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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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 의무병 복무 후 빌나 군사학교 속성과정 수료, 소위로 남서전선 전투. 결핵으로 후송.
1918.3–8고향 스놉스크에서 빨치산 부대 조직, 독일 점령군과 교전. 가을 볼셰비키 입당.
1918.9–11보훈 연대 창설.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 제2여단장으로 체르니히우·키예프·파스티우 탈환.
1919.2키예프 사령관 임명 (2월 5일–13일). 명예 금무기 수여.
1919.3–8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 지토미르·빈니차·즈메린카 탈환, 폴란드군 및 페틀류라군 방어전.
"경호대는 피곤하다" 한마디로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아나키스트 수병: 24세에 전사한 혁명의 아이콘
1918년 1월 5일 새벽 4시, 타브리다궁전. "경호대는 피곤하다. 회의를 중지하고 전원 퇴장하라." 이 한마디로 13시간 동안 이어진 제헌의회는 영원히 문을 닫았다.
발트함대 수병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 1917년 10월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했고, 1918년 1월 5일 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으로서 "경호대는 피곤하다"는 한마디로 러시아 제헌의회를 해산시켜 혁명의 신화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기관총 사수와 장갑열차 지휘관으로 돈·크라스노프·데니킨 부대와 싸웠으며,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19년 7월 데니킨군 포격에 전사한 뒤 소련 문화에서 노래·시·영화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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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제2발트함대 승무원으로 징집, 기관학교 입학
1916체포 우려로 탈영, 흑해 상선에서 가명으로 화부·기관조수로 근무
1917.5제1차 발트함대 대회(중앙발트) 대표 선출
1917.6두르노보 저택 방어전 가담, 체포되어 14년형 선고; 9월 크레스티 교도소 탈옥
1917.10해군혁명위원회 위원, 겨울궁전 습격 및 아드미랄테이스트보 점령 지휘
1918.1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 — 제헌의회 해산
1918.3비르줄라 요새화 지구 사령관, 오스트리아-독일군과 교전
1918.6–9키크비제 사단 예하 제1옐란스키 보병연대장, 차리친 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1918.10–1919.4오데사 지하활동(빅토르스 가명), 봉기 후 상선노조 위원장
1919.5–7장갑열차 후댜코프호 지휘관;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데니킨 전선 전투 중 포격 전사
세르게이 예세닌은 농민 가정에서 자라 러시아 농촌의 기억과 구전적 이미지에 현대적 서정성을 부여한 시인이었다. 그는 10월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지지했지만, 산업화와 국가 권력이 자신이 꿈꾼 사회주의와 어긋난다고 느끼며 점차 환멸을 드러냈다. 이미지니즘을 이끈 대표적 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혁명기의 해방감과 도시화가 낳은 상실을 함께 기록했다. 1925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은 신경제정책기 문화의 어두운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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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조국의 배신자가 침략자들의 손에 내 유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 산디노 선언(1927)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미군 점령에 맞서 '국가주권 수호군(EDSN)'을 이끌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소모사가 이끄는 국가경비대에 암살되었고, 그의 유산은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이어져 1979년 소모사 독재를 전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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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미군 개입과 셀레돈 장군 전사 목격 — 반제의식 형성
1921–1926멕시코 망명 — 스탠더드오일 정유공장 노동, 멕시코 혁명 사상 접촉
1926–1927니카라과 귀국 — 금광 노동자 중심 의용군 조직, 입헌전쟁 참전
1927.7에스피노네그로 협정 거부 — 산 알비노 선언으로 대미 게릴라전 개시
1927–1933국가주권 수호군(EDSN) 총사령관 — 미 해병대 상대 6년 게릴라전 지휘
1920년 8월 7일 밤, 에이데만이 이끄는 우안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카홉카 교두보를 점령했고, 페레코프에서 60km 떨어진 이 교두보는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창끝이 되었다.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와 브란겔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내전 영웅이었다.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의장으로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으나,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인으로 총살되고 1957년 복권됐다.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와 베리아를 비판했다고 여러 회고록이 전하는데, 해당 회의는 속기록이 남지 않아 발언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 10월 20일(구력)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유대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영어권 연구는 11월 1일생으로만 적는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툴라에서 「콤무나르」를 창간하고 시·주 소비에트와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에 파견되었다.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1925년에는 쿨라크의 협동조합 가입을 막는 데 반대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를 비판하고 베리아 관련 자료를 제출한 뒤 6월 25일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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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7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1915년 모스크바대 의대 입학(2개 학년 수료), 툴라 볼셰비키 서기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림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를 추진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1934.2–1937.3), 소련 위생총감(1935년부터),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실신과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수사관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소비에트 권력의 자비를 받을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는 소련의 군사정보 지휘관으로, 1935년 4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노농적군 정보총국(GRU)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조카이자 외교관 바츨라프 보롭스키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내전기 기병 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대 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을 수행했고, GRU 수장 재임 중에는 스페인 내전 초기 소련의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감독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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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1934–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1936.9내무인민위원
1936–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스테판 로베츠키는 폴란드의 직업군인이자 독일 점령기 국내군의 초대 총사령관으로, 분산된 저항 조직을 통합된 지하군으로 묶은 인물이다. 그는 독일군의 패퇴와 소련군의 진입이라는 상반된 조건 속에서 봉기를 구상했고, 1942년 국내군 창설 뒤 전면 봉기 계획을 발전시켰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된 뒤 독일의 반소 협력 제안을 거부했으며, 바르샤바 봉기 직후 작센하우젠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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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제5 보병연대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1919–1920폴란드군 참모장교로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
1923–1926군사교육과학연구소 학술부장, 군사 주간지 《프셰글롱트 보이코비》 창간·편집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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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1941년 11월, 독일군이 점령한 얄타에서 붉은 공군 대령 정복 차림으로 독일 사령부에 모습을 드러내 볼셰비키와 싸우겠다고 말했다.
소련 공군 대령 출신으로, 1941년 독일군 점령 하의 얄타에서 투항하여 대소련 협력 진영으로 전향했다. 블라소프 휘하 러시아 해방군(ROA) 공군을 조직하고 KONR 공군 사령관(소장)으로서 약 5천 명 규모의 항공전력을 편성했으나, 실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종전을 맞았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고문당했으나 자백하지 않고 석방된 경험이 그를 반볼셰비키로 돌아서게 한 결정적 계기였으며, 수감 경험을 담은 『GPU 컨베이어』를 출간해 독일의 선전물로 활용되기도 했다. 전후 미군에 의해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6년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1953년 7월 21일 증인 신문에서 그는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린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9월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가 1923년 베리야에게 발탁되었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