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마르크스가 1851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직후 쓴 정치 분석. 1852년 5월 뉴욕에서 바이데마이어의 잡지 《혁명》 첫 호로 나왔다.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의 프랑스를 계급과 그 분파, 그리고 그 정치적 대표자들의 투쟁으로 풀어, 보잘것없는 인물이 영웅 노릇을 하게 된 조건을 밝힌다. 어느 계급도 지배하지 못하는 교착 속에서 국가 기구가 사회 위에 선 듯 보이는 체제, 곧 보나파르티즘을 처음 분석했고, 혁명은 이 국가 기구를 넘겨받지 말고 부숴야 한다는 결론은 파리 코뮌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으로 이어졌다.
상세
쿠데타의 압박 아래 쓴 글
마르크스는 1851년 12월 중순부터 1852년 3월 25일까지 이 글을 썼다. 친구 요제프 바이데마이어가 1852년 1월부터 뉴욕에서 정치 주간지를 낼 계획이었고, 마르크스는 그에게 쿠데타의 역사를 2월 중순까지 매주 써 보냈다. 주간지 계획은 무산되었고, 바이데마이어가 그 대신 낸 월간지 《혁명》의 첫 호(1852년 5월 18일)가 통째로 이 글이었다. 500부가 찍혔고 독일에는 수백 부만 들어갔다. 이때 제목은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었다. 1869년 함부르크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로 제목을 바꾼 제2판이 나왔는데, 마르크스는 개정하면 글의 독특한 색채를 잃는다며 오식과 더는 통하지 않는 암시만 고쳤다. 1885년에는 엥겔스 서문을 붙인 제3판이 나왔다. 한국어로는 최형익의 번역(세창출판사, 2025)이 나와 있다.
제목의 브뤼메르 18일은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총재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의 날이다. 큰아버지의 쿠데타를 조카가 되풀이했다는 조롱이 제목에 들어 있다.
마르크스는 1869년 서문에서 같은 사건을 다룬 두 책과 자기 책을 견주었다. 빅토르 위고의 『꼬마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한 개인의 폭력 행위로만 보아, 오히려 그 개인에게 세계사에 유례없는 주도권을 돌려 그를 작게 만들기는커녕 크게 만들었다. 프루동의 『쿠데타』는 쿠데타를 앞선 역사 발전의 결과로 그리려다 그 주인공을 변호하는 데 빠졌다. 마르크스 자신은 프랑스의 계급투쟁이 어떻게 기괴하고 평범한 인물이 영웅 노릇을 할 수 있는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 냈는지를 보이겠다고 했다.
비극과 소극: 과거의 옷을 빌린 혁명
책은 “헤겔은 어디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그가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고 잇는다. 당통 대신 코시디에르, 로베스피에르 대신 루이 블랑, 1793~1795년의 산악파 대신 1848~1851년의 산악파, 큰아버지 대신 조카가 나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스스로 고른 환경이 아니라 과거에서 넘겨받은 환경 아래서 만들며,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위기의 순간에 과거의 이름과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면을 썼고, 1789~1814년의 혁명가들은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옷을 입고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세우는 제 과제를 치러 냈다. 1848년에는 그 빌림이 패러디가 되었다. 혁명의 정신을 되살리는 대신 혁명의 유령을 다시 걷게 했을 뿐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19세기의 혁명은 과거에서 시를 길어 올 수 없고, 제 내용에 이르려면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신을 묻어 버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에서 성공으로 내달리다 금세 절정에 이르고 긴 숙취에 빠지는 데 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판하고 제 행보를 멈추며 이미 이룬 듯한 것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세 시기와 하강선
1장은 1848년 2월 24일부터 1851년 12월까지를 세 시기로 나눈다. 2월 24일 루이 필리프의 퇴위부터 5월 4일 새 의회가 처음 모일 때까지는 혁명의 서막인 2월 시기다. 그다음 1849년 5월 28일까지는 헌법을 만든 의회가 공화국을 세운 시기이고, 1851년 12월 2일까지는 입헌공화국, 곧 입법국민의회의 시기다. 6장 끝에서 마르크스는 이 시기들을 다시 잘게 나누어 요약한다.
3장은 이 과정을 하강선으로 그린다. 1789년의 혁명은 입헌파에서 지롱드파로, 지롱드파에서 자코뱅으로, 매번 더 과감한 당파가 앞선 당파를 밀어내는 상승선을 그렸다. 1848년은 그 반대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소부르주아 민주파에 붙어 있다가 4월 16일과 5월 15일, 6월 봉기에서 그들에게 버림받았다. 민주파는 부르주아 공화파의 어깨에 기댔다가 밀려났고, 부르주아 공화파는 질서당의 어깨에 기댔다가 떨어졌다. 질서당은 군대의 어깨에 올라탔지만 어느 날 아침 그 어깨가 총검으로 바뀌어 있었다. 각 당파가 뒤에서 앞으로 밀고 나가는 당파를 걷어차고 뒤로 잡아끄는 당파에 몸을 기대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연쇄다.
2장은 이 하강의 첫 단계에서 부르주아 공화파와 질서당이 저마다 제 무덤을 판 과정을 그린다. 부르주아 공화파의 단독 지배는 1848년 6월 24일부터 12월 10일까지뿐이었고, 그 내용은 공화국 헌법의 기초와 파리 계엄으로 요약된다. 헌법은 자유를 선언하면서 그 하나하나를 “법률이 정하는 조건에 따라” 누리게 했고, 그 부속 법률은 뒷날 질서당이 만들어 자유를 부르주아지만 걸림 없이 누리게 묶었다. 헌법이 의사당 안에서 만들어지는 동안 바깥에서는 카베냐크가 계엄을 유지했다. 마르크스는 이 헌법이 뒷날 총검으로 없어진다면, 태어날 때도 인민을 겨눈 총검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 12월 선거에서 진 공화파의 헌법 제정 의회는 부속 법률을 다 만든 뒤 해산하기로 했지만, 질서당은 1849년 1월 6일 라토 의원을 시켜 부속 법률을 그만두고 즉시 해산하자는 동의를 냈다. 1월 29일 의회가 해산을 결정하는 날, 샹가르니에의 군대가 의사당을 둘러쌌고 의회는 짧은 연장만 흥정한 채 굴복했다. 마르크스는 이날을 왕당파가 보나파르트와 함께 공화파 의회에 행한 1851년 12월 2일의 예행연습이라 불렀다. 그날 보나파르트는 튀일리궁 앞에서 군대의 사열을 받았다.
로마 원정은 이 연쇄의 결정적 고리였다.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 된 뒤 첫 각료회의는 의회 몰래, 거짓 구실로 예산을 얻어 로마 공화국을 칠 원정을 결정했다. 1849년 5월 8일 의회가 우디노 장군의 치비타베키아 점령을 두고 내각을 견책하자, 보나파르트는 그날 저녁 우디노의 무훈을 치하하는 편지를 공개해 의회와 맞선 군대의 보호자 행세를 했다. 3장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군의 로마 포격을 산악파를 의회에서 거리로 끌어내 스스로 의회 권력을 깨뜨리게 하려고 던진 미끼로 본다. 다른 인민의 자유에 무력을 쓰지 못하게 한 헌법 제5조와, 의회 동의 없는 전쟁을 금한 제54조를 근거로 르드뤼롤랭은 6월 11일 대통령과 각료의 탄핵안을 내고 무기를 들고서라도 헌법을 지키겠다고 했다. 탄핵안은 다음 날 부결되었고, 6월 13일의 봉기는 무기 없는 민주파 국민위병의 거리 행진에 그쳐 군대에 흩어졌다. 산악파 지도자들은 망명하거나 재판에 넘겨졌고 파리와 리옹은 다시 계엄 아래 놓였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끌어들이지도 못한 채 의회에서 무력을 운운한 소부르주아 민주파의 허세를 비웃는다. 1851년 12월 2일 질서당이 헌법을 지킬 장군으로 인민 앞에 내세운 사람이 바로 로마를 포격한 우디노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교황을 바티칸에 되앉힌 보나파르트는 사제들을 제 편으로 얻었다.
4장은 보나파르트가 의회의 손에서 행정 권력을 빼내는 과정을 따라간다. 1849년 11월 1일 그는 교서 한 장으로 바로-팔루 내각을 해임했다.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짜인 이 질서당 내각은 보나파르트가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의회 내각이었고, 그 해임으로 질서당은 의회 체제를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행정 권력의 지렛대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새 도풀 내각에는 총리가 없었고, 의회에서 이름 있는 인물은 재무장관이 된 금융가 풀드 하나뿐이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국채 시세는 보나파르트파의 주가와 함께 오르내렸고, 보나파르트는 카를리에를 파리 경찰청장에 앉혀 경찰도 손에 넣었다.
1850년 3월 10일 6월 13일 이후 투옥·망명으로 빈 의석을 채우는 보궐선거에서 파리는 사회민주파 후보만 뽑았고, 표를 가장 많이 몰아준 사람은 1848년 6월 봉기 가담자 드플로트였다. 파리의 군대도 보나파르트의 장관에 맞서 이 봉기 가담자에게 표를 던졌고, 지방에서도 산악파가 대체로 우세했다. 파리의 소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손잡고 6월 13일의 패배를 되갚은 것이다. 혁명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보나파르트는 1849년 1월 29일과 6월 13일처럼 질서당 뒤로 숨어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질서당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잡지 못하고, 부르주 고등법원에서 5월 15일과 6월 13일의 혁명가들을 기소했던 검사 바로슈를 도풀 내각에 들여보내는 데 그쳤다. 사회민주파도 승리를 스스로 무디게 했다. 파리와 스트라스부르에서 함께 당선된 비달이 스트라스부르를 택해 파리에 재선거를 남겼고, 4월 그 재선거에서는 감상적인 소설가 외젠 쉬가 뽑혔다. 마르크스의 말로 그들은 3월 10일을 만우절 장난으로 만들었다.
질서당 지도자 17명은 새 선거법을 만들었고, 5월 31일 통과된 이 법은 한 곳에 3년을 산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고 노동자는 그 거주를 고용주의 증명으로 입증하게 했다. 등록 유권자 1천만 명 가운데 적어도 3백만 명이 명부에서 지워졌다. 산악파는 대통령의 주머니에 항의문을 슬쩍 밀어 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선거법 뒤에는 새 언론법이 따라와 혁명적 신문을 완전히 억눌렀고, 그 홍수 뒤에 혁명의 가장 앞선 전초로 남은 것은 《나시오날》과 《라 프레스》라는 두 부르주아 신문이었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신문들이 그런 운명을 자초했다고 덧붙였다. 보통선거를 건드리면 본때를 보이겠다던 소부르주아 민주파는 1852년 5월 둘째 일요일에 모든 프랑스인이 한 손에 투표용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1850년은 호황이어서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일자리가 있었지만, 이 법은 그들을 정치 무대에서 쫓아내 2월 혁명 이전의 천민 처지로 되돌렸다.
계급과 그 대표자
질서당은 부르봉가를 받드는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가를 받드는 오를레앙파의 연합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가른 것이 백합 문장과 삼색기 같은 원칙이 아니라 대토지 소유와 자본이라는 두 가지 재산, 곧 물질적 존재 조건이었다고 보았다. 두 왕가는 서로를 배제했으므로, 의회 공화국은 두 분파가 함께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형태였다.
산악파, 곧 사회민주파는 소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었다. 민주주의자는 두 계급의 이해가 무뎌지는 과도기 계급을 대표하기에 자신이 계급 대립 위에 서 있다고 상상하고, 자신을 ‘인민’이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소부르주아의 대표자들이 모두 상점 주인이거나 상점 주인의 열렬한 옹호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들을 소부르주아의 대표자로 만드는 것은, 소부르주아가 생활에서 넘지 못하는 한계를 그들이 머릿속에서 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계급과 그 정치적·문필적 대표자의 관계에 대한 이 정식은 이 책을 정치 분석의 고전으로 만든 핵심 가운데 하나다.
부르주아지 역시 제 대표자와 갈라섰다. 의회 밖의 부르주아 대중은 사회적 권력을 온전히 지키려면 정치적 권력을 부숴야 한다고 고백했고, 1851년의 상업 불황과 개헌·연장·왕가 통합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의회 공화국을 향해 “끝없는 공포보다 공포스러운 끝”을 외쳤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1849년부터 보나파르트파 장군과 요원들이 파리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비밀 분대로 묶은 「12월 10일회」였다. 마르크스는 보나파르트를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우두머리로 그렸다.
군대: 국민위병의 해체에서 대역병의 군대까지
마르크스는 이 시기의 정치를 군대가 차츰 결정권을 쥐어 가는 과정으로도 읽었다. 그 눈금은 국민위병의 운명이었다. 1848년 6월에는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가 국민위병으로서 군대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를 쳤다. 1849년 6월 13일에는 부르주아지가 소부르주아의 국민위병을 군대가 흩어 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1851년 12월 2일에는 부르주아지의 국민위병 자체가 이미 사라져, 보나파르트는 해산 명령에 서명해 그 사실을 기록하기만 하면 되었다. 6월 13일 민주파 국민위병은 무기 없이 제복만 입고 군대 앞에 섰는데, 군대는 그 제복도 여느 모직 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주문은 풀렸다. 부르주아지는 군대에 맞설 마지막 무기를 제 손으로 부순 셈이었다.
질서당은 군대에 기대 의회를 지키려 했다. 파리 군대와 국민위병의 지휘권을 한 손에 쥔 샹가르니에 장군이 그 버팀목이었다. 보나파르트는 그 사이 장교와 병사를 직접 샀다. 1850년 엘리제궁에서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시가와 샴페인, 닭고기와 마늘 소시지를 대접했고, 10월 생모르와 사토리 열병식에서는 같은 일을 병사 대중에게 더 크게 벌였다. 1851년 1월 그가 샹가르니에를 해임하자 질서당은 군대와 국민위병에 대한 장악력을 잃었다. 마르크스의 말로 의회는 이제 내각도 군대도 인민도 여론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공업 지대의 부르주아 유권자들은 해임에 맞서 산악파와 손잡은 티에르 같은 제 대표자들을 오히려 질서에 대한 반역이라고 꾸짖었다.
7장에서 마르크스는 군대의 우위를 마지막이자 가장 높은 「나폴레옹적 관념」으로 꼽는다. 나폴레옹 1세 때 군대는 분할지 농민의 명예였다. 제복은 그들의 국가 의상이었고 전쟁은 그들의 시였으며, 애국심은 소유 감각의 이상화된 형태였다. 그러나 이제 농민이 제 땅을 지켜야 할 적은 코사크가 아니라 집달리와 세리이고, 분할지는 조국이 아니라 저당 등기부 속에 있다. 군대도 더는 농민 청년의 꽃이 아니라 농민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늪지 꽃이다. 두 번째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의 대역이듯 군대도 대부분 돈을 받고 남 대신 입대한 대역병으로 채워졌고, 농민을 산양처럼 몰아대는 헌병 노릇으로 무공을 세운다. 보나파르트는 위스키와 소시지로 이 술 취한 병사들을 샀고, 그들에게 계속 소시지를 던져 주어야 했다.
국가 기구와 분할지 농민
7장에서 마르크스는 50만 명의 관료와 또 50만 명의 군대를 거느린 행정 권력을 프랑스 사회의 몸을 옭아매고 모든 숨구멍을 막는 기생체라 불렀다. 이 기구는 절대왕정 때 봉건제의 해체와 함께 생겨났고, 대혁명과 나폴레옹, 왕정복고와 7월 왕정, 의회 공화국을 거치며 오히려 강해졌다. “모든 변혁은 이 기구를 부수는 대신 완성했다.” 앞선 체제에서 국가는 지배 계급의 도구였지만, 두 번째 보나파르트 아래서 비로소 국가는 완전히 자립한 듯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르봉가가 대토지 소유의 왕조, 오를레앙가가 화폐의 왕조였듯 보나파르트가는 프랑스 사회의 가장 큰 계급인 분할지 농민의 왕조였다. 분할지 농민은 서로 비슷한 조건에서 살지만 생산 방식이 그들을 서로 고립시킨다. 자루 속 감자들이 감자 한 자루를 이루듯 같은 크기의 단위들을 더한 것일 뿐이어서, 그들은 한 계급이면서 계급이 아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해서든 국민공회를 통해서든 제 이름으로 계급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해 대표되어야 한다. 그 대표자는 그들 위에 선 주인, 다른 계급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 위에서 비와 햇빛을 내려 주는 무제한의 통치 권력으로 나타나야 했다.
마르크스는 이 기반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고 보았다. 나폴레옹 1세 때 분할지는 봉건 영주에 맞선 부르주아 사회의 방벽이었지만, 19세기에는 도시 고리대금업자가 봉건 영주를, 저당이 봉건 부담을 대신했다. 농민의 이해는 이제 부르주아지, 곧 자본과 맞서고, 그래서 농민은 부르주아 질서의 전복을 과제로 삼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타고난 동맹자이자 지도자를 찾게 된다.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의 가부장적 은인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한 계급에 주려면 다른 계급에서 빼앗아야 한다. 책은 황제의 망토가 마침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리면 방돔 광장 기둥 꼭대기의 나폴레옹 청동상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은 실제로 이 기둥을 쓰러뜨렸다.
이 책이 남긴 것
1871년 4월 12일 마르크스는 쿠겔만에게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보면, 프랑스에서 일어날 혁명의 다음 시도는 관료·군사 기구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이라고 썼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파리 코뮌이 바로 그 시도였다. 레닌은 1917년 『국가와 혁명』 2장에 「1848~1851년의 경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7장의 국가 기구 대목을 인용해, 국가를 넘겨받지 말고 부숴야 한다는 결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1869년 서문에서 독일에 퍼진 ‘카이사르주의’라는 말을 거부했다. 고대 로마의 계급투쟁은 자유로운 부자와 자유로운 빈민이라는 특권 소수 안의 싸움이었고 생산하는 노예 대중은 그 수동적 받침대였으니, 이 피상적 유비는 핵심을 놓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그린 계급 균형과 국가의 자립화라는 문제는 이후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한 갈래가 되었다. 아우구스트 탈하이머는 이 개념으로 파시즘을, 트로츠키는 파시즘에 앞선 위기 정부와 스탈린 체제를 분석했고,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서로를 파괴할 만큼 균형을 이룬 세력들 사이에서 나오는 카이사르주의를 논하며 나폴레옹 3세를 예로 들었다. 정치학자 로버트 터커는 이 분석을 파시즘에 관한 훗날 마르크스주의 사유의 서곡이라 불렀다. 개념의 이후 전개는 보나파르티즘 항목에서 다룬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Marx,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1869): weekly articles for Weydemeyer down to mid-February 1852; Die Revolution, spring 1852, first number consists of the Eighteenth Brumaire; a few hundred copies reached Germany; material does not extend beyond February 1852; Hugo makes the individual great, Proudhon's construction becomes an apologia, "I, on the contrary, demonstrate how the class struggle in France created circumstances and relationships that made it possible for a grotesque mediocrity to play a hero's part"; only printer's errors corrected; the Vendome Column prophecy; rejection of the phrase "Caesarism"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 "Hegel remarks somewhere that all great world-historic facts and personages appear, so to speak, twice. He forgot to add: the first time as tragedy, the second time as farce"; Caussidiere for Danton, Louis Blanc for Robespierre; "The tradition of all dead generations weighs like a nightmare on the brains of the living"; Roman costume of 1789-1814; "The revolution of the nineteenth century must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proletarian revolutions criticise themselves constantly; "a nation of thirty-six millions ... three knights of industry"; three main periods: February period (24 February-4 May 1848), Constituent National Assembly (to 28 May 1849), Legislative National Assembly (to 2 December 1851)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II: Legitimists and Orleanists, "two great interests into which the bourgeoisie is split - landed property and capital"; the descending line: the proletarian party leans on the petty-bourgeois democrats, they on the bourgeois republicans, they on the party of Order, which "throws itself on the shoulders of armed force"; "The revolution thus moves in a descending line"; the Social-Democratic party as coalition of petty bourgeois and workers; democratic representatives need not be shopkeepers: "What makes them representatives of the petty bourgeoisie is the fact that in their minds they do not get beyond the limits which the latter do not get beyond in life"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V: the bourgeoisie confesses "that to preserve its social power intact its political power must be broken"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V: the Society of December 10 (from 1849), the lumpenproletariat of Paris organised into secret sections, "la boheme"; Bonaparte "constitutes himself chief of the lumpenproletariat"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VI: the parliamentary republic as "the unavoidable condition of their common rule" for Legitimists and Orleanists; the bourgeois cry in 1851: "Rather an end with terror than terror without end!"; the recapitulation of the periods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VII: "a host of officials numbering half a million, besides an army of another half million"; "All revolutions perfected this machine instead of breaking it"; "Only under the second Bonaparte does the state seem to have made itself completely independent"; Bonaparte represented the small-holding peasants, "potatoes in a sack form a sack of potatoes"; "They cannot represent themselves, they must be represented"; "rain and sunshine from above"; mortgage and usurer; the peasants "find their natural ally and leader in the urban proletariat"; "Bonaparte would like to appear as the patriarchal benefactor of all classes. But he cannot give to one without taking from another"
- de.wikipedia.org written mid-December 1851 to 25 March 1852; first published 18 May 1852 as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Napoleon in the first issue of Weydemeyer's Die Revolution, New York, 500 copies; revised second edition Hamburg 1869 with Marx's preface; third edition Hamburg 1885
- 위키백과 (영문) Robert C. Tucker: a "prologue to later Marxist thought on the nature and meaning of fascism"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Marx to Kugelmann, 12 April 1871: "If you look up the last chapter of my Eighteenth Brumaire, you will find that I declare that the next attempt of the French Revolution will be no longer, as before, to transfer the bureaucratic-military machine from one hand to another, but to smash it"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 The State and Revolution, chapter II "The Experience of 1848-51", quoting the seventh chapter of the Eighteenth Brumaire on the state machine
-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세창출판사, 2025 — 1장 첫머리 인용문의 한국어 번역(헤겔 언급,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신을 묻어 버리도록」)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I: "The exclusive rule of the bourgeois republicans lasted only from June 24 to December 10, 1848. It is summed up in the drafting of a republican constitution and in the state of siege of Paris"; organic laws "brought into being by the friends of order"; protected by bayonets in its mother's womb; Rateau motion of 6 January 1849; 29 January 1849, building occupied by Changarnier's troops, "What was January 29 but the coup d'etat of December 2, 1851"; expedition to Rome resolved at the first council of ministers behind the back of the National Assembly; 8 May 1849 censure over Civitavecchia and Bonaparte's letter to Oudinot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II on the Roman expedition and 13 June 1849: bombardment of Rome as bait; Article 5 and Article 54; Ledru-Rollin's impeachment bill of 11 June, rejected 12 June; procession of unarmed democratic National Guards; state of siege in Paris and Lyon; Oudinot offered as general for the constitution on 2 December 1851; "After having reinstalled the High Priest Samuel in the Vatican"; the National Guard in June 1848, 13 June 1849 and 2 December 1851, "Bonaparte merely registered this fact"; uniform "a piece of woolen cloth like any other"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V: cigars and champagne, cold poultry and garlic sausage at the Elysee, the St. Maur review (3 October) and Satory parade (10 October 1850); Changarnier's dismissal, the party of Order "having now indeed lost its grip on the army and the National Guard", "Without the ministry, without the army, without the people, without public opinion"; the Society of December 10 (from 1849), the lumpenproletariat of Paris organised into secret sections, "la boheme"; Bonaparte "constitutes himself chief of the lumpenproletariat"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V: dismissal of the Barrot-Falloux Ministry on 1 November 1849, "the first and last parliamentary ministry", the party of Order lost "the lever of executive power"; Hautpoul Ministry without prime minister, Fould at Finance, fonds rising and falling with Bonapartist stocks, Carlier police prefect; by-elections of 10 March 1850, Paris elected only social-democratic candidates, most votes for the June insurgent De Flotte, the army voted for him, Montagnards ahead in the departments; Baroche, prosecutor at Bourges, added to the ministry; Vidal chose Strasbourg; April election of Eugene Sue, "an April Fool of March 10"; seventeen burgraves, law of 31 May 1850, three years residence, employer certificate, at least three million struck off of ten million; "second Sunday in May, 1852"; proletariat thrown back into the position of pariahs; the bourgeoisie confesses "that to preserve its social power intact its political power must be broken"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hapter IV: dismissal of the Barrot-Falloux Ministry on 1 November 1849, "the first and last parliamentary ministry", the party of Order lost "the lever of executive power"; Hautpoul Ministry without prime minister, Fould at Finance, fonds rising and falling with Bonapartist stocks, Carlier police prefect; by-elections of 10 March 1850, Paris elected only social-democratic candidates, most votes for the June insurgent De Flotte, the army voted for him, Montagnards ahead in the departments; Baroche, prosecutor at Bourges, added to the ministry; Vidal chose Strasbourg; April election of Eugene Sue, "an April Fool of March 10"; seventeen burgraves, law of 31 May 1850, "The Montagne contented itself with smuggling a protest into the President's pocket", new press law by which the revolutionary newspaper press was entirely suppressed, The National and La Presse left as the most advanced outposts, three years residence, employer certificate, at least three million struck off of ten million; "second Sunday in May, 1852"; proletariat thrown back into the position of pariahs; the bourgeoisie confesses "that to preserve its social power intact its political power must be brok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