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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03–1978 ○ 자연사

아르메니아 선율을 소비에트 교향악에 녹여낸 작곡가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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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 부의장
  • 1943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4아르메니아 SSR 국가 작곡
  • 1950그네신 음악교육원 교수
  • 1951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54소비에트 인민예술가
  • 1957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서기
  • 195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5소집)

너지 페렌츠

Nagy Ferenc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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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45소농당 공동 창립·초대 사무총장, 반전·반나치 활동
  • 1944.04–10게슈타포 투옥, 석방 뒤 화살십자 정권 하 은신
  • 1945–46복구장관·국회의장·국민최고회의 위원
  • 1946–47제2공화국 초대 총리: 포린트 도입, 파리 평화조약 서명
  • 1947.06스위스에서 사임 강요, 미국 망명
  • 1947–70망명 정치, 국제농민연합 부회장·회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레온티예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Леонтьев
학술·연구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3–1979 ○ 자연사

활동 이론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학자

인간은 인격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되어 간다.

소비에트 심리학자·철학자로, 레프 비고츠키·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문화역사적 심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인간 의식이 외부 세계와의 능동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활동 이론의 창시자다. 1930년대 하리코프 학파를 이끌며 아동 발달·기억·의지 연구를 주도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소비에트 심리학 제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저 『활동·의식·인격』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고전으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으며, 비고츠키 사후 그 이론을 독자적 방향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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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모스크바국립대 졸업, 심리학연구소 연구원
  • 1924–1930비고츠키·루리야와 공동 연구
  • 1931–1934하리코프 심리학파 지도
  • 1934–1941모스크바 복귀, 심리학연구소 연구 지속
  • 1941–1966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철학부 심리학과장
  • 1950–1957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심리학부 학술서기
  • 1959–1961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6–1979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

이사 알렉산드로비치 플리예프

Исса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ли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오세트인) 1903–1979 ○ 자연사

유일한 기병 출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쿠바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가다

1942년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 교두보. 플리예프의 기병군단 병사들이 돈 전선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쳤다. 독일 6군 33만 명을 가둔 포위환이 처음으로 닫힌 순간이었다.

북오세티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붉은군대에 입대한 후 소련 최고의 기병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독소전에서 도바토르 휘하 모스크바 방어전을 시작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그의 부대가 독일 6군 포위를 최초로 완성했고, 이후 기계화기병집단을 이끌며 우크라이나·벨라루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종심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만주에서는 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을 지휘해 관동군을 격파함으로써, 붉은군대에서 유일하게 기병 장군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아나디리 작전의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핵전쟁 직전의 긴장을 직접 관리했고, 같은 해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봉기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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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95기병사단 작전과장, 몽골 군사고문, 48기병연대장
  • 194150(후일 3근위)기병사단장 —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방어
  • 1942–433근위기병군단장 — 스탈린그라드, 독일 6군 포위 최초 완성
  • 1944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 — 오데사 해방 (1차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4–451근위기계화기병집단 — 바그라티온·데브레첸·부다페스트·프라하
  • 1945.8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 — 관동군 격파 (2차 영웅)
  • 1958–68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62–63아나디리 작전 —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Heinz Reinefarth
군사·지휘 소속 미확정 독일 독일계 1903–1979 ○ 자연사

바르샤바 봉기의 학살을 지휘한 SS 장군

라이네파르트는 바르샤바 봉기 진압 보고에서 “죽일 탄약보다 포로가 더 많다”고 썼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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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예나에서 법학을 마치고 법률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 1932나치당과 SS에 가입했다.
  • 1942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SS 민정 행정감찰관을 맡았다.
  • 1944바르테란트 SS·경찰고등지도자가 되었다.
  • 1944-08바르샤바 봉기 진압 전투단을 지휘했다.
  • 1945퀴스트린 요새 사령관을 맡았고 미군에 체포되었다.
  • 1951–1964베스터란트 시장을 지냈다.
  • 1962–1967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보리스 파블로비치 베셰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ещев

29년간 소련 철도를 이끈 최장수 장관

1930년대 후반, 젊은 엔지니어의 열차 편성 시간 단축 제안을 검토한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적었다: '베셰프 동지의 재능과 연구 자질을 키워줘야겠다.'

철도 전문 엔지니어 출신 최초의 소련 철도장관으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28년 7개월간 재임하며 소련 장관 중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세웠다.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하여 1950년까지 철도 화물 회전율을 전쟁 전보다 45% 끌어올렸고, 이후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전기 견인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주도해 철도 수송 비용을 약 3분의 1 절감했다. 재임 기간 소련 철도 화물 회전율은 8배 증가했고 2만 3,500km의 신규 간선이 건설되었으며, 56개로 분산된 철도국을 26개 대간선으로 통합했다. 바이칼-아무르 간선(BAM)의 설계·측량 작업을 재개시키고 철도 전산화와 고속 운행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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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레닌그라드 철도운수기사 연구소 졸업, 모스크바 호브리노 역 선임기사
  • 1937–1940오르조니키제 철도국장
  • 1940–1941옥탸브리스카야 철도국장
  • 1941–1942교통인민위원부 특별전권대표, 레닌그라드 전선 군수수송 및 대피 총괄
  • 1942–1944쿠이비셰프 철도국장
  • 1944–1946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운수관리국장
  • 1946–1948교통부 제1차관
  • 1948–1977소련 교통부 장관 (28년 7개월)

사르디온 니콜라예비치 나다라야

Сардион Николаевич Надарая

베리야의 경호를 맡은 내부감옥 책임자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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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 부책임자, 이어 책임자
  • 1939–1946베리야 개인 경호 부책임자
  • 1946–1952MGB 경호총국 장교
  • 1952–1953MGB 제41 경호대 부책임자
  • 1953베리야 개인 경호 책임자
  • 1953–1965체포, 십 년형 복역

유리 예브게니예비치 막사료프

Юрий Евгеньевич Максарёв

T-34 대량생산을 조직한 전차공업의 핵심 책임자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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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8키로프 공장: 직장·공장장·전차부장
  • 1938–1941하리코프 제183전차공장장
  • 1941–1942니즈니타길 제183공장장 (1942년 2월 해임)
  • 1942–1946우랄 제183전차공장장 (스탈린 기념)
  • 1946–1949소련 수송기계공업부 차관
  • 1950–1953소련 수송기계공업장관
  • 1957–1959소련 각료회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 1961–1978소련 각료회의 발명발견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정부·행정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사망, 사망일 이견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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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보니파티 미하일로비치 케드로프

Бонифатий Михайлович Кедров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고 '케드로프 삼각형'을 정립한 과학철학자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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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셰비키 입당; 『프라우다』 책임비서 M.I. 울리야노바 보좌, 체카 근무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과 졸업; 화학 준박사 (깁스 역설)
  • 1935–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과학부 지도원
  • 1939–194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1946년 철학 박사; 1941–1945년 붉은군대
  • 1947–1949『철학의 제문제』(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 창간 편집장
  • 1955–1972과학사연구소(IIET) 선임연구원 → 소장(1962–1972)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7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лмого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87 ○ 자연사

현대 확률론의 공리적 기초를 세운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증언했다: "30년 동안 나는 콜모고로프의 논문을 읽을 때면 이것이 내 생각이라고 느낀다.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1933년 『확률론의 기초개념』에서 측도론 기반 공리계를 제시해 확률론을 엄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소련 수학자다. 위상수학의 코호몰로지, 고전역학의 KAM 이론, 난류 이론, 알고리즘 복잡도, 힐베르트 제13문제 해결 등 수학 전 분야에서 근본적 성과를 남겼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1935년 확률론 학과를 창설해 30년간 이끌었고, 1939년 35세로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소련 수학 올림피아드 체계와 콜모고로프 기숙학교를 설계한 영재 교육의 설계자였으며, 1964~1985년 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확률론을 포격 통계에 적용해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했고, 전후 중등 수학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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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87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35–1965모스크바 국립대학 확률론 학과장
  • 1939–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39–1942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64–1966, 1974–1985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
  • 1963–1987콜모고로프 기숙학교 (제18학교) 창립자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노비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Новиков

케넌의 장전보에 맞선 노비코프 전보: 냉전 개막을 쓴 소련 외교관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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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동양학원 졸업,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기관에서 근무
  • 1935세계경제·세계정치 적색교수연구소 입소
  • 1938외무인민위원부 제1동방부 책임고문
  • 1941–1943외무인민위원부 제4유럽부장
  • 1943–1944주이집트 소련 대사 (그리스 대사 겸임)
  • 1946–1947주미국 소련 대사
  • 1947대사직 해임, 중앙위 간부예비역으로 전출
  • 1950소련 작가동맹 가입, 학술·문학 활동 전념

아나톨리 페트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94 ○ 자연사

소련 원자력 해군을 창시하고 체르노빌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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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 1975–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6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즈나이다 바실리예브나 예르쇼바

Зинаида Васильевна Ершова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03–1995 ○ 자연사

소련 원자력 계획을 개척한 방사화학자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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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학생, 방사화학 연구
  • 1930–1937모스크바 희소원소 공장 방사늄 부문, 물리实验실장
  • 1936–1937파리 라듐연구소 연수, 이렌 졸리오퀴리 지도
  • 1938–1945기레드메트 라듐 연구실장, 우라늄 카바이드·금속 우라늄 생산
  • 1946–1948특수금속연구소 NII-9 제1방사화학연구실장
  • 1947–1954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생산 기술 연구, 스탈린상 수상
  • 1960년대–1989전러시아 무기재료연구소에서 폴로늄 화학과 동위원소 전원 연구

레오니트 가톱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Гатовский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한 편집자

1949년 여름, 보즈네센스키의 『소련 전시경제』를 '중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이라 평했다는 이유로 당 중앙위 결정에 따라 《볼셰비키》 잡지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경제학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1957–1965)로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했다. 1929년 곡물 시장 연구로 집단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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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민스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 (유대계)
  • 1924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1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가격 부문 책임자, 제1·2차 5개년 계획 작성 참여
  • 1931–1936공산주의 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비에트 무역 부문 주임
  • 1933–1937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무역회전·국민경제균형 부서장
  • 1939–1949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볼셰비키》 잡지 편집위원
  • 1949보즈네센스키 저서 호평으로 《볼셰비키》·고등당학교에서 해임
  • 1957–1965《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정치경제학)
  • 1965–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71–1997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
  • 1997모스크바에서 사망, 바간코보 묘지에 안장

아나톨리 안토노비치 볼린

Анатол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ин

판사 숙청을 지휘하고 재활 조치로 실각한 최고재판소장

1954년 1월, 볼린의 최고재판소 총회는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을 반환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 지도부는 곧바로 이를 오류라고 규정했고, 그 해석은 3년 후 그를 실각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쿠반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나 내전에 참전하고, 라브파크와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1939년 RSFSR 검찰총장에 올라 대숙청 후반기와 전쟁기 검찰을 이끌었고, 194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952년까지 사법기관 숙청을 직접 조직·감독했다. 그러나 1954년 1월 최고재판소 총회가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해석을 내놓자 당 지도부는 이를 오류로 규정했고, 결국 1957년 2월 해임되었다. 이후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2년간 재직하다 104세까지 생존해 소련 최고위 법조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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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테므류크 어류가공공장 노동자
  • 1921붉은군대 부대 본부 비밀부서장, 내전 참전
  • 1923–1926크라스노다르 라브파크 학생
  • 1925RKP(b) 입당
  • 1930레닌그라드국립대학 법학부 졸업
  • 1930–1931공산주의아카데미 대학원생 (레닌그라드)
  • 1931–1932레닌그라드대학 교원·교수주임
  • 1932–1933카렐리야 자치SSR 문화·공교육 부문장
  • 1933–1935페트로자보츠크 검사
  • 1935–1937레닌그라드 볼로다르스키 구역 검사보, 소콜니키 구역 검사
  • 1937–1939RSFSR 부검찰총장
  • 1939–1948RSFSR 검찰총장
  • 1948–1957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7–1969소련 각료회의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
  • 1969–2007연방급 개인연금자, 《인간과 법》 잡지 고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오스트롭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계 1904–1936 ○ 병사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저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범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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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셰페톱카 볼셰비키 지하운동 연락원
  • 1919콤소몰 가입 및 붉은군대 자원입대, 코톱스키 기병여단 복무
  • 1921–1923키예프 철도공장 전기공·콤소몰 서기
  • 1924당 가입, 베레즈디프·이자슬라프 콤소몰 지구위원회 서기
  • 1930–1934시력·보행 상실 상태에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집필
  • 1935레닌 훈장 수훈
  • 1936『폭풍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 집필 착수, 완성 전 사망

발레리 파블로비치 치칼로프

Валерий Павлович Чка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4–1938 ✕ 추락사

북극을 넘어 미국까지: 스탈린의 매, 그리고 마지막 시험비행

1937년 6월 20일, ANT-25기가 밴쿠버의 피어슨 비행장에 착륙하자 미군 장교가 물었다. "어디서 왔소?" 치칼로프가 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시험비행사이자 1930년대 소비에트 항공력의 상징.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I-15, I-16 전투기를 시험하며 상승 스핀과 슬로 배럴 롤이라는 새 곡예비행 기동을 창안했다. 1936년 모스크바-우드 섬 9,374km 무착륙 비행으로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같은 ANT-25기로 모스크바-북극-밴쿠버(미국) 8,811km를 63시간 만에 횡단하며 북극 항로를 개척했다. 스탈린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올 만큼 대중적 영웅이 되었으나, 1938년 12월 서둘러 추진된 I-180 전투기 초도비행에서 엔진 정지로 추락해 3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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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제4카나빈 항공대 항공기 정비공
  • 1921–1924예고리옙스크·보리소글렙스크·모스크바·세르푸호프 비행학교 수료
  • 1924–1930제1적기전투비행대 전투기 조종사
  • 1930–1933NII VVS RKKA 시험비행사
  • 1933–1938제39항공공장 시험비행사 (폴리카르포프 설계국)
  • 1935–1938공군 곡예비행 부문 책임자
  • 1937–193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1소집)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 예조바

Евгения Соломоновна Ежова
문학·예술 소련 벨라루스 (유대계) 1904–1938 ✕ 자살

문단 살롱을 열었던 화보지 편집인, 예조프의 아내

1938년 11월, 요양원에 있는 그에게 남편이 루미날을 보냈다. 며칠 뒤 그는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고멜의 상인 가정에서 예브게니야 파이겐베르크로 태어나, 하유틴·외교관 글라둔과의 결혼을 거쳐 1931년 예조프와 결혼했다. 1930년대에는 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의 부편집인으로 사실상 편집을 이끌었고, 바벨숄로호프, 예이젠시테인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모스크바 살롱을 열었다. 1933년 딸 나탈리야를 입양했다. 1938년 남편의 몰락이 다가오자 가까운 친구들이 잇따라 체포되었고 그 자신의 과거를 고발하는 진정서도 접수되었다. 심한 우울 상태로 요양원에 들어갔고, 남편이 보내 준 수면제 루미날의 과다 복용으로 1938년 11월 21일 사망했다. 돈스코이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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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출판·언론계 근무
  • 1930년대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 부편집인 · 사실상 편집 책임

런비스

任弼时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04–1950 ○ 뇌출혈

옌안 시기 「5대 서기」의 한 사람이었던 조직가, 건국 이듬해 요절했다

1940년 옌안으로 돌아온 뒤 서기처와 조직부에서 일했고,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혀 마오쩌둥·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 다음 서열에 올랐다. 1950년 10월 27일 베이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후난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배우고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대장정 때 허룽과 함께 제2방면군을 지휘했고 1938년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1943년부터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 조직과 재정을 맡아 마오·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와 함께 「5대 서기」로 불렸다. 1949년 건국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0년 뇌출혈로 46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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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0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43–1950중앙서기처 서기

야코프 표도로비치 카푸스틴

Яков Фёдорович Капустин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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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김무정

金武亭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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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중국공산당 입당
  • 1934–1935중국 홍군 대장정 참가
  • 1937–1940팔로군 포병사령관
  • 1942조선의용군 총사령
  • 1946북조선로동당 제2비서
  • 1948민족보위성 부상 겸 제2지휘소 사령관
  • 1950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보그단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Богдан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이자 카틴·민족이주의 집행자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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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 1953.3–1953.6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의 측근으로 복귀
  • 1953.6–1953.12베리야와 함께 체포, 사형 선고 후 총살

쿠즈마 니콜라예비치 데레뱐코

Кузьма Николаевич Деревянко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한 소련 대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 갑판 위에서 "소련 대표가 서명할 차례입니다"라는 맥아더의 말에 데레뱐코 중장이 걸어나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3분간의 의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소련의 군사정보 장교이자 중장으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 항복문서에 소련 대표로 서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 종결에 참여했다. 독소전 기간에는 제53군, 제57군, 제4근위군의 참모장으로 쿠르스크 전투, 코르순-셰브첸코 작전, 이아시-키시뇨프 공세, 부다페스트와 빈 함락 작전에 참여했다. 종전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시찰한 최초의 소련 관료로서 원자폭탄 피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소련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와 GRU 정보국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시찰 당시의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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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붉은 군대 입대
  • 1924제2키예프 붉은감제관학교 졸업, 제297보병연대 배속
  • 1933–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방학부에서 영어·일본어 전공
  • 1936–1938적군 정보총국(GRU) 근무, 스페인 내전 파견, 중국군 비밀 무기지원 작전 수행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특별스키여단 참모장
  • 1940–1941발트 특별군관구 정보부 부장, 동프로이센 특수임무
  • 1941–1942서북전선 사령부 정보부 부장·대리
  • 1942–1943제53군 참모장 (서북전선 → 스텝전선)
  • 1943–1944제57군 참모장 (제2·제3우크라이나전선)
  • 1944–1945제4근위군 참모장 (제2·제3우크라이나전선), 부다페스트·빈 공세 참여
  • 1945제35군 참모장, 9월 2일 일본 항복문서 서명 (소련 대표)
  • 1945–1950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 히로시마·나가사키 시찰 및 스탈린 보고
  • 1950–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직 → GRU 정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