)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문 고문(1991년 4~8월)
  • 1992–2004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지도자(1992년 9월부터). 당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공산당연합-소련 공산당 이사회 집행위원 겸 부의장
  • 1993–1996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검열국장(1993년 1월~1996년 6월)
  • 1994–2004이. 라자코프 재단 이사장(1994년부터)
  • 1995–2004주고르쿠 케네시 인민대표회의 의원(1995년 4월 선출, 2000년 4월 재선), 2000년부터 입법회의 의원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코시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сыгин
소련 코랴크 (러시아) 1933–2012 ○ 자연사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이자 소련 인민대표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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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코랴크 자치구 문화계에서 교사·방법론자·문화원장 등으로 활동
  • 1969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 출간, 필명 '코얀토' 사용 시작
  • 1972소련 작가동맹 회원
  • 1974캄차카 작가조직 공동 창립
  • 1976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 출간 — 북방 관료제 비판으로 반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코랴크 자치구 선출), 민족문제위원회 위원
  • 1990년대–2000년대코랴크 자치구 대통령 전권대표부 전문가, 주지사 고문, 인권위원장
  • 2002–2012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 팔라나 사범대학에서 북방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미그라노비치 몹시샨

Վլադիմիր Միգրանովիչ Մովսիսյան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33–2014 ○ 자연사

소련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공산당 제1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미해결을 이유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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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5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여러 지역의 수석 수의사
  • 1969–1973아르타샤트 지구당 제1서기
  • 1975–197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84–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소련 농업·식량부 차관
  • 1996–1999아르메니아 농업부 장관

레너드 H. 퍼루츠

Leonard H. Perroots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33–2017 ○ 자연사

핵전쟁의 문턱에서 신중함을 택한 정보장교

소련의 핵준비가 비정상적이었지만 NATO 경보를 더 높이지 말라고 권고했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NATO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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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미 공군 임관
  • 1970년대공군 지휘·정보 보직
  • 1982–1984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3애이블 아처 83 당시 NATO 경보 격상에 신중한 판단을 권고
  • 1984–1985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5–1988국방정보국장
  • 1989미 공군 퇴역
  • 2017사망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말로페예프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оф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로루시아인 1933–2022 ○ 자연사

연방 해체기에 당의 연속성을 지키려 한 벨로루시아의 조직가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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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고멜 출생
  •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 1978–1985고멜주 집행위원회 위원장, 벨로루시아 공산당 고멜주위원회 제1서기
  • 1985–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민스크주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6–2000벨로루시아 공화국 국민의회 하원 초대 의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메르트니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ссмертных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3–

소련 말기의 마지막 정규 외무장관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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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01–08외무장관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타라카노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Тарак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

체르노빌 지붕 위에서 인간이 로봇을 대신한 장군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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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하리코프 군사기술학교 졸업
  • 1963하리코프 도로공과대학 기계공학 전공
  • 1967–1972모스크바 민방위 군사학교 교관, 쿠이비셰프 공병사관학교 부관과정
  • 1972–1986민방위군 군사기술위원회 선임전문가, 전소련 민방위연구소 제1부소장, RSFSR 민방위참모부 부참모장
  • 1986체르노빌 특별위험구역 제염작전 지휘관
  • 1988스피타크 지진 구조작전 지휘관
  • 1990년대–회고록 집필, 러시아 작가동맹 회원, 숄로호프 문학상 수상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파니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анич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34–

페레스트로이카 속 공작기계 공업을 지키려 했던 마지막 장관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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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5소련군 복무
  • 1955–1956드리빈 지구 DOSAAF 위원장
  • 1957–1959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 선반공
  • 1959–1964레닌그라드 연삭장비 특별설계국 설계사
  • 1964–1975일리치 공장 작업장장 → 스베르들로프 공작기계연합 당위 부비서
  • 1975–1978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장 겸 연삭장비 특별설계국장
  • 1980–1981전연방 정밀공작기계 생산연합 책임자
  • 1981–1986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차관 → 제1차관
  • 1986–199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91–1992국영주식연합 '스탄코인스트루멘트' 회장
  • 1992–로스스탄코인스트루멘트 사장 · 스탄코인스트루멘트 이사회 의장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자소호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засох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오세티야계 러시아 1934–

국제주의와 지역 통치를 잇댄 정치가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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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르조니키제 시 콤소몰위원회 제1서기
  • 1967–1986소련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연대위원회 제1서기, 제1부위원장
  • 1986–1988소련의 시리아 대사
  • 1988–1990북오세티야주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서기
  • 1993–1998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 1998–2005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계 1934–1993 ○ 자연사

위기 속에서 공화국 권한을 주장한 소비에트 정치가

“공화국의 동의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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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아제르바이잔 국립대학교 졸업, 문헌학 연구
  • 1966–197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바쿠 시당위원회 이념 담당 서기
  • 1980–1983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장관
  • 1983–1987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외무부 장관
  • 1987–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90–1992아제르바이잔 최고소비에트 의장

스타니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샤탈린

Станислав Сергеевич Шаталин

500일 계획의 설계자, 소련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한 급진 개혁파 경제학자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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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59재무부 산하 재정연구소 경제연구원
  • 1959–1965고스플란 산하 경제연구소(NIEI) 연구원
  • 1965–1976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부소장·부문장
  • 1970–1983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수리경제분석학 주임교수
  • 197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6–1986전연방체계연구소 수석연구원, MIPT 일반경제학 강의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과학기술진보경제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9.12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
  • 1989–1996과학아카데미·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 1990500일 계획 작업반장,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통합민주당 창당 조직위원장, '개혁' 국제재단 이사장
  • 1991.06러시아 대통령선거 옐친 신임인

유리 니콜라예비치 아파나시예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Афанасьев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 칭한 역사가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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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6크라스노야르스크 수력발전소 콤소몰 서기
  • 1972–1981고등콤소몰학교 교수·부총장
  • 1983–1986『콤무니스트』 역사부문 편집위원
  • 1986–1991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총장; 탈스탈린화 주도
  • 1989–1993소련 인민대표;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
  • 1990–1992'민주 러시아' 공동 창립자·공동의장; 1990년 탈당
  • 1991–2003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 설립자·총장

레오니트 마카로비치 크랍추크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4–2022 ○ 사망

공산당 선전가에서 시작해 소련을 서명으로 끝낸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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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70정치경제학 교사에서 체르니우치 주당 선전선동 부장까지
  • 1970–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서에서 승진
  • 1980–198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장
  • 1988–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이념 부장
  • 1989–1990.0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정치국원, 제2서기
  • 1990.07–1991.08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 의장; 독립선언 주재
  • 1991.12–1994.07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 협정 서명, 쿠치마에 패배
  • 1994–2006인민대의원, SDPU(o) 원내대표

스타니슬라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슈시케비치

Станіслаў Станіслававіч Шушкевіч
벨라루스 국가기관 벨라루스 벨라루스 1934–2022 ○ 코로나19 합병증

체르노빌 진실을 요구한 핵물리학자, 소련의 종말을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통보한 사람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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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벨라루스 국립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 1963–1965벨라루스 국립대학 핵물리학과 부교수
  • 1966–1970민스크 무선기술연구소 연구부총장
  • 1971–1990벨라루스 국립대학 핵물리학과 주임
  • 1989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 1990–1991벨라루스 SSR 최고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91–1994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 (국가원수)
  • 1998–2018벨라루스 사회민주당 의장

바실리 게오르기예비치 자하로프

Василий Георгиевич Заха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2023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기 문화자유화를 집행한 선전 관료 출신 문화장관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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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 1973–1983레닌그라드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서기, 문화·과학·교육 담당
  • 1983–1986중앙위 선전부 제1부부장 → 모스크바 시당위 제2서기 (옐친과 공조)
  • 1986–1989소련 문화장관, 글라스노스트기 금서 해제·검열 완화·극장 자율화 추진
  • 1989–1990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예브게니 그리고리예비치 야신

Евг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Ясин
자유주의·공화주의 러시아 러시아계 1934–2023 ○ 자연사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설계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1968년, 소련 탱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주로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것을 지켜본 야신은 훗날 '나에게는 그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고 회고했다.

예브게니 야신은 소련 말기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려는 개혁 구상을 발전시킨 경제학자였다. 그는 샤탈린 그룹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로 참여해 급진적 시장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소련의 해체 뒤에는 러시아의 개혁 국가기구에서 일했다. 옐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서 시장개혁을 추진했지만, 전환의 사회적 비용과 국가 역량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자유주의 노선을 대표했다. 이후 고등경제대학과 자유주의 사상 재단을 이끌며 러시아의 경제정책과 공론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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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데사 수문공학연구소 졸업, 교량 건설기사
  • 1963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 1964–1973중앙통계국 연구소 부서장·연구실장
  • 1973–1989소련 과학아카데미 중앙경제수학연구소 연구실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서장,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
  • 1994–1997러시아 연방 경제부 장관
  • 1998–2021고등경제대학 학술감독
  • 2000–2019자유주의 사명 재단 대표

발레리 이바노비치 볼딘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Болд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5–2006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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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1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19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19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19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5–2012 ✕ 자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책임자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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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주파키스탄 소련 대사관 통역·3등서기관
  • 1962KGB 제1총국 입국, 101정보학교 훈련
  • 1964–1968파키스탄 주재 KGB 정보장교
  • 1971–1977주인도 KGB 부주재관 → 주재관
  • 1979–1983주이란 KGB 주재관
  • 1983–1987KGB 제1총국 정보분석국 부국장 → 국장
  • 1987–1989KGB 제1총국 부국장 (중동·아프리카 담당)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1총국장
  • 1991.08.22–23KGB 의장 대행

발렌티나 세메니브나 셰우첸코

Валентина Семенівна Шев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35–2020 ○ 사망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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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크리비리흐에서 피오네르 지도자, 지리 교사, 학교 콤소몰 서기
  • 1957–1962크리비리흐 시 콤소몰 서기, 이후 제르진스키 구 당위원회 서기
  • 1962–1969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겸 부서장
  • 1969–1972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차관
  • 1975–1985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85–199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 1985–1989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빅토르 페트로비치 브류하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Брюх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35–2021 ○ 1988년 10년형, 5년 복역 후 석방

건설을 이끌고 사고의 책임을 진 체르노빌 원전의 첫 소장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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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타슈켄트 공과대학 졸업, 앙그렌 화력발전소 취직
  • 1966슬라뱐스크 화력발전소에서 부수석 엔지니어까지 승진
  • 1970–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 겸 건설 책임자
  • 1986.07사고 책임으로 당 제명·해임, 8월 체포
  • 1988.0710년형 선고, 도네츠크 교정노동시설 복역
  • 1991.09조기 석방, 우크라이나 대외무역부 근무
  • 1995–2015우크르인테르에네르고에서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몰도바 몰도바인 1935–2024 ○ 자연사

소련 말기 몰다비아 공산당의 마지막 수장

그는 공산당 금지를 “불법적인 행위”라고 규정하며 1991년의 단절을 비판했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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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농촌 중등학교 도서관장으로 노동 시작
  • 1954–1956소련군 복무
  • 1966–1970코토프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70–1980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제1부의장
  • 1980–1990몰다비아 공화국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1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4–1998루마니아 주재 몰도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