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전간기 민주주의와 군부 권위주의의 충돌 속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 망명정부의 수상 겸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방 연합국에 폴란드의 국가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폴란드 포로 석방과 군대 창설의 길을 열었지만, 카틴 학살 조사 요구 뒤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다.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망명정부의 외교적 영향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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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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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오데사 대학에서 에스에르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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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NATO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1919년 9월 22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녹스 장군이 내게 왔다. 처칠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지원하라고 훈령했다.」 붕괴 직전의 정권 내막을 기록한 총리의 목소리다.
제정 러시아의 카데트당 소속 두마 의원으로, 1918년 11월 옴스크에서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차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붕괴 직전의 백색 정부를 이끌었고, 정권의 유일한 충성파 정치인으로서 최후까지 콜차크 곁에 남았다. 1920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정치중앙에 넘겨졌고, 2월 7일 새벽 레닌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1941년 4월 6일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자 그는 영국군 철수를 요구한 독일의 통첩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는 법률가·경제학자이자 은행가로, 국가 재정과 농업 신용 제도의 조직에 관여했다. 그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권위주의 정권에서 관료와 장관을 지냈지만, 정당 정치인이라기보다 행정가로 총리가 되었다. 1941년 1월 메탁사스 사망 뒤 영국군 지원을 받아들이며 독일의 침공에 맞선 정부를 이끌었고, 그 선택은 그리스의 전쟁 수행을 연합국과 결부시켰다. 독일군이 진격하던 4월 18일 자살로 생을 마쳤다.
파벨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내전 말기의 크론시타트 소비에트를 이끈 볼셰비키 지방 간부였다. 그는 전쟁공산주의와 당의 통치에 반발한 수병·노동자들의 요구가 공개 충돌로 번지는 현장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대표했다. 1921년 3월 반란 세력은 그를 니콜라이 쿠즈민과 함께 체포했고, 이 사건은 혁명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 독점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