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1905년 오데사, 전함 포툠킨의 반란 소식이 도시를 뒤흔들자 구세프는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자.
1896년 레닌의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창립에 참여한 구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수도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프룬제와 함께 '군사야당'을 이론적으로 주도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섰다. 정치총국장으로 적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완성했으며, 이후 중앙통제위원회와 코민테른에서 스탈린 노선의 핵심적 제도 구축자로 활동했다.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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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주여, 군대를 구원하소서" — 1928년 4월 브뤼셀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남긴 마지막 말.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광산 기사로 출발했으나, 러일전쟁에 지원 입대하며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카우셴 전투의 기병 돌격을 이끌어 전쟁 최초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917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0년 데니킨의 뒤를 이어 남러시아 백군 총사령관이 되어 '러시아군'으로 재편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적군에 패배한 뒤 14만 5천 명 이상을 크림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대규모 대피 작전을 조직했으며,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남았다.
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아타만이자 백군 중장. 1917년 11월 소비에트 권력을 불인정한 최초의 군사 지도자로서 오렌부르크-타슈켄트 철도를 차단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20개월간 갈라놓았다. 콜차크 휘하에서 오렌부르크 독립군을 지휘했고, 패배 후 '기아 행군'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1921년 체카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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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에 항의해 퇴장하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선언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879년 11월 7일(구력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주 야노프카의 유대인 농업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2월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를 조인한 뒤 1918~1925년 군사·해군 인민위원으로 적군을 건설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를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밀려 1927년 출당, 1928년 알마아타 유형, 1929년 국외 추방, 1932년 시민권 박탈을 겪었다. 망명지에서 《배반당한 혁명》(1936)으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NKVD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짜르 장교에서 붉은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점령하고 브레스트 조약에 반대해 봉기한 좌파 에스에르
키예프 점령 후 레닌에게: "포병대에 고층 건물과 부유한 궁전, 교회와 사제들을 향해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복무한 농민 출신 장교로,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에 합류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방어를 지휘했다. 1918년 초 키예프를 점령해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루마니아 전선에서 베사라비아 방어 작전을 이끌며 적군의 주요 군사 지휘관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18년 7월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해 봉기, '독일과의 전쟁 재개'를 선언했다가 심비르스크에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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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까지 진급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 방어 지휘
1917.12–1918.2남부혁명전선 참모장, 키예프 점령 작전 지휘
1918.2–3루마니아 전선 사령관, 베사라비아 방어 및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지휘
1918.6–7동부전선 사령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봉기 후 심비르스크에서 사살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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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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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