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1933)

인물빌리 뮌첸베르크,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룀, 에트문트 하이네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파울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하인리히 브뤼닝,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그레고어 슈트라서, 빌헬름 프리크, 로베르트 라이, 오토 벨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에른스트 톨러 용어갈색책 (1933),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1933),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 (1933), 돌격대 (SA), 친위대 (SS), 강제적 동질화, 1933년 나치 분서, 성과학 연구소 사건나치 집권과 수권법,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6 문화 섬멸전

독일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에 대한 주공격과 나란히, 히틀러와 괴벨스는 독일 지식인의 가장 훌륭한 층에 맞서서도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돌격대의 군화가 가장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들이 평생 애써 이룬 업적을 짓밟는다. 돌격대는 말 그대로 수많은 지식인의 잔혹하게 학대당한 몸뚱이를 짓밟는다. 이들은 싸우는 노동자들과 털끝만 한 연관도 없을 때가 많았는데도 – 독립적이고 진보적이며 자유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증오를 샀다.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유주의적 신념만으로도 이미 “범죄”이며, 가차 없이 처벌된다.

괴벨스는 갈색 종교재판관들을 지휘한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까지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 민족주의로 왜곡된 프리드리히 대왕(Fridericus Rex)의 지팡이, 열병식 행진, 시체 같은 맹종 – 이것이 “제3제국”을 특징짓는 저 “문화”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지목된 모든 것, 지난 150년 동안의 시민적 진보와 계몽을 구현하는 모든 것이 뿌리 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 독일에는 이제 “정신의 자유”라는 사상이 설 자리도, 학문적 객관성을 향한 시민 학자들의 지극히 소박한 선의가 설 자리도, 예술 작품 속에서 민중의 사회적 해방 투쟁을 가장 수줍게 표현하는 일이 설 자리도 없다. 강단에서, 무대에서, 연단과 지휘대에서 쫓겨났다! 진료소와 연구소와 학술원에서 쫓겨났다. 독일 도시들의 광장에 쌓인 진보 문학의 화형대는 멀리서도 보이는 불길의 신호로 알린다. 갈색 야만은 가장 용감하고 헌신적인 반파시스트들을 육체적으로 절멸하려 할 뿐 아니라, 시민 문화가 노동계급에게 물려줄 살아 있고 값진 모든 것, 아니 그저 시민적으로나마 진보적인 모습을 띤 모든 것까지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정신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기수들이 지금 독일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살당하고 있다. 그 학살자는 지배 세력이 자기들의 자본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풀어놓은 저 갈색 폭력이다. 최근 독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우리 시대에 문화의 미래가 노동계급의 해방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증명했다.

6.1 학자 박해

“오 세기여, 오 학문이여, 사는 것이 즐겁도다!”

(울리히 폰 후텐)

파시즘의 치명적 증오는 당연히 노동계급의 해방 투쟁을 공공연히 지지하거나 평화주의 단체와 가까운 지식인들을 겨눈다. 이 증오는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첫날부터 이미 그들에게 온 힘을 다해 쏟아졌다. 갈색 방화범들의 도발 직후 시작된 첫 검거 물결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의사 협회」의 독일 지부가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지도자 펠릭스 뵌하임 박사는 2월 말부터 히틀러의 감옥에 갇혀 있다.

뵌하임 박사는 대단히 존경받는 내과 전문의로, 수많은 학술 업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업적의 학문적 의의를 인정받아 베를린에서 손꼽히게 큰 병원인 후펠란트 병원의 과장 의사 자리에 올랐다. 펠릭스 뵌하임 박사가 양심에 따라 전쟁 반대 의사 운동의 선두에 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히틀러 파시스트들의 화해할 수 없는 증오에 내맡겨졌다. 국제 의사 협회를 위한 그의 활동은 제멋대로 “대역죄”로 낙인찍혔다. 그에게는 변호인도 허락되지 않는다. 몇 달째 구금되어 있는데도 가족과의 연락은 일절 거부되었다.

막스 호단은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남성을 위한 성 상담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수많은 대중 과학서를 쓴 사람이다. 그는 몇 달째 히틀러의 앞잡이들 손아귀에 있다.

이름난 마르크스주의 학자 헤르만 둥커는 전 세계 노동운동 전체에서 높은 이름을 얻은 사람인데, 노령과 중병에도 불구하고 투옥되었다. 그의 목숨이 몹시 위태롭다. 전쟁 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한 세대 전체가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던 이 사람이 히틀러의 감옥에서 몸과 마음이 무너져 가고 있다.

중국에 관해 깊은 통찰을 주는 책을 쓴 작가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 작가 루트비히 렌, 카를 폰 오시에츠키, 쿠르트 힐러, 에곤 에르빈 키시, 에리히 뮈잠, 클라우스 노이크란츠, 에리히 바론 등, 그리고 의사인 브레슬라우의 셸러 교수, 베를린의 아슈 박사, 함부르크의 볼게무트 박사가 체포되었다. 학술 기관과 대학과 학교는 “돌격대 문화”의 훈련소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나 평화주의나 자유주의 사상을 품었다는 의심을 받는 고명한 학자들에 대한 박해는 독일 국가인민당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독일의 가장 중요한 대학들의 교수진이 반달족 같은 무자비함으로 쑥대밭이 된다. 무능하고, 기껏해야 시류에나 밝은 사이비 학자들의 밀고와 자리 사냥이 판을 친다.

6.2 독일 학문의 정수가 파괴되다

해고, 휴직 처분, 박해를 당한 이들의 명단에서 우리는 몇몇 사례만 골라 든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박해다. 스위스 시민이자 프로이센 학술원 회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좌파 민주주의적 정치 신념,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 관심, 그리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문적 업적 때문에 나치에게서 “비독일적”이라는 증오를 샀다. 아인슈타인의 학술 저작은 나치의 환호 속에 베를린 대학의 화형대에서 불태워진다. 노벨상 수상자를 이렇게 다룬 것 하나만으로도 히틀러 독일은 현대 학문의 세계에서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정밀과학 없이는 고도로 발달한 산업의 어느 분야도 번성할 수 없다. 그런데도 히틀러 정권은 정밀 자연과학과 수학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을 강단에서 몰아냈다.

괴팅겐 대학은 매우 오랜 전통을 지녔고, 지난 50년 동안 걸출한 연구자 한 세대 전체를 길러 냈다. 이 대학의 가장 중요한 교수들이 쫓겨났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실험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자진” 사퇴를 강요당했다.

역시 이름난 물리학자인 보른 교수는 자신의 “비독일적” 연구를 독일에서 더는 이어 갈 수 없다.

수학자 쿠란트는 함수론 분야의 권위자다. 베른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보험 수학자로 꼽힌다. 에미 뇌터는 수학과 고등 대수학 분야에서 명망 있는 학자다. 이 학자들 모두가 떠나야 했다.

베를린의 수학부는 가장 뛰어난 교수들을 빼앗겼다. 베를린 공과대학도 큰 손실을 입었다.

쫓겨난 이들 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을 실현하는 최초의 실용적 방법을 제시한 공로를 지닌 물리학자 아르투어 코른 교수도 있다.

대학 “숙청”의 희생양이 된 베를린 수학자들 가운데 맨 앞자리에는 대수학자 슈어와 미제스 교수, 비버바흐 교수가 있다.

정밀과학의 대표자들을 향한 이 광란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 운영의 관점에서 보아도 자살 행위다. 이것은 소련이 모든 정직한 학자들에게 열어 준 거대한 가능성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나치 숙청의 희생자 가운데에는 노벨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도 있다. 화학자들의 큰 학파를 이끈 하버는 이미 전쟁 전에 일급의 학문적 권위자였다. 그는 공기에서 질소를 얻는 최초의 쓸 만한 공정을 개발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버는 자신의 발명으로 세계대전 때 빌헬름 시대 독일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이름은 현대 독일 화학의 최고 발전을 상징한다. 《타임스》(1933년 5월 4일)가 지적했듯이, 독일이 4년의 전쟁을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을 아마 그 누구보다 많이 빚진 사람(하버)을 나치가 사퇴하도록 “강요”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같은 때 쫓겨난 폴라니 교수는 하버의 중요한 협력자였다.

정밀과학 분야에서 나치의 문화 야만에 밀려나야 했던 다른 이름난 학자들 가운데에는 플랑크의 양자론을 연구한 베를린의 뷔크 교수가 있다. 정수론 분야에서 독자적인 업적으로 알려진 쾨니히스베르크의 수학자 헨젤이 있다. 집합론에 관한 주목받는 책을 낸 킬의 아돌프 프랑켈 교수가 있다. 복사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 베를린의 물리학자 프링스하임이 있다.

여기 열거한 학자들은 모두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름난 학자이자 연구자이자 스승이다. 매우 불완전한 이 열거만으로도, 이 추방이 독일 학문의 진정한 섬멸이라는 것, 독일 파시즘이 종교재판과 화형대로 모든 학문적 진보와 싸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6.3 학자들에게 해외 여권을 내주지 마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에 초빙되고, 징계받은 부인과 의사 베른하르트 촌데크 교수가 스톡홀름에서 강의하자, 징계받은 독일 대학교수들의 해외 여권을 빼앗는 방안이 진지하게 검토되기에 이르렀다. 이 학자들의 “비독일적” 정신이 외국 대학에 이로움을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익지 《테글리헤 룬트샤우》는 1933년 4월 17일 자에서 아인슈타인이 프랑스 학사원에 초빙된 것을 두고 제국 정부에 요구했다. 휴직 처분을 받은 독일 대학교수 16명의 해외 여권을 즉시 빼앗으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머지않아 파리나 옥스퍼드나 런던에 자리를 잡고 그곳 강단에서 반독일 정치를 펴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문은 휴직 처분을 받은 교수들 가운데 켈젠, 레데러, 본 같은 이들은 외국에 아주 훌륭한 연줄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6.4 독일 최고의 의사들이 독일에서 일할 수 없다

독자는 이 장의 다른 곳에서,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독일에서 해고되고 “휴직 처분”되고 한직으로 밀려난 학자들의 명단을 보게 될 것이다. 자리에서 쫓겨난 의사 몇 사람을 여기서 짧게 소개해 두고자 한다.

베른하르트 촌데크는 스웨덴의 노벨 의학상 수상자 폰오일러에게서 “비길 데 없는 권위자”라는 평을 들었다. 우리는 촌데크 덕분에 소변을 분석해 임신을 아주 이른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학적 방법을 갖게 되었다. 이 방법은 사회위생의 관점에서나 순수 의학의 관점에서나 지극히 중요하다. 촌데크는 호르몬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그는 성호르몬을 분리해 내려고 힘써 왔다. 성호르몬은 남성과 여성에게서 특이하게 다른 물질로, 그 존재가 최근 몇 해 사이에야 확인되었다. 촌데크는 이 연구 방법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최근 성호르몬의 “인공” 제조를 놀라운 성과로 진척시켰다. 히틀러 정부는 이런 학문적 역량을 강단에서 밀어낸다!

한직으로 밀려난 베를린의 결핵 연구자 프리트만은 민중의 역병인 결핵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뛰어난 결핵 치료제를 발명했다.

베를린 모아비트 병원 외과 과장이자 추밀 의무 고문관이며 교수인 모리츠 보르하르트는 젊은 시절 독일의 저명한 외과 의사 폰베르크만의 조수였다. 뒤에는 베를린 피르호 병원의 과장 의사를 지냈다. 보르하르트는 외과 의사로서 결핵과 싸웠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보건 위원”에 의해 해임되었다.

6.5 히르슈펠트의 성과학 연구소는 어떻게 쑥대밭이 되고 파괴되었나

연구소에 몸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건의 경과를 낱낱이 지켜볼 수 있었던 믿을 만한 목격자이자 증인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 베를린의 학술 연구·교육·치료 기관이 끔찍하게 파괴된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33년 5월 6일 아침 《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는 베를린 도서관들에서 비독일적 정신의 책들을 숙청하는 작업이 이날 오전에 시작되며, 체육 대학 학생들이 성과학 연구소에서 이 작업의 막을 열 예정이라는 소식을 실었다. 이 연구소는 1918년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박사가 옛 하츠펠트 공의 저택에 세웠고, 그 뒤 프로이센 정부가 공익 재단으로 인수했다. 연구소는 유례없는 수집품과 연구, 기록 보관소와 도서관 덕분에 국제적 명성을 누렸고 찾는 이가 많았다. 특히 많은 외국 학자와 의사와 작가가 그곳에서 연구하려고 베를린에 왔다.

이 신문 기사를 보고 특히 귀중한 개인 장서와 원고 몇 가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좌절되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나가던 젊은이가, 분명 밤사이에 이미 연구소를 에워싸고 있던 감시대에게 붙잡혀 가진 것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5월 6일 9시 30분, 학생 100명가량과 관악대를 태운 트럭 몇 대가 연구소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건물 앞에 군대식으로 대열을 짓고는 음악에 맞춰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사무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때라 연구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가사 일을 하는 여성 몇 명과 연구소와 가까운 남자 한 사람만 있었다. 학생들은 모든 방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했다. 얼마 전부터 쓰지 않던 1층의 응접실들, 그리고 세계 성개혁 연맹의 예전 사무실과 지금 사무실처럼 잠겨 있던 방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아래층 방들에서 별로 얻을 것이 없자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가 연구소 접견실들에서 잉크병을 서류와 양탄자 위에 쏟아 버리고 개인 책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흠잡을 데가 있어 보이는 것은 다 가져갔는데, 대체로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따른 듯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책들도 집어 갔다. 이를테면 비서 기제의 개인 장서에서 투탕카멘에 관한 큰 책 한 권과 미술 잡지 여러 권을 가져갔다. 이어 그들은 기록 보관소에서 간성(間性) 사례들을 그린 큰 벽 도판들을 떼어 냈다. 이것은 1913년 런던 켄싱턴 박물관에서 열린 국제 의학 대회 전시회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이 도판 대부분을 창밖으로, 건물 앞에 서 있던 동료들에게 던졌다.

그 밖의 그림, 중요한 유형들을 찍은 사진 대부분은 벽에서 떼어 내어 그것으로 축구를 했다. 그래서 부서진 그림과 유리 조각이 큰 무더기로 남았다. 한 학생이 이것은 의학 자료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다른 학생은 그런 건 상관없다고, 자기들은 책 몇 권과 그림 몇 장을 압수하려는 게 아니라 연구소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긴 연설과 함께, 내분비 과정을 보여 주는 실물 크기 모형을 창밖으로 던져 박살 냈다. 한 진료실에서는 환자 치료에 쓰던 판토스타트[81]를 대걸레 자루로 때려 부쉈다. 또 히르슈펠트 박사의 청동 흉상을 약탈했다. 그 밖에도 많은 예술품을 가져갔다. 연구소 도서관에서는 처음에는 책을 몇백 권만 가져갔다.

그동안 내내 직원들은 감시를 받았고, 음악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래서 건물 앞에는 구경꾼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12시에 지휘자가 꽤 긴 폐회 연설을 했고, 대원들은 특별히 지은 「저질 외설 노래」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82]를 부르며 물러갔다.

연구소에 사는 사람들은 이 약탈로 일이 끝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후 3시에 다시 돌격대원들을 태운 트럭 여러 대가 나타나, 아침의 대원들이 철저히 치울 시간이 모자랐으니 압수를 계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두 번째 무리는 모든 방을 다시 샅샅이 뒤지고, 값진 책과 원고는 모조리 바구니 여러 개에 담아 날라 갔다. 모두 합쳐 큰 화물차 두 대 분량이었다. 그들이 퍼붓는 욕설로 보아 학생들은 이 전문 도서관에 있는 저자들의 이름을 대부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계단실에서 떼어 내어 끌고 간 초상의 주인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돼지 유대인 프로이트’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해블록 엘리스도 ‘돼지 해블록 엘리스’라고 불렀다. 영국 저자 가운데서는 해블록 엘리스 말고도 특히 오스카 와일드, 에드워드 카펜터, 노먼 헤어의 저작을 노렸고, 미국 작가 가운데서는 소년 법원 판사 린지, 마거릿 생어, 조지 실베스터 비어렉의 책을, 프랑스 저작 가운데서는 앙드레 지드, 마르셀 프루스트, 피에르 로티, 졸라 등의 책을 노렸다. 판더펠더와 덴마크 의사 레운바크 박사의 책을 보고도 학생들은 저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잡지도 여러 해 치를 통째로 가져갔는데, 특히 『성적 중간 단계 연보』 24권이 그랬다. 그들은 작성된 질문지(수천 장)도 끌고 가려 했으나, 이것은 환자 병력이라는 분명한 지적을 듣고서야 학생들은 그만두었다. 반면 세계 성개혁 연맹의 자료, 잡지 《섹수스》의 남아 있던 부수 전부, 그리고 카드 색인을 가져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도 일부 있는 수많은 친필 문서와 원고(크라프트에빙과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의 것 등)도 침입자들의 손에 희생되었다.

그들은 히르슈펠트 박사가 언제 돌아오는지 거듭 물었다. 그들 표현대로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 ‘귀띔’을 받고 싶어 했다. 연구소가 약탈당하기 전에도 이미 돌격대원들이 여러 차례 연구소에 와서 히르슈펠트 박사를 찾았다. 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외국에 있다는 대답을 듣자 그들은 이렇게 받아쳤다. ‘그럼 우리가 손쓸 것도 없이 뒈져 버리면 좋겠군. 그러면 굳이 목을 매달거나 때려죽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5월 7일 베를린과 다른 지역의 신문들이 성과학 연구소에 대한 작전을 보도하자, 세계 연맹 지도부는 전보로 항의했다. 수집된 자료 가운데 많은 것이 외국인 소유물이니 예고된 소각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문화부 장관에게 보낸 이 전보는 무시되었고, 오히려 모든 저작과 그림이 사흘 뒤 오페라 광장에서 다른 많은 저작과 함께 불태워졌다. 연구소 전문 도서관에서 없어진 책은 1만 권이 넘었다. 횃불 행렬에서 학생들은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박사의 흉상을 들고 가다가 화형대에 던졌다.”

나치의 보도에서 이 “문화적 위업”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독약 부엌을 힘차게 들이치다.”

독일 학생들이 “성연구소”를 소탕하다.

독일 학생회 제10관구가 어제 유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이끌어 온 “성연구소”를 점거했다. 학문의 외투를 걸치려 애쓰던 이 연구소는 14년 동안의 마르크스주의 지배 아래서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늘 비호를 받았는데, 이번 가택 수색으로 똑똑히 밝혀졌듯이 오물과 추잡함의 소굴일 뿐이었다. 외설 그림과 글, 그리고 문서와 카드 색인이 트럭 한 대 가득 압수되었다… 발견된 자료 가운데 일부는 형사 경찰이 다루어야 하고, 다른 일부는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울 것이다.

(《앙그리프》 1933년 5월 6일 자)

6.6 “비독일적” 사회학자, 국법학자, 법학자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이름난 사회학자, 국법학자, 법학자들을 몰아내면서, 몹시 “국가 수호적”인 연구자들, 대개는 훌륭한 보수주의자들까지도 자리에서 내쫓았다.

쫓겨난 학자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이는 하이델베르크의 사회학자 알프레트 베버다. 알프레트 베버는 세상을 떠난 형 막스 베버와 함께 큰 저작들에서, 유럽 밖 여러 민족과 문화의 원시 경제가 발전해 온 형태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다. 베버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시민 학자다. 베버는 다른 민족과 문화를 민족사회주의식으로 반쯤 원숭이요 “열등 인간”이라고 낙인찍지 않는 대죄를 저질렀다.

베를린 상과대학은 학장인 뛰어난 자유주의 경제학자 본 교수를 잃는다. 국법학자 안쉬츠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떠나야 한다. 베를린 대학 교수를 오래 지낸 안쉬츠는 이미 제정 독일 시절에 자기 분야에서 일급의 권위자였다. 뒤에 그는 바이마르 제국 헌법의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되었다.

그의 동료 다수가 내쫓겼다. 쾰른의 시민적 교수 켈젠, 킬의 동료 함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전 편집인 파일러, 우파 사회민주주의자 에밀 라트브루흐,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랑크푸르트의 진츠하이머, 하이델베르크의 레데러, 프랑크푸르트의 헬러 – 모두 법학자다. 독일 최고의 민법학자 마르틴 볼프 교수는 갈고리십자가 학생들에게 강단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헤이그 국제 사법 재판소의 독일 대표인 킬의 자유주의 국제법학자 레빈 쉬킹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위대한 심리학자들도 강의실에서 밀려났다. 아동 심리학에 관한 큰 저작을 낸 함부르크의 빌리암 슈테른,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의 막스 베르트하이머는 더는 독일 대학에서 가르칠 권리가 없다. 함부르크에서는 덜 알려진 교수 대여섯 명과 함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가 해고되었다. 그는 이른바 마르부르크 학파 출신으로, 학식과 명성이 높은 사람이다.

6.7 화형대로!

“베를린에서 정치경찰은 어림잡아 1만 첸트너[83]쯤 되는 책과 잡지를 압수해 옛 기마 보안경찰의 마구간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꼼꼼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압수가 늘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작전이 알려지자 곧 많은 도서실이 경찰의 손을 피하려고 책을 은신처로 옮겼다. 그러나 은닉처는 대부분 찾아냈다. 많은 장서가 헛간, 지하실, 정원 오두막, 다락, 개인 주택 등에 나뉘어 숨겨진 채 발견되었다.”

(《푈키셔 베오바흐터》 1933년 5월 21/22일 자)

“우리는 괴테와 아인슈타인의 나라가 아니며, 그런 나라가 되고 싶지도 않다. 바로 그것만은 안 된다.”

(후송, 《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 1933년 5월 7일 자)

“칼리프가 알렉산드리아의 이름난 도서관을 불태우려 하자, 몇몇 사람이 이 귀중한 장서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왜?’ 칼리프가 물었다. ‘이 책들에 코란에 있는 것이 적혀 있다면 쓸데없다. 다른 것이 적혀 있다면 해롭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불태워졌다.”

5월 10일, 대학 맞은편 베를린 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서 거대한 화형대의 불길이 타올랐다. 광장 전체가 돌격대와 친위대의 갈색·검은색 부대에 군대식으로 봉쇄되었다. 트럭들이 어마어마한 책 더미를 실어 왔고, 고함이 울려 퍼졌고, 선전 장관 괴벨스가 자동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1933년에 이 유례없는 분서의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독일의 노래」가 이를 반주했다.

화형대 위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이, 레닌과 스탈린의 저작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의 저작이 날아갔다. 일하는 인류에게 해방의 길을 가리켜 보인 이 위대한 학자이자 투사들의 저작을 불태우는 일이, 고삐 풀린 반동 무리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독일이여, 독일이여, 모든 것 위에!”—

날름거리는 불길 속으로 평화주의 작가들의 저작이 날아갔다. 시민 독일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뜻하던 이름의 시민 시인과 사회 개혁가들의 책이 불탔다. 불은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레온하르트 프랑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지크문트 프로이트, 야코프 바서만, 슈테판 츠바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알프레트 되블린, 테오도어 플리비어의 책을 삼켰다.

“독일이여, 독일이여, 모든 것 위에!”—

진보적 정신의 산물을 불태우는 이 일은 베를린 대학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빌헬름 폰 훔볼트 상 받침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다. 이 대학을 세운 빌헬름 폰 훔볼트는 계몽 시대 정신의 담지자로서, 융커의 프로이센을 서구 시민 세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이제 그의 기념상 앞에서 돌격대 제복을 입은 독일 학생들이 진보 문학을 향한 포그롬을 벌였다. “독일이여, 독일이여, 모든 것 위에!” —

베를린 대학 앞에서 타닥거리는 불, 쇼비니즘으로 들끓는 군중의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제국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 — 히틀러에 충성하는 베를린의 《12시 신문》조차 무의식적인 자기 인식 속에서 “유령 같다”고 부른 구경거리. 모든 세기의 압제자들이 자기들의 화형대로 얻은 쓰라린 경험은 잊혔다! 중세의 유령들이 되살아난다. 베를린 대학 앞의 불길은 마르크스주의 저작들과 함께 지난 150년 동안 시민 문화와 학문이 이룬 최고의 성과까지 삼키려 한다.

독일 전역에서 모든 진보 문학을 향한 파괴의 광란이 날뛰고 있다. 가택 수색에서 수만 곳의 개인 장서가 압수되었고, 흔히 그 자리에서 없애거나 제멋대로 끌고 갔다. 대체할 수 없는 노동운동의 희귀 문헌을 갖춘, 독일에서 가장 값지고 큰 도서관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치히 인민회관 도서관은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갈색 “문화 담지자”들의 증오에 희생되었다.

독일 국가인민당 계열 통신사 「텔레그라펜 우니온」의 1933년 5월 10일 자 보도에 따른 공개 분서의 몇 가지 사례를 든다.

“베를린, 5월 10일. 뮌헨에서는 대학 중정에서 기념식이 열려 총장 폰춤부슈 추밀 고문관이 새 학생법을 전달했다. 기념 연설은 바이에른 문화부 장관 솀이 맡아 민족 혁명과 대학의 과제에 관해 말했다. 마지막 순서로 쾨니히스 광장까지 횃불 행렬이 이어졌고, 그곳에서 비독일적 책들을 불태웠다.

드레스덴에서는 학생회 집회에서 시인 빌헬름 페스퍼가 연설했다. 그곳에서도 기념식이 끝난 뒤 큰 횃불 행렬이 비스마르크 기념탑까지 나아갔고, 드레스덴 학생회 최고참의 연설에 이어 저질·외설 문헌 전부를 불태웠다.

브레슬라우에서는 학생회 집회가 성 광장에서 열렸다. 대학교수 보른하우젠의 기념 연설이 있은 뒤 저질·외설 문헌 약 40첸트너를 불태웠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는 대학교수 프리케가 역사적인 뢰머베르크 광장에서 거행된 의식의 막을 열었다. 상징적으로 불태울 책을 실은 수레를 황소 두 마리가 소각 장소까지 끌고 왔다. 소각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합창으로 끝났다.”

그보다 며칠 앞서 뒤셀도르프에서는 위대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이 화형대의 불길에 넘겨졌다.

괴벨스 씨는 베를린 연설에서 소 수레가 화형대로 나아가는 것, 문학을 불태우는 것을 “강력한 상징적 행위”라고 불렀다. 분서는 단지 상징으로만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 파시스트들의 반동은 실제로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인쇄된 말을 조금도 상징적이지 않게 불태워 버리려 한다. 반파시즘 문학을 퍼뜨리고 쓰는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절멸하려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6.8 갈색 명부

불태워 마땅한 문학의 갈색 명부가 후겐베르크의 《나흐트아우스가베》[84] 1933년 4월 26일 자에 실렸다.

  • 순문학: 숄렘 아시, 앙리 바르뷔스, 베르톨트 브레히트, 막스 브로트(그의 소설 『튀코 브라헤』는 제외), 알프레트 되블린(『발렌슈타인』은 제외), 일리야 예렌부르크, 알베르트 에렌슈타인, 아르투어 엘뢰서, 리온 포이히트방거, 이반 골, 야로슬라프 하셰크, 발터 하젠클레버, 아르투어 홀리처,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코프, 요제프 칼레니코프, 지나 카우스, 에곤 에르빈 키시, 하인츠 리프만, 하인리히 만(『피리와 단검』은 제외), 클라우스 만, 로베르트 노이만, 에른스트 오트발트, 쿠르트 핀투스, 테오도어 플리비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루트비히 렌(그의 작품 『전후』만), 알프레트 시로카우어, 아르투어 슈니츨러,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에른스트 톨러, 쿠르트 투홀스키, 아르놀트 츠바이크, 슈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아드리엔 토마스의 책 『카트린, 병사가 되다』.
  • 정치와 국가학: 레닌, 카를 리프크네히트, 카를 마르크스, 후고 프로이스, 발터 라테나우, 루돌프 힐퍼딩, 아우구스트 베벨, 막스 아들러, S. 아우프호이저, E. J. 굼벨, N. 부하린, L. 바우어, 그리고 헬렌 켈러. 라살레는 『배심 법정 변론』과 『현재의 역사 시기와 노동자 신분 이념의 특수한 연관에 대하여』를 빼고 전부.
  • 역사: 모든 평화주의 저작과 “패배주의” 저작, 러시아사에 관한 모든 친볼셰비키 문헌을 통틀어 없애야 한다. 특히 오토 바우어, 카를 추피크, 오스카어 블룸, 파울 한, 뮐러프랑켄의 저작, 쿠르트 케르스텐의 『비스마르크와 그의 시대』, 프란츠 메링의 『독일사를 위하여』와 『프로이센사를 위하여』, 글레저와 업턴 싱클레어의 저작을 뿌리 뽑아야 한다.

독일 학생회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관구장 구트야르가 베를린 대학 앞 광장의 분서를 지휘했다. 그는 앞에 든 저자들의 책 말고도 무엇보다 엥겔스, 지크문트 프로이트, 에밀 루트비히, 알프레트 케르, 오시에츠키, 테오도어 볼프, 게오르크 베른하르트, 베르타 폰 주트너, 로자 룩셈부르크, 테오도어 호이스, 폰쇠나이히 남작, 판더펠더의 저작을 불길 속에 던지게 했다.

학문과 문학을 상대로 한 이 섬멸전에서, 문화와 학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까지 모두 공공 도서관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그 의도에서, 갈색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허약함이 드러난다.

히틀러가 독일의 진보적 사상의 모든 저작을 불태운다고 해서, 인류가 지난날 독일의 정신생활에 빚진 것이 단 한순간이라도 잊힐 수는 없다. 베를린 오페라 광장의 화형대 불길 속에서 인류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할 독일의 능력이 불타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히틀러, 괴벨스, 괴링, 루스트는 결코, 절대로 “참된 독일 정신”의 대표자가 아니다. 문화적 진보를 위한 독일의 참으로 위대한 창조력은 히틀러 정권이 반파시스트 노동자, 학자, 예술가, 지식인으로서 잔혹하게 박해하고 때려눕히는 저 수백만 사람들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수백만 사람들 속에, 독일이 앞으로 사회주의 문화를 이끄는 나라가 될 능력이 보증되어 있다.

6.9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의 숙청

우리가 히틀러의 이 시인 아카데미 공격을 서술하면서,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한 번이라도 긍정적이고 참으로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했는지는 우리 고찰의 중심이 아니다. 갈고리십자가에 충성하는 그 후임자들에 견주면, 이 기관에서 내쫓기거나 압력에 못 이겨 탈퇴한 회원들은 정신과 역량과 마땅한 명성에서 참으로 거인들이다.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에서 “숙청된” 회원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이는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아마도 시민 독일을 가장 잘 대표하는 작가인 토마스 만이다. 그의 “범죄”는 지난 몇 해 사이에 사회민주주의에 다가섰고, 사코·반제티 사건과 라호시[85] 사건처럼 계획된 사법 살인에 맞서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는 데 있었다. 이 위대한 작가는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밀려났다. 그가 언젠가 NSDAP를 “시대의 가장 해로운 쓰레기”라고 부른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은 시민 세계 안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독립적 정신”의 자리를 만들어 보려 했다. 그는 시민을 희화로 그렸다. 제정의 시민(『충복』)과 공화국의 시민(『큰 사건』)을. 하인리히 만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암스테르담 국제 민중 운동을 지지했다. 그 때문에 그는 동생 토마스처럼 히틀러의 “문화 담지자”들에게 책이 불태워지고 쫓겨난다.

나치의 증오를 받는 세 번째 시민 작가는 야코프 바서만으로,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의 주된 범죄는 유대인이라는 것, 그리고 소설에 시민적·자유주의적 견해를 담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쫓겨난 알프레트 되블린은 베를린 노동자 구역의 의사로, 환상적이고 부분적으로 이국풍으로 꾸민 소설(『왕룬의 세 번 도약』, 『발렌슈타인』, 『산, 바다, 거인』)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되블린의 마지막 대작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었다. 되블린은 공개 토론에서 스스로를 계급의식 있는 시민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일랜드인 제임스 조이스와 미국인 도스 패서스를 본떠 형식적·예술적으로 아주 대담한 실험을 했다.

순전히 시민적인 사상 세계의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20년 전 표현주의의 개척자였다. 베르디를 다룬 소설로 그는 큰 인기를 얻었다. 나치는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엘자스 출신의 독일 시인 르네 시켈레가 쫓겨났다. 반전 소설 『인간은 선하다』를 쓰고 소설 『도둑 떼』와 『원인』에서 사회 비판적 경향을 추구한 레온하르트 프랑크가 쫓겨났다. 레온하르트 프랑크는 지난 몇 해 사이에 문학 정치적으로 점점 더 오른쪽으로, 순전히 시민적인 소재 쪽으로 옮겨 갔는데도, 그 과거 때문에 나치의 증오를 샀다.

독특하고 강한 아나키즘적 재능을 지닌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도 아카데미를 떠나야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작가 프리츠 폰 운루, 재능 있는 자유주의 작가 베른하르트 켈러만, 서정시인 몸베르트와 루돌프 판비츠, 그리고 희극 작가 루트비히 풀다가 쫓겨났다. 문학적 역량을 지닌 몇 안 되는 독일 여성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리카르다 후흐는 4월 초 스스로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에서 탈퇴했다.

정치적으로 한 번도 나선 적이 없는 회원 오스카어 뢰르케와 야코프 샤프너 말고도, 게르하르트 하웁트만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직조공』의 시인은 이미 여러 번 “변신”을 겪었다. 전쟁 중에 그는 제국주의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수치스러운 「93인 지식인 선언」[86]에 서명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궁정 시인으로 떠받들어졌다. 갈색 테러가 가장 훌륭한 시민 작가와 학자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 때, 그는 끈질기게 침묵했다.

그러면 이제 민족사회주의자인 교육부 장관 루스트가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에 들여앉힌 인물들을 보자.

그들의 간판은 한스 요스트다. 그는 한때 시류를 아주 잘 읽어 혁명 편에 섰다. 그 “11월 범죄”는 용서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이름을 얻은 유일한 민족사회주의 작가다. 지금 독일의 무대 수백 곳이 히틀러 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의 「슐라게터 극」[87]을 공연하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말 그대로 이렇게 외친다.

문화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브라우닝 권총의 안전장치를 푼다.

루스트 씨가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를 위해 내세운 특별한 볼거리는, 한스 카로사를 빼면 에밀 슈트라우스, 빌 페스퍼, 빌헬름 셰퍼, 아그네스 미겔, 페터 되르플러 같은 하찮은 작가들뿐이다. 한스 그림은 소설 한 편에서 “공간 없는 민족”을 지어냈고, 뵈리스 폰 뮌히하우젠은 튜턴 정신으로 가득한 낭만적 발라드를 썼다.

조금이라도 무게 있는 이름을 찾아 헤매던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서정시인 슈테판 게오르게까지 시인 아카데미로 끌어들이려 한다. 갈색 문화 파괴자이자 “게르만 정신의 쇄신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문화 정책을 위장하는 데 그의 이름을 쓰려고, 독일의 모든 시인 가운데 가장 속물적이고 민중과 가장 동떨어진 이 시인에게 비굴하게 구애한다.

6.10 갈색 시문학

제3제국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 박사는 소설을 한 편 썼다. 『미하엘, 일기장으로 본 한 독일인의 운명』이다. 미하엘, 곧 길을 찾는 독일의 영혼은 환영을 본다. 악마가 러시아인 이반의 모습으로 나타나 고귀한 영혼을 볼셰비즘으로 꾀어내려 한다. 미하엘의 영혼은 유혹자와 씨름한다.

“그러나 나는 그놈보다 강하다. 이제 나는 그놈의 멱살을 잡는다. 이제 나는 그놈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저기 그놈이 누워 있다. 핏발 선 눈으로 그르렁거리며. 뒈져라, 이 썩은 고기야! 나는 그놈의 두개골을 짓밟아 부순다. 이제 나는 자유다!”

이것이 히틀러화된 시인 아카데미에 들어갈 자격을 주는 정신이다. “나는 그놈의 두개골을 짓밟아 부순다! 뒈져라, 이 썩은 고기야!”

괴벨스가 획일화된 독일 작가 보호 동맹의 지도자로 앉힌 이름난 작가 한스 하인츠 에버스는 아직 시인 아카데미에 공식으로 불려 가지는 않았다. 이 포르노 작가의 소설 『알라우네』와 『흡혈귀』는 나치 자신이 뒤늦게 저질·외설 문학 명부에 올렸는데(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그럴 만한 유일한 책들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의 영웅 호르스트 베셀의 공식 전기 작가다. 에버스가 예전에 “악마주의자”로서 문학적 도착을 “팔아먹었듯이”, 이제 그는 포주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금칠한다. “영웅적” 인물 호르스트 베셀은 그 세계에서 경쟁 포주의 총알에 쓰러졌다. 히틀러의 생일에 도이칠란트 방송은 한스 하인츠 에버스의 방송극 「호르스트 베셀」을 내보냈다. 이 작가는 여러 해 동안 까맣게 잊혀 있다가, 이제 “제3제국”의 궁정 시인으로서 문학적 망각에서 부활을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1922년에 H. H. 에버스는 이즈리얼 쟁윌의 책(『예루살렘의 목소리』, 1922년, 베를린 자무엘 크론바흐 출판사)에 매우 친유대적인 서문을 썼다. 그사이 시류가 바뀌었고, H. H. 에버스는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이렇게 프로이센 시인 아카데미는 저 정신의 깃발 아래 새로 짜였다. 그 정신의 “깨어나는 서정시”는 이를테면 이렇다.

“새들이 모두 벌써 왔네!”(「잘 있거라」와 「새들이 모두」의 가락으로)

“1.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고향 땅
슈트라스부르크 보루 위에서
크나큰 슬픔이 시작되네
승리의 화관을 쓴 그대에게 만세
우레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지네
로자 룩셈부르크는 운하에 떠 있고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 나무에 매달려 있네

2. 새들이 모두 벌써 왔네
새들이 모두, 모두
지빠귀, 개똥지빠귀, 되새와 박새
그리고 국기단, 검정·빨강·똥…
아니 아깝구나, 금색이 빠졌으니
아깝다, 영원히 아깝다!”[88]

(『독일이여 깨어나라』에서 뽑음. 작은 나치 노래책. B판, 엮은이 파울 아렌트, 오버팔츠의 줄츠바흐, 제8(!)판.)

제8판까지 퍼진 갈색 서정시의 이 걸작이 전형적이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이것이 많이들 부르는 돌격대 노래들과 어디가 다른가.

“유대인의 피가 칼에서 흘러내리면, 우리는 두 배로 신이 나지.”

또는 비슷하게,

“붉은 족속, 짓이겨 곤죽을 만들어라! 돌격대가 행진한다 — 길을 비켜라!”

1933년 6월 중순 뮌헨 시 참사회가, 1919년 둘 다 바이에른 반동에게 살해된 구스타프 란다우어와 쿠르트 아이스너의 무덤을 허물어 땅바닥과 평평하게 만든 것은 나치의 이 정신에 걸맞은 일이다.

6.11 비독일적 음악을 향한 출정

제국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 씨는 5월 9일 독일의 극장장과 예술가들 앞에서 선언했다. “예술(Kunst)은 할 줄 아는 것(Können)에서 오지, 하고 싶은 것(Wollen)에서 오지 않는다.” 이 멋진 말을 예증하려고 우리는 여기 독일 예술의 손실 목록을 하나 더 내놓는다.

독일 최고의 재현 예술가로는 늘 지휘자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퍼러, 프리츠 부슈가 꼽혀 왔다.

오토 클렘퍼러는 몇 해 동안 베를린 크롤 오페라를 이끌며 그곳을 현대 음악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지휘 아래 힌데미트와 쿠르트 바일이 무대에 올랐다. 크롤 오페라가 문을 닫은 뒤 클렘퍼러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로 불려 가 같은 정신으로 활동을 이어 갔다. 이제 그는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한다. 유대계 혈통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명성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말러의 제자다. 그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래서 — “예술은 할 줄 아는 것에서 온다” — 그는 더는 독일에서 지휘할 수 없다. 그 대신 나치의 전속 음악가(큰 취주악대의 대장)인 푸젤 아무개 씨가, 예술이니 실력이니 하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그가, 깨어난 독일 민족에게 음악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드레스덴 음악 총감독 부슈는 금발이어서 그의 “아리아” 혈통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보수적인 시민이지만, 어쩌다 보니 나치는 아니다. 이름난 예술 기관인 드레스덴 오페라는 부슈 덕분에 되살아났다. “민족 궐기”의 나날에 공연 도중 한 민족사회주의자 밀고자가 무대에 나타나 부슈에게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베를린, 3월 8일. — 어젯밤 이름난 지휘자 부슈의 지휘로 「리골레토」가 공연되던 중 돌격대원 60명이 시립 오페라 무대를 점거했다. 《포시셰 차이퉁》의 보도에 따르면 돌격대 지휘관은 관객에게,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극장을 이끌 것이며 지휘자 슈트리거가 곧바로 부슈 대신 지휘를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부슈가 그래도 계속 지휘하려 하자 그 자리에 있던 돌격대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소란이 일었고, 부슈는 오페라 극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슈트리거가 지휘대에 섰다.”

독일에서 가장 이름난 피아니스트는 틀림없이 아르투어 슈나벨이다. 그는 30년의 노력 끝에 위대한 피아노 음악의 해석자가 되었다. 그는 베를린 음악 대학에서 피아노 마이스터 클래스를 이끌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다. 베를린 음악 대학의 동료 가운데서는 지금 독일의 유일한 일급 첼리스트 에마누엘 포이어만,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마이스터 클래스 교수인 레오니트 크로이처가 밀려났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플레슈는 한직으로 밀려났고, 한때 새로운 음악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이름난 지휘자 오스카어 프리트, 유명한 오페라 지휘자 프리츠 슈티드리와 구스타프 브레허, 그리고 뛰어난 피아니스트 브루노 아이스너가 쫓겨났다.

독일의 작곡가 가운데 곧바로 나치 지지를 밝힌 이는 막스 폰 실링스다. 그의 작품은 독창성이 없고, 지휘자로서도 그는 어디서도 판에 박힌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 지나간 공화국 아래서 높은 자리를 맡았고 막스 리버만이 물러난 뒤 예술 아카데미 의장이 된 실링스에게는 나치에 충성하는 벗으로 작곡가 한스 피츠너가 있다. 대표적인 작곡가 가운데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그들과 한패가 된다. 그의 작품은 나치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음탕한 유대적 관능 자극”에 봉사하지만, 그는 궁정 작곡가가 되어 가는 중이다.

독일의 현대 작곡가 가운데 나치 편에 남은 이는 거의 없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쫓겨나 음악 대학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의 음악을 어떻게 보든, 쇤베르크는 현대 음악의 발전에 가장 크고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적이지만, 음악에서는 새로운 고유한 음악 언어를 찾아낸 형식의 혁명가였다. 나치 독일은 이 개척자를 쓸 데가 없다.

독일에서 가장 이름난 작곡가 가운데 하나인 쿠르트 바일은 히틀러 독일에서 배척당한다. 그는 세계적 성공을 거둔 『서푼짜리 오페라』의 작곡가다. 바일은 유대인이어서 이제 고향을 잃었다.

오페라 작곡가 프란츠 슈레커(그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이름난 것은 「먼 곳의 소리」)는 결코 특별히 진보적이지 않은데도 베를린 음악 대학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혈통이 “흠잡을 데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치의 각별한 증오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에게 쏠렸다. 그 역시 외국으로 쫓겨났다. 그는 지난 몇 해 동안 독일 노동계급에게 큰 합창곡(「조치」)과 대중적인 투쟁가들을 주었다. 그 노래들은 거리에서, 집회에서, 노동자 구역에서 대중이 가장 큰 열광 속에 불렀고, 곧 여러 나라에 알려졌다. 그는 의식적으로, 끈질기게 자신의 음악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노동계급의 투쟁 수단으로 만들었다. 쇤베르크 악파에서 나온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투쟁 음악이라는 뜻에서 새롭고 수준 높은 업적을 이룬 창작자가 되었다. 히틀러 독일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강제수용소의 조련이나 돌격대 병영에서의 고문사다.

여러 해째 전반적 위기에 빠져 있던 독일 음악은 가장 뛰어난 힘들을 빼앗겼다. 이 일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세계 최고의 이름난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리하르트 바그너 기념의 해에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가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6월 초 위니프레드 바그너 부인[89]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 제 감정을 해치는 사건들이 제 바람과 달리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았으므로, 두 달 동안 스스로 지켜 온 침묵을 오늘 깨고, 제가 바이로이트에 가는 일은 더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저와 부인과 모든 이의 평온을 위해 낫다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것이 제 의무라고 여깁니다. 바그너 가문에 대한 변함없는 우정의 마음을 담아.”

서명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6.12 연극 — 조형 예술 — 영화

독일의 무대에서는 이제 슐라게터를 찬미하는 쇼비니즘과 호르스트 베셀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일이 개가를 올려도 된다. 괴벨스 씨는 자신의 “이름난” 무대 작품 「방랑자」를 베를린의 한 무대에 올리게 한다. 독일 연극에서는 뛰어난 연기 업적을 보여 준 많은 배우가 사라졌다. 모든 국립·시립·사립 극장이 “획일화”되었다. 극장 종사자 조직들은 파시스트 위원들의 지시 아래 굴복을 강요당했다. 프리츠 코르트너, 막스 팔렌베르크, 마사리와 베르크너,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예스너는 “비독일적”이라며 외국으로 쫓겨났다.

오페라 가수 로테 쇠네, 프리다 라이더, 알렉산더 키프니스 등의 예술적 역량은 루스트의 갈색 문화 독재 아래서 더는 아무 쓸모가 없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가수이자 배우인 에른스트 부슈는 아이슬러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노래들을 널리 알리고, 그로써 그 자신이 독일 노동 대중의 해방 투쟁을 알리는 사랑받는 전령이 된 뛰어난 예술가인데, 외국으로 내몰렸다.

영화사 「우파(UFA)」는 앞으로 자사 영화에서 유대인 배우는 부정적인 역할에만 쓸 수 있다는 지침을 내렸다. 독일 영화의 지배자들은 앞으로 자기 영화에서 유대인을 사기꾼, 범죄자, 병적인 인간으로만 보여 줄 작정이다. 1933년 7월 초에는 유대인은 괴벨스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만 고용할 수 있다는 그의 새 명령이 나왔다.

6월 6일, 모든 노동조합처럼 폭력으로 “획일화된” 옛 무대인 조합의 베를린 사무실에서 「예술 무대 감독 협회」의 총회가 열렸다. 이 협회는 분과 단체로서 민족사회주의 「독일 문화 투쟁 동맹」에 편입되어 있다. 국가 위원 힌켈은 이 총회에서 예술가들에 대한 새로운 자의적 “정화” 출정을 예고했다.

“프로이센 문화부의 제안에 따라 최근 며칠 사이에 괴링 총리에게 프로이센 극장 위원회의 구성이 통보되었다고 한다. 힌켈이 위원장을 맡는 이 극장 위원회는 모든 시립 극장의 극장장, 음악 총감독, 악장, 연출가, 독주자 전원을 심사하는 일을 맡는다. 앞으로 며칠 안에 계약을 무효로 하거나 보완하거나 변경할 수 있게 하는 명령들이 나와, 독일 극장이라는 뜻에서의 예술 창작이 어떤 식으로든 방해받는 일을 막을 것이라고 한다. 사법상의 구속은, 독일 극장의 이익에 어긋날 때에는 법적 조치로 풀 수(!) 있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1933년 6월 8일 자)

나치의 무의미한 파괴 작업은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벌어진다. 예술 아카데미 의장이자 보수적 신념을 지닌 위대한 화가 막스 리버만은 아리아인 조항에 따라 물러나도록 강요당했다. 베를린 분리파의 공동 창립자로서 오랫동안 그 회장을 지낸 그는 여기서도 물러나야 했다. 노동자 세계의 천재적 예술가 케테 콜비츠가 추방당하는 것은 민족사회주의 노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전시회의 “독일적 숙청”에 희생된 화가와 조형 예술가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독일에서 가장 이름난 진보적 영화감독들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과 가까운 모든 영화인, 모든 프롤레타리아 영화나 진보적 영화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이를테면 히틀러 정부의 명령으로 다음 영화들이 곧바로 금지되었다.

  • 「쿨레 밤페」
  • 「무인 지대」
  • 「동지애」
  • 「크라우제 어머니의 행복 여행」
  • 「다른 쪽」
  • 「마부제 박사의 유언」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 「여성의 행복 — 여성의 고난」
  • 「나무 십자가」(프랑스 영화)

소련 영화 가운데서는 이를테면 다음이 금지되었다.

  • 「인생 길」
  • 「아시아의 폭풍」
  • 「어머니」
  • 「병기고」
  • 「세계를 뒤흔든 열흘」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최후」
  • 「기억을 잃은 사나이」

프롤레타리아 영화와 지나치게 가깝다는 의심을 받는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 돌격대와 보조 경찰이 A. 슈타이글러 박사를 체포하고 학대한 일은 그 특징적인 예다. 슈타이글러는 여러 해 동안 베를린 SW 48 구, 프리드리히 거리 238번지에 있는 한 민중 영화사의 사장으로 일했다. 이 회사가 상업적 관점에서 운영한 영화 사업 가운데에는 러시아 영화 몇 편의 배급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돌격대와 경찰이 이 영화사의 사무실을 점거하고 전 직원에게 체포를 선언하기에 충분했다. 베를린의 마이캐퍼 병영[90]으로 끌려간 뒤 슈타이글러 박사는 자기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끔찍한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

6.13 “제3제국”의 학교

“너희 학교에서는 소년과 소녀가 벌거벗고 시합을 벌이며, 그렇게 해서 전사와 아마존으로 길러진다고들 하더군.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배우기는 하는가? 그리고 서로 그런 모습을 보면 관능이 들끓지 않는가?”

“천만에, 이 사람아. 우리는 그들이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들볶는다네. 지치고 나면 생각도 못 하고 관능도 느끼지 못하지.” “그러면 그들이 배워야 할 학문과 기예는 어떻게 되는가, 오 나의 현명한 입법자여?”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말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네. 생각할 줄 아는 자는 나쁜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몸을 단련받고 온종일 혹사당하는 자는 쓸모 있는 국가 시민이 될 수 있으니까.”

(스파르타식 교육에 관한 고대 그리스의 대화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학교 정책에서 몇 가지 실험을 할 수 있게 했다. 적어도 큰 도시들에서는 학생이 종교 수업 없이 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었다. 공화국은 유산 계층의 교육 특권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 출신 대입 자격자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려는 몇 안 되는 조심스러운 시도를 했고, 그런 노동자 대입 자격자를 준비시키는 강좌 몇 개를 용인했다.

학교는 아래부터 위까지 다시 그리스도교 종교 훈련소가 되었다. 이를테면 노이쾰른의 카를 마르크스 실업 김나지움 같은 실험은, 새로운 수업 방법을 시험하고, 수업 단위를 크게 갈래 짓고(곧 참여자들의 주된 관심에 따라 여러 그룹, 이를테면 언어 그룹으로 나누고), 무엇보다 노동자 대입 자격자를 체계적으로 길러 내는 데 이바지했는데, 그런 실험들은 끝장나고 금지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자신의 책 『나의 투쟁』에서 학교 강령을 펼쳤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에 인용한 스파르타의 냉소가의 강령과 꽤나 닮았다. 히틀러가 쓴 대목의 뜻은, “제3제국”의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지식과 앎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지도자에 대한 복종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거칠게, 에두르지 않고 말하는 것을 프리크는 조금 위장해서 실행한다.

1933년 5월 9일 프리크는 각 주의 문화부 장관들 앞에서 강령 연설을 했다. 자신은 세계대전을 고향 피르마젠스에서 무사히 넘긴 프리크가 이제 대포밥이 되기 위한 영웅적 교육을 요구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아이들이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공부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리크는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북유럽의 같은 겨레인 게르만 민족들, 그리고 바다 건너 그들의 딸 나라들과 손잡고 세계를 아우르는 과제를 풀어야 하며, 그 과제가 북방 인종의 활력에 문화를 건설하는 활동의 넓은 마당을 열어 준다는 것을 상기할 까닭이 있다.”

여기서 “같은 겨레인” 민족들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다. 프리크 씨는 그들 모두를 “열등 인간”에 맞서 하나로 묶어 세계를 아우르는 “제3제국”을 세우려는 듯하다. 그 제국은 라틴계든 다른 무슨 “인종”이든 모든 “열등한” 민족에게, 반듯한 히틀러식 제국에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여 줄 것이다.

“순전히 신체적인 민첩함과 능력을 기르는 것과 더불어, 의지력과 결단력을 길러 내는 데 특별히 힘써야 한다. 그것은 성격이 뿌리내리는 책임감을 기르는 교육의 없어서는 안 될 전제 조건이다.”

학교는 교양 없는(“공부하지 않은”), 그러나 빈틈없이 조련된 저돌적인 “제3제국”의 병사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에 “제3제국”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가르치려면, 세계를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모습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니 역사는 민족사회주의식으로 날조되어야 한다. “새 역사 교과서”에는 되도록 적게 실어야 한다. “대폭적인 제한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작용해 온 역사 형성의 힘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역사 고찰의 핵심 부분은 우리 시대의 지난 20년이 이루어야 한다.” 이 일을 더 자세히 그리려고 프리크는, 특히 “루르 투쟁에서 시작해 민족사회주의 자유 사상의 돌파에 이르고, 포츠담의 날[91] 독일 민족 공동체가 회복되기까지의 민족의 각성”을 다루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런 종류의 역사 과목 말고도 특별히 장려되는 “인종학”과 “가계 연구의 기본 개념 입문”을 가르친다고 한다. 바이에른 문화부는 훈령을 냈는데,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바이에른주 모든 학급의 역사 수업에서는 1933/34 학년도 초에 — 다른 모든 교재 계획과 교과 과정과 상관없이 — 처음 4~6주 동안 1918년부터 1933년까지를 아우르는 교재 영역을 다루도록 정한다. 그러면 위에 든 과목의 교과 과정에 따른 나머지 분량은 그만큼 줄여 그해의 남은 달들에 나누어 배정한다. 이 과정을 마친 뒤 마지막 시간은 민족의 궐기에 관한 교사와 학생 한 명의 짧은 연설, 애국 가요 제창, 깃발 장식으로 감격스러운 마무리 의식으로 꾸며야 한다. 바이에른 학생들의 민족 감정을 되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이 ‘민족의 궐기’라는 주제가 단지 한 과목(역사, 향토학 등)으로만 여겨질 것이 아니라 수업 원리로서 집중적으로 가장 철저히 다루어지도록 특히 유의한다. 학기 말에 시험을 치르는 경우 이 교재 영역을 각별히 고려해야 한다.”

베를린의 국가 위원 마인스하우젠 박사는 베를린 학교 제도 개편에 관한 강연에서 이렇게 선포했다(《푈키셔 베오바흐터》 1933년 5월 6일 자).

“자유주의적 감상벽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한다 … 유대인 문제에서는 이 말이 통한다. 감상은 민족 반역이다.”

이에 따라 민족사회주의 문화부 장관들은 모든 교육 아카데미를 완전히 개편하고 “혐의가 있는” 교사를 모두 해고했다. 모든 세속 학교가 해산되었다. 종교 수업은 다시 의무가 되었고, 체벌의 부활이 갈색 학교 정책의 첫 업적이었다.

현대적 학교를 향한 모든 경향이 깡그리 지워졌다. 베를린 노이쾰른의 “개편된” 카를 마르크스 학교의 최상급생들은 모두 2년씩 낙제 처리되었다. 대학 공부를 허락받기 전에 먼저 진짜 나치 정신으로 조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 교수만이 아니라 유대인 학생들도 대학에서 쫓겨났다. 고등 교육 기관에는 새로 들어오는 학생 가운데 “비아리아” 인종이 1.5퍼센트까지만 입학이 허가된다(1933년 5월 8일 프로이센 정부 훈령).

모든 교사가 민족사회주의 교사 동맹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것이 국가가 교원으로 고용하는 전제 조건이다.

이제 새 독일이 몇 가지 법령과 명령으로 스스로 말하게 하자.

「독일 학교와 대학의 과밀과 외래화를 막는 법률」에서.

제1조. 의무 교육 학교를 뺀 모든 학교에서 학생과 대학생의 수는 철저한 교육이 보장되고 직업의 수요가 충족될 만큼으로 제한해야 한다.

제4조. 신입생을 받을 때에는 1933년 4월 7일의 「직업 공무원 제도 재건법」이 뜻하는 비아리아 혈통의 제국 독일인 수가 각 학교와 각 학부의 전체 재학생 가운데서 제국 독일인 인구 중 비아리아인의 비율을 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 비율은 제국 전역에 일률적으로 정한다. (1.5%)

제7조. 이 법률은 공포와 동시에 효력을 발생한다.

민족 단체 회원을 위한 법학 시험 완화.

프로이센 법무부 담당 제국 위원 케를은 4월 5일 자 훈령으로, 인정된 민족 단체의 회원으로서 일정 기간 애국 봉사에 종사한 법학 지원자와 시보는 그로 말미암아 수련 과정에 지장을 받은 것을 보상하기 위해 신청하면 법학 시험을 단축된 형식으로 치를 수 있도록 지시했다.

(《D. A. Z.》[92] 1933년 4월 12일 자)

6.14 화형대 학생들의 “정신”

1. 언어와 문학은 민족에 뿌리내린다 …

2. 오늘날 문학과 독일 민족성 사이에는 모순이 크게 벌어져 있다. 이 상태는 치욕이다.

3. 언어와 문학의 순수성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4. 우리의 가장 위험한 적은 유대인이다 …

5. 유대인은 유대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독일어로 쓴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독일어로 쓰되 비독일적으로 생각하는 독일인은 배신자다! …

6. 우리는 거짓을 뿌리 뽑고, 배신에 낙인을 찍으려 한다 …

7. 우리는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존중하려 하며, 민족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열에 요구한다.

  • 유대인의 저작은 히브리어로 출간한다. 독일어로 출간되면 번역서로 표시해야 한다… 독일 문자는 독일인만 쓸 수 있다. 비독일적 정신은 공공 도서관에서 뿌리 뽑는다 …

독일 학생회

(1933년 4월 13일 베를린 학생들이 베를린 대학에 내건 12개 테제 「비독일적 정신에 반대하여」에서.)

6.15 언론의 “획일화”

히틀러-후겐베르크 정부가 들어선 1933년 1월 30일 저녁, 새 제국 내무 장관 프리크는 베를린 언론 대표들을 회의에 불러 모았다. 그는 새 정부가 언론 자유를 폭넓게 지킨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정부와 다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독일 사나이의 약속”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독일 전역에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언론에 대한 금지의 물결이 일었다. 2월 중순에는 독일의 공산당 언론이 거의 모두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민주당 계열 신문에 대한 금지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제국의회 선거전 동안 돌격대 무리가 밤마다 라인란트의 중앙당 계열 신문 인쇄소 건물 앞에 몰려가 민족사회주의 장관들의 연설을 싣도록 강요했고, 경찰 당국의 비호 아래 가장 잔인한 사전 검열을 했다.

국회의사당 화재 직전의 마지막 며칠 동안 프리크의 “언론 자유”는 돌격대와 경찰의 장화에 거의 완전히 짓밟혔다. 노동자 신문들은 용감한 프롤레타리아 자위대의 경비 덕분에 겨우 인쇄소와 편집국이 부서지는 것을 면했다. 국회의사당에서 그 엄청난 도발극이 성공하고 갈색 포그롬이 날뛰기 시작하자, 마지막 남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신문들이 단번에 금지되었다.

언론 자유의 마지막 남은 조각마저 살해되었다.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좌익 시민 언론인들이 체포되거나, 돌격대 병영에서 가학적인 고문꾼들의 손에 내맡겨졌다. 계속 발행되던 시민 민주주의 언론과 중앙당 계열 신문들은 새 포그롬 정권에 맞추어 “획일화”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큰 민주주의 계열 출판사들, 울슈타인과 모세에서, 그리고 제국 각지의 자유주의 언론에서, 유대인이거나 평화주의자이거나 그 밖에 나치에게 미움받는 편집인들의 “자발적” 축출이 시작되었다. 이 언론도 “이 나날의 운명적인 사건들”을 축하했다. 그들은 민족의 “각성”에, 히틀러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노동자 구역에서 벌어진 학살 소식을 빼 버렸다. 그들은 편집국에서 몇 분 거리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끔찍한 만행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유대인 신문”들이 유대인 박해를 부인했다.

비인간적인 만행에 그처럼 고분고분 입을 다물지 않던 외국 언론은 곧바로 히틀러 정부와 충돌했다. 3월 7일 정부 공식 발표가 나왔다.

“독일 내부 사정에 관한 외국 언론의 악의적 보도를 고려하여, 여러 외국 특파원에 대한 엄중한 조치가 준비되고 있었다. 해당 특파원 가운데 일부는 출국함으로써 경찰의 손길을 피했다. 나머지 특파원들로 말하면, 앞으로 보도에서 모든 악의적 경향을 삼가고 모호한 표현을 피하겠다는 확약을 이제 그들에게서 받았다. 이를 고려해 해당 특파원들은 일단 추방을 면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2개월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

4월 5일 히틀러 정부는 외국 언론 협회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정부는 협회가 회장인 《시카고 데일리 뉴스》 특파원 마우러[93]를 물러나게 하지 않으면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다. 외국 언론 협회 총회는 찬성 60, 반대 7, 기권 3으로 마우러의 사임 제의를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그 뒤 몇 주 동안 외국 여론의 압력 아래 히틀러 정부는 외국 언론 대표들에게 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민족사회주의 언론 책임자 디트리히를 의장으로 하는 독일 언론 제국 연맹, 독일 신문 발행인 협회, 독일 잡지 발행인 제국 연맹(사단법인)이 강제로 “획일화”되었다. 발행인과 언론인의 모든 지역 조직이 “획일화”되었다. 독일 언론 제국 연맹은 새 지도부 아래, 앞으로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 편집인은 회원이 될 수 없다고 결의했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를 내는 루돌프 모세 출판사에는 편집진의 “게르만화”와 히틀러 정치에 대한 비굴한 굴종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4월 초 이 출판사는 사실상 몰수되어 새로 세운 유한회사에 넘어갔고, 그 경영은 민족사회주의 위원 오스트, 출판 이사 카를 페터, 민족사회주의자 경영 협의회 위원 한 명이 맡았다.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철저히 보증하는 새 편집진이 채용되었다. 당시 돌격대 지휘관 헬도르프 백작의 심복인 민족사회주의 위원 오스트는 몇 주 뒤 체포되었다. 그는 루돌프 모세 출판사를 공갈로 몰수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마르크를 제 주머니로 챙겼던 것이다. 나치 위원들이 석 달 동안 경영한 끝에 1933년 7월 중순 루돌프 모세 출판사는 지급을 정지했다. 부르주아 신문 출판사들의 숱한 “획일화”의 또 다른 예는 《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가 “자발적으로” 민족사회주의 당 기관지로 바뀐 일이다. 유럽 최대의 인쇄소를 갖춘 《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는 베를린 밖 독일 신문 가운데 발행 부수가 가장 많았다. 이 신문은 특히 라인란트-베스트팔렌의 인구 밀집 노동자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내용 면에서 반자본주의적·반파시즘적 대중 정서에 크게 양보했다. 히틀러 정부가 들어선 뒤 옛 편집인들은 물러나야 했다. 흔히 보는 “자발적 획일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갈색 권력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4월 20일 이 신문에는 숱한 생일 찬가 한가운데 화가 슈툼프의 히틀러 동판화가 실렸다. 돌격대 지휘관들은 이 그림을 히틀러 풍자화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신문을 압수하게 하고, 《도르트문더 게네랄안차이거》 건물을 돌격대를 시켜 폐쇄했다. 도르트문트 경찰청장은 민족사회주의 신문 《로테 에르데》의 편집장에게 회사 경영을 맡겼다.

부르주아 신문과 잡지에 대한 금지와 경고의 사슬을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다. “획일화” 출정은 독일 보도 업무 전체의 독재적 개편으로 이어졌고, 관영 볼프 전신국의 지도부가 바뀌었다. 독일에서 아직 발행되는 언론의 독자들은 외국에서 오는 모든 진실한 소식에서 완전히 차단된다.

독일에서 금지된 외국 신문은 230종이 넘는데, 나라별로는 다음과 같다. 미국 9, 아르헨티나 2, 벨기에 7, 캐나다 2, 덴마크 4, 단치히 3, 영국 5, 프랑스 31, 네덜란드 9, 라트비아 2, 리투아니아 1, 룩셈부르크 5, 오스트리아 37, 폴란드 24, 루마니아 1, 자르 지역 4, 스웨덴 1, 스위스 26, 소련 9, 에스파냐 2, 체코슬로바키아 66. 그러니까 이 금지에서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는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다.

독일은 문학 생산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히틀러 정권의 첫 몇 주 만에 이미 문학 생산이 줄어든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다음 보도다.

출판 생산에서 종이 소비 감소.

“1933년 4월 15일 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보도에 따르면, ‘민족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인쇄 용지 제조의 가동률이 많은 경우 25%까지 떨어졌다. 4월의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1933년 1사분기 출판 생산이 1931년 1사분기보다 30% 줄었다고 보도한다. 수출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독일 서적상은 가장 좋은 고객들을 빼앗기고, 지식과 문학의 분야를 통째로 잃었다.”

6.16 히틀러 독일에서 징계받은 학자와 예술가 명단

대학교수

베를린 대학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물리학, 노벨상 수상자)
  • 피셸 교수(미술사)
  • 욜로스 교수(동물학)
  • 프리츠 하버 교수(화학, 노벨상 수상자)
  • 발터 노르덴 교수(보험학)
  • 베른하르트 촌데크 교수(부인과학)
  • 리히터 교수(의학)
  • 프링스하임 교수(화학)
  • 모리츠 본 교수(국민경제학)
  • 헤르만 그로스만 교수(공학)
  • 에밀 레데러 교수(국민경제학)
  • 마네스 교수(보험학)
  • H. 프로인틀리히 교수(콜로이드 화학)
  • 뷔크 교수(물리학)
  • 폴라니 교수(물리 화학)
  • 페르디난트 블루멘탈 교수(암 연구)
  • 프란츠 블루멘탈 교수(피부과학)
  • 페터 로나 교수(화학과 생리학)
  • 비른바움 교수(정신 의학)
  • 오토 리프만 박사, 강사(심리학)
  • 미트보흐 교수(셈어 문헌학)
  • 율리우스 포코르니 교수(켈트 문헌학)
  • 이자이 슈어 교수(수학)
  • 콘라트 콘 박사, 강사(치의학)
  • 제임스 골트슈미트 교수(형법)
  • 카를 브란트 교수(농학)
  • 프리츠 바데 박사, 강사(사회학)
  • 발로그 박사, 강사(철학)
  • 쿠르트 헨첼 박사, 강사(언론법)
  • 발터 란데 박사, 강사(의학)
  • 볼프아이스너 교수(의학)
  • 뇔러 교수(수의학)

베를린 공과대학

  • 쿠라인 교수(공학)
  • 트라우베 교수(콜로이드 화학)
  • 슐레징거 교수(기계 공학)
  • 달링거 교수(전기학)
  • 슈베린 교수(탄성학)
  • 켈렌 박사, 사강사(수리학)
  • 레비 교수(국민경제학)
  • 그라보프스키, 강사(수학)
  • 레만 교수(광화학)
  • 하예스 교수(위생학)
  • 코른 교수(사진 전송)
  • 이겔 교수(철도 건설)
  • 놀데 교수(화학)
  • 프리츠 프랑크 교수(화학)

베를린 독일 정치 대학

  • 예크 교수
  • 드레브스 교수
  • 지몬스 교수

아헨 공과대학

  • 블루멘탈 교수(공학)
  • 마우트너 교수(철골 구조)
  • 호프 교수(고등 수학)
  • 레비 교수(유기 화학)
  • 푹스 교수(물리학)
  • 슈트라스, 사강사(문학)
  • 모이젤 교수(국민경제학)
  • 피크, 사강사(수학)

프랑크푸르트암마인

  • 헬러 교수(공법)
  • 플레스너 교수(동양어)
  • 호르크하이머 교수(사회학)
  • 조머펠트 교수(문헌학)
  • 뢰베 교수(국민경제학)
  • 만하임 교수(사회학)
  • 틸리히 교수(철학)
  • 발터 프랑켈 교수(야금학)
  • 진츠하이머 교수(노동법)
  • 프리츠 마이어 교수(화학)
  • 잘로몬 교수(사회학)
  • 에른스트 칸 교수(경제 언론학)
  • 카를 메니케(철학)
  • 루트비히 베르트하이머 교수(은행학)
  • M. 베르트하이머 교수(심리학)
  • 노이마르크 교수(국민경제학)
  • 슈트루프 교수(국제법)
  • 에른스트 콘 교수(사법)
  • 프리브람 교수(국민경제학)
  • 리하르트 코흐 교수(의학)
  • 글라처 교수(유대학)
  • 알트슐 교수(국민경제학)
  • 브라운 교수(위생학)
  • 바일 교수(동양어)

킬

  • 쉬킹 교수(국제법)
  • 콜레, 사강사
  • 칸토로비치 교수(형법)
  • 크로너 교수
  • 아돌프 프랑켈 교수(수학)
  • 리페 교수(독일 문헌학)
  • 에른스트 프랑켈 교수(법학)
  • 콜름, 사강사(국민경제학)
  • 나이서 교수(국민경제학)
  • 펠러 교수
  • 슈텐첼 교수(철학)
  • 오페트 교수(독일법)
  • 멜리타 게르하르트, 사강사
  • 스칼바이트 교수(국민경제학)
  • 회버 교수
  • 베데마이어 교수
  • 로젠베르크 교수
  • 슈라더 교수
  • 후설 교수(로마법)
  • 라우흐 교수(철학)
  • 회니거 교수(법학)
  • 클렘퍼러 교수(의학)
  • 뢰베 교수
  • 에밀 푹스 교수(신학)
  • 하르더 교수
  • 마라노 박사, 외국어 강사
  • 야코비 교수(철학)
  • 빌헬름 오퍼만 교수
  • 카이저 교수
  • 프리드리히 코파이 박사, 강사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 헨첼 교수(공법)
  • 라이데마이스터 교수(수학)
  • 파네트 교수(화학)
  • 슈나이더 교수(철학)

쾨니히스베르크 상과대학

  • 로고프스키 교수
  • 퀴릅스 교수
  • 헨슬러 교수
  • 파일러 교수

쾰른

  • 켈젠 교수(공법)
  • 콘포센 교수(수학)
  • 슈말렌바흐 교수(국민경제학)
  • 브라운펠스 교수(철학)
  • 립스 교수(사회학)
  • 슈니트만 교수(국민경제학, 체포됨)
  • 에슈 교수(교통학)
  • 바이어 교수(교육학)
  • 슈피처 교수(철학)
  • 호니히슈타인 교수(사회학)

예나

  • 에밀 클라인 교수(의학)
  • 페터스 교수(심리학)
  • 테오도어 마이어슈타이네크 교수(의학사)
  • 샥셀 교수(동물학)
  • 한스 슈팀멜 교수(철학)
  • 베르톨트 요제피 교수(국민경제학)
  • 마틸데 베르팅 교수(교육학)
  • 레오 브라우너, 사강사(식물학)

브레슬라우

  • 마르크 교수(법철학)
  • 콘 교수(법학)

본

  • 뢰벤슈타인 교수(정신 의학)
  • 한스 로젠베르크 교수(철학)
  • 칸토로비치 교수(치의학)

마르부르크

  • 뢰프케 교수(국가학)
  • 헤르만 야코프존 교수(인도게르만 문헌학, 해임된 뒤 자살)

괴팅겐

  • 제임스 프랑크 교수(실험 물리학, 노벨상 수상자)
  • 보른 교수(이론 물리학)
  • 호니히 교수(형법)
  • 에미 뇌터 교수(철학)
  • 쿠란트 교수(수학)
  • 베른슈타인 교수(통계학)
  • 브란디 교수(역사학)

그라이프스발트

  • 클링뮐러 교수(사법)
  • 브라운 교수(국민경제학, 해임된 뒤 체포됨)
  • 치글러 교수(고전 문헌학)

뮌스터

  • 프로이트 교수(법학)
  • 브루크 교수(국민경제학)
  • 하일브론 교수(식물학)

하이델베르크

  • 한스 폰 에카르트 교수(신문학)
  • 안쉬츠 교수(공법)
  • 라트브루흐 교수(형법)
  • 알프레트 베버 교수(사회학)

하노버

  • 테오도어 레싱 교수(철학)

드레스덴 공과대학

  • 홀리다크 교수(법학)

할레

  • D. 데엔 교수(신학)
  • 키칭거 교수(형법)
  • 오뱅 교수(법학)
  • 우티츠 교수(심리학)
  • 프랑클 교수(미술사)
  • 헤르츠 교수(사회학)
  • 키슈 교수(법제사)
  • 베어 박사, 사강사(수학)

함부르크

  • 에두아르트 하이만 교수(법학)
  • W. A. 베렌드존 교수(문학)
  • 파노프스키 교수(미술사)
  • 리하르트 잘로몬 교수
  • 빌리암 슈테른 교수
  • 에른스트 카시러 교수(철학)

튀빙겐

  • 헤글러 교수
  • G. 바이제 교수(미술사)

라이프치히

  • 비트코프스키 교수(문학사)
  • 에베르트 교수(신문학)
  • 괴츠 교수(역사학)
  • 헬만 교수(의학)
  • 아펠트 교수(공법)
  • 베커 박사, 강사(철학)

뒤셀도르프

  • 보덴 교수
  • 마이어 교수
  • 엘링거 교수
  • 노이슈타트 박사, 사강사

교육 아카데미 강사

  • 오토 하제 교수, 엘빙
  • 에밀 푹스 교수, 킬
  • 카를 티메 교수, 엘빙
  • 빌헬름 오퍼만 교수, 킬
  • 한스 하펜리히터 교수, 엘빙
  • 프리드리히 폰 코페트 박사, 강사, 킬
  • 에밀 고소 교수, 엘빙
  • Joh. 지펠 교수, 도르트문트
  • 헬레네 치게르트 교수, 엘빙
  • 한스 플루크 박사, 강사, 도르트문트
  • Joh. 크레치만, 강사, 엘빙
  • 콘라트 아멜른 교수, 도르트문트
  • 율리우스 프랑켄베르거 교수, 할레
  • 마르틴 슈미트 교수, 프랑크푸르트
  • 엘리자베트 블로흐만 교수, 할레
  • 마리아네 쿤체 교수, 프랑크푸르트
  • 프리츠 하셰크 박사, 할레
  • 게르다 지몬스 교수, 프랑크푸르트
  • 안나 다이넬 교수, 할레
  • 헤르만 제밀러 교수, 프랑크푸르트
  • 마르틴 랑 교수, 할레
  • 헤르베르트 크란츠 교수, 할레
  • 아돌프 라이히바인 교수, 할레
  • 한스 티어바흐, 강사, 프랑크푸르트
  • 카를 폰 홀란더 교수, 할레
  • 베르타 키저, 강사, 프랑크푸르트
  • 프리츠 카우프만 교수, 할레
  • 한스 로젠베르크 교수, 본
  • 한스 호프만 교수, 할레
  • 요하네스 리히터 교수, 라이프치히
  • 슈페만 교수, 프랑크푸르트

음악

  • 오토 클렘퍼러, 음악 총감독
  • 한스 아이슬러
  • 아르투어 슈나벨 교수
  • 브루노 발터, 음악 총감독
  • 프리츠 부슈, 음악 총감독
  • 다니엘 교수, 베를린 음악 대학
  • 프리츠 슈티드리
  • 레오니트 크로이처 교수, 베를린 음악 대학
  • 구스타프 브레허, 음악 총감독
  • 오스카어 프리트
  • 에마누엘 포이어만 교수, 베를린 음악 대학
  • 아르놀트 쇤베르크
  • 프란츠 슈레커
  • 회르트 교수, 베를린 음악 대학
  • 쿠르트 바일
  • 프리츠 크라이슬러
  • 휘네만 교수, 베를린 음악 대학
  • 카를 플레슈 교수
  • 브루노 아이스너

회화

  • 케테 콜비츠 교수(예술 아카데미에서 탈퇴하도록 압박받음)
  • 막스 리버만 교수,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명예 의장(사임함)
  • 오토 딕스 교수(미술 아카데미에서 해임됨)
  • 카를 호퍼 교수(미술 아카데미에서 ‘휴직 처분’됨)
  • 파울 클레 교수, 휴직 처분됨
  • 오스카어 몰 교수(‘휴직 처분’됨)
  • 게오르크 타페르트 교수, 베를린-쇠네베르크 국립 미술 학교
  • 쿠르트 라스 교수, 베를린-쇠네베르크 국립 미술 학교
  • 요제프 비네츠키 교수, 베를린-쇠네베르크 국립 미술 학교
  • 프리츠 비헤르트 교수, 프랑크푸르트 공예 학교 교장

박물관

  • 빌헬름 베촐트 추밀 고문관, 베를린 국립 박물관 총관장
  • 막스 J. 프리틀렌더 추밀 고문관, 베를린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 관장
  • 루트비히 유스티 추밀 고문관, 베를린 ‘국립 미술관’ 관장
  • 게오르크 슈바르첸스키 교수,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관’ 관장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박물관장들.

변호사

베를린에서만 1200명이 넘는 변호사가 유대인이거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이유로 더는 직업 활동을 허가받지 못했다.

시인과 작가

작품이 금지되었고, 대부분 독일을 떠난 이들: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에른스트 톨러, 슈테판 츠바이크, 아르놀트 츠바이크, 야코프 바서만, 리온 포이히트방거, 쿠르트 투홀스키, 에밀 루트비히, 알폰스 골트슈미트, 구스타프 레글러, 오토 카츠, 테오도어 볼프, 알프레트 케르, 베르트 브레히트, 카를 폰 오시에츠키(체포됨), 헬무트 폰 게를라흐, 오토 레만루스뷜트(체포됨), 프리드리히 볼프 박사, 안나 제거스(클라이스트상 수상자), 마르틴 부버 박사, 위르겐 쿠친스키 박사,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요제프 로트, 한스 마르흐비차, 알프레트 되블린, 베르너 헤게만, 브루노 폰 잘로몬, 에른스트 블로흐 박사, 발터 메링, 아르투어 홀리처, E. 굼벨 교수, 그로스만 교수, S. 크라카우어, 헤르만 벤델, K. A. 비트포겔(체포됨), 보토 라저슈타인, 에곤 에르빈 키시(추방됨), F. C. 바이스코프, 요하네스 R. 베허, 브루노 프라이, 파울 프리틀렌더, 하인츠 폴, 오토 헬러, 에리히 바이네르트, 루트비히 렌(체포됨), 헤르만 둥커 박사(체포됨), 베른하르트 켈러만, 레온하르트 프랑크, 프란츠 베르펠, 루트비히 풀다, 비키 바움, 아드리엔 토마스, 페르디난트 브루크너타거, 카를 슈테른하임, 게오르크 카이저, 카를 추크마이어, 게오르크 베른하르트, 하인리히 지몬(《프랑크푸르터 차이퉁》), 에리히 바론(옥중에서 사망), 발터 쇤슈테트,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시인, 작가, 언론인.

의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박사, 브레슬라우의 셸러 교수, 세균학(보호 구금에서 풀려난 뒤 자살). 펠릭스 뵌하임 박사(체포됨), 시 참사회원이자 작가인 호단 박사(체포됨), 프리츠 바이스 박사, 시 의사 슈밍케 박사, 프랑켈 박사, 엘리자베트 아셴하임 박사, 카를 밤베르크 박사, 게오르크 베냐민 박사, 베를린 중앙 보건청의 보린스키 박사, 시 의사 콘 박사(여), 베를린 중앙 보건청의 콘 박사, 구스타프 에마누엘 박사, 쿠르트 프리트만 박사, 알프레트 고트하이머 박사, 로자 홀데 박사, 브라운슈바이크 지역 의료 보험 조합 수석 의사 레비 박사(체포됨), 막스 레비 박사, 율리우스 레빈 박사, 루트 루블리너 박사, 에르빈 마르쿠센 박사, 베를린 중앙 보건청의 젤리히만 박사, 베를린-리히텐베르크의 한 병원 원장 요제프 스투에이나스 박사(리투아니아 태생, 추방됨), 함부르크 의료 보험 의사 협회 이사 볼게무트 박사(체포됨), 베를린의 아슈 박사(살해됨), 비테나우 병원의 디네만 박사, 불가르텐 요양소 수석 의사 괴츠 박사,

그리고 직업 활동을 더는 할 수 없게 된 1000명이 넘는 다른 유대인 의사들.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체포되었고 여럿이 살해되었다.

7 학대와 고문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은 몇 해째 독일의 산업 황제와 농업 황제들에게 부양받으면서, 제 역할에 걸맞게 역사에서 배웠다. 이 당은 새로운 것을 하나도 발명하지 않았다. 이 당은 지난날 몰락의 시대들을 공부했다. 몰락해 가는 세계에 마지막 봉사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당은 방화는 네로에게서, 유대인 비방과 박해는 중세에게서, 착취당하는 이들에 대한 피의 테러는 농민 학살자 루터와 사회주의자 살해자 무솔리니에게서 배웠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당은 오래전부터 공식 문서에서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을 예고해 왔다. 그 공식 명칭은 “긴 칼의 밤”이었다.[94] 이 밤은 국회의사당 화재의 저녁과 함께 닥쳐왔다. 그 밤은 오늘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이 너무 강하고, 자유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이 이미 너무 많은 수백만이기 때문이다.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바르톨로메오의 밤을 바르톨로메오의 해로 만들어야 했다. 강철 회초리의 해, 우리는 여기서 그 첫 석 달을 보고한다.

히틀러 정권의 친구들은 독일에는 평온과 질서가 지배한다는 정부의 성명을 즐겨 되풀이한다. 부인 성명은 외국을 안심시키려 하고, 축제와 열병식은 실제 일어나는 일들에서 주의를 돌리려 한다. 왜 많은 사람이 독일에서 일어나는 참된 일들을 보지 못하는가?

폭정에 짓눌린 독일을 아직도 찾아가고 싶어 하는 몇 안 되는 외국 관광객은 돌격대 병영에도, 강제수용소에도 안내받지 않는다. 밤마다 벌어지는 고문, “도주 중” 사살, 음험하게 조직된 살인 — 외국 방문객은 우연히나 그 목격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외국 기자는 — 그의 전화 통화 하나하나, 전보 하나하나가 가장 엄격한 검열을 받지 않는가! 그의 걸음 하나하나가 감시당하지 않는가! 날마다 추방 위협을 받지 않는가!

그러나 돌격대 지하실에서 고문당하는 이들의 비명이 너무 크고 끔찍하게 이웃 주민들의 귀를 파고들 때, 박해받는 이의 아내가 갑자기 구약성서 같은 분노로 거리에 대고 제 비탄을 외칠 때, 나치의 만행이 우연히 수백 명 앞에서 드러날 때, 이 독일에서는 곧바로 “그건 예외적인 경우다”라는 반론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대중 집회가 환호하며 승인한 괴링 장관의 공식 발언은 이렇다. “대패질을 하면 대팻밥이 나오는 법이다.”(1933년 3월 10일, 에센)

이 노골적인 장관의 말에 대해 우리는 말해야 한다. “대팻밥이 떨어지는” 일은 오래전부터 조직되어 있었다. 지금 나치가 실행하는 중세적 방법들은 몇 해 전부터 나치 지도부가 선전하고 다듬어 온 것이다.

나치 지도자들은 중세의 포그롬과 린치, 제멋대로 체포하던 국왕 봉인장(보호 구금), 화형대, 태형 대열 통과[95], 그리고 1도·2도·3도 고문을 들여왔다. 선전에 효과가 있는 한 중세적 방법들은 공공연히 쓰였다. 그러나 고문은 비밀로 남았다. 그들은 밤의 어둠 속에서만 고문을 감행했다. 오늘까지도 수백만 독일인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책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한다.

7.1 밤의 테러

올해 2월 27일부터 비밀 테러가 날뛰고 있다. 그들은 “결산”을 한다. 체계적으로 체포하고, 계산된 대로 괴롭힌다. 그리고 전혀 근거 없는 고문에 대해 혹시라도 망설임이 있을까 봐, 장관은 다시 한번 어디까지 가도 되는지 알려 주며 그 망설임을 덜어 준다.

“귀와 코가 잘린 공산주의자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내가 보지 않는 한, 흥분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거기까지는 가도 된다는 것이다! 희생자를 꼼꼼히 살펴보거나 밀고를 너무 꼼꼼히 확인할 의무도 없다. 경찰 총수에게서 이토록 분명한 지시를 받은 돌격대는 체포할 때 프랑스 추기경의 말을 따른다. 그 추기경은 비슷한 시대에(본보기가 된 바르톨로메오의 밤에)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모조리 죽여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그리스도인을 가려내실 것이다.”[96]

날마다 이 밤의 고문을 당한 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여 준다. 그들은 자기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한다. 학대당한 사람 특유의 떨림을 띤 채로. 그들은 몸만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영혼에도 고문자들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증오가 낙인처럼 새겨졌다.

우리는 여기서 조서와 보고를 공개한다. 우리의 대의가 요구하는 모든 주의와 철저함으로 검토한 것들이다.

7.2 고문실

우리 앞에는 돌격대의 매질 요율표를 공공연히 알려 주는 보고가 하나 있다. “사회민주당(SPD)의 단순 당원은 맨몸에 고무 곤봉 서른 대로 처벌한다. 공산당 당원은 일반적으로 마흔 대로 다스린다. 당사자가 정치적 또는 노동조합의 직책을 맡았던 경우에는 형을 가중해야 한다. 형벌은 포로의 태도에 따라 조정한다.”

베를린 니더쇠네바이데의 노동자 간부 베른슈타인은 돌격대 병영에서 판자 침상에 내던져져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몽둥이 쉰 대를 맞는다. 이어서 “게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다시 쉰 대를 맞는다.

그러니까 고문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조서들이 그것을 확인해 준다. 포로들이 걸어가는 고난의 길을 따라가 보자.

고문은 희생자가 집에서 “끌려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문을 연 사람에게 권총이 들이밀어진다. 가족들은 위협당하고, 가구는 부서지고, 서가는 짓밟히거나 길바닥으로 내던져진다. 작가들은 몇 달 작업의 열매인 원고를 눈앞에서 잃는다. 노동자들은 마지막 남은 품삯마저 압수당한다. 가족은 그 곁에 서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낯선 젊은이들에게 얼굴을 얻어맞는 것을, 아버지가 아무 저항도 못 하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리고 벌써 모두의 앞에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하는 걱정이 거대하게 버티고 선다. 아내는 체포하러 온 녀석들의 거친 얼굴을 본다. 아내는 무슨 일이 닥칠지 짐작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더 알고 싶어 한다. 남편을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것은 비웃는 대답뿐이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포로를 집 밖으로 밀어내 계단 아래로 몰아 거리에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태운다. (이런 행동이 자발적이었다는 모든 부인 성명에는, 우리가 받은 모든 보고에 이 자동차가 등장한다는 사실로 거듭 반박해야 한다. 몇 달 전부터 돌격대의 모든 중대는 최고 지도부의 명령으로 자동차 한 대씩을 쓸 수 있었다. 체포할 사람의 명단은 이미 나누어져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둘러야 했다.)

그들은 되도록 합법적인 척했으므로 이 모험이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시민들이 잠든 시간으로 그것을 옮겼다. 집에 사는 사람들이 깨면 그들은 재빨리 이 행동을 평범하게 진행되는 일로 위장하려 했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한 체포 때는 이미 계단에서 구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체포된 사람의 귀에 중대장의 외침이 들린다. “주의! 때리지 마라!” 매질이 멎고, 포로는 맞은편 집에서 사람들이 깨어난 것을 본다. 세상의 눈이 나타나자 돌격대는 “규율을 지켰다”.

자기들 지하실에서는 이제 이런 조심을 버려도 되었다. 포로가 돌격대 병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는 지도부가 몇 해 전부터 돌격대에 약속한 그대로 법의 보호를 완전히 잃은 자가 된다. 자기가 얼마나 권리 없는 몸이 되었는지 아직 다 깨닫기도 전에, 벌써 곤봉들이 그를 고문의 집 계단 위로 몰아 올린다. 투사에게 위험 앞에서 달아나야 하는 것은 언제나 치욕이다. 그러나 완전히 무방비로 원수들의 손에 떨어져, 이 고무 곤봉에서 저 고무 곤봉으로 내몰리면서, 조금이라도 막으려 들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 그것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고문의 집에서 보내는 1분 1분이 새로운 상처를 벌려 놓는다. 걸음마다, 제 희생자가 얼마나 속수무책인지 털끝만큼이라도 느끼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계단과 복도에서 포로와 마주치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때리거나 걷어찬다. 겁쟁이들이 살인자가 되었다. 그들은 기사도라는 것을 모른다. 날이면 날마다 그들은 1도 고문을 가하는 방들 앞에 서서 호송되어 오는 포로들을 기다린다. 포로들은 그들이 늘어선 줄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채찍이 휙휙 소리를 내고, 장화가 엉덩이를 걷어차고, 고무 곤봉이 머리통 위로 둔탁하게 철썩인다.

그러고 나서 중대장 또는 친위대 지휘관의 방문이 열리고, “심문”이 시작된다.

7.3 페메 법정 앞에서

탁자 뒤에 페메(비밀 처형) 판관이 앉아 있다. 돌격대 제복 깃에 단 별 셋이 그에게 모든 체포자에 대한 재판권을 주었다. 탁자 판에는 번쩍이는 단검과 총검이 꽂혀 있다. 좌우에서 촛불이 흔들릴 때도 많다. 포로는 탁자 앞으로 떠밀려 간다. 돌격대원들이 그에게 바싹 다가선다. 그는 그들이 곁에 있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그의 대답마다 주먹질로 장단을 맞춘다. 그가 결백을 호소하면 그들은 그의 등을 걷어찬다. 어떤 변론도 무의미해진다. 진실은 문제가 아니다. 이 법정은 소극일 뿐, 새로운 고문을 위한 핑계일 뿐이다.

갑자기 포로는 자기를 여기로 끌고 온 밀고가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된다. 그는 고발을 반박할 수 있다고 믿고 열띠게 사실관계를 늘어놓지만, 벌써 고무 곤봉이 그에게 날아든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들은 주소를 알아내려 한다. 새 희생자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서로 배신했다는 이야기를 곳곳에 퍼뜨릴 수 있다면 정치적 성과를 거두리라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치는 것은 신의다. 동지들은 아무것도 불지 않는다. 그러면 사디즘적 분노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매질이 시작된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돌격대의 곤봉 아래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독일 노동운동사의 영예로운 한 장이다. 모든 잔혹 행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동지들은 사형 집행인들에게 새 희생자를 넘겨주느니 차라리 쓰러지는 쪽을 택했다. 1933년의 페메 법정들은 혁명가들의 몸을 칠 수 있었고, 그들을 평생 불구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혁명가들의 용기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들은 한 사람을 고문할 수 있었고, 체계적인 잔혹함으로 그를 쓰러지게 할 수 있었고, 수십 명의 포로를 자살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기구로도 배신은 한 줌도 받아 내지 못했다. 이 굳건함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은 돌격대가 그다음에 취한 조치다. 돌격대는 2도 고문을 발명해야 했던 것이다.

7.4 매질 지하실

심문이 끝나면 포로들은 지하실로 끌려간다. 불행한 이들은 벌써 비틀거린다. 오로지 살인자들 사이에 완전히 혼자 있다는 것은 섬뜩한 체험이다. 이 고문의 집이 근대적 대도시 한가운데 서 있고, 수백만 명이 제국 정부의 위임으로 밤마다 저질러지는 만행에는 아랑곳없이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섬뜩하다. 프리드리히 대왕 군대의 헌병 형리가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 듯하다. 포로들은 지하실의 어스름 속에서 몇 주 전부터 마련해 둔 매질 침상을 본다. 둥근 천장의 곰팡내에서는 말라붙은 피와 공포의 땀 냄새가 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이 유령 같아진다. 바로 히틀러가 포츠담 수비대 교회에서 프리드리히의 무덤 곁에서 취임 연설을 하던 그날들이다.[97] 곳곳에서 교회 종이 울리고, 수십만 명이 거리에 서 있다. 열광이 끓어오르고, 사람들은 민족의 궐기를, 민족의 재생을 말한다. 포로는 그 상투어들을 조금 전까지 들었고, 이제 이 침상 앞에서 그 거짓말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몸소 겪는다.

포츠담의 국가 의식은 상징이 된다. 저기서는 장군들과 호엔촐레른가 후손들 앞에서 “지도자”가 지팡이 짚은 군주의 묘소에서 연설하고 — 여기서는 돌격대 근위병들이 지하 감옥의 방음된 어둠 속에서 무방비의 노동자들을 때리고 고문한다. 다만 상징적인 차이가 하나 있을 뿐이다. 이제 1933년에는 독일 철강 산업이 제 형리들에게 연장을 대 주었다는 것이다. 포로는 침상에 내던져지고, 강철 회초리가 그의 등을 두들긴다.

마지막 분노 속에서, 온몸이 타는 듯한 채로 포로는 몸을 일으킨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더러운 천에 처박고, 그는 그 누더기를 물어뜯는다. 상처에서 피가 옷 속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차라리 완화처럼 느껴지지만, 새로운 매질이 벌써 드러난 살을 찢어 놓는다.

형리들은 넷이서 때린다. 경련하는 몸 위에는 그 많은 매가 떨어질 자리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다 그들은 지친다. 얻어맞은 사람의 신음이 그들의 귀에는 음악처럼 들리는 듯하다. 그들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조롱한다. 그러고는 그를 옆 지하실로 몰아넣는데, 거기서 그는 마침내 더는 혼자가 아니다. 구석마다 고통을 함께 겪는 동지들이 웅크리고 있다. 짚과 감자 자루 위에서 중상자들이 뒹군다. 몇몇은 기력이 다해 울고 있다. 광기가 둥근 천장 아래를 떠돈다. 옆방에서 다음 희생자의 비명이 들려온다.

7.5 진짜 하등 인간들

졸개들은 그를 서둘러 다루지 않는다. 지친 그들은 한동안 정신적 고문으로 기운을 되찾는다. 그들은 가장 굴욕적인 짓을 궁리해 낸다. 새로 들어온 포로는 제 손으로 옷을 벗어야 한다.

타락한 교사들의 사디즘이 여기서 새로운 변주를 얻는다. 우리 앞에 한 가장이 나타난다. 노동자이자 실업자 무료 급식소를 꾸리던 사람이다. 그는—기억이 떠오르자 목소리가 머뭇거린다—돌격대 지하실에서 어떻게 몸을 숙이고 맨 엉덩이를 내밀어 정확히 겨냥한 매질을 받아야 했는지 이야기한다. 돌격대원들은 그를 한동안 그렇게 세워 두고 그 꼴을 즐기다가 내리친다.

옆방의 포로들은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칸막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포로는 강철 회초리의 첫 매에 몸을 일으키지만, 새로운 명령이 그를 다시 굴욕적인 자세로 꺾어 누른다. 몸을 일으킨 것은 “처벌감”이었고, 절차는 더 가혹해진다. 이제 그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매를 큰 소리로 함께 세어야 한다. 숫자는 고통의 비명 속에 흐려지고, 매는 날카롭고, 다섯 번째 매에 살갗이 터진다. 그사이 돌격대원들은 다시 기운이 났다.

이미 둘째 단계는 셋째 단계, 곧 정신적 고문과 하나가 되었다. 그 고문은 부대 지휘관들이 고안한다. 하급 돌격대원들에게는 그나마 곧은 길로 가려던 원시적 복수욕이 있었다면, 지휘관들은 그것을 사디즘이라는 도착으로 비틀어 놓았다. 많은 돌격대 지휘관들의 부자연스러운 성생활이 여기에 얼마나 큰 몫을 했는지는 훗날 밝혀질 것이다. 동성애자인 헬도르프 백작, 지금의 포츠담 경찰청장이 숱한 고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생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돌격대 지도부의 도착증에 걸려든 불행한 대상이었다고 결론짓기에 충분한 의혹이 생긴다.

그들은 이때도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했다. 베를린 쾨페니크에서 나온 한 문서는 쾨페니크의 돌격대 술집 「데무트」의 실태를 이렇게 전한다.

“이 매질에는 특히 술집 주인의 아들이 앞장섰다. 그 밖에 이 행동들을 늘 지휘한 쾨페니크의 돌격대 지휘관 헤르베르트 샤르지히도. 처음에는 여주인의 아들이 비명을 덮으려고 오토바이 엔진을 돌려 놓았다. 요즘은 희생자들의 얼굴을 천에 처박는다. 이웃 주민들은 여러 차례 경찰에 호소했다. 침실이 마당 쪽으로 난 주민들은 집 안 배치를 바꿔, 비명을 듣지 않으려고 이제는 길 쪽 방에서 잔다. 마당 쪽 창가에는 아무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무장한 돌격대원 하나가 늘 마당에 서 있다. 우리도 목숨이 위태롭다. 우리가 이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눈치채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7.6 사디스트들은 발명에 능하다

반쯤 정신을 잃도록 얻어맞은 포로가 침상에서 끌어 일으켜진다. 돌격대원들의 얼굴이 엄해지고, 중대장이 앞으로 나와, 제 앞에 휘청거리며 서 있는 피 흘리는 희생자에게 선언한다. “이제 너는 총살이다.”

공포에 다시 정신이 든 그를 벽 앞으로 데려가, 지하실 돌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 세운다. 깊은 정적이 흐르고, 등 뒤에서 형리들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권총 안전장치가 조용히 딸깍인다. 그러나 아직 총소리는 나지 않는다. 포로는 벽을 노려본다. 가족이 떠오르고, 동지들이 떠오른다. 모르는 것을 불어야 하나? 살길이 있을까? 상처 입은 등이 타는 듯하고, 옷이 찢긴 살갗 위를 쓸어 댄다. 고통은 그를 기절 속으로 끌어당기고, 등 뒤의 확실한 죽음은 그를 끔찍한 각성으로 잡아챈다. 그는 마비된 듯 서 있다. 그때 총소리가 난다. 그는 총알이 귓가를 스쳐 휙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거의 구원 같지만, 이내 그는 총알이 자기를 맞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형리들이 그를 맞히려 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그들이 명령한 대로 다리를 벌리고 서 있다. 이제 그는 그들이 다리 사이로 쏘았다는 것을 느낀다. 경련이 그를 아직 고통스럽게 꼿꼿이 세워 두고, 죽음의 한 발은 오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돌격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믿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젓지 말라. 이 비인간성을 의심하지 말라. 수백 건의 보고가 이 사실을 전해 왔다. 그 모두를 대신해 하나를 소개한다.

“나는 베를린 C구 위덴 거리 50번지, 돌격대 연대가 자리 잡은 곳의 이웃 주민이다. 3월 19일, 지난번 보고에서 쓴 제멋대로의 체포가 계속되었다. 밤 9시 무렵, 또 한 포로가 위층으로 끌려 올라간 직후, 주민들은 열려 있는 연대 사무실 창문에서 총소리 한 발을 들었다. 나는 굳이 살펴보러 갔고, 한 남자가, 보아하니 그 포로가, 몸을 구부린 채 창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다시 총소리가 났는데, 이번에도 포로를 맞히지 않았고, 분명 맞힐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제 쓰러지고, 돌격대원 몇이 웃으며 그 위로 몸을 숙이는 것이 보였다. 한 목소리가 명령조로 여러 번 외쳤다. ‘자, 일어나! 집에 가!’ 그러나 포로는 이 조롱하는 외침을 이미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놀라서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일 끝에 사람들이 미쳐 버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수백 명의 포로가 이것마저 견뎌 냈다. 그들은 고문실에서 끌려 나와 “대기실”의 동지들 곁으로 내던져졌다. 지쳐서 자루 위로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총살이 다음 날 아침에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고통 때문에 그들은 새 위협에 무감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깨어나면 그들은 기억해 냈다. 누구에게도 그 위협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신음하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 마지막 아침을 기다렸다. 민족 혁명은 그들에게 “도끼날 앞의 밤”을 마련해 주었다. 1분 1분이 영원이 되면서도, 너무 빨리 끝을 향해 몰아갔다.

새벽녘 지하 감옥으로 스며든 희미한 빛이 마지막 시간을 알렸다. 감시병은 밤새 말없이 문설주에 기대어 있다가, 비꼬듯 노래 한 곡을 불렀다. “아침놀아, 아침놀아, 너는 내 이른 죽음을 비추는구나.” (베를린 헤데만 거리에서 온 보고가 이 세부를 전한다.) 이제 벌써 둥근 천장 위로 발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밤을 더 늘인다.

조서들에서 우리는 거듭 읽는다. 포로들이 이런 위협을 받은 뒤 며칠씩 더없이 소름 끼치는 불확실 속에 내버려진다는 것을. 그들은 옆방에서 매질이 새로 시작되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 방의 문도 다시 열어젖혀져, 그들은 고문을 지켜본다. 이따금 그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내 다시 “심문”한다.

7.7 오물에서 얻는 쾌락

공포 때문에 모두가 거의 무감각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늘 새로운 종류의 고문을 본다. 이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지만, 새로운 비명이 번번이 그들의 고개를 돌려놓는다. 방금 지식인처럼 보이는 새 포로가 침상 지하실로 끌려왔다. 그들이 보니, 그의 머리를 붙잡고 이를 억지로 벌리고, 한 돌격대원이 병을 들어 헐떡이는 목구멍에 피마자기름을 붓는다. 남자는 역겨워 구역질하고, 돌격대는 웃는다. 그들의 태도가 점잖아지는 듯하다. 그들은 포로에게 바지를 내리라고 한다. “부탁드린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눈으로 포로는 옷 단추를 풀고 허리띠를 끄르고, 바지가 흘러내린다. 이번에는 그를 침상에 내던지지 않는다. 15분 동안 맨 엉덩이를 드러낸 채 허리를 굽히고 서 있게 한다. 옆방의 포로들은 이 모든 굴욕을 새삼스레 함께 겪는다. 돌격대는 한마디씩 지껄인다. 알 수 없게도 그들은 기다린다. 그러나 마침내 강철 회초리를 집어 든다. 지식인의 마른 몸 위로 매가 쏟아진다.

그는 거듭 몸을 일으키고, 비명을 지르고, 짓눌리고, 그러다 갑자기 울부짖으며 배를 움켜쥔다. 돌격대는 계속 때린다. 엉덩이가 붉어지고, 이윽고 백 번이나 고문당한 이 사람의 창자가 매질 속에 비워진다.

나치 지도부는 이 역겨운 일들을 부인할 것이다. 우리 기록 보관소가 그것이 거짓임을 밝혀 줄 것이다. 이 보관소는 이런 고문을 견뎌야 했던 작가와 노동자들의 조서만 내놓는 것이 아니다. 베를린 돌격대원들의 비밀 회합에 관한 보고도 내놓는다. 그 자리에서 지금의 인민 계몽 장관 괴벨스 박사는, 자기가 내무장관이 된다면 곧바로 자기 의견에 따르지 않는 편집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계몽”해 주었다.

“그러면 친위대가 해당 신문사 사무실로 가서 편집자들에게 피마자기름을 1리터씩 먹여야 할 것이다.”

보다시피 돌격대는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희생자들의 어떤 곤경에도, 정말이지 어떤 곤경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7.8 돌격대 지하실의 “적십자”

포로들은 매질의 고통을 겪은 뒤 지하실 바닥에 누워 있다. 아무 도움도, 아무 완화도, 아무 위로도 없다. 중상자들의 신음과 무너진 이들의 울음이 그들의 잠을 앗아 간다. 나치 의사들은 원칙적으로 고문할 때만 나타난다. 그들은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포로가 아직 매질을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야말로 마지막으로 종교재판의 고문실에서나 알려진 그 진짜 고문 의사들이다. 죽을 위험이 있으면 고문을 멈춘다.

모든 보고가 확인해 준다. 희생자가 죽을까 봐 염려될 때에야 약을 주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주사를 놓았다. 전문가가 “사망”이 임박했다고 보증할 때에야 병원으로 옮겼다.

나치 위생병들도 이런 지침에 따라 일했다. 붕대는 패혈증 따위는 아랑곳없이 감았다. 거즈와 반창고를 상처에 졸라매던 거친 손길이 이 “구호대”의 참된 마음가짐을 증명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중상자들을 변소로 끌고 간다. 이따금 누군가 한 명은 여기서 생명을 이렇게 다룬다는 데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백 건의 조서 가운데 한 번, 한 위생병이 이 기절에서 저 기절로 빠져드는 학대 피해자에게 제 술병에서 한 모금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를 읽는다. 한 번은 그런 일이 있다. 그러나 백 번은, 짐승 같은 자가 생명의 마지막 비참 앞에 무심하게 서 있다. 어디서나 씻을 물을 주지 않았고, 비웃는 핑계를 대며 그런 경우도 많았다.

7.9 술 취한 살인자들

포로들은 오물과 악취 속에 누워 있다. 가장 약한 이들은 누운 채로 오줌과 똥을 지린다. 고통이 그들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 역병 같은 공기는 점점 더 짙어진다. 저녁 무렵이면 멀리서 고문 졸개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자기들의 “혁명”을 축하하고 있다. 기부받은 맥주를 마시며 기운을 돋운다. 술판이 끝나면 그들은 한밤중에 취한 채 비참한 이들 사이로 와서 새로운 “심문”을 벌일 것이다.

아내가 용감하게 돌격대의 지옥까지 함께 따라온 한 포로는, 자기가 이미 죽을 듯이 앓아 바닥에 누워 있을 때 그에게 보낸 끄나풀 이야기를 전한다. 그 끄나풀은 그를 몰아붙여 자백을 받아 내야 했다. 포로는 그 공갈에 용감하게 버텼다. 돌격대 끄나풀은 힘든 임무를 수월하게 해치우려고 술을 마셨다.

“그는 내 위로 몸을 숙였는데,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 악당 놈아, 독일의 위대함이 너 때문에 꺾일 거라고 생각하냐, 이 썩은 찌꺼기 같은 놈아. 곧 너를 쏴 죽여 버릴 테다.’ 그는 권총을 뽑았다. 나는 말없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아니면 당신은 목숨이 아깝지 않고, 부인을 더 큰 고통에 빠뜨리고 싶은 겁니까?’ 그는 말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었다. ‘그래도 산다는 건 참 좋은 거요. 나는 슬라브인을 좋아하오, 사랑스럽고 좋은 민족이지. 나는 우크라이나에 가 본 적이 있소. 이제 그만 당신이 체카 간첩이라고 말하시오! 나는 불가리아 사람도 많이 알지. 당신은 대답만 하면 되오, 내게가 아니라, 당신에게 질문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다 끄나풀은 취기에 완전히 무너지고, 그의 말은 횡설수설이 된다. 그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더니, 중상을 입은 포로를 걷어차며 소리친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 전권 위원, 군사 위원이 당신에게 하는 말이오.” (불가리아 의사 앙겔루셰프의 조서에서. 이 조서는 1933년 5월 15일 파리에서 공증인에게 맡겨졌다.)

때로는 희생자가 술을 대기도 한다. 그사이 외국으로 피신한 한 동지가 헤데만 거리에서 전해 온 보고를 여기 옮긴다.

포로는 저녁에, 아직 돈을 지니고 있던 한 유대인 포로가 술을 기부해 제 처지를 덜어 보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유대인 포로는 실제로 술판에도 끼게 된다. 어쩌면 그는 벌써 가장 나쁜 일을 다행히 피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포로들은 이제 밤새도록 술꾼들의 소란을 듣는다. 이른 아침, 한 돌격대원이 당직자와 교대하려고 지하실로 들어온다. 그는 아직 취해서 비틀거리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야, 우리 진짜 퍼마셨다. 하도 취해서 결국 볼프존 놈을 쏴 버렸지. 그 비겁한 돼지 놈, 뒈져야 했다고.”

지금으로서는 이 살인이 정말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없다. 중상을 입은 포로들은 온갖 고통 속에서 새삼 깨닫는다. 술 취한 간수들에게서 어떤 폭행도, 어떤 고문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잔인한 학대에 냉소적인 조롱이 더해진다. 달라지는 것이라고는 중대장의 말투뿐이다!

7.10 정신의 고문

여기까지는 중상을 입은 이들에게도 마지막 위안 하나가 남아 있었다. 끌려 나온 것은 자기 혼자였고, 가족은 체포되던 몇 분 동안만 위협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확신도 서서히 사라진다. 이 돌격대 앞에서는 친척들도 안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포로들은 묻는다. 그저 가족 소식을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한다. 체포된 날부터 집에는 빵 한 조각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안다. 마지막 남은 품삯은 체포 때 돌격대 손에 넘어갔다. 그들의 눈앞에 절망한 어머니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복지 당국이 아내들에게 지원을 거부할까 봐 두려워한다. (수백 번 확인된 사실이다.) 그들은 감시병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더없이 비참한 처지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이 남자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너희 마누라들 말이냐, 너희 계집들은 우리가 잘 돌봐 주었다. 아홉 달 뒤면 집에 가서 튼튼한 히틀러 소년들을 보게 될 거다.” 히틀러의 “명예 근위대”는 여자들을 겁탈했다고 자랑한다. 이 보고는 베를린 게네랄파페 거리의 돌격대 병영에서 나왔다. 이 돌격대원이 진실을 말했는지, 아니면 그저 포로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려 했는지는 우리의 고찰에서는 전혀 상관없다.

7.11 그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른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고문 졸개들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꺾이지 않고 그들 앞에 섰다. 늘 새로운 고문 방법을 그토록 다채롭게 고안해 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갈색 부대는 포로들의 태도를 꺾으려고 백 가지 새로운 고통을 궁리해 내야 했다. 그들은 몸을 부술 수 있었고, 무방비의 사람들에게 굴욕을 강요할 수 있었고, 몇 주에 걸친 고문으로 신경을 갈가리 찢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새로운 사람이 그들 앞에 섰고, 그들에게 고문을 더욱 끌어올리도록 강요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기도문」을 외웠다는 것,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돼지”라고 불렀다는 것을 그들이 승리라고 떠벌린다면,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 둔다. 전깃줄로 때려서야 희생자들에게 그렇게 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중상자들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게 하려면 강철 회초리와 가죽 혁대를 휘둘러야 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에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들으려면 불붙은 담배를 맨 발바닥에 갖다 대야 했다.

그러나 고문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라고 요구하자 노동자들은 말없이 그들 앞에 서 있다. (에센에서 온 한 보고가 이 영웅적인 일화를 전한다.) 노동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던 수백 번의 집회를 떠올린다. 자유의 노래, 온 세계를 아우르는 노래, 세계 최초 노동자 국가의 국가(國歌), 그들의 거룩한 노래를. 1933년 1월에도 그들은 수만 명에게 둘러싸여, 동지와 동지가 나란히 서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죽을지언정 이 형리들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고무 곤봉으로 때린다. 새로운 패거리가 잇달아 방으로 뛰어들어, 관자놀이와 입에서 벌써 피가 솟구치는 남자들을 한데 덤벼 때린다.

그들의 눈은 열에 들떠 있다. 그들은 아직 서로 손을 잡고 있지만, 아직 노래하지 않는다. 매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남자들은 비틀거리다가, 이제 한꺼번에 바닥에 쓰러진다. 고문자들은 비웃으며 그들에게서 손을 떼고 벽 쪽으로 물러선다.

그러나 정적은 1분뿐이다. 갑자기 포로들이 뒤엉킨 무더기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에 실려 나직이 노랫소리가 솟아오른다. 저들이 값싸고 잔인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는 바로 그때, 남자들이 노래한다. 바닥에 누워, 짓이겨지고 피 흘리면서도 꺾이지 않은 채, 그들은 이 땅의 어떤 폭력도 곤봉으로 때려눕힐 수 없는 것을 노래한다. “일어나라, 이 땅의 저주받은 자들아!” 돌격대원들은 한순간 굳어 서 있다가, 이내 달려들어 노래하는 무더기를 때린다. 그 무더기가 잠잠해지고 고통을 덜어 주는 기절이 모두를 덮칠 때까지. 그러나 노래는 방 안에 서 있다. 방을 가득 채우고, 고문실의 벽을 꿰뚫고, 강철 회초리의 휙휙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7.12 비방의 테러

민족사회주의자들은 고문을 쓸 권리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의심의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 낸 뒤에야 고문도 쓸 수 있었다. 중세는 마녀 신앙에서, 모든 학자에게서 악마를 부리는 자를 보고 모든 약제사에게서 밤에 지하의 정령을 불러내는 자를 보던 우매한 교회 신도들의 원시적 관념에서 이득을 보았다.

7.12.1 “11월의 범죄자들”

민족사회주의 지도부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몇 해 전부터, 전쟁의 결말이 몇몇 범죄자, 곧 “11월의 범죄자들”의 짓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이 거짓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했고, 그리하여 환멸에 빠진 수백만 사람들 사이에 독일의 파멸이 실제로 1918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는 확신이 생겨났다.

괴링 장관은 오늘까지도, 자기 생애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은 황제의 장교들이 견장을 뜯기던 1918년 11월이었다고 강조한다. 히틀러 제국 총리는 평생 단 한 번 울었는데, 그도 견장 때문에 울었다. 그는 1918년의 수병들이 장교들을 공격한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제국 총리는 오늘까지도 바로 그 장교들 밑에서 일등병이었던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래서 모든 선전은 늘 이 하나의 기조뿐이다. 11월의 범죄자들 탓이다. 히틀러는 자기 선전이 정치를 모르는 대중이 쉽게 믿는 성질을 노린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대중의 수용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이해력은 작지만, 그 대신 잘 잊는 성질은 크다고 본다. 히틀러가 세계대전 때의 협상국에 바친 말을 이 선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히틀러의 선전 또한 “처음에는 그 주장의 뻔뻔함 때문에 미친 것처럼 보였고, 나중에는 불쾌해졌으며, 마침내는 믿어졌다”(『나의 투쟁』, 203쪽). 그 결과는 이 책의 사진 부분에서 볼 수 있다. 돌격대는 손수레를 끌고 11월의 범죄자들의 집 앞으로 가서, 서둘러 불러 모은 조롱하는 무리가 늘어선 줄 사이로 그 남자들을 끌고 간다.

죽은 이들의 안식마저 돌격대의 복수욕을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수병 반란자 라이히피치와 쾨베스의 무덤을 파괴하고,[98] 그들이 잠든 곳의 비석을 부순다. 11월의 범죄자들은 무덤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7.12.2 소비에트 러시아

비방은 죽음의 경계에서도, 독일의 국경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히틀러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그 정치가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러시아의 앞잡이들이 피 묻은 비열한 범죄자들이며, 여기서 다루는 것이 인류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

(『나의 투쟁』, 750쪽)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마자 벌써 소비에트 시민들에 대한 첫 습격이 벌어진다.

베를린 그라이프스발트 거리 12번지의 소비에트 시민 샤야크는 자기 작업장에서 얻어맞는다. 그가 항의하자 돌격대 병영으로 끌려간다. 거기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길바닥에 내던져진다.

돌격대가 함부르크의 소련 통상 대표부에 쳐들어가 약탈하고 때려 부순다.

아르코 백작, 카르도르프, 그 밖에 시민계급의 여러 지도적 인사가 회원이던 「새로운 러시아의 친구 협회」는 해산된다. 그 서기 에리히 바론은 감옥에 던져져 자살로 내몰린다.[99]

3월 10일부터 독일의 모든 방송국이 라디오극 「호르스트 베셀」을 내보내는데, 이 극에서 소련에 관한 히틀러의 거짓말이 되풀이된다. 러시아에서 1917년 이래 20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는 거짓, 사기, 절도, 약탈, 강도의 대변자라는 것이다. 국제 석유 자본이 저 끔찍한 간섭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그 희생은 고스란히 간섭군 장군들의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마침내 쟁취한 자유를 지키려는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없다. 점령한 마을과 도시에서 백군 지휘관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없다. 그러나 이 비방은 나치에게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사냥, 독일 노동자와 지식인 박해의 구실을 준다.

7.12.3 “숙적”

민족사회주의 지도부는 서쪽 이웃 나라를 비방하는 것으로도 자기들의 만행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 그들은 벌써 첫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제3제국에서는 평화가 한창인 때에 프랑스인들이 습격당한다. 히틀러에게 프랑스는 여전히 숙적이다. 독일의 몰락을 바랄 수밖에 없는 “잡종화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에 대한 증오가 길러지고, 청년들은 복수 사상을 먹고 자란다.

그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한 프랑스 노동자의 아내가 쓴 편지다. 이 노동자는 뒤셀도르프에서 일자리를 얻었다가 3월 말 돌격대에게 습격당했다. 아내는 도움을 구하며 자기 나라 영사에게 호소했다.

“저, 졸링겐발트 하우프트 거리 265a번지의 프리츠 블랑크 부인은 매우 심각한 일로 귀하께 호소드리고자 합니다. 제 남편이 3월 31일 금요일 오후 2시, 우리 집 정원에서 NSDAP 돌격대원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남편은 돌격대 병영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남편은 아무 죄도 지은 것이 없는데, 짐승처럼, 금수처럼, 사람으로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학대당했습니다. 얼굴에 쓴 안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부서졌습니다. 여섯 명이 남편을 바닥에 짓눌렀습니다. 한 사람은 아랫배에 아주 위험한 발길질을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덤벼 봐라, 이 프랑스 개새끼야!’ 하며 남편 가슴에 권총을 들이댔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뒤에서 딱딱한 물건으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비웃는 말을 하며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남편을 커다란 피 웅덩이 속에 한참 동안 내버려 두었고, 남편은 피를 흘리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졸링겐에서 나치 의사를 불러왔고, 그 의사가 남편을 병원으로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병원에 들여보낼 때 그 녀석들은 남편을 길에서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옷은 도살장에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그 옷은 누구든 볼 수 있게 우리 집에 두었습니다. 남편의 모습이 어떤지는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서는 첫날 밤 남편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저는 저녁에 전화를 받고 그리로 불려 갔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이가 둘 있는데, 하나는 여섯 살, 하나는 생후 7주입니다. 이런 충격으로 저는 젖이 말라 버렸습니다…”

오늘은 뒤셀도르프의 프랑스 노동자, 베를린의 소비에트 시민, 체코의 작가[100]가 돌격대의 매질 아래 쓰러진다. 그렇다면 내일은?

7.12.4 잔학 동화

비방의 테러는 “지도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수천 명의 선동가가 몇 해 전부터 잔학 동화를 지어내는 일에서 히틀러를 능가하려고 애써 왔다. 씨앗은 두 손 가득 뿌려졌다. 이 봄날에 와서야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거짓말이 쏟아부어졌는지 알게 된다. 아무리 어리석은 이야기라도 곤궁한 시대에는 믿는 사람을 찾지 못하는 법이 없다. 한 조서는 이렇게 전한다.

“한 의사가 돌격대 병영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중상을 입은 채 짚 자리에 누워 있다. 방에 들어온 한 돌격대원이 그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하지만, 다른 대원이 의사의 상태가 어떤지 그에게 일러 준다. 이 설명에 그 돌격대원은 극도로 흥분한다. 그는 소리치기 시작하고, 그가 자기 대관구 지도자에게서 다음과 같은 괴담을 들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유대인 의사들은 모두 몇 해 전부터 병원에 실려 오는 독일 소녀 하나하나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는데, ‘유대 족속’만 불어나 독일을 지배하게 하려고 몰래 난소를 잘라 낸다는 것이다. 그 돌격대원은 부상당한 포로의 배를 걷어찬다.”

이 돌격대원 역시 히틀러에게서 곧바로 배운 것이다.

“그(유대인) 자신이 계획적으로 여자와 소녀들을 타락시키듯,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더 큰 규모로 혈통의 장벽을 허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나의 투쟁』, 237쪽)

7.13 농촌의 테러

히틀러는 모든 지방 도시를 에워싼 편협함에서 특히 큰 덕을 보았다. 신분 의식의 편견과 소시민의 반동적 도덕관념은 바로 독일의 지방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편협함과 함께 속물들의 법칙이 지닌 가차 없음도, 곧 모든 아웃사이더를 박해하고 모든 진보를 의심하고 헐뜯으려는 의지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는 지방에서도 많은 표가 흘러들었다. 히틀러가 출발한 단골 술자리는 테러의 나날에도 마을과 소읍의 시골 참모들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로 남았다. 지휘권은 대개 지주나 옛 장교들에게 있다. 소농들에게는 혹독한 농업 위기가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결과라고 설명된다.

반유대주의는 궁핍에 빠진 영세 상인들의 분노를 우선 다른 데로 돌리는 데 쓰였다. 유대인 소매상은 파산으로 내몰렸다. 유대인 가축상은 가난한 농민에게 그의 비참을 낳은 주범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었다. 많은 이들이 “민족 봉기”의 나날에 학대당하고 맞아 죽었다.

사람들은 갈취로 넘어갔다. 밀고라는 독기가 농가와 집들의 지붕 위를 휩쓸었다. (오버헤센에서는) 사회민주당원 면장들이 린치를 당했다. 공산주의자에게 저지르는 온갖 짐승 같은 짓이 용인된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로 마을마다 갈색 기동 타격대의 자동차가 정기적으로 나타나, 그 고장 거점 지도자의 행동을 거든다. 고발은 가택 수색으로 이어지고, 혐의는 체포로 이어진다. 밀고자들은 앞잡이가 된다. 국도에서는 돌격대가 자동차를 세운다. 히틀러 사진을 바가지 값에 팔고, 산 사람은 그것을 곧바로 차창에 붙여야 한다. 돌격대는 모금 명부를 들고 이 농가에서 저 농가로 돌아다니는데, 그 권위를 감히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을 내기를 거절하면 틀림없이 제재가 뒤따르므로, 이 갈취를 물리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7.14 나치 지도자들의 피의 죄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자기네 특수 부대의 중세적 수법뿐 아니라 추종자들의 살기에도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는, 권력 장악 전후에 지도자들이 한 말이 드러내 준다.

지금의 제국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간부 몇만 명쯤 다친다고 해서 큰일 날 것은 없다.”

제국의회 부의장을 지낸 슈퇴어는 한 대중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마 산업에 돈벌이를 안겨 줄 것이다.”[101]

린치와 교수형을 즐기는 같은 취향을 올덴부르크 주 총리 뢰버는 취임 직후 드러냈다.[102]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중앙당 패거리를 교수대에 매달아 까마귀 밥으로 줄 것이다.”

대관구 지도자 텔쇼는 1929년 10월 22일 엘베 강변 노이하우스의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해 싸울 것이다. 싸움에는 시체가 생긴다. 유대인 잡것들을 상대할 때라면 우리는 무덤도 넘어간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

1933년 3월 10일, 제국 장관 괴링이 에센의 전시장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 연설한다. 고삐 풀린 돌격대의 만행에 온 나라가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괴링 장관은 집회 청중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차라리 몇 번쯤 너무 짧게, 너무 멀리 쏘더라도, 나는 적어도 쏘기는 한다.”

7.15 살인 문서

괴링의 말은 비옥한 땅에 떨어졌다. 4월 말 도르트문트 경찰청장 셰프만[103]이 명령 하나를 내렸는데, 그것은 그 나름으로 근대사의 모든 경찰 명령을 능가한다.

“최근 다시 여러 차례 공산주의 전단이 배포되었다. 나는 내 휘하의 경찰에게, 공산주의 전단을 배포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즉시 총기를 사용할 것을 명령한다.”

7.16 테러는 조직된 것이었다!

1. 국회의사당 화재가 난 밤, 베를린에서만 잔혹 행위를 위해 돌격대 막사 30곳이 준비되어 있었다. 강철 회초리, 채찍, 쇠사슬, 결박용 밧줄, 물통, 피마자기름을 사 두었다. 그것들은 바로 그날 밤부터 쓰였다. 모든 막사에 의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2. 독일의 많은 도시에서 들어온 보고들이, 그날 저녁 돌격대가 비상 경계 태세를 강화한 채 노동자 지도자들의 집과 기차역과 우체국을 감시하고 있었음을 증언한다.

3. 희생자를 고르는 방식은 독일의 모든 도시에서 똑같았다.

4. 체포는 주로 돌격대와 그 특수 부대에 맡겨졌다. 경찰은 아직 믿을 수 없었으므로, 이 무렵에는 곁딸려 붙었을 뿐이다.

5. 2월 22일, 돌격대를 보조 경찰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더 큰 행동을 계획하면서 가능한 한 합법의 겉모양을 지키려 했다는 확실한 표시다.

6. 이미 2월 17일에 괴링은 프로이센 판무관 자격으로 발포 명령[104]을 내려, 모든 경찰관에게 온갖 테러와 재판 없는 사형 집행의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이 명령은 보안 경찰 안의 거리낌 없는 분자와 머뭇거리는 분자를 가려내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돌격대의 살인 행위에서 불법성을 모조리 걷어 냈다.

“이 의무를 수행하면서 총기를 사용하는 자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감싸 줄 것이다. 반면 그릇된 배려로 직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징계상의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 모든 공무원은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이 직무 수행 중의 실수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7. 헤데만 거리의 피의 지하실[105]과 다른 막사들에는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고위 간부들이 늘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학대를 지휘하고 심문을 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괴링과 날마다 연락했고 지금도 연락하는 돌격대 지휘관 헬도르프 백작이 학대당한 이들의 열병식을 사열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있다.

7.17 우리의 문서

우리 문서고에는 심하게 학대당한 사람들의 진술 조서 536건이 있다. 그 사실들은 검증을 거쳐 옳다고 확인되었다.

진단서 137건이 이 희생자들의 심한 만성 손상을 확인한다. 조서 375건은 학대당한 이들이 고문을 받은 뒤 서명해야 했던 각서에 관해 전한다. 고문당한 이들은 아직 고문의 집 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확인해야 했다.

제3제국의 도시와 마을에서 모은 우리 자료로 미루어 보면, 2월 28일 이후 약 6만 명이 학대당했다.

이제 희생자들 자신이 말하게 하자.

7.18 그들은 스스로 노동자의 벗이라 부른다…

공산주의자들 집에 구걸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집안일을 얻은 한 실업자가, 동지들의 연대에 배신으로 보답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는 꿋꿋이 버텼고, 그 대가로 다음과 같은 학대를 당했다. 그는 이렇게 쓴다.

“3월 6일 월요일 오후 5시, 돌격대원 둘과 돌격대 중대장 하나가 의원 X의 집 문 앞에 나타나 들여보내라고 요구했다. 나는 빨래를 정리하느라 그 집에 있었으므로 문을 열었지만, 우선 걸쇠가 걸린 데까지만 열었다. 곧바로 문틈으로 권총 한 자루가 들어왔고, 돌격대원은 문을 다 열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X 동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끌고 갔다.

그들은 사이드카에 나를 태워 뵈트허 거리로 데려갔다. 거기서 학대가 시작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에게는 그들이 거기서 나에게 저지른 모든 짓의 흔적이 눈에 보이게 남아 있다. 두 눈은 맞아서 시퍼렇게 멍들었고, 이마 왼쪽에는 4센티미터나 되는 덮인 열상이 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두 손은 아직도 부어 있고 긁혀 있다. 그들은 아무 까닭도 없이 나를 ‘살인 악당’ 따위로 불렀다. 그러고는 피를 씻어 내라고 했다. 피가 이마와 입과 코에서 흘러내렸다. 씻자마자 그들은 나를 다시 앞방으로 데려가 새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나는 방 안에 있던 걸상에 몸을 피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매를 피하려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턱이 부서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다른 두 명의 체포자와 함께 택시에 실려 헤데만 거리로 끌려갔다. 오토바이 두 대가 호송하며 따라왔다. 떠날 때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인도적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하부 지구대에서는 다른 식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헤데만 거리에서 나는 심문을 받으며, 구걸하러 다니다가 X의 집 문 앞에서 늘 무언가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주 찾아갔고, 정치 이야기도 나누러 갔으며, 결국 X 부인에게서 양탄자 털기 같은 집안일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돌격대원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렇게 점잖은 대우를 받아서 무척 기뻤다고 말했다. 나는 돌격대원들에게 내가 독일 공산당에 공감하며 3번 명부[106]에 투표했다고도 말했다. 그러자 심문하던 자가 말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우리도 늘 아량을 베푼다. 우리가 없애려는 건 너희가 아니라, 너희 지도자들이다. 그놈들과 결판을 내려는 거다.’”

7.19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수천 명의 노동자를 박해한다

여기 그에 대한 특히 뚜렷한 증거가 있다. 헤데만 거리로 끌려갔던 한 노동자가 말한다.

“3월 5일 저녁, 나는 다른 노동자 여섯 명과 함께 베를린 북부 Y 거리의 X 술집에서 제복 차림의 돌격대원 한 무리에게 습격당했다. 우리는 선거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거기 앉아 있었다. 돌격대원들은 우리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고, 손을 든 채 X 거리에 있는 자기네 돌격대 술집으로 가게 했다. 거기서 우리는 우선 ‘공산주의 돼지들’이라며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 그다음 우리는 자동차에 실려 헤데만 거리 6번지의 돌격대 본부로 옮겨졌다. 우리는 5층으로 내몰렸고, 쉴 새 없이 주먹과 승마 채찍으로 얻어맞으며 긴 복도를 따라 끌려갔다. 복도는 위에서 아래까지 ‘노획한’ 사회민주당 깃발과 현수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에는 적색 전선 투사 동맹 제복을 입은 인형 하나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는데, 에른스트 텔만을 나타낸 것이었다. 우리는 두들겨 맞으며 공동실로 몰려 들어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무릎 꿇고 주기도문을 외게 하고, 이어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즉시 따르지 않는 사람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 나중에 그들은 우리를 방 벽으로 끌고 가서 우리 머리 바로 위로 쉴 새 없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한동안 쉬게 내버려 둔 뒤 첫 ‘심문’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방으로 불려 갔는데, 거기에는 돌격대원 여섯 명쯤이 승마 채찍을 들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옷을 모두 벗어야 했고, 그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자백할 때까지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을 수도 없는 자백을 요구했다. 공산주의 간부들의 이름과 주소를, 무기와 등사기를 숨겨 두었다는 곳을 물었다. 이 심문 동안 그들은 쉬지 않고 우리를 때렸다. 그러고는 반 시간씩 생각할 말미를 주었고, 그것이 지나면 고문이 새로 시작되었다. 예전에 돌격대에 몸담았던 반파시스트 몇 사람은 앞머리 한 줌만 묶어 남기고 머리를 깎였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이튿날 아침 총살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왔을 때 그들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공동실에 누워 있었다. 공동실에는 우리 말고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노동자 50명쯤이 더 있었다. 풀려날 때 우리 앞에, 건강에 아무 손상 없이 그 집을 나섰다는 내용의 각서가 놓였다. 우리는 서명했다. 내 동료 두 사람은 나중에야 ‘프리드리히스하인’ 병원에서 다시 만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목에 총을 맞았다.”

이 뚜렷한 문서에 이어, 학대당한 노동자들의 보고를 몇 편 더 싣는다. 민족사회주의 운동이 어디서나 어떤 행동으로 자기네 공식 집권기를 시작했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다.

“상처로 뒤덮여”

“베를린 베르더 거리의 노동자 J. M.은 3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에 돌격대에 끌려가 루도 거리의 나치 막사에서 심하게 학대당했다. 그의 온몸은 벌어진 상처로 뒤덮여 있다.”

집이 부서진다

“정치 간부로 알려진 쇠네베르크의 노동자 R.은 이 습격이 있은 뒤 월요일에 자기 집에서 붙잡혀 강철 회초리로 심한 상처를 입은 뒤 돌격대 막사로 끌려갔다. 이 보고를 적는 순간까지도 그 노동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집은 습격 때 돌격대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났다.”

마구 쏘아 댄다

“브란덴부르크 주 W.에 사는 노동자 막스 F.는 밤중에 무장한 돌격대원 40명쯤에게 습격당했다. 현관문이 부서졌다. 돌격대원들은 곧바로 집 안으로 마구 총을 쏘아 댔다. F.는 엉덩이에 심한 총상을 입었는데도 창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달아나다가 팔과 가슴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를 또 입었다. 그는 빠져나가 한 병원에 몸을 맡겼다. 그 습격 이후 가족이 날마다 협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가 머무는 곳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우리 문서고에 있다.)

뼈가 부러졌다!

“말플라케 거리 23번지에 사는 36세 노동자 파울 파프로키는 3월 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는 밤 3시에 집에서 끌려 나왔다. 돌격대의 꽤 큰 부대가 체포된 그를 우트레히터 거리의 돌격대 술집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그는 간부들의 주소를 추궁당했다. 그가 주소를 대기를 거부하자 학대가 시작되었다. 몇 시간 뒤 그는 심한 타박상을 입은 채, 그리고 의사의 진찰에 따르면 아마도 종아리뼈 복합 골절까지 입은 채 풀려났다.”

주기도문을 외든지, 가죽 혁대로 머리를 맞든지

“그륀탈러 거리 63번지에 사는 18세 노동자 쿠르트 하켄부슈는 3월 26일 친구 셋과 함께 체포되어 프린첸 거리의 술집으로 끌려갔다. 무거운 가죽 혁대로 학대. 붙잡힌 이들은 모여 선 돌격대 앞에서 주기도문을 외기를 거부했다. 새로운 학대. 몇 시간 뒤 붙잡힌 이들은 응급 구호소로 옮겨졌고, 거기서 협박을 받으며 돌격대원들이 자기들을 습격에서 구해 주었다고 진술해야 했다. 하켄부슈는 얼굴과 등의 피멍 말고도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피멍

“카셀 케텐가세 4번지에 사는 20대 초반의 노동자 야코프 이클러는 1933년 3월 20일 그의 아버지 집을 수색하던 돌격대에 끌려가 뷔르거잘레 회관으로 옮겨졌고, 판자 침상에 눕혀진 채 고무 곤봉으로 학대당했다. 얼굴 아래쪽과 관자놀이를 맞았다. 등과 엉덩이와 넓적다리에 피멍. 의사의 진단서(문서고에 있음)가 이 소견을 확인한다.” (의사의 이름은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제3제국의 독일에서는 학대당한 사람에게 당연한 의료 도움을 베푸는 일조차 이제 위험하기 때문이다.)

7.20 목마른 자에게 오줌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자 전 제국 장관인 빌헬름 졸만[107]은 친위대와 돌격대에게 당한 학대를 이렇게 쓴다.

“3월 9일 목요일 오후 3시가 지나서, 쾰른라트에 있는 우리 집 앞에 친위대와 돌격대원을 가득 태운 자동차 석 대가 들이닥쳤다. 나는 마침 한 시의원과 통화하던 중이었으므로 수화기에 대고 ‘친위대가 우리 집에 쳐들어온다, 기동 경찰대를 불러 달라’고 외칠 수 있었다. 그 순간 여러 사람이 언제든 쏠 수 있게 겨눈 권총과 손도끼와 높이 쳐든 칼을 들고 내 서재로 몰려 들어왔다. 내가 한마디도 하기 전에 나는 책상 앞에서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증오와, 나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일종의 광란 상태에 있었다. 대부분은 집 안의 다른 방들로 흩어져 말 그대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산산조각 냈다… 나는 주먹질을 당하며 지붕 없는 자동차에 내던져졌다. 아내가 ‘남편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하고 소리쳤다. 한 놈이 히죽거리며 ‘곧 알게 될 거요’ 하고 대답했다. 그들은 나를 먼저 황야를 가로질러 숲 쪽으로 몰고 갔다. 내 앞에 앉은 돌격대원이 줄곧 권총을 내 눈앞에서 휘둘러 댔으므로, 나는 그들이 근처 숲에서 나를 해치우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더러는 그야말로 미친 듯한 욕설을 끊임없이 퍼부으며 나를 브뤼크를 거쳐 칼크로 데려갔다. 거기서는 천천히 차를 몰며 붐비는 큰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를 거듭 보여 주었다. ‘이게 그 위대한 졸만이다! 봐라, 얼마나 작은지!’ 그들은 나를 모차르트 거리에 있는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대관구 본부로 끌고 갔다. 나는 주먹질과 발길질과 매질을 당하며 계단 위 회의실로 내몰렸다. 블라인드를 내려 두어서 방은 어스름했다. 여기서 나는 재판정에 세워질 참이었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갈고리 십자 깃발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신문사 편집 동료 에퍼로트가 창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처럼 몰골이 엉망이었다. 내가 에퍼로트 옆에 앉자마자 두 시간 넘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돌격대 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내 동료 말로는 시의원 에벨레라는 자였는데, 이제 보복을 받게 될 에퍼로트를 규탄하는 짧은 연설을 했다. 그러고 나서 친위대원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30분쯤 에퍼로트와 나는 너무 지쳐서 더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듭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고, 그 사이사이 머리채를 잡아 뜯기고 서로 머리를 맞부딪히기도 했다. 마침내 그들은 우리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한 놈이 의자 등받이 뒤에서 우리 두 손을 붙잡고, 둘째 놈이 억지로 이를 벌리게 하고, 셋째 놈이 우리 목구멍에 피마자기름을 4분의 1리터씩 쏟아부었다. 고문꾼 하나가 우리 고통을 더하려고 소금을 가져오라고 소리쳤지만, 그렇게 빨리는 소금을 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잠깐 쉬게 해 주었다. 나는 물 한 잔을 청했다. 받고 보니 물 빛깔이 수상해서, 나는 그것을 피투성이가 된 손을 씻는 데만 썼다. 그러자 한 놈이 소리쳤다. ‘왜 그 물을 안 처마시냐?’ 그들은 우리에게 줄곧 반말을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남은 액체가 든 잔을 내 얼굴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주먹질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갑자기 고문꾼들 사이에 어떤 동요가 일었다. 나는 그사이 경찰이 습격과 우리가 끌려간 일을 알게 된 것이라고 짐작했다. 5시쯤 친위대가 우리를 붙잡아 ‘석탄 창고로!’ 하고 외치며 말 그대로 계단 아래로 내던졌다. 석탄 창고는 열려 있지 않은 듯했고, 그들은 서둘러 우리를 치워 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우리를 — 우리 얼굴은 그사이 온통 피 흘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 길 건너 자동차로 몰고 갔다. 거기서 우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야 했다. 운전사 옆에 앉은 사내가, 나중에 그가 내비친 말로 보아 옛 장교였음이 틀림없는데, 아래로 소리쳤다. ‘엉덩이를 걷어차!’ 그 말은 곧바로 실행되었다. 학대는 문 닫힌 자동차 안에서도 이어졌다. 나는 오른쪽 눈에 주먹을 맞았다. 우리는 경찰청 앞에 섰고, 이 호송을 지휘한 제국의회 의원 샬러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거의 쓰러질 지경인데도 복도와 계단을 뛰어서 달려가야 했다. 한 놈이 말하기를, 우리는 이튿날 나치의 대규모 횃불 행진 앞에서 행진해야 하고, 마지막에는 한데 던져 쌓은 횃불 위에서 불태워질 것이라고 했다… 경찰청장은 우리에게 보호 구금에 들어가라고 제안했다. 나는 내 의원 면책 특권을 내세웠다. 그는 내 견해에 동의했지만, 그래도 에퍼로트와 함께 교도소 병원에 들어가라고 부탁했다. 병원에서 우리는 붕대를 감고 상처를 꿰맸다. 고문하는 동안 친위대원 하나가 천천히, 잘 계산해서 내 벗 에퍼로트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었다. 의사는 그 찔린 상처가 1센티미터만 더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신문에는 우리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자들에게 습격당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7.21 그들은 한 의사와 그 아내를 고문한다

“3월 6일 새벽 4시,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여러 남자 목소리가 외쳤다. ‘경찰이다! 열어!’ 아내가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오세요. 밤에는 문을 열지 않아요!’ 문을 세게 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문이 부서졌고, 경찰 표지 없이 돌격대 제복을 입은 남자 다섯이 권총과 기관단총을 겨누며 집 안으로 쳐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하는 내 물음에 그들은 고무 곤봉과 주먹으로 몇 차례 때리는 것으로 답했다. ‘닥쳐, 누가 너한테 물었어?’ 그들은 ‘손 들어!’ 하고 명령했다. 몇 놈이 내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너희 유대 놈들은 이제 끝장이다, 볼셰비키 패거리야.’ 내가 무어라 대꾸하려 하자 그들은 또 나를 때렸다. 그들은 집을 뒤지고, 내 책상 서랍을 부수고, 가방 하나에 책과 문서와 편지를 채워 넣고는 ‘나와!’ 하고 명령했다. 나를 이 침입자들 손에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던 아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따라나섰다… 그들은 발길질로 나를 계단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아내가 병자에게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항의하자, 그들은 아내에게 욕을 퍼붓고 차 안 자리에서 밀어냈다. ‘이 뻔뻔한 암퇘지야, 조용히 해, 안 그러면 너도 맞는다.’ 자동차는 돌격대와 친위대 한 무리가 서 있는 집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고무 곤봉과 개 채찍으로 쫓기며 5층까지 내몰렸다. 나는 병(독감, 심근 쇠약) 때문에 몸을 쓰는 일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내가 꼭대기 층에 이를 때까지 분이 나서 나를 마구 때렸다. 나는 복도로 떠밀렸고, 나와 아내는 우리에게 매를 퍼붓는 돌격대원들의 두 줄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그다음 나는 따로 떨어진 방으로 끌려갔다. 나는 이것은 틀림없이 오해이며 해명할 기회를 달라고 청했다.”

7년 동안 베를린의 여러 병원에서 일했고 마지막에는 노이쾰른 시립 병원의 한 전문 진료과 과장 의사였던 이 포로는, 오랜 심문 끝에야 자기가 공산주의자들의 제국 선전 책임자였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결백을 호소하자 학대가 돌아왔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전한다.

“그들은 짐승 같은 분노로 고무 곤봉과 가죽 채찍과 강철 회초리를 들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머리를 때렸다. 탁자와 의자 위로 뛰어올라 위에서 사정없이 내리쳤다. 피가 내 얼굴을 뒤덮었고, 살려 달라는 내 외침은 곧 잦아들었다. 쇠막대로 몇 번 맞자 왼쪽 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고, 나는 비틀거리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학대당한 그는 이어서, 자기가 곧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빠졌고,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의료 도움까지 베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언제라도 몸이 갑자기 무너질 수 있음을 각오해야 했는데도, 그는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히 관찰할 정신력을 잃지 않았다. 그 가장 중요한 묘사 몇 가지를 발췌해 싣는다.

“방에는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고, 몇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들은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격대원들이 자주 들어와서는, 모든 수감자가 즉시 벌떡 일어나 ‘하일 히틀러’로 인사하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에 너무 굼뜨게 따른 사람들은 채찍을 맞으며 일어섰다 다시 앉기를 강요당했다. 이것이 점점 빠른 속도로 10번에서 15번까지 되풀이되었다. 돌격대원들이 와서 책상 서랍에서 권총과 탄약을 꺼내 갔다. 서랍마다 권총이 가득했고, 저마다 마음대로 하나씩 골라 갔다. 또 어떤 이들은 와서 오스트리아로 갈 의용병 등록 명부를 찾았다(!).[108] 며칠 전에 돌격대원 하나를 모욕했던 한 남자는 침대에서 끌려 나와 그날 밤 체포되었다. 공산주의자에서 나치로 넘어간 자에게 지조가 없다고 나무랐던 한 여자는 자기 집에서 체포되어 이리로 끌려왔다. 갑자기 누가 외쳤다. ‘피크와 울슈타인이 체포되어 이리로 끌려온다!’[109] 돌격대원들은 광란의 분노에 빠졌다. 그들은 고무 곤봉을 허공에 휘둘렀다. ‘오기만 해 봐라!’ 노동자 슐체가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돌격대원들은 모두 방을 나갔다. 15분 동안 그들이 복도에서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나서 서른 살쯤 된 작은 체구의 노동자 하나가 문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그의 오른쪽 눈은 피로 가득했다. 심문에서 그는 ‘독일 적색 구원회’ 회원임을 인정했다. 그들은 그가 돌격대원 하나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고 몰아붙였다. 그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그 혐의로 이미 미결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개 채찍으로 때렸고, 그에게 묻는 모든 질문에 ‘예!’ 하고 대답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예’ 하고 말할 때까지 그들은 그를 때렸다. ‘네가 살인범이냐, 이 악당아?’ ‘아니오.’ 노동자가 대답했다. ‘아니라고?’ 그들은 더 세게 때렸다. 얼굴은 이미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는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방금 네가 자백했잖아!’ 대답은 ‘그건 강요된 것이었소.’ 그들은 그를 또 때렸다. 그들은 그에게 자식을 몇이나 낳았는지, 몇 명의 여자와 잤는지 물었다. 자식들도 다 그처럼 백치냐고 물었다. 그다음 그는 머리를 짧게 깎이러 부엌으로 보내졌다. 그가 돌아오자 그들은 그를 리히터펠데에서 온 여든 살의 병약한 노신사, 한 목사와 마주 세웠다. 백발의 노신사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안녕하시오, 동지!’ 하고 인사해야 했다. 노인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당신 손을 잡겠소. 당신은 고통받는 사람이오.’ 모두 웃었다. ‘그래, 살인범에게 인사를 하는구먼!’ 노인이 대답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는 시달리는 사람이오. 그리고 당신들은 폭력의 화신인데, 폭력은 영원하지 않소. 내 신념을 고무 곤봉으로 몰아낼 수는 없소. 당신들은 민족주의자고 나는 국제주의자요.’ 노인의 이 용감한 태도에 고문꾼 몇은 기가 꺾였다. 그래도 몇 놈이 그에게 덤벼들자, 다른 놈들이 그들을 말렸다.”

그사이 의사의 아내가 어떤 고통을 견뎌야 했는지는 보고의 뒷부분에서 드러난다.

“자정이 지나 나는 여러 사람의 손에 붙들려 심문실로 끌려갔다. 거기서 나는 유령처럼 창백한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모국어로 나에게 속삭였다. ‘더는 못 견디겠어요. 창밖으로 뛰어내릴 거예요! 더는 못 하겠어요! 저들이 당신을 체카[110] 첩자로 몰아 총살하려고 해요!’ ‘제발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어요!’ 이 말이 오가자, 피곤해서(술에 취해서?)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던 심문하는 돌격대원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아내는 끌려 나갔다. 내 상태는 나빠졌고, 나는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중대 지휘관의 방으로 옮겨졌다. 아내가 요구해서, 아내가 나에게 마실 것을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것이 허락되었다.”

학대당한 그의 상태가 위중했는데도, 돌격대 부대는 자기들이 원하는 자백을 의사에게서 짜내려는 뜻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불가리아어를 하는 밀정 하나를 그에게 보내 입을 열게 하려 했다. 그 밀정은 막사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도 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의사는 이렇게 쓴다.

“그는 권총을 뽑아 들고 외쳤다. ‘총알 세 발, 하나는 이마에, 하나는 입에, 하나는 배에, 그러면 끝이고 거름 더미로 가는 거요.’ 나는 말없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어 들어 내 얼굴을 쳤다. ‘몇 분 뒤면 당신은 끝장이오. 여기 창턱에 너를 매달 테다. 나는 키예프에서 그렇게 목을 매달았어. 이제 몇 분만 남았다. 내가 이 방을 나가면 너무 늦는다. 말할 테냐 말 테냐! 이 비열한 악당아! 체카는 무엇을 하고, 게페우는 무슨 짓을 꾸미느냐?’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있었는데, 그가 온 힘을 다해 내 배를 걷어찼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우리는 이 학대당한 의사가 그 끔찍한 짓들의 증거로 가져온 증빙 자료의 사진을 본문에 싣는다.

7.22 의사를 함정으로 꾀어내다

자르브뤼켄의 《노동자 신문》 4월 14일 자에서 다음 보도를 옮긴다.

“3월 17일, (베를린) 의학회의 정기 모임 하나가 열렸다. 강연이 끝난 뒤, 대학 병원 원장이자 일흔 살인 제1회장 골트샤이더 교수[111]가 동료들에게 몇 분만 더 남아 달라고 청했다. 특히 흥미로운 증례를 하나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온몸에 붕대를 감은 환자 한 사람이 불려 들어왔고, 골트샤이더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 이 환자는 우리 동료 루스트 박사입니다. 그저께 저녁 그는 리히터펠데의 한 환자에게 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도착하자 돌격대가 그를 맞았고, 그를 이토록 끔찍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말에 모임은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독일 민족주의자 자우어브루흐 교수가 즉석에서 벌떡 일어나, 돌격대의 이 희생자를 자기 병원에 받겠다고 나섰다. 이 일을 계기로 베를린 의사들의 넓은 층에 공황이 번졌다. 환자에게 불려 갈 때 자기들에게도 비슷한 끔찍한 운명이 닥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7.23 쉰 살 여성이 채찍질당하다

(목격자 보고, 사진 기록.) 3월 20일 월요일에서 3월 21일 화요일로 넘어가는 밤, 사회민주당 시의원 마리 얀코프스키(베를린쾨페니크, 베르크만 거리 18번지)가 자기 집에서 습격을 당했다. 미트케 세탁소(쾨페니크, 카를 거리)의 자동차 한 대가 집 앞에 섰다. 돌격대원 스무 명이 뛰어내려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 복도와 계단을 차지했다. 여섯 명이 권총을 겨눈 채 집 안으로 쳐들어갔다. 얀코프스키 부인은 이미 차 안에 붙잡혀 있던 공산당 간부 두 사람과 함께 쾨페니크 돌격대의 단골 술집(엘리자베트 거리 29번지)으로 끌려갔다.

마당의 헛간에서 그녀는 알몸으로 옷을 벗도록 강요당했고, 검정·빨강·금색 깃발[112]을 덮은 나무 평상 위에 눕혀졌다. 네 사람이 그녀를 붙잡고, 한 사람은 그녀의 얼굴을 낡은 넝마 뭉치에 처박았다. 두 시간 동안 쉰 살의 여성이 곤봉과 강철 회초리와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고문이 끝나자 얀코프스키 부인은 길거리에 내던져졌다. 새벽 다섯 시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해 택시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의사들은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정했다. 콩팥 하나가 짓이겨져 있었다. 말 그대로 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카를스호르스트의 안토니우스 병원에서 얀코프스키 부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해 조서에 남겼다.

맞는 동안 그들은 노동자들의 주소와 이름을 대라고 거듭 명령했습니다. 나는 공화국의 색깔을 늘어놓아야 했고, 검정·빨강·금색 대신 검정·빨강·똥색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너 복지청에서 돈 받았지? 공산주의자들을 집에 들여 먹여 줬지? 실업자들 신발을 훔쳤지? 나치 상점 불매 명단을 준비했지? 내가 아니라고 할 때마다 한바탕 매질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면 고문하던 자들 가운데 다섯째가 내 얼굴을 넝마에 처박았습니다. 적어도 백 대는 맞은 뒤 나는 평상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지고는 얼굴을 어찌나 세게 맞았던지 구석으로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때 무릎을 다쳤습니다. 그다음에는 똑같이 고문을 당한 공산주의 노동자 두 사람과 함께 「독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독일」을 불러야 했습니다. 사회민주당에서 탈당하고,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으며, 목요일마다 나치 지휘소에 출두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러자 대우가 달라졌습니다. 물 한 잔을 받았습니다. 내 옷은 솔질을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돌격대 중대장이 돌격대원 한 사람에게 “숙녀분을 밖으로 모시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쓰러지려 하자 부축해 주었고, 내 뒤로 문을 닫으며 정중하게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경찰에 고발했지만, 경찰은 손쓸 힘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무엇이 이 젊은 녀석들을, 여기 사진과 조서로 남은 저 비인간적인 잔혹 행위로 몰아갔는가?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책임 있는 자리에서 곤궁을 덜어 주어 온 여성, 나이로 치면 그들의 어머니뻘인 여성을 고문했다. 이것이 사사로운 복수였다고 말하지 말라. 녀석들은 벌거벗은 여성을 때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주소를 캐물었다. 그들은 돌격대 지휘부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지휘부는 이 범죄를 감싸 주었을 뿐 아니라, 이 일이 외국에 알려지자 평생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릴 이 중태의 여성을 상대로 “잔혹 행위 소문 유포” 혐의의 소송까지 걸었다.

7.24 학대당한 신경과 의사가 나라 밖으로 쫓겨나다

3월 21일 화요일, 주로 프롤레타리아 계층 환자를 보아 온 신경과 의사 프렝켈 박사가 베를린의 자기 집에서 꽤 큰 돌격대 부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게네랄파페 거리의 나치 막사로 끌려가 목요일까지 붙잡혀 있었다. 이틀 동안 그는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강철 회초리와 개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프렝켈 박사가 풀려난 뒤 학대의 흔적과 채찍질로 생긴 눈의 부상이 틀림없이 확인되었다. 프렝켈 박사는 3월 23일 목요일에 풀려났는데, 자신과 아내를 위해 독일을 당장 그리고 영원히 떠나겠다는 각서에 서명한 뒤였다.

강요된 이 약속을 따라 지금 망명 중인 프렝켈 박사는 나치 막사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전한다.

“내가 있는 동안, 내가 갇힌 방에 젊은 노동자 열다섯 명가량이 끌려 들어왔다. 나는 이 젊은 노동자들이 더없이 끔찍한 방식으로 학대당했음을 증언한다. 의사로서 나는, 그 가운데 적어도 여덟 명은 이미 게네랄파페 거리에서 부상으로 숨졌을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밝힐 수 있다. 노동자들은 묶인 채 불붙은 담배로 발바닥을 지짐당했고, 그 뒤에도 돌격대원들에게 몇 시간이나 잔인하게 고문당했다. 나와 함께 베를린비스도르프의 필립스탈 박사라는 사람도 끌려 들어왔다. 이 동료는 중상을 입었다. 나는 이 의사가 살아날지 몹시 걱정스럽다.” (필립스탈 박사는 3월 23일 우르반 병원으로 옮겨졌고, 실제로 그곳에서 숨졌다.)

7.25 고문실의 국기단원과 간부들

나치 정부의 부인 성명에서는 돌격대 막사의 만행을 개별 돌격대원의 제멋대로 한 짓으로 꾸미려는 시도가 거듭된다. 우리는 여기 카셀시에서 온 보고 여러 편을 싣는다. 이 보고들을 보면 학대가 돌격대 공식 지휘부와 얼마나 밀접하게 맞물려 이루어졌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건물의 서로 다른 방에서 벌어진 신문과 학대를 서로 갈라놓으려는 수고조차 별로 하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순한 신문을 받은 뒤 “석방”되었다가, 계단에서 벌써 돌격대에게 “뒤처리”를 받으러 붙들려 지하실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자주 읽게 된다.

국기단 지도자 한스 크베어는 이렇게 진술해 조서에 남겼다.

“33년 3월 24일 1시 조금 넘어, 돌격대원 넷과 민간인 하나가 시청 51호 집무실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감. ‘크베어 씨,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바깥 계단을 내려감. 계단 위에 서 있던 돌격대원 몇이 구경꾼들에게 외침. ‘이제 국기단 장군 크베어 나가신다!’ 뷔르거잘레로 끌려감. 따라온 돌격대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디펠(슈타인헤거 술 외판원, 최근까지 복지청 근무, 횡령을 저질러 해고되고 징역 4개월 선고). 돌격대원 하나가 인적 사항과 소속 정당을 물음. 그러고는 석방이라고 통보. 복도에서 돌격대원 둘이 나를 붙잡고 아직 가면 안 된다고 함. 한 사람이 인적 사항을 적은 돌격대원이 있는 방으로 들어감. 잠시 뒤 다시 나와, 나를 지하실로 데려가라는 뜻의 손짓을 함. 거기서 돌격대원 열 명에서 열다섯 명이 나를 넘겨받아 당장 외투와 모자를 벗으라고 함. 이어 억지로 평상 하나가 놓인 어두운 지하실로 끌려감. 돌격대원 하나가 손전등을 들고 앞장서 비춤. 등이 꺼짐. 억지로 평상 위에 엎어져, 고무 곤봉으로 그야말로 짐승 같고 잔인무도하게 적어도 10분에서 15분 동안 맞음. 반쯤 정신을 잃고 평상에서 굴러떨어져 좀 더 인간답게 대해 달라고 빌자, 비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고, 곧바로 매질이 훨씬 더 세졌음. 지하실을 나갈 때 걸음이 빠르지 않자 이런 말을 들음. ‘아직 덜 맞았군. 서두르지 않으면 한 번 더 데려갈 테다.’

시 서기 마르틴 마이어(30세, 뵈트허 거리 4번지)는 3월 24일 1시, 그가 일하는 카셀시 집행청에서 돌격대에게 끌려 나와 오버레 카를 거리의 뷔르거잘레로 끌려갔다. 거기서 그는 어두운 지하실로 끌려가 평상 위에 눕혀졌고, 잠깐 쉬었을 뿐 30분가량 고무 곤봉으로 맞았다. 코와 오른쪽 눈에 심한 타격.

제펠 카셸, 노동조합 서기, 카셀, 실 거리 14번지. 33년 3월 23일 오후 5시, 노동조합 서기 게르케와 함께 노동조합 회관에서 돌격대원 여덟 명에게 신문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뷔르거잘레로 끌려감. 큰 홀에 붙잡혀 있음. 아래층 방에서 비명이 들림. 한 시간 기다림. 여덟 명에게 어두운 지하실로 끌려가 탁자 위에 엎어지고, 세 차례에 걸쳐 여섯 명에게 고무 곤봉으로 맞음. 치료 중. 현재도 몸져누워 있음. 콩팥 손상 추정. 혈뇨, 등·엉덩이·허벅지를 맞음.

하인리히 발, 상인, 카셀, 루트비히 거리 2번지. 33년 3월 24일 3시 무렵 가게에서 돌격대원 넷에게 체포되어 뷔르거잘레로 끌려감. 길에서 벌써 맞음. 도망치려 하면 쏘아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음. 뷔르거잘레에서 학대당함. 맨몸(바지를 끌어내림)에 15분 동안 고무 곤봉으로 맞음. 그 뒤로 카셀 주립 병원에 몸져누워 있음.

카셀 지역 의료보험조합 사무장 크리스티안 비트로크(카셀, 루이제 거리 20번지, 40대)는 33년 3월 24일 돌격대원 두 사람에게 사무실에서 끌려 나왔다. 시청 바깥 계단을 지나, 군중 사이를 뚫고 오버레 카를 거리의 뷔르거잘레로 끌려갔다. 가는 길에 벌써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함. 뷔르거잘레에서는 먼저 돌격대가 그의 인적 사항을 받아 적고 나서 ‘비트로크는 석방이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석방될 것처럼 홀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나, 건물 밖이 아니라 뜻밖에 어두운 지하실로 끌고 가 평상 위에 눕히고 고무 곤봉으로 학대했다. 머리에 두 대, 등·엉덩이·허벅지에 피멍. 옷은 더럽혀지고 군데군데 찢김, 신발도 마찬가지. 그 뒤 다시 홀로 끌려가 거기서 두 번째로 학대당함. 치료 중.”

7.26 장교들도 페메에 걸려든다

“3월 둘째 주, 지금 구역 측량사로 일하는 퇴역 중위 안할트(베를린템펠호프, 게르마니아 거리 12번지 거주)가 돌격대원 셋과 민간인 하나에게 자기 집에서 체포된다. 그는 곧바로 기동 경찰대를 부르고, 경찰대가 오기는 왔지만 개입을 거절한다. 돌격대원들은 안할트를 헤데만 거리의 동부 하부 지구대 본부로 실어 간다. 거기서 그는 먼저 기동 경찰대에 전화할 엄두를 냈다는 이유로 무리 가운데 민간인에게 맞았다. 그다음 이미 열두세 명이 짚 위에 누워 있는 방으로 끌려갔다. ‘오버파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돌격대원 하나가 중위를 넘겨받았다. 안할트가 국기단에게 불법으로 무기 훈련을 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더는 나오지도 않았다. ‘오버파러’가 아는 것은 눈앞에 있는 자가 전직 장교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졸개 둘과 함께 ‘처형’을 시작했고, 안할트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는 중상을 입은 그를 일으켜 세워, 바닥에 신음하며 누워 있는 다른 포로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여기 봐라, 이 돼지 새끼가 중위란다. 겁이 나서 똑바로 서지도 못한다.’ 안할트가 몸을 곧추세워 그 말이 거짓임을 보여 주자, 돌격대원은 그의 오금을 걷어찼다. 그는 안할트가 쓰러질 때까지 그 짓을 되풀이했다. 새로운 매질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포로의 태도는 바라던 만큼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안할트가 말없이 매를 견디자 돌격대원은 어쩔 줄 모르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울부짖어, 이 개새끼야!’ 그는 고함치며 안할트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내리쳤다. 그러고는 그를 다른 포로들이 있는 짚 위로 내던졌다.”

7.27 신경 쇠약일 뿐

오토 게르케. 3시 반에 카셀 노동조합 회관에 들어오자 보조 경찰 셋이 말을 걸어옴. 1번이 말함. ‘이놈도 그런 녀석이군.’ 2번. ‘이놈은 우리가 데려가겠다.’ 3번. ‘이건 금속노조의 게르케야.’[113]

“4시에 돌격대원 넷이 사무실로 들어옴. ‘게르케 씨?’ ‘예.’ ‘옷을 입으시오. 같이 신문받으러 가야 합니다.’ 경찰청장에게 알렸느냐고 묻자 대답. ‘그렇소.’ 돌격대원 여덟 명에게 둘러싸여 슈포어 거리를 지나 뷔르거잘레로 끌려감 … 먼저 위병소로 끌려갔다가, 그다음 위층 홀에서 무기 수색을 받음. 5시 반에서 5시 45분 사이에 내 이름이 불림. 돌격대원 둘에게 계단 아래 지하 복도로 끌려감. 오른쪽에 자전거 몇 대가 서 있었음. 그러자 외투와 모자를 벗으라 함. 계단 열두 개 깊이의 지하실로 끌려감. 지하실에서 준비해 둔 탁자 위에 엎어짐. 머리와 팔을 붙잡힌 채 15분에서 20분 동안 고무 곤봉으로 학대당함. 일으켜 세워져 ‘하일 히틀러’를 외치라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음. 곧바로 주치의를 불렀고, 심한 피멍과 신경 쇠약이라는 진단이 나옴.”

진단서 사본.

카셀, 33년 3월 28일

본인은 카셀 유소 거리에 사는 오토 게르케 씨를 큰 피멍 때문에 치료하고 있음을 이에 증명합니다. 피멍은 두 팔 언저리, 허벅지 뒤쪽, 오금, 그리고 종아리 뒤쪽까지 걸쳐 있습니다. 위로는 피멍이 콩팥 언저리까지 뻗어 있습니다. 본인은 33년 3월 24일부터 게르케 씨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누워 있어야 합니다.

서명

7.28 점심 대신 선동 영화

“4월 3일 월요일 아침 7시, 나는 친위대원 둘에게 체포되었다. 신문에서 나를 체포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나는 다른 포로 둘과 함께 얼음 창고 지하실에 갇혔다. 땅 밑에 있는 방으로, 길이 3미터, 너비 2미터쯤 되었다. 이 구멍에는 공기도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바짝 마주 서서 서로 만질 수 있을 때에야 서로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금세 숨이 막혀 괴로웠고, 드러누워서 숨을 돌리려 했다. 누울 수 있는 곳이라고는 담요도 매트리스도 없는 낡은 야전 침대 하나뿐이었다. 감자 자루 몇 개가 널려 있어 그것을 담요로 썼다. 마실 물은 없었고, 씻을 물마저 주지 않았다. 식사는 고역이었고 음식은 언제나 식어 있었다. 함께 갇힌 사람 가운데 유대인 한 사람은 신문 때, 돌격대원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팔레스타인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며 인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 굴욕이 그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느낄 수 있어서 그가 몹시 안쓰러웠다. 목요일 밤 11시 반에야 우리는 지하실에서 풀려나 학교 교실로 옮겨졌다. 금요일에는 우리가 다시 자유를 얻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구경거리로 삼았을 뿐이었다. 근방의 파시스트 주민들이 돌격대원들에게서 기별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자동차에 실릴 때 그들은 학교 앞에 빽빽이 늘어서서 조롱의 고함으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보았을 텐데, 그들은 우리의 비참함을 즐겼다. 놀랍게도 우리는 영화관으로 실려 갔다. 우리에게 보여 준 영화의 제목은 「피 흘리는 독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프랑스를 향한 선동이었다. 슐라게터의 총살[114] 장면도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나치 하나가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를 훨씬 더 설득한 것은, 그날 우리가 점심 한 끼조차 얻어먹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금요일 밤 12시, 나는 갑자기 돌격대원 둘에게 다시 끌려 나가 경찰서로 실려 갔다. 거기서도 나는 그들의 질문에 그들이 만족할 만큼 대답하지 못했다. 경찰 경감이 나를 다시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한 시간 뒤 친위대원 둘이 나를 데리러 왔는데, 구금소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숲으로 싣고 갔다. 갑자기 차가 섰다. 나는 끌려 내려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그들이 물었다. ‘무기는 어디 있나?’ 나는 말했다. ‘아는 무기가 없습니다.’ 그러자 매질이 시작되었다. 내 얼굴은 풀밭에 짓눌렸다. 축축한 흙냄새가 났고, 이 사이에 모래가 씹혔고, 등 위로는 고무 곤봉이 철썩철썩 떨어졌다. 가장 끔찍한 것은 매 순간 이제 마지막 한 대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얼마 뒤 그들이 손을 늦추었고, 다시 물었다. ‘무기는 어디 있나?’ 갑자기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아져서 나는 그들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다시 돌아섰고, 나는 그들이 때리다 지쳤다는 것을 알아챘다. 갑자기 내 뒤통수를 땅에 누르고 있던 주먹이 풀리더니, 끔찍한 일격이 내 머리를 내리쳤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그들은 가고 없었다. 나는 몸을 끌다시피 집으로 갔다.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겁쟁이라 진단서를 써 주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대책이라고 약속하는 것은 모두 사기다. 부당한 돌격대 공격을 막는다는 특별 부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 모래를 뿌릴 뿐이다. 그 뒤 풀려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는 학대당하지 않았다는 각서에 서명해야 했다고 내게 말했다. 서명을 하자마자 그들은 그를 다시 때리면서 비웃으며 외쳤다. ‘이제 너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네 서명을 받았으니 됐다.’”

7.29 상이군인들도 고문을 피하지 못한다!

3월 하순, 돌격대 부대들이 쉬프바우어담의 베를린 전력 회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건물을 점거하고 직원들이 나가지 못하게 막았으며, 경영 평의회 위원을 모두 체포해 돌격대 막사로 끌고 갔다. 베박(Bewag)[115] 경영진은 몇 시간 동안 경찰이 나서도록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이튿날에야 민족사회주의자들과 직접 협상해서 그들을 풀려나게 할 수 있었다. 노동자 열세 명은 자기들이 몇 시간 동안 군대식 대열로 행진하며 「독일의 노래」를 거듭 불러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저항은 권총을 들이대어 꺾었다. 노동자들 가운데 중상이군인이 둘 있어서 나중에 기진맥진해 쓰러졌기에, 모두가 그 고문을 더욱 비인간적이라고 느꼈다. 다른 모든 석방 때와 마찬가지로 이 노동자들도 흠잡을 데 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각서에 서명해야 했다.

베를린의 스물네 살 노동자 한 사람(이름은 기록 보관소에 있음)이 3월 27일 월요일 밤늦게 돌격대에게 끌려 헤데만 거리로 갔다. 그는 거기서 수요일까지 갇혀 있었고, 정치적 동지들의 이름을 대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승마 채찍으로 여러 차례 얻어맞았다. 나치는 그와 함께 중상이군인인 그의 아버지도 끌고 갔다. 아들은 늙은 아버지도 채찍으로 맞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진단서를 보면 두 사람 모두 얼굴에 상처가 있었고, 코는 부어올랐으며, 목덜미와 엉덩이는 온통 채찍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7.30 제 피를 핥아야 했다

1933년 3월 24일, 베를린 북부의 비틀러 제빵 공장에서 스물한 살의 배달 조수 치글러가 공장 구내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반파시즘적인 말을 했다. 역시 비틀러에서 일하는 돌격대원 뮐러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겐터 거리의 친위대 중대를 불러 모았다. 이들은 치글러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그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고, 도망치려 하면 실탄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이어 치글러는 친위대원들에게 끌려갔다. 그 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한 친위대원이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놈은 제 혁대로 혁대가 끊어질 때까지 얻어맞았고, 그러고 나서 제 피를 핥았지. 그다음 우리가 솔로 그놈 혓바닥을 다시 깨끗이 닦아 줬고, 중대 지휘관이 그놈한테 말했어. ‘이 썩을 놈아, 너는 지금 히틀러의 땅에 있다. 이 땅은 너한테도 신성해질 거다.’”

7.31 진짜 아리아인이 제3제국을 알게 되다

다른 곳에서 이미 보도했듯이, 4월 마지막 주에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조카[116]가 히틀러 암살을 꾸몄다는 혐의로 남부 독일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제3제국”의 감옥에 관해 전하는 묘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공정하다고 주장할 만할 것이다. 타고르는 며칠 동안 굴욕과 학대를 견딘 뒤 풀려나야 했다. 그는 이렇게 전한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타고르의 수기를 싣는다. 필자 소미엔드라나트 타고르(1901~1974)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타고르가 갇힌 곳은 땅속 깊이 있는 캄캄하고 공기 없는 방이었다. 거기에는 대부분 공산주의자인 좌파 정당원 스물두 명이 이미 갇혀 있었고, 한 달이 넘도록 신문 한 번 받지 못한 이도 많았다. 불려 나간 동료는 비명 끝에 매 맞은 몸으로 되돌아왔다. 거짓 증언을 거부한 젊은이는 강철 회초리에 허벅지가 찢겨 돌아왔고, 무기를 내놓지 않은 노동조합 간부는 팔이 부러지고 뺨이 찢긴 채 들어왔다. 한 공산당 의원은 자기 몸의 상처를 보여 주며 이것이 「독일 민족 문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밤에는 갇힌 이들의 비명과 고문하는 자들의 노래·웃음소리 때문에 잠들 수 없었다. 타고르는 무슨 혐의인지도 모른 채 낯선 나라의 감옥에 기한 없이 갇혀 있었던 그 며칠을 「지옥」이라고 적는다.

7.32 괴벨스도 부인할 수 없는 문서들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화 기자 쿠르트 하스가 2월 28일 밤 자기 집에서 민간인들에게 체포된다. 그는 돌격대 신분증 말고는 아무런 공문서도 내보이지 못하는 이 사람들을 따라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당장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재갈을 물리고, 침대에서 그를 두들겨 패고, 묶어서, 이미 중상을 입은 그를 자동차에 싣고 끌고 간다. 분개한 운전사가 가는 길에 불쑥 보안 경찰 초소를 부르는 바람에 하스는 목숨을 건진다. 그는 국립 병원에서 붕대를 감고 풀려난다. 유감스러운 “착오”라고? 여기까지는 이 사건에 별다를 것이 없다. 하스는 내무부에 진정을 낸다. 그러자 그의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된다. 그를 체포한 돌격대가 공식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는 것을 조금도 입증하지 못했는데도, 내무부는 나중에 가서 돌격대를 완전히 감싸 준다. 괴링 내무부의 답신을 원문 그대로 싣는다.

프로이센 내무장관 돌격대 연락 지휘관 문서 번호 29/33. 베를린, 1933년 3월 13일

베를린빌머스도르프 쿠르트 하스 귀하

귀하가 내무장관께 보낸 1933년 3월 4일 자 서신은 소관에 따라 본인에게 넘겨져 추가 처리와 조치를 맡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귀하의 서신에 적힌 내용이 오히려 핵심적인 점에서 사실과 다르고 왜곡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돌격대는 귀하를 보호 구금할 충분한 권한이 있었으며,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본인이 벌인 조사에 따르면, 귀하는 돌격대가 귀하 스스로도 인정하듯 돌격대임을 밝힌 뒤 처음에는 상황에 맞게 처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돌격대의 요구에 따라 옷을 입은 뒤, 귀하는 갑자기 큰 소리로 날뛰고 고함치며 돌격대원들을 먼저 때리기 시작하였고, 돌격대원 한 사람의 손가락을 물어 그 상처가 오늘까지도 낫지 않았으므로, 귀하의 저항을 강제로 꺾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귀하 자신의 탓입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행사된 강제력의 정도는 귀하의 저항을 꺾는 데 필요한 것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관련된 돌격대 지휘관과 돌격대원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부상당한 돌격대원이 그 나름으로 귀하에게 법적 조치를 취할 권리를 유보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귀하가 언급한 헬러 형사관께는 이 서신의 사본을 참고로 보냈습니다.

프로이센 내무부 돌격대 연락 지휘관

하일 박사, 돌격대 대대장(서명)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인자의 손가락을 이로 문 자는 죄를 지은 것이고 새로운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한 시민의 진정에 장관이라는 자들이 살인 선동으로 답한다. 여기서 제3제국의 새 법전이 말하고 있다.

돌격대에게 습격당한 자는 자기가 법의 보호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문서는 역사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이것은 빌레펠트에서 나온 저 공식 보도와 마찬가지로 반박할 수 없다. 그 보도는 덧붙여, 독일에서는 자기 범죄를 떠벌려도 얼마나 아무 벌도 받지 않는지를 보여 준다.

“빌레펠트, 1933년 4월 3일.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자 시의원인 슈레크[117]가 어제 체포되었다. 그는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다.”

고전적인 증거다. 체포는 곧 중상과 같은 말이다. 이제 어떤 부인 성명도 소용이 없다. 히틀러의 경찰이 스스로 제 기소장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