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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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아벨 게제비치 아간베갼

Абел Гезевич Аганбегян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아르메니아 1932–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장개혁 설계사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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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노동·임금 국가위원회에서 경제학자로 근무
  • 1961–1966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섹터장, 33세에 소장
  • 1966–1984IEiOPP 소장, BAM 과학위원회 의장, 『EKO』 창간·편집장
  • 1974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64년 통신회원)
  • 1985–1989고르바초프 경제 고문, 생산력연구위원회 의장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상임위원
  • 1989–2002소련·러시아 정부 산하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
  • 2002–현재국민경제아카데미 경제이론·정책 학과장, 저술 활동 지속

카렌 세로보비치 데미르찬

Карен Серобович Демирчя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32–1999 ✕ 암살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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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 197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1999아름엘렉트로마시나(하이엘렉트로메케나) 전기기기 공장 총지배인
  • 1998–1999아르메니아 인민당 창당·의장
  • 1999아르메니아 국민의회 의장 (6월–10월)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블라소프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Власов

OMON을 창설하고 옐친에게 패한 마지막 공산당 RSFSR 총리

내무부에서 블라소프를 부르던 별명은 「티샤이시」였다 — 가장 조용한 자. 조직범죄를 방치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부랴티야의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체첸-인구시 공화국과 로스토프 주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였다. 1986년 1월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특수경찰부대 OMON을 창설했으나, 조직범죄 대응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으며 2년 8개월 만에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으로 옮겼고, 199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게 535 대 467로 패배했다.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당 조직의 적응 논리를 체현했으나 결국 양쪽에 밀려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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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체렘호보 탄광 5호 갱부 감독; 콤소몰 체렘호보 시위원회 선전부장, 제2서기
  • 1955–1961이르쿠츠크 주 콤소몰 제2서기, 제1서기
  • 1961–1965이르쿠츠크 주 지민스키 구당 제1서기; 이르쿠츠크 공업주당 제2서기; 이르쿠츠크 주 집행위 제1부의장
  • 1965–1972야쿠트 주당 서기, 제2서기
  • 1972–1975CPSU 중앙위 감찰원
  • 1975–1984체첸-인구시 공화국 당 제1서기
  • 1984–1986로스토프 주당 제1서기
  • 1986–1988소련 내무장관 (중장, 재임 중 상장 진급)
  • 1988–1990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8.9–1990.7)
  • 1990.5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 패배 (467:535)
  • 1990–1991CPSU 중앙위 사회경제부장
  • 1994–2002이르쿠츠크 향우회 「바이칼」 회장

에를렌 키리코비치 페르비신

Эрлен Кирикович Первышин

군사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통신장비공업 장관

1976년 4월, 전자공업부 전시회에서 동료 장관 발렌틴 프롤레이코는 페르비신을 이렇게 평했다: "자기 쪽 작업이 뒤처진 데에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빈정거리며 오직 불평만 늘어놓았다."

시베리아 설치 현장에서 출발한 통신기사로, 1974년부터 1989년까지 15년간 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군사령·통제·통신(C3) 체계의 중추인 보안통신·무선중계·레이더 장비 생산을 총괄했다. 1989년 통신부 장관으로 옮겨 통합 통신망 구축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에는 러시아 통신 기업을 이끌며 민영화 전환기에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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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7제5설계·조립트러스트 톰스크 설치구역 기사
  • 1957–1959제5설계·조립트러스트 크라스노야르스크 설치구역 책임자
  • 1959–1961제5설계·조립트러스트 부수석기사 (모스크바)
  • 1965–1969소련 무선공업부 전소련 설계·조립트러스트 총책임자
  • 1970–1974소련 무선공업 차관
  • 1974–1989소련 통신장비공업부 장관
  • 1989–1990소련 통신부 장관
  • 1991–1992통신기업 콘체른 '텔레콤' 이사회 의장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볼스키

Аркадий Иванович Вольский

소련 기계공업을 총괄하고 탈소비에트 자본을 조직한 실무자

1991년 8월 쿠데타 때, 가택연금 중인 고르바초프와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볼스키는 쿠데타파가 퍼뜨린 '고르바초프 건강 이상설'이 거짓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안드로포프체르넨코의 경제 보좌관, 그리고 소련 말기 산업 관료에서 탈소비에트 기업 로비로 이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의 창립자이자 15년간 회장을 맡으며 '붉은 디렉터'들을 조직화된 로비 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러시아 시장경제 이행의 조건을 크게 규정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고르바초프와 접촉하여 쿠데타파가 내세운 '건강상 무능'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장(1988~1990)과 체첸 평화협상 부대표(1995)를 지냈으며, 1986년 체르노빌에서 석 달간 산업 대응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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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9ZIL 자동차 공장: 보조 직장 → 주물공장장 → 당위 서기
  • 1969–1983중앙위 기계제작부: 자동차산업 부문장 → 부부장 → 제1부부장
  • 1983–1984안드로포프 서기장 경제 보좌관
  • 1984–1985체르넨코 서기장 경제 보좌관
  • 1985–1990중앙위 기계제작부장
  • 1988–1990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회 위원장
  • 1990–2005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 회장
  • 1991.8–12소련 부총리 (산업·군수복합체 담당)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2010 ○ 자연사

당을 모스크바에서 분리해 낸,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대통령이 된 공산주의자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NATO·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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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리투아니아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 1967–1977리투아니아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
  • 1977–1987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89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소련공산당에서 분리) 제1서기
  • 1990리투아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3–1998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 2001–2006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스테판 카라페티 포고샨

Ստեփան Կարապետի Պողոսյան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2012 ○ 자연사

붕괴 직전 아르메니아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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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 1990–1991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아르놀트 바실리예비치 보일루코프

Арнольд Васильевич Войлуков

개혁의 이면을 증언한 소비에트 은행가

그는 1991년 개혁의 발상이 국가보안위원회와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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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금융대학 졸업
  • 1955–1960년대국립은행 지역 기관에서 근무
  • 1960년대–1970년대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 국립은행 현금유통·출납업무 부장
  • 1980년대소련 국립은행 중앙기구 고위 간부
  • 1990–1991소련 국립은행 이사회 부의장
  • 1992–1994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

비톨트 파블로비치 포킨

Вітольд Павлович Фокін

소련 경제관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첫 총리로

소련 해체 협정에 서명했던 포킨은 2016년 인터뷰에서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크림반도가 병합됐을 때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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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3루한스크 지역 탄광 기술자·관리자
  • 1963–1971돈바스 무연탄 산업 관리자
  • 1971–1987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부서장·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1–1992우크라이나 초대 총리
  • 1991벨로베시 협정 우크라이나 서명자
  • 2020우크라이나 삼자접촉그룹 대표단 제1부대표

야아코브 로이

יעקב רועי
학술·연구 이스라엘 이스라엘 1932–

소련 사회와 유대인의 역사를 잇댄 역사가

그는 전쟁의 장기적 국내 영향이 국제적 파장보다 훨씬 광범위했다고 분석했다.

야아코브 로이는 소련의 유대인, 이슬람, 중동 정책과 소비에트 사회를 연구한 이스라엘 역사가다. 그는 문서 연구와 사회조사를 결합해 국가 정책이 민족 공동체와 대중의 정치 의식에 미친 영향을 추적했다. 『출혈하는 상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국내적 비용과 유산을 분석하며,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주민의 태도 차이를 통해 전쟁과 소련 붕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 실증 자료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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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케임브리지대학교 역사학 학사
  • 1960–1965바이츠만 기록보관소 연구원
  • 1972–1974텔아비브대학교 러시아사 강사
  • 1977–1982텔아비브대학교 러시아·동유럽 연구센터 소장
  • 1982–1990텔아비브대학교 러시아사 부교수
  • 1990–2003텔아비브대학교 러시아사 정교수
  • 2001–2002컴밍스센터 소장
  • 2003–텔아비브대학교 명예교수

1989년 철의 장막을 절단한 헝가리 외무장관이자 개혁 총리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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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9재무부 근무
  • 1959–1969외무부 외교관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주재)
  • 1969–198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 국제부 근무, 1983년 국제부장
  • 1985–1989외무부 차관(국무장관)
  • 1989–1990외무장관: 철의 장막 개방, 소련군 철수 협정 체결
  • 1990–1994헝가리 사회당 대표, 국회 외교위원장
  • 1994–1998헝가리 총리: 보크로시 긴축 개혁 단행

카호르 마흐카모비치 마흐카모프

Қаҳҳор Маҳкамович Маҳкам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타지크 1932–2016 ○ 자연사

소련 말기 타지키스탄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사임하던 1991년 8월 회의장을 나서며 그는 "나는 떠나지만,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후 정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카호르 마흐카모프는 광산 기술자 출신의 타지크 공산당 관료로, 계획경제와 공화국 행정을 오래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족적 자기의식과 정치적 동요를 키우던 시기에 그는 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대중의 불신과 민족주의적 압력에 부딪혔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1년 모스크바의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사임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도적 연속성과 해체기의 정치적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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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슈라브 탄광 기술자로 일하기 시작
  • 1963–1982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각료회의 부의장
  • 1982–1986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5–1991타지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90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0–1991타지키스탄 초대 대통령
  • 2000–2016타지키스탄 국민회의 종신 의원

올레크 드미트리예비치 바클라노프

Олег Дмитриевич Бакланов

우주산업을 이끈 최후의 GKChP 생존자

1991년, 나는 우리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하리코프 계기공장의 조립공으로 출발해 소련 로켓·우주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일반기계공업부 장관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에네르기야-부란 왕복우주선 계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 우주개발의 마지막 대역사를 이끌었다. 1988년 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로 당의 군수정책을 주관했고, 1991년 8월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8인 중 한 명으로 소련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 후 1년 반 동안 수감되었다. 2021년 사망 당시 GKChP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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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2하리코프 계기공장에서 조립공·무선기기 조정사로 근무
  • 1963–1972하리코프 계기공장 주임 엔지니어
  • 1972–1975하리코프 계기공장 공장장
  • 1975–1976생산연합 '모놀리트' 총괄책임자
  • 1976–1981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차관
  • 1981–1983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 1983–1988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 1988–1991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코체토프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еевич Кочетов

트빌리시에서 정치국 승인 없이 무력 사용을 강행한 국방차관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 1989년 4월 8일,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서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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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리보프 보병학교 졸업, 독일 주둔 소련군에서 소대장·중대장
  • 196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북캅카스 군관구 연대장
  • 1973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24 '철의' 사단장
  • 1977–1979제7근위군 사령관
  • 1982–1985남부군집단(헝가리) 사령관
  • 1985–1988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88–1989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89–1991소련 국방부 제1차관

레프 드미트리예비치 랴베프

Лев Дмитриевич Рябев

체르노빌 직후 핵산업을 넘겨받은 중형기계공업 장관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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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3VNIIEF(KB-11) 기술자·선임 기술자
  • 1963–1967크렘료프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7–1969VNIIEF 생산 담당 부수석 기술자
  • 1974–1978VNIIEF 소장
  • 1978–1984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 중형기계공업 부문장
  • 1984–1986중형기계공업 차관·제1차관
  • 1986–1989중형기계공업 장관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연료에너지복합체 국장
  • 1993–2002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

사모라 모이세스 마셸

Samora Moisés Machel

포르투갈 식민지배를 무너뜨리고 모잠비크 독립을 이끈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아프리카의 해방은 대륙 전체의 해방이거나, 그 무엇도 아니다.”

모잠비크 독립혁명의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 FRELIMO를 이끌어 포르투갈 식민 지배를 무장 투쟁으로 종식시키고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로디지아와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해방운동의 동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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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탄자니아로 망명, FRELIMO 합류 — 알제리서 게릴라 훈련
  • 1966FRELIMO 국방담당 비서
  • 1968모잠비크 해방군 총사령관
  • 1970FRELIMO 의장 취임 —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 채택
  • 1974포르투갈 신정부와 독립 협상 — 루사카 협정
  • 1975–1986모잠비크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 1984남아공과 은코마티 불가침협정 체결
  • 1986.10잠비아 방문 후 귀국 중 남아공 음부지니에서 항공 사고로 사망

이코 카레이라

Iko Carreira
군사·지휘 앙골라 국가기관 앙골라 앙골라(포르투갈·이탈리아계) 1933–2000 ○ 자연사

앙골라 인민군을 창설한 초대 국방부 장관

카레이라는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앙골라 독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FAPLA)을 창설·지휘한, 네투 다음 가는 MPLA 군사 지도자였다.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그는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선언해 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을 증언했다. 1977년 니티스타 봉기 진압과 군사재판을 지휘했으나, 1979년 네투 사망 뒤 실각해 말년엔 조국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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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독립운동 가입
  • 1961포르투갈군 탈영, MPLA 합류
  • 1971MPLA 서기장
  • 1975–1980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국방부 장관
  • 1982소련 보로실로프 총참모아카데미 졸업, 아프리카 장교 최초 장군 과정 수료
  • 1983–1986앙골라 인민공군 사령관
  • 1987알제리 주재 대사

캄란 마메드 오글루 바기로프

Kamran Məmməd oğlu Bağıro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3–2000 ○ 자연사

알리예프의 후계자였으나 위기 앞에서 무너진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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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바쿠 가스 사무소 정비공
  • 1957아제르바이잔 공과대학 졸업, 조교·전임강사·건축학부 부학장
  • 1968–197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건설·공공주택부 부부장
  • 1971–1974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도시경제부장
  • 1974–1978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8–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2–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2아제르바이잔 국가산업안전·광산감독위원회 의장

압사마트 마살리예비치 마살리예프

Абсамат Масалы уулу Масали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키르기스 1933–2004 ○ 자연사

소련 말 키르기지야의 당 지도자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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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키질키야 탄광관리국 콤소몰스카야 광산의 광산부문 부총공학자, 이어 키르기즈우골 트러스트 부총공학자
  • 1961–1973오시주 당위원회 강사, 알마아타 고등당학교 수학, 당·국가 감독 기관 근무, 오시주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타시쿠미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2–1974프룬제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74–1979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9–1985이식쿨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1991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5년 11월 2일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선출, 1991년 4월 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이동하며 해임).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1990년 4월 10일 제12차 소집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선출, 12월 10일 본인 요청으로 해임)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문 고문(1991년 4~8월)
  • 1992–2004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지도자(1992년 9월부터). 당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공산당연합-소련 공산당 이사회 집행위원 겸 부의장
  • 1993–1996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검열국장(1993년 1월~1996년 6월)
  • 1994–2004이. 라자코프 재단 이사장(1994년부터)
  • 1995–2004주고르쿠 케네시 인민대표회의 의원(1995년 4월 선출, 2000년 4월 재선), 2000년부터 입법회의 의원

베르나르 콜렐라

Bernard Kolélas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콩고-브라자빌 콩고-브라자빌 (풀주) 1933–2009 ○ 자연사

일당제를 무너뜨린 풀주 출신 야당 지도자

1988년 11월 7일과 1989년 11월 20일, 사수응게소 대통령에게 전국 원탁회의 개최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풀주의 킨칼라구 음볼로키 출신의 콩고 정치인으로, 일당제 시절에 콩고민주통합발전운동(MCDDI)을 창설하고 다당제 도입을 요구했다. 1991년 주권 국민회의에서 정당 연설을 개막하고 앙드레 밀롱고의 과도 총리 선출을 지지하는 등 민주화 이행의 야당 축이었다. 1992년 대선 결선에서 리수바에게 패했고, 1997년 내전 중 리수바의 민족통합정부 총리가 됐다가 사수응게소 충성 세력에 축출되어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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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콩고민주통합발전운동(MCDDI) 창설, 당 규약을 내무부에 제출
  • 1991주권 국민회의에서 정당 연설 개막
  • 1992대선 1차 20.32%로 2위, 결선에서 리수바에 패배
  • 1994브라자빌 시장 선출
  • 1997리수바에 의해 민족통합정부 총리로 임명됨, 사수응게소 충성 세력의 점령으로 축출·망명
  • 2000콩고 법원에서 궐석 사형 선고
  • 2005사면으로 귀국, 의회 사면법 채택
  • 2007총선에서 국회의원 당선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코시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сыгин
문학·예술 소련 코랴크 (러시아) 1933–2012 ○ 자연사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이자 소련 인민대표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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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코랴크 자치구 문화계에서 교사·방법론자·문화원장 등으로 활동
  • 1969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 출간, 필명 '코얀토' 사용 시작
  • 1972소련 작가동맹 회원
  • 1974캄차카 작가조직 공동 창립
  • 1976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 출간 — 북방 관료제 비판으로 반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코랴크 자치구 선출), 민족문제위원회 위원
  • 1990s–2000s코랴크 자치구 대통령 전권대표부 전문가, 주지사 고문, 인권위원장
  • 2002–2012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 팔라나 사범대학에서 북방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미그라노비치 몹시샨

Վլադիմիր Միգրանովիչ Մովսիսյան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계 1933–2014 ○ 자연사

소련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공산당 제1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미해결을 이유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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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5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여러 지역의 수석 수의사
  • 1969–1973아르타샤트 지구당 제1서기
  • 1975–197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84–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소련 농업·식량부 차관
  • 1996–1999아르메니아 농업부 장관

마티외 케레쿠

Mathieu Kérékou

베냉 인민공화국과 체제 전환

2005년 3선 개헌 요구에 "권력을 떠나지 않으면 권력이 당신을 떠날 것이다"라고 답했다.

1972년 쿠데타로 집권한 베냉 지도자다. 1974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언하고 이듬해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경제위기 속에서 1990년 국민회의의 전환 결정을 수용했으며 1991년 선거에서 소글로에게 패배한 뒤 권력을 이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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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위베르 마가 대통령의 부관
  • 1967군사혁명위원회 의장
  • 1972군사 쿠데타로 집권
  • 1974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정 이념으로 선언
  • 1975베냉 인민공화국 수립, 일당 체제 출범
  • 1990국민회의 개최, 마르크스·레닌주의 폐기
  • 1991선거에서 소글로에게 패배해 권력 이양
  • 1996선거로 대통령 복귀, 2006년 임기 종료

블라디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 쿠투조프

Владисла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тузо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933–2016 ○ 자연사

레닌그라드 사건 연구의 기초를 놓은 소련 역사학자

1989년, 『CPSU사 문제』에 실린 그의 논문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은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 대 말렌코프-베리야 그룹'의 파벌 투쟁으로 정식화했다. 이후 30년 넘게 이 틀이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의 역사학자. 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를 우등 졸업하고 토르조크에서 교사와 당 일꾼으로 일한 뒤, 1966년부터 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에서 25년간 봉쇄·전후복구·당 간부들의 정치 전기를 연구했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발표한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에서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과 말렌코프-베리야 그룹 사이의 파벌 투쟁으로 해석하는 틀을 처음 제시했고, 이듬해 빅토르 데미도프와 함께 편찬한 동명의 책은 20만 부 발행으로 대중적 폭발을 일으켰다. 이 작업으로 '레닌그라드 사건' 연구의 포스트소비에트 역사학 전체를 열었으며, 1991년부터 사망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로 후속 세대를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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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칼리닌주 토르조크 출생, 노동자 가정
  • 1952–1957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 우등 졸업
  • 1957–1962르제프 중등학교 교사, 이후 토르조크 시당위 선전선동부 지도원·부장
  • 1965후보학위 취득, 「제1차 5개년계획기 레닌그라드 CCC-RKI 활동」
  • 1966–1991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후일 역사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1987–1989『대화』에 '레닌그라드 사건' 첫 논문 게재, 『CPSU사 문제』에 획기적 논문 발표, 박사학위 취득, KGB상 수상
  • 1990V. I. 데미도프와 『레닌그라드 사건』 편찬, 20만 부 발행
  • 1991–2016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역사학부 러시아현대사 교수, 150편 이상 논문·저서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