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반 공중전에서 베르시닌은 항공자산을 분산 배속하던 기존 교리를 깨고,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켰다. 에이스 포크리시킨은 베르시닌이 주재한 전투기 조종사 전군 회의를 '전쟁 2년 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두 차례(1946~1949, 1957~1969) 역임하며 항공전력을 제트기와 핵무장 체제로 재편한 군사 지도자다. 빈농 출신으로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보병 장교로 내전을 겪었고, 1930년 항공대로 강제 전속된 후 급속히 성장했다. 독소전쟁에서는 제4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과 핵폭격기 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했으나, 1949년 돌연 강등되어 바쿠 방공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귀해 1969년까지 재임하며 전략항공 역량을 완성했다.
「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구데리안은 므첸스크에서 카투코프의 T-34에 막힌 후 이렇게 썼다. "그들(러시아군)은 이미 무언가 배웠다."
미하일 카투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제1근위전차군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싸운 붉은 군대 최고의 기갑 지휘관이다.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그의 제4전차여단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저지하며 붉은 군대 최초로 근위 칭호를 획득했다. 쿠르스크에서는 전차 매복과 역습으로 독일 남부 돌파를 소모시켰고, 이후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기갑 선봉으로 활약했다. 전후 독일 주둔 소련군 기갑부대 사령관과 국방부 감찰총감을 지냈으며, 1959년 기갑군 원수와 두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2년 12월~1943년 2월, 노비코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독일군 집단에 대한 공중봉쇄를 조직해 수송기 보급로를 끊었다.
코스트로마 시골의 농민 아들로 태어나 교사로 일하다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30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33년 공군으로 전환해 겨울전쟁에 참전했고 1942년 4월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전선 공군을 항공군으로 바꾸고 동종 항공군단을 세워 대규모 항공작전을 가능케 했으며, 스탈린그라드 공중봉쇄와 쿠르스크·쾨니히스베르크·베를린 작전을 조율했고 1943년 항공원수, 1944년 항공 총원수를 처음 받았다.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야간 심문 끝에 자백을 강요당하고 티크시에서 복역, 1952년 석방과 1953년 복권 뒤 장거리항공대를 지휘했다. 1956년부터 레닌그라드 고등민간항공학교장을 지내고 1966년 중풍으로 은퇴했다.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41년 8월 28일 밤, 탈린을 탈출한 발트 함대가 기뢰밭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트리부츠는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라 명했다. 그는 밤새 함교를 떠나지 않았다.
소련 해군에서 가장 오래 발트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1939–1947). 핀란드 겨울전쟁, 탈린 철수,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4–45년 발트 공세까지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함대를 지휘한 유일한 함대 사령관이었다. 독소전 직전 전 함대에 전투태세를 발령해 기습 피해를 최소화했고,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는 함포와 해군 항공대로 육상 작전을 지원했다. 1941년 탈린 전환에서 지휘 과실로 상당한 손실을 냈다는 비판도 있지만, 1943년 제독으로 진급해 전후까지 함대를 이끌었다. 퇴역 후 200여 편의 해군사 저술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늘날 태평양 함대 구축함 '트리부츠 제독'에 그 이름이 살아 있다.
주코프 회고: “스탈린이 나를 기계로 불러 레닌그라드 근처 군대를 지휘할 좋은 사령관을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페듀닌스키 장군의 이름을 댔다 …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군사 지도자이며, 뛰어난 조직가이고, 부대 지휘의 명수다.”
우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내전을 치렀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제24차량화연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후방을 돌파해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 공적으로 주코프의 눈에 띄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으로서 도시 방어의 결정적 시기를 지휘했고, 이후 제2충격군 사령관으로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주공을 위장 전환하는 작전으로 1944년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에는 트란스코카서스 및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며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사망 시까지 소련 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복무했다.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올봄 소련에 대한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소문과 문서들은 영국, 어쩌면 독일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허위정보로 간주해야 한다." 94일 뒤 바르바로사가 시작되었다.
농민 출신 정치지도원으로 내전에 참전한 후 11년간 군 정치기관에서 복무하다 프룬제 사관학교를 마치고 지휘관으로 전환했다. 1940년 7월 GRU 정보총국장에 올랐으나, 1941년 봄 독일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영미의 도발적 허위정보'라고 보고해 바르바로사의 전략적 기습을 막지 못했다. 독소전에서 모스크바 반격의 10군과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두 차례 대공세로 적 25개 사단을 격멸했으나 그해 3월 하리코프 상실로 전선에서 물러났다. 전후 인사총국장을 거쳐 1958년 글라프PUR 총정치국장으로 흐루쇼프 시기 당의 군대 통제를 담당했고 1961년 소련원수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8–21적군 자원입대, '붉은 독수리' 연대에서 내전 참전, 정치지도원
1921–31군 정치기관에서 선전·선동 부서장 역임, KUVNAS 졸업(1929)
1931–3895연대장 → 61사단장 → 8기계화여단장 → 45기계화군단장
1938–39벨로루시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빈니차 군집단·6군 사령관
1939–406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 참전
1940–41부참모총장 겸 GRU 정보총국장 — 바르바로사 직전의 첩보 평가
1941–42소련 군사사절단장(영·미) → 1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1942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1근위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1942–43재임명된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 하리코프 공세, 이후 해임
1942년 9월 12일, 전임자가 도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본 자리.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추이코프는 답했다. "맹세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거나, 지켜내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폐허의 제62군 사령관. 독일군과 수류탄 투척 거리에 지휘소를 두는 「포옹 전술」로 도시를 버텼고, 자신의 군대가 계획의 미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부대는 근위 제8군이 되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 유언대로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언덕, 자기 병사들 곁에 묻혔다.
1917년 7월 4일, 16세의 쿠로치킨은 크셰신스카야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경비했고, 훗날 그 연설이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스몰렌스크주 고르네보 마을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제과점 심부름꾼과 기관차 수리공장에서 일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무장대에서 볼셰비키 집회를 경비하다 10월에 적위대에 가담했다. 1918년 8월 적군에 입대해 기병 과정을 마치고 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으며, 1921년에는 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941년 7월 제20군 사령관으로 레펠 반격과 스몰렌크 포위전을 겪고 포위된 제16·제20군의 주력 돌파를 조직했으며, 이후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데먄스크 포위전을 지휘했다. 1944년부터 제60군을 이끌어 1945년 1월 27일 제322소총사단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진입했고, 1989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 무선조종 지뢰와 철도 사보타주로 파르티잔전을 설계한 사보타주 기술자
1941년 11월 14일 새벽 3시 30분, 스타리노프는 보로네시에서 암호화된 무선 신호를 보냈다. 300km 떨어진 하리코프에서 독일군 사령부 건물이 R-10 지뢰와 함께 폭발해 게오르크 폰 브라운 장군이 매몰됐다.
일찍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을 거친 뒤 철도부대 공병장교로 복무하며 기폭 기술을 독학했고,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군관구에서 파르티잔·사보타주 교관으로 활동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의 사보타주 작전을 조직했고,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무선조종 지뢰 R-10으로 하리코프 독일군 사령부를 원격 폭파했으며 중앙유격대본부의 사보타주 담당으로서 '레일 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의 기술적 토대를 설계했다. 전후에도 KGB 교육기관에서 1987년까지 사보타주 전술을 가르친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로, 그의 반열차 지뢰(PMS)와 훈련 체계는 베트남에서 라틴아메리카까지 20세기 비정규전의 유산이 되었다.
1942년 7월 보로네시가 위태롭던 작전회의에서 바투틴이 일어났다. "스탈린 동지! 저를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스탈린이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훗날 바투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행동은 아마도 주변에 더 적임자가 보이지 않을 때 즉시 중대 지휘를 맡겠다고 결심한 병장의 결정을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소련의 육군대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라누스' 작전을 입안하고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를 지휘했으며, 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해방했다. 1944년 2월 UPA 매복으로 중상, 4월 사망.
1942년 6월, 제2충격군이 포위되었을 때 사령부는 비행기로 탈출할 것을 제안했다. 블라소프는 거부하고 부하들과 함께 독일군 점령지에 숨었다가 열흘 뒤 농부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붉은 군대 중장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20군을 지휘해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불렸으나, 1942년 류반 작전에서 포로가 된 후 나치 독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해방군(ROA)과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의 지도자로서 반스탈린주의 민주 러시아를 표방했고, 1944년 프라하 선언을 통해 민족자결과 기본적 자유를 내건 강령을 발표했다. 나치는 그를 선전 도구로만 이용했으나, 전쟁 말기 ROA 제1사단은 프라하 봉기에 가담해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비밀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역사학과 기억 정치에서 첨예한 논쟁 대상이다.
상세 이력 보기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백군·마흐노 세력과 교전
1930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1938–39중국 파견, 장제스 군사고문으로 복무
1940–41제99소총사단장(최우수사단 선정), 이어 제4기계화군단장
1941제37군 사령관(키예프), 제20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솔네치노고르스크 탈환
니콜라이 펙렌코는 러시아 내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소련의 기갑 지휘관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초기에 제57특별소총군단을 지휘했으나, 5월 전투의 실패 뒤 6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를 교체했다. 이후에도 기계화군단과 전차군단, 전차병과 기계화부대의 편성·훈련을 맡으며 전쟁 수행 체계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1942년 11월 로콥소프스키가 전했다: "당신의 성 '지도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꾸길 바란다." 유대인 비하 표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철자 하나를 바꾸자 스탈린은 "아주 좋다"고 결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세력과 싸웠다.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6군 사령관으로 북쪽 방어를 지휘하며 독일군 측면 공격을 좌절시켰고, 이 공로로 부대는 제5근위군으로 개칭되었다. 쿠르스크의 프로호롭카 전차전, 우크라이나 해방, 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제5근위군을 지휘하며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역을 관통했고, 1945년 4월 엘베 강에서 미 제1군과 조우했다. 전후 지상군 제1부사령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중앙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1955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9–22붉은군대 입대, 제46소총사단·제1기병군에서 내전 참전 —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토벌, 중상
1943년 2월 스탈린 앞에서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그에게 첫 개편 전차군을 맡기며 "당신이 직접 증명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농촌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이자 기갑군 총원수로 올라선 전차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구원을 막은 코텔니코보 전투와 역사상 최대 전차전인 프로호롭카에서 제5근위전차군을 지휘했다. 프로호롭카의 막대한 손실은 평생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반격은 쿠르크 남부 방면 독일군 진격을 결정적으로 멈춰 세웠다. 1943년 초 스탈린에게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전환하자고 직접 설득해 전선의 주 타격 수단으로 재편시켰고, 자신이 첫 편제의 사령관이 되었다. 코르순-셰우첸콥스키 포위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민스크 해방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기갑군사학교장과 국방차관보로 소련 전차 교리와 장교 교육에 헌신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부상, 적기훈장 수훈
1924–28제11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6–37극동 특별붉은기군 사령부 제1부장, 제63연대장
1937–39스탈린 기갑·차량화군사학교 전술교관, 당에서 잠시 제명 후 복권
1940소련-핀란드 전쟁 전차대대장, 제35경전차여단 참모장
1941.5–9제3기계화군단 참모장, 개전 직후 포위망 탈출
1941.9–1942.4제8전차여단(후 제3근위전차여단)장, 모스크바 공세
1942.4–12제7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1942.12–1943.2제3근위전차군단장, 코텔니코보에서 만슈타인 구원 차단
1943.2–1944.8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프로호롭카, 드네프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바그라티온, 민스크·빌뉴스 해방
참모부에 거의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최전선에서 보냈다. — 시테멘코 육군대장이 '전진 장군!'이라 부르며 회고한 렐류셴코의 지휘 방식
2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육군대장으로,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을 저지하며 모스크바 남쪽 접근로를 봉쇄한 것이 그의 군사적 유산의 정점이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제30군을 지휘하여 클린을 탈환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제3근위군으로 포위망 외곽을 형성했으며, 이후 제4전차군(후에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서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을 연속으로 수행했다. 전후에는 자바이칼 및 우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군사과학 후보논문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1918–1921붉은 파르티잔으로 참전, 이후 제1기병군 소속 제21기병연대에서 복무, 남북전쟁 전역 참전
1925–1933기병연대 정치지도원·군정위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1933)
1933–1939전차중대장, 기계화여단 작전과장, 훈련전차대대장을 거쳐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1939–1940제39독립전차여단장으로 겨울전쟁에 참전, 만네르헤임선 돌파 공훈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1차 수훈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제4방면군 총지휘로 장궈타오의 분열을 겪고, 1979년 국방부장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원수
1990년 6월 결핵이 재발해 입원했고 9월 21일 89세로 사망했다. 유언은 시신 인사도 추도회도 없이, 유골을 대별산·대파산·태행산·하서회랑에 뿌리라는 것이었다. 화장한 유골은 네 곳에 나뉘어 뿌려졌다.
산시 출신 황푸 1기생으로 광저우 봉기 뒤 어위완 소비에트에서 제4방면군 총지휘가 되었고, 대장정 중 장궈타오의 남하 결정에 따르다 1936년 서로군이 하서회랑에서 궤멸하는 참패를 겪었다. 항일전쟁기 129사단 부사단장, 국공내전기 화베이 군구 부사령관으로 타이위안을 점령했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2월 역류」 뒤 한직에 있다가 1978년 복귀해 국방부장으로 1979년 중월전쟁을 지휘했다.
1936년 12월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고, 그 대가로 반세기 넘게 연금 생활을 했다.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로 1928년 아버지가 일본군에 폭살되자 동북을 물려받았고, 그해 말 난징 국민정부에 귀순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근거지를 잃은 뒤 공산당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1936년 12월 시안에서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감금해 내전 중지와 항일을 요구했다. 사건은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풀렸지만 그는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돌아가 이후 반세기 넘게 연금되었다. 1990년대 풀려나 하와이에서 100세로 사망했다.
야코프 스무시케비치는 스페인과 할힌골에서 소련의 공중전 경험을 축적한 군사 지도자이자 전쟁 직전 붉은군 공군을 재편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일본군에 맞선 항공작전을 지휘해 제공권을 회복했고, 귀환 뒤 붉은군 공군 수장이 되어 겨울전쟁의 교훈과 조종사 훈련·신형 장비의 부족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 직전 날조된 군사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폭발이 가라앉은 뒤 부분적으로 녹아내린 금성훈장, 어깨 견장 한 짝, 폭발 순간에 멈춘 손목시계만이 남았다.
1902년 11월 9일(구력 10월 27일) 러시아 제국 탐보프현 보리스оглеб스크에서 태어나 1960년 10월 24일 바이코누르에서 사망했다. 출신 배경은 사료마다 달라 귀족 집안, 노동자 집안, 상인 점원 집안으로 갈리며, 아버지는 1907년에 사망했다. 1920년 붉은군대에 입대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고 1924년 당에 입당했으며, 스페인과 핀란드와 독소전쟁에서 포병 부대를 지휘했다. 1950~1952년과 1953~1955년 두 차례 포병총사령관을 지냈고 그 사이인 1952~1953년에는 무장 담당 전쟁차관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