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1948년 2월 20일, 경찰 지휘부 교체를 둘러싼 정부 위기에 립카는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서를 제출했다. 베네시 대통령은 사임을 수리했고, 공산당의 권력 장악 뒤 립카는 다시 망명했다.
언론인 출신의 국민사회당 정치가로, 1940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망명정부 외무부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1945년 귀국해 대외무역장관을 맡았고 1946~1948년 제헌의회 의원이었다. 1948년 2월 경찰 숙청에 항의해 사임한 비공산당 장관 가운데 하나였고,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다시 나라를 떠났다. 망명 중에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협정, 1948년 2월 사건에 관한 책을 썼고, 1958년 1월 런던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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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영국으로 가 런던 망명정부 외무부 국무장관으로 일했다.
1945임시정부의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어 5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다.
1946–1948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482월 사임 뒤 망명해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협정, 1948년 2월 사건을 다룬 저술을 남겼다.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슈투트가르트 근교 포이어바흐에서 태어나 보슈 공장의 금속 프레스공으로 일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0년대 공산당 농업 정책을 이끌었다. 나치 집권 뒤 투옥되었다가 소련으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되어 1942년 게슈타포에 넘겨졌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3월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화폐개혁과 경제계획을 이끌었다. 동독 정치국원과 부총리,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3년 7월 정치국에서 울브리히트 교체를 권했으나 자리를 지켰다. 기계공업장관과 대외무역장관을 지내다 196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1919년 16세에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가 평의회 공화국 적군에서 싸웠고, 호르티 시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0년 라코시와 함께 석방되어 소련으로 갔다가 1944년 소련군 장교로 귀국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시장, 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1945~1949), 국가계획청장(1949~1953)을 지내며 5개년 계획을 짰고 당 핵심 「모스크바파」로 꼽혔다. 1953년 2월 모든 직위를 잃은 뒤 너지 임레 노선에 붙어 각료회의 사무국장(1954~1955)을 맡았고, 1955년 1월 소련 간부회는 그를 너지와 함께 비판했다. 1956년 11월 너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에 억류되었고, 이후 정치에서 밀려나 글을 쓰며 살았다.
베를린 릭스도르프의 구두장이 아들로 사무원으로 일하며 야간에 경제학을 배웠고, 1931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신문과 당 군사정보 조직에서 일하다 1936년 체포되어 6년형을 살았고, 작센하우젠과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전후 공산당 경제부를 세워 이끌었고, 1947년부터 독일경제위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며 계획을 맡아 1948년 반년 계획과 1949~1950년 2개년 계획을 짰다. 1952~1961년 라우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정치국원, 1955~1965년 각료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61년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상호경제원조회의 상임대표를 맡았고, 196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1947년 11월 18~19일 정치국 회의에서 쇼체가 그를 '반당적 민족주의 활동'으로 고발했고, 이튿날 그는 국가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에서 자살로 공식 설명이 바뀌었고 살해 주장도 있어 경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본명 아타나스 스피루. 두러스의 부유한 정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코르푸와 토리노에서 수학했고, 1941년 신생 알바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부를 이끌었다. 1944년 정치국원, 1946년 3월 22일 경제장관, 1947년 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1946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제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했으나 이후 관세동맹과 통화통합을 포함한 경제통합 계획에 반대했고, 1947년 베오그라드 교섭과 모스크바 방문으로 유고슬라비아 의존에서 벗어날 근거를 마련해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코치 쇼체와 충돌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공산주의 범죄연구소는 그를 당·민족해방군의 탄압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한다.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둡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녜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1975년 11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고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로서 앙골라 경제계획의 설계를 맡았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다 호샤 올리베이라 디롤루아(1939년 12월 2일 숨베 출생, 1996년 11월 16일 루안다 사망)는 앙골라의 경제학자이자 반식민주의 활동가, 대학 교수였다. 1950년대 루안다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61년 비리아투 다 크루스의 영향으로 MPLA에 들어가 디롤루아 전시명을 썼다. 돌리지에서 제1혁명훈련센터를 세우고 교수했으며 1963년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이 되어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에 참여했고, 1975년 11월 경제장관,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를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루안다에서 사망했다.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