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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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세운 원로로,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4년 전쟁 발발 뒤 게드는 사회주의자의 반전 노선에서 이탈해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들어갔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는 사회주의 투쟁 외의 별도 반전 행동을 거부했지만, 전쟁기 정부 참여는 그 선택을 현실 정치로 옮겼다.
파리코뮌을 지지했다가 망명한 언론인으로, 1880년 마르크스와 함께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하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가 되었다. 개혁주의자 조레스와 오랫동안 맞섰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 창당에 참여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전쟁을 없앨 것이라며 특별한 반전 행동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1914년 8월 조국이 위협받는다고 보고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해 1916년까지 「신성 연합」 정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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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카를 마르크스와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했다. 강령은 그해 11월 당 창립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1907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프랑스 소수파를 대표해 사회주의 투쟁 외의 특별한 반전 조치를 거부하는 결의안을 냈다.
1914–1916전쟁 발발 뒤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해 1916년까지 재임했다.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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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18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1876–18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1881–18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1900–19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1903–19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1906–19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1918년 1월 오스트리아 하층부와 빈의 파업 노동자들에게 복귀를 촉구했다. 10월 30일 독일오스트리아 임시 국민의회에서 외무장관으로 선출되어 협상국과의 적대 행위 종식을 감독했고, 11월 11일 사망했다.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의사로, 빈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사회주의로 돌아서 1889년 하인펠트 대회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통합해 세웠다. 다민족 제국 안에서 당을 「작은 인터내셔널」로 이끌었다. 1914년 7월 브뤼셀 사무국 회의에서 「전쟁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며 당의 무력함을 고백했고, 개인적 의구심에도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다. 1918년 10월 공화국 과도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으나 11월 11일 공화국 선포 하루 전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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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분열된 세력을 통합하는 데 앞장섰다.
1889사회주의 신문 《아르바이터차이퉁》을 창간했다.
1914제2인터내셔널 긴급 회의에서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밝혔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참전과 당 지도부의 친전 입장을 옹호했다.
광부 출신으로 영국 노동당을 세우고, 반전 총파업을 주장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끝까지 반대한 사회주의자
1892년 광부 출신으로 하원에 진출한 뒤, 하디는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초기 지도자로 노동자 정치 조직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반전 운동에 나섰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부터 탄광에서 일했고, 광부 노조 조직가를 거쳐 1892년 노동자 출신 첫 하원 의원이 되었다. 1893년 독립노동당을 세우고 1906년 노동당의 첫 의회 지도자가 되었으며, 여성 참정권과 인도 자치를 지지했다. 1910년 코펜하겐 대회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군수 산업 총파업안을 제안했다. 1914년 7월 브뤼셀 사무국 회의에 참석했고, 전쟁 내내 반대하다 1915년 숨졌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자 플레하노프는 말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아직 사회주의라는 밀빵을 구울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이식한 사람. 레닌 세대 전체가 그의 책으로 배웠다. 그러나 1917년 37년 만에 귀국한 그는 10월 봉기를 「역사의 단계를 무시한 시기상조」라 규탄했다. 제자들이 세운 정권 아래에서 결핵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반(半)야당 시위가 되었다.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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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1918년 슈티네스와 노사 협정을 맺고 1920년 카프 폭동에 총파업으로 맞선 독일 자유노조 지도자
마리엔부르크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선반공이 되었다. 188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890년부터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1893~1898년과 1903~1920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13년 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의 우파를 이끌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는 성내 평화와 파업 포기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15일 후고 슈티네스와 협정을 맺어 고용주가 처음으로 노조를 노동자 대표로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와 사업장 노동자위원회를 받아들이게 했으나, 노조는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1919년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되었고,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맞서 총파업을 조직했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죽었다.
센에우아즈의 보니에르쉬르센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가 되어 변호사로 일했고, 언론인으로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를 이끌었다. 블랑키주의 경향의 중앙혁명위원회에 들어가 그 후신 정당들을 거쳐 1905년 SFIO에 합류했다. 1893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 18구의 노동자 지역에서 사회주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1년 평화주의 소책자 『왕을 세우라, 아니면 평화를 맺으라』를 썼지만, 1914년 8월 비비아니의 신성 연합 정부에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들어가 브리앙 내각에서 1916년 12월까지 자리를 지켰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에 반대표를 던졌다. 1922년 샤모니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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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헨더슨은 주물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 창립에 참여했다. 1906년 노동당을 세운 회의를 주재하고 1911년부터 1934년까지 당 서기를 맡아 당의 조직과 기반 확대를 이끌었다. 1915~1916년 교육위원회 의장, 1924년 내무장관, 1929~1931년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32년 국제연맹 군축회의 의장에 선출됐다. 군축회의가 끝내 실패했지만, 국제 협상과 군축을 위한 활동으로 193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14년 전쟁공채 지지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내놓고, 뒤에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된 정치가
1914년 영국의 참전과 전쟁 지출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사임했으며, 1931년 거국 내각을 이끌어 노동당 지지를 잃었다.
스코틀랜드 로시머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조직가가 되었고, 1911년 노동당 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노동당이 정부의 전쟁공채를 지지하자 의장직을 사임했고, 전쟁 반대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되어 소련을 승인했고, 1929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31년 경제 위기 속에 보수당과 거국 내각을 꾸려 노동당에서 제명되었다. 1937년 항해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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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독립노동당에 가입하고 런던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1906레스터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1노동당 의회그룹 의장이 되었다.
1924영국 최초의 노동당 총리로 취임했다.
1929두 번째 소수 노동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실업 증가 속에 야당 지도자들을 거국 내각에 포함했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의장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이끌다 1914년 벨기에 전시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노동 조항, 특히 8시간 노동일을 지지하는 조항이 조약에 포함되도록 했다. 1925년 벨기에 외무장관으로 로카르노 조약 협상에 참여했다.
벨기에 노동당의 지도자이자 법학자로, 1900년부터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의장을 맡아 제2인터내셔널의 얼굴이 되었다. 1914년 8월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국무장관으로 입각해 조국 방위를 지지했고, 치머발트 운동에 맞서 사무국을 지키려 했다. 전후 법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지내며 1925년 로카르노 조약에 서명했고, 1923년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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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벨기에 노동자당에 가입해 지도자가 되었다.
1894사회당 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914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시 내각에서 일했다.
1919–1920파리강화회의 조약 협상에서 노동 관련 조항, 8시간 노동일을 지지하는 조항을 포함시키는 데 기여했다.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1867년 러시아 제국 빌나 현의 줄로보 영지(오늘날 리투아니아)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은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으로 서술된다.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고, 폴란드 사회당에서 지하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일으켰다가 1917년 마그데부르크에 갇혔고, 1918년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어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를 꺾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뒤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서 베레자 카르투스카 등에 반대파를 가두었고, 1935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1868년 그루지야 서부 구리아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수의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1890년대 그루지야 최초의 합법 마르크스주의 단체 메사메 다시를 이끌었다. 1903년 멘셰비키 편에 섰고 1906년 제1대 국가 두마 의원이 되었다. 1917년 트빌리시 소비에트와 그루지야 민족회의를 이끌었고, 1918년 5월 독립 선포 회의를 주재한 뒤 7월 그루지야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이 되어 토지개혁과 사회 입법을 이끌었다. 1921년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프랑스에 망명해 망명정부를 이끌다 1953년 파리 근교에서 숨졌다.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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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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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혁명당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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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1901–1902분산된 사회혁명주의 그룹들을 단일 사회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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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동프로이센 다르케멘에서 태어나 변호사 사무원으로 일하다 사무직 노동조합을 세웠고, 1908~1918년 자유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12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노동장관이 되었다. 1919년 6월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해 사임하자, 조약을 비판해 왔으면서도 후임 총리를 맡아 조약 비준을 이끌었다. 재정 개혁과 사회보험 확대를 펼쳤으나, 1920년 3월 카프 폭동 때 반란군과 협상한 일로 정부가 물러났다. 뒤에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바르마트 부패 사건으로 1925년 의원직을 내놓았다. 1944년 베를린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