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백색진영

76 명

소속 인물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밀류틴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6–1912 ○ 자연사

20년간 전쟁장관으로 러시아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탈바꿈시킨 대개혁의 군사 설계자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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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5근위대 장교, 캅카스 전쟁 참전, 중상
  • 1845–1856육군대학 교수, 『1799년 전쟁사』(5권)로 데미도프상
  • 1856–1860캅카스군 주임참모, 샤밀 체포 작전 수행
  • 1861–1881전쟁장관: 전군 징병제, 군관구제, 사관학교 근대화, 병사 기초교육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플레브나 포위 지속 주장, 승리 견인
  • 1878백작 수여, 전후 부패 조사 위원회 설치
  • 1881–1912알렉산드르 3세 즉위 후 사임, 시메이즈에서 회고록 집필
  • 1898제국 최후의 야전원수 진급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2세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II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8–1881 ✕ 인민의 의지에 의한 암살

농노해방과 대개혁으로 구체제를 위로부터 현대화하려 했던 차르, 혁명가들의 표적이 되다

1856년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한 연설: "현행 농노 소유 질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래로부터 저절로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1855년 크림전쟁의 패배 속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아래로부터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다'며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젬스트보 자치·사법 개혁·병역 개혁을 차례로 단행했다. '해방자 차르'로 불렸으나, 개혁은 급진파에게는 불충분했고 보수파에게는 지나쳤으며, 1866년 암살 미수 이후 반동으로 기울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 헌법 초안에 서명한 바로 그날,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대개혁 시대의 종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적 테러를 러시아 정치의 결정적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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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5아버지 니콜라이 1세 즉위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55차르 즉위; 크림전쟁 패배 속에 즉위
  • 1856파리 조약으로 크림전쟁 종결; 대관식에서 정치범 사면
  • 1861농노해방령 — 2,300만 농노 해방
  • 1863–64폴란드 봉기 진압; 핀란드 의회 재소집
  • 1864젬스트보(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
  • 1874전계급 징병제 도입 — 군제 개혁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불가리아 해방
  • 1880로리스멜리코프에게 헌법 초안 위임
  • 1881.3.13인민의 의지(나로드나야 볼랴) 소속 이그나치 그리네비츠키의 폭탄에 치명상, 겨울궁전에서 사망

미하일 니키포로비치 카트코프

Михаил Никифорович Кат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8–1887 ○ 자연사

『러시아 통보』와 『모스크바 소식』으로 여론과 조정을 움직인 '러시아의 천둥소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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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8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졸업
  • 1840–1841베를린 대학 수학, 셸링 철학 강의 수강
  • 1845–1850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조교수
  • 1851–1855『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초대 편집자
  • 1856–1887『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자 겸 발행인
  • 1863–1887『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편집자 겸 임차인
  • 1868차레비치 니콜라이 기념 리체움 공동 설립
  • 1882추밀원 의원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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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27–1907 ○ 자연사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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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39–1917 ✕ 강도에게 피살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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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 1891법무차관
  •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 1916제1급 추밀고문(제국 최후의 수훈자), 해임
  • 1917.12소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됨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3세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III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45–1894 ○ 신장염으로 사망

부친의 대개혁을 되돌리고 전제정치를 재확립한 '평화를 만드는 자'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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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으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66포베도노스체프에게 법률 교육을 받기 시작하다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루슈크 분견대 지휘
  • 1881.3.13부친 암살 후 즉위
  • 1881.4.29'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공포, 반개혁 시작
  • 1889토지대장(zemsky nachalnik) 제도 도입으로 농촌 귀족 통제 강화
  • 1892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두바소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5–1912 ○ 지병으로 사망

모스크바 12월 봉기를 포격으로 진압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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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해군사관학교 졸업
  • 1877기뢰정으로 터키 장갑함 격침, 성 게오르기 4급 훈장 수훈
  • 1897–1899태평양함대 사령관, 뤼순항 점령
  • 1901–1905해군기술위원회 의장
  • 1905–1906모스크바 총독, 12월 무장봉기 진압
  • 1906국가평의회 위원;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생존하고 해군 대장 진급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두르노보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Дурнов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45–1915 ○ 병사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세계대전의 파국을 예견한 제정 내무장관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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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해군사관학교 졸업, 태평양·발트 함대 복무
  • 1870군사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검사보로 전임
  • 1884–1893내무성 경찰국장
  • 1893–1900원로원 의원
  • 1900–1905내무차관 (우편·전신 담당)
  • 1905.10–1906.04내무장관 (비테 내각)
  • 1906–1915국무회의 의원, 우파 그룹 지도자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폰 플레베

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계) 1846–1904 ✕ 암살

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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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48–1909 ○ 심장마비로 사망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함대를 이끈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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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 1906군법회의에서 부상으로 인한 무죄 판결, 퇴역
  • 1909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그루지야 1849–1915 ○ 자연사

차르가 미워한 구원투수

1888년, 측근들 앞에서 "화물 기관차 두 대로 황실 열차를 끌면 위험하다"고 직언했다. 며칠 후 보르키 탈선 사고.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국철 책임자로 발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금본위제를 주도한 제국 근대화의 설계자. 1905년 일본과 강화를 맺고 10월 선언을 받아냈으나, 차르는 위기를 넘겨준 그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한직에서 회고록을 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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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03재무장관, 금본위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업화 드라이브
  • 1905.9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 협상 타결
  • 1905.10초대 총리, 10월 선언 기초
  • 1906.4해임, 이후 국가평의회 한직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무롬체프

Сергей Андреевич Муромц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0–1910 ○ 심장마비

러시아 최초의 헌법적 의회를 이끈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지도자

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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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모스크바 대학 로마법 도첸트
  • 1877법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교수
  • 1880–1892《법률 회보》 편집자, 모스크바 법률학회 회장
  • 1905.10입헌민주당(카데트) 공동 창립, 중앙위원
  • 1906.4–7제1대 국가두마 의장
  • 1908비보르크 호소 서명으로 3개월 수감
  • 1910사망; 장례식이 대규모 반체제 시위로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골리친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Голицы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0–1925 ✕ 총살

스스로 무능을 고백한 제국의 마지막 총리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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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1879내무부 관료, 폴란드령에서 농민 담당
  • 1879–1885아르한겔스크 부지사,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
  • 1885–1903아르한겔스크·칼루가·트베리 지사
  • 1903–1915원로원 의원, 국가평의회 의원
  • 1915–1916러시아 포로구호위원회 의장
  • 1917.01–03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Сахар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1853–1920 ✕ 녹색군에 체포 · 처형

브루실로프 공세의 11군 사령관이자 백군에 합류한 기병대장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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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1878육군 입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0–1897군사학교 교관, 참모직, 기병연대장 역임
  • 1900–1901의화단 진압 작전 중 북만주 주둔군 사령관
  • 1904–1905러일전쟁: 만주군 야전참모장, 총사령관 참모장
  • 1906–1914제7군단장, 제11군단장, 기병대장 진급 (1908)
  • 1914–1915제11군단 이끌고 갈리치아 전투 및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참전
  • 1915–1916제11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브로디 점령
  • 1916–1917두너이군 사령관, 루마니아 전선 총사령관 보좌관
  • 19172월 혁명 후 구치코프에 의해 해임
  • 1918–1920백군에 가담, 크림반도에서 녹색군에게 체포·처형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еевич Бруси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6 ○ 심장마비로 사망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 혁명 후 붉은 군대에 합류한 제정 러시아 최후의 명장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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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5트베리 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아르다한·카르스 공략에서 두각
  • 1902–1906기병장교학교 교장, 러시아 기병 교육의 중심 인물
  • 1914–1916제8군 사령관 → 남서전선 총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 지휘
  • 1917.5–7러시아군 최고사령관, 6월 공세 실패 후 경질
  • 1920–1924붉은 군대 기병 감찰관, 혁명군사평의회 특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즈스키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з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4–1918 ✕ 적군에 인질 살해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강요한 북부전선 사령관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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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 1917.04임시정부와의 군기 유지 갈등으로 사임, 캅카스 광천으로 이주

표도르 이즈마일로비치 로디체프

Фёдор Измайлович Родич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4–1933 ○ 망명 중 사망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로 교수대를 고발한 카데트의 두마 연사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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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세르비아-튀르크 전쟁 의용군 참전
  • 1877–1895트베리 현 젬스트보 활동가, 베세곤스크 현 귀족 대표(1879–1891)
  • 1898–1904페테르부르크 변호사, 학생 시위 항의 서명으로 추방
  • 1904–1905젬스트보 대회·연회 캠페인 공동 조직,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참여
  • 1906–1917제1~4차 국가두마 카데트 의원, 중앙위원
  • 1917.03–05임시정부 핀란드 담당 위원
  • 1918–1920백군 진영 참여, 세르비아·폴란드 파견 대표
  • 1920–1933망명: 파리, 이후 로잔에서 여생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트레포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5–1906 ○ 심부전으로 사망

진압 명령과 개혁 약속을 한 손에 쥔 1905년의 얼굴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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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기마연대 배속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텔리시 전투에서 부상
  • 1896–1905모스크바 경찰총감
  • 1900소장 진급
  • 1905.1–10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비상대권)
  • 1905.5–10내무차관, 경찰·헌병대 사령관
  • 1905.10–1906.9황실 궁정 경비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6–1929 ○ 망명 중 병사

차르 앞에서 권총을 꺼내 입헌군주제를 강요한 대공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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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884근위 후사르 연대장
  • 1895–1905기병 총감
  • 1905군사독재 거부, 니콜라이 2세에게 10월 선언 수용 촉구
  • 1905–14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14–15제1차 세계대전 최고사령관
  • 1915–17캅카스 총독 겸 캅카스 전선 사령관
  • 1922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전러시아 황제로 추대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Пётр Дмитрие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57–1914 ○ 자연사

"신뢰의 시대"를 약속했으나 피의 일요일로 끝난 비운의 내무장관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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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펜자 주지사
  • 1897–1900예카테리노슬라프 주지사
  • 1900–1902내무차관 겸 헌병단장
  • 1902–1904빌나·코브노·그로드노 총독
  • 1904.8–1905.1내무장관, '신뢰의 시대'
  • 1905.1피의 일요일 후 사임, 정계 은퇴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알렉세예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е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7–1918 ○ 심장마비 사망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백군 의용군의 기초를 놓은 차르의 마지막 참모총장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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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 1890–1904참모본부 근무, 니콜라이 아카데미 교수
  • 1904–1905제3 만주군 병참총감 (러일전쟁)
  • 1908–1912키예프 군관구 참모장
  • 1912–1914제13 군단장
  • 1914–1915남서전선 참모장 (갈리치아 공세 입안)
  • 1915북서전선 총사령관, 대후퇴 조직적 지휘
  • 1915–1917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 — 전 러시아군 실질적 총지휘
  • 1917 3–5월임시정부 최고사령관
  • 1917–1918의용군(알렉세예프 조직) 창설자·최고지도자

세르게이 세묘노비치 하발로프

Сергей Семёнович Хаба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오세티야계) 1858–1929 ○ 빈곤 속 사망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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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1886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 졸업, 근위대 참모 근무
  • 1903–1905모스크바 군사학교 교장
  • 1905–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
  • 1914–1916우랄주 군사령관 겸 우랄 코사크군 아타만
  • 1916–1917.02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17.02시위 진압 명령 수행 중 수비대 통제력 상실, 체포
  • 1917.10–1929석방 후 남러시아에서 생활, 예센투키에서 사망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망명 중 빈곤 속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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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파벨 밀류코프

Павел Милюков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859–1943 ○ 자연사

입헌민주당(카데트)의 지도자: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1916년 11월 두마 연단에서 그는 정부의 실패를 하나하나 열거한 뒤 매번 같은 후렴구를 던졌고, 의원들은 "반역이다!"라고 외쳐 답했다.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이자 역사가. 1916년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로 차르 체제를 뒤흔들었고, 외무장관 시절 4월 위기를 촉발했다. 망명 후 파리에서 신문을 발행했으며, 대독소전 때 소련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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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 1906비보르크 선언 기초 — 의회 해산에 대한 저항 촉구
  • 1907–1917제3·4대 두마 의원, 카데트 원내대표
  • 1915진보블록(Progressive Bloc) 결성 주도
  • 1916.11'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 — 슈튀르메르 정부 맹비판
  • 1917.3–5임시정부 외무장관 — 밀류코프 비망록으로 4월 위기 촉발 후 사임
  • 1917.8코르닐로프 사건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대립 속 혼란 가중
  • 1920–1940파리에서 망명 신문 『최신소식』 발행
  • 1941–1943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 지지 —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기뻐함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칼레딘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Калед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1–1918 ✕ 권총 자살

돈에서 첫 백군 거점을 연 카자크 아타만

1918년 2월 11일, 마지막 정부회의에서 방어를 위한 총검이 147자루뿐임을 듣고 사임한 그날, 알렉세예프에게 남긴 유서: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을 맡아 루츠크를 돌파한 제국 육군 기병대장. 1917년 6월 돈 카자크 최초의 선출 아타만이 되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을 전면 거부하며 돈 지역을 독립시켜 남부 백군의 첫 거점을 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카자크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의용군마저 돈을 떠나려 하자 「카자크가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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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06노보체르카스크 카자크 사관학교장
  • 1912–15제12기병사단장,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지휘
  • 1915–16제12군단장, 제8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돌파
  • 1916–17기병대장 승진, 제8군 사령관직 유지
  • 1917.6돈 카자크 아타만에 선출 (1709년 이후 첫 선거)
  • 1917.10–11소비에트 권력 불인정, 돈 지역 독립 선포, 백군 장교 수용
  • 1918.1–2카자크 중립 선언으로 전선 붕괴, 사임 후 권총 자살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1–1925 ○ 망명 중 빈곤 속 사망

류리크 왕조의 후예, 제국의 마지막 자유주의 총리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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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3툴라 현 젬스트보, 기근 구호 활동
  • 1900–1906툴라 현 젬스트보 행정위원회 의장
  • 1904–1905러일전쟁: 젬스트보 의료여단 조직·지휘, 전국적 영웅
  • 1906제1대 국가두마 의원(카데트), 의료·식량위원회 위원장
  • 1914–1917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 의장, 육군 의료·보급망
  • 1915–1917젬고르 공동위원회 지도자, 전시 군수·구호 총괄
  • 1917.3–7임시정부 총리 겸 내무장관: 보통선거·사형폐지 등 개혁
  • 1918–1925체포·탈출, 미국 거쳐 파리 망명, 회고록 집필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독일 1862–1911 ✕ 암살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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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2–1933 ○ 폐결핵

캅카스 전선을 승리로 이끌고 백군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제국 러시아의 마지막 명장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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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1–87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제18소총연대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산데푸·무크덴 전투에서 부상
  • 1913–15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 캅카스군 참모장 → 보병대장 진급 및 캅카스군 사령관
  • 1916에르주룸·트레비존드·에르진잔 점령,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
  • 1917.5캅카스 전선 총사령관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불복종'으로 해임
  • 1919.6–10북서군 총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 공세,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 후 패퇴
  • 1920.1북서군 해산 명령, 에스토니아에서 체포 후 석방, 프랑스로 망명

세르게이 예피모비치 크리자놉스키

Сергей Ефимович Крыжан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62–1935 ○ 망명 중 자연사

1907년 「뻔뻔한」 선거법으로 두마를 길들인 제국의 법률 설계사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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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1896내무성 경제국 과장
  • 1904–1906내무성 지방경제총국 부국장
  • 1906–1911내무차관 (스톨리핀의 오른팔)
  • 1907상원의원 · 추밀고문관
  • 1911–1917제국 국무장관 (마지막 재임자)
  • 1917국가평의회 의원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구치코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уч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2–1936 ○ 망명 중 사망

차르의 퇴위를 받아낸 옥토브리스트 지도자, 보어전쟁 의용군에서 임시정부 장관까지

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는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의 황실 열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로부터 퇴위 조서를 받았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그 열차 안에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10월 17일 동맹'(옥토브리스트)을 이끌며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 개혁을 지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제3대 두마 의장과 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라스푸틴과 궁정을 공개 비판하며 니콜라이 2세의 적이 되었다. 1917년 3월 2일 바실리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받아냈으며, 임시정부 초대 육군해군장관이 되었으나 4월 위기로 사임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백군을 후원했다. 보어전쟁 의용군, 티베트 여행, 수차례 결투로 점철된 모험가적 삶을 살았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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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2보어전쟁 의용군, 부상 후 영국군 포로
  • 1906'10월 17일 동맹' 중앙위원회 의장
  • 1907–1912제3대 두마 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
  • 1910–1911제3대 국가두마 의장
  • 1915–1917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
  • 1917.3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7.3–4임시정부 육군해군장관
  • 1919–1936백군 후원, 파리 망명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4–1917 ✕ 퇴위 소식에 권총 자살

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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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키시킨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ишк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4–1930 ○ 자연사

10월 혁명 당일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전권자로 임명된 카데트 장관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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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즐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зл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소비에트 러시아인 1864–1940 ○ 망명 중 사망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으로 봉기했고, 볼셰비키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구제국 장군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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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블라디미르 키예프 사관생도단 입대
  • 1884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90미하일롭스키 포병아카데미 1등급 졸업
  • 1905–1912제33포병여단 제2대대장
  • 1912소장 진급; 제11시베리아 포병여단장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4군단 포병감
  • 1918–1920적군 군사전문가로 복무
  • 1920.12–1921.03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 봉기 중 방어 지휘
  • 1921–1940핀란드 망명: 교사, 도로 노동자, 정비공

티혼 총대주교

Тихо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65–1925 ○ 자연사

혁명기의 교회를 이끈 총대주교

1922년 교회 귀중품 논쟁에서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와 성물의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티혼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이자 1917년 복원된 총대주교직의 첫 보유자로, 혁명 뒤 교회와 새 국가의 충돌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1921~1922년 기근 구호를 호소했지만, 1922년 2월 법령 뒤 성물의 일괄 인도가 교회법을 침해한다고 보아 자발적 기부와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이 입장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방어였지만, 성직자 탄압과 교회 재산 압수로 이어지는 대립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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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교수
  • 1897류블린 주교
  • 1898–1907알류샨·북아메리카 주교, 대주교
  • 1907–1913야로슬라블·로스토프 대주교
  • 1917모스크바 대주교, 모스크바 총대주교
  • 1917–1925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총살 (부토보)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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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8–1905.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s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6–1918 ✕ 체카에 처형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관료 경력 없이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도 혁명의 위협을 부정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에 무능했으며, 각료와 총리의 거듭된 사임 요구를 무시했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체포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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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4–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9–1917.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발크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Балк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6–1957 ○ 망명 중 사망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시장, 2월 혁명의 물결 앞에 선 경찰 관료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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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 1945–1957브라질 이주, 상파울루 근교 오자스쿠의 수도원 양로원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제노노비치 마이-마옙스키

Владимир Зенонович Май-Мае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7–1920 ✕ 철수 중 권총 자살

의용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무리한 전선과 알코올 의존으로 무너진 백군 장군

1919년 여름, 영국 사절단은 '하리코프 장군'에게 수여하라는 훈장을 들고 의용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하리코프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고, 세인트마이클·세인트조지 훈장은 하리코프 주둔 사령관인 마이-마옙스키에게 주어졌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정 러시아 중장으로, 1918년 의용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뒤 빠르게 사단장으로 올랐고 1919년 5월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세에서 하리코프·쿠르스크·오룔을 연이어 점령하며 백군 중 가장 깊숙이 볼셰비키 수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과 돈군과의 협조 실패, 후방의 마흐노 봉기로 공세는 붕괴했고, 악화된 알코올 의존 탓에 1919년 11월 데니킨브란겔로 교체했다. 1920년 11월 크림 철수 중 세바스토폴에서 사망했으며, 권총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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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96제1사관학교·니콜라옙스크 공병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대령 진급
  • 1914–17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1근위군단 지휘, 중장 진급
  • 1918의용군 사병 입대, 드로즈돕스키 사후 제3소총사단장 취임
  • 1919.5의용군 사령관 임명, 하리코프 점령 후 지역 총사령관 겸임
  • 1919.6–10모스크바 공세 주도, 쿠르스크·오룔 점령
  • 1919.11공세 붕괴로 해임, 브란겔이 승계
  • 1920크림에서 후위부대 지휘, 세바스토폴 철수 중 사망

예브게니 카를로비치 밀레르

Евгений Карлович Миллер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발트 독일계 러시아인 1867–1939 ✕ 모스크바에서 총살

북부 백군을 지휘하고 파리에서 NKVD에 납치된 발트 독일계 제정 러시아 장군

나는 그들에게 분노도 복수심도 없으며, 그저 무엇에든 선동될 수 있는 불쌍한 회색 무리일 뿐이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의 제정 러시아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올랐다. 내전기에는 아르한겔스크 북부정부의 수반 겸 북부 백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미국 간섭군의 지원을 받으며 볼셰비키에 맞섰으나, 연합군 철수 후 홀로 싸우다 1920년 2월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으로 반소 활동을 이끌었으며, 1937년 파리에서 NKVD 요원 니콜라이 스코블린의 함정에 빠져 납치되어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1939년 5월 NKVD 내부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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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브뤼셀·헤이그 주재 무관
  • 1901이탈리아 주재 무관
  • 1914–1916제5군·제12군 참모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제26군단장, 루마니아 전선
  • 1919–1920북부정부 수반 겸 북부군 총사령관
  • 1920–1930프랑스 망명, 브란겔 장군 휘하 참모장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
  • 1937파리에서 NKVD에 납치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8–1918 ✕ 처형

전제(專制)를 신이 맡긴 의무로 믿은 마지막 차르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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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차르 즉위
  • 1904–05러일전쟁 패배, 1905년 혁명
  • 1906기본법 공포, 제한된 두마 체제 출범
  • 1915총사령관을 자임하고 전선으로, 패전 책임이 왕좌로 직결
  • 1917.3퇴위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리티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иттих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발트 독일계) 1868–1930 ○ 망명 중 사망

곡물 강제 징발로 빵 위기를 폭발시킨 마지막 차르 체제 농업장관

1917년 2월 17일 두마 연단에서 곡물 징발의 정당성을 역설했으나 야당의 냉소만 샀다. 닷새 뒤 페트로그라드의 빵 가게 앞에 선 여성들이 혁명을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농업장관으로, 1916년 11월 29일 곡물 강제 징발령(продразвёрстка)에 서명했고 1917년 1월 말 페트로그라드의 제분소 공급을 하루 3만 5천 푸드로 제한했다. 이는 빵 부족과 줄서기 공황을 촉발해 2월 혁명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원래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핵심 설계자였던 유능한 관료였으나, 전시 경제의 수송 붕괴와 인플레이션 앞에서 도구를 잘못 쥔 개혁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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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알렉산드르 관립학교(리체이) 금메달 졸업
  • 1888–1905내무성 지방국·경찰국·이주관리국 근무, 농업문제 특별회의 서기
  • 1905–1912토지정리·농업총국 국유지부장, 스톨리핀 개혁 입법 설계
  • 1912–1916농업차관, 궁정 시종장(1913), 원로원 의원(1916)
  • 1916.11–1917.02농업장관 — 곡물 징발령 서명(11.29), 페트로그라드 제분 제한(1917.1)
  • 1919–1930영국 망명, 런던 소재 러시아 은행장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ут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16 ✕ 살해

제국의 침실까지 들어온 시베리아의 「성자」

1905년 11월 1일,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시에 세르기옙카로 갔다. 밀리차 및 스타나와 차를 마셨다. 하느님의 사람 — 토볼스크 출신 그리고리와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 신비가. 황태자의 혈우병을 진정시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고, 전시에 장관 인사까지 좌우했다. 1916년 12월 군주제를 구하려던 귀족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왕조는 두 달 뒤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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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시베리아 순례자에서 페테르부르크 살롱으로
  • 1905–07황실에 소개되어 황태자의 발작을 진정
  • 1911–16인사 개입 스캔들, 전시의 「장관 도약」
  • 1916.12유수포프 저택에서 살해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47 ✕ 교수형

반볼셰비키 돈 카자크 국가를 세우고 나치와 협력한 백군 아타만이자 노벨상 후보 작가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장군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8년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반볼셰비키 국가 '전대돈군주'를 세웠다. 망명 후 다작 소설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대항하는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다가 종전 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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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아타만 연대 복무, 러일전쟁 종군기자, 제10돈 코사크 연대장
  • 1914–1917제2복합 코사크 사단장 겸 제3기병군단장, 루츠크 돌파 주도, 소장 진급
  • 1917.10–11케렌스키-크라스노프 봉기: 700명의 카자크로 페트로그라드 진격, 실패 후 체포되었다가 트로츠키에 의해 석방
  • 1918.5–1919.2돈 카자크 아타만 당선, 독일 지원으로 돈 군대 조직, '전대돈군주' 수립
  • 1919–1936도임 후 북서군 신문 편집, 독일·프랑스 망명, 반소비에트 망명 정치 활동
  • 1921–1939『쌍두독수리에서 붉은 기까지』 3부작 등 20여 편 집필,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43–1945나치 동부점령지부 카자크 중앙관리국장, 대소련 카자크 부대 조직
  • 1945–1947영국군에 체포되어 소련 송환,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1947년 1월 16일 교수형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카자흐스탄 1870–1918 ✕ 전사

「강한 손」을 자처한 장군

1914년 11월 야간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직접 이끈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 포로 1,200명과 함께 사로잡힌 라프트 장군: 「코르닐로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오.」

카자크 병사의 아들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의 군인. 1917년 8월 소비에트를 부수러 수도로 군단을 보냈으나, 철도 노동자와 선동가들 앞에서 군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녹았다. 내전 초기 백군 의용군을 이끌다 1918년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포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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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6사단장, 오스트리아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전국적 명성
  • 1917.3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황후의 연금을 집행
  • 1917.7총사령관 임명
  • 1917.8수도로 군단 이동, 실패, 비호프 수도원 연금
  • 1917.11–1918.4탈출, 백군 의용군 창설,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전사

블라디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푸리슈케비치

Владимир Митрофанович Пуришкевич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0–1920 ○ 발진티푸스

두마 연단에서 물컵을 던지고 라스푸틴을 쏜 극우 군주주의자

1916년 11월 19일 두마 연설에서: "라스푸틴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 직후 유수포프 공작이 암살 음모를 제안했다.

흑백당과 '미하일 대천사 동맹'을 창립한 제정 러시아의 대표적 극우 군주주의 정치인. 2·3·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반유대주의·반의회주의 연설과 의사당 내 물리적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1916년 12월 궁정의 '어둠의 세력'을 제거해 군주제를 구하려는 신념으로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했고, 직접 권총을 발사했다. 혁명 후 백군에 합류해 반볼셰비키 지하조직을 이끌다 체포·사면되었으며, 노보로시스크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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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흑백당 조직, '러시아 인민동맹' 공동 창립
  • 1907–19172·3·4대 국가두마 의원 (베사라비아·쿠르스크)
  • 1908'러시아 인민동맹'에서 분리, '미하일 대천사 동맹' 창립
  • 1914–19171차대전 중 위생열차 조직·지휘
  • 1916.12라스푸틴 암살 공모, 직접 발포
  • 1917–1918반볼셰비키 지하조직 결성, 체포·사면
  • 1919–1920백군 지역에서 군주제 선전활동, 『블라고베스트』 발행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리모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ым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계 1871–1917 ✕ 자살

질서의 회복을 군사력에서 찾은 기병 장군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크리모프는 숙소로 돌아가 가슴에 권총을 쏘았다.

알렉산드르 크리모프는 러시아 제국군의 기병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7년 혁명 뒤 그는 군대의 규율과 강한 국가 권력을 중시하는 장교 진영에 섰고, 임시정부와 두마 야권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개입에도 연루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명령으로 제3기병군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향했지만 병사들의 동요와 철도 노동자들의 저지로 진군은 무너졌다.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체포와 굴욕을 피하려고 자살했으며, 그의 죽음은 군부의 질서 회복 시도가 혁명의 이중권력과 충돌한 결과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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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2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생도, 졸업 후 포병 장교
  • 1902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4시베리아군단 사령부 복무
  • 1911–1913자바이칼 카자크군 제1아르군 연대 지휘
  • 1915–1916우수리 기병여단과 우수리 기병사단 지휘
  • 1917제3기병군단장,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 지휘

파벨 니콜라예비치 페레베르제프

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Переверз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1–1944 ○ 망명 중 자연사

혁명의 위기에서 법과 정치의 경계를 넘은 법률가

1917년 7월 4일, 그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겨냥한 반역 혐의 자료의 언론 공개를 승인했다.

파벨 페레베르제프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사건을 변호한 법률가로, 혁명기에는 법무 행정과 임시정부의 질서를 맡았다. 그는 1917년 7월 볼셰비키와 독일의 연계를 주장하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해 정치적 탄압의 분위기를 키웠고, 자료의 신뢰성과 해석은 이후에도 논쟁으로 남았다. 공개가 정부와 조율되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 사임한 뒤 내전과 망명을 거쳐 프랑스에서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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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01선서 변호사로 활동 시작
  • 1915제4차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들의 변호인
  • 1917.03페트로그라드 사법재판소 검찰관
  • 1917.05–07임시정부 법무장관
  • 1920–1921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튀니스에서 망명 생활
  • 1927–1944프랑스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서 활동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한진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Ханж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1–1961 ○ 수용소 10년, 사후 복권

콜차크군의 볼가 진격을 이끌고 프룬제에게 무너진 포병 장군

1915년 7월 7일, 후퇴하던 12보병사단의 전열에 균열이 생기자 한진은 직접 예비 대대를 이끌고 틈새로 달려가 후퇴하는 부대를 멈춰 세웠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포병 장교로, 루소-일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포병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의 우랄 군단을 창설하고 콜차크 휘하 서부군 사령관으로 1919년 3월 전략적 돌파를 이끌어 볼가 강 30km 앞까지 진격했으나, 과신장된 전선이 프룬제의 남부군집단 반격에 노출되어 부굴마·부구루슬란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었다. 실각 후 콜차크 정부의 마지막 군무장관을 지냈고, 중국 망명을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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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3오렌부르크 사관학교 →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코룬지 임관
  • 1899미하일롭스카야 포병 아카데미 수석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제3 동시베리아 포병여단 제4포대장,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제19포병여단장 → 제12보병사단장 → 제8군 포병감, 브루실로프 공세 포병 기획 주도
  • 1918–1919우랄 군단장 → 콜차크 서부군 사령관, 볼가 진격 → 부구루슬란 패배 후 경질. 포병대장 진급
  • 1919–1920콜차크 정부 군무장관, '3인 위원회' 일원으로 옴스크 붕괴 수습
  • 1920–1945중국 망명 (다롄·상하이·창춘), ROVS 극동부장 역임
  • 1945–1961SMERSH 체포, 10년형 → 1955년 석방, 잠불에서 사망. 1992년 사후 복권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독일 1872–1918 ✕ 처형

라스푸틴에 의존해 제정 말기 정치를 좌우한 마지막 황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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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니콜라이 2세와 결혼, 러시아 황후
  • 1904황태자 알렉세이 출산
  • 1905라스푸틴과 첫 만남
  • 1915–17니콜라이 2세 부재 중 라스푸틴과 함께 내정 통제
  • 1917.3가택연금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Антон Иванович Деник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2–1947 ○ 심장마비

볼셰비키 정권을 모스크바 400km 앞까지 몰아붙인 백군 최대 규모 군대의 총사령관

1899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부당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자 황제에게 탄원했다. 주변에서 청원을 취하하면 조용히 배려해 주겠다고 했을 때의 답: "나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내 권리인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국 육군 중장으로, '철의 여단'을 이끌며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에 섰다. 1918년 코르닐로프 사후 의용군 사령관을 이어받아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백위대 최대 병력을 지휘했고, 1919년 여름 모스크바 공세로 오룔까지 진격해 소비에트 정권을 가장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라는 경직된 구호로 민족·농민 문제에 실패했고, 통제 불능의 포그롬은 국제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망명 후 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를 집필해 혁명과 내전의 기초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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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05러일전쟁 참전, 참모 장교로 무공을 세워 대령 진급
  • 1914–16제4소총 '철의 여단'(후 사단) 지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2회 점령
  • 1917.4–5최고사령관 알렉세예프의 참모장, 군의 민주화에 반대
  • 1917.8–11코르닐로프 지지로 체포, 비호프 수도원에 수감
  • 1918.4코르닐로프 전사 후 의용군 사령관 승계
  • 1919.1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백군 최대 병력 편성
  • 1919.7–10모스크바 공세, 오룔 점령 후 적군 반격으로 패퇴
  • 1920.4브란겔에게 지휘권 이양, 망명길에 오름
  • 1923–27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 출간

베냐민 파블로비치 카잔스키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Каза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3–1922 ✕ 총살, 1992년 시성

기근 구호와 성물 수호 사이에서 교회를 이끈 수도대주교

“기근 구호를 위해 기부할 수 있지만, 성전의 성물은 건드리지 말라.”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대주교이자 페트로그라드 교구의 지도자로, 혁명 뒤 교회의 교육과 신자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백색운동과 거리를 두면서도 국가가 교회의 자율성과 성물을 침해하는 데에는 맞섰다. 1922년 볼가 기근 때 성물이 아닌 교회 재산의 자발적 기부와 교회가 통제하는 구호를 제안했지만, 당국이 강제 몰수로 전환하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죄 판결 뒤 처형되었고 1992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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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리가 신학교 성서학 교사
  • 1898–1899홀름 신학교 감독관
  • 1899–1902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감독관
  • 1902–1905사마라 신학교 학장
  • 1905–1910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학장
  • 1910–1917그도프 주교,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 보좌
  • 1917–1922페트로그라드·그도프 수도대주교
  • 1922페트로그라드 재판 피고, 처형

세묜 레온티예비치 마슬로프

Семён Леонтьевич Мас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3–1938 ✕ 총살, 1988년 복권

농민 협동조합을 꿈꾼 에스에르 농업정책가

“우리는 너무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세묜 레온티예비치 마슬로프는 에스에르 계열의 농업경제학자이자 농민 협동조합 운동의 조직가였다. 그는 토지개혁을 지지했지만 농민의 지주지 무단 점거에는 반대하며 법적 개혁과 농촌 자치를 결합하려 했다. 1917년 10월 농업장관으로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시간을 맞았고,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뒤에도 제헌의회와 협동조합의 길을 지지했다. 훗날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옹호한 그는 1938년 처형되었다가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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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으로 유배된 뒤 카잔대학교 법학부를 졸업
  • 1902–1913카잔 젬스트보 통계가, 농민 신문 편집자, 에스에르 출판 활동가
  • 1913–1917모스크바 농업협동조합과 중앙아마재배자조합에서 활동
  • 1917.04–10주요 토지위원회 부위원장,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
  • 1917.10.03–25임시정부 농업장관
  • 1917.10–1918겨울궁전에서 체포, 석방 뒤 비밀 임시정부와 제헌의회에 참여
  • 1921–1929셀스코소유즈 의장, 교수, 전러시아 협동조합 연구소 부총장
  • 1930–1938강제유배와 재체포를 겪은 뒤 1938년 총살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20 ✕ 총살형

북극에서 총살형장까지, 제정의 마지막 무장 방어자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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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해군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00–1902러시아 북극 탐험대 수문학자 겸 지도제작자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구축함 세르디티 함장 → 뤼순 포대 지휘, 부상·포로
  • 1906콘스탄틴 메달 수상, 해군 참모본부 근무
  • 1914–1915발트함대 작전부장 → 기뢰부대 사령관,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6–1917흑해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 1918–1919전러시아 최고 통치자 겸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옴스크)
  • 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넘겨져 이르쿠츠크에서 총살

미하일 콘스탄티노비치 디테릭스

Михаил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Дитерихс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37 ○ 망명 중 사망

콜차크의 참모장이자 로마노프 일가 수사 책임자, 백색 프리아무르의 마지막 통치자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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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 1922프리아무르 젬스키 소보르 소집,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 → 패배 후 상하이 망명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극동부 의장

표트르 이오아키모비치 팔친스키

Пётр Иоакимович Пальчи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소비에트 러시아인 1875–1929 ✕ 총살, 반혁명 사보타주

겨울궁전 방어를 지휘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기술관료

궁전이 함락되던 순간, 팔친스키는 돌격해 들어온 적위대 앞으로 뛰어들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의회와 소비에트 대표단이 오는 중이다"라고 외쳤다.

카잔 출신 광산 기술자로, 청년 시절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했으며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1917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 차관과 페트로그라드 총독을 거쳐, 10월 25일 키시킨의 보좌관으로서 겨울궁전 방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궁전 함락 직전 돌입해 온 볼셰비키 병력에게 각료들의 항복 결정을 전했다. 석방 뒤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하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 및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을 맡았으나, 1928년 샤흐티 재판의 후속 탄압 속에 체포되어 이듬해 '반혁명 사보타주'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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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광산 기술자, 도네츠 탄전 조사
  • 1902–1905골로빈스키 탄광 지배인, 이르쿠츠크
  • 1906–1913망명 (런던·토리노·로마), 토리노 세계박람회 광업부문 책임
  • 1915–1917중앙군수공업위원회 간부
  • 1917.03–10임시정부 통상·산업 차관, 페트로그라드 총독 (8–9월)
  • 1917.10.25겨울궁전 방어 책임자, 체포
  • 1918–1928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
  • 1928–1929체포, 사형 선고, 총살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нова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5–1949 ○ 자연사 · 파리

9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자본가, 차르 체제를 뒤흔든 진보블록의 설계자

1917년 5월 16일, 군산업위원회 대회 연설에서 그는 경고했다: "반국가적 경향이, 대중을 최면에 빠뜨리는 구호로 자신의 본질을 위장하며, 러시아를 거대한 걸음으로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섬유 자본가 중 한 명으로, 1900년에 이미 9시간 노동제와 노동자 주택·학교·병원을 도입한 선구적 산업가였다. 진보당 창립자이자 4대 두마 부의장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진보블록을 조직하여 차르 체제에 맞선 의회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고, 마지막 내각에서는 케렌스키의 부총리로서 10월 혁명 당일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밀류코프의 『최신소식』 발행을 이끌며 러시아 망명 사회의 좌파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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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5가업인 콘스탄틴 직물 공장 경영, 1900년 9시간 노동제·노동자 주택·학교·병원 도입
  • 1905–12통상산업당 공동 창립, 모스크바 증권거래소 부위원장
  • 1912–14진보당 공동 창립, 4대 두마 의원(코스트로마), 두마 부의장
  • 1915–17.2중앙군산업위원회 부의장, 진보블록 조직, 두마 임시위원회 위원
  • 1917.3–5임시정부 통상산업부 장관(1차), 노사 타협 추진하다 사임
  • 1917.9–10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 10월 25일 겨울궁전에서 각료 회의 주재 중 체포
  • 1918–40프랑스 망명, 『최신소식』 이사회 의장, 진보적 망명 단체 지도
  • 1941–49미국 거주 후 파리 귀환, 1949년 사망

로만 바츨라보비치 말리놉스키

Роман Вацлаво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폴란드 1876–1918 ✕ 총살형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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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엥겔하르트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нгельгардт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877–1962 ○ 자연사, 리가에서

수비대를 막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으로 명령 제1호를 촉발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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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3파제스키 군단·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근위 울란 연대 복무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1만주군 사령부 근무
  • 1908건강 문제로 제대, 모길료프 현 지방 자치 활동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원, 10월당·진보블록
  • 1917.02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페트로그라드 혁명 사령관
  • 1918–1919백군 의용군 대표부 정치부장(키예프·오데사), 남러시아군 선전부
  • 1920–1940프랑스·라트비아 망명, 택시 기사·경마 조련사
  • 1940–1962소련 체포·호레즘 유형(1946년까지), 이후 리가에서 통역사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8–1918 ✕ 체카에 피살

하루 동안의 차르가 될 수 있었으나 제헌의회에 양보한 마지막 로마노프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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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3기병 총감
  •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 1918.3–6페름 유형, 체카에 납치·살해됨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브란겔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8–1928 ○ 급사 · 독살 의혹

'흑남작', 이미 진 전쟁을 넘겨받아 개혁으로 돌파를 시도한 백군 최후의 총사령관

"주여, 군대를 구원하소서" — 1928년 4월 브뤼셀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남긴 마지막 말.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광산 기사로 출발했으나, 러일전쟁에 지원 입대하며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카우셴 전투의 기병 돌격을 이끌어 전쟁 최초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917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0년 데니킨의 뒤를 이어 남러시아 백군 총사령관이 되어 '러시아군'으로 재편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적군에 패배한 뒤 14만 5천 명 이상을 크림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대규모 대피 작전을 조직했으며,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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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광산기사 졸업, 기마친위대 지원입대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아르군 코사크 연대 복무, 훈장 수훈
  • 1910–1914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기마친위대 중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4카우셴 전투에서 기병 돌격 지휘,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5–1917제1네르친스크 코사크 연대장 → 소장, 제7기병사단장 → 통합기병군단장
  • 1918–1919의용군 입대, 제1기병사단장 → 캅카스 의용군 사령관, 차리친 점령
  • 1920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러시아군'으로 재편, 크림 철수 작전
  • 1924–1928러시아 전군연합(ROVS) 창설, 망명 백군 운동 지도

바실리 비탈리예비치 슐긴

Василий Витальевич Шульг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무국적) 러시아 1878–1976 ○ 자연사

차르의 퇴위를 직접 받아내고 백군 이데올로그가 된 두마의 군주제 보수주의자

프스코프 역의 차르 전용 열차에서, 나흘째 면도도 씻지도 않은 슐긴에게 황제의 측근이 말했다: '이 피자크 차림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오.'

바실리 슐긴은 러시아 제국 말기 두마(II·III·IV대)의 핵심 보수정치인이자 《키예블랴닌》 편집자로, 강력한 러시아 민족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했다. 1917년 3월 알렉산드르 구치코프와 함께 프스코프로 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직접 받아냈으나, 혁명의 파국을 막지는 못했다. 남북전쟁기 백군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으며, 1944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12년간 수감되었다. 1956년 사면 후 소련에 남아 회고록을 집필하고 1965년 다큐멘터리 《역사의 심판》에 출연하여, 패배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구체제의 산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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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II·III·IV대 두마 의원 (볼린현)
  • 1913–1917《키예블랴닌》 편집자
  • 1915진보블록 공동창설, '진보적 민족주의자' 그룹 지도
  • 1917.3구치코프와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8–1920백군 운동 선전가·이데올로그, 《로시야》·《벨리카야 로시야》 편집
  • 1920–1944유고슬라비아 망명, 회고록 《날들》·《삼도시》 집필
  • 1947–1956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25년형 수감 (12년 복역)
  • 1956–1976사면 후 블라디미르 거주, 《레닌의 실험》 집필, 영화 《역사의 심판》 출연

알렉산드르 일리치 두토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Дут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9–1921 ✕ 체카 요원에 암살

오렌부르크 카자크를 이끌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투르키스탄 사이를 차단한 백군 아타만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고 있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아타만이자 백군 중장. 1917년 11월 소비에트 권력을 불인정한 최초의 군사 지도자로서 오렌부르크-타슈켄트 철도를 차단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20개월간 갈라놓았다. 콜차크 휘하에서 오렌부르크 독립군을 지휘했고, 패배 후 '기아 행군'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1921년 체카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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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콜라이 기병학교 졸업,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배속
  • 1908총참모부 아카데미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지휘
  • 1917.09오렌부르크 카자크군 아타만에 선출
  • 1917.11볼셰비키 권력 불인정, 무장봉기 주도
  • 1918–1919콜차크 휘하 오렌부르크 독립군 사령관
  • 1919–1920악토베 패배 후 '기아 행군', 중국 망명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알렉신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Алекси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9–1967 ○ 망명 중 자연사

혁명적 국제주의에서 전시 애국주의로 선회한 논객

1917년 7월, 그는 《Живое слово》에 레닌의 독일 간첩설 자료를 실었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는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가이자 제2국가두마 의원으로 부상했지만, 전쟁과 혁명의 압박 속에서 사회애국주의로 급선회했다. 1917년 그는 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에 합류해 볼셰비키를 공격했고, 7월에는 에르몰렌코의 불충분한 증언을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주장으로 포장해 대중 언론에 올렸다. 이 폭로는 군대와 소비에트 안에서 반볼셰비키 정치를 강화했지만, 그가 혁명가에서 반볼셰비키 망명자로 바뀐 경로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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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모스크바대학교 학생, 학생운동 참가
  • 1905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선동가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볼셰비키 출판물 필자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사회민주파 볼셰비키계 연설자
  • 1909–1914좌익 볼셰비키계 《전진》 그룹 지도자
  • 1914–1917전쟁 지지 사회민주주의자, 파리 《호소》 공동 편집자
  • 1917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 지도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
  • 1919–1967러시아 망명 정치가·논객, 파리 러시아 평의회 의장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

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스웨덴계) 1883–1920 ○ 동상 · 폐렴 사망

백군 최고의 '병사들의 장군', 얼음 행군을 이끌다 사라진 카잔의 정복자

“병사들에게 전하라, 내가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죽는 것이 그 증거라고.”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에 참여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맞서 코무치 인민군 소규모 의용대를 이끌고 기동전으로 카잔을 점령, 적군의 동부전선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으며 '작은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콜차크 휘하에서 동부전선 총사령관이 된 후, 붕괴하는 전선을 수습하며 바이칼까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을 이끌었고, 도중 동상과 폐렴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관은 부하들의 손에 끝까지 운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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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니콜라옙스크 기병학교 졸업, 제54용기병연대 코르네트
  • 1913니콜라옙스크 참모아카데미 1등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 참여, 중령
  • 1918.6코무치 인민군 제1의용대 지휘관
  • 1918.7–8시즈란·심비르스크·카잔 점령, 대령 진급
  • 1918.11소장 진급
  • 1919제1볼가군단장 → 볼가집단사령관 → 제3군사령관 (콜차크군)
  • 1919.12–1920.1동부전선 총사령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 지휘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Виктор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5–1920 ✕ 총살형

콜차크 독재를 설계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선 카데트 정치인

1919년 9월 22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녹스 장군이 내게 왔다. 처칠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지원하라고 훈령했다.」 붕괴 직전의 정권 내막을 기록한 총리의 목소리다.

제정 러시아의 카데트당 소속 두마 의원으로, 1918년 11월 옴스크에서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차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붕괴 직전의 백색 정부를 이끌었고, 정권의 유일한 충성파 정치인으로서 최후까지 콜차크 곁에 남았다. 1920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정치중앙에 넘겨졌고, 2월 7일 새벽 레닌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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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카데트당 소속 제4대 국가두마 의원 (톰스크현)
  • 1914–1917제3 시베리아 위생·급식대 대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02–05임시정부 크론시타트 항구 사령관 겸 정부위원
  • 1918.08–11시베리아에서 군사독재 수립 운동 주도, 옴스크 쿠데타 조직
  • 1918.12–1919.05콜차크 정부 경찰국장 → 내무차관
  • 1919.05–11콜차크 정부 내무장관
  • 1919.11–1920.01각료회의 의장 (총리)
  • 1920.01–02체코군단에 넘겨져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수감, 총살

야코프 알렉산드로비치 슬라시초프

Яко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лащё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85–1929 ✕ 피살

페레코프를 지킨 백군 장군

1921년 귀환을 호소하며 말했다. “소련 정권은 러시아와 그 인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권이다.”

야코프 슬라시초프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백군 장군으로, 남러시아 내전에서 크림 방어를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말 페레코프 지협의 방어선을 장악하고 1920년 초 붉은 군대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 열세한 병력으로 브랑겔의 크림 거점을 지탱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벌어진 가혹한 진압과 약탈 의혹은 군사적 역량과 함께 백군 통치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망명 뒤 소련으로 돌아가 전술을 가르치며, 패배한 진영의 군사 지식이 새 국가에 흡수되는 역설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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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핀란드 연대 소위
  • 1911–1917니콜라이 군사참모 아카데미 수학, 파제스 군단에서 전술 교육
  • 1917모스크바 근위연대 지휘관
  • 1918의용군 합류, 슈쿠로 유격대 참모장 및 쿠반 부대 지휘
  • 1919제4보병사단장, 남러시아군 제3군단장
  • 1919–1920크림 방어 지휘관, 페레코프 지협 방어선 운용
  • 1922–1929소련 군사학교 ‘비스트렐’ 전술 강사

막심 막시밀리아노비치 필로넨코

Максимилиан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Филоне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85–1960 ○ 망명 중 자연사

혁명 정부의 질서 회복을 밀어붙인 에스에르 관료

막심 필로넨코는 변호사 출신의 에스에르 정치인으로, 1917년 혁명 정부가 군대의 붕괴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압박한 인물이다. 전선과 최고사령부의 정부 комиссар로서 코르닐로프사빈코프와 협력해 사형제 부활과 군율 강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7월의 억압적 전환을 상징했다.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했지만 결국 코르닐로프 봉기 국면에는 케렌스키 편에 섰다. 10월 이후에는 반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망명 뒤에는 변호사와 법학 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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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조선학과 수학
  • 1914제1차 세계대전 참전, 근위 척탄병연대 소위
  • 1917.06제8군 임시정부 комиссар
  • 1917.07–08코르닐로프 휘하 최고사령관부 정부 комиссар
  • 1917.08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의 중재 시도, 이후 케렌스키 지지
  • 1917–1918페트로그라드 반볼셰비키 지하조직 참여
  • 1918–1919아르한겔스크 북부 지역 임시정부의 시의원
  • 1933–1940브뤼셀대학교 로마법 교수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Роман Фёдорович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발트 독일인 (러시아 제국) 1886–1921 ✕ 총살형

몽골을 해방하고 칭기즈 칸 제국의 부활을 꿈꾼 백군의 광신적 군벌

나의 이름은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있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의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믿은 백군 장군. 시베리아에서 그리고리 세묘노프 휘하의 아시아 기병사단을 이끌며 붉은 군대와 싸우다 1920년 몽골로 넘어갔다. 1921년 2월 중국 점령군을 몰아내고 복드 칸의 신정 군주제를 복원시켜 '다르한 호쇼이 친 왕'의 작위를 받았으나, 유대인과 볼셰비키 동조자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공포 통치를 펼쳤다. 같은 해 8월 몽골인 부대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넘겨진 뒤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6시간의 재판 끝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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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아르군 코사크 연대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5회 부상,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918그리고리 세묘노프와 함께 특별만주부대 결성
  • 1918.11소장 진급, 다우리아에 아시아 기병사단 창설
  • 1921.02우르가 점령, 중국군 축출, 복드 칸 복위
  • 1921.02복드 칸으로부터 '다르한 호쇼이 친 왕' 작위 수여
  • 1921.08몽골인 부대에 체포되어 붉은 군대에 인도됨
  • 1921.09.15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공개 재판 후 총살형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세묘노프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90–1946 ✕ 교수형

일본군에 기대어 자바이칼을 지배하고 콜차크와 맞선 백군 아타만

「…태동하는 내전의 조건에서, 모든 온정과 인간애는 버려져야 한다」: 회고록 『나 자신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백색 테러 정책을 정당화한 말.

자바이칼 코사크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유능한 기병 장교였다. 1917년 말 특별만주부대(OMO)를 조직해 시베리아 내전의 첫 전선을 열었고, 일본군의 군사·재정 지원을 등에 업고 자바이칼 지역을 장악해 '동부 변경' 정부를 수립했다. 콜차크의 권위를 거부하며 독자 세력화했고, 그의 통치 아래 자행된 대규모 백색 테러는 미군 정보 당국의 조사 대상이 될 정도로 잔혹했다. 1920년 패주 후에도 일본의 후원 아래 만주에서 반소 활동을 이어가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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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1오렌부르크 코사크 사관학교 졸업,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4급·게오르기 무기 수훈, 에사울 진급
  • 1917.12–1918특별만주부대(OMO) 조직, 자바이칼에서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18–1919치타 점령, 자바이칼 코사크 군 아타만 선출, 콜차크와 충돌 후 화해
  • 1920.1–10러시아 동부 변경 전권 통치자, 극동군 편성 → 10월 패주, 비행기로 만주 도피
  • 1921–1945일본·만주 망명, 일본군과 협력, BREM 의장(1943–1945)
  • 1945.8–1946.8소련군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교수형

아나톨리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Анатолий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제정·백색진영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891–1938 ✕ 총살, 1989년 복권

27세에 장군이 된 백군 지휘관, 야쿠티야 원정으로 내전을 끝내다

「나는 내 정치적 신념을 모른다. 나는 당파적이지 않다. 나는 인민에게 선과 행복을, 러시아 인민이 친절하고 평화로우며 강하고 위대한 인민이 되길 바란다」: 야쿠티야 원정 중 일기에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의 최연소 장군 중 하나로, 27세에 소장 계급을 받고 '시베리아의 수보로프'로 불렸다. 1918년 12월 페름을 함락시켜 2만 명의 붉은군대 포로를 석방했으며, 콜차크 휘하에서 제1시베리아군을 지휘했다. 내전이 패배로 기운 후에도 하얼빈에서 목수와 마부로 생계를 이어가다 1922년 9월 자원대를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에 나섰으며, 1923년 6월 아얀에서의 항복으로 끝난 이 원정은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대숙청기인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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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 진급,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수훈
  • 1918.05–08톰스크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제1중앙시베리아군단 지휘
  • 1918.09–12소장 진급(27세), 페름 함락, '시베리아의 수보로프' 별칭
  • 1919중장 진급, 제1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0–1922하얼빈 망명, 목수·마부로 생계
  • 1922.09–1923.06시베리아 의용대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 아얀에서 항복
  • 1924–1938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1936년 석방, 1938년 대숙청으로 총살

빅토르 이바노비치 말체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Мальцев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895–1946 ✕ 처형 · 교수형

소련 공군 대령에서 ROA 공군 사령관으로, 블라소프 운동의 항공전력 창설자

1941년 11월, 독일군이 점령한 얄타에서 붉은 공군 대령 정복 차림으로 독일 사령부에 모습을 드러내 볼셰비키와 싸우겠다고 말했다.

소련 공군 대령 출신으로, 1941년 독일군 점령 하의 얄타에서 투항하여 대소련 협력 진영으로 전향했다. 블라소프 휘하 러시아 해방군(ROA) 공군을 조직하고 KONR 공군 사령관(소장)으로서 약 5천 명 규모의 항공전력을 편성했으나, 실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종전을 맞았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고문당했으나 자백하지 않고 석방된 경험이 그를 반볼셰비키로 돌아서게 한 결정적 계기였으며, 수감 경험을 담은 『GPU 컨베이어』를 출간해 독일의 선전물로 활용되기도 했다. 전후 미군에 의해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6년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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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붉은 군대 자원입대; 예고리옙스크 비행학교 졸업(1919)
  • 1925–1927모스크바 근교 중앙비행장장
  • 1927–1931시베리아 군관구 공군 사령부 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36대령 진급
  • 1937투르크멘 민간항공관리국장
  • 1938–1939NKVD에 체포되어 고문당함; 자백 없이 석방
  • 1939–1941얄타 아에로플로트 요양소장
  • 1941얄타에서 독일군에 투항; 1942년 얄타 시장 역임
  • 1943–1944소련 포로 조종사들을 모집해 동방 항공대 편성
  • 1945.2소장 진급, KONR 공군 사령관 임명 (약 5천 명, 항공기 40-45대)
  • 1945.4–8미군에 항복; 소련으로 송환됨
  • 1946.8.1반역죄로 사형 선고, 부티르카 교도소에서 교수형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Власов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901–1946 ✕ 교수형

모스크바 방어전의 영웅에서 나치 협력자로 전향한 러시아 해방군 지도자

1942년 6월, 제2충격군이 포위되었을 때 사령부는 비행기로 탈출할 것을 제안했다. 블라소프는 거부하고 부하들과 함께 독일군 점령지에 숨었다가 열흘 뒤 농부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붉은 군대 중장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20군을 지휘해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불렸으나, 1942년 류반 작전에서 포로가 된 후 나치 독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해방군(ROA)과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의 지도자로서 반스탈린주의 민주 러시아를 표방했고, 1944년 프라하 선언을 통해 민족자결과 기본적 자유를 내건 강령을 발표했다. 나치는 그를 선전 도구로만 이용했으나, 전쟁 말기 ROA 제1사단은 프라하 봉기에 가담해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비밀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역사학과 기억 정치에서 첨예한 논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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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백군·마흐노 세력과 교전
  • 1930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 1938–39중국 파견, 장제스 군사고문으로 복무
  • 1940–41제99소총사단장(최우수사단 선정), 이어 제4기계화군단장
  • 1941제37군 사령관(키예프), 제20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솔네치노고르스크 탈환
  • 1942제2충격군 사령관, 류반 작전 중 포위·포로, 나치에 협력 전향
  • 1944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 의장, 프라하 선언 발표
  • 1945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스코블린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кобл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93–1937/1938? ✕ 실종, 사망 경위 불명

백군 장군이 된 비밀 협력자

1937년 밀러를 만나게 한 뒤, 스코블린은 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니콜라이 스코블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백군 장교로, 코르닐로프 타격사단을 이끈 젊은 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망명 뒤 그는 러시아 전군사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협력자로 포섭되어 백계 러시아인 망명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사건을 둘러싼 독일 측 문서와 정보가 스탈린의 숙청을 촉발했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주도 아래 조작·활용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1937년 예브게니 밀러 납치에 관여한 뒤 사라졌으며, 그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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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7–1918코르닐로프 타격부대 대대장
  • 1918–1920코르닐로프 타격연대·사단 지휘관, 백군 소장
  • 1920–1929갈리폴리·불가리아 망명, 코르닐로프 연대 지휘
  • 1929–1937파리 러시아 전군사연합 코르닐로프 연대장
  • 1935–1937ROVS 내부선 방첩 책임자
  • 1937밀러 납치 작전 협력 뒤 실종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폴란드계 생몰년 미상 ○ 생몰년 미상

혁명의 첫날 기록에 남은 의장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첫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보구스와프 즈보로프스키는 1905년 혁명기에 활동한 노동운동가로, 상세한 개인 이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첫 의장을 맡았고, 다음 날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에게 자리를 넘겼다. 짧은 재임이었지만 소비에트가 파업 속에서 노동자 대표를 정치적 조직으로 묶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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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페테르부르크 노동운동 활동가
  • 1905.10.13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창립 의장
  • 1905.10.14의장직 교체

티모페이 이바노비치 키르피치니코프

Тимофей Иванович Кирпичн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92–1917/1918 ✕ 백군 내부에서 처형

제정군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 지도자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겠는가? 나는 가지 않겠다.”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하급지휘자였지만, 전선의 경험과 병사들 사이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명령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했다. 1917년 2월 26일 시위 진압 뒤 부하들에게 노동자에게 발포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다음 날 볼린스키 연대의 봉기를 이끌어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연쇄적인 가담을 촉발했다. 그는 임시정부에게 혁명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으나, 10월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맞섰고 백군 내부의 처형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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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부상
  • 1916–1917페트로그라드 주둔 예비부대, 볼린스키 연대 훈련대 선임 하사관
  • 1917.02.27볼린스키 연대 훈련대의 명령 불복종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봉기 주도
  • 1917.04임시정부에 의해 혁명의 영웅으로 선전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선출
  • 1917.04–05임시정부 지지 병사 시위 조직, подпрапорщик 및 прапорщик으로 승진
  • 1917.10–1918볼셰비키에 맞서 남부로 이동, 백군 진영에서 처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