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그 결과는 제6군의 포위와 파괴로 이어졌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세습으로 가졌고, 1913년 뮌헨으로 옮겨 스스로 무국적으로 신고했다.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1921년 당수가 되었고,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복역 중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에서 해제되어 1932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까지 무국적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를 구축했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를 겸했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 학살과 민간인·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오랜 세월 전 우리는 운명과의 약속을 맺었고, 이제 그 서약을 실현할 시간이 왔습니다. 한밤중, 세계가 잠든 그 시간에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깨어날 것입니다.」(1947년 8월 14일 독립 전야 연설)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1947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에 취임하여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계획경제를 인도 국가의 기초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개척했다. 1954년 티토와의 공동성명에서 '비동맹'을 국제정치 용어로 처음 규정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과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비동맹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 중·인도 국경전쟁의 패배로 국내적 위신이 흔들렸으나, 사후에도 인도 공화국의 설계자로 추앙받았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페틀류라 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부상당한 채 탈출하여 붉은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은신했다.
야코프 드롭니스는 1906년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유대인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다섯 차례 중앙위원을 지냈다. 내전기에는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맞서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했으며, 폴타바·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가담했고 1927년 제명되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의 피고로 사형당했다.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를 '영국의 요원'으로 여긴 자하리아디스는 1946년 '어떤 경우에도 시안토스를 내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해외 탈출을 미뤘다.
담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지 시안토스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점령기에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로 이송되자 당의 직무대행 서기를 맡아 KKE와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4년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을 지휘했고, 무장부대 해산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협상 노선을 택했다. 1945년 바르키자 협정에서 EAM 대표단을 이끌고 서명했지만, 협정의 무장해제 조항은 뒤이은 백색 테러와 새로운 내전 국면 속에서 EAM의 정치적 패배로 남았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 출신으로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접고 아인슈타인·플랑크 아래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1차대전을 겪으며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라 통일전선을 배격하며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였으나, 스탈린과 텔만에게 밀려나 1926년 제명된 뒤로는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길을 헤맨 이단아였다.
상세 이력 보기
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2폴란드 사회당–좌파(PPS-레비차) 입당
1918폴란드 공산당(KPRP/KPP) 입당, 활동 중단 후 1921년부터 다시 당원으로 활동
1925–1930코민테른 비밀학교(1925–26)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1927년 11월부터 1930년까지) 수학, 코민테른 교관
1933–1938사나치아 정권에 체포(1933년 12월), 7년형 선고; 1938년 12월 사면
1943폴란드 노동자당(PPR) 서기국 합류(11월 23일), 국가민족평의회(KRN) 의장 선출(12월 31일)
1947–1952폴란드 공화국 대통령(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선출로 종료)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장, 1954년 3월 17일부터 제1서기
1952–1954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1952년 11월 20일–1954년 3월 18일)
1916–1921루블린 식료품 협동조합 간부, 노동자 협동조합 연합 좌파 조직; 1921년 바르샤바 주택협동조합 공동창립
1927–1933폴란드 공산당 중앙기술부 책임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에서 코민테른 특수임무 수행
1944–1949PPR 정치국 비공개 위원(1944년 8월부터); 1949년 2월 24일부터 당 중앙위 정치국 안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탄압기구 감독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라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진영에서 축출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지도력에 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충돌은 이데올로기 분쟁인 동시에 발칸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계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마리야 사이에서 쿠므로베츠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는 아버지와 이웃들처럼 크로아티아인으로 정체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로 복무하다 부상당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1920년 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1년 파르티잔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민족해방투쟁을 지도했고, 전후에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끌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지목된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