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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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티 미하일로비치 케드로프

Бонифатий Михайлович Кед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5 ○ 자연사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고 '케드로프 삼각형'을 정립한 과학철학자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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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셰비키 입당; 『프라우다』 책임비서 M.I. 울리야노바 보좌, 체카 근무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과 졸업; 화학 준박사 (깁스 역설)
  • 1935–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과학부 지도원
  • 1939–194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1946년 철학 박사; 1941–1945년 붉은군대
  • 1947–1949『철학의 제문제』(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 창간 편집장
  • 1955–1972과학사연구소(IIET) 선임연구원 → 소장(1962–1972)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7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미하일 보리소비치 흐랍첸코

Михаил Борисович Храп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4–1986 ○ 자연사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공세에 희생된 문화행정 수장, 고골·톨스토이 연구로 부활한 문학학자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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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 1948–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4–1957잡지 《옥탸브리》 편집장
  • 1967–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문학·언어 분과 아카데미크-서기(분과장)

천보다

陈伯达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4–1989 ↓ 실각 1970 · 자연사

마오의 정치비서 겸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중앙문혁소조 조장에서 1970년 실각

「문화대혁명은 광기의 시대였고, 그때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1988년 석방된 뒤 천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사람들이 내 비극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푸젠 출신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배운 뒤 1937년 옌안에서 마오의 정치비서가 되어 마오의 저작을 다듬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건국 후 『홍기』 편집장과 선전 분야 책임자로 대약진 운동의 이론을 썼고,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1970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 쪽에 서 국가주석직 문제로 마오의 분노를 사 실각했고, 1981년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에서 18년형을 받았다.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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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홍기』 편집장
  • 1966–1970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

안톤 아커만

Anton Ackermann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05–1973 ✕ 암 투병 중 자살

1945년 공산당 호소문을 쓰고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운 동독 공산주의자

작센 탈하임의 양말공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고, 모스크바 레닌 학교를 다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활동과 망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 정치학교를 이끌었고, 모스크바에서 자유독일 방송을 맡았다. 1945년 작센으로 파견된 공산당 선발 그룹을 이끌었고, 1945년 6월 11일 공산당 호소문 초안을 썼다. 194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도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세울 수 있다는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웠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뒤 이를 철회해야 했다. 외무차관과 대외정보기관 책임자를 지냈고, 1953년 차이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다. 1973년 암 투병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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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독일 공산당 입당
  • 1935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 1945작센 파견 공산당 그룹 책임자, 6월 11일 호소문 초안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9–1953외무차관
  • 1953모든 직책에서 해임

나자티 시드키

نجاتي صدقي
코민테른 공산주의 팔레스타인 1905–1979

팔레스타인과 스페인의 반파시즘을 연결한 활동가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반파시즘 연대가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경험했다.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작가·번역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스페인으로 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프랑코군에 속한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이며 스페인의 반파시즘과 아랍인의 해방 문제를 연결했다. 이후 언론과 문학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회고록은 아랍인 참가자의 시각에서 스페인 내전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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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예루살렘에서 영국 위임통치 당국 체신부에서 근무하며 유대인 노동자들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접촉,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
  • 1925–1928팔레스타인 공산당 지도부의 파견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서 수학하고 우크라이나 출신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 1930예루살렘에서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지하 신문 『일랄-아맘』 편집에 참여했다.
  • 1931–1933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야파·아크레 감옥에서 2년형을 복역하고 석방 후 6개월간 경찰 감시를 받았다.
  • 1933–1936코민테른의 파견으로 파리에서 아랍어 월간지 『알-샤르크 알-아라비』를 편집했으나 프랑스 당국의 폐간 조치를 당했다.
  • 1935–1936타슈켄트에서 소련의 민족 문제 경험을 연구한 뒤 1936년 8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다.
  • 1937–1939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옮겨 다마스쿠스·베이루트의 공산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며 당 기관지에 글을 썼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을 비판한 이유로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 1939–1948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영국 당국이 운영하는 근동방송에서 일하면서 문학 활동에 집중했고, 카이로에서 푸시킨(1945)과 체호프(1947)를 출간했다.
  • 1948–19761948년 팔레스타인인 대이주 이후 방송국을 따라 키프로스 리마솔로 옮겨 1950년까지 살았고, 이후 베이루트에서 언론·번역·문학 비평 활동을 이어갔다.
  • 1976–1979딸이 살던 그리스 아테네로 옮겼고 1979년 그곳에서 사망해 아테네에 안장되었다.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크루슈코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Круж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전기를 공동 집필하고 즈다노프 노선을 집행한 후 성 스캔들로 몰락한 이념 관료

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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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크룹스카야 공산주의 교육 아카데미 졸업
  • 1933공산주의 사회과학 교원대학 철학부 대학원 수료
  • 1940교수 학위 취득
  • 1941–1942대외정책선전국 위원
  • 1942–1943소비에트 정보국 위원
  • 1943–1944잡지 『전쟁과 노동계급』 부편집장
  • 1944–1949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
  • 1947스탈린 공식 단평전 공동 집필
  • 1949–1950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제1부부장
  • 1950–1953중앙위 문학예술부장
  • 1950철학 박사학위 논문 방어
  • 1952–195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53–1955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55–1961우랄 국립대 교수·『우랄 노동자』 편집장
  • 1961–1973소련 문화부 예술사연구소장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Дмитрий Трофимович Шепи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05–1995 ↓ 실각 1957

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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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ономарё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5 ○ 자연사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관리한 당 국제부장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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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1943코민테른 기관에서 활동, 국제공산주의 네트워크 실무를 익힘
  • 1943–1955코민테른 해산 뒤 중앙위 국제 라인에서 각국 공산당 관계 관리
  • 1955–1986중앙위 국제부장, 세계 공산당과 민족해방운동 지원 노선 관리
  • 1960년대–1970년대중소분쟁과 유로코뮤니즘 속에서 모스크바의 정통 노선을 방어
  • 1986 이후고르바초프의 외교·당 개혁 속에서 퇴장

로저 페렌츠

Rózsa Ferenc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6–1942 ✕ 구금 중 사망

지하 기관지 『서버드 네프』의 첫 편집인으로 1942년 체포되어 구금 중 숨진 공산주의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카를스루에와 드레스덴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드레스덴 사회주의 학생연맹을 이끌며 나치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썼다. 1931년 귀국해 형 리하르드의 권유로 지하 공산주의 운동에 들어갔고, 1935년 공산주의 청년동맹 간부가 되었다. 1938년부터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안의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고, 1941년 6월 독소전쟁 뒤 지하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2년 2월 『서버드 네프』 편집장이 되었다가 6월 1일 체포되었고, 2주 뒤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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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카를스루에·드레스덴 유학, 사회주의 학생연맹 지도
  • 1932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35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도부
  • 1938–1941사회민주당·노동조합 안 공산당 조직 구축
  • 1942『서버드 네프』 편집장, 체포 뒤 구금 중 사망

커스트네르 레죄

Kasztner Rezső
헝가리 (이후 이스라엘) 헝가리 (유대계) 1906–1957 ✕ 암살

아이히만과 협상해 유대인 1,684명을 「커스트네르 열차」로 스위스에 보낸 시온주의자 변호사

콜로즈바르(클루지나포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 15세에 시온주의자가 되어 유대계 신문 『우이 켈레트』 기자와 변호사로 일했다. 1941년 부다페스트로 옮겨 난민을 국경 너머로 들여오던 부다페스트 구호구조위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4년 여름 아이히만과 협상해 돈과 금, 다이아몬드를 대가로 유대인 1,684명을 아우슈비츠 대신 스위스로 보내는 「커스트네르 열차」를 성사시켰다. 열차는 베르겐벨젠으로 돌려졌다가 8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스위스에 닿았다. 전후 이스라엘에서 정부 대변인이 되었으나 나치 협력 고발을 둘러싼 1955년 재판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판결을 받았고, 1957년 3월 총격을 받아 숨졌다. 1958년 대법원은 혐의 두 가지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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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시온주의 청년단 가입
  • 1930년대『우이 켈레트』 기자, 변호사
  • 1941부다페스트로 이주
  • 1944아이히만과 협상, 커스트네르 열차
  • 1952이스라엘 상공부 대변인
  • 1955그루엔발트 명예훼손 재판 판결
  • 1957피격, 사망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미하일로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хай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6–1982 ○ 자연사

스탈린의 청년 동원가에서 해빙기 문화장관까지, 당 기구를 오가며 생존한 기구인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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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 1938–1952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원
  • 1952–1953공산당 중앙위 상임위원 겸 서기, 선전선동부장
  • 1953–1954모스크바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4–1955소련 주폴란드 대사
  • 1955–1960소련 문화부 장관
  • 1960–1965소련 주인도네시아 대사
  • 1965–1970국가출판위원회 의장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일리초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Ильичё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9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모두 편집하고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한 철학자

1952년,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 더 강한 사람을 임명하고, 이 사람은 좀 더 배우게 하라."

흐루쇼프 시대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을 지내며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하고 라디오 마야크를 창설했다. 이후 24년간 외무차관으로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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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북캅카스 공산대학 졸업
  • 1937적색교수양성소 졸업 (철학)
  • 1938–1944잡지 《볼셰비크》 책임비서
  • 1944–194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1–1952《프라우다》 편집장
  • 1953–1958소련 외무부 출판국장,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 편집장 겸임
  • 1958–1961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연방공화국 담당)
  • 1961–1965CPSU 중앙위원회 서기, 이념위원회 의장, 이념부장
  • 1965–1989소련 외무차관
  • 1962소련 과학원 학술원 회원 (철학)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61 ↓ 좌천 1955

스탈린의 수석 이념 감독관, 철학 논쟁에 무너지다

1947년 6월 철학 논쟁장. 즈다노프가 500명 앞에서 묻는다: "이 책에서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서로를 깨물어먹는 장면은 묘사했으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어떻게 그 모두를 쓸어버렸는지는 어디 있습니까?" 알렉산드로프는 침묵한다.

스탈린 시대 수석 철학 관료. 고아에서 선전선동국장까지 올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을 받았으나, 1947년 철학 논쟁으로 실각했다. 문화장관도 성추문으로 1년 만에 민스크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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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20년대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전기기사 아들. 내전기 고아가 되어 보리소글렙스크 고아원에서 성장
  • 1930–1935모스크바 철학문학사연구소(МИФЛИ) 졸업 및 아스피란투라 수료
  • 1935–1939МИФЛИ 교수, 철학사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박사학위
  • 1939중앙위 선전선동국 부국장 겸 고등당학교(ВПШ) 교장
  • 1940–1947중앙위 선전선동국장: 전쟁기 선전·대외이념공세·전후 문화통제 주도
  • 1943『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수상
  • 1946『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스탈린 전기(2판) 공동 집필
  • 19476월 철학 논쟁: 스탈린·즈다노프의 비판. 9월 선전선동국장 해임, 철학연구소장으로 전출
  • 1954–1955소련 문화장관 임명. 1년 만에 「검투사 사건」 성추문으로 파면
  • 1955–1961민스크의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철학법률연구소 분과장으로 좌천, 말년을 보냄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페도세예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с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90 ○ 자연사

소련 이념 장치의 철학 행정가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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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
  • 1950–1954중앙위원회 감사관 · 고등당학교 변증법적 유물론 주임
  • 1954–1955『파르티나야 지즌』(당 생활) 주필
  • 1955–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장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2–1967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인문사회과학 담당)
  • 1967–1973중앙위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 1971–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재임)
  • 1961–1989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28년간)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м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98 ○ 자연사

매주 월요일 지도부 전화를 수확하던 정체기 영화 총책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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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9건설 노동자 → 고등국립문학과정 수료(3년)
  • 1929–1944신문 《스텝의 진리》(악튜빈스크), 《고리키 코뮌》 기자·부장·책임비서·부편집장
  • 1944–1946《프라우다》 고리키주 특파원
  • 1946–1949《고리키 코뮌》→《소비에트 벨로루시》 책임편집자
  • 1949–1955부쿠레슈티 발행 공산당 기관지 부주필
  • 1955–1963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부장 → 이념부 제1부부장
  • 1961–1986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63–1972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2–1983《소비에트 문화》 주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푸르체바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Фурце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4 ○ 자연사

해빙과 통제 사이의 장기 문화장관

1957년 주코프가 흐루쇼프로부터 국방장관 해임을 통보받고 물었다. "누구로 교체합니까?" "말리놉스키." 주코프가 답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푸르체바인 줄 알았어." 소련 최고 지도부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을 향한 동시대 남성 권력의 시선을 압축한 장면이다.

소련 공산당 상임간부회(정치국)에 진입한 유일한 여성 정회원이다.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지지했고, 1960년부터 1974년까지 문화장관으로 해빙기 문화를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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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4문화장관

덩퉈

邓拓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2–1966 ✕ 자살

『인민일보』 편집장, 『연산야화』로 대약진 운동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자가 된 언론인

1966년 『연산야화』와 『삼가촌 찰기』가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전국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5월 18일 가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979년 2월 복권되었다.

푸젠 출신 역사학자·언론인으로 항일전쟁기 진차지 근거지에서 신문을 만들고 최초의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했다. 1949년부터 『인민일보』 편집장·사장을 맡았으나 1957년 마오에게 「서생 논정(書生辦報)」이라 질책받고 물러났다.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로 1961~1962년 『베이징만보』에 연재한 잡문 『연산야화』와 우한·랴오모사와 함께 쓴 『삼가촌 찰기』는 1966년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되었고, 그는 그해 5월 자살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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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인민일보』 편집장 · 사장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학문 정통성의 문지기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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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중부볼가 지방 콤소몰 활동, 1931년 당 입당
  • 1935–1944펜자주 당 간부, 세르돕스크 지역위 제1서기, 펜자주당 농업부장
  • 1948–1956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 겸 『몰도바 공산주의자』 편집장
  • 1956–1960중앙위 서기 L.I.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0–1965중앙위 고등당학교 연구부학장
  • 1965–1983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학계 인사·교육과정·출판의 최종 심판관

블라디미르 일리치 스테파코프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Степа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7 ○ 자연사

레닌 테제 오류로 축출된 브레즈네프기 아지트프롭 수장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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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모스크바주 MGB 부국장
  • 1957–1961모스크바 시당 선전선동부장 → 제2서기
  • 1964–196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65–1970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브레즈네프기 일상 이념 장치 총괄
  • 1967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71–1978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핀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2–199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5년간 소련 TV·라디오를 장악한 방송 총책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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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출판부 선임지도원·부문장
  • 1944–1949전연방 방송위원회 정치방송 주필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방송위원회 부의장
  • 1953–1955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55–195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당위원회 서기
  • 1956–1960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0–1962러시아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 외무장관
  • 1962–1965소련 외무차관
  • 1965–1967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0TASS(타스) 사장
  • 1970–1985소련 각료회의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1978년부터 고스텔레라디오)

바실리 필리모노비치 샤우로

Василий Филимонович Шаур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2007 ○ 은퇴 1986

21년간 소련 문화의 당 문지기로 군림한 '위대한 무언가'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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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 1965–1986중앙위 문화부장
  • 1986연금 은퇴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3–1990 ○ 사망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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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장칭

江青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14–1991 ✕ 자살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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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중국 공산당 입당
  • 1935–1937상하이 좌익 영화·연극 배우 (예명: 란핑)
  • 1938마오쩌둥과 결혼, 옌안 루쉰 예술학원 연극 강사
  • 1949–1951영화지도위원회 부주임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 1969–1976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0–1991사형 선고 → 무기징역 → 의료 가석방 → 자살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9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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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