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비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쳐 1885년 하원에 들어갔고, 러시아의 인도 위협을 경고하는 여행기를 썼다. 1899~1905년 인도 총독으로 행정 개혁을 폈지만, 1905년 벵골 분할로 민족주의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재임 중 대기근이 겹쳤다. 1차 세계대전 중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소련-폴란드 경계안인 커즌선에 이름을 남겼다. 세브르 조약을 설계했고, 1922년 로잔 회의에서 연합국 수석 협상자로 튀르키예의 국경을 정했다. 1923년 총리 자리를 놓쳤고 1925년 죽었다.
헨더슨은 주물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 창립에 참여했다. 1906년 노동당을 세운 회의를 주재하고 1911년부터 1934년까지 당 서기를 맡아 당의 조직과 기반 확대를 이끌었다. 1915~1916년 교육위원회 의장, 1924년 내무장관, 1929~1931년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32년 국제연맹 군축회의 의장에 선출됐다. 군축회의가 끝내 실패했지만, 국제 협상과 군축을 위한 활동으로 193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맨체스터의 웨일스인 집안에서 태어나 급진 자유주의 웅변가로 이름을 얻었다. 재무장관으로 1909년 「인민 예산」과 국민보험법을 내 복지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군수장관과 육군장관을 거쳐 1916년 12월 총리가 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독일 경제를 무너뜨릴 막대한 배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의 패권을 견제했다. 1921년 영국-소련 무역협정을 맺고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을 협상했으나 1922년 보수당이 연립에서 빠지자 사임했다. 1936년 히틀러를 만나 찬양하기도 했다. 1945년 죽었다.
영국령 인도 펀자브의 머리에서 양조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샌드허스트를 나왔고, 벵골군으로 옮겨 국경 원정에 나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세이스탄 부대를 지휘했다. 임시 준장이던 1919년 4월 13일, 집회 금지령을 어기고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바그에 모인 군중에게 경고 없이 발포를 명령했다. 병사들은 출구 쪽을 향해 약 10분 동안 1,650발을 쏘았고, 공식 보고로도 최소 379명이 죽었다. 영국 여성이 습격당한 거리에서는 사람들을 배로 기어가게 했다. 헌터 위원회의 비판을 받고 사임을 강요당했으나, 영국에서는 「인도를 구한 사람」이라며 모금이 열렸다. 1927년 뇌출혈로 죽었다.
1865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러디어드 키플링과 같은 학교를 다녔고, 키플링의 소설 속 「스토키」의 모델이 되었다. 영국령 인도군 장교로 북서변경과 중국에서 복무했다. 1917년 말 메소포타미아 전선 등에서 뽑은 1,000명 미만의 연합군 부대 던스터포스의 지휘관이 되어 1918년 1월 바그다드를 출발해 페르시아를 가로질렀다. 1918년 8월 센트로카스피 독재 정부가 장악한 바쿠의 방어에 나섰으나, 9월 14일 오스만군의 공세 앞에서 바쿠를 버리고 물러났다. 1946년 잉글랜드 데번주에서 숨졌다.
1914년 전쟁공채 지지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내놓고, 뒤에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된 정치가
1914년 영국의 참전과 전쟁 지출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사임했으며, 1931년 거국 내각을 이끌어 노동당 지지를 잃었다.
스코틀랜드 로시머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조직가가 되었고, 1911년 노동당 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노동당이 정부의 전쟁공채를 지지하자 의장직을 사임했고, 전쟁 반대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되어 소련을 승인했고, 1929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31년 경제 위기 속에 보수당과 거국 내각을 꾸려 노동당에서 제명되었다. 1937년 항해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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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독립노동당에 가입하고 런던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1906레스터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1노동당 의회그룹 의장이 되었다.
1924영국 최초의 노동당 총리로 취임했다.
1929두 번째 소수 노동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실업 증가 속에 야당 지도자들을 거국 내각에 포함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처칠의 회고록 서술이다.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어 스탈린에게 밀어 보냈다.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해 돌려보냈다." 소련 당국은 1958년 이를 부인했다.
영국의 정치가·군인·저술가. 1874년 블레넘 궁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수단·보어전쟁에서 복무한 뒤 1900년 의회에 입성했고, 자유당 정부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해군장관을 지냈으나 갈리폴리 원정 실패로 물러났다. 1924~1929년 재무장관을 지냈고, 1940년 5월 총리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다. 1945년 선거에서 패한 뒤 야당 당수가 되어 1946년 '철의 장막'을 경고했으며, 1951~1955년 다시 총리를 지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5년 사망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며 인도 자치에 반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갈린다.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시카고의 갱스터들이 차에 방탄유리를 달 수 있다면, 우리 조종사들도 같은 것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 공군 장교 휴 다우딩은 전투기 중심의 방공을 일찍 중시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전투기지휘부에서 레이더, 관측망, 습격 plotting, 무선통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소수의 전투기로 독일 공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1940년 영국 전투에서 예비 전력과 조종사를 보존한 신중한 운용은 방어의 지속성을 높였지만, 전후에는 대형 편대 전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지휘권을 잃었다.
베르트람 램지는 영국 해군 장교로, 전시 해상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능력으로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됭케르크에서 그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동원해 포위된 영국·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해군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1915년 재무부에 들어가 연합국 간 신용 조건을 설계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독일의 배상액을 지불 능력을 넘지 않게 하려 했으나 고위 협상에서 대부분 밀려났고, 조약에 실망해 재무부를 떠났다. 1919년 『평화의 경제적 귀결』로 조약의 해악을 예측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대공황 속에서 유효수요가 경제활동 수준을 정한다고 보고 재정·통화 정책으로 불황에 맞설 것을 주장했으며, 1936년 『일반이론』을 냈다. 1944년 브레턴우즈 협상에서 영국 대표단을 이끌었으나 미국안에 밀렸다. 1946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는 1943년 프랑스 상륙이 충분한 병력과 상륙정, 제공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판단은 노르망디 상륙을 1944년 6월까지 늦췄다. 1945년까지 대륙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트라이던트 회의 발언은 전략가로서의 명성을 훼손했다.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녜르드비고르에서 태어나 1963년 6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영국 육군의 야전원수다. 그는 포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해 1929년 라크힐 포병학교 교장을 지냈고 1940년 본토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12월 제국참모총장, 1942년 3월 참모총장위원회 의장에 올라 윈스턴 처칠의 최고 군사고문으로서 연합국의 전략을 조율했고 1944년 1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지중해 항로를 여는 전략을 우선했으며, 영국 본토 출생이 아닌 프랑스 출생이지만 국적은 영국이다. 전쟁일기는 처칠과 다른 지휘관들에 대한 직설적 비판으로 유명하다.
존 고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용맹성과 제2차 세계대전의 지휘 판단이 함께 기억되는 영국 육군 원수였다. 1918년 됭노르 운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도 공격을 이끈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장을 받았다.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1940년 독일군의 포위와 대륙 방어선의 붕괴를 판단해 됭케르크 철수를 명령했고, 이 선택은 병력을 보존했지만 그의 야전 지휘 능력에 대한 논쟁을 남겼다. 이후 몰타 총독으로 포위된 섬의 방어를 지휘하며 명성을 회복했다.
그는 1942년 처칠에게 도시 폭격으로 노동계급 주거지를 무너뜨리자는 ‘Dehousing’ 논리를 제출했다.
프레더릭 린데만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윈스턴 처칠의 핵심 과학 자문자로, 과학 연구를 국가의 전쟁 수행과 정책 결정에 직접 결합했다. 그는 옥스퍼드 클라렌던 연구소를 이끌며 항공기 스핀 회복과 물리화학을 연구했고, 전시에는 통계 부서를 조직해 전쟁 내각이 보급과 생산을 수치로 판단하도록 했다. 폭격의 효과와 민간 사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도시 지역 폭격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코번트리 이후에도 폭격 지속을 뒷받침하는 정책 논리를 제공했다. 그의 전문성은 처칠에게 신속한 판단의 도구를 주었지만, 계급주의적 인간관과 폭격 정책은 과학 지식이 국가 폭력에 편입될 때 생기는 책임의 문제를 드러냈다.
1944년 6월 12일 노르망디에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과 나는 곧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병사 훈련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지휘관이 된 영국 육군 원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엘알라메인에서 제8군을 재건해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제21군집단을 맡아 초기 연합군 지상군을 통솔했으며, 상륙 규모를 확대하고 해안 교두보를 넓히는 구상을 추진했다. 그의 신중하고 통제적인 작전 방식은 병력 손실을 줄이는 장점과 전쟁을 느리게 한다는 비판을 함께 남겼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몽고메리는 “그만이 지상전에서 이기려는 유일한 공군 지휘관이며 질투심도 없다”며 전쟁성에 리말로리의 유임을 요구했다.
트래퍼드 리말로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항공 정찰과 육군 협동 경험을 바탕으로 왕립공군의 작전 지휘관이 된 영국 공군 원수였다. 영국 전투에서는 대편대 운용을 둘러싸고 휴 다우딩과 키스 파크의 방어적 운용에 맞섰으며, 그 갈등은 지휘부 교체와도 얽혔다. 그는 오버로드에서 연합원정공군을 조정해 독일군 증원과 수송망을 차단하는 항공계획을 추진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도 함께 남겼다. 노르망디 전투 뒤 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으로 이동하던 중 프랑스 알프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쾰른에 대한 1,000기 폭격 직후 뉴스릴 연설에서 그는 '그들은 바람을 뿌렸으니, 이제 회오리바람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서 해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를 이끈 공군 지휘관으로, 독일 도시를 겨냥한 지역 폭격을 전쟁 수행의 핵심 수단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대규모 폭격의 작전적 효율성을 높였지만 민간인 사망과 도시 파괴를 낳은 전략의 책임도 함께 짊어졌다.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는 독일 산업에 대한 압박을 약화시킨다며 수송계획으로의 전환에 반대했으나, 1944년 3월 프랑스 철도 중심지에 대한 초기 공격을 명령해 계획을 실행했다. 이 긴장은 전략폭격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공군 지휘와 지상군 지원이라는 연합군의 공동 목표가 충돌한 사례를 보여 준다.
로널드 스코비는 제1·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영국 육군 장군으로, 토브루크와 몰타를 거쳐 제3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1944년 해방 직후 그리스에서 영국의 군사 개입을 대표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12월 1일 ELAS 무장해제 명령은 국민해방전선과 영국·그리스 정부 세력의 충돌을 촉발했고, 스코비는 아테네 전투에서 영국군 작전을 지휘했다.
다우딩의 후임이 된 그는 전투기 사령부를 재건하는 동시에 독일 공군에 공세로 맞서려 했다.
윌리엄 쇼얼토 더글러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친 영국 공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대규모 전투기 편대를 중시하는 노선을 지지했고, 휴 다우딩의 후임으로 전투기 사령부를 맡아 전쟁의 소모로 약해진 전력을 재건하면서 독일 공군에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이 전환은 방공 중심의 임무를 프랑스 상공 공세로 넓혔지만, 서커스 작전은 제한적인 성과에 그쳤다. 전후에는 독일 영국 점령지 사령관과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회장으로 활동했다.
1944년 6월 4일 밤, 스태그는 폭풍 뒤 6월 6일 새벽까지 이어질 짧은 호전을 예보했다.
제임스 스태그는 영국 기상청 출신의 스코틀랜드 기상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기상 자문을 맡았다. 그는 해상 관측, 정찰 비행, 암호 해독 자료를 종합해 군사작전에 필요한 예보를 만들었고, 기상학을 지휘부의 작전 판단과 연결했다. 1944년 6월 4일 폭풍 뒤 6월 6일의 짧은 호전 가능성을 제시해 노르망디 상륙의 실행 조건을 판단하게 했으며, 이는 완벽한 날씨가 아니라 감수 가능한 위험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결정이었다. 전후에도 기상청에서 일하며 자신의 경험을 『오버로드 예보』로 정리했다.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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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