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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을 20년간 통치한 스탈린 시대의 당 서기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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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푸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58 ○ 자연사

세미나리 출신 교관에서 13군을 유럽 중부까지 이끈 육군대장

"겉으로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결단력을 발휘하고 확고한 손으로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령관이었다." — 이반 코네프 원수

제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고 내전에서는 여단·사단 참모장을 지낸 니콜라이 푸호프는, 전간기 대부분을 군사학교 교관으로 보내 현장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독소전을 맞았다. 1942년 1월 13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쿠르스크 북측면에서 모델의 9군을 6일간 저지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에서 세 개 전선군 중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체르니고프를 해방하여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까지 13군을 이끌며 중부 유럽을 관통했고, 13군은 최고사령관 명령에 26회 거명되었다. 전후에는 오데사·북캅카스·서시베리아·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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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러시아 제국군 준사관, 북부전선에서 독가스 피해
  • 1918–23적군 입대, 남부전선·카렐리야·폴란드 전선에서 여단·사단 참모장
  • 1924–30제34소총연대장, 비스트렐 과정 수료
  • 1930–41비스트렐 교관 → 기계화군사아카데미 교관 → 하리코프 기갑학교장 → 군사경제아카데미 교관
  • 1941–42제304소총사단장, 폴타바·돈바스 방어전
  • 1942–46제13군 사령관 — 쿠르스크·드네프르·우안우크라이나·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
  • 1946–48제8기계화군 사령관,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48–57오데사 → 북캅카스 → 서시베리아 →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57–58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

마르소 피베르

Marceau Pivert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95–1958 ○ 병사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쓴 사회당 좌파, 인민전선의 왼쪽 경계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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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14센에마른의 교사 집안,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됨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전쟁이 그를 반군국주의자로 만듦
  • 1924–1935SFIO 파리 연맹과 교원노조 운동
  • 1935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 결성
  • 1936.05「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고
  • 1936–1937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 책임
  • 1938제명 뒤 노동자농민사회당(PSOP) 창당
  • 1940–1946멕시코 망명
  • 1946–1958SFIO 복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서 활동
  • 1958.06파리에서 사망
군사·지휘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계 1895–1960 ○ 자연사

봉기의 동원과 개시를 맡은 국내군 지휘관

1944년 7월 말, 그는 지하 병력을 봉기에 맞춰 동원하고 8월 1일 개시 명령을 내렸다.

안토니 흐루시치엘은 폴란드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바르샤바 지구 국내군을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944년 7월 25일 봉기 승인을 받은 뒤 지하 병력의 동원을 준비하고 현지 개시 시기를 판단했으며, 8월 1일 봉기가 시작되자 수도의 무장 부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외부 지원과 독일군의 붕괴를 낙관한 그의 판단은 봉기의 장기화와 군사적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전후에는 포로수용소를 거쳐 서방으로 망명했고, 공산 당국의 시민권 박탈을 겪은 뒤 워싱턴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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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제90보병연대 장교
  • 1919–1927폴란드군 제14·42보병연대 지휘관
  • 1931–1937보병훈련소와 육군대학 전술 강사
  • 1938–1939폴란드군 제82 시베리아 소총연대장
  • 1940–1941무장투쟁연맹 제3부장, 바르샤바 지구 참모장
  • 1941–1944바르샤바 지구 국내군 사령관
  • 1944바르샤바 봉기 전군 지휘관, 바르샤바 국내군단 사령관
  • 1945–1948서방 폴란드군 참모·재향군인 조직 간부

루트 피셔

Ruth Fischer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독일 오스트리아 1895–1961 ○ 자연사

유럽 대중공산당의 첫 여성 지도자,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반스탈린주의 전향자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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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 1924–1925KPD 공동의장 — 제국의회·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 후보
  • 1924코민테른 제5차 대회 독일 대표단장 — 트로츠키 공개 비난
  • 1925–1926모스크바에 강제 체류 — 스탈린의 당 노선 복종 요구 거부
  • 1926KPD 제명 —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참여 후 곧 탈퇴
  • 1933–1941파리 망명 — 트로츠키와 협력, 국제그룹 결성
  • 1941–1955미국 망명 — 《스탈린과 독일 공산주의》(1948) 출간
  • 1947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형제 게르하르트·한스 아이슬러에게 불리한 증언
  • 1955–1961파리 귀환 — 《레닌에서 마오까지》(1956) 출간, 반공주의 철회

스탈린의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의 타협론을 묵살한 겨울전쟁 직전의 핀란드 외무장관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 파시키비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에르코가 남긴 훈시.

헬싱긴 사노마트를 북유럽 최대 일간지로 키운 언론 재벌로, 1938년 12월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소련과의 협상 전권을 장악했다. 모스크바로 떠나는 파시키비에게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고 훈시할 만큼 확신에 찬 강경파였으며, 스탈린의 영토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 원수의 타협 권고를 묵살했다. 그가 소유한 헬싱긴 사노마트가 여론을 타협 불가 방향으로 이끈 가운데 협상은 결렬되었고, 겨울전쟁 발발 후 파시키비는 이를 "에르코의 전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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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백위대 장교로 핀란드 내전 참전
  • 1919–1927외무부 파리·탈린·런던 근무
  • 1927–1938헬싱긴 사노마트 주필 겸 사노마 Oy CEO
  • 1932무임소장관 겸 내무차관 (수닐라 2차 내각)
  • 1933–1936국회의원 (국민진보당)
  • 1938–1939외무장관 (카얀데르 3차 내각)
  • 1939–1940주스톡홀름 대리공사
  • 1945–1965사노마 Oy CEO·이사회 의장

장팅푸

蒋廷黻
외교·국제활동 중국국민당 중화민국 중국 (한족) 1895–1965 ○ 자연사

소련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안보리 의장석의 국민당 외교관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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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난카이대학 역사학과 교수·주임
  • 1929–1935칭화대학 역사학과 주임·문학원장
  • 1935–1936국민정부 행정원 정무처장
  • 1936–1938주소 중화민국 대사
  • 1944–1946UNRRA 중국 대표·행정원 선후구제총서 서장
  • 1947–1962중화민국 상임 유엔대표·안보리 대표
  • 1961–1965주미 중화민국 대사 (유엔대표 겸임)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

Tadeusz Bór-Komorowski
군사·지휘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인 1895–1966 ○ 자연사

봉기의 명령과 항복을 함께 감당한 국내군 지휘관

1944년 10월 5일, 그는 항복한 국내군 부대의 선두에 서서 바르샤바를 떠나 포로가 되었다.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기 폴란드 국내군을 이끈 군인이자 런던 망명정부의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소련군의 진격 속에서 독립국가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표로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를 명령했지만, 서방 연합국의 제한된 지원과 소련군의 개입 부재 속에서 봉기는 고립되었다. 그는 1944년 10월 항복 협상을 승인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전후에는 망명정부 총리로서 패전국이 된 폴란드의 국가적 연속성을 지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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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 1918–1939폴란드군 기병 장교, 그루지옹츠 기병훈련센터 지휘관
  • 1939–1941크라쿠프 지역 지하조직과 서부지역 전구 지휘
  • 1941–1943국내군 부사령관
  • 1943–1944국내군 총사령관, 바르샤바 봉기 명령
  • 1944–1947폴란드군 총사령관, 독일군 포로 생활 포함
  • 1947–1949런던 폴란드 망명정부 총리
  • 1956–1966망명 폴란드 정치권의 삼인평의회 위원

이오나 티모페예비치 니키첸코

Иона Тимофеевич Никитченко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소련 측 판사, 대숙청 사형 선고자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니키첸코가 말했다. "만약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연만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1938–1949)이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1945–1946)로, 스탈린 시대 사법 살육의 핵심 집행자였다.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기 군사법정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울리히 휘하의 군사합의부 부의장으로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사형에 처한 재판을 비롯한 모스크바 쇼 재판을 주재했다. 런던 헌장의 세 명의 주요 기초자 중 한 명으로 국제군사재판의 법적 틀을 설계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폰 파펜·프리체의 무죄 판결에 유일한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1940년 당 통제위원회로부터 극동 지역 '컨베이어식' 재판의 절차적 위반으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1951년 퇴직 후 196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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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918노보체르카스크 적위대 분대장 대리
  • 1918–1920제4군 및 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 근무
  • 1920–1924세미레치예 군집단·투르케스탄 전선 군사법정 부의장 및 의장
  • 1924–1926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합의부 위원
  • 1926–1935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의장
  • 1935–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부의장
  • 1938–1949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3법무 소장 진급
  • 1945런던 회의 소련 대표 — 국제군사재판 헌장 기초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
  • 1949–1951소련 법무부 수상운수선박법정 관리국장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5–1970 ○ 자연사

소련 원수, 1940-1941년 국방인민위원

바실렙스키 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1월 7일 최고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를 묻자 긴 침묵이 흘렀고, 티모셴코가 일어나 논의된 모든 것을 받는다면 맡겠다고 답하며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895년 베사라비아 오르만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1914년 징집되었고, 내전에서 부됸니 기병군 계열로 성장했다. 1920~1930년대에 기병 군단과 군관구를 지휘했고 겨울전쟁에서 북서전선을 이끌며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재무장·기계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3일부터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11월 로스토프나도누를 되찾았다. 1942년 5월 하리코프 포위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전선 해임 뒤 1943년 3월까지 북서전선을 지휘했고, 이후 스타브카 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명예직을 맡았다. 197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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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기병 지휘관으로 내전 참전, 부됸니 기병군 계열에서 성장
  • 1939–1940겨울전쟁 후반 지휘로 명성을 얻고 원수로 승진
  • 1940–1941국방인민위원, 대숙청 뒤 붉은 군대 재건 시도
  • 1941–1942독소전 초기 여러 전선을 지휘하나 하리코프 패배 등 한계 노출
  • 1943–1945최고사령부 대표와 원로 지휘관 역할로 후퇴
  • 전후군 원로와 명예직으로 남음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Андреев

20년간 정치국에 앉아 있던 조직의 사나이, 가장 자주 지방을 숙청하러 파견된 서기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지하 볼셰비키들이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몰렌스크주 쿠즈네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두 해의 농촌 학교를 다녔고, 1908년 13세에 모스크바로 나가 식당의 접시닦이 소년으로 일했다. 노동자 야학과 프레치스텐스키 노동자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11~1912년 사회민주주의 서클에 들어갔으며, 1914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대숙청기에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숙청했다. 정치국 정위원으로 20년간 최고 지도부에 있었다. 1937~1962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고, 197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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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위원(1915–1916)
  •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 1938–46연방회의(소비에트) 의장
  • 1939–52당 통제위원회 의장, 예조프의 뒤를 이어 당 규율 총괄
  • 1943–46농업인민위원, 전후 복구 계획 참여
  • 1946–53소비에트 각료회의 부의장, 농업·콜호즈 담당
  • 1953–62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위원
  • 1957–62소중우호협회 회장

이고리 예브게니예비치 탐

Игорь Евгеньевич Тамм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5–1971 ○ 루게릭병

수소폭탄에서 토카막까지, 두 핵 시대의 이론물리학자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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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대학 졸업
  • 1924–1930모스크바대학 강사 → 이론물리학 주임
  • 1934–197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이론부장
  • 1949–1953아르자마스-16 열핵폭탄 이론그룹장
  • 1951사하로프와 토카막 개념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8노벨 물리학상 (체렌코프 복사 해명)
  • 1966스탈린 복권 반대 25인 성명 서명

이반 스테파노비치 유마셰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Юмаш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2 ○ 자연사

8월 폭풍 작전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스탈린에게 '장관감이 못 된다' 일갈당한 해군원수

1951년 7월 해군 주력군사평의회에서 스탈린은 유마셰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깨끗하고 용감하며 훌륭한 선원이지만, 장관이 아니다. 모든 일을 보좌관에게 맡기고 권력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짜르 해군의 수병으로 출발하여 소련 해군 최고위에 오른 제독. 1939년부터 태평양함대를 지휘하며 극동의 해군 기지를 정비했고, 1945년 8월 대일전에서 함대를 이끌어 남사할린·쿠릴 열도 상륙과 조선 북부 해안의 청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7년 쿠즈네초프의 뒤를 이어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1950년 해군장관에 올랐으나, 스탈린은 그가 실무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음주에 빠져 있다며 '사람은 좋지만 장관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1951년 경질했다. 이후 해군아카데미 교장으로 물러나 함대보다 교실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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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발트함대 크론슈타트 소년병학교 입교, 순양함 보가티리에서 복무
  • 1917레발 해안포대 수병위원회 위원장, 혁명 후 질병으로 제대
  • 1918–1920입당 및 붉은의용대 지휘관, 볼가-카스피 소함대에서 내전 참전
  • 1920–1924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후일 마라트) 포술지휘관·부함장
  • 1926–1937흑해함대: 구축함·순양함 지휘, 구축함대·순양함여단장
  • 1938.01–1939.03흑해함대 사령관
  • 1939.03–1947.01태평양함대 사령관, 대일전 승리로 소련영웅 칭호(1945)
  • 1947.01–1950.02군무차관 겸 해군총사령관
  • 1950.02–1951.07소련 해군장관
  • 1951–1957보로실로프 해군아카데미 교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Орлов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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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 1938.07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 1938–1953알렉산더 버그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잠적 생활
  • 1953『스탈린 범죄의 비사』 출간, 《라이프》에 연재
  • 1955–1957미국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에서 두 차례 증언
  • 1963『방첩·유격전 편람』 출간, 미시간 대학 법학대학원 연구원
  • 1973.03.25클리블랜드에서 사망

이반 세르게예비치 호흘로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Хох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5–197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직조공 출신 총리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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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40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 상임간부회 의장
  • 1940–1943러시아 공화국(RSF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41–1944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모스크바 방어·스몰렌스크 해방)
  • 1944–1945제3벨로루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동프로이센 공세)
  • 1945–1954첸트로소유스 이사회 의장
  • 1955–1965국가무역감독국장 (소련·RSFSR 무역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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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Бахт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대화와 카니발의 철학자, 30년의 망각을 뚫고 귀환하다

“예술 속에서 내가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에 나는 내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 「예술과 책임」(1919)

1920년대 '바흐친 서클'을 이끈 문학이론가로, 대화주의·폴리포니·카니발화 개념을 통해 언어와 문학 서사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30여 년의 망각 끝에 재발견되어 세계 인문학 전반을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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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네벨·비테프스크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바흐친 서클' 형성, 「예술과 책임」 발표
  • 1924–1928레닌그라드에서 연구활동,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1929) 집필
  • 1929–1934OGPU 체포 → 솔로프키 5년형 → 쿠스타나이(카자흐스탄) 유배, 회계원으로 생계
  • 1936–1961사란스크 교육대학 교수, 1946년 라블레 논문으로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63–1975재발견 —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개정판(1963)·『라블레』(1965) 출간, 1967년 복권, 1970년 작가동맹 가입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슈밀로프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남부를 6개월 사수한 64군 사령관

1943년 1월 31일, 베케톱카 64군 사령부. 슈밀로프 장군 앞에 파울루스 원수가 들어섰다. 독일군 원수가 적군에 항복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그를 생포한 것은 슈밀로프의 병사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친 베테랑 보병 장교. 1942년 8월 6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를 6개월간 책임졌다. 추이코프의 62군이 북부 시가전을 치르는 동안 64군은 헤르만 호트의 4기갑군을 저지하며 남부 방어선을 사수했고, 1943년 1월 부하들이 생포한 파울루스 원수를 직접 심문했다. 이후 제7근위군으로 개편된 부대를 이끌고 쿠르스크, 드네프르 도하, 부다페스트, 프라하 공세까지 진군했으며, 드네프르 도하의 공로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백해군관구와 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을 지냈고, 사후 마마예프 쿠르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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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추구예프 군사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붉은 군대·볼셰비키당 입대
  • 1918–20내전: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 1938–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
  • 1938–41제11소총군단장 (폴란드·핀란드 전쟁, 발트 방어)
  • 1942.1–8제21군 부사령관 (하리코프·돈 강)
  • 1942.8–1943.4제64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
  • 1943.4–1945.5제7근위군 사령관 (쿠르스크 → 프라하)
  • 1949–55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

파벨 오시포비치 수호이

Павел Осипович Сухой

Су(Sukhoi) 설계국의 창립자, Su-7, Su-24, Su-27의 아버지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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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 1949–1953OKB 해체; 투폴레프 설계국 부수석 설계자
  • 1953–1975OKB-51 재건 — Su-7, Su-9, Su-15, Su-17, Su-24, Su-27 착수
  • 1958–1974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7 ○ 자연사

천왕성 작전을 설계한 신학교 출신 참모

겨울전쟁 계획기 무렵 크렘린의 비공식 오찬에서 스탈린이 부모에 대해 물었다. 바실렙스키는 1938년 자서전에서 1924년부터 개인적·서신적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놀라며 당장 관계를 회복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1940년 회복되었다.

1895년 키네솀스키군 노바야 골치하에서 교회 선창자였다가 뒤에 사제가 된 아버지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코스트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9년 붉은 군대에 들어갔다. 1942년 6월 26일 참모총장이 되고 같은 해 10월 14일부터 국방인민위원을 겸해 스탈린그라드 반격을 조율했으며, 이후 쿠르스크·크림·벨라루스·발트 전역에서 스타프카 대표로 전선을 조율했다. 1943년 2월 16일 소련 원수가 되었다. 1945년 2월부터 4월까지 3벨라루스전선군을 지휘해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켰고, 그해 하반기에는 극동 소련군을 지휘했다. 전후 1946~1948년 참모총장, 1949~1953년 군사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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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41참모본부 작전부, 숙청으로 빈 자리를 채우며 초고속 승진
  • 1942–45참모총장, 천왕성 작전 공동 설계
  • 1945.8극동군 총사령관, 만주 전역
  • 1949–53군사장관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정부·행정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폐렴)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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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1962헝가리 개입 반대, 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루드비크 스보보다

Ludvík Svoboda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국민영웅에서 프라하의 봄의 뜻밖의 보루가 된 군인 대통령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두브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두브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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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즈보로프·바흐마치 전투, 시베리아 철수
  • 1921–1939체코슬로바키아군 장교; 뮌헨 위기 당시 대대장
  • 1939–1945폴란드·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 편성; 제1군단장으로 키예프·두클라 해방
  • 1945–1950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1950–1951부총리 겸 체육위원장으로 전보
  • 1951–1954숙청: 체포·수감 후 석방, 고향 협동조합에서 노동
  • 1954–1959클레멘트 고트발트 군사대학 총장
  • 1968–1975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프랑스 러시아 1895–1984 ○ 자연사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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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 1920.12투르 대회: 수바린 결의안 채택으로 프랑스 공산당(SFIC) 창당 — 명예의장 추대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상임위원회·서기국 위원 — 3대 기구 모두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 1924볼셰비키 13차 대회에서 트로츠키 옹호 — 코민테른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전격 제명
  • 1926크루프스카야→라코프스키 경로로 입수한 레닌의 유언장을 프랑스에서 최초 출판
  • 1927–1935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하며 트로츠키와 결별 — 민주공산주의서클(CCD) 조직
  • 1935《Staline, aperçu historique du bolchévisme》 출간 — 최초의 비판적 스탈린 평전
  • 1935사회사연구소(Institut d'Histoire Sociale) 설립 — 암스테르담 IISH의 프랑스 지부
  • 1939.5《피가로》 지면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100일 앞서 예측
  • 1940–1947비시 정권에 체포, 석방 후 미국 망명 — 1947년 귀환
  • 1947–1976《Est & Ouest》 및 《Le Contrat Social》 발행 — 냉전기 반스탈린 좌파 소비에트학 주도

윌리엄 K. 해리슨 주니어

William K. Harrison Jr.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5–1987 ○ 자연사

158차례 정전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 육군 중장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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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웨스트포인트 졸업, 기병 소위 임관
  • 1944제30보병사단 부사단장, 노르망디·벌지 전투 참전
  • 1946–1949연합국 최고사령부(GHQ) 배상과장, 일본 점령
  • 1950–1951제9보병사단장, 포트 딕스
  • 1951.12제8군 부사령관, 한국
  • 1952.05–1953.07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
  • 1953.09극동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54–1957카리브군 사령관, 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