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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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안토노비치 트로야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нтонович Троя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5 ○ 자연사

차르의 포병 장교에서 스탈린의 첫 주미 대사로: 혁명과 외교를 오간 러시아 귀족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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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분파) 입당, 키예프 군사조직 활동
  • 1909–1910예니세이현 유형, 탈출 후 망명
  • 1914–1917멘셰비키 방위파, 망명 중 레닌·스탈린과 협력
  • 1918멘셰비키 중앙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8–1921붉은 군대 복무, 교관
  • 1923RKP(b) 입당
  • 1924–1927RSFSR 국가무역청(Gostorg) 청장,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 1927–1933주일 소련 전권대표
  • 1933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33–1938주미 소련 전권대표 — 초대 대사
  • 1939–1955고등외교학교 교수, 소비에트정보국 활동

테렌티 드미트리예비치 데리바스

Терентий Дмитриевич Дериба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38 ✕ 처형

극동의 보안 총독

1937년 8월 11일, 예조프가 류시코프의 전보를 스탈린에게 전달하자, 스탈린은 여백에 직접 써넣었다. "데리바스를 체포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 몰로토프와 보로실로프가 '찬성'을 덧붙였고, 데리바스는 다음 날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출신으로 1929년부터 극동 OGPU-NKVD 전권대표를 맡아 대일 방첩 작전과 BAM 강제노동 건설을 지휘했다. 8년간 '극동의 총독'으로 불렸으나 대숙청에 휩쓸려 1938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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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GPU·OGPU 비밀국장
  • 1927–1929OGPU 비밀작전총국 제1부국장
  • 1929–1934극동변경주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4BAM 건설 책임자
  • 1934–1937극동변경주 NKVD 관리국장 겸 극동군 특별부장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일리치 예고로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Его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39 ✕ 처형

데니킨을 무너뜨린 남부전선 사령관, 초대 원수 5인 중 마지막으로 이름이 지워진 참모총장

「나는 인민과 당, 붉은 군대 앞에 깨끗하다」 1938년 3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금장 검과 여섯 개의 훈장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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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 1918–1919붉은 군대 입대, 제9군·제10군·제14군 사령관
  • 1919–1920남부전선 사령관 — 데니킨 백군 격파, 오룔·보로네시·로스토프 탈환
  • 1920남서전선 사령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키예프 탈환 후 르부프 진격
  • 1925–1926중국 군사고문: 장제스·펑위샹에게 파견
  • 1927–1931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31–1937붉은 군대 참모총장 — 기계화군단·탱크전 교리 추진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이후 자캅카스 군관구로 강등
  • 1939군사재판 없이 처형
  • 1956흐루쇼프에 의해 복권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러시아 러시아 1883–1945 ○ 폐암

망명에서 돌아와 스탈린 문학의 기둥이 된 붉은 백작

“소비에트 정부 외에 러시아의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 — 전시 연설, 1941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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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 1939소련 과학원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41–1943스탈린상 2회 수상; 상금 10만 루블로 전차 건조 기부
  • 1941–1945종군기자로 60여 편의 전선 에세이, 「러시아인의 성격」 발표
  • 1945『이반 뇌제』 희곡으로 사후 스탈린상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알렉산드로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러시아 1883–1946 ○ 급사

성가대 소년에서 소련 국가 작곡가로, 붉은 군대 합창단 창시자

1941년 6월 26일, 「신성한 전쟁」을 벨로루스키 역에서 처음 연주하자 병사들은 침묵했다가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랴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카잔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글라주노프와 바실렌코에게 배웠고, 혁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소비에트 합창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을 창설, 남성 합창과 민속·교향 혼성 오케스트라, 발레를 결합한 군사 문화 기관을 수립했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사흘 만에 「신성한 전쟁」을 작곡, 붉은 군대의 비공식 진군가가 되었다. 1943년 「볼셰비키 당 찬가」 선율을 소련 국가로 발전시켰으며, 이 멜로디는 2000년 러시아 연방 국가로 재도입되었다. 교회 전례음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장엄한 음악적 표상으로 나아간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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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합창대 지휘자 과정 졸업, 지휘자(레겐트) 자격 취득
  • 1913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졸업(대은메달)
  • 1918–1922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합창 지휘자
  • 1922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28–1946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창설·음악 감독·예술 총감독·수석 지휘자
  • 1940모스크바 음악원 지휘·합창 학부장, 예술학 박사
  • 1943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계급 수여
  • 1944소련 국가 음악 공식 채택

알렉세이 예고로비치 바다예프

Алексей Егорович Бад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3–1951 ○ 자연사

두마 의원에서 러시아 공화국 명목상 국가원수가 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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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의원 · 《프라우다》 공식 발행인
  • 1914–1917투루한스크 유배
  • 1917–1920페트로그라드·북부 지역 식량 공급 인민위원
  • 1930–1935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
  • 1935–1937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
  • 1937–1938러시아 식품공업 인민위원
  • 1938–1944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부의장
  • 1943–1951글라브피보(맥주공업총국) 국장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시키랴토프

Матвей Фёдорович Шкирят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54 ○ 담석증

30년간 당원 명부 위에 놓인 지우개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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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입당,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
  • 1910–1914체포·볼로그다 유형 → 귀환 후 모스크바 볼셰비키 지하조직 복귀
  • 1917모스크바 병사대표 소비에트·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1920전러시아 재봉노조 중앙위 서기, 모스크바 시당위원
  • 1921–19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상임위원, 당 검증·숙청 실무 총괄
  • 1934–1939당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39–1952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
  • 1952–1954당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위 상임위원 (1953.3 제외)

안드레이 야누아리예비치 비신스키

Андрей Януарьевич Выш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3–1954 ○ 자연사

모스크바 재판의 검사, 뒤에 유엔에서 강경 외교를 대변한 인물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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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3외무장관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글라드코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Глад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3–1958 ○ 식도암

시멘트 공장의 재건을 통해 소비에트 산업소설의 길을 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고전 작가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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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선전활동 시작
  • 1906RSDLP 가입, 이르쿠츠크주 만주르카로 4년 유형
  • 1910쿠반주 파블롭스카야 초등학교장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노보로시스크 교육 책임자
  • 1920–1921『크라스노예 체르노모리예』 편집자
  • 1921–1925『노비 미르』 서기, 문학그룹 '쿠즈니차' 활동
  • 1925『시멘트』 발표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
  • 1932–1938『에네르기야』 집필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 형상화
  • 1941–1943『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 특파원 (우랄)
  • 1945–1947고리키 문학대학 학장
  • 1949–1954자전적 3부작 발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58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드미트리 자하로비치 마누일스키

Дмитрий Захарович Мануильс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59 ○ 자연사

스탈린주의 숙청을 집행한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1928~1943)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말했다: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트로츠키주의자 도적떼를 숙청할 때 침묵한 것을 우리가 비판했는데 이제는 아첨을 시작했어!" 트로츠키와 연이 닿은 구볼셰비키 가운데 그만 살아남았다.

볼린의 스비아테츠 마을에서 성직자 가문(영어권 사료는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소르본에서 법학을 마친 볼셰비키다. 《브페료드》파 성원이었고 1917년 메즈라욘치에 합류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코민테른 요직을 맡았다. 1920~30년대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로서 기구와 각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숙청을 지도했고, 1945~46년에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헌장 전문과 제1장 초안을 작성한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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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5–19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 1907–19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 1912–19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 1914–19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21–19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 1924–19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 1926–1943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 1926년 12월~1928년 7월, 1931년 4월 15일~1943년 5월 해산
  • 1944–19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 1924–19431924년 7월 15일~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 및 상임간부
  • 1944–1952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 1946년부터 외무장관 - 1944년 7월 12일~1952년 6월 10일
  • 1948–1949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우크라이나 대표, 이사회 의장직 대행

나프탈리 아로노비치 프렌켈

Нафталий Аронович Френкель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자연사

죄수에서 총국장으로, 제 침대에서 죽은 굴라크 행정가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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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솔로프키 수용소 죄수에서 행정가로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공사 책임자
  • 1933–1937BAM 수용소장
  • 1937–1947NKVD·MVD 철도건설총국장
  • 1947중장 계급과 연금으로 퇴역

이반 파블로비치 바르딘

Иван Павлович Бард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심장마비

쿠즈네츠크를 세운 소련 제철의 아버지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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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키예프 공대 졸업, 유좁카 제철소 기술자
  • 1910–1911미국 기계·제철 공장 노동자
  • 1915–1923예나키예보 제철소 주임기사 → 수석 엔지니어
  • 1924–1925마케옙카 제철소 수석 엔지니어
  • 1925–1929카멘스코예 제철소 수석 엔지니어
  • 1929–1937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KMK) 수석 엔지니어
  • 1937–1939중공업인민위원부 철강총국 수석 엔지니어 → 기술위 의장
  • 1939소련 철강금속공업 부인민위원
  • 1939–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야금학연구소 소장
  • 194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44–1960중앙철강금속연구소(TSNIIchermet) 창립 소장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펠트만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льд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58 ○ 자연사

자본재 부문 주도 성장 모형을 최초로 정식화한 고스플란의 수학적 경제학자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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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 1935–1937북극해항로총국(GUSMP) 종합계획반장
  • 1937–1953탄압을 겪은 후 여러 도시에서 공학직으로 근무, 시추 관련 발명특허 획득
  • 1953–1958중병을 앓으며 모스크바 귀환, 경제학 연구에서 물러나고 사후 복권

이반 미하일로비치 마이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Май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75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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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 1906–19081905년 혁명 참여로 체포, 토볼스크 유배
  • 1912뮌헨 대학 경제학부 졸업, 런던으로 이주
  • 1917임시정부 노동부 차관
  • 1918사마라 KOMUCh 정부 노동상; 멘셰비키당 제명
  • 1920–1921볼셰비키 전향 선언, RKP(b)에 입당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언론국장
  • 1929–1932핀란드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2–1943영국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대사
  • 1941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 서명,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 복원
  • 1943–1946외무인민부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참여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53–1955간첩 혐의로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및 복권
  • 1957–1975당적 회복, 학술 활동 재개; 회고록 및 외교 일기 집필

이반 이바노비치 코롯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рот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5–1949 ○ 자연사

당 통제 기관에서 미술관으로 간 볼셰비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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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 1913–1916체포 및 유형
  •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 1918–19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 1922–1924RKP(b) 중앙위원
  • 1923–1924중앙위 조직지도부장, 오르그뷰로 후보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간부위원
  • 1934–1939당통제위원회 위원
  • 1939–1944푸시킨 국립미술관 관장
  • 1944은퇴

예핌 아파나시예비치 샤덴코

Ефим Афанасьевич Щад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계 1885–1951 ○ 자연사

1기병군의 인민위원에서 대숙청의 인사 집행자로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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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카멘스카야 볼셰비키 위원회 의장 · 적위대 지휘관
  • 1918–1919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우크라이나 전선 RVS 위원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제2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마흐노 토벌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
  • 1939–1941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1–1943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글라부쁘라포름 국장
  • 1943–1944남부전선 · 제4우크라이나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6–1934 ✕ 암살

레닌그라드의 조직가, 대숙청의 구실이 된 암살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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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7블라디캅카스에서 언론·지하활동
  • 1921–1926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 바쿠 유전 재건
  • 1926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지노비예프의 기반 인수
  • 1930정치국원
  • 1934.12.01스몰니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피살, 같은 날 신속 처형령 발효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오르조니키제

Григо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ерго) Орджоник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그루지야 1886–1937 ✕ 총상 사망, 자살로 추정

대전환의 공업 사령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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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 1921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 「그루지야 사건」 논란
  • 1926–1930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0–1932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 5개년 계획의 공업 총괄
  • 1924–1926트랜스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북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1930노농검열인민위원, 소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0–1937정치국 정위원
  • 1935스타하노프 운동을 전국적 캠페인으로 전환

보리스 자하로비치 슈먀츠키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Шумя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6–1938 ✕ 처형

소련 영화산업을 설계한 혁명가 출신 문화행정가,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꾸다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전국 모든 군 중심지에서 상영하나?"라고 물었다. 슈먀츠키는 음향 영사기가 약 4~5백 대뿐이라 답했고, 스탈린은 대책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의 가난한 유대인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고, 극동공화국 제2대 총리 겸 외무장관,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1923–1925),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지냈다. 1930년 11월 소유즈키노 이사장에 임명되어 1933년부터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GUKF)을 이끌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했고, 1936년 예술위원회 부의장을 겸했다. 1938년 1월 7일 해임되고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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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치타·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노동자로 입당,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
  • 1906–1913지하신문 편집·선동, 아르헨티나 망명, 귀국 후 체포·징집
  • 1917.10–1918.03첸트로시비리 의장,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 선포
  • 1920.06–10극동공화국 외무장관 겸 총리
  • 1921–1922코민테른 극동비서국장, 몽골 인민혁명 고문, 수흐바타르와 의형제
  • 1923–1925페르시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6–1928동방노동자공산대학(KUTV) 총장, 《혁명적 동방》 편집장
  • 1930–1938소유즈키노 이사장 →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장, 소련 영화산업 총괄
  • 1935제1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창설, 레닌훈장 수훈
  • 1938.01–07해임·체포, 반혁명·간첩 혐의로 사형, 코뮤나르카에서 총살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계 1886–1948 ✕ 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 후 사망

기갑전의 한계를 드러낸 일본군 장성

1939년 7월 9일, 전차의 절반 이상을 잃은 야스오카 파견대는 해산되고 그는 지휘에서 해임되었다.

야스오카 마사오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성으로, 보병 중심 군대에서 전차 운용을 맡은 지휘관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제1전차단을 중심으로 임시 편성된 야스오카 파견대를 지휘해 7월 공세에 참가했지만, 전차와 보병·포병의 협조가 무너진 가운데 장갑차량의 절반 이상을 잃고 부대가 해산되었다. 이후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인도네시아 점령 통치에 참여한 뒤 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194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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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육군 보병 소위, 보병 제43연대
  • 1914육군대학 졸업
  • 1935육군 소장, 보병 제30여단장
  • 1938육군 중장, 독립혼성 제1여단장
  • 1939제1전차단장, 노몬한의 야스오카 파견대 지휘
  • 1941예비역 편입
  • 1942–1945육군 사정장관, 수라바야 주지사
  • 1945–1948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 1948년 사망

프리드리히 아르투로비치 찬데르

Фридрих Артурович Цандер
소비에트 러시아 (발트 독일인) 1887–1933 ○ 발진티푸스

화성을 꿈꾼 GIRD 공동 창립자, 소련 액체 로켓의 설계자

'전진, 화성으로!'라는 평생 구호를 남기고 1933년 3월 발진티푸스로 숨졌으며, 자신이 설계한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가 6개월 후 발사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발트 독일인 가문 출신의 소비에트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 비행 이론가. 1931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반응 추진 연구 그룹(GIRD)을 공동 창립하고 제1여단장을 맡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를 설계했다. 우주 온실, 태양 돛, 날개형 로켓, 대기권 제동 등 선구적 개념들을 제안했으며, '전진, 화성으로!'라는 구호로 평생 행성 간 비행의 꿈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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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리가 공과대학 졸업
  • 1915–1919프르보드니크 고무공장 기술자, 모스크바
  • 1919–1926모토르 항공기 공장 기술자
  • 1926–1930중앙항공설계국 기술자
  • 1929–1932OR-1 제트 엔진 설계·시험
  • 1930–1931모스크바 항공대학 강사
  • 1931–1933GIRD 공동 창립, 제1여단장
  • 1933OR-2 액체 연료 엔진 설계·시험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7–1938 ✕ 처형

법정에서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한 라트비아 볼셰비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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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0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0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7–1939 ✕ 처형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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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7–1943 ○ 옥사

세계 최대 종자은행을 세운 유전학자, 리센코의 반대자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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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사라토프 대학 교수, 식물면역 연구
  • 1920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 발견
  • 1920–1940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
  • 1926재배식물 기원중심지 이론 발표
  • 1929–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총재
  • 1930–1940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31–1940전연방지리학회 회장
  • 1935–1940VASKhNIL 부총재, 리센코 학설에 공개적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