совет · 1905–1991

소비에트

Soviet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하며, 지역이 아니라 생산 단위에서 노동자·병사·농민이 선출한 대의원들로 구성된 대표 기관이다. 대의원은 유권자에게 직접 알려진 인물로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은 1905년 혁명기에 파업 투쟁을 이끌 기관으로 소비에트를 세웠다. 1917년 2월 혁명 뒤에는 임시정부와 맞서는 이중권력의 한 축이 되었고, 10월 혁명 이후에는 국가 권력의 공식적 기초로 제도화되었다. 생산 단위 대표와 소환권에 기초한 이 형식은 의회제와 구별되는 대안적 대의제로 제시되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단일 후보 선거와 당의 사실상의 통제 속에 형식화되었고 1991년 12월 소련 해체와 함께 연방 차원의 소비에트 체계가 끝났다.

상세

개념과 어원

소비에트(совет)는 평의회·회의·조언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같은 말이 1810~1917년의 국가평의회처럼 혁명 이전의 국가 기관 명칭으로도 쓰였고, 소련 해체 뒤에도 연방평의회 등에 남았다. 이 말은 벨라루스의 뱌르호우니 사베트, 아제르바이잔의 알리 소베티, 우즈베키스탄의 올리 소베티, 몰도바의 소비에툴 수프렘처럼 여러 공화국에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쓰였으며, 우크라이나의 라다, 폴란드의 라다처럼 각 언어의 대응어로 옮겨지기도 했다.

영어권 서술은 소비에트를 러시아 혁명의 맥락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노동자 평의회로 정의하며, 러시아어 자료는 일정 기간 주민이 선출하는 인민 권력의 대표 기관으로 규정한다. 소비에트는 특정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노동자 평의회 일반을 가리킬 수도 있고, 러시아 밖의 소비에트가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따를 필요도 없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의 평의회로 이후 노동자 평의회의 모델로 취급되었고, 엥겔스는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사례로 불렀다.

역사

1905년 혁명기 최초의 소비에트들이 세워졌다. 공식 소련 사학은 1905년 5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첫 노동자 평의회가 결성되었다고 본다. 소비에트는 산업 중심지에서 주로 공장 단위로 조직되어, 정부 감독 아래 있던 노조에서 벗어나 파업을 이끌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자율 기관으로 기능했고 1905년 혁명이 진압된 뒤 사라졌다.

'최초의 소비에트' 귀속은 논쟁적이다. 1905년 3월 8일 알라파옙스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만들어졌으나 단일 기업에 한정되었고, 더 널리 알려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대의원 평의회(Совет уполномоченных)는 1905년 5월 15일 파업 중인 방직 노동자들이 조직해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파업위원회로 활동했다. 이 평의회는 노동자 500명당 1명꼴로 여성 25명을 포함한 대의원 151명을 선출했고, 5월 15일(28일)부터 7월 19일(8월 1일)까지 회의를 열어 노동자 민병대와 여러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러시아 최초의 소비에트'로 간주된다. 다만 해당 자료 자체는 이 회의가 새로운 국가 관리 형태가 아니었다는 견해와, 1920~30년대에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최초의 소비에트'로 불리게 되었다는 지적도 함께 전한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기원에 대해서도 다른 기록이 있다. 아나키스트 볼린은 회고록에서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시작을 목격했다고 주장했고, 초대 의장 흐루스탈료프노사르는 자신과 노동자 집단이 1905년 1월 9일 결성된 파업위원회에서 노동자 대표 평의회를 만들었다고 공개적으로 단언했다. 소련 시기 회고록 작가 스베르치코프는 이를 날조라고 반박했고, 밀류코프의 회고록도 평의회의 기원을 1905년 초와 쉬들롭스키 위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 13일 대의원 40명으로 구성되었고, 11월 중순에는 147개 기업, 34개 작업장, 16개 노조에서 나온 562명의 대의원을 포괄했다. 흐루스탈료프노사르가 체포된 뒤 1905년 11월 26일 트로츠키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첫 러시아 혁명 기간에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가 62개 생겨났고, 그중 47개는 볼셰비키가 이끌거나 영향을 미쳤으며 10개는 멘셰비키가 주도했다. 1905년 12월 모스크바 봉기에서 볼셰비키가 이끄는 모스크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주변 소비에트는 무장 봉기를 지도하며 혁명 권력 기관으로 활동했다. 1905~07년 혁명이 패배한 뒤 정부는 소비에트를 해산하고 대의원들을 탄압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전국에서 생겨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에 이중권력 상태가 형성되었다. 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노동자 대표와 병사 대표)는 1917년 3월 1일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합쳐져 수도에서 임시정부와 나란히, 그리고 그에 맞서 권력을 행사했다. 1917년 3월까지 도시와 주에 약 600개의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있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부처와 나란히 위원회들을 두고 8시간 노동제 법령 같은 조치를 내렸으며, 1917년 3월 8일(21일) 만들어진 연락위원회를 통해 정부에 대한 통제를 행사했다.

초기 소비에트에서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소수였다. 회원 4천 명의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가장 중요했다. 전쟁이 이어지면서 볼셰비키가 성장해 '소비에트에 전권을'을 요구했고, 7월 사건으로 이중권력이 끝나면서 당은 이 구호를 철회했다. 코르닐로프 사건 뒤 소비에트가 '볼셰비키화'되자 9월에 구호가 복원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0월 직전에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가 1,429개 있었다.

10월 혁명으로 이중권력이 끝나고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국가 최고 통치 기관임을 선포했다. 제2차 전러시아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1917년 10월 25일(11월 7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려 권력을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에 넘겼다. 레닌은 1918년에 소비에트 권력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된 형태'라고 규정했고, 부르주아지의 선거권 박탈은 계획된 특징이 아니라 투쟁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8년 7월 10일 제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채택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은 소비에트를 공화국의 정치적 기초로 삼고 이전의 혼란한 소비에트 체계를 통일했다. 선거는 간접·불평등하게 남아 도시 노동자에게 유리했고, 제65조는 이윤을 위해 고용노동을 쓰는 자, 비근로 소득생활자, 사영 상인과 중개인, 수도자와 성직자, 경찰·헌병 관리와 로마노프 왕조 구성원, 정신질환자, 이득을 위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선거권과 피선거권에서 배제했다. 헌법 채택 나흘 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모든 수준에서 비볼셰비키 대의원의 위임장을 무효화했다.

소비에트가 처음에는 여러 정당에 열려 있던 곳도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당파 분파를 통해 지도권 독점을 주장했다. 1918년 6월 14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우익 사회혁명당원을 소비에트에서 배제했고, 좌익 사회혁명당 봉기 뒤에는 그 당도 금지되어 배제되었다. 이후 소비에트는 중앙위원회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실상 순수 볼셰비키 기구가 되었다. 비볼셰비키 다수를 선출한 소비에트는 해산되었고(1918년 이젭스크 등), 오데사에서는 볼셰비키가 혁명위원회 기구로 선출된 대의원을 축출했다. 1920년대 초 서시베리아 봉기 등 농민 저항은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를 구호로 삼아 비당파 소비에트를 세웠고,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참가자들은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에 권력을', 새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요구했다. 봉기를 진압한 뒤 볼셰비키는 신경제정책을 도입했다.

1922년 12월 30일 소련이 성립되면서 소련 소비에트 대회가 최고 국가권력 기관이 되었다. 도시 거주자 2만 5천 명당 1명, 주 대회를 통한 농민 12만 5천 명당 1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어 1년에 한 번 회의를 열었고, 회의 사이에는 연방평의회와 민족평의회 두 개의 동등한 회의체를 둔 중앙집행위원회(상설기구 21명)가 통치하며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의원은 선거 집회에서 공산당 후보와 무소속 후보 가운데 공개 투표로 직접 선출되었고, 1918년 헌법과 유사한 선거권 박탈자(리셴치) 범주가 있었다. 박탈자 비율은 1923년 도시 유권자의 8.2%에서 1934년 2.4%로 줄었다.

1936년 헌법은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를 최고소비에트로 대체했다. 1936년 11~12월의 제8차 임시 소비에트 대회가 헌법을 비준하고 스스로 영구 해산하여 새로 세워진 최고소비에트에 권한을 넘겼고, 최고소비에트는 1938년 1월 첫 회의를 열었다. 1936년과 1977년 헌법 아래에서 최고소비에트는 광범한 입법 권한을 가진 최고 국가권력 기관으로 규정되었으나, 실제로는 당과 행정 기관이 이미 내린 결정을 대개 만장일치로 추인하는 형식적 의회로 기능했다. 대의원은 당이 통제하는 조직이 준비한 단일 후보 명부로 선출되었고, 1938년부터 1990년 2월까지 최고소비에트가 통과시킨 법률은 80건으로 전체 입법 행위의 1%에 못 미쳤다.

1930년대 중반에는 소비에트가 비경쟁적으로, 즉 자리마다 후보 한 명으로 구성되었고 후보 명부는 해당 공산당 기관(구역위원회, 주위원회, 공화국 중앙위원회)이 작성했으며 당 기관이 동의하지 않은 후보는 선거에 나올 수 없었다. 러시아어 자료는 이를 앞선 선출 원리와의 결정적 단절로 서술하고, 민주화와 경쟁 선거(1987년 소비에트의 5%만을 대상으로 한 다수 후보 실험까지 포함)는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돌아왔다고 본다.

소비에트가 실제 권력을 갖지 못하고 명목상의 장식으로 남아 노멘클라투라의 무통제 지배를 가렸다는 연구도 있다. 보슬렌스키에 따르면 결정은 소비에트가 아니라 중앙위원회에서 구역위원회에 이르는 당 위원회에서 내려졌고, 파블류첸코프는 1918년 5월 13일과 27일의 법령이 지방 식량 기관을 지방 소비에트가 아니라 식량 인민위원에게 직접 예속시킨 봄 1918년을 이데올로기적 장식으로의 전환점으로 본다. 반대로 서스턴, 가와모토 가즈코 같은 역사가들은 지방 소비에트가 의미 있는 참여 요소를 유지했다고 주장하며, 참여적 성격이 살아남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1989년 3월 26일 소련 인민대표대회에 대한 경쟁 선거가 치러졌고 대회는 1989년 5월 28일 개회했다. 1990년에는 경쟁 선거로 지방 소비에트가 새로 구성되어 대의원 활동이 늘었다. 1991년 9월 제5차 인민대표대회 임시회의는 구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인민대표대회와 소련 최고소비에트를 해산했으며 최고소비에트 의장직을 폐지했다. 최고소비에트의 마지막 회기는 1991년 12월이었고, 공화국 소비에트는 1992년 1월 2일부터 활동을 중지했으며 소련 최고소비에트는 1991년 12월 26일 독립국가연합 창설과 관련해 소련의 존속이 끝났다는 선언을 채택했다.

1991년 12월 8일 벨로베자 협정이 조인되어 12월 12일 러시아 최고소비에트가 비준했다. 공화국 소비에트는 1991년 12월 24일 결의 140-N으로 1992년 1월 2일부터 소련 최고소비에트와 그 기관의 활동을 중지시켰고, 고르바초프는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으며, 12월 26일 소련 최고소비에트는 소련의 소멸에 관한 선언 제142-N을 채택했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체계는 1993년 가을 옐친 대통령에 의해 최종적으로 청산되었고(최고소비에트와 인민대표대회 해산, 이어 모든 수준의 소비에트 해산), 이 말은 연방평의회나 지방 '대의원 소비에트' 같은 기구에 남았다.

사례

이 말은 1917년 이후 구 러시아 제국 밖으로 퍼졌다. 아일랜드에서는 1919년 리머릭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가 생겼고, 1920년 《워커스 드레드노트》에 '영국 소비에트를 위한 헌법'이 실렸다. 폴란드 노동자 평의회(라디 로보트니체)는 1905~07년 회의 폴란드에서 나타났고, 1918~19년에는 100개가 넘는 평의회가 약 50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을 포괄했다가 1919년 7월 해체되었으며 1944~47년, 1956년, 1970년, 1980~81년에 다시 나타났다. 1919년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은 1919년 5월 1일 독일 군대와 자유군단에 의해 전복되었고 수백 명이 죽었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1931년 선포되어 1937년 9월 22일 해산되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1918~21년 마흐노주의 '자유 소비에트'가 있었다.

비교할 만한 노동자 평의회는 1905년 회의 폴란드와 라트비아, 1918~19년 독일 혁명기(노동자·병사 평의회), 1919~23년 아일랜드 혁명기, 1936년 스페인 혁명, 1956년 헝가리, 1967년 1월 상하이 인민공사, 1968년 5월 프랑스, 1978~79년 이란(쇼라), 1980~81년 폴란드, 2012년 이후 로자바에서 나타났다.

구별

소비에트는 고전적 의회와 여러 지점에서 구별되었다. 유권자의 지시가 대의원을 구속하고 정기적 보고와 소환권이 따르는 명령적 위임, 입법과 집행 기능을 결합하고 삼권분립을 거부하는 '일하는 기업체' 성격, 대의원이 생산 노동자로 남는 비전문직 구성(대의원 지위는 직업이 아니며 생산에서 떨어져 나온 유급 관료는 평균 임금 이상을 받지 못했다), 민주적 중앙집권제, 공공 조직과 발의 집단의 네트워크, 다단계 구성(1936년 헌법으로 폐지)과 1918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이 그것이다.

연방 및 자치 공화국의 최고소비에트는 상설기구를 두되 단원제였고, 소련 해체 뒤 계승 의회들은 역사적 명칭으로 돌아가거나 양원제 의회를 채택했다. 우크라이나의 베르호브나 라다, 카자흐스탄의 조하르기 케네스, 폴란드의 세임, 동독의 국가평의회처럼 소비에트에 해당하는 말이 각 공화국의 언어로 옮겨지기도 했다.

1917년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가 노동자 평의회에 얼마나 충실했는지에는 논쟁이 있다. 평의회가 영구적인 자치 정치 형식이 될 의도가 아니었고 그래서 공산당에 의해 밀려났다는 지적, 평의회 민주주의를 무력화하고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만들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비판, 레닌과 트로츠키가 대중의 정치 교육을 소홀히 하고 전체 인민의 대의 기관을 평의회로 대체했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 망명한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 관료제를 규탄하며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함께 전해진다. 한편 서스턴은 소비에트 체계의 지방 수준이 상당히 참여적으로 남았다고 본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rticle on soviets as workers' councils: etymology, origins in 1905, role in 1917, institutional structure within USSR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language article on Soviets: emergence in Ivanovo-Voznesensk May 1905, 62 soviets during 1905 revolution, development into state form, hollowing out in 1930s
  3. en.internationalism.org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analysis drawing on Oskar Anweiler's classic study: spontaneous origins of soviets in 1905 strike struggles, Ivanovo-Voznesensk as first city-wide soviet, relationship to party organ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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