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된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외무차관으로 마셜 플랜 거부를 지지했고, 1948년 쿠데타 뒤 외무장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조직했다. 1950년 축출된 뒤 체포되어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 티소베츠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슬로바키아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문화·정치 잡지 『다우』를 함께 편집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3월 얀 마사리크가 숨진 뒤 외무장관이 되어 1950년까지 재임했다. 「티토주의」와 「민족주의 편향」 혐의로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3일 처형되었다. 뒷날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꾸렸다.
- 193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 1945외무부 국무차관이 되었다.
- 1948–1950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쿠데타 조직에 참여했고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마련했다.
- 1950「편향주의」 혐의 속에 사임을 강요당한 뒤 체포되었다.
- 1952슬란스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1963사후 복권되었다.
1953년 봉기 뒤 페히너를 이어 법무장관이 되어 가혹한 정치 재판을 이끈 동독 법률가
안할트 베른부르크의 자유주의적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 최초 세대의 여성 법학도로 공부했다. 사회민주당원이었다가 1926년 의사 게오르크 벤야민(발터 벤야민의 동생)과 결혼하고 1927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나치 시대에 변호사 활동을 금지당했고, 남편은 1942년 마우트하우젠에서 죽었다. 전후 소련 점령지구 사법행정에서 일했고, 동독 최고재판소 부소장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국가의 적」에 대한 공개 재판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15일 파업 노동자 처벌에 반대한 페히너를 이어 법무장관이 되었고, 봉기 가담자를 가혹하게 처벌해 「붉은 힐데」, 「붉은 프라이슬러」로 불렸다. 1967년 울브리히트에게 밀려 물러났고, 1989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독일 공산당 입당
- 1949–1953동독 최고재판소 부소장
- 1953–1967동독 법무장관
- 1954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
- 1967울브리히트에 의해 사임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올 것이라 홀로 경고한 CIA 국장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수석부사장
- 1937Bechtel-McCone 공동 창업
- 1941–1945California Shipbuilding Corporation 사장
- 1950–1951미국 공군 차관
- 1958–1961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1961–1965제6대 CIA 국장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를 지휘하다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 1991파리에서 사망했다.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1953년 신노선을 함께 쓰고 울브리히트 퇴진을 꾀하다 숙청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글라이비츠의 유대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특파원으로 일하며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이 되었다. 1939년 소련으로 망명해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의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귀국해 《베를리너 차이퉁》을 이끌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창간에 참여했으며, 그 편집장으로서 늘 모스크바의 노선을 따랐다. 1953년 6월 차이서와 함께 울브리히트에 맞섰고,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신노선을 함께 썼다. 봉기 뒤 집단지도를 제안했으나 7월 「반당 분파」로 몰려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고, 1954년 1월 당에서 제명되었다. 메르제부르크의 문서고에서 일하다 1966년 죽었고, 1989년에야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GRU 요원으로 포섭
- 1943《자유 독일》 편집장
- 1945《베를리너 차이퉁》 편집장
- 1950–1953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후보위원
- 1953「반당 분파」로 중앙위원회에서 축출
- 1954당에서 제명
- 1989사후 복권
195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의 수석 이데올로그였다가 쉬르데반 사건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난 경제학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19년 독립사회민주당, 1920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당 신문 편집자로 일했다. 1926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와 붉은 교수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33년 망명해 파리에서 울브리히트의 비서로 일했고, 1936년 모스크바에서 「이념적 일탈」로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전쟁 중에는 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당 선전·교육을 맡았고, 1950년 정치국원, 1950~1955년 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어 당의 수석 이데올로그로 통했다. 1953년 6월 할레에서 봉기 진압 지휘부를 꾸렸다. 1956년 뒤 농업 전면 집단화에 반대하다 1958년 정치국에서 쫓겨났고,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독일 공산당 입당
- 1926–1932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붉은 교수 연구소
- 1941–1944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
- 1950–1958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 1950–1955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8–196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45소농당 공동 창립·초대 사무총장, 반전·반나치 활동
- 1944.04–10게슈타포 투옥, 석방 뒤 화살십자 정권 하 은신
- 1945–1946복구장관·국회의장·국민최고회의 위원
- 1946–1947제2공화국 초대 총리: 포린트 도입, 파리 평화조약 서명
- 1947.06스위스에서 사임 강요, 미국 망명
- 1947–1970망명 정치, 국제농민연합 부회장·회장
라코시 시대 계획청장, 실각 뒤 너지 임레의 사람
1919년 16세에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가 평의회 공화국 적군에서 싸웠고, 호르티 시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0년 라코시와 함께 석방되어 소련으로 갔다가 1944년 소련군 장교로 귀국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시장, 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1945~1949), 국가계획청장(1949~1953)을 지내며 5개년 계획을 짰고 당 핵심 「모스크바파」로 꼽혔다. 1953년 2월 모든 직위를 잃은 뒤 너지 임레 노선에 붙어 각료회의 사무국장(1954~1955)을 맡았고, 1955년 1월 소련 간부회는 그를 너지와 함께 비판했다. 1956년 11월 너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에 억류되었고, 이후 정치에서 밀려나 글을 쓰며 살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헝가리 공산당 입당, 평의회 공화국 적군 복무
- 1925–1940코민테른 임무로 귀국했다 체포, 15년 가까이 복역
- 1945부다페스트 시장
- 1945–1949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
- 1949–1953국가계획청장, 노동인민당 정치국원(1951~)
- 1954–1955너지 정부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6–1958유고슬라비아 대사관 피신, 루마니아 억류
라코시 4인 지도부의 국방장관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5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서기국원이 되었다.
- 1948–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을 지냈다.
- 1956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61석방된 뒤 부다페스트에서 편집자·출판인으로 일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 1962ExComm 위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핵심 조언
- 1962–1966국무부 소련 담당 대사급 순회대사·정무담당 부차관보
- 1967–1969주소 미국 대사 (2차), 글래스보로 정상회담, SALT·핵비확산 협상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마셜의 하버드 연설문으로 옮긴 국무부 소련 전문가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4–1940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독소불가침조약 전문 입수
- 1943–1945백악관 소련 고문,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7–1949국무부 고문, 마셜의 하버드 연설 초안 작성
- 1949–1951주프랑스 미국 공사
- 1953–1957주소 미국 대사
- 1957–1959주필리핀 미국 대사
- 1962–1968주프랑스 미국 대사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다 프라하의 봄 개혁운동에 의해 축출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둡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당원으로 입당
- 1937–1938KSČ 호도닌 지역위원회 서기
- 1941–1945나치 점령 하 지하활동으로 체포,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수감
- 1945–1951KSČ 프라하 시당 제1서기
- 1951–1953KSČ 정치서기국 위원 겸 부총리
- 1953–1968KSČ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7–196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71정상화 국면 KSČ 중앙위원 재선
1946년 장전문과 X 논문으로 봉쇄 정책을 설계한 미국 외교관·역사가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3–1936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 1944–1946주소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장전문' 송신
- 1947–1949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 마셜 플랜 설계, X 논문 발표
- 1952주소 대사,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56–2005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외교사 저술
- 1961–1963주유고슬라비아 대사
1945년 공산당 호소문을 쓰고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운 동독 공산주의자
작센 탈하임의 양말공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고, 모스크바 레닌 학교를 다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활동과 망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 정치학교를 이끌었고, 모스크바에서 자유독일 방송을 맡았다. 1945년 작센으로 파견된 공산당 선발 그룹을 이끌었고, 1945년 6월 11일 공산당 호소문 초안을 썼다. 194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도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세울 수 있다는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웠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뒤 이를 철회해야 했다. 외무차관과 대외정보기관 책임자를 지냈고, 1953년 차이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다. 1973년 암 투병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독일 공산당 입당
- 1935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 1945작센 파견 공산당 그룹 책임자, 6월 11일 호소문 초안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9–1953외무차관
- 1953모든 직책에서 해임
1956년 폴란드 10월로 복귀해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을 실험한 민족공산주의자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1905년 오스트리아 분할령 갈리시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네 살부터 배관공으로 일했다. 1926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3년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8년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로 밀려나 1951~1954년 옥살이를 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10월 20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고, 소련군의 진격에는 저항하되 동맹은 유지한다는 입장을 관철해 소련이 물러섰다. 1967~68년 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노선은 끝났고, 1970년 12월 가격 인상에 항의한 그단스크·그디니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군대의 발포를 명령했다. 사인은 폐암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폴란드 공산당 입당
- 1934–19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43–1948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
- 1948–1951'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해임, 1951년 체포
- 1954–1956석방·복권, 폴란드 10월로 복귀
- 1956–197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 1970.12가격 인상 반대 파업 유혈 진압, 심장발작 뒤 12월 20일 해임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이탈리아 공산당(PCI) 입당
- 1932파시스트 특별재판소에서 10년형 선고
- 1937–1939파리에서 『라 보체 델리 이탈리아니』 편집자
- 1944–1947보노미, 파리, 데 가스페리 내각에서 외무차관
- 1945–1947주폴란드 이탈리아 대사
- 1947.09코민포름 창립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 이탈리아 대표
- 1948–1953이탈리아 공화국 상원의원
- 1957PCI에서 제명; 『사회주의 통신』 공동 창간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이자 친중파 원로로, 1979년 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한 정치국원 출신 정치가
1979년 중월전쟁 뒤 카라치에서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하고 소련에 굴종한다고 지도부를 비판했다.
응에안 성 출신의 혁명가로 호찌민과 함께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50~1957년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를 지내며 두 나라를 잇는 핵심 통로였고, 1956~1976년 정치국원, 1958~1979년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중소분열 때 북베트남이 잠시 중국 쪽으로 기운 1960년대 초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으나,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밀려났다. 1979년 7월 동독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던 중 카라치에서 감시를 따돌리고 중국 영사관으로 피신해 베이징으로 갔고, 8월 기자회견에서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했다. 1991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호찌민과 함께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을 도왔다.
- 1950–1957북베트남 초대 주중 대사로 재임했다.
- 1958–1979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 국회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19761956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재선되었다.
- 1963당 국제연락부장에 임명되어 친중 노선의 대외 정책을 맡았다.
- 1976제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에서 배제되었다.
- 1979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대규모 공수작전의 설계자
“모든 비행은 날씨가 좋든 나쁘든, 낮이든 밤이든 계기비행으로 한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1941미 육군 항공대 장교, 조종사와 참모
- 1942–1943항공수송사령부 국내·수송 사단장
- 1942여성보조수송비행대 창설 조직
- 1944–1945인도·중국 사단장, 히말라야 공수 지휘
- 1948–1949연합 공수임무부대 사령관, 베를린 공수
- 1950–1951전투화물사령부 사령관, 한국전쟁 공수
- 1958–1960군사항공수송 근무 사령관
- 1960미 공군 퇴역
유대교와 가톨릭의 기억을 잇고 광장의 기억을 조직한 작가
유대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혼례』 속의 유대인이다」라고 불렀다.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시와 평론으로 문단 데뷔
- 1929–1932파리 유학, 아담 미츠키에비치 연구로 철학박사 취득
- 1933–1935시온주의 폴란드어 잡지 《오피니아》 문예부장
- 1940–1946팔레스타인에서 폴란드 전신통신사 근무
- 1947–1948로마 주재 폴란드 대사관 문화참사관
- 1948–1950포즈난 폴란드극장과 대극장 문예 책임자
- 1960–1987포즈난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성서 번역과 《나사렛 예수》 집필
- 1980포즈난 1956년 6월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청년공산주의동맹(KZMP) 가입
- 1926–1929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0–1932폴란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활동
- 1938–1945NKVD에 체포, 콜리마 강제수용소 8년형
- 1945–1948카토비체주 선전비서, 『트리부나 로보트니차』 편집장
- 1948–1954PZPR 중앙위원회 출판·언론부장
- 1955–1957PZPR 바르샤바 위원회 제1서기
- 1957–1958폴란드 통신사(PAP) 사장
- 1968반유대 캠페인으로 PZPR에서 축출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킨 1956년 폴란드 해빙기의 과도기적 제1서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1939바르샤바 방어전 참전 후 소련으로 이동
- 1943베를링군 제1사단 정치위원, 레니노 전투 참전
- 1944–1946PPR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 1949–1950국방차관 겸 군 정치총국장
- 1956.03–10PZPR 제1서기, 흐루쇼프 비밀연설 대량 유포 결정
- 1964–1968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68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해 전직 사퇴
일본을 불태우고 상대에게 핵폭격을 주장한 공군 원수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제305폭격단장, 유럽 전선
- 1944–1945제21폭격사령부 지휘관, 일본 소이탄 공습
- 1947–1948미 유럽공군(USAFE) 사령관, 베를린 공수 개시
- 1948–1957전략공군사령부(SAC) 사령관
- 1957–1961미 공군 부참모총장
- 1961–1965미 공군 참모총장
- 1968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후보
아폴로를 조직한 행정가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 1936워싱턴 법학대학원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 1936–1944스페리 자이로스코프 인사·재무·경영 담당
- 1946–1949미국 예산국 국장
- 1949–1952미국 국무부 차관
- 1961–1968미 항공우주국 국장
- 1969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우주시대의 관리』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