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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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1913–16체포 및 유형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1939년 11월 26일 저녁, 그는 몰로토프의 마이닐라 포격 항의각서를 받고 즉시 헬싱키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아르노 위리외코스키넨은 독립 핀란드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정치 업무와 대외 협상을 맡았다. 모스크바 공사로서 그는 1939년 11월 마이닐라 포격을 둘러싼 몰로토프의 항의와 핀란드의 회답을 전달하며 전쟁 직전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지만, 협상으로 안보 갈등을 봉합하려던 외교는 겨울전쟁을 막지 못했다.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고 노동자와 독립운동가의 무료 변론을 도맡은 대표적 항일변호사였다. 1927년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와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을 거쳐 월북하여 조선 근대 민족운동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가교가 되었다.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사령부와 떠돌던 소문의 영향으로 자신을 겨냥한 예상 밖의 행동을 두려워했다」, 훗날 필로넨코가 조사위원회에 남긴 증언이다.
막심 필로넨코는 변호사 출신의 에스에르 정치인으로, 1917년 최고사령부 정부 위원으로서 코르닐로프·사빈코프와 함께 사형제 부활과 군율 강화를 밀어붙인 인물이다. 코르닐로프 봉기 국면에서는 케렌스키 편에 섰고, 10월 이후 반볼셰비키 지하활동에 참여했다가 망명해 변호사와 법학 교수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 노동운동과 시장 이론을 함께 탐구했다.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과 시베리아 유형을 거쳐 1917년에는 멘셰비키로 전향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을 모색했다. 북부전선 위원으로서 6월 공세 준비에 관여했지만, 병사들의 전쟁 피로와 명령 거부를 직접 마주하며 혁명적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10월 이후 망명한 그는 국제 노동·경제 연구자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길을 주장했다.
1947년 2월 베네치아에서 재판이 시작되어 5월 6일 아르데아티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선동 혐의로 유죄, 사형 선고를 받았고, 7월 4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10월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루프트바페 건설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로, 폴란드·프랑스·소련 침공과 지중해 전구를 지휘했고 1941년 11월부터 남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맡아 구스타프선과 고딕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동시에 그의 지휘 아래 민간인 보복이 자행되었고, 1944년 6월 반당파 지령으로 보복을 승인했으며 아르데아티나 동굴 학살을 포함해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베네치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석방되었으나, 자신의 전쟁 수행을 철회하지 않았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이자 장군으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함께 비밀 군사조직과 폴란드 군대를 건설했다. 그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군 조직과 전투를 지휘하고 전간기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국내 저항운동과 런던 망명정부의 군사 지도자로서 소련과 서방 연합국의 정책이 폴란드를 종속시킬 위험을 경고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지원을 요구하며 연합국을 공개 비판한 뒤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전후 캐나다에서 망명 폴란드 사회의 원로로 활동했다.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메헬렌 문서를 검토한 뒤,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경보를 방어 준비로 전환했다.
라울 판 오버스트라텐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벨기에 장군으로, 군사사와 작전 분석에도 힘을 쏟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레오폴드 3세의 군사고문으로서 메헬렌에서 확보한 독일 공격계획을 검토하고 경보를 현실적인 방어 조치로 바꾸는 데 관여했다. 그의 신중함은 정보의 진위를 따지면서도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실무적 판단으로 나타났다. 전후에는 왕실과 군의 기록을 바탕으로 벨기에의 전쟁정책을 저술했다.
파벨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내전 말기의 크론시타트 소비에트를 이끈 볼셰비키 지방 간부였다. 그는 전쟁공산주의와 당의 통치에 반발한 수병·노동자들의 요구가 공개 충돌로 번지는 현장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대표했다. 1921년 3월 반란 세력은 그를 니콜라이 쿠즈민과 함께 체포했고, 이 사건은 혁명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 독점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42년 12월, 호트의 제4기갑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헤르만 호트는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국방군의 기갑 지휘관으로 성장한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빠른 기동작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블라우 작전의 남부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구출 시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절멸전으로 이해했고 정치위원 명령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를 전달·집행했다. 전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조기 석방되었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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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나의 이름은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있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의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믿은 백군 장군. 시베리아에서 그리고리 세묘노프 휘하의 아시아 기병사단을 이끌며 붉은 군대와 싸우다 1920년 몽골로 넘어갔다. 1921년 2월 중국 점령군을 몰아내고 복드 칸의 신정 군주제를 복원시켜 '다르한 호쇼이 친 왕'의 작위를 받았으나, 유대인과 볼셰비키 동조자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공포 통치를 펼쳤다. 같은 해 8월 몽골인 부대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넘겨진 뒤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6시간의 재판 끝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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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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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체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체코 민족운동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연결한 장교였다. 1918년 그는 펜자에 집결한 약 8,000명의 최대 군단 집단을 지휘했고, 사마라 점령을 통해 코무치 정부가 세워질 조건을 열었다. 그의 행보는 군단 지휘관들이 볼셰비키 군대와의 충돌에서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 준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군 참모와 항공 행정을 맡으며 군단의 전투 경험을 국가 군사체계 건설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