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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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내 인물들

중국 혁명과 인민공화국의 인물들

그 밖의 세계 인물들

니콜라 디미트로프 페트코프

Никола Димитров Петков
반체제 인사 불가리아 불가리아인 1893–1947 ✕ 처형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다 교수형에 처해진 농민동맹 지도자

미 국무부 특사 마크 에스리지가 페트코프를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 불렀다.

불가리아 농민동맹(BZNS) 지도자로, 제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3년 조국전선을 공동 창설했으나 1945년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 야당을 이끌었고, 1946년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야당 연합 101석을 얻었다. 1947년 6월 의회에서 체포되어 8월 쿠데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평화조약 발효 여드레 뒤인 9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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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귀국, 언론인으로 활동
  • 1938제24대 국회의원으로 선출(12월 선거 무효)
  • 1941농민동맹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지도자
  • 1943조국전선 창설 참여
  • 1944조국전선 제1차 정부 무임소장관(1945년 8월까지)
  • 1945반공 연합야당 지도자
  • 1946제6대 대국민의회 의원

밀라다 호라코바

Milada Horáková
반체제 인사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01–1950 ✕ 처형

나치와 공산당 모두에 맞서다 1950년 조작된 반역 재판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체코의 여성 정치가

여성 권리 운동가이자 반나치 저항 활동가였던 호라코바는 전후 의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사임했다. 1949년 체포되어 조작된 반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라하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여성 권리 운동에 앞장섰다. 독일 점령기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가 1940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진과 독일의 감옥을 거쳤고,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원이 되었고 1947년 여성 잡지 『블라스타』를 창간했다. 1948년 2월 쿠데타 직후 항의의 뜻으로 의원직을 내놓았지만 망명하지 않고 프라하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49년 9월 체포되어 고문을 동반한 신문 끝에 음모·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6월 27일 판크라츠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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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프라하 시의회 복지부서 책임자가 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에 가입했다.
  • 1945독일 점령기 저항 활동으로 수감된 뒤 연합군에 의해 석방되어 프라하로 돌아왔고, 국민사회당에 재가입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 19482월 공산당 장악 뒤 의원직에서 사임했다.
  • 19499월 27일 불법 정치 모임과 관련해 체포되었다.
  • 1950반역·간첩 혐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얀 파토치카

Jan Patočka
반체제 인사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7–1977 ○ 자연사

진실의 책임을 시민적 행동으로 옮긴 현상학자

1977년 3월 3일, 그는 헌장 77 대변인으로 말하겠다며 불러낸 국가보안기관의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얀 파토치카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운 체코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역사철학을 발전시켰고, 유럽의 위기와 인간의 영혼 돌봄을 탐구했다. 공산당 가입을 거부한 뒤 여러 차례 대학 강단과 출판에서 배제되었지만, 연구와 가정 세미나를 이어 갔다. 1977년 그는 바츨라프 하벨, 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시민권 보장을 요구한 헌장 77의 첫 대변인이 되었다. 반복된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3월 13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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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1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철학·슬라브어문학·로망스어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음
  • 1933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움
  • 1936–1939카렐대학교에서 강의 자격을 취득하고 철학 저널 《체코의 정신》 편집을 맡음
  • 1945–1950전후 카렐대학교와 마사리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공산당 가입 거부 뒤 대학을 떠남
  • 1964–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1968년 카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으나 1972년 퇴직당함
  • 1973–1976가정 세미나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플라톤과 유럽》과 《역사철학의 이단적 에세이》를 발전시킴
  • 1977바츨라프 하벨·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헌장 77의 첫 대변인으로 활동

프란티셰크 크리겔

František Kriegel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반체제 인사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1908–1979 ○ 당 제명 · 의사면허 박탈 1969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한 유일한 프라하의 봄 지도자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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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KSČ 입당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군의관
  • 1940–1945중국-버마 전선 군의관
  • 1949–1952보건부 차관
  • 1964–1968국민의회 의원 → KSČ 중앙위원
  • 1968.04–08민족전선 의장 겸 KSČ 상임간부회 위원
  • 1968.08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거부
  • 1969–1977당 제명·의사면허 박탈, 이후 헌장 77 최초 서명

로베르트 하베만

Robert Havemann
동독 국가기관 반체제 인사 동독 독일 1910–1982 ○ 자연사

나치의 사형 선고를 살아남고 뒤에 사회주의통일당에서 쫓겨나 가택연금된 동독의 화학자·반체제 인사

뮌헨에서 태어나 베를린과 뮌헨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물리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항 단체 「유럽 연합」을 세웠다가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전쟁에 필요한 연구를 이유로 집행이 거듭 미뤄져 살아남았다. 전후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들을 이끌다 미국 당국에 해임되었고, 1950년 훔볼트 대학교 물리화학 교수가 되어 인민의회 의원과 독일평화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젤프만과 함께 정부 청사 앞 군중 앞에 섰다. 1963~1964년 강의 「도그마 없는 변증법」으로 당에서 쫓겨나고 교수직을 잃었다. 1976년 비어만 추방에 항의한 뒤 가택연금되었고, 1982년 그륀하이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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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독일 공산당 입당
  • 1943게슈타포에 체포, 사형 선고
  • 1950훔볼트 대학교 물리화학 교수
  • 1950–1963인민의회 의원
  • 1964사회주의통일당에서 제명
  • 1976–1979그륀하이데에서 가택연금

밀로반 질라스

Милован Ђилас

코민포름에서 서유럽 공산당을 공격하고, 훗날 『새 계급』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해부한 유고슬라비아 반체제 인사

나는 공산주의의 전 길을 걸었다: 젊은 혁명가에서 독실한 스탈린주의자로, 그리고 완전한 환멸에 이르기까지.

몬테네그로 출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로, 파르티잔 투쟁과 전후 국가 건설에서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하나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 카르델리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주의적 기회주의'를 신랄히 비판했으며, 그의 회고록은 이 회의의 내부 동학에 관한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당내 민주화와 관료 특권층 비판을 제기하다 1954년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었고, 수감 중 밀반출한 『새 계급』에서 공산당 관료가 착취적 지배계급으로 변했다고 주장해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30년 넘게 투옥과 감시 속에서도 저술을 이어간 동유럽 최초의 저명한 공산권 반체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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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 체포 및 수감
  • 1937–1939KPJ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 1941–1945몬테네그로 파르티잔 봉기 지도, 최고사령부 선전 담당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통령, 민족의회 의장
  • 1953–1954『보르바』에 일당제 비판 연재, 당에서 축출
  • 1956–1966반체제 저술로 두 차례 수감, 『새 계급』·『스탈린과의 대화』 해외 출간
  • 1966–1995베오그라드에서 감시 속 자유, 저술 활동 지속

이르지 하예크

Jiří Hájek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이르지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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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루드비크 바출리크

Ludvík Vaculík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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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6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 1959–1965체코슬로바키아 방송 청년 프로그램 편집자
  • 1965–1969『리테라르니 노비니』(후에 『리테라르니 리스티』) 편집자
  • 1967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 연설로 당에서 축출
  • 1968「이천 마디 말」 선언문 작성 및 발표
  • 1969–1989출판 금지, 지하 출판 활동
  • 1973–1990사미즈다트 출판사 페틀리체 설립·운영
  • 1977헌장 77 서명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Tadeusz Mazowiecki
폴란드 국가기관 반체제 인사 폴란드 폴란드 1927–2013 ○ 자연사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 총리가 된 연대노조의 가톨릭 지식인

우리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굵은 선으로 가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지식인으로 1958년 독립 월간지 《비엥치》를 창간·주재하고,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즈나크' 가톨릭 의원단 소속으로 의회에서 양심적 반대를 실천한 폴란드의 정치인이다. 1980년 그단스크 파업에서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고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엄령 아래 1년간 억류된 뒤 1989년 원탁회의 협상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1989년 8월 24일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로 취임해 발체로비치 계획을 통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굵은 선'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바웬사에 패배한 뒤 민주연합을 창당해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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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81《비엥치》 창간·편집장
  • 1961–1971'즈나크' 의원단 소속 의원
  • 1980그단스크 파업 연대노조 고문단장
  • 1981《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
  • 1981–1982계엄령 아래 억류
  • 1989원탁회의 협상 핵심 인물
  • 1989–1991폴란드 총리
  • 1992–1995유고전범조사 유엔 특별보고관

안나 발렌티노비치

Anna Walentynowicz
연안 자유노조 반체제 인사 폴란드 폴란드 1929–2010 ✕ 추락사

해고당한 조선소 노동자에서 '독립 폴란드의 어머니'로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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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 1980.09NSZZ 연대 창립위원회 간부회 일원
  • 1981.12계엄령 후 조선소 파업 공동 조직, 이후 총 19개월 구금·연금
  • 1990조선소 복귀 후 1991년 은퇴, 계속해서 바웬사와 포스트연대 정치권을 비판

즈데네크 믈리나르시

Zdeněk Mlynář

사회주의를 민주화하려 한 개혁 공산주의자

옛 룸메이트 고르바초프를 1967년 찾아가 개혁 구상을 설명했을 때, '그가 내 말을 아주 잘 이해하는 듯했다'고 믈리나르시는 회고했다.

즈데네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둡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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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
  • 1955–1956프라하 검찰총국에서 근무
  • 1956–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연구자
  • 1967–1968공산당 정치체계 개혁 연구팀 및 행동강령 작성 참여
  • 196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프레지디엄 위원
  • 1970공산당에서 제명, 국립박물관에서 곤충학 연구
  • 1977–1997헌장 77 서명 뒤 오스트리아 망명, 인스브루크대학교 정치학 교수

야체크 얀 쿠론

Jacek Jan Kuroń

노동자 자주관리와 시민 연대를 잇은 반체제 사회주의자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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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적색 스카우트 운동 공동조직자·월터 대원대 지휘관
  • 1965–1967「당에 보내는 공개서한」 공동 저자, 정치범
  • 1968–19713월 학생 시위 조직자, 정치범
  • 1976–1977노동자 방어위원회(KOR) 공동 창립자
  • 1980–1981독립자치노조 연대 전국위원회 자문역
  • 1981–1984계엄령 수감자, KOR 재판 피고인
  • 1989–1991노동·사회정책 장관
  • 1992–1993노동·사회정책 장관
  • 1989–2001폴란드 하원의원

마리안 유르치크

Marian Jurczyk
폴란드 연대노조 반체제 인사 폴란드 폴란드인 1935–2014 ○ 자연사

두 항구의 합의 사이에 선 조선소 노동자 지도자

“의장은 유르치크가 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대표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마리안 유르치크는 슈체친 조선소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80년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와 협상한 지도자였다. 그는 8월 30일 슈체친 협정에 서명했지만, 단결권 보장을 얻지 못한 채 경제적 양보를 받아들였고, 하루 뒤 그단스크에서 더 폭넓은 합의가 성립하면서 두 지역의 차이가 선명해졌다. 계엄 뒤에는 수감과 재판을 겪었으며, 훗날 레흐 바웬사 진영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노동조합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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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0슈체친 아돌프 바르스키 조선소 노동자
  • 1970–1971슈체친 노동자 파업 참가자·파업위원
  • 1980.08슈체친 조선소 및 공장간 파업위원회 의장
  • 1980.08.30슈체친 협정 서명자
  • 1980–1981연대 공장간 노동자위원회 의장·전국조정위원
  • 1981–1984계엄기 internment 및 정치 재판 피고인
  • 1997–2000폴란드 상원의원
  • 1998–2006슈체친 시장

안제이 그비아즈다

Andrzej Gwiazda

8월의 연대를 만든 비타협적 조직가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을 시작한 그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향해 기업간파업위원회에 합류했다.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전자공학자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1970년대 후반 그단스크의 독립 노동운동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해안 자유노조를 공동 창립하고 지하 출판을 이끌며 국가 통제 밖의 노동자 조직을 준비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에서 그단스크 조선소로 온 그는 기업간파업위원회 지도부에 합류해 21개 요구안을 공동 작성하고 연대의 초기 지도자가 되었다. 계엄령 뒤 투옥과 탄압을 겪은 그는 레흐 바웬사의 협상 노선과 결별하고 원탁회의 타협에 반대한 경쟁적 야당 흐름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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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3그단스크 공과대학교 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조교
  • 1973–1981엘모르 전기·자동화 설비 공장 엔지니어
  • 1978–1980해안 자유노조 공동 창립자·기관지 편집자
  • 1980기업간파업위원회 집행부 위원, 21개 요구안 공동 작성자
  • 1980–1981연대 그단스크 지역·전국조정위원회 부위원장
  • 1986–1989연대 전국위원회 노동그룹 지도자
  • 1989–1997《포자 우크와뎀》 공동 발행·편집
  • 2007–2011국가추모연구소(IPN) 평의회 위원

바츨라프 하벨

Václav Havel
반체제 인사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36–2011 ○ 자연사

부조리극으로 체제를 풍자하고 반체제 운동을 이끈 체코 극작가 출신 정치가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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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가든 파티』로 극작가 데뷔
  • 1968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시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으로 저항
  • 1969『트바르시』에 「체코의 운명?」 발표, 쿤데라에 반박
  • 1977헌장 77 공동 창립, 초대 대변인
  • 1979–1983반체제 활동으로 투옥, 『올가에게 보내는 편지』 집필
  • 1989시민포럼 이끌며 벨벳 혁명 주도
  • 1989–1992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93–2003체코 공화국 대통령

얀 루드비차크

Jan Ludwiczak
폴란드 연대노조 반체제 인사 폴란드 폴란드인 1937–2023 ○ 자연사

체포로 우제크 파업을 촉발한 노동조합 지도자

1981년 12월 13일 그의 체포 소식이 우제크 광산에 전해지자 광부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일하지 않기로 했다.

얀 루드비차크는 광부이자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우제크 광산 사업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의 체포는 광부들이 계엄령에 맞서 파업하고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석방 뒤에도 그는 강등과 감시를 견디며 광산 안에서 지하 출판물을 배포했고, 1989년 연대 재건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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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포즈난 인근 페크나 출생
  • 1954포즈난 철도학교 졸업
  • 1958–1959카토비체 광산군단에서 군 복무
  • 1965–1990카토비체 우제크 탄광 노동자
  • 1980우제크 연대 창립위원회 부위원장
  • 1980–1981우제크 연대 사업장위원회 위원장
  • 1981–1982체포·구금, 1982년 12월 석방
  • 1989우제크 연대 임시창립위원회 위원장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

전기공에서 대통령이 된 연대노조의 지도자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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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주도·연대노조 결성
  • 1980–1981연대노조 위원장
  • 1983노벨 평화상 수상
  • 1989원탁회의 야권 대표·부분 자유선거 승리
  • 1990–1995폴란드 대통령
  • 1995대선 패배·정치 은퇴

얀 룰레프스키

Jan Rulewski

노동자와 농민 요구를 잇다 폭행당한 연대 지도자

“룰레프스키에게 나가라고 설득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하고 긴급합니다.”

얀 룰레프스키는 폴란드의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비드고시치 지역 자유노조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농민들의 독자적 노동조합 등록 요구를 연대의 의제로 받아들였고, 3월 19일 지방 국민평의회 회의장에서 민병대에게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자유노조가 전국 경고파업을 조직하고 계엄 선포 전의 긴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계엄기에 internment를 겪었으며, 민주화 뒤에는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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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비드고시치에서 출생
  • 1965–1969군사기술학교 제적 뒤 탈출 시도로 투옥
  • 1979비드고시치 공업농업기술 아카데미 기계공학부 졸업
  • 1980–1981자유노조 비드고시치 지역 의장
  • 1981–1984계엄 선포 뒤 구금, 1984년 사면으로 석방
  • 1991–2001폴란드 하원의원
  • 2007–2019폴란드 상원의원

로만 바르토슈체

Roman Bartoszcze
폴란드 인민당 반체제 인사 폴란드 폴란드계 1946–2015 ○ 자연사

농민 연대에서 다당제 정치로 나아간 농민 지도자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독립 농민노조의 합법화 투쟁을 민주화 이후의 농민정치로 이어나간 폴란드의 농민·반체제 지도자였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농성을 이끌어 농민 연대의 등록을 관철했고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1990년 부활한 폴란드 농민당의 초대 대표가 되어 그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이듬해 지도부 경쟁에서 물러난 뒤 보수 성향의 소규모 농민 정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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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농촌청년연합 지방 조직 의장
  • 1980농민 연대 운동 지도자
  • 1981농민 개인경작자 연대 전국 파업위원회 지도자
  • 1981–1983계엄 시기 internment 수감자
  • 1989계약 의회 하원 의원
  • 1990폴란드 농민당 초대 대표
  • 1991제1기 하원 의원

아담 미흐니크

Adam Michnik

공산 정권과 협상해 평화적 전환을 설계한 반체제 전략가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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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반체제 활동으로 투옥
  • 1977노동자방어위원회(KOR) 활동
  • 1980–1989연대노조 고문, 계엄령 기간 재수감
  • 1989원탁회의 협상 참여,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
  • 1989.07「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 제안
  • 1989–1991계약 세임 의원
  • 1989–현재《가제타 비보르차》 편집장

얀 팔라흐

Jan Palach
반체제 인사 체코 체코 1948–1969 ✕ 분신

소련 점령에 항거해 스스로 불붙인 카렐대 학생

의사들이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병상에서 팔라흐는 말했다: '내 행동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동료 학생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라고 당부했다.

1969년 1월 16일, 바르샤바조약군 점령 5개월 만에 체코 사회가 체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카렐대학교 학생. 검열 폐지와 소련군 기관지 발행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을 '인간횃불 1호'라 부른 그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20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상화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항의였고, 20년 후 그의 기일 시위는 벨벳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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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프라하 출생, 브셰타티에서 성장
  • 1963–1966멜니크 김나지움
  • 1966–1968프라하 경제대학
  • 1968.09카렐대학교 철학부로 편입
  • 1968.11학생 파업 참가
  • 1969.01.16바츨라프 광장 분신
  • 1969.01.1920세로 사망

보그단 보루세비치

Bogdan Borusewicz

1980년 그단스크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MKS를 공동 설립한 연대노조의 설계자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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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시위 전단 배포로 체포·3년형 선고, 1969년 사면
  • 1977–1978자유해안노조(WZZ) 공동 조직
  • 1980.08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계획 입안·MKS 공동 창립
  • 1981–1986계엄령 아래 지하활동, 임시연대조정위원회 위원
  • 1991–2001폴란드 하원의원(3선)
  • 1997–2000내무행정차관(경찰 담당)
  • 2005–2015폴란드 상원의장(3선)
  • 2010.07.08대통령 권한대행(수 시간)

알리나 피엔코프스카

Alina Pienkowska
연안 자유노조 반체제 인사 폴란드 폴란드 1952–2002 ○ 자연사

정권이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노동자들을 붙잡아 연대 파업으로 전환시킨 조선소 간호사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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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자유해안노조(WZZ) 창립 참여, 『해안의 노동자』 편집
  • 1980.08.14–16조선소 파업: 외부 연락 담당, 파업 연장에 결정적 역할
  • 1980.08.17–31MKS 상임위원, 21개 요구 공동 초안·그단스크 협정 서명
  • 1980–1981NSZZ 연대노조 보건의료 전국부문위원장
  • 1981.12–1982.07계엄령으로 체포·억류
  • 1982–1989지하 연대노조 활동, 억압 피해자 구호
  • 1991–1993폴란드 상원의원(그단스크)
  • 1998–2002그단스크 시의원

퇴케시 라슬로

Tőkés László

강제 퇴거 시도가 루마니아 혁명을 촉발한 헝가리계 목사

군중은 저항의 원래 이유를 잊고, 일반적 의미에서 체제 자체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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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클루지 개신교 신학대학 졸업, 개혁교회 목사 안수
  • 1981–1982지하 저널 『엘렌폰토크』 기고, 세큐리타테의 첫 박해
  • 1986티미쇼아라 개혁교회 보좌목사 부임
  • 1988–1989체계화 정책 공개 비판, 헝가리 TV와 비밀 인터뷰로 세큐리타테 표적
  • 1989.12.16강제 퇴거 저지 시위가 루마니아 혁명으로 확산
  • 1990오라데아 키라이하게멜레크 개혁교구 주교 선출
  • 2007–2019유럽의회 의원 (2010–2012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