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1933)
인물빌리 뮌첸베르크,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룀, 에트문트 하이네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파울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하인리히 브뤼닝,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그레고어 슈트라서, 빌헬름 프리크, 로베르트 라이, 오토 벨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에른스트 톨러 용어갈색책 (1933),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1933),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 (1933), 돌격대 (SA), 친위대 (SS), 강제적 동질화, 1933년 나치 분서, 성과학 연구소 사건나치 집권과 수권법,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10 살인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 목이 떨어질 것이다.”
1930년 제국 법원에서 히틀러[173]
살인이 독일을 휩쓸고 있다. 돌격대 막사에서 뚜껑을 닫은 관에 담긴 훼손된 시체들이 실려 나간다. 어두운 숲에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시체들이 발견된다. 강물은 한데 묶인 피살자들의 몸뚱이를 뭍으로 밀어 올린다. 시체 안치소에는 “신원 불명”의 시체들이 누워 있다.
수백 가지 잔혹한 비극이 벌어진다. 아내는 한밤중에 남편을 침대에서 끌어내는 돌격대원들의 권총과 곤봉 사이에서 남편을 보며, 다시는 그를 살아서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두개골이 박살 나고, 칼에 열두어 군데 찔리고, 얼굴이 일그러진 채 발견된다. 언론은 “도주 중 사살!”이라고 보도한다. 그나마 신문에 무슨 소식이라도 실린다면 말이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속수무책의 절망 속에서 붙잡혀 간 아들의 고통에 찬 비명을 듣는다. 그 끔찍한 일을 믿고 싶지 않지만, 며칠 뒤에는 결국 두려워하던 통지가 온다. “그의 시체를 인수해 가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밤중에 “끌려간다”. 그가 죽을 때까지 돌격대 막사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비명이 몇 블록 밖까지 들린다. 누군가는 짓밟히고 얻어맞고 고문당하다가, 거의 미쳐서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망나니들은 비웃는다. 그가 4층 창문으로 달아나려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사지가 으스러진 채 감옥의 채광통에서 발견된다. 세 번째 사람은 콩팥이 터진 채 누워 있다. 겉으로는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줌 대신 피를 쏟는다. 그는 얼마 안 가 죽는다.
살인이 독일을 휩쓸고 있다. 음험하게, 짐승처럼, 계획적으로. 히틀러 정부의 이름으로, 그 지시를 받아 돌격대 막사와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자 거리와 외딴 숲에서 밤낮으로 저질러지는 실제의 끔찍한 만행을, 외국의 그 어떤 “잔학 보도”가 비슷하게나마 그려 낼 수 있겠는가! 몰락할 때가 된 사회 질서의 지배층이 비인간적인 잔인함으로 지배를 유지하려 든다는 것은 역사의 경험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은 그 새로운 증거를 내놓고 있다.
세계대전 때는 사망자 명단이 작성되었다. 그 명단은 적과 적 사이에 교환되기까지 했다. 히틀러 정부는 물론 자기 희생자 전원의 명단을 공개할 만큼 “자유주의적”이지 않다. 살인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곧 피살자의 지위 때문에 또는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숨길 수 없는 경우만이 “도주 중 사살”이나 그 밖의 위조된 형태로 발표된다. 진실을 캐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를 기다리는 것도 같은 운명, 곧 고문과 죽음이다.
돌격대 지휘관들의 지시로 저질러진 수백 건의 살인은 히틀러 체제 아래에서 결코 법정에 서지 않을 것이다. 3월 22일, “민족 봉기를 위한 투쟁에서 저질러진” 모든 범죄에 대한 일반 사면이 선포되었다.[174] 이 일반 사면은 지난 살인과 앞으로 올 살인 모두에 대한 면허장이다. 7월 23일 괴링은 “민족 봉기에 봉사하여” 저지른 가장 끔찍한 행위에 대해 다시 한번 처벌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
10.1 포템파의 히틀러의 동지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몇 달 동안 이미 돌격대의 총탄과 칼에 쓰러진 희생자들을 정확히 집계한 자료는 없다. 그 수는 사회민주주의자·기독교도·공산주의자·무소속 노동자 수백 명에 이른다. 민족사회주의당이 특별한 정치적 곤경에 빠졌을 때나, 노동자들의 끈질긴 저항이 그 전진을 가로막을 듯할 때면 갈색 테러 행위의 물결은 유난히 높이 일었다. 1932년 7월 선거 다음 날 밤에는 사회민주주의자·공산주의자·민주주의자를 노린 폭탄 테러, 수류탄 공격, 살인 기습이 잇따랐다. 많은 도시에서 이 습격들은 같은 시각에 일어났으니, 분명히 정확하게 미리 짜 둔 것이었다. 1933년 1월 슐라이허 정부 아래에서 민족사회주의자들의 폭력 행위는 다시 매우 빠르게 늘었다. 히틀러가 제국 총리에 임명된 뒤 돌격대의 테러는 날마다 더 거침없이 풀려났다. 2월 전반에만 돌격대가 노동자 남녀를 살해한 사건이 27건 알려졌다.[175]
1월 30일 이전에 이미 돌격대에게는 잘 다듬어진 살인 전술이 있었다. 그 고장에 사는 돌격대원들이 기회를 엿보고 살인을 준비했다. 외지에서 온 패거리들은 압도적인 수로, 흔히 매복했다가 나타나야 했다. 적 몇 명을 쓰러뜨린 뒤에는 곧바로 (대개 자동차를 타고) 그 일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테러와 총격 가운데 상당수는 질주하며 지나가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에서 이루어졌다. 총알이 노동자 술집에 박히고 노동자들이 쓰러졌다 — 그리고 범인을 가려내거나 막아 낼 생각을 하기도 전에 총잡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1932년 여름 상슐레지엔의 마을 포템파에서 일어나, 히틀러가 공공연히 두둔한 탓에 온 문명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저 짐승 같은 살인을 떠올려 보자.[176] 미리 술집에서 술기운으로 용기를 낸 돌격대 살인 특공대가 한 공산주의 노동자의 집에 쳐들어갔고, 그 노동자는 늙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말 그대로 짓밟혀 죽었다. 이 범행이 짐승 같은 세부까지 낱낱이 법정에서 드러나고 살인자 몇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히틀러는 공개적으로 이 살인 패거리와 연대를 표명하며 전보에서 그들을 “나의 동지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파펜 정부에게 감형받았다.
3월 5일 직후, “일반 사면”보다도 앞서 이 살인자들은 히틀러에게 사면받아 다시 노동자들에게 풀려났다.
10.2 살인의 위장
이 책의 모든 절에서처럼 우리는 신중하게 확인된 자료만 쓴다. 우리는 주로 두 가지 출처에 한정한다. 하나는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독일에서 보낸 목격자 보고이고, 다른 하나는 “획일화된” 독일 언론의 보도다. 언론 보도는 살인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줄 뿐 아니라, 실제 사실을 덮으려 드는 거친 수법을, 그리고 그러다가 흔히 저도 모르게 그 사실을 드러내고 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3월에는 아직 언론이 스스로 작성한 정치 살인 보도가 실렸다. 물론 노동자 신문들은 이미 금지되었고, “중도” 언론은 너무나 겁을 먹어서 가장 확실한 소식조차 대개 감히 싣지 못했다.
그러나 언론이 이토록 굴종했는데도 남에게 불리한 소식이 여전히 너무 많이 세상에 새어 나가자, 히틀러 정부는 자기 위신이 위협받는다고 보았다. 나치 판무관들의 지방 검열과 신문들의 “자기 검열”에 선전부의 중앙 집중 검열이 더해졌다. 4월 2일에는 “제3제국”에서 살인 보도가 경찰과 언론의 일이 아니라 선전의 일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시인된다.
“베를린, 4월 2일(WTB).[177] 제국 정부는 모든 통신사에 지시를 내려, 독일 안의 사건에 관한 소식은 … 제국 정부 공보실(선전부 안)이 명시적으로 허가하기 전에는 공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허가된 문구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도하는 것은 금지된다.”
중앙 집중 검열 때문에 보도는 더 판에 박힌 것이 된다. “획일화된” 언론은 지시를 엄격히 따른다. 범행 정황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일은 드물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오면, 세부의 모순이 곧바로 거짓말을 드러낸다.
몇 가지 위조 유형이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첫째, 신원 불명이라는 시체의 발견. 경찰은 며칠 전부터 이미 “실종”이나 “납치”로 신고된 시체의 신원을 대개 곧바로 확인해 낸다. 그런데 이 신원 확인은 대중에게 비밀에 부쳐지거나, 여러 주가 지나서야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발표된다. 이 유형 가운데에는 페메(비밀 처형)로 살해된, 반항하던 돌격대원도 여럿 있다.
둘째, 3월 5일 이래 파시즘 테러에 뒤따른 자살의 물결과 맞물려, 수많은 살인을 자살로 꾸며 내려 한다.
이 속임수가 얼마나 서툴게 벌어지는지는 마그데부르크 시의원 크레세 살해에 관한 공식 보도가 보여 준다.
“마그데부르크, 3월 14일(TU).[178] 마그데부르크 근교 펠겔레벤에서 일요일 밤늦게 투표소로 쓰인 한 음식점에서 유혈 사건이 일어났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온 사회민주당 시의원 크레세는 음식점에 들어서자 돌격대원 몇 명의 요구에 따라 그 자리에 있던 보안 경찰관들에게 보호 구금되었다. 투표소 옆방에서 크레세는 돌격대원 몇 명과 말다툼을 벌였고, 그 와중에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한 발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 돌격대 중대장 구스타프 레만이 중상을 입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허둥지둥 음식점을 빠져나갔고, 이어 밖에서 음식점 안으로 여러 발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얼마 뒤 크레세는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채 음식점 안에서 발견되었다. 크레세가 권총 습격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니면 밖에서 음식점으로 쏜 총탄 가운데 하나에 맞아 죽었는지 밝히기 위해 현재 부검이 진행 중이다.”
민족사회주의 정당 언론은 이런 보도를 한술 더 떠 선정적으로 우려먹는 경향이 있다. 4월 25일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가장 끔찍한 린치 살인 가운데 하나를 “자살”로 싣는데, 바로 그 세부 묘사가 자살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식이다.
“끔찍한 자살. 온몸에 타르를 바르고 불타 죽다. 이곳 주민 한 사람이 호르너 모어[179]의 자기 오두막에서 끔찍한 방법으로 자살했다. 그는 오두막에 덧붙여 지은 연장 창고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타르 한 통이 있었다. 그는 옷을 일부 벗은 다음 온몸에 타르를 바르고 그 통에 불을 붙였다. 그 불길 속에서 그는 죽음을 맞았다. 자살 동기는 우울증으로 보인다. 오두막은 완전히 타 버렸다. 자살자는 기혼이었고 자녀가 여럿 있었다.”
이런 식의 보도는 삼류 통속 소설처럼 보이려 한다. 사건을 소름 끼치게 그려 냄으로써 동기와 앞뒤 사정에 대한 물음을 지워 버리려는 것이다.
셋째, 학대 끝에 병원에서 죽은 희생자들의 경우 자연사로 꾸미려 애쓴다. 여러 경우에(이를테면 브레슬라우의 에크슈타인 박사[180]) 보도는 죽은 뒤에까지 피살자를 중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성병을 지어내 명예를 더럽히는 데 쓴다.
넷째, 비정치적 범죄로 꾸미기. 동기와 범인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빠져 있다. 그것이 곧바로 올바른 실마리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보도의 노골적인 공허함은 공식 전황 보도의 텅 빈 틀을 떠올리게 한다.
“경찰 발표. 토요일 저녁 지붕 수리공 헨젤러는 여러 사람에게 이끌려 그들과 함께 레싱 거리 21번지 집으로 갔다. 주민들은 곧 여러 발의 총소리를 들었다. H.는 그 집 다락에서 중상을 입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뒤 숨졌다. 범인들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달아났다.” (《게르마니아》 5월 15일 자)
다섯째, 다른 모든 술책이 실패하는 곳,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그리고 오로지 정치적 신념이 살해의 이유였다는 것을 더는 숨길 수 없는 곳에서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살해 이래 아주 분명하고 오해의 여지 없는 성격을 띠게 된 공식이 등장한다. “도주 중 사살”이다. 이 수법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공공연히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문서로, 하인츠 베슬러 사건에 관한 공식 보도 원문을 싣는다. 첫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4월 5일 자는 4월 4일 뒤셀도르프발(WTB)로 이렇게 보도한다.
“오랫동안 수배 중이던 공산주의자 지도자 베슬러가 오늘 아침 보조 경찰관들에게 붙잡혔다. 몸수색을 받던 중 체포자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달아나려 했다. 여러 번 불러도 멈추지 않자 경찰관들은 총을 쏘았다. B.는 총탄 한 발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간 뒤 숨졌다.”
둘째,
《앙그리프》 4월 5일 자는 4월 5일 뒤셀도르프발(경찰서 발표)로 이렇게 보도한다.
“4월 4일 오후 4시(!)쯤 공산주의자 간부 베슬러가 자기 집에서 친위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다이너마이트 두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그 밖에 문서도 압수되었다. 경찰 본부 초소로 가던 길에 B.는 달아나려 했다. 여러 번 ‘서라!’ 하고 외쳤으나 따르지 않았고, 경고 사격을 여러 발 했는데도 계속 달아났다. 그는 등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병원에 실려 간 직후 숨졌다.” (실제로는 베슬러의 집은 이미 밤중에 포위되었고, 그는 이른 아침에 끌려 나가 거리에서 사살되었다. 공식 보도들 사이의 모순은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다. “다이너마이트”는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다. 그러나 “경고 사격”은 아마 겨냥해서 쏜 것이었으리라.)
“도주 중 사살”은 사람 사냥을 가리키는 파시즘의 표현이다. 그 사냥에는 보도 방식도 포함된다. 그 보도는 히틀러 체제 전체만큼이나 테러적이다.
10.3 “정치 살인의 최대 감소”
1933년 5월 6일 자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민족 정부의 권력 장악 이래 정치 살인의 최대 감소”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실었다.
(공식 발표:)
“프로이센 총리 겸 내무장관 괴링 각하가 비밀 국가 경찰청장을 통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민족 봉기가 시작된 이래 정치적 동기로 저질러진 치사 폭력 행위가 눈에 띄게 줄었다. … 민족 정부의 권력 장악과 거의 동시에, 새 정부의 정력적인 방어 조치가 민족 운동의 승리로 생겨난 정치적 대립의 완화와 맞물려 사망 사건을 빠르게 줄였다. 이 감소는 이제껏 꾸준히 이어져, 올해 4월에는 사망 사건이 단 두 건으로 오래전부터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렀다.”
히틀러 정부가 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발표를 퍼뜨리게 한 바로 그 무렵, 역시 공식적으로 “4월 한 달 동안 베를린 시체 안치소에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시체 46구가 들어왔다”는 보도가 나왔다. 파시즘 언론은 4월 한 달 동안 50건이 넘는 정치 살인 사건을 피살자의 이름까지 밝힌 보도로 스스로 시인했다.
우리는 여기서 돌격대가 노동자와 지식인을 살해한 사건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몇 가지를 그려 보인다. 읽는 이에게 의심이 들고 상상력이 이 공포의 보고를 따라가지 않으려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들은 사실이다. 수많은 증인이 확인하고, 흔히 살인자 자신들까지 확인한 이 기록 속에서 제3제국의 공포에 관한 진실이 입을 연다.
10.4 “이것은 독일인의 짓이 아니었다”
1933년 4월 4일 뒤셀도르프에서 공산주의 노동자 하인츠 베슬러가 돌격대에게 살해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이 살인을 “도주 중” 사살로 위조하려 애쓴 《프랑크푸르터 차이퉁》과 《앙그리프》의 보도를 실었다. 하인츠 베슬러는 갈색 페메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1930년 12월까지 민족사회주의당 당원이자 돌격대 중대장이었다. 그는 나치의 거짓말을 가장 가까이에서 겪었고, 진저리를 치며 1930년 12월 돌격대 대열을 떠났다. 그는 공산당으로 가는 길을 찾았고, 그 길을 찾아냈다. 그래서 살해된 것이다. 깊은 내적 갈등과 진지한 정치 공부 끝에 NSDAP를 떠나 혁명적 노동운동의 당에 들어간 한 젊은 노동자에 대한 살인이었다. 다음에 싣는 한 목격자의 편지는 나치의 범죄를 그 비열함 그대로 폭로한다. 이 편지는 수백만 부로 퍼뜨릴 가치가 있다.
“우리 사랑하는 하인첼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짓을 갚아 주실 거예요. 이것은 독일인의 짓이 아니었어요. 아침에, 그러니까 화요일 아침 4시에 친위대원 7명과 형사 2명이 우리를 깨웠어요. 그들은 권총으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했고, 하인츠는 옷을 입고 따라가야 했어요. 우리는 문을 닫아야 했고 창문을 열어서도 안 됐어요. 오, 하느님, 그들이 우리 하인첼을 얼마나 거칠게 다뤘는지요. 그들은 3시에 벌써 길을 막아 놓았고 4시에 올라왔어요. 그러고는 그 애를 데려가서 슈테른 거리에서 쏘아 죽였어요, 즉결 처형으로요. 오, 그 불쌍한 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차라리 내가 따라갔더라면! 그 애는 심장에 3발, 팔에 1발, 목에 1발, 골반에 1발, 그리고 또 2발, 모두 여덟 발을 맞았어요. 그들은 그 애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농부들이 그 애를 개처럼 버려진 채로 찾아냈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날 아침 곧바로 M. 씨에게 달려갔어요. 하인츠가 나한테, 곧장 그분한테 가서 알려 드려, M. 씨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손을 잡고 약속했어, 하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그 애를 어떻게 도와주었던가요! 하인츠는 사람들을 너무 믿었어요. L. 부인, (…) 지금 관대 위에 누운 하인츠를 보셨다면, 부인께서도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부르셨을 거예요, 그토록 그 애를 학대했어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불쌍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그토록 학대할 수 있나요! 그리고 그 거짓말 신문들은, 하인츠가 도주 중에 사살되었고 다이너마이트 두 꾸러미를 찾아냈다고 하네요. 이런 비열한 짓이 있나요, 그런데 정의를 얻을 길이 없어요. 그들은 권총 한 자루도, 대수롭지 않은 쪽지 한 장도 찾아내지 못했어요. 내 연애편지 몇 통과 공책 몇 권만 찾아냈을 뿐인데, 신문들은 그런 선동을 써 대요. 하지만 이토록 거칠고 비열한 짓에 대해 나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부르겠어요. (…) 사람들은 모두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았어요. 저 사람들이 한 사람을 그렇게 비열하고 잔인하게 쏘아 쓰러뜨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장례식은 토요일 낮 1시 반 남부 묘지에서 있어요. 하인츠는 성직자의 집전으로 묻히고, 아주아주 많은 사람이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 해요. 내가 M. 씨한테 갔을 때 그분이 나를 어떻게 대했던가요! 어떻게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그렇게 쏘아 죽일 수 있느냐고 내가 말하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계속 이러시면 당신도 체포하게 하겠소!’ 어머니가 안부 전하시래요, 장례식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하인첼을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드려요. 안녕히 계세요, 안부 전해요. 나는 그 애를 결코 잊을 수 없어요, 그 애를 너무 사랑했으니까요! 제발 편지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애가 편지를 못 드렸다고 언짢아하지 마세요. 내 탓이었어요. 아,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내 사랑하는 착한 아들!”
10.5 “쏘아 죽이겠다”
(목격자 보고 – 사진 자료.) 기혼으로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성 노동자 그레테 메싱은 3월 6일 저녁 6시쯤 장바구니를 들고 젤브(바이에른)의 조머뮐렌 길에 있는 집을 나서서, 장을 보러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집에서 마흔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역시 조머뮐렌 길에 사는 라거라는 민족사회주의자와 마주쳤다. 그는 이 여성 노동자의 앞을 가로막고 “하일 히틀러”라는 인사로 그녀를 도발했다. 메싱 부인은 “적색 전선”이라고 받고는 지나가려 했다. 라거는 그녀를 붙잡고 성이 나서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쏴 봐!”
라거는 이 여성 노동자의 목에 브라우닝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메싱 부인은 치명상을 입었다. 남편이 그녀를 집으로 옮겼다. 그녀는 거기서 피를 쏟고 죽었다.
살인자는 그 고장의 나치 단골 술집으로 가서 독주 몇 잔으로 기운을 차린 뒤 “보조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구금되었다. 그러나 열흘 뒤 그는 벌써 풀려났다. 젤브 역에서는 환영 대표단이 그를 맞았다.
라거는 돌격대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 대신 피살자의 남편과 열아홉 살 난 아들이 바이로이트 노역소에 “보호 구금”되어 있다. 경찰과 보조 경찰은 젤브의 노동자 집들을 거듭 가택 수색한다. 그들이 찾는 것은 범죄자도 살인자도 아니라, 피살자의 치명상을 기록으로 남긴 사진 한 장이다. 독일에서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목숨이 걸린 일이다.
10.6 마흐노 숲의 시체들
(목격자 보고.)
1933년 3월 11일 모든 신문은 마흐노 숲[181]에서 총에 맞아 죽은 젊은이 세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경찰이 인적 사항을 확인했는데도 그것은 대중에게 숨겨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1. 프리츠 니치만. 도배공. 1909년 3월 1일 올덴부르크 출생. 베를린 쇠네베르크 거주. 무소속. 부모도 무소속.
2. 한스 발슈카트. 노동자. 1913년 8월 28일 베를린 출생. 베를린 쇠네베르크 거주. “적색 구원회”[182] 회원.
3. 프로이스. 23세. 베를린 고텐 거리 22번지 거주.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던 프리츠 니치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3월 8일 밤 9시 반, 니치만은 약혼녀와 함께 글레디치 거리에서 그루네발트 거리를 지나 지크프리트 거리 쪽으로 자기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이 슈투벤라우흐 거리와 에르트만 거리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빨간 승용차 한 대가 지크프리트 다리를 건너와 인적 없는 거리의 왼쪽으로 달려왔다. 차에서 제복 차림의 돌격대원 두 명이 뛰어내려(운전사는 사복 차림이었다) 니치만과 약혼녀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멈춰, 서, 신원 확인하게 따라와.” 돌격대원 세 명은 안전장치를 푼 권총을 손에 들고 있었다. 니치만은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그러자 돌격대원들은 말했다. “입 닥치고 타!” 니치만은 아무 잘못도 한 기억이 없었으므로 이 요구에 따랐다. 역시 무소속인 약혼녀가 함께 차에 타려 했지만, 돌격대원들에게 가슴을 세게 떠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니치만이 신원 확인 때문에 따라가야 할 뿐이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세게 떠밀리고 나서 울고 있던 약혼녀는 자동차 번호도, 돌격대원들의 옷깃에 달린 번호도 알아 두지 못했다.
자동차는 슈투벤라우흐 거리를 지나 하우프트 거리로 꺾어 들었다. 체포 직후 약혼녀는 니치만의 어머니에게 가서 그 일을 이야기했다. 거기서 그녀는 크림힐트 거리 경찰서로 가서 신고했다. 거기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한테 별일 없을 겁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내일 한 번 더 와 보세요.” 3월 9일 아침 8시 어머니가 같은 경찰서로 갔으나, 그녀도 약혼녀와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다만 경찰은 밤사이 모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니치만은 어디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낮 12시에 다시 오라고 했다. 12시에 아버지가 경찰서로 가서 실종 신고를 냈다.
니치만의 부모는 3월 11일까지 경찰에게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이날 9시에 경찰관들이 찾아와,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에 마흐노 숲에서 시체 세 구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났다고 알려 주었다. 인상착의를 듣고 아버지는 곧바로 그 셋 가운데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곧장 다시 경찰을 찾아갔지만, 경찰은 그때에도 아무것도 알려 주지 못했다.
낮 12시 아버지는 경찰청 본부의 살인 수사반으로 가서 수사를 지휘하는 경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돌격대가 니치만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경감은 아버지에게, 자기가 형사로 일하는 동안 이토록 잔인하고 난폭한 살인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사정을 설명하자 경감은, 자기와 부하들이 살인 사건을 밝혀내려고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시체 안치소에서 아버지는 경감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시체에는 모두 열 발의 총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8발은 등에, 1발은 목에, 1발은 턱에 맞은 것이었다. 시체를 사진으로 찍게 해 달라는 요청은 거부되었다. 감정인들의 소견이 엇갈릴 수 있다는 이유로 화장은 허락되지 않는다. 3월 15일 낮까지도 검찰은 시체들을 내주지 않았다.
이제 피살자의 아버지에게 두 사람이 서로 따로 찾아와, 니치만을 납치해 간 빨간 자동차의 번호를 똑같이 대고 있다. 그 번호는 I A 78087이다. 두 사람 다 그것이 빨간 차였다고도 증언한다.
두 번째 피살자의 납치는,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한스 발슈카트는 3월 8일 저녁 쇠네베르크 고텐 거리 14번지의 현관 앞에서 민족사회주의자 세 명에게 권총으로 위협당하며 체포되어 검은 자동차에 실려 갔다.
3월 10일 아침 발슈카트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오늘 내용물이 든 지갑을 하나 주웠습니다. 3월 11일 토요일 오후 6시에 저희 집으로 지갑을 찾으러 와 주십시오.
한스 슈미트, 포츠담 근교 보른슈테트
빅토리아 거리 26번지”
엽서가 왔을 때 아버지는 집에 없었고, 어머니가 이 엽서를 들고 형사 경찰에 갔다. 거기서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보른슈테트에 가지 말라고 했다. 동시에 알렉스(경찰청 본부)[183]로 전화가 갔고, 거기서 다시 보른슈테트로, 그리고 아직 마흐노 숲에서 작업 중이던 살인 수사반으로 연락이 갔다. 지갑은 검찰이 압수했다. 같은 날 아버지가 다시 형사 경찰에 갔는데, 거기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보른슈테트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지갑을 주웠다는 사람은 범인으로 의심되어 이미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지갑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의심을 산 것이라고 했다.
3월 11일 아버지는 아들의 시체를 보았다. 아들이 너무나 끔찍하게 망가져 있어서, 그는 곧바로 아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입술은 두툼하게 부어오르고 퍼렜으며, 턱은 얻어맞아 찢어져 있었다. 목과 후두와 가슴에는 퍼런 멍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세차게 걷어차여서 생긴 것 같았다. 팔과 가슴에는 피멍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결박당한 자국인 듯했다.
아버지가 대충 살펴본 바로는(아버지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게 막혔다) 피살자는 일곱에서 여덟 발쯤 총을 맞았다. 그 가운데 2발은 뒤통수에, 1발은 관자놀이에, 2~3발은 오른팔에, 그리고 1발은 오른쪽 가슴에 맞았다.
세 번째 피살자 프로이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체 답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국 철도의 기관사인데, 아들의 장례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장례는 복지 기관이 맡는다. 쇠네베르크에서는 나치가 프로이스를 잘못 골랐다는 말이 돈다. 피살된 프로이스는 나치와 가까웠다고 한다.
10.7 쇠채찍과 염산
(브라운슈바이크의 목격자 보고)
전신 가설공 그로테헤네는 아무런 정치적 직책도 맡지 않았다. 그는 국기단원이었다. 3월 27일 월요일, 돌격대원들이 그로테헤네를 찾아와 돌격대 술집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의 아내는 흔히 그렇듯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에 들라고 강요하려는 것이라 여기고, 남편에게 당장 입당하고 집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로테헤네는 나치들을 따라 돌격대 술집으로 갔다. 몇 시간이 흘렀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돌격대 술집 앞에는 마이어라는 나치가 서 있었다. 그로테헤네 부인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남편을 풀어 달라고 빌었다. 바로 그때 그로테헤네의 몸뚱이가 거리로 내동댕이쳐졌다. 남자는 피투성이 고깃덩어리가 되도록 얻어맞아 있었다. 몇 사람이 중상을 입은 그를 집으로 옮겼다. 그는 겉의 상처뿐 아니라 몸속의 통증도 호소했다. 독을 먹은 것 같아 사람들은 그에게 우유를 먹였다. 그는 토했다. 그의 입가에 흘러나온 거품을 닦아 주던 아내는 그가 토해 낸 산 때문에 손수건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보았다. G.는 이따금 정신이 들어 자기가 당한 고문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옷을 벗긴 채 세 시간 동안 쇠채찍으로 맞았다. 그 사이사이에 자기 옷으로 바닥의 피를 닦아 내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가 이를 악문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자, 돌격대원들은 그에게 염산을 먹이려 했다. 곧바로 되지 않자 억지로 입을 벌렸다. 그 바람에 윗입술 한쪽이 찢겨 나갔다. 그로테헤네는 엄청난 고통 끝에 4월 29일 저녁 숨졌다. 시신은 법원의 명으로 부검되었다. 사인은 “뇌졸중과 내부 화상”으로 확인되었다. 검찰이 사건을 맡았지만, 지금까지 책임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았다.
10.8 말 그대로 찢기다
(하이데나우의 목격자 보고들)
3월 초 하이데나우의 프리츠 굼베르트가 보호 구금되었다. 그는 “탄약과 무기를 땅에 묻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쾨니히슈타인 요새로, 거기서 다시 호엔슈타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거기서 그는 사슬에 묶여 고문을 당했다. 그가 견뎌야 했던 학대가 얼마나 혹독했던지 그는 숨지고 말았다. 그의 아내에게는 사인이 위장과 장의 출혈이라고 통보되었다.
그러자 하이데나우 공장들의 노동자들이 모금을 해서 시신을 하이데나우로 옮겨 오게 했다. 이는 허락되었지만, 관을 열지 않는다는 분명한 조건이 붙었다. 노동자들은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사람은 누구도 그것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얼굴은 온통 기워 붙여져 있었다. 보아하니 혀가 없었다. 두 팔에는 무거운 사슬 자국이 보였다. 몸 뒤쪽은 조각나고 구멍 뚫린 살점 덩어리였다. 항문은 출혈을 막으려는 넝마로 틀어막혀 있었다. 척추는 부러져 있었다. 생식기는 찢겨 있었다. 오른쪽 넓적다리는 찢어져 벌어져 있었다. 명치는 짓밟혀 꺼져서 창자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온통 물어뜯긴 입술은 굼베르트가 견뎌 낸 끔찍한 고통을 증언했다.
경악하고 분노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자 돌격대는 시신을 다시 압수했다. 망나니 킬링거[184]가 몸소 경찰과 의사들을 거느리고 현장에 나타났다. 사진기와 건판을 압수하려고 노동자 집들을 일제히 뒤졌다. 모든 증인에게 가장 무거운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며 입을 열지 말라고 했다. 시신을 본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소환되어 “주둥이를 닥치고 있으라”는 경고를 받았다.
4월 28일 금요일에 장례가 치러졌다. 3,000명 가까운 남녀 노동자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나왔다. 모든 진입로는 카빈총을 겨눈 돌격대가 막고 있었다. 행렬이 묘지 문 앞에 이르자 나치들이 덮쳐 행렬을 흩어 버렸다. 유족만 묘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덤 앞에서는 보란 듯이 하켄크로이츠를 단 성직자가 추도사를 했다.
10.9 두들겨 맞고, 찔리고, 짓밟히다
(목격자 보고)
3월 28일 밤 12시, 쾨니히스베르크 로베르트 거리 6번지에 사는 공산주의자 에돔이 자기 집에서 끌려 나갔다. 그가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쉬츠[185]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 시간 동안 그를 어찌나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던지, 그는 완전히 무력해지고 정신을 잃고 고통으로 실성한 채 쓰러져 쉬츠의 집을 불고 말았다.
새벽 2시 30분, 쉬츠가 같은 돌격대 막사로 끌려왔다. 그는 거기서 열두 시간 동안 두들겨 맞고, 찔리고, 짓밟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3월 29일 저녁 쉬츠는 병원에서 숨졌다. 사망 진단서에는 심장마비라고 적혀 있다.
4월 3일 쉬츠는 짐승처럼 땅에 파묻혔다. 독일 신문 어느 하나도 그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인들은 협박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고인의 아내는 그 며칠 동안 보호 구금되었다. 열두 살 난 아들은 장례 전에 아버지의 일그러진 시신 앞으로 떠밀려 갔다. 한 나치가 말했다. “네가 아버지 발자취를 따라가면 너도 이렇게 된다.”
10.10 콩팥이 터지도록 맞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5월 9일 자: “경찰 발표에 따르면, 2월 28일부터 보호 구금되어 있던 변호사 에크슈타인 박사가 월요일 오전 브레슬라우 아인바움 거리의 병원에서 폐렴과 신장염, 그리고 초기 정신병으로 숨졌다.”
에크슈타인의 죽음은 브레슬라우 노동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돌격대원들은 4월 28일 그를 체포할 때 벌써 “에크슈타인은 다시는 못 볼 거다”라고 말했다. 5월 1일 전야에 브레슬라우의 보호 구금자들을 악대를 앞세운 개선 행렬로 갈색 회관(노이도르프 거리)에서 강제수용소(슈테흘라우 가도)로 끌고 갈 때, 에크슈타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신문들은 그가 감옥에서 “자해”했다고 보도해야 했다. 그는 이미 그때 감히 사람들 앞에 내보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따로 새로 세운 수용소로 옮겨졌다. 학대는 계속되었다. 짐승 같은 매질로 그의 콩팥은 터져 버렸다. 정신을 잃도록 맞은 그를 찬물을 양동이로 끼얹어 다시 깨우는 동안 “폐렴”이 덧붙었다. 그의 살인자들의 행동이 독일 정부가 길러 낸 정상 상태에 들어맞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부를 것이다.
10.11 감옥에서 린치당하다
슘 사건에 관한 다음 세 가지 공식 보도는 파시스트 보도 기관의 수법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첫째,
“킬, 4월 1일, 텔레그라펜 우니온. 11시쯤 유대인 가구점 슘 앞에서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유대인 가게 주인의 아들이 친위대원 한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동료 한 사람이 그를 도우러 오자, 두 친위대원과 달려 나온 가게 주인 및 그 아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그러다 총이 한 발 발사되어 킬 출신의 22세 친위대원 발터 아스트할터가 가슴에 중상을 입었다.”
실제로 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유대인 상점 불매 운동 중에 돌격대 한 패가 가구상 슘의 가게를 점거했다. 밀고 들어온 자들은 주인을 괴롭혔다. 가구상의 아들인 변호사 슘이 이에 맞섰다. 말다툼이 벌어지고 몸싸움이 일었고, “그러다 총이 한 발 발사되어” – 그것도 돌격대원 가운데 한 사람 쪽에서 – 다른 돌격대원이 중상을 입었다.
둘째,
“킬, 4월 1일, 볼프 전신국. 오전에 아버지의 가게 앞에서 돌격대원 한 사람에게 몇 발의 총을 쏘아 그에게 배에 중상을 입힌 가구상 슘의 아들이, 그가 끌려가 있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몇몇 사람이 경찰 본부에서 슘의 감방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 총탄에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시신은 법의학 연구소로 옮겨졌다.”
두 번째 보도는 벌써 “정정”되어 있다. 아예 무기도 갖고 있지 않던 슘이 “한 발”을 쏜 것이 아니라 “몇 발”이나 쏘았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이 보도는 슘 살해의 정황을 꽤 사실대로 전한다. 다만 오전의 유혈 사태의 증인을 없애려고 바로 그 돌격대원들이 슘을 죽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두 보도 모두 너무 속이 들여다보이고, 서툴고,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게 쓰여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날 오후 중앙 공보국이 나서서 모든 면에서 깨끗이 손질하고 모든 면에서 거짓인 세 번째 보도를 내놓았다.
셋째,
“킬, 4월 1일, 볼프 전신국. 유대인 변호사이자 공증인인 슘이 오전 11시 30분쯤 케덴 거리에서 친위대원 발터 아스트할터를 배에 총을 쏘아 쓰러뜨렸는데, 지금까지의 보도에 따르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었다. 친위대원은 병원에서 숨졌다. 주지사가 지시한 변호사 슘의 이송이 이루어지기 전에 흥분한 군중이 경찰서 유치장 앞에 몰려들었다. 흥분한 군중은 경찰서 유치장 안으로 밀고 들어갔고, 거기서 슘은 권총에 맞아 죽었다.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경찰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군중은 케덴 거리에 있는 변호사 슘의 아버지 가게에도 밀고 들어가 집기를 부수었다.”
이 보도로도 이제는 사건의 실제 경과를 두고 세상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보도에는 또 하나의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앞으로 이런 사건을 – 아예 숨길 수 없는 경우에 한해 – 제국 선전장관 괴벨스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알리는 방식의 본보기로 보아야 한다. 바로 그날 저녁, 앞에서 인용한 규정, 곧 “사건에 관한 보도”는 사전 허가 없이는 할 수 없고 공식 문안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은 금지된다는 규정이 공포되었다.
10.12 창밖으로 떨어지다!
4월 16일 도르트문트에서 광원 지도자 알베르트 푼크[186]가 한 민족사회주의자의 눈에 띄어 경찰에 밀고되었다. 알베르트 푼크는 오랫동안 광원 파업을 이끌어 온 사람으로,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고 광원 통일 연맹의 지도자였다. 혁명적 광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알베르트 푼크는 당과 연맹의 울타리를 훨씬 넘어 루르의 광부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었다.
알베르트 푼크는 도르트문트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그는 편지 한 통을 몰래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했는데, 거기서 다른 수감자 일곱 명이 당한 끔찍한 학대를 알렸다. 처음 며칠 동안 푼크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
신문들은 그의 체포에 대해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최악의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베르트 푼크를 두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는가? 왜 그의 체포를 숨겼는가?
4월 26일, 열흘 동안 갇혀 있던 알베르트 푼크가 살해되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면회하러 도르트문트 경찰서 유치장에 왔다. 관리자 측은 남편이 감방에서 음독자살했으므로 더는 만날 수 없다고 그녀에게 전하게 했다. 이튿날인 4월 29일, 루르 지방 신문들에는 레클링하우젠·겔젠키르헨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무기, 다이너마이트 창고, 테러 집단 따위가 발견되었다는 대대적인 “충격적 폭로”가 실렸다. 이와 관련해 이런 발표가 나왔다. 체포된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알베르트 푼크가 레클링하우젠 미결수 구치소에서 무모하게 탈옥하려다 4층 창문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려 척추와 팔다리가 여러 군데 부러졌고, 의식이 또렷한 채 병원에 실려 갔으나 곧 숨졌다는 것이다. 푼크가 이미 두 주일쯤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감추어졌고, 그가 어째서 갑자기 도르트문트에서 레클링하우젠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한마디 설명도 없었다.
광원 지도자 알베르트 푼크는 더없이 끔찍한 학대로 실성 직전에 이르렀고, 고문자들에게 떠밀려 창밖으로 떨어졌다. 마침 감옥 마당에 있던, 피살자와 함께 갇힌 동지들이 충격에 비명을 지르자, 살인자들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모스크바 돼지 놈들, 너희도 따라 뛰어내려라!”
10.13 게오르크 벨 박사에 대한 페메 살인
4월 5일 게오르크 벨 박사가 쿠프슈타인 근처 오스트리아의 마을 두르히홀첸에서 돌격대 지도부의 살인 특공대에게 희생되었다.
두르히홀첸의 총성은 한 모험에 찬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게오르크 벨은 누구였던가?
1930년 초까지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만 그 존재를 아는 첩자였다. 1930년 1월에야 비로소 그는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그때 그는 (이미 그 전에 뮌헨에서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체르보네츠 위조 재판[187]에서 피고석에 함께 앉아 있었다. 소련 지폐를 위조해 소련을 곤경에 빠뜨리고 남쪽 공화국들을 러시아에서 떼어 내자는 계획은 그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벨은 이 재판에서 대단히 교묘하게 처신했다. 그러잖아도 노동자·농민 국가를 겨냥한 음모를 너무 깊이 들추지 않으려 애쓰던 법정이 벨에게 곤란한 대목을 건드려야 할 때마다, 그는 독일 정치가들과의 관계를 털어놓겠다고 위협했다. 그렇게 그는 기꺼이 휘둘려 주는 법정을 휘둘렀고, —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에서 한 가지 사실만은 드러났다. 이 위조의 배후 인물은 영국의 석유왕 헨리 데테르딩 경[188]으로, 그는 이런 식으로 소련이라는 석유 경쟁자와 싸우고 새 유전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것이다. 데테르딩은 독일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자금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그의 반소·반노동자 계획을 위한 가장 좋은 앞잡이였다. 그리고 데테르딩과 나치를 잇는 연락책이 바로 게오르크 벨이다. 이 사실은 1932년 중반 뮌헨에서 열려 세상을 크게 들끓게 한 두 번째 재판에서 알려졌다. 페메 살인자 슐츠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전국 지도자 슈바르츠[189]가 사회민주당 신문 《뮌헨 포스트》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 재판이었다.
뮌헨 재판의 발단이 된 사실은 무엇이었는가? 1932년 2월 중순 《뮌헨 포스트》는 비밀 정보를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안에는 눈엣가시 같은 인물들을 없애는 임무를 맡은 특별 부서가 있었다. 그 부서의 이름은 “G 세포”였다.
이 재판에서 벨은 증인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어느 날 룀이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가장 새로운 소식 들었소? 우리를 죽이려 한다오. 당신하고 뒤 물랭에카르트하고 나를 말이오.’ 그는 처음에 믿으려 하지 않았는데, 룀이 자세한 내용을 알려 주면서 부흐 소령이 그 배후에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는 어느 카페에서 슈바이카르트를 만났다. 슈바이카르트도 그에게 그가 살해될 것이라는 사실을 벌써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슈바이카르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찰국에 한마디만 하면 그 돼지 같은 패거리를 몽땅 감옥에 처넣을 수 있어.’ (‘돼지 같은 패거리’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전국 지도부를 가리킨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슈바이카르트는 그에게 물었다. ‘네 살인자를 만나 보고 싶나? 곧 여기 올 거야.’ 실제로 그러자 카를스루에의 호른 박사가 그 가게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1932년 7월에 열린 이른바 단차이젠 재판[190]에서, 룀과 뒤 물랭에카르트는 동성애 성향 때문에, 벨은 그것을 알고 공갈에 써먹었기 때문에 “해치워질” 예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령을 내린 자의 지시는 분명했다.
“빌란트 II, 국외, 일자 …
헬레네에게. 즉시 졸른(부흐 소령)과 연락할 것. 그 전에 집으로 전화할 것. 집주인 여자가 사정을 안다. 사실관계는 이렇다. 뒤 M. 백작은 예전부터 제175조 관계로 R.과 아는 사이다. R.은 벨이라는 자에게 공갈을 당하고 있다. 뒤 M.은 R.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행동해야 한다. 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뚱보 토끼가 울 건을 맡는다. 귀(귄슈)는 자기 조 전원과 함께 벨 건을 맡는다. 50호실 건(50호실은 뒤 물랭 백작이 묵고 있는 방)은 가장 위험한 건이므로 당신이 맡는다. 바퀴 나사를 풀 것(파란 작업복) 또는 더 좋은 방법. 50호실은 오펠 1050을 몬다. 토끼에게 강한 압력을 넣을 것. 실패할 경우 법적인 뒷수습은 마련되어 있다. 집주인 여자가 주소를 안다.
빌란트 II”
벨 박사가 “지도자들”의 사생활을 너무 많이 알았다는 것만이 그가 제거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를 제거한 것은, 일찍이 그와 그의 친구 룀이 보호를 구하며 사회민주당 신문에 호소했던 바로 그 “G” 그룹이었다.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국회의사당 화재에 대해, 괴링·괴벨스·하이네스·룀의 가담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다는 것이다. 도구였던 판데르루버도 그의 첩자였고, 그는 판데르루버가 전하는 말에서 그 연락책들을 짐작해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앞 장에서 분명히 증명했다. 그러나 돌격대 지도부, 곧 괴링과 룀도 그들의 광범한 밀정망을 통해 벨이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그가 또다시 그 지식을 돈으로 바꾸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룀은 벨 박사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소문을 들은 벨은 먼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탈당했다. 계속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그의 아내와 딸은 돌격대에 인질로 붙잡혔다. 벨의 친구인 돌격대원 콘라트를 통해 룀은 그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벨은 전보를 보내 전능한 룀에게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룀은 자신의 가까운 경호대원 네 사람에게 벨을 독일로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헤어질 때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놈을 산 채로든 죽여서든 데려와라. 하지만 산 채로 데려오는 게 더 좋다. 그러니 군말 없이, 머리를 한 대 치고, 차에 처넣고, 앞으로 갓, 국경을 넘어라!” 룀의 살인 특공대는 나치당 지도부의 차를 타고 갔다. 그 밖에도 친위대 최고 지휘자를 겸하는 뮌헨 경찰청장 힘러가 보조 경찰로 근무하는 돌격대원들을 태운 차 한 대를 따로 내보냈다.
그사이 콘라트에게서 전보로 경고를 받은 벨은 마침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그때 추격자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그들의 차를 타고 독일로 가기를 거부했다. 대답은 여섯 발의 총알이었다. 모두 명중했다. 세 발은 머리에, 두 발은 가슴에, 한 발은 배에. 벨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10.14 투시가 살해
에리크 얀 하누센, 본명 헤르슈만슈타인슈나이더는 1882년 7월 2일[191] 빈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고, 본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로스니츠다. 그는 곡예사가 되고, 전쟁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을 위해 점막대기로 수맥 찾는 실험을 하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버라이어티 극장 무대에 선다. 그러면서 손재주 마술을 “초자연적 힘의 작용”이라고 내세우다가 여러 번 체포되고, 빈과 메멜에서 추방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큰 규모의 투시가 활동을 한다. 운 좋게도 한 헌병에게 사기죄로 고발을 당한다. 그는 가장 위험한 증인, 곧 속임수로 그의 “투시”를 가능하게 해 주던 비서 에리히 윤이 법정에 나오지 못하게 막는 데 성공한다. 라이트메리츠 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이 광고 효과를 등에 업고 그는 독일에서 투시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특히 정치 문제까지 예언의 범위에 끌어들인 뒤로 그는 많은 사람을 끌어모은다. 강령회와 강연회를 열고, 《하누센의 다채로운 주간 화보》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부자가 된다. 1930년 9월 14일 나치가 선거에서 승리한 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가 된다. 대중의 분위기를 좇아 그는 히틀러를 널리 알리기 시작한다. 여권을 위조해 “판(van)”이라는 낱말을 끼워 넣고, 이제 귀족 가문의 아리아인이 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돌격대원이 되고, 나치 고위 지도자들, 특히 헬도르프 백작의 친구가 된다. 1932년 12월 《앙그리프》이 어느 사기 재판을 계기로 그를 “체코 유대인”이라고 부르자, 헬도르프가 개입하고 《앙그리프》은 해명 기사를 싣는다. 그는 자기 자동차를 돌격대에, 자기 돈을 돌격대 지휘관들에게 내주고, 돌격대 중대 하나의 보호를 받는다. 그의 운전사는 돌격대 대대장이다.
1월 30일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되자, 그사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하누센은 히틀러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해 히틀러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찬양한다.
“민족 봉기” 뒤에 하누센은 기고만장해졌다. 그는 자신이 출연하던 베를린의 버라이어티 극장 “스칼라”에서 밤마다 자신을 제3제국의 예언자로 떠받들게 했고, 유대인 회사와 신문 출판사들을 찾아가 돌격대와의 좋은 관계를 내세워 돈을 뜯어냈다. 그렇게 그는 획일화된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의 출판 담당 이사 카를 페터에게도 찾아가, 나치들의 온갖 공격에서 그를 지켜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모세 회관[192]의 나치 판무관 폰 오스트도, 헬도르프와 다른 돌격대 지휘관들도 자기에게 큰돈을 빚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페터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스트를 찾아가 상당한 액수의 수표를 건네며 하누센에게 휘둘리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스트는 대답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소!” 오스트는 괴링과 헬도르프와 힘러를 찾아갔다.
바로 그날 저녁, 3월 24일, 하누센은 “스칼라”에서 무대에 오르기 전에 체포되었다. 관객들에게는 그가 신경 쇠약으로 쓰러졌다고 알렸다.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하누센이 가짜 서류로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베를린 경찰청에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는 하누센을 차에 태워 베를린 가까운 초센 근처의 바루트로 끌고 갔다. 열흘 뒤 산책하던 사람들이 그곳 숲 덤불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여섯 발의 총알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져 있었다. 돌격대 최고 지도부의 숱한 비밀을 아는 또 한 명의 위험한 공모자가 민족사회주의 페메에게 제거된 것이다.
10.15 쾨페니크의 바르톨로메오 밤
독일의 많은 도시 지역에서 돌격대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예고하던 “긴 칼의 밤”을 그야말로 실행에 옮겼다. 6월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밤, 베를린 교외 쾨페니크에서 돌격대의 짐승 같은 살육이 시작되어 며칠 동안 날뛰었다.[193] 사회민주당과 국기단과 공산당의 일꾼들이 그 희생자가 되었다.
6월 21일 돌격대는 쾨페니크 주택 단지에 사는 노동조합 서기 슈마우스의 집을 두 차례 수색했다. 무기를 찾는다는 구실이었다. 밤에 돌격대는 세 번째로 와서, 체포해 둔 슈마우스의 공산주의자 사위를 끌고 와 총을 여러 발 쏘며 집으로 쳐들어갔다. 슈마우스에게는 정신 박약인 스물두 살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총소리에 잠이 깨어 옷도 입지 않은 채 권총을 손에 들고 돌격대 앞에 나섰다. 어머니가 놀라서 그에게 “쏘지 마!” 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총을 쏘았고, 밀고 들어오던 돌격대원 둘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러자 도살이 시작되었다. 슈마우스의 사위 라코프스키는 그 자리에서 집 앞에서 돌격대에게 사살되었다. 슈마우스의 아들은 체포되어 맞아 죽었다.
슈마우스는 돌격대에 의해 집 안에서 목매달렸다. 어머니 슈마우스는 “쏴 버려!”라고 외쳤다는 누명을 돌격대원들에게 썼다. 그녀는 고문을 당해 며칠 만에 숨졌다.
주택 단지와 쾨페니크 전역과 프리드리히스하겐에서는 그날 밤 안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잠자리에서 끌려 나갔다. 그 가운데는 국기단 지도자이자 메클렌부르크의 전 주 총리 요하네스 슈텔링, 쾨페니크의 55세 국기단 일꾼 파울 폰에센, 프리드리히스하겐의 전 국기단 지도자인 57세의 아스만이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이 그 살인 막사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한 사회민주당원 목격자가 이렇게 전한다.
“차는 우리를 쾨페니크 법원 구치소로 데려갔다. 구 법원 앞 광장은 돌격대원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그러나 돌격대 중대장이 고함쳤다. ‘멈춰, 길거리에서는 때리지 마!’ 하지만 우리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일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계단 위로, 긴 복도를 따라 내몰렸다. 큰 감방 하나에 동지 열 명이 벽을 보고 서 있었고, 바닥과 벽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피 묻은 옷을 입은 늙은 여자가 바닥을 문질러 닦아야 했다. 돌격대원 로제가 내게 물었다. ‘이 창녀 알아?’ 자세히 보니, 기겁하게도 내 아내의 어머니였다. 이어서 로제는 카이저 동지에게 다른 동지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라고 했다. 카이저가 머뭇거리자 그 자신이 로제에게 주먹을 맞아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그다음 동지들은 몽둥이에 떠밀려 피가 날 때까지 서로 때려야 했다. 로제는 ‘드디어 잡았다, 이 마르크스주의자 돼지 놈아’라는 말로 나를 맞았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쳤고, 그의 패거리도 그를 따라 했다. 모두 머리와 수염이 잘렸고, 내 머리는 하켄크로이츠 모양으로 깎였다. 한 공산주의자는 일부러 가위로 코를 베였는데, 그때 지휘자가 고함쳤다. ‘살가죽이 좀 같이 떨어져도 상관없어, 붕대는 있으니까.’ 그런 뒤 우리는 몽둥이와 곤봉을 든 돌격대원들이 늘어선 사이를 열 번쯤 지나가며 몰매를 맞아야 했다. 나이 든 사람 몇은 그러다 쓰러졌다. 그사이 엄청난 승리의 함성 속에 55세의 파울 폰에센 동지가 끌려 들어왔다. 그는 오랫동안 실업자였고, 막 병원에서 나온 참이었으며, 한쪽 눈이 멀었고,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참전 군인이었다. 그들은 먼저 그의 얼굴을 치고, 바지를 끌어내린 뒤 드러난 몸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몽둥이와 곤봉으로 때려 그가 정신을 잃게 했다. 그러자 한 돌격대 지휘관이 말했다. ‘자, 돼지 한 마리 끝났군.’ 폰에센 동지는 그 뒤 고문자들이 입힌 끔찍한 상처로 숨졌다. 아직 서 있을 수 있는 수감자들은 로제의 지휘 아래 몇 시간이고 서로 권투를 해야 했다. 지치면 고무 곤봉과 몽둥이로 더 열심히 하라고 몰아붙였다. 나는 그때 얼굴이 퉁퉁 붓고 피투성이 덩어리가 되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사람과 맞붙어 권투를 해야 했다. 그다음 우리는 한 사람씩 매를 맞으며 감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한 시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매질이 되풀이되었다. 마침내 나는 돌격대 대대장 게리케 앞에 끌려갔다. 절망한 나머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러자 게리케는 당분간 나를 더 때리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총살될 것이라고 했다. 얼마 안 가 감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쾨페니크 알비처 광장에 사는 돌격대 중대장 코볼트가 돌격대원 몇과 함께 뛰어들어 나를 마구 때리며 고함쳤다. ‘이 건달 놈, 오늘 끝장내 주마!’ 그들은 나를 복도로 끌고 가 장모의 감방으로 데려갔다. 돌격대원 둘이 나를 붙잡고 있는 동안, 코볼트와 다른 자들이 쉰세 살 된 그 여자를 몽둥이로 때려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녀는 지금 정신 착란을 일으켜 요양소에 있다. 나는 내가 아는 하셰 형제, 아주 젊은 두 사람이 끔찍하게 얻어맞는 것도 보았다. 이 학대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새로운 폭행조가 번갈아 가며 계속 들어왔다. 오후 4시에 나는 감방에서 끌려 나왔고, 당장 집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분대장 코볼트가 돌격대원 셋과 오토바이를 타고 앞서갔다. 나를 불쌍히 여긴 한 돌격대원이 내가 살해될 것이라고 귓속말을 해 주었다. 길은 숲을 지나갔는데, 거기서 나는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이 목격자는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서 슈텔링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자루에 넣어 꿰매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슈텔링의 시신이 피노 운하에서 건져 올려졌다. 동시에 신원 모를 시신 두 구가 더 뭍으로 올라왔다. 아직도 열한 명이 행방불명이었다. 7월 12일 프리드리히스하겐에서는 아스만의 시신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돌격대 지도부는 이 “긴 칼의 밤”을 일부러 조직했다. 바로 그 무렵 “제2의 혁명”으로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사회주의적” 요구를 실현하라고 다그치던 돌격대원들의 커져 가는 불만을,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일 자유를 내줌으로써 딴 데로 돌리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히틀러가 대자본가 집단의 요구를 더 노골적으로 받아들이던 바로 그 나날에, 독일 곳곳에서 살인의 수가 늘어난다!
11 제3제국의 살인 명부
— 1933년 7월 29일 마감. —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반쯤 실성하셨습니다. 저도 이제 아주 정상은 아닙니다.” (독일에서 살해된 한 노동자의 딸이 보낸 편지)
아래에 우리는 살해된 노동자와 지식인 명단에서 뽑은 일부를 공개한다. 우리 손에는 돌격대가 저지른 살인 500여 건에 관한 보고가 들어와 있다. 오늘 우리는 그 가운데 250건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 자료는 독일 당국의 공식 발표, 정정되지 않은 신문 보도, 그리고 우리나 우리가 믿는 대리인 앞에 나와서 한 증인들의 진술에 근거한다.[194]
3월 3일
- 게르데스, 공산당 주의회 의원, 올덴부르크, 길에서 사살(WTB[195]).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3월 16일: “주 정부는 결코 이 행위를 시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구금된 자들에 대한 소송 절차를 중지했다 …”)
- 신원 불명의 공산주의자, 모이르스군 홈베르크, 권총에 맞아 사망(WTB).
(WTB: “경찰은 이에 덧붙여, 범인을 정적들 사이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 신원 불명의 국기단원, 브레멘, 길에서 사살(WTB).
- 신원 불명의 노동자, 베른부르크,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사살(WTB).
- 구스타프 제게브레히트, 베를린 리벤발더 거리 44, 리벤발더 거리 41의 술집 슈테판에서 동맥에 총을 맞아 사망(목격자 보고).
- 베른하르트 비르싱, 베를린 페트리 거리 8/9, 자기 집에서 돌격대에게 사살(목격자 보고).
- 에벨링, 노동자, 마그데부르크, 브레켄 거리에서 배에 총을 맞아 사망(목격자 보고).
- 바이스, 사회민주당 인민회관 관리인, 보름스, 사살(목격자 보고).
- 이름 모를 소녀, 보름스, 인민회관 습격 때 사망(목격자 보고).
- 파비안, 공산당원 노동자, 켈링후젠, 총에 맞아 병원에서 사망(WTB).
3월 4일
- 이름 모를 노동자 두 명, 쾰른, 총격전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WTB).
- 이름 모를 “강철 전선”[196] 회원, 탈레슈바일러, 길에서 사살(WTB).
(WTB: “선전 행진 때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단골 술집에서 약 20발이 발사되었다.”)
- 프리드리히 마르크바르트, 뒤셀도르프 베렌 거리 14, 무소속, 튕겨 나온 총알에 맞아 사망(목격자 보고).
3월 5일
- 클라센과 드롱그빌, 오버하우젠(라인주), 실업 김나지움 마당에서 “도주 시도” 중 사살(WTB). 두 사람 모두 앞쪽에서 총을 맞았다(목격자).
- 바르니케, 피네베르크 근처 크비크보른, 사살(WTB).
(피살자의 아내에게 온 편지: “당신 남편이 살해당했다고 당신한테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소 … 머지않아 당신과 당신 아들도 상여에 눕게 될 거요.” 아들은 여덟 살이다.)
- 이름 모를 국기단원, 중부 독일, 칼에 찔려 사망(WTB).
- 바시 형제 두 명, 상슐레지엔 반카우, 돌격대에게 살해(목격자 보고).
- 카를 타르노, 베를린 마리엔도르퍼 길의 프리덴 주말농장 단지 거주, 노이쾰른 크네제베크 거리에서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3월 6일
- 그레테 메싱, 여성 노동자, 젤브, 길에서 총에 맞아 쓰러짐(WTB). (보고 참조.)
- 한스 바우어, 무소속 노동자, 베를린 모아비트, 프리드리히 거리 234(헤데만 거리)의 돌격대 막사에서 돌아오지 못함(목격자 보고).
- 프리틀렌더, 제빵 견습공, 19세,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 알렌슈타이너 거리 11, 헤데만 거리 돌격대 막사에서 살해(《베를리너 타게블라트》).
3월 7일
- 베른하르트 크라우제, 공산당원 노동자,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 근처 비제나우, 돌격대에게 사살(WTB).
- 이름 모를 노동자 두 명, 함부르크, 돌격대가 노동자들을 습격. 노동자 두 명이 죽고 여덟 명이 중상을 입었다 …(WTB).
- 이름 모를 노동자, 뒤셀도르프, 레베트초 거리에서 습격당해 사망(TU).
3월 8일
- 이름 모를 공산당원 노동자, 함부르크 근처 빌슈테트, “도주 시도” 중 사살.
- 필리프, 노동조합 회관 관리인, 브레슬라우, 노동조합 회관 점거 때 사살(WTB).
- 하인리히 슈파를리히, 건설 노동자, 브레슬라우,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등을 칼에 찔리고 총을 맞아 사망(《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 발슈카트, 니치만, 프로이스, 베를린 쇠네베르크. 3월 11일 마흐노 숲에서 시체로 발견(《포시셰 차이퉁》). (보고 참조.)
- 이름 모를 공산당원 노동자, 보훔뒤스테른, 공식 발표에 따르면 … 길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TU).
- 이름 모를 노동자, 보훔, 밤에 자기 집에서 낯선 남자 여섯 명에게 습격당해 총에 맞아 쓰러짐(TU).
- 블레스, 국기단원, 오펜바흐, 3월 5일 돌격대의 투표소 습격 때 치명상을 입고 사망(목격자 보고).
3월 9일
- 이름 모를 국기단원, 뮌헨, 뮌헨 노동조합 회관에서 썩은 시체로 발견(목격자 보고). (3월 1일 노동조합 회관 점거 때 뮌헨 신문들에 “실종자”로 보도된 국기단원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 란트그라프, 출판사 사장, 켐니츠, 《폴크스슈티메》 점거 때 사살(TU).
- 헬푸흐, 공산당원 노동자, 뒤스부르크, 뒤센 구역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WTB).
3월 10일
- 빅스 부인, 70세, 베를린 바이센제, 랑한스 거리 돌격대 분대원들이 집 문을 뚫고 총을 쏘아, 아이를 안고 있던 B. 부인이 치명상을 입음(WTB).
- 헤르만, 시계공, 드레스덴, 국제 노동자 구원회(IAH)[197] 간부, 집에서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불법 신문 《드레스드너 아르바이터슈티메》에 실림).
- 한스 자일레, 광고부장, 브라운슈바이크, 《폴크스프로인트》 점거 때 사살(목격자 보고).
- 울리히, 헤센 사회민주당 지도자, 학대 끝에 사망(《베를리너 타게블라트》).
(헤센 주지사 베르너 박사가 살해된 울리히의 미망인에게 조문 편지를 보냈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는 이 신성모독에 관한 기사에 “기사도적 행위”라는 제목을 달았다.)
- 이름 모를 노동자 두 명, 초파우, 돌격대에게 사살(《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
- 알프레트 페츨라프, 공산당원 노동자, 베를린 쇠네베르크 놀렌도르프 거리 10, 돌격대가 집에서 끌고 감, 시체는 완전히 일그러진 채 프리스터베크역 옆 주말농장 단지에서 발견(목격자 보고).
- 쇼인플뤼겔, 노동자, 켐니츠 근처 베르나우, “빗나간 총알”에 맞아 사망(《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
3월 11일
- 에리히 마이어, 청년 노동자, 슈판다우, 맞아 죽음(《프랑크푸르터 차이퉁》).
(빈 《아르바이터 차이퉁》, 3월 25일: “… 나치 20명이 … 오두막 지붕에 기어 올라가 … 그 위에 짚단을 펼쳐 놓고 … 단지 전체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다 …”)
- 로베르트 디트마르, 노동자, 베를린 근처 카를스호르스트,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
- 이름 모를 노동자, 브레슬라우, 칼에 찔려 사망(TU).
- 푀르스터와 탄들러, 공산당원 노동자, 켐니츠 근처 림바흐, 도주 중 사살(목격자 보고).
- 파울 크란츠, 청년 노동자, 켐니츠 근처 림바흐, 도주 중 사살(WTB).
(목격자 보고: “K.는 아버지가 있는 곳을 대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 의식을 잃고 쓰러질 만큼 두들겨 맞았다. 다시 정신이 들게 하고는 … 고문을 되풀이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자 그를 벽에 세워 놓고 쏘아 죽였다. 살인자는 민족사회주의자 몰츠다.”)
- 이름 모를 남자, 무소속, 오펠른, 시청 계단에서 사살(《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
3월 12일
- 크레세 시의원, 사회민주당원, 마그데부르크, 펠겔레벤의 투표소에서 사살(TU).
- 아이히홀츠와 카터, 노동자, 톨케미트, “도주” 중 사살(TU).
- 슈피겔, 사회민주당원 변호사, 킬, 집에서 습격당해 사살(WTB).
(“민간인 살인”으로 그려졌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킬, 3월 26일: “경찰 수사는 … 지금까지 범인 체포로 이어지지 못했다 … 적어도 네 사람이 가담했다 … 그 가운데 두 사람이 범행하는 동안 … 나머지 두 사람은 이웃집 앞에서 망을 보았다.”)
3월 13일
- 신원 불명의 노동자, 엘빙, 마이스너셔 그룬트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채 발견(TU).
3월 14일
- 크루크, 슈바인푸르트, 돌격대원이 “정당방위”로 사살(TU).
- 이름 모를 노동자, 함부르크, 형사들에게 사살(WTB).
- 레오 크렐, 편집자, 베를린, 맞아 죽음(보고 참조).
3월 17일
- 신원 불명의 두 사람, 엘빙, “도주” 중 사살(《나흐트아우스가베》).
3월 18일
- 발터 슐츠, 공산당원 노동자, 비트슈토크안데어도세, 교도소에서 살해(목격자 보고).
- 한스 작스, 공장주, 켐니츠, 사살(WTB).
(《데어 타크》, 켐니츠, 3월 19일: “잘 알려진 메리야스 공장 마르셸 프랑크 작스 주식회사의 공동 사장이 어제저녁 보호 구금[198]을 당하게 되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 지크베르트 킨더만,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카이저 프리드리히 거리, 헤데만 거리로 끌려가 맞아 죽고 창밖으로 내던져짐(《베를리너 타게블라트》).
- 이름 모를 노동자, 베를린 베딩 게리히트 거리, 노발리스 거리의 돌격대 술집에서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3월 19일
- 크레프스, 공산당원 노동자, 베를린 모아비트 비르켄 거리 54, 돌격대가 길에서 사살(목격자 보고).
3월 20일
- 귄터 요아힘, 변호사, 베를린, 울라프[199]에서 고문당하고 모아비트 국립 병원에서 사망(《포시셰 차이퉁》).
- 쿠르트 포사너, 베를린–빈, 사살. 페메(비밀 처형) 살인인가? (빈 신문들)
(빈, 3월 21일: “일주일 전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 활동 혐의로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이송되던 중 사살되었다. 오랫동안 독일 민족사회주의자들과 오스트리아 민족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연락 장교였으나, 최근 지도부와 사이가 틀어졌다.”)
3월 21일
- 오토 젤츠, 슈트라우빙, 사살(목격자 보고).
3월 22일
- 발터 뵈게, 에버스바흐, 사회민주당 《폴크스차이퉁》 점거 때 뢰바우에서 체포. “도주” 중 사살(《포시셰 차이퉁》).
- 빌헬름 벤첼, 공산당원 노동자, 에센, 길에서 사살(WTB).
(《포시셰 차이퉁》, 3월 22일: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밤, 보조 경찰관 한 명이 에센의 29세 W. W.를 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W.는 병원에 실려 간 직후 숨졌다.”)
- 드레셰, 드레스덴, 살해된 채 발견(목격자 보고).
- 파울 로이터, 베를린 젤초버 거리, 돌격대에게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3월 23일
- 에리히 랑게, 전 친위대원, 겔젠키르헨, 돌격대에게 사살(목격자 보고).
- 프랑크, 국기단원, 보름스, 전쟁에서 전사한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 프랑크의 조카, 이른바 자살(《운저레 차이트》). (목격자 보고: “침대에서 끌려 나가 학대당하고 마구간에 목매달렸다.”)
- 헤르베르트 판게리츠, 노동자, 베를린 N 베르크 거리 78, 학대당하고 우르반 병원에 실려 간 직후 사망(목격자 보고).
(의사의 사망 진단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인은 방광이 짓밟히고 두개골이 박살 나 생긴 심한 내부 손상이다.”)
3월 24일
- 아르베츠 부인, 여성 노동자, 글라트바흐레이트, “도주 시도” 중 사살(TU).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제목: “공산당 계집 사살.”)
- 에리히 페를, 청년 노동자, 17세, 라이프치히, 나치 막사에서 풀려난 뒤 길에서 사살(목격자 보고).
(목격자 보고: “나치들은 두 줄로 늘어서서 노동자들이 그 사이로 지나가게 했고, 그때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매를 맞았다. 그들이 다음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권총이 잇달아 불을 뿜었다 … 페를은 배에 다섯 발, 폐에 한 발, 허벅지와 팔에도 총을 맞고 병원에 실려 갔고, 스무 시간 뒤에 숨졌다.”)
- 하우스, 전 군수, 사회민주당, 도르트문트, 아이힐링호펜의 길가 도랑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프랑크푸르터 차이퉁》).
3월 25일
- 사회민주당 지구 위원장, 베를린 베딩, 학대당하고 병원에서 사망(목격자 보고).
(“… 파시즘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라고 강요당했다. 그가 이를 거부하자 … 발을 붙잡고 … 4층에서 돌계단으로 길바닥까지 끌고 내려갔다 …”)
- 뮐러 부인, 작센 아우에, 학대당함, 이른바 자살(목격자 보고).
3월 27일
- 노이만, 백화점 주인, 쾨니히스베르크, 습격당해 두들겨 맞고 과녁으로 쓰임(TU).
(목격자 보고: “상처에는 … 소금과 후추가 뿌려졌다. 풀려난 뒤 그는 베를린의 병원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숨졌다.”)
- 그로테헨네, 브라운슈바이크, 전신 수리공, 국기단원, 돌격대 술집에서 맞아 죽음(보고 참조).
- 막스 플라우트 박사, 변호사, 카셀의 나치 막사(뷔르거잘레, 카를 거리)에서 나치 동료 변호사인 지금의 차관 프라이슬러[200]와의 개인적 원한 때문에 그의 명령으로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 막스 빌레츠키, 쇠네베르크 하우프트 거리 18, 게네랄파페 거리 돌격대 막사에서 고문당하고 우르반 병원에서 사망(목격자 보고).
3월 29일
- 발터 쉬츠, 쾨니히스베르크,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짓밟혀 죽음. 어떤 독일 신문도 그의 죽음을 알려서는 안 된다. (보고 참조.)
3월 30일
- 프리츠 롤레, 노동자, 지멘스슈타트, 칼에 찔려 죽은 채 발견(WTB).
(《포시셰 차이퉁》, 3월 30일: “… 오른쪽 가슴을 여러 번 찔려 숨졌다 … 시체에는 머리에도 상처가 있었는데, 넘어지면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 경찰견을 풀었으나 헛수고였으므로, 살인자들은 자동차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 라이블 폴슐레거, 베를린 SO 스칼리처 거리, 끌려가 살해되어 물에 던져짐(목격자 보고).
(“외국 국적의 유대인 L. V.는 한 식당에 들어서다가 돌격대원들에게 끌려갔고, 그 뒤 사흘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나흘째 되는 날 그의 시체가 슈프레강에서 건져졌다. 장례는 3월 30일 바이센제에서 치러졌다.”)
- 신원 불명의 유대인, 오버헤센,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사망(《맨체스터 가디언》).
4월 1일
- 빌헬름 푀터, 제빵공, 그리고 카를 괴르만, 공산당원 노동자, 노이마르크 볼덴베르크, “도주” 중 사살(《포시셰 차이퉁》).
- 빌헬름 뎅만, 제철 노동자, 뒤스부르크함보른 마이데리히, 길에서 사살(《포시셰 차이퉁》).
(《포시셰 차이퉁》, 4월 1일: “… 죽은 채 발견되었다. 시체에는 총상이 네 군데 있었다. 범행 정황으로 보아 D.는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뒤에서 총을 맞은 것이 틀림없다. 범행 동기에 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
- 이름 모를 23세 노동자, 뮌헨, 셰플딩 근처에서 “도주” 중 사살(《뮌히너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뮌히너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4월 1일: “… 보호 구금 중 … 자동차로 뮌헨에서 란츠베르크로 이송되었다. 세 번이나 불러 세웠는데도 멈추지 않자 호송대가 발포했다.”)
- 프리츠 슘, 변호사, 킬, 교도소 감방에서 맞아 죽음(TU). (보고 참조.)
- 프레스부르거, 가축상, 뮌헨, 총에 맞아 죽음, 체포 직전의 이른바 자살(《뮌히너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뮌히너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4월 1일: “일요일 아침 유대인 가축상 P.가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P.는 유대인 학대설을 퍼뜨린 혐의가 짙어 체포될 참이었다.”)
4월 2일
- H. 베르트하이머, 켈, 체포 직전의 이른바 뇌졸중(WTB).
4월 3일
- 파울 야로스, 대장장이, 켐니츠 근처 림바흐, “도주 중 사살”(TU).
- 이름 모를 석판 인쇄공, 아우크스부르크, 체포 때의 이른바 뇌졸중(TU).
- 게오르크 벨, 뮌헨의 기술자, 갈색 회관[201]과 돌격대 참모장 룀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나치의 페메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가 발흐제 근처(쿠프슈타인군) 두르히홀첸의 여관에서 돌격대원들에게 사살(Conti WTB). (보고 참조.)
4월 4일
- 하인츠 베슬러, 뒤셀도르프, “도주” 중 사살(WTB). (보고 참조.)
- 빌헬름 드레프스, 노동자, 베를린,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포시셰 차이퉁》).
- 필립스탈 박사, 베를린 비스도르프, 의사, 맞아 죽음(《베를리너 타게블라트》).
(목격자 보고: “Ph.는 밤중에 집에서 끌려 나갔다. 어느 돌격대 막사에서 학대당한 뒤 우르반 병원으로 실려 갔다. 숨지기 몇 시간 전에 그를 샤리테 병원으로 옮겼는데, 우르반 병원에 이런 사례가 너무 많이 쌓였기 때문이다.”)
4월 5일
- 르누아, 공산당 시의원, 본, “도주” 중 사살(TU).
(목격자 보고: “… 고문당하고 …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두들겨 맞고 … 과녁으로 쓰였다. 아침에 보안 경찰관들이 나타나 … 피살자의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는 막을 수 없었다,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 자우어, 추바흐비츠, 원가 계산원, 사회민주당원, 강제수용소에서 맞아 죽음(《노이에 벨트》).
(《노이에 벨트》, 4월 12일: 호엔슈타인 강제수용소에서 맞아 죽었고 4월 5일 묻혔다.)
- 빌헬름 드레프스, 공산당원 노동자, 함부르크, 길에서 사살(TU).
(《푈키셔 베오바흐터》, 4월 7일: “정치적 다툼 중. 수요일 밤 함부르크 훔볼트 거리에서 한 노동자가 정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에서 총에 맞았다.” 스위스 사회민주당 보도국: “… 밤에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나치 한 명에게 붙들렸다. 그와 동시에 돌격대원 두 명이 뒤에서 노동자에게 몰래 다가가 등을 단검으로 여러 번 찔렀다 … 여러 사람이 이 비겁한 살인을 목격했다 …”)
4월 6일
- 막스 니더마이어, 공산당 시의회 의원, 작센 요한게오르겐슈타트, 츠비카우 교도소에서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 쿠르트 프리드리히, 공산당원 노동자, 작센 요한게오르겐슈타트, 사살(목격자 보고). (“돌격대 지휘관 코흐가 그 악명 높은 림바흐 ‘살인 분대’를 이끌고 요한게오르겐슈타트에서도 날뛰었다. 많은 사람이 이웃 숲으로 달아났다. 숲이 포위되었고, K. F.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4월 7일
- 헤르슈만 슈타인슈나이더(에리크 얀 하누센[202]), 베를린, 페메 살인(TU). (보고 참조.)
4월 8일
- 이름 모를 노동자, 베를린 노이쾰른 강호퍼 거리, 돌격대에게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4월 9일
- 발터 카슈, 함부르크, 오두막에서 돌격대에게 습격당해 사살.
4월 10일
- 프리츠 엥글러, 정치와 무관한 이발사, 켐니츠, 차이지히 숲에서 고문 끝에 사망(목격자 보고).
4월 11일
- 막스 루프, 국기단원, 켐니츠,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TU).
(《베를리너 뵈르젠차이퉁》, 4월 11일: “켐니츠 근처 노이키르헨에서 무기고가 발견되었다. 루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달아났다. 그는 나중에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다.”)
- 아르투어 바이너 박사, 변호사, 켐니츠,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프랑크푸르터 차이퉁》).
- 알빈 한슈파흐, 치타우 근처 프리더스도르프의 공산당원 노동자, 보호 구금 중 사살(TU).
(《포시셰 차이퉁》, 4월 11일: “… 친위대 숙소에 침입하려 했다 … 친위대원 한 명이 그를 막아서자 그는 그 대원의 무기를 빼앗으려 했다. 친위대원은 위협 사격을 했고, H.가 그래도 놓아주지 않자 실탄을 쏘았으며, H.는 그 총에 맞아 숨졌다. 사살된 자의 아내는 공산주의 책동 혐의로 어제부터 보호 구금 중이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4월 12일 자는 심지어 H.가 친위대원에게 “무기를 들고 맞섰다!”고 주장한다. 서로 어긋나는 보도들은 날조가 얼마나 서툰지를 드러낸다.)
4월 12일
- 베나리오 변호사, 뉘른베르크의 상인 아르투어 칸, 뉘른베르크의 상인 에르빈 칸, 뉘른베르크의 상인 골트만,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도주 중 사살”(WTB,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뮌헨에서 온 목격자 보고: “네 사람 모두 앞에서 총을 맞았다. 장례는 어떤 신문에도 알려서는 안 되었고, 아무도 묘지에 들어가지 못했다.”)
- 프리츠 콜로셰, 샤를로텐부르크, 뢴트겐탈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로지넨 거리 돌격대 막사에서 고문당하고 병원에서 사망(목격자 보고).
4월 13일
- 알베르트 얀카,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이른바 자살(WTB).
(바젤 《나치오날차이퉁》, 4월 18일, WTB: “보호 구금 중이던 26세의 전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얀카가 교도소에서 목을 맸다.” 파시스트 언론은 3월 초 얀카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으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는데, 그것은 희망 사항이 낳은 생각일 뿐이었다. 얀카는 전향을 선언하라는 압박을 몇 주 동안 받았다. 그가 굽히지 않았고 거짓말을 더는 끌고 갈 수 없게 되자 교도소에서 살해된 것이다.)
- 구스타프 쇤헤르, 노동자, 함부르크 알터 슈타인베크 71, 고문 끝에 사망.
(아버지가 선전장관 괴벨스에게 보낸 편지, 5월 19일 자르브뤼켄 《아르바이터 차이퉁》에 실림.)
4월 15일
- 슈피로, 유대인, 17세, 베를린 쇤홀처 거리 17, 프린첸 거리 100의 돌격대 숙소에서 고문당하고 헤데만 거리 돌격대 막사에서 살해(목격자 보고).
4월 16일
- 브레트슈나이더, 지크마르(작센),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
(《데어 타크》, 4월 16일: “안티파 지도자 브레트슈나이더가 지크마르에서 멀지 않은 숲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다.”)
4월 17일
- 부활절 월요일, 뮌헨 아벤틴 거리의 유대인 상인 슈나이더가 뮌헨 경찰청에서 죽임을 당했다. 경찰청 건물에서 검시한 경찰의는 엉덩뼈가 꿰뚫린 것을 확인했다.
4월 18일
- 바이어 시 참사, 크레펠트위르딩겐,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포시셰 차이퉁》).
- 리하르트 톨라이트, 공산당원 노동자, 쾨니히스베르크, “도주” 중 사살(《프랑크푸르터 차이퉁》).
- 이름 모를 공산당원 노동자, 쾨니히스베르크, “도주” 중 사살(TU).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4월 20일: “공산주의자들이 모임을 열던 발링의 한 집을 수색할 때 참석자 한 명이 달아났다. 멈추라는 경찰의 요구에 따르지 않아 총을 쏘았다. 그는 치명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4월 19일
- 이름 모를 철도 보조원, 뮌헨, 뒤에서 칼에 찔림, 이른바 자살(《뮌히너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 알프레트 엘커, 그리스도교도. 유대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돌격대에게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라이프치거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은 이 사건을 광고란에만 다음과 같이 실었다.
4월 20일
- 카민스키, 도르트문트회르데, 반파시즘 투쟁 동맹 회원, 교도소에서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회르데의 돌격대 막사에서 그는 더없이 끔찍하게 고문당했고, 그 비명이 몇 거리 밖까지 들렸다 … 신문에 부고를 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 장례는 공개되지 않았고 … 가장 가까운 가족만 들어갈 수 있었다 … 며칠 뒤 불법 신문 《도르트문더 켐퍼》가 나왔고, 거기서 노동자들은 도르트문트 경찰청장 셰프만을 카민스키의 살인자로 고발했다.”)
4월 21일
- 프리츠 드레셀, 목수, 공산당 주의회 교섭단체 대표, 이른바 “자살”, 목격자 보고에 따르면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뮌히너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4월 22일
- 막스 카셀, 우유 장수, 비스바덴, 집에서 사살(《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 잘로몬 로젠슈트라우흐, 상인, 비스바덴, 집에서 살해(《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 파울 팝스트, 노동자, 돌격대 막사에서 이른바 자살(《게르마니아》).
(《게르마니아》, 4월 29일: “체포된 뒤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돌격대 집단 회관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척추 중상. 사망.”)
4월 23일
- 쿠르트 벤케 경사, 돌격대원, 베를린, 페메 살인으로 보임(《앙그리프》).
- 파울 헤르데, 노동자, 뤼벤, 사살(《포시셰 차이퉁》).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4월 25일: “… 철도 경찰관 한 명이 H.를 뒤쫓아 불러 세우고 체포한다고 선언했다. H.는 따라가다가 얼마 뒤 몸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철도 경찰관이 세 번 불러 세웠으나 H.는 서지 않았다. 위협 사격에도 그는 계속 달렸다. 그러자 철도 경찰관이 달아나는 자를 쏘았고, 총알은 등을 뚫고 심장에 맞았다.”)
- 프란츠 슈나이더, 반파시스트 노동자, 고흐(라인란트), 구금 중 이른바 자살(《포시셰 차이퉁》).
(《포시셰 차이퉁》, 4월 24일: “보호 구금 중 신문을 받으러 끌려 나가게 되어 있던 S.는 3층에서 깊이 8미터의 채광 수직 통로로 뛰어내렸다.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곧 숨졌다.”)
- 코니에츠니, 공산당원 노동자, 욀스니츠(에르츠산맥), 구금 중 이른바 자살(《포시셰 차이퉁》).
(《포시셰 차이퉁》, 4월 25일: “… 감방에서 목을 맸다 …”)
4월 24일
- 이름 모를 주말농장 거주자, 호르너 모어[203], 네로 치하의 그리스도교도들처럼 타르를 뒤집어쓰고 불태워짐, 이른바 자살(《푈키셔 베오바흐터》, 4월 25일). (보고 참조.)
- 코르데스와 아들, 상인, 브레멘 근처 비트문트, 포그롬 때 사살(WTB).
(《브레머 차이퉁》, 4월 24일: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 유대인 상인 C.가 집 밖으로 꾀어내져 세 발을 맞고 죽었다. 그의 아내는 맞아 쓰러졌다. 24세의 아들은 침대에서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죽었다.”)
4월 25일
- 멘델 하버, 상인, 도르트문트, 사살되어 물에 던져짐(《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
(NSDAP 기관지 《로테 에르데》, 4월 28일: “유대인 H.는 돌격대에게 체포되어 돌격대 막사로 넘겨졌다 …” 5월 6일 도르트문트의 모든 일간지에 카스트로프라욱셀 근처 운하로 밀려온 시체 소식이 실렸다. H. 부인은 그 시체가 실종된 남편임을 알아보았다. 머리에 총상이 여러 군데, 칼에 찔린 상처 등이 있었다. 《로테 에르데》가 4월 25일 하버의 체포를 시인했는데도, 5월 19일 《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현상금 1000마르크 — 도르트문트 상인 강도 살해 — 4월 25일 이 죽은 사람을 본 이는?”)
- 이름 모를 노동자 두 명, 하일(리페), 시체 발견(《푈키셔 베오바흐터》). (《푈키셔 베오바흐터》, 4월 25일: “하일에서 리페강 지류 운하로부터 밧줄로 한데 묶인 남자 시체 두 구가 건져졌다. 둘 다 머리에 심한 상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노동자 계층 출신이다.”)
- 그라니차, 노동자, 쾨니히스베르크, “도주” 중 사살(《나흐트아우스가베》).
(《슈투트가르터 노이에스 타크블라트》, 4월 26일: “G.는 화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대질 신문을 위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도이치아일라우로 이송되었다. 엘빙을 앞두고 G.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에게 총이 발사되었고 그는 폐에 총을 맞아 죽었다.”)
4월 26일
- 빌리 플론스케, 노동자, 베를린 만토이펠 거리 97, 시체 발견(《앙그리프》).
(《앙그리프》, 4월 27일: “… 텔토 부퍼탈러 거리의 운하 다리에서 떠다니는 시체 한 구 …. 이 신원 불명자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포시셰 차이퉁》, 5월 13일: “텔토 운하에서 건져 낸 남자 시체의 신원이 이제 확인되었다.”)
4월 27일
- 에르빈 폴크마르, 베를린 노이쾰른, 권투 선수. “정치와 무관한 살인”이라고 함. 길에서 사살(《앙그리프》).
4월 28일
- 이름 모를 남자, 오버바르님군 볼렌베르크, 사살되고 불태워짐(《프랑크푸르터 차이퉁》).
(프렌츨라우 살인 수사반 보고: “시체에는 휘발유가 끼얹어지고 불이 붙여져 있었다. 여러 군데의 핏자국으로 보아 발견 장소가 곧 범행 장소이며, 불을 붙일 때 피해자는 살아 있었다.”)
- 풍크,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도르트문트, 교도소에서 살해, 이른바 자살(《앙그리프》). (보고 참조.)
- 프리츠 굼베르트, 공산당원 노동자, 하이데나우, 몇 주 동안 고문당한 끝에 맞아 죽음, 4월 28일 묻힘. (보고 참조.)
4월 29일
- 신원 불명의 남자, 마르크 지방 베르노이헨 근처에서 살해된 채 발견(WTB).
4월 30일
- 하크슈타인, 공산당원 노동자, 그레벤브로이히, “도주” 중 사살(《쾰니셰 차이퉁》).
(《쾰니셰 차이퉁》, 5월 2일: “사육제 이후 도피 중이며 대역죄로 수배되어 있던 H.는 일요일 경찰과 보조 경찰에게 발견되어 도주 중 사살되었다.”)
- 안드레아스 폰 플로토, 독일국가인민당 계열 농장주, 국방부 직원, 돌격대에게 체포되어 슈베린(메클렌부르크) 근처 노이부코에서 “도주” 중 사살(Conti).
4월 말
- 이름 모를 노동자, 에버스도르프(작센), 그리고 하인츠 골트베르크, 적색 체육인, 뢰바우 근처 니더쿠너스도르프, 뢰바우의 “헤르만 괴링 회관” 지하실에서 사살(목격자 보고).
- 4월 말 다하우에서 “적색 구원회”[204]의 전 서기 카를 홀리가 죽임을 당했다. 그가 죽고 2주 뒤 《뮌히너 차이퉁》에 다하우에서 대우를 잘 받고 있다는, 그가 서명한 편지가 실렸다.
5월 2일
- 로덴슈토크, 사회민주당 계열 공공 부문 노동자 조합 서기, 그리고 신원 불명의 노동조합 간부 두 명, 뒤스부르크 비테킨트 거리의 돌격대 숙소에서 고문당하고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 단치거, 뒤스부르크함보른의 유대인 상인, 밤에 돌격대원들에게 습격당해 얼마 뒤 숨질 만큼 학대당함(목격자 보고).
5월 3일
- 에른스트 오버포렌 박사, 독일국가인민당 제국의회 교섭단체 대표, 킬의 자택에서 죽은 채 발견. 독일 언론은 그의 “자살”을 보도한다. 실제로는 돌격대의 페메 살인이다. 오버포렌이 국회의사당 방화의 진짜 범인들에 관한 비망록[205]을 돌렸기 때문이다(목격자 보고).
5월 4일
- 이름 모를 철모단원, 베를린, 말뫼어 거리와 우커뮌더 거리 모퉁이의 돌격대 술집 “슈투름포겔”에서 사살(자르브뤼켄 《아르바이터 차이퉁》).
5월 5일
- 지몬 카츠, 수공업자, 폴란드 국적,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베를린, 5월 5일: “… 시체를 슈프레강에서 건져 냈다. 시체에는 상처가 많았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K.를 때려 죽인 뒤 슈프레강에 던진 것이다.”)
- 이름 모를 남자, 포츠담 겔토, 묶인 채 물에 던져짐(《포시셰 차이퉁》).
(《포시셰 차이퉁》, 5월 5일: “겔토 근처 이른바 그라스호른에서 남자 시체 한 구를 건졌다. 하반신은 회색 군용 담요에 싸여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다리와 무릎이 한데 묶여 있었다. 상반신에는 붉은 줄무늬 이불잇이 씌워져 있었다 … 4월 중순쯤부터 물속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
- 슈팡엔베르크, 공산당원 노동자, 브레더라이헤(템플린군), 교도소에서 이른바 자살(《포시셰 차이퉁》).
(《포시셰 차이퉁》, 5월 6일: “프렌츨라우 구 법원의 감방에서 … 목을 매 자살.”)
- 이름 모를 염색 공장 노동자, 자간, 이른바 자살, 교도소에서 살해(WTB).
5월 6일
- 이름 모를 소녀, 그로센, 시체 발견(《앙그리프》).
(《앙그리프》, 5월 8일: “…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소녀의 시체. 시체는 국도 근처의 소나무 묘목장에 놓여 있었다. 흔적으로 보아 이 신원 불명의 여성은 자동차로 그곳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 소녀는 목이 졸려 죽은 것 같다.”)
5월 8일
- 에크슈타인 박사, 사회주의 노동자당 지도자, 브레슬라우, 고문 끝에 사망(WTB). (보고 참조.)
5월 9일
- 마이어 박사, 유대인 치과 의사, 부퍼탈에서 돌격대원들에게 체포되어 뒤셀도르프의 돌격대 숙소로 끌려감. 거기서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학대당하고 몸이 훼손된 뒤, 자동차로 뫼네 댐에 실려 가 물에 빠뜨려짐(목격자 보고).
(뒤셀도르프의 친구들에게 익명의 통고가 왔다. 이 일이 공개되면 유대인 열 명이 더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 갈리노프스키, 알렌슈타인, “도주” 중 사살(WTB).
5월 10일
- 이름 모를 청년 노동자(적색 체육인), 베를린 베딩, 헤데만 거리 돌격대 막사에서 살해, 목이 베인 채 슈프레 운하에서 건져짐(목격자 보고).
5월 11일
- 비더만,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 함부르크, 이른바 자살(《프랑크푸르터 차이퉁》).
(아바스 통신, 에센, 5월 11일: “… 레클링하우젠역 근처 철로에서 발견되었다 …”)
- 글뤼코, 공산당원 노동자, 베를린 O 팔리사덴 거리 9, 고문당하고 헤트비히 병원에서 사망(목격자 보고).
(사망 진단서에는 “폭행으로 인한 내출혈”이라고 적혀 있다.)
5월 12일
- 제프 괴츠, 공산당 주의회 의원, 몇 주 동안 학대당한 끝에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살해. (다하우에서 탈출한 목격자의 보고.)
5월 13일
- 이름 모를 돌격대 보조 경찰관, 킬,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프랑크푸르터 차이퉁》).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5월 14일: “킬의 카이저 빌헬름 운하 옆 숲에서 … 살인인지 자살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 페메 살인이다. 목격자 보고에 따르면 사살된 이는 한 나치 술집에서, 제국 정부가 그 거창한 약속들을 언제 진지하게 실행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 헨젤러, 공산당원 노동자, 뒤셀도르프, 사살(《게르마니아》).
5월 15일
- 알프레트 슈트라우스 박사, 뮌헨, 변호사, 30세, 독일 민족주의자인 유대인, 동료 변호사인 바이에른 법무장관 프랑크[206]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심하게 학대당하고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 이름 모를 철모단원, 베를린. 철모단의 광장 연주회 때 돌격대에게 습격당해 칼에 찔려 사망(목격자 보고).
- 팔레티, 베를린 쇠네베르크, 고문 끝에 사망(목격자 보고).
(“가슴과 등에 갈고리 십자가를 낙인으로 찍은 뒤, 콩팥이 떨어져 나갈 만큼 두들겨 팼다. 얼마 뒤 그는 부상으로 숨졌다.”)
5월 17일
- 헤르만 리델, 글라트베크, 이른바 자살(《데어 타크》).
(《데어 타크》, 5월 17일: “G.에서 전 스파르타쿠스단 지도자 R.가 목을 맸다. 그는 전후 초기 적색 소요 때 엠셔–리페 지방에서 한몫을 했던 자다.”)
- 요하네스 바르트와 빌헬름 바르트, 뒤스부르크, 맞아 죽음(《데어 타크》).
(《데어 타크》, 5월 17일: “… 신원 불명자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었다 … 생사의 기로에 있다.” — “그사이 숨졌다.”)
5월 18일
- 이름 모를 남자, 베를린, 이른바 자살(《포시셰 차이퉁》).
(《포시셰 차이퉁》, 5월 18일: “경찰관들이 마이바흐 강변에서, 분명 오래전에 자살한 남자의 시체를 물에서 건져 냈다. 신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 홍크슈타인, 그레벤브로이히, “도주” 중 사살(WTB).
5월 19일
- 레온하르트 하우스만, 공산당 간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도주” 중 사살(WTB).
5월 20일
- 아르투어 뮐러, 국기단원 노동자, 나치들에게 자동차로 납치되어 베를린 쇠네베르크 게네랄파페 거리의 나치 막사에서 고문당하고 맞아 죽음(목격자 보고).
(“시체는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두개골은 깨지고 오른쪽 눈알은 터져 흘러나왔다. 얼굴 전체가 찢겨 있었고, 몸은 온통 매 자국과 핏덩이로 덮여 있었다. 한쪽 팔은 두 군데가 부러져 있었다.”)
5월 25일
- 슐로스, 뉘른베르크의 상인, 사살(목격자 보고).
5월 26일
- 그로만, 뒤스부르크의 화가, 칼쿰 숲에서 친위대원들에게 사살된다. 살인자들은 시체에 “슐라게터[207]를 기리며”라고 쓴 쪽지를 붙인다(목격자 보고).
5월 27일
- 프란츠 레어부르거, 뉘른베르크 출신, 29세,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도주” 중 사살(《프렝키셔 쿠리어》).
(목격자 보고: “부모는 봉인된 관을 받았고,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으리라는 위협 아래 관을 열어 보지도 못했다.”)
5월 29일
- 빌헬름 아론, 밤베르크의 사법 연수생, 24세, 국기단원, 다하우에서 “도주” 중 사살(《밤베르거 차이퉁》).
5월 말
- 공산당원 노동자 두 명, 지크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사살(목격자 보고).
6월 8일
- 반대파 돌격대원, 뒤셀도르프, 전단을 돌리다가 사살(《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
(뒤셀도르프 경찰청장의 6월 10일 자 공고는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최근 며칠 동안 ‘경보, 제39연대 혁명적 돌격대원 그룹 투쟁지’라고 적힌 전단이 거듭 뿌려졌다. 이 전단을 돌리던 자들 가운데 한 명이 지난밤 라인강 다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으며, 신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6월 10일
- 카를 로테스, 공산당원 노동자, “도주 중 사살”(WTB).
- 프리츠 코코렌츠, 반대파 돌격대원, 베를린 쾨페니크 거리 114의 자기 집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목격자 보고).
(“이것은 페메 살인이다. 코코렌츠는 요즘 상관들과 거듭 다툼을 벌였다. 죽기 전날 저녁 그는 한 돌격대 행사에서 반대파의 연설을 했다. 그의 집은 나치 사무소와 같은 건물에 있다. 그의 시체를 보고 돌격대원 두 명이 말했다. 조심해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이렇게 된다고.”)
- 발터 에른스트, 베를린 근처 헤닝스도르프의 묘지에서 반쯤 묻힌 채 발견(WTB).
(목격자 보고: “발터 에른스트는 펠텐 근처 마이스너호프의 돌격대 막사에서 맞아 죽었다. 헤닝스도르프의 묘지기들이 반쯤 흙에 덮인 시체를 발견했다.”)
6월 12일
- 이름 모를 노동자, 에센, “도주 중 사살”(TU).
6월 20일
- 발터 케르징, 노동자, 독일국가인민당 투쟁단 회원,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서 “충돌” 때 나치들에게 사살(WTB).
6월 21일
- 파울 우르반, 노동자, 브란덴부르크, 교도소에서 이른바 “자살”(《나흐트아우스가베》).
- 신원 불명의 세 사람, 츠비카우 근처 노이슈테델의 필츠 연못에서 시체로 발견(《츠뵐프우어 미타크스블라트》).
(《츠뵐프우어 블라트》, 6월 23일: “… 발이 밧줄로 묶이고 … 돌로 무게가 더해지고 … 철사로 서로 묶여 있었다 … 25세에서 30세 사이의 남자들 … 손수건에는 G. E.와 M. H.라는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신원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6월 22일
- 알텐부르크, 공산당원 노동자, 노이마르크 아른스발데, “도주 중 사살”(《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 슈마우스 가족, 베를린 쾨페니크,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돌격대에게 살해(보고 참조).
- 라코프스키, 노동자, 쾨페니크, 돌격대에게 사살(보고 참조).
- 요하네스 슈텔링, 전 메클렌부르크 총리, 쾨페니크에서 끌려가 살해(보고 참조).
- 파울 폰에센, 국기단 지도자, 쾨페니크, 학대 끝에 사망(보고 참조).
6월 24일
- 아르투어 마이, 아헨의 공산당 간부, 윌리히 요새로 이송되던 중 “도주” 중 사살(아헨 경찰 공보실).
6월 26일
- 신원 불명의 공산당원 노동자, 브라운슈바이크, 교도소에서 살해, 이른바 “자살”(WTB).
6월 29일
- 로젠펠더 박사, 뉘른베르크의 변호사,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목격자 보고).
6월 말
- 글레스퍼, “적색 구원회” 지구 책임자, 엘버펠트
- 고트샬크, 시의회 의원(살해된 프란츠 G.의 형제)
- 에르빈 델러, 청년 노동자, 엘버펠트 비르크 거리, 배가 갈린 채 엘버펠트 쓰레기장에서 죽은 채 발견.
- 고르스마이어, 청년 노동자, 엘버펠트, 돌격대에게 체포된 뒤 자동차 안에서 사살, 이튿날 아침 베크의 웅덩이에서 죽은 채 발견.
- 이름 모를 노동자, 엘버펠트, 브레머 거리에서 죽은 채 발견(배에 두 발, 가슴에 한 발).
- 이름 모를 노동자, 엘버펠트 오스터브룬, 죽은 채 발견(배에 두 발, 등에 두 발). (엘버펠트의 피의 만행에 관한 자료는 모두 검증을 거친 목격자 보고에 근거한다. 다른 보고 여섯 건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살인 행동은 거의 예외 없이 엘버펠트 라이트반 거리의 돌격대 지휘관 아우구스트 푸페가 지휘했다.)
- 훙링거, 경찰 소령, 뮌헨,
- 제바스티안 네프츠거, 뮌헨,
- 미하엘 지크만, 사회민주당원, 파징,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목격자 보고들).
7월 1일
- 막스 마르골리너, 브레슬라우, 24세 상인, 4월에 카를 거리의 갈색 회관에서 고문당하고 두 달 뒤 브레슬라우 남부의 유대인 병원에서 사망(목격자 보고). (자르브뤼켄 《폴크스슈티메》: “… 인간이기를 그만둔 그 녀석들은 의식을 잃은 그의 항문에 나선형 용수철을 돌려 박았다. 그는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어서 병원에서 여덟 주 동안 물속에 누워 있었다.”)
7월 10일
- 요제프 니스, 편집자, 프롤레타리아 자유사상가 연맹 지구 책임자, 에르푸르트,
- 알프레트 놀, 공산당 간부, 예나, 그리고
- 이름 모를 공산당원 노동자, 에르푸르트, 공산당 신문 《튀링거 폴크스블라트》의 불법 인쇄소가 적발될 때 돌격대에게 “즉결 처형”(목격자 보고).
7월 12일
- 아스만, 국기단 간부, 쾨페니크프리드리히스하겐, 쾨페니크 “바르톨로메오의 밤”[208]의 희생자(보고 참조).
- 판텐더, 공산당원 노동자, 에센, 1931년 10월부터 중노동 교도소에 갇힌 정치범, “도주” 중 사살(Conti WTB).
- 슐츠, 공산당 주의회 의원, 베를린, 학대를 받아 교도소 병원에서 사망(《르 탕》).
(자르브뤼켄 《폴크스슈티메》, 7월 18일: “… 슐츠는 …, 1930년 장갑 순양함 건조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던 사회민주당 편집자를 대신해 베를린 라디오에 나가, 뜻밖에도 정부의 전술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던 사람이다 …”)
- 프리츠 랑게, 공산당원 노동자, 쾨니히스베르크, 린치당함(《앙그리프》).
(《앙그리프》, 7월 12일: “많은 군중이 법원 구치소 앞으로 몰려가 공산주의자 살인범을 끌어내 린치했다.”)
- 요제프 메싱어, 공산당원 노동자, 본, 교도소에서 살해, 이른바 “자살”(아바스 통신).
7월 14일
- 프란츠 브라운, 《폴크스바흐트》 편집자, 슈테틴, 체포 다음 날 감방에서 살해(Conti WTB).
- 이름 모를 공산당원 노동자, 슈테틴, 총에 맞아 쓰러짐(Conti WTB).
- 이름 모를 공산주의자 세 명, 슈베린(바르테)군, 조넨부르크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도주” 중 사살(《포시셰 차이퉁》).
- 이름 모를 공산당 간부, 보훔, 신문 도중 “도주” 중 사살(《포시셰 차이퉁》).
7월 15일
- 슈페어, 재단사, 베를린, 소화기 시험장 근처에서 목이 베인 채 발견(목격자 보고).
- 클라라 바그너, 비서, 베를린 트렙토, 사살(목격자 보고).
7월 17일
- 빌헬름 셰퍼 박사, 프랑크푸르트, 전 민족사회주의자, “복스하임 문서”[209](1931년 나치의 테러 지침)를 공개해 알려진 인물, 프랑크푸르트 시립 숲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 페메 살인(《프랑크푸르터 차이퉁》).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7월 18일: “… 범인들의 흔적은 아직 전혀 찾지 못했다 …”)
7월 20일
- 이름 모를 노동자, 베를린, 뮈겔제 둑길 히르슈가르텐 근처에서 죽은 채 발견(목격자 보고).
- 50세 남자, 베를린, 쿠퍼그라벤의 무제움 다리 근처에서 죽은 채 발견(목격자 보고).
- 후고 페더젠, 공산당원 노동자, 함부르크, 교도소에서 살해, 이른바 “자살”(WTB).
- 반대파 돌격대원, 뮌헨 근처 오버멘칭, 카를스펠트 변전소 근처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 페메 살인(Conti WTB).
7월 24일
- 에리히 루돌프와 구스타프 루돌프, 뒤링스호프(동부선), 란츠베르크안데어바르테에서 “도주” 중 사살(《프랑크푸르터 차이퉁》).
- 반대파 돌격대원 세 명, 베를린 근처 그루네발트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 페메 살인(목격자 보고).
- 야스코비아크, 반대파 민족사회주의자, 레버쿠젠, 친위대원이 이른바 “정당방위”로 사살(《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
7월 29일
- 졸레츠키, 공산당원 노동자, 이저론, 보조 경찰이 “정당방위로” 쏘아 쓰러뜨림(WTB).
- 하인리히 푀르딩, 공산당원 노동자, 코스펠트, 레클링하우젠 경찰청에서 창밖으로 떨어짐, 이른바 자살, 또 하나의 풍크 사건이다!(WTB)
8월 1일 알토나에서 노동자 뤼트겐스, 테슈, 볼프, 묄러가 처형되었다.[210]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온 한 보고는 그곳에서 최근 몇 주 동안 수감자 열 명이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그 가운데는 국기단원 오토 로제(“자살”), 19세의 벤노 엘러스(맞아 죽음), 철도원 동맹 서기 헤르만 바세, 공산주의자 카를 볼프와 에리히 셸프만(“폴크스프로인트 회관” 4층에서 내던져짐)이 있다. 또 다른 보고는 7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 브라운슈바이크의 옛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ADGB) 회관 리제베르크에서 노동자 열 명이 사살되었다고 전한다. 이 소식들은, 그리고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 파우스트가 브레멘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 반대파 돌격대원 열다섯 명이 빌제데 강제수용소에서 사살되었다는 소식 등은 인쇄를 마감하기 전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 『갈색책』 제2권은 여기서 아직 공개하지 못한 히틀러 파시즘의 살인 행위들을 입증할 것이다.
12 세계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독일의 사건들이 외국에서 불러일으킨 반향은 히틀러 정부의 가장 필사적인 술책도 진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외국 언론은 압도적 다수가 민족사회주의자들을 국회의사당 방화범으로 지목했다. 외국 언론은 히틀러 정부의 부인 성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테러와 유대인 박해를 기록했다. 외국 언론만이 아니다. 시민 세계의 가장 뛰어난 작가들, 학자들, 의사들, 변호사들이 히틀러 테러에 항의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위원회로 뭉쳐 히틀러 파시즘의 희생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히틀러 테러를 고발한 이들의 거대한 합창 가운데, 『갈색책』 제1권에서는 몇 안 되는 목소리만을 들려줄 수 있을 뿐이다.
항의
셔우드 앤더슨은 『갈색책』에 글을 보내 달라는 우리의 부탁에 다음과 같은 편지로 답했다.
히틀러 독일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은 때때로 삶을 그토록 절망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저 끔찍한 인간적 부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를 섬뜩하게 한 것은 여기서 독일 민족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토대가 너무나 쉽게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그것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인 저로서는 우리 자신의 역사가 그리 자랑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 미국인은 불과 몇 해 전까지 큐 클럭스 클랜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어서는 안 되며, 이곳 남부에서 아직도 그치지 않은 흑인 린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유럽과 미국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항의하고 싶다는 제 바람을 막지는 못합니다. 진심을 담아,
셔우드 앤더슨
독일 파시즘
서유럽의 미래가 독일에서 결정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독일의 사태 전개를 고통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아주 뜻밖일 수는 없다. 오늘 백주에 활개 치는 모든 것이 전쟁 전에 이미 잠복해 있지 않았던가. 유대인 박해, 넓은 민중층과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그들의 요구에 대한 관청의 사무친 증오, 그 인간적 요구를 쫓아다니며 짓밟는 수법의 잔인함 — 모든 것이 이미 거기 있었다! 반동은 다른 곳에도 넘치도록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융커 땅은 그야말로 세계 반동의 보호령이었다. 여기, 제국이 없애 버린 35만 자유농 농가의 땅 위에 융커들이 앉아 있었고 – 지금도 앉아 있다 — 그들이 빌헬름 제국의 골수였다. 그 족속은 여기서 날아 나왔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날마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농업 노동자들을 보며 이미 굳어 버렸고, 대학 시절의 학생 단체, 그 단체 정신, 술판, 민간인에 대한 경멸로 더욱 거칠어진 그들은 결투로 “심신을 단련”했고, 이 크고 부지런하고 순박한 민족의 정부에 장교와 군수와 고급 관리를 대 주었으며, 무엇보다 경찰 고위 간부들을 대 주었다. 그 간부들이 고향의 가장 쓸 만한 농업 노동자의 아들들을 데려다 저 악명 높기로 마땅한 “순경”으로 만들었다.
독일 민족은 – 어느 민족이든 충분히 오래 함께 살다 보면 그렇듯이 – 그 근면함과 남을 돕는 마음씨와 다정한 성품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빌헬름 시대의 독일에서는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늘 막연한 느낌이 따라다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섬뜩한 힘들이 나를 노리고 있고, 그 힘의 야만스러움 앞에서는 정신적인 것, 인간적인 것이 모두 튕겨 나간다는 느낌이었다. 독일은 겉보기에는 정성스럽게 일군 땅 같았지만, 언제라도 황무지가 다시 밀고 들어와 모든 것을 뒤덮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는 땅이었다.
이 위험은 때로는 차베른 사건[211]과 모아비트 사건[212]에서처럼 난폭하고 과장된 모습으로, 때로는 쾨페니크 사건[213]에서처럼 노골적이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드러났다.
넓은 민중층은 대체로 주인 근성과 거기서 생겨나는 노예 근성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랫동안 본보기 노릇을 한 독일 노동운동에서조차 인간적인 자기주장보다 단체 정신이 더 많았다.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를 자기의식으로 깨우는 데 실패했다. 민간인 하사관과 상사들, 제국주의 쪽으로 기운 지도자들을 거느린 노동조합과 당의 간부층에서는 빌헬름 체제의 구조가 틀림없이 되살아났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의 잡초로 가득했다. 제국주의, 반유대주의, 개인주의, 관료주의. 대중에게서 그것은 많은 길들임과 적은 자립적 사고력으로, 무기력과 얼마간의 비겁함으로, 어쨌든 기백의 결여로 나타났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 독일을 본보기로 삼아 — 숱한 잡초를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작물이라고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모든 문화 투쟁은 어느 영역에서든 인간의 해방을 뜻한다. 오늘날 문화 투쟁은 오직 하나, 경제적·민족적·식민지적·인종적 폭정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하는 것뿐이다. 모든 억압은 영혼과 문화와 인간다움에 대한 경멸을 전제로 한다. 억압자가 어떤 탈을 쓰든 그 속에는 짐승이 들어 있다!
파시즘이란 짐승으로서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의 자본주의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모든 문화 투쟁과 마찬가지로 짐승에 맞서 인간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아직도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오늘의 독일을 보라.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를 가지고 장난치며 시민적 미덕과 악덕을 흉내 내는 노동운동은 이 싸움에 쓸모가 없다. 엉겅퀴를 뽑으려는 사람은 단단히 움켜쥐어야 하고, 게다가 손에 굳은살이 박여 있어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깊이 갈지 않았다. 일군 겉흙 밑에는 옛것의 뿌리가 모조리 남아 있었다. 아마 독일이 가장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땅을 새로 뒤엎어야 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처럼 하자. 트랙터 대대를 몰고 새로 시작하자.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
우리 시대 최대의 희비극
이 책은 사실과 문서의 기념비다. 그것이 동시에 소름 끼치는 고발장이라면, 그것은 사실 자체가 고발을 외쳐 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20세기는 지난 시대들로부터 모든 생명체의 살림을 보장할 수 있을 만한 생산력과 문명과 문화를 물려받았다. 인류 역사에서 황금시대라는 옛 동화가 현실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이 천 년의 싸움 끝에 자연력을 다스릴 그토록 많은 무기와 그토록 완벽한 교통·소통 수단을 쟁취한 바로 오늘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정반대다! 그토록 칭송받는 이 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다. 황금시대? 아니다. 황금과 쇠와 피의 시대다. 전후에도 — 전쟁 중과 꼭 마찬가지로 — 인간의 비참과 고통은 역병처럼 엄청나게 퍼져 나갔다. 어디서나 불의와 억압과 잔인이 지배한다. 식민지에서, 극동에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이탈리아에서, 헝가리에서, 폴란드에서, 발칸에서. 그리고 이제 독일에서 완전한 야만으로의 회귀가 벌어지고 있으니, 그 잔학함은 지금껏 겪은 모든 것의 한계를 넘어선다.
우리 시대의 세대들을 고통받고 피 흘리고 때 이르게 죽게 하는 온갖 비참 가운데서도, 독일에 닥친 일은 우리의 가슴과 정신을 가장 깊이 찌른다. 우리가 그 철학과 예술의 천재들 때문에, 세계를 비춘 걸작들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체계와 조직에 대한 빛나는 재능을 감탄해 마지않던 위대한 민족. 그 민족이 이제는 감히 고개를 드는 머리마다 짓밟히는 노예의 무리가 되어 버렸다. 개인을 전체 속에 짜 넣는 독일인의 능력, 힘들을 조화시키는 재능, 이 민족의 민족적 미덕 가운데 하나인 본능적인 사회적 정신이 반사회적인 일, 박해와 섬멸의 일을 해치우는 데 악용되고 있다. 위대한 독일의 오늘의 주인들은 오직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움켜쥐었으며, 그들은 자기 민족의 가장 나쁜 적이다.
조직되고 교활한 야만의 한 국면이다. 다른 곳에서 약탈과 학살은 원시적이고 순전히 짐승 같은 성격을 띤다. 그러나 여기서는 계산되고 치밀하게 궁리된 것이며, 검증된 전술과 숙고된 전략을 보여 준다. 히틀러 파시즘의 범죄들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그 일에 고용된 연출가와 배우들(총리에서 맨 밑바닥 밀고자까지)이 공들여 무대에 올린 공포극의 공개 상연이다.
온 세계가 확신하고 있다 — 나는 최근 온갖 색깔의 수많은 단체 대표단을 이끌고 독일 대사관에 가서 이를 밝혔다 —.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공식 전설, 어제의 모든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이 거창한 술책, 오늘과 내일의 모든 범죄를 여는 이 음울한 서막은 이 책에서 그토록 훌륭하게 입증되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의로, 의식적으로, 허무 위에 쌓아 올린 것이라고. 이전의 음모들을 겪은 탓에 아직 의심하던 사람들도, 믿을 만하기에 반박할 수 없는 이 책의 논증을 읽고 나면, 그리고 저들이 끌어내려는 결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보고 나면, 여기서 광기가, 그것도 제 행위를 스스로 두려워하는 열등한 광기가 일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히틀러는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대중은 속여야만 이끌 수 있다”고 밝혔다. 옳은 말일 것이다. 대중은 속임수로 꾈 수 있다 — 그러나 그 속임수가 얼마나 오래 먹히겠는가?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고 이 책의 대부분이 이미 인쇄에 들어간 이 순간, 아주 자세한 보도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일부러 눈을 감고 제 근시안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 아니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히틀러, 괴링, 괴벨스 무리의 전술에 대해 눈을 뜨게 될 새로운 사건이다.
비행기 사건, 한심하지만 위협적인 날조다. 6월 23일 밤 10시 30분, 한 통신사가 「베를린 상공의 붉은 비행기 역병」이라는 제목으로 베를린 신문들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 오후 독일에 알려지지 않은 기종의 외국 비행기들이 베를린 상공을 날아 정부 청사 지구와 시 동부에 제국 정부를 모욕하는 전단을 뿌렸다. 항공 경찰은 쓸 수 있는 기체가 없었고, 비행장에 있던 스포츠 비행기들은 외국 기체를 쫓기에 속도가 모자랐다. 외국 기체들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밤 11시 30분, 베를린 템펠호프 비행장은 이 보도 내용에 관한 외국 특파원들의 문의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밝혔다.
밤 11시 25분, 같은 일로 질문을 받은 항공 경찰도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통신사는 보도에서 항공 경찰과 비행장 당국이 알맞은 기체가 없어서 출동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밝혔는데도 말이다. 《타임스》의 베를린 특파원은 항공 경찰도, 비행장 당국도, “루프트한자”도 이 “공습”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자기 신문에 타전했다.
3,000미터 높이에서 전단을 하필 정부 청사 지구와 미리 정해 둔 거리에 떨어지도록 겨냥해 뿌리는 재주를 부렸다는 이 별난 비행기들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이튿날 아침 독일의 모든 신문이 이 소식을 싣고 거의 똑같은 말로 논평한다.
《르 탕》은 이 논평들의 문구가 한결같은 까닭을 밝혀 준다. 보도에는 신문사들에 보내는 지시와 “모범 논평”이 딸려 있었고, 그것을 1면에 실으라는 명령이 붙어 있었다.
이 표준 논평은 독일이 지금 항공 분야에서 견딜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주제를 이렇게 펼치라고 지시한다. 오늘은 외국 비행기들이 떨어뜨리는 것이 전단뿐이지만, 내일은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폭탄일지도 모른다. 결론: 독일 항공부는 무엇을 할 셈인가?
그렇게 독일의 모든 신문이 한목소리로 나팔을 불며 공군 재무장을 요구한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는 이 바람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고, 이 말은 히틀러의 총지휘 아래 있는 언론, 다시 말해 독일의 모든 언론이 이렇게 또는 비슷하게 받아 실었다. “독일 민족은 이런 공중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단을 달라고 요구한다.”
실제로는 이 이야기 전체가 아무 근거도 없다. 항공부 차관 밀히 씨가 기자들에게 (3,000미터 높이에서!) “한두 대의” 복엽기가 “목격되었다”고 밝혔다 해도 그렇다(그는 덧붙여 제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비슷한 전단”이 “알렉산더 광장의 한 고층 건물 위층에서도” 뿌려졌다고 말하는 서투른 짓까지 저질렀다). 그는 두 사건을 서로 엮는다. 이 새빨간 거짓말의 흉계를 폭로하는 데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이 거짓말은 1914년 7월 28일 뉘른베르크 상공에 저 유명한 비행사가 나타났다는 전설이 불러일으킨 것과 똑같은 흥분에 독일 민족을 빠뜨리려고 꾸며 낸 것이다.[214] 목표는 재무장이고, 전쟁이다. 이런 속임수로 여론을 이런 쪽으로 이끌고, 필요한 공황을 만들어 낸다.
건전한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 모든 나라의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대답은 하나뿐이다. 전쟁과 파시즘에 맞선 싸움을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끈질기게, 세계 모든 나라 노동자들과 통일전선을 이루어 벌이는 것. 암스테르담 운동[215] 같은 국제 운동을 강화하는 것. 진실과 분노의 외침을 거대한 세계 집회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것.
앙리 바르뷔스
제 나라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맞서
영국과 미국이 히틀러 체제의 권력 행사와 권력 남용에 맞서 들고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항의의 외침을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듣는 것이 특히 반갑다. 프랑스에서는 분노가 너무 자주 오래된 반감에 영합하는데, 나는 그 반감과 싸우는 것이 현명하고 필요하다고 여겨 왔다. 막 수그러들던 참이었는데 오늘의 독일이 불행히도 다시 정당화해 주는 듯 보이는 그 반감 말이다.
선거 결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독일이 독일 전체는 아니라고 되풀이해 스스로 일깨우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지금 몽둥이에 맞아 쓰러진 독일의 억눌린 부분에게 우리가 여전히 공감하고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돕는 것,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오늘 독일이 저지르는 모든 폭력은 원칙과 이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다. 그 원칙과 이론은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전염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경쟁심에서든 두려움에서든 이웃 나라들을 비슷한 폭력으로 꾀어 마침내 전쟁으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히틀러주의에 항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만큼 저마다 제 나라에서 파시즘의 애벌레인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무장한 용기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겁쟁이 취급을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앙드레 지드
진짜 독일은 아직 살아 있다
[옮긴이] 미국 작가 마이클 골드(본명 이츠오크 그라니치, 1894~1967)의 기고다. 필자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골드는 미국에도 쿠클럭스클랜과 린치가 있지만, 독일에서는 죽어 가는 사회 질서의 늪 전체가 한꺼번에 끓어올랐다고 쓴다. 나치는 자본주의와는 타협도 협상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것이다. 계급 협조를 설교해 온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지금 감옥이나 묘지에 있다.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독일이 보여 주듯이, 노동계급이 파시즘을 피할 유일한 길은 소비에트의 길이다. 만·롤랑·프로이트·아인슈타인의 책을 태운 것은 나치의 「정신」이 천재와 발견을 바라지 않는 소시민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노동계급과 그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은 히틀러를 따르지 않는다. 골드는 “진짜 독일은 아직 살아 있으며 그 병을 이겨 낼 것”이라고 쓰고, 그 끝에서 히틀러가 억누른 모든 이가 세울 소비에트 독일을 내다본다.
마이클 골드
2월 28일, 베를린 경찰청에서
에곤 에르빈 키시는 국회의사당 화재가 난 밤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경찰 유치장에서 14일을 보낸 뒤 국경 밖으로 추방되었다. 에곤 에르빈 키시는 독일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히틀러의 감옥과 돌격대 막사의 실상을 포괄적으로 서술해 발표했다. 아래 대목은 에곤 에르빈 키시가 준비하고 있는 히틀러 독일에 관한 큰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를 데려온 자들은 영수증을 받고 나를 정치경찰에 넘겼다. 복도 양쪽 의자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고, 그 사이 공간에는 문화 볼셰비즘이 서로 몸을 맞대고 몰려 있다. 모두가 서로 아는 사이라, 경찰이 새 사람을 끌고 들어올 때마다 모두가 그에게 인사한다.
1914년 9월의 어느 아침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우리는 드리나강 오스트리아 쪽 기슭에 앉아 있었다. 궤멸해 강 건너로 밀려난 한 사단의 잔병들이었다. 한 무리 한 무리가 어제까지만 해도 한 연대였다. 그리고 그 연대에 속한 흠뻑 젖고 누더기가 된 사람이 비틀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동료들은 서글픈 미소로 인사하고 더 바싹 붙어 앉아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의 모습도 그와 비슷하다. 처음에 나는 왜 많은 이들이 그토록 넋이 나가고 창백한지 몰랐다. 나중에야 일부 체포 때 어떤 폭력 장면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뒤에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막사에서 무방비한 수감자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도 내 눈으로 보게 된다.
복도의 나머지 부분과 우리 사이를 막아선 경찰들은 젊은 녀석들로, 완장에는 벌써 보조경찰의 하켄크로이츠가 달려 있다. 그들은 몹시 흥분한 듯하다. 근무가 처음이라 그 불안을 건방진 행동 뒤에 감추려 더욱 애쓴다. 비웃는 말을 내뱉고, 누구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고함칠 때는 “개자식”, “유대 돼지”라는 말로만 부르며 반말을 한다.
이름이 불리고, 무리가 짜이고, “우향우”, 경찰 유치장으로 내려간다. 첫 번째 정거장은 보관소다. 여기서 시계, 만년필, 현금을 맡기면 봉투에 넣는다. 두 번째 정거장, 칼, 가위, 손톱 줄을 맡긴다. 세 번째 거점은 이미 지하실 아래다. 수감자에게 아직 남은 것 — 지갑, 수첩, 담뱃갑, 성냥, 손수건, 열쇠, 장갑이나 연필 — 은 모자에 넣어야 하고, 구두끈을 풀고, 웃옷을 벗어야 한다. 그러면 더듬는 손이 주머니에 남은 것이 없는지, 미끄러지는 손이 안감에 꿰매 넣은 것이 없는지, 구두나 양말에 숨긴 것이 없는지 뒤진다.
이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새 경찰청장 폰 레베초 씨[216]가 경찰 부관과 당 부관과 참모 한 무리를 거느리고 지나간다…. 그는 해군 장교였고, 사회민주당원 노스케가 그를 제독 계급에 올려 주었다. 제독 나리는 이제 경찰청이라는 제 함교를 거드름 피우며 순시한다.
“그래, 이게 그 잡것들인가?” 그는 어깨 너머로 우리를 경멸스럽게 흘겨보며 묻는다. “그렇습니다, 청장님!” 부관이 서둘러 딱딱하게 대답한다.
“너는 어디서 잡혔나?” 그가 헤르만 둥커에게 묻는다. 한 세대 전체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친 이 백발의 학자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말할 때는 뒤꿈치를 붙이고 차렷 해, 이 돼지 같은 놈아?!”
그러고는 벌써 차렷 자세가 시원찮아 보이는 다른 사람을 찾아낸다.
“이 건달 놈을 당장 암실 독방에 처넣고 살갗이 터지도록 쇠고랑을 채워라.”
순경 둘이 신이 나서 인권 연맹[217]의 늙은 의장 오토 레만루스뷜트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고 간다.
우리는 분노로 창백해져 서 있다. 노스케 덕분에 제독이 된 나리는 벌써 지나가 버렸고, 다른 무리에게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지하 공동 감방에 떠밀려 들어간다. 마흔일곱 명이 그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벽을 따라 나무 침상이 놓여 있고, 마당 쪽 벽 가운데에 변기통이 있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맞은편, 복도 쪽 벽에는 깔때기 모양의 구멍 두 개가 벽돌로 쌓여 있다. 그 뾰족한 끝이 “유다”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이 들여다보는 구멍으로 방 안 전체를 훑을 수 있다. 눈 하나로든, 기관총으로든.
우리는 저마다 이웃을 하나 찾아 그 옆자리에 외투를 접어 베개로 삼는다. 무리가 생겨난다. 서로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어떤 집들은 나치에게 정식 포위를 당했다. 문 너머로 총을 쏘아 댔고, 그다음 가구를 부수고 책을 찢었으며, 습격당한 사람들을 그 아내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지독하게 학대했다.
에곤 에르빈 키시
히틀러는 가장 거대한 사기다
[옮긴이] 영국 언론인·소설가 비벌리 니컬스(1898~1983)의 짧은 기고다. 필자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니컬스는 히틀러가 역사에서 위대한 비극 배우로 남을지 위대한 바보로 남을지는 미래가 정하겠지만, 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고 쓴다. 히틀러는 인간 정신을 눈멀게 한 가장 거대한 사기이며, 그의 철학은 증오에서, 정책은 무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이 허깨비를 만든 것이 연합국 자신이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우리 마음속의 독을 씻어 내지 않는 한 히틀러주의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비벌리 니컬스
정신과 민족들의 인터내셔널을 위해
1933년 5월 9일 자 《쾰니셰 차이퉁》은 「방주(旁註)」 난에 로맹 롤랑에 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외국에서 독일의 민족 정부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선동을 벌이고 있다. 숱한 거짓말과 끔찍한 이야기를 동원해 독일이 “노동자들의 피로 김을 뿜고 있다”고,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일의 파시스트 테러에 맞서” 공격하려고 결집할 의무가 있다고 세계를 속이려 한다. 이른바 지식인들에게는 비장한 말투로 이 싸움에 가담하라고 촉구한다. 그렇게 할 만큼 눈먼 사람이 많으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호소문 밑에서 그들의 이름을 읽어도 놀랍지 않다. 다만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코펜하겐에서 나오는 저 고약한 비방문 가운데 하나가 앙리 바르뷔스의 글과 나란히 로맹 롤랑의 글도 실었다는 점이다.[218] 이 기회에 떠오르는 것은 두 사람이 한때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로맹 롤랑은 볼셰비즘의 잔인한 오류를 단호히 비난했고, 바르뷔스는 그것을 인류의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과도적 단계라며 정당화하려 했다. 이제 두 사람은 한데 뭉쳤다. 모스크바의 광신적 제자와, 사태를 공정하게 볼 만큼 용감했기에 한때 “유럽의 양심”이라 불렸고 독일이 전쟁 중에도 그 뒤에도 그의 공정한 태도를 보여 준 여러 증거에 감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 최근까지도 로맹 롤랑은 조약들을 더 철저히 개정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지지했다. 그 때문에 프랑스 쇼비니스트들의 증오를 샀어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유럽과 그 고귀한 문화유산이었고, 그는 그것을 위해 더 나은 평화를 쟁취하려 싸웠다. 그리고 바로 이런 통찰을 지녔기에 그는 독일의 민족 정부에 대해서도 이해를 보였어야 했다. 이 정부의 단호한 손길 덕분에야 독일은 볼셰비즘의 혼돈을 면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그 혼돈의 제물이 되었더라면 혼돈은 분명 제국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문화와 평화를 거짓으로 내세워 독일을 비방하는 저 조용한 곳들까지 덮치지 않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로맹 롤랑은 공개서한으로 답했고, 우리는 그것을 처음으로 발표한다.
로맹 롤랑이 《쾰니셰 차이퉁》에 보낸 공개서한
1933년 5월 15일, 파리.
편집장님,
나에게 바쳐진 5월 9일 자(25호) 《쾰니셰 차이퉁》의 「방주」를 누가 보내 주었습니다(동봉한 것을 보십시오).
사실입니다. 나는 독일을 사랑하며, 외국의 불의와 몰이해에 맞서 늘 독일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 내 정신을 풍요롭게 해 준 독일은 그 위대한 세계 시민들의 독일입니다. — “(괴테의 말을 빌리면) 다른 민족의 행복과 불행을 자기 것처럼 느낀” 사람들 — 인종과 정신의 친교를 위해 일해 온 사람들의 독일입니다.
이 독일은 지금의 “민족” 정부에게, 하켄크로이츠의 독일에게 짓밟히고 피로 더럽혀지고 능욕당했습니다. 그 독일은 노동의 인터내셔널을 세우려는 자유로운 정신들, 훌륭한 유럽인들, 평화주의자, 유대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를 내쫓습니다. — 당신들은 이 민족 파시스트 독일이 그것이 바로 부정하고 있는 저 참된 독일의 가장 나쁜 적이라는 것을 정말 보지 못합니까?
이런 정책은 인류에 대한 범죄일 뿐 아니라 당신들 자신의 민족에 대한 범죄입니다. 당신들은 그 민족에게서 그 힘의 큰 부분을 빼앗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벗들의 존경을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지도자들”은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자와 국제주의자가 손잡고 당신들에게 맞서는 동맹을 억지로 만들어 냈습니다. 당신들은 그것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또다시 독일에 대한 음모를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이, 오직 당신들만이 독일에 맞서 음모를 꾸몄습니다.
나는 1918년의 승리 뒤에 독일이 희생된 불의를 고발했습니다. 나는 강요된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독일이 다른 강국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 그러나 내가 그것을 더 나쁜 불평등을 위해, 인간 인종들의 평등을, 아니 우리에게 신성한 모든 인권을 스스로 짓밟는 독일을 위해 요구했다고 생각합니까? 가장 맹렬한 개정 반대론자들도 당신들이, 오직 당신들만이 그랬던 것보다 더 심하게 독일에 해를 끼칠 수는 없었습니다.
미래는 당신들에게 — 너무 늦게! — 당신들의 파멸적인 오류를 증명할 것입니다. 그 오류의 유일한 변명은, 당신들을 이긴 자들의 눈멂과 가혹함이 베르사유 이래 당신들의 민족을 빠뜨린 절망의 광기뿐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당신들에 맞서, 독일에 대한 애정을 간직할 것입니다. 히틀러 파시즘의 파렴치와 오류를 혐오하는 저 참된 독일에 대한 애정을. 그리고 나는 평생 그래 왔듯이, 한 민족의 이기심이 아니라 손잡은 모든 민족을 위해 — 정신과 민족들의 인터내셔널을 위해 계속 일할 것입니다.
로맹 롤랑
추신. 당신들은 히틀러 파시즘에 대한 외국 언론의 고발을 중상으로 취급합니다.
우리에게는 국가 권력이 처벌하지도 유감을 표하지도 않은 갈색 셔츠단의 폭력 행위에 관해 망명자들이 남긴 증언이 문서고 하나를 이룰 만큼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둡시다! 우리에게는 공식 발표로 충분합니다. 당신들은 라디오가 퍼뜨린 당신들의 장관 괴링과 괴벨스의 성명을 부인합니까? 폭력을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 다른 인종, 예컨대 유대인을 모욕하는 인종 광기의 고백을 부인합니까? 이미 오래전에 유럽에서 사라졌던 중세의 곰팡내를 이 모든 것에서 맡지 못합니까? 자유로운 사상을 태우는 화형대를, 온 세계가 비웃은 유치한 분서를 부인합니까? 아카데미와 대학에 정치가 뻔뻔하게 밀고 들어간 것을 부인합니까? 학문과 예술의 위대한 망명자들이 세계 여론의 저울 위에서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우스꽝스러운 파문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정말 모릅니까?
로맹 롤랑
독일 파시스트 테러의 의미
오늘 독일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학대당하는 데 경악하는 사람은 물리적·도덕적 폭력이 파시즘 일반의 본질이라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파시즘은 반혁명적일 뿐 아니다. 그것은 “반역사적”이기도 하다. 히틀러가 그러듯이, 무솔리니가 그랬듯이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온 힘을 다 짜내야 한다. 히틀러는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로 향하는 자연스러운 흐름, 경제적 흐름을 막으려고 온갖 편견,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격정에서 이득을 끌어내야 한다. 반유대주의는 그에게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힘이었다.
파시스트 지도자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일 때마다 모든 격정, 모든 편견을 이용하고 부채질한다. 그렇게 히틀러의 지도부는 나머지 세계를 그에게 등 돌리게 한 노골적인 만행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세계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파시즘이 언제나 이 길을 갈 것이며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파시스트들은 역사를 적으로 두고 있다 — 역사와 인간의 통찰을.
러시아의 공산주의도 반유대주의에 부딪혔다. 그것도 아주 강하고 아주 널리 퍼진 반유대주의에. 차르 시대의 포그롬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라 불리는 저 인간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체제를 세우는 데 함께 일하고 거들 수 있는 모든 민족을 자기 주위에 모으려 했다. 공산주의는 포그롬을 없앴다. 반유대주의는 사라져 가고 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대중 집회가 열린다니 아주 기쁘다. 거기서 파시즘의 의미가 밝혀지기를 바란다. 독일의 사건들에서 교훈을 얻지 않고 — 정당한 것이라 해도 — 분노 속에 빠져 버리기만 한다면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 교훈은 이렇다. 파시즘은 높은 경제 단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유대인이든 독일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미국인이든 증오로 박해하며, 과거에 자신을 지킬 처지가 가장 못 되었던 소수자들을 가장 맹렬히 박해한다. 나는 처음부터 유대인에 대한 공격 다음에는 여성, 어린이, 노동계급, 흑인이 우리 시대에 얻어 낸 권리들에 대한 공격이 뒤따르리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내가 직접 읽은 한 독일 잡지 《민족사회주의 월보》에서 흑인은 “노예제로도 문명으로도 길들일 수 없는 야수”로 묘사되었다. 나아가 여성들이 투표권을 잃고 “부엌, 교회, 아이들”이라는 독일 여성의 옛 군주정 시대 이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파시즘은 몇 주 전 히틀러 테러와 함께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늘 법으로 승인된 수법들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시험되어 왔다. 여러 해 동안 유대인과 자유주의자들은 커져 가는 파시스트의 압력 때문에 자리를 잃어 왔다.
오늘 우리가 온 주의를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파시즘이다. 제 모순과 생존을 건 싸움에서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하는 세계 자본의 정치의 한 국면으로서의 파시즘이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한 것은 민족주의적 테러의 물결 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유대인과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독일이 아니라, 분명하고 틀림없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 거듭 말하지만 – 공산주의 체제에 적응할 수 있고 심지어 그 아래서 행복할 수도 있는, 경제적으로 앞선 모든 민족의 억압을 노린다. 우리 미국인은 러시아인보다 더 쉽게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보다 공산주의에 더 무르익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독일인들은 오리 새끼가 오리 연못에 적응하듯 금세 공산주의에 적응할 것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무르익었다. 히틀러의 탄압을 받고도 그들은 공산당에 500만 표를 던졌다.
독일에서 온 모든 소식 가운데 나를 가장 뒤흔든 것은 일부 유대인(이를테면 유대인 참전 용사들)이 자기들은 학대당하지 않았다고 조직적으로 항의했다는 소식이었다.[219] 유대인들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것에 서명하게 만들 수 있었던 테러가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라.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것은 오직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미국 노동자들은 큰일을 하고 있으며, 이 사실들을 깨닫고 올바르게 조명한다면 독일의 인종적 비참을 하나의 승리로 바꿀 수 있다.
링컨 스테펀스
괴벨스 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5월 5일 독일 작가, 철학자, 학자들의 저작이 화형대에 던져졌을 때, 괴벨스 씨, 당신은 이 야만적 행위를 비호하고 승인했으며, 연설에서 당신보다 더 고귀한 독일을 대표하는 이들의 불탄 저작을 “정신의 오물”이라 불렀습니다.
당신은 독일의 출판사, 극장, 서점, 도서관, 학교에서 우리 작품을 꺼내 불태웠고, 그 지은이들을 박해하여 가두거나 나라 밖으로 쫓아냅니다.
당신은 독일 대학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들을 몰아냅니다. 연주회장에서 지휘자와 작곡가들을. 극장에서 뛰어난 배우들을. 일터와 아카데미에서 화가, 건축가, 조각가들을. 당신은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가둔 이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모자라 망명자들까지 갖가지 폭력 수단으로 쫓아다니며, (당신들의 말로 하자면) 그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잔인하고 가차 없이 섬멸”하려 합니다.
이토록 깊은 증오의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자유와 인간다움과 사회 정의의 세계를 믿습니다. 이 사람들은 참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또는 신앙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진실의 목소리를 부인하고 권력에 고개 숙일 뜻이 없습니다.
박해와 추방은 박해받는 우리에게 큰 영예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는 이제 비로소 자신이 이 영예에 걸맞음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독일 문화를 구한다고 하면서 독일 문화의 가장 고귀한 일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독일 청년을 일깨운다고 하면서 그들의 정신과 눈과 감각을 멀게 합니다.
당신은 독일 아이들을 구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리석은 민족주의와 인종 증오의 파렴치한 문구로 중독시킵니다.
당신은 일하는 민중을 해방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사회적·정신적 부자유의 노예 사슬로 묶습니다.
당신은 독일에서 그 “죄인들”을 씻어 낸다고 하면서 가장 약한 이들, 유대인을 박해합니다.
당신은 당신과 독일 정신이 하나라고 하지만, 당신의 행위는 괴테와 레싱, 헤르더와 실러, 빌란트와 랑케, 그리고 독일의 가장 순수한 가치를 위해 애쓰고 그것을 세계로 가져간 모든 이들의 사상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나는 요즘 당신의 예술 작품과 당신의 당동지[220]들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서투른 독일어를 쓴다고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권력이 재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독일 극장들에 이 초라한 작품들을 공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당신은 영웅 정신을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어디서 증명했습니까? 우리도 영웅 정신을 압니다. 노동의 영웅 정신, 성품의 영웅 정신, 제 이념을 지키는 꺾이지 않는 인간의 영웅 정신을.
당신은 적들의 비겁함을 그토록 많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약속합니다. 당신의 박해는 우리를 더 단단하게, 당신의 증오는 우리를 더 성숙하게, 당신의 싸움은 우리를 더 투쟁적으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운명에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가장 큰 잘못은 우리의 너그러운 인내였습니다.
당신이 준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이겨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공로입니다.
에른스트 톨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시즘에 맞선 통일전선을
온 영혼을 다해 들고일어나야 할 일들이 있다. 세계는 1914년 8월 이래 많은 잔인함을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단 한 번의 독가스 공격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지어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런데도 4년이라는 길고 죽음으로 가득한 세월 동안 전쟁을 묵인하고, 아니 찬미하기까지 한 세계가 히틀러가 석 달 동안 한 일에 경악하고 있다. 히틀러가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할 때는 어깨만 으쓱했고 공산주의에 타격을 가할 때는 박수까지 치며 반겼던 이들이, 독일이라는 나라에 세계의 존경을 안겨 준 모든 문화적 노력, 책과 사람과 연구와 사상에 맞선 그의 체계적인 공세에는 분개하고 있다.
나는 루르 지방의 한 노동자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책을 불태운다더군요.” 그는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책은 다시 찍을 수 있다. 그러나 돌격대가 죽인 소중한 남녀들은 다시 살려 낼 수 없다. 파시즘의 위험은 미래를 가리키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는 데, 우리를 낡은 관념에 묶어 두려는 결의에 있다. 군국주의, 노예 상태, 여성의 종속, 소공업, 인류가 이미 넘어선 사회 형태들.
히틀러와 파시스트들은 온갖 진보의 지도자들을 꼼꼼히 골라냈다. 작가, 시인, 학자만이 아니고, 진보적 정치 견해의 지도자와 전파자만도 아니다. 이른바 “돌격”대는 바로 동료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도자처럼 보이는 노동자들, 벌써 작은 서가를 모아 두고 루트비히 렌이나 카를 마르크스의 사진을 지니고 있던 노동자들을 골라냈다. 노동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범죄의 혐의를 받아 고통을 당했다. 파시즘 아래서는 분명히 그것이 가장 큰 범죄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벌써 이렇게들 말하기 시작한다. “최악은 지나갔다. 이제 독일은 진정될 것이다.”
나는 최근 국경 도시들의 난민들을 만나고 왔다. 자르브뤼켄, 포르바크, 스트라스부르와 그 주변 마을들이었다. 날마다 새 난민들이 도착한다. 루르의 노동자들, 저택에서 나온 변호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직도 계속되는 가차 없는 테러를 증언한다. 나는 고향 도시에서 도망쳐야 했던 남편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들이 쓴 편지 몇 통을 읽었다. 뒤스부르크의 한 평범한 여성은 이렇게 썼다. “히틀러를 치러 날아오는 비행기들을 본다면 나는 기뻐서 손뼉을 칠 거예요. 내가 죽는다 해도 다른 독일 사람들은 이 괴물들에게서 구원받을 테니까요.” 무일푼인 아들에게 망명지로 보내려고 4마르크를 가까스로 긁어모을 수 있을 뿐인 여성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파시스트 지배를 제 몸으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혼의 사무친 분노에서 나온 것이다.
나라의 주인이 된 지금, 나치는 포로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나는 한 젊은 난민, 난민이 아니라 제 나라의 자랑이어야 할 사람과 함께 스트라스부르의 한 신문사 편집국을 찾았다. 편집자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신문쟁이였다. 그는 책상 너머로 명단 한 장을 우리에게 던졌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하우 사망자의 최신 명단입니다.” 내 동행은 종이를 집어 들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는 무너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무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네, 험한 시절이지요.” 편집자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심하게 고문당했습니다.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는 상태에서 총살당했지요. 물론 발표는 ‘도주 중 사살’이고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편집자는 웃었다. “나치도 그걸 몹시 알고 싶어 하지요. 내 정보는 그들이 바라는 것보다 정확합니다.”
엘런 윌킨슨
13 독일 노동자들의 영웅적 투쟁
브레멘 경찰청: “며칠 전 불법 공산주의 인쇄물 배포에 대한 경찰의 경고와 무거운 처벌 규정에 대한 주의가 공표되었는데도, 화요일 저녁 공산주의자 쪽에서 6쪽짜리 불법 《노동자 신문》을 배포했다…”(1933년 5월 26일). 베를린 경찰 공보실: “수색 결과 상당한 인쇄물 자료와 메이데이 전단을 만들기 위한 원지 여러 장이 슈테글리츠와 프리데나우에서 발견되었다…”(1933년 4월 28일). 슈투트가르트 경찰 공보실: “모든 공산주의 인쇄물의 압수와 몰수가 이미 1933년 3월 1일에 명령되었는데도, 여전히 주(州) 안에 공산주의 전단이 퍼지고 있다…”(1933년 4월 21일).
이 책은 국회의사당의 진짜 방화범들과 야만적인 히틀러 테러를 알린다. 그러나 이 책을 공동 작업으로 쓴 독일 반파시스트들은 온 세계에 기쁘게 알리고자 한다. 또 하나의 살아 있는 독일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반파시스트들의 지하·불법 자유 투쟁의 독일이다. 그것은 참된 영웅주의의 독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나 목숨을 바쳐 독일 노동 민중의 명예와 사회주의적 미래를 영웅적으로 지키는 이들의 독일이다.
히틀러는 모든 정당을 쳐부수려 했다. 그러나 쳐부술 수 없는 당이 하나 있다. 불법 상태에서 싸우는 독일 공산당이다. 이 당이 흔들림 없는 능동적 대항 세력이라는 사실은 히틀러 정부 자신의 보도가 날마다 증언한다. 당은 활동을 이어 가고 있으며, 독일 곳곳에서 사회민주당, 국기단,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 기독교 노동자의 노동자 집단들이 통째로 불법 활동 중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히틀러 독재에 맞선 실천 투쟁 속에서 형제적 통일전선으로 뭉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난 바로 그날들에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반파시즘 전단이 노동자 대중 속으로 흩날렸다. 노동자 살림집, 셋집 공동주택의 지하실과 다락방이 비밀 인쇄소로 바뀐다. 선동가 수백 명이 체포되면, 훈련받고 확신에 찬 새 투사 수천 명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고문과 학대가 쌓여 갈수록 반파시즘 자유 투쟁의 목소리는 더욱 대담하게, 더욱 사람들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공산주의자들의 불법 신문은 하나하나가 한 줄 한 줄 노동자의 피로 쓰였다. 한 호가 나올 때마다 그것이 나온 곳에서는 새롭고 잔혹한 박해 작전이 응답한다.
국회의사당 화재의 조직자 괴링은 1933년 6월 말 “청년 독일 국가인민당원 투쟁동맹”[221]을 해산하면서 공식 해산 사유로 이 “투쟁동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침투당해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반파시즘 “와해 공작”에 더없이 빛나는 증명서를 써 주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초 “제2 혁명”[222]에 맞서 히틀러와 프리크가 내놓은 위협적 성명은 히틀러 정권의 정체를 폭로하는 활동이 돌격대와 NSBO[223]의 넓은 층에서도 효과를 내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어지는 몇 쪽은 “지하” 독일의 작은 단면만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13.1 불법 《로테 파네》
반파시즘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 가운데 하나는 불법 신문의 발행과 배포다. 독일 공산당 중앙 기관지 《로테 파네》(붉은 깃발)는 국회의사당 화재 이후 꼬박꼬박 나왔다. 경찰 작전, 일제 단속, 수천 명의 밀정 동원, 인쇄소를 누비는 돌격대와 친위대의 야간 순찰도 이 신문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넉 쪽이든 두 쪽이든, 이 불법 신문은 언제나 다시 베딩의 셋집 공동주택으로, AEG와 지멘스의 작업장으로, 베를린 교통 회사의 전차 차고로 가는 길을 찾아낸다. 《로테 파네》의 기술적 꼴은 예전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한 부 한 부가 지금처럼 많은 독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기독교사회당 계열의 빈 신문 《라이히스포스트》는 5월 27일자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묘사를 싣는다.
“《로테 파네》는 처음에 불법으로 인쇄한 판으로 30만 부가 나왔고, 뒤이어 등사판이 여러 차례 나왔다. 비밀 인쇄소 —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목적에 대비해 둔 것이다 —, 복사기와 타자기가 일을 시작했다. 곧 지역·세포·사업장 신문 대부분이 — 물론 대개는 등사본일 뿐이지만 — 다시 돌기 시작했고, 수십만 장의 전단이 사업장과 실업 사무소에서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대(大)베를린의 스무 개 구역에서는 — 인쇄된 《로테 파네》와 나란히 — 밀랍판이나 금속판으로 찍어 낸 등사 신문이 꼬박꼬박 한 주에 한 번, 어떤 지역에서는 한 주에 두 번 배포된다. 모두 《로테 파네》라는 제호를 달고 있다. 이 신문들의 편집자는 평범한 노동자 여럿이다.
13.2 독일 전역의 붉은 확성기
함부르크 경찰은 5월 초 이렇게 발표한다.
“당국이 아무리 엄중한 대응 조치를 취해도, 독일 공산당의 대역죄적 선전물, 특히 전단과 금지된 《함부르거 폴크스차이퉁》, 그 밖의 마르크스주의 문서가 만들어져 거리와 집집에 퍼지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루르 지방에서는 《루르 에코》가 여러 차례 대량으로 나왔다. 루르 노동자들의 이 신문의 메이데이 호는 2색 인쇄이기까지 했다. 에센의 여러 구역에서는 돌격대와 경찰이 동네를 통째로 뒤졌는데도, 신문 배포자로 의심받은 이들이 더없이 끔찍하게 고문당했는데도, 《루르 에코》의 등사판이 거듭 나왔다.
뮌헨에서 온 한 노동자의 편지는 매주 등사 신문이 3000부씩 나온다고 전한다. 국기단 동지회 여섯 곳이 신문 배포를 돕는다.
브레멘 경찰청은 5월 23일 6쪽짜리 불법 《노동자 신문》을 겨냥한 포고를 낸다. 슈투트가르트의 《남독일 노동자 신문》은 인쇄본으로 나오며, 라이프치히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불법 기관지도 마찬가지다. 니더라인에서는 4월과 5월에 뒤셀도르프의 《프라이하이트》(자유)가 여러 호 배포되었다. 만하임에서는 《바덴의 로테 파네》가 거듭 목소리를 높인다. 에르푸르트에서는 《튀링겐 인민신문》이 나온다.[224]
13.3 사업장에서 울리는 반파시스트의 목소리
공산당은 여러 해 전부터 사업장에서 불법 활동에 대비해 온 유일한 정당이었다. 당원들은 히틀러 독재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미 사업장 신문을 몰래 만들고 퍼뜨리는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그런 신문이 수없이 나오고 있으며, 전례 없는 희생정신으로 배포되고 있다.
베를린의 AEG에서는 불법 사업장 신문이 나온다. 함부르크 항구에서는 《항만 전보》, 《무선 통신》, 《폭풍》이라는 신문이 나온다.
한 AEG 노동자는 불법 사업장 활동의 방법을 이렇게 전한다(《반파시즘 전선》, 1933년 7월 2일).
“우리의 지난번 전단은 10×20센티미터 크기로 나왔습니다. 만든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구호를 다듬어 리놀륨에 새긴 다음, 그 리놀륨 조각을 잉크 압지틀에 못으로 박고 한 장 한 장 찍었습니다. 밤에 꽤 많은 장을 사업장 문 앞에 붙이고, 나머지는 뿌림 전단으로 길바닥에 깔아 두었습니다. 계몽 자료에 그야말로 굶주려 있던 동료들은 아침에 일하러 와서 그 쪽지를 열광하며 받아 들었고, 한 장 한 장이 수십 사람의 손을 거쳤습니다.”
함부르크의 한 사무직 사업장에서는 화장실 휴지를 당길 때마다 아주 작은 전단이나 불법 신문을 오린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고 한다. 베를린 슈판다우의 지멘스 사업장에서는 반파시스트 청년 노동자들이 사업장 신문을 마지막 호까지 꼬박꼬박 배포해 냈다. 빌레펠트 사업장들이 손수 만든 《붉은 파수꾼》은 공산당, 사회민주당, 국기단 노동자들이 함께 판다.
13.4 “번개 행동”
지난 몇 달 동안 수백 곳에서 반파시스트들의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는데, 대개 이른바 “번개 시위”의 형태를 띠었다. “번개 시위” 또는 “날아다니는 시위”는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들이 정해진 신호에 맞춰 약속된 지점에 모여, 몇 분 동안 히틀러 독재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반파시즘 노래를 부르며 시위한다. 이런 시위는 경찰과 돌격대가 손쓰기도 전에 다시 흩어지는 일이 많다. 이 기동성 있는 방법은 대량 체포를 막으려는 것이다.
4월 한 달 동안만 해도 렘샤이트, 클레베, 크레펠트, 지겐, 슈테틴, 보름스, 오스테로데, 뒤셀도르프, 하노버 근처 린덴 등지에서 이런 시위가 있었다는 보도가 들어왔다.
이를테면 5월 초 함부르크에서는 공산주의 청년들이 인쇄 전단 1만 장을 배포하고, 손수 만든 포스터 30장을 붙이고, 모든 구역의 담벼락과 기둥에 반파시즘 구호를 열심히 써 놓았다는 보도가 있다. 번개 시위도 네 차례 벌어졌는데, 시위마다 평균 300명의 청년 반파시스트가 참가했다.
한 덴마크 반파시스트는 독일에 머무는 동안 본 반파시즘 선동 방법을 이렇게 전한다. 어느 노동자 거리에 갑자기 합창 낭독대가 나타난다. “누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나? 나치다!” 하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잠시 뒤 합창 낭독대 네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3월 초 도르트문트의 한 노동자 거리를 가로질러 현수막이 걸렸다.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도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 히틀러는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죄를 덮어씌운다!” 4월 말에는 도르트문트 여기저기에 같은 구호가 리놀륨 판화로 나붙었다. 5월 3일자 《포시셰 차이퉁》은 이렇게 보도한다.
“볼프 전신국(WTB)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우에서는 5월 1일로 넘어가는 밤 마리엔 교회 탑 꼭대기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깃발은 5월 1일 이른 아침 돌격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끌어 내렸다. 민족 노동의 날[225]을 맞아 시청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올리려 했을 때, 사람들은 그 깃발이 밤사이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이중의 도발에 베르나우가 얼마나 들끓었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어서 5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밤 돌격대가 경찰과 함께 혐의자 40명을 체포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5월 1일을 앞두고 반파시스트들의 번개 같은 선동 방법은 한층 거세졌다. 4월 29일 저녁 9시, 프랑크푸르터 알레와 쾨니히스베르거 거리 모퉁이의 집들에서 수천 장의 전단이 행인들 위로 흩날렸다. 카데베(서부 백화점)와 티츠 백화점들에서는 중정의 회랑과 계단에서 전단이 뿌려졌다. 5월 1일 오후에는 베를린 동부에서 노동자 300명이 페테르스부르거 광장으로 행진하며 시위했다. 5월 들어 반파시즘 활동의 새 물결은 더욱 높아진다. 5월 12일 베를린의 《12시 신문》은 슈판다우에서 공산주의자 시위 행렬이 해산되고 그 과정에서 10명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한다. 슈투트가르트 동부의 “라이텔스베르크” 주택 단지에서는 청년 노동자들이 히틀러 독재에 맞서 시위한다. 6월의 새 체포 물결조차 반파시스트들의 용감한 행동을 막지 못했다.
“6월 9일 베를린 동부 중앙 가축 시장 근처에서 시위가 벌어져 노동자 500~600명이 참가했다. 저녁 7시 조금 전, 나팔 신호에 맞춰 노동자들이 옆 골목들에서 나와 엘데나어 거리에 모였다. 중앙 가축 시장과 주변 정육점의 도축 직인들도 많이 가담한 가운데,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 공산당 만세와 히틀러 정부 타도를 외치며 시위대는 엘데나어 거리, 하우스부르크 거리, 테어 거리를 지나 프랑크푸르터 알레 바로 앞까지 행진했다. 주변 돌격대 술집에서 몰려나온 파시스트 돌격대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깨뜨리지 못했다. 출동한 경찰은 시위가 끝난 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했다.”
13.5 반파시즘의 영웅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독일 안에서 불법으로 싸움을 이어 가는 반파시스트들을 잔혹하고 가혹하게 박해한다. 그들이 돌격대의 손에 떨어지면 그것은 흔히 고문과 죽음을 뜻한다. 브레멘 경찰청은 1933년 7월 1일, 체포된 반파시스트들을 경찰 신문의 준비 과정으로 고문하겠다고 공공연히 발표했다.
“브레멘 경찰청은 다음과 같이 알린다. ‘최후 경고’ 포스터 게시에 이어, 경찰 책임자는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마르크스주의 선전이나 그 밖의 국가에 적대적인 활동으로 구금되는 모든 사람을 먼저 민족 단체에 넘기라고(!) 명령했다. 민족 단체는 정치 경찰을 지원하여 체포된 자들을 그 범행에 관해 철저히 예비 신문하고, 그 조사 결과와 함께 비밀국가경찰에 넘기는 임무를 맡는다.”
고문과 살인에 더하여, 굶기기가 반파시스트들을 겨냥한 히틀러 정부의 무기로 나선다.
카셀, 7월 8일: “카셀 행정구에 속하는 슈말칼덴 군에서는 최근 며칠 사이 실업자들 사이에 공산주의 선전이 부쩍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여러 차례 공산주의 전단이 뿌려졌는데, 그 작성자와 배포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슈말칼덴 시에서는 시장이 복지청에서 지원금을 받는 좌익 성향의 사람 모두에 대해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지원을 끊으라고 명령했다.”(《프랑크푸르터 차이퉁》, 33년 7월 10일)
특별 재판소 앞에 선 반파시스트 피고들에게는 변호인도, 증인도, 자신을 변호할 가장 작은 가능성도 없다. 판사가 곧 망나니다. 기소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는 어떤 가혹한 판결을 내려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많은 피고가 파시즘의 폭력에 영웅적으로 맞선다. 이를테면 1933년 6월 2일 알토나에서 반파시스트 노동자 20명에 대한 재판[226]을 두고 이런 보도가 나왔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공산주의자 노동자 뤼트겐스는 검찰의 구형이 자신에게 영예가 된다고 밝혔다. 혁명가에게 계급 재판소가 내리는 사형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며 죄수복은 명예의 옷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겉치레로 함께 기소된 경찰 밀정이 자신과 같은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밝히고, 끝으로 그 경찰 밀정이 받게 될지 모를 형량을 자신에게 얹어 선고해 달라고, 그래서 이 불한당과 같은 감옥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5월 중순 속기 타자수 위르가 법정에 서서, 전단을 남에게 건넸다는 이유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베를린의 《데어 타크》는 이렇게 전한다.
“피고는 법정에서 지금도 공산주의 사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검찰 측 대표는 이렇게 맞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특별 재판소에까지 나와 얼마나 뻔뻔하고 얼마나 몰염치하게 나설 엄두를 내는지, 여기서 한번 만천하에 밝혀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독일 특별 재판소들에서 날마다 벌어진다. 언론에 보도되는 재판은 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5월 말 켐니츠의 반파시스트 노동자 바르텔과 빙클러, 그리고 알토나의 노동자 뤼트겐스, 테슈, 볼프, 묄러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은 세계 여론을 들끓게 했다. 그 뒤로 테러적 사형 판결의 수는 주마다 늘어난다. 데사우에서, 쾰른에서, 하르부르크빌헬름스부르크에서, 베를린에서, 함부르크에서 반파시스트 노동자들에게 줄줄이 사형이 선고된다. 일부는 이미 오래전에 사면된 행위, 정당방위로 벌어진 행위, 그들이 아예 가담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은 행위 때문이다. 그들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신념 때문에 처벌받는다.
이 책의 분량으로는 불법 반파시즘 투쟁의 몇몇 단면만 보여 줄 수 있다. 반파시스트들이 조직한 정치 파업과 경제 파업, 사업장에서 벌어진 수백 건의 움직임, 청년 반파시스트들의 지도 아래 일어난 의무 노동 봉사 수용소[227]의 반란은 이 지면에서 그려 내지 못했다. 이런 행동들은 『갈색책』 제2권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독일의 불법 반파시즘 자유 투쟁을 노래하는 영웅의 노래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살해의 위협을 똑바로 쳐다보며 갈색의 공세를 버텨 낸 투사들. 사형 예고에 사회주의를 향한 당당한 신앙 고백으로 답한 체포자들. 강철 채찍과 곤봉에 얻어맞으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른 학대당한 이들. 헤센의 저 교사 빌헬름 하만[228] 같은 영웅들. 그는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들고 “독일 민족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만세!”를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돌격대에게 얻어맞으며 “혁명 만세, 텔만 동지 만세!”를 외쳤다.
이름 없는 투사 수만 명이 “제3제국”에서 독일과 세계를 치욕스러운 갈색 야만에서 해방하려고 일하고 있다. 교수대와 특별 재판소, 고문과 강제수용소가 그들을 위협한다. 그들의 굳건함, 그들의 용기는 꺾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가올 자유로운 사회주의 독일을 위해 나선다. 그들은 두려움 없는 활동으로 거듭거듭 불씨를 지핀다. 그 불씨에서 사회주의적 자유의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맺는말
『갈색책』은 6월 말께 마무리되었다. 살인을 다룬 장에는 7월의 사건 하나를 더 넣었다. 살해된 이들의 명단은 책을 인쇄하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 적었다.
정오표
149쪽에서 헨젤 교수를 실수로 수학자라고 적었다. 헨젤 교수는 법학자다.[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