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1933)

인물빌리 뮌첸베르크,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룀, 에트문트 하이네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파울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하인리히 브뤼닝,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그레고어 슈트라서, 빌헬름 프리크, 로베르트 라이, 오토 벨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에른스트 톨러 용어갈색책 (1933),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1933),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 (1933), 돌격대 (SA), 친위대 (SS), 강제적 동질화, 1933년 나치 분서, 성과학 연구소 사건나치 집권과 수권법,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4 진짜 방화범들

4.1 독일 국회의사당

1884년 6월 9일, 베를린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국회의사당의 머릿돌을 놓았다. 건물은 프랑크푸르트의 건축가 파울 발로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다. 양식은 전통에 얽매인 르네상스풍이었다. 공사비는 2700만 마르크가 들었다. 공사는 10년 넘게 걸렸다. 1894년 12월 5일 빌헬름 2세가 마지막 돌을 놓았다.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은 비스마르크 기념비 맞은편 “공화국 광장”에 서 있다. 국회의사당의 동쪽 정면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거리로 나 있고, 남쪽 정면은 티어가르텐을 바라보며 짐존 거리와 맞닿아 있고, 북쪽 정면은 슈프레강을 향해 있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지하층, 1층, 본층, 중이층, 그리고 위층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정면의 길이는 137미터다. 건물 꼭대기는 커다란 돔이 덮고 있으며, 그 둘레를 작은 돔 네 개가 둘러싸고 있다. 본층의 한가운데에는 방청석을 갖춘 큰 회의장이 있다.

회의장의 세 벽은 나무 판으로 덮여 있고, 의장석 뒤의 정면 벽에는 천이 씌워져 있다. 단상, 방청석, 의원석은 나무로 되어 있다. 좌석 줄은 일곱 구역으로 나뉘어 원형 극장처럼 층층이 높아지며, 두꺼운 양탄자를 깐 좁은 통로로 서로 갈라져 있다. 회의장은 둘레 복도로 에워싸여 있고, 이 복도는 로비로 이어진다. 로비 복도와 로비에는 양탄자, 안락의자, 문 휘장이 갖추어져 있다.

본층에는 그 밖에도 많은 방과 홀이 있는데, 그 창문들은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거리 쪽으로 나 있다. 열람실, 문서고, 도서관은 일부는 본층에, 일부는 중이층에 있다. 지하층에는 난방 설비와 환기 설비가 있다. 지하층에서 작은 계단 하나가 지하 통로로 이어진다. 이 통로는 국회의사당의 주랑 현관 밑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거리 밑을 지나 제국의회 의장 괴링의 관저(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거리의 건너편에 있다)로 통한다. 지하 통로는 이 지하 계단 쪽으로도, 다른 난방 지하실 쪽으로도 문 하나로 막혀 있다. 통로의 벽을 따라 난방관이 지나간다.

국회의사당의 정문은 “공화국 광장”으로 나 있으며 경축 행사 때에만 열린다.

4.2 방문객은 어떻게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는가?

히틀러 정부는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모든 보고에서 범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국회의사당 안에 들어왔는지를 밝히기를 피했다. 정부는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아는 독일인이나 외국인이 거의 없다는 데 기대를 걸었다. 다음에 늘어놓은 것을 보면 국회의사당 방문객이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1) 의원이 아닌 사람과 방문객은 2번 출입구나 5번 출입구로만 국회의사당에 들어갈 수 있다. 2번 출입구는 짐존 거리에, 5번 출입구는 라이히스타크 강변로에 있다.

2) 5번 출입구로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는 사람은 대기실에 이른다. 대기실은 밧줄 차단선으로 막혀 있다. 이 밧줄 차단선 뒤에 접수 직원들이 있다.

3) 방문객은 누구나 접수 직원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가야 한다. 접수 직원에게 신고하지 않고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문객은 누구나 미리 인쇄된 쪽지를 채워야 하는데, 여기에는 방문객의 이름, 만나려는 의원의 이름, 방문 용건을 적어야 한다.

4) 채운 쪽지는 국회 사환이 방문 상대인 해당 의원에게 가져간다. 의원에게 방문객을 맞을 뜻이 있는지 묻는다.

5) 국회 사환이 의원의 동의를 받아 오는 동안 방문객은 대기실에서 기다린다. 그동안 방문객은 줄곧 근무 중인 국회 직원들의 감시를 받는다.

6) 의원이 동의하면 국회 사환이 방문객을 해당 의원에게 데려간다. 방문객은 국회 사환에게 이끌려 의원이 있는 곳까지 간다. 국회 사환은 방문객이 의원과 마주 선 다음에야 자리를 뜬다.

7) 모든 방문객은 별도의 명부에 기록된다. 채운 방문 쪽지가 이 명부에 기록하는 근거가 된다.

4.3 국회의사당의 화재

1933년 2월 27일 저녁 9시에서 9시 15분 사이에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불이 난다.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첫 공개 발표는 같은 날 저녁 라디오로 나온다. 베를린 방송국은 게다가 범인이 판데르루버라는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라고 알린다. 그가 모든 것을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는 바지만 입은 채 국회의사당 건물 안으로 들이닥친 경찰관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범인은 네덜란드 여권과 네덜란드 공산당의 당원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933년 2월 28일 이른 아침,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퍼뜨린다.

“월요일 저녁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탔다. 프로이센 내무부 담당 제국 판무관인 괴링 제국 장관은 화재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모든 조치를 명령하고 모든 행동의 지휘를 맡았다. 화재 첫 보고를 받고 아돌프 히틀러 제국 총리와 폰 파펜 부총리도 도착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까지 독일에서 겪은 가장 심각한 방화다. 경찰 조사 결과 국회의사당 건물 전체에, 1층부터 돔까지 발화 지점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것은 타르 제제와 횃불로 이루어져 있었고, 가죽 안락의자 속, 의회 인쇄물 밑, 문과 휘장과 나무 벽판, 그 밖에 불이 잘 붙는 곳곳에 놓여 있었다. 경찰관 한 명이 어두운 건물 안에서 불붙은 횃불을 든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즉시 총을 쏘았다. 범인 가운데 한 명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네덜란드 레이던 출신의 스물네 살 벽돌공 판데르루버로, 정식 네덜란드 여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이 네덜란드 공산당 당원이라고 밝혔다. 국회의사당의 중앙 건물은 완전히 타 버렸고, 회의장은 모든 방청석과 둘레 복도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피해액은 수백만에 이른다. 이 방화는 지금까지 독일에서 볼셰비즘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테러 행위다. 경찰이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28]을 수색하다 찾아낸 100첸트너[29]의 체제 전복 자료 가운데에는 볼셰비키식 공산주의 테러를 실행하라는 지시가 들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정부 청사, 박물관, 궁전, 생활에 꼭 필요한 사업장에 불을 지르게 되어 있다. 또 소요와 충돌이 일어나면 테러 집단 앞에 여자와 아이들을, 될 수 있으면 경찰관의 처자식까지 앞세우라는 지시도 내려져 있다. 이 자료를 찾아냄으로써 볼셰비키 혁명의 계획적 실행은 방해를 받았다. 그런데도 국회의사당 화재는 피비린내 나는 폭동과 내전의 봉화가 될 참이었다. 이미 화요일 새벽 4시에 베를린에서 대규모 약탈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 이날을 기해 독일 전역에서 개별 인사들에 대한, 사유재산에 대한, 평화로운 주민의 몸과 목숨에 대한 테러 행위가 시작되어 전면적인 내전을 터뜨리게 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프로이센 내무부 담당 제국 판무관인 괴링 제국 장관은 이 엄청난 위험에 가장 강력한 조치로 맞섰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국가의 권위를 지켜 낼 것이다. 범죄 세력의 첫 공격은 일단 격퇴되었음이 확인될 수 있었다. 공공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월요일 저녁 안으로 모든 공공 사업장과 생활에 꼭 필요한 사업장이 경찰 보호 아래 놓였다. 경찰 특별 차량들이 특히 위험한 시가지를 쉬지 않고 순찰한다. 프로이센의 보안경찰과 형사경찰 전체에 즉시 최고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보조 경찰이 소집되었다. 공산당 소속 지도적 제국의회 의원 두 사람에게 긴급한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공산당의 나머지 의원과 간부들은 보호 구금된다. 공산당의 신문, 잡지, 전단, 벽보는 4주 동안 프로이센 전역에서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의 모든 신문은 14일 동안 금지되었다. 국회의사당 방화범이 자백에서 사회민주당과 연계되어 있음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이 자백으로 공산당–사회민주당 통일전선이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이 통일전선은 프로이센의 안전을 책임진 수호자에게, 이 위험한 순간에 국가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에 따른 단호한 조치를 요구한다. 이미 그 전에 시작된 특별 조치들(발포 훈령[30], 보조 경찰 따위)이 필요했다는 것이 최근의 사건들로 완전히 증명되었다. 이 조치들 덕분에 국가 권력은 독일의 평화와, 따라서 유럽의 평화를 겨냥한 어떤 공격도 싹부터 짓밟을 만큼 충분히 무장해 있다. 괴링 제국 장관은 이 엄중한 시간에 독일 국민에게 최고의 규율을 요구한다. 그는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몸소 보증했으며, 국민이 아낌없이 지지해 주기를 기대한다.”

4.4 첫 신문 보도

2월 28일 아침, 수백만 명이 신문에서 국회의사당 화재 이야기를 읽는다. 신문 1면마다 커다란 활자가 외친다. 독일 국회의사당 불길에 휩싸이다! 이 사건은 다른 모든 일을 가려 버린다. 런던, 파리, 뉴욕, 암스테르담, 프라하, 빈에서 독자들 앞에 불타는 국회의사당에 관한 장황한 묘사가 차려진다. 그러나 아직은 기자들만 말하고 있다. 그들의 기사에는 “밤하늘로 치솟는 붉은 불길”도,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광경”이라는 상투적인 문장도 빠지지 않는다. 보도들은 하나같이 본회의장이 완전히 타 버렸고, 그 위의 돔도 유리 지붕이 깨지고 버팀대가 휘어졌다고 전한다. 회의장의 둘레 복도와 로비도 타 버렸다.

세계 언론의 그 밖의 보도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드러났다. 2월 28일 자 《프라거 타크블라트》는 밤 10시 무렵에 불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는 반면, 3월 1일 자 《르 탕》은 불이 21시 15분에 발견되었다고 보도한다. 1933년 2월 28일 자 런던 《타임스》에는 불이 밤 9시에 났다고 적혀 있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를 두고도 신문들의 보도는 엇갈린다. 후겐베르크의 통신사 “텔레그라펜 우니온”[31]은 1933년 2월 28일 조간에서 일부 언론이 실은 보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불이 횃불로 여러 발화 지점에서 붙여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보안경찰관 한 명이 유리창 너머로 휙 지나가는 횃불 든 사람을 보고 즉시 그에게 한 발을 쏘았다.”

반면 1933년 3월 1일 자 《르 탕》은 화재를 처음 알린 것이 국회의사당 맞은편 엔지니어 회관의 직원이었다고 보도한다.

발화 지점의 수도 신문마다 아주 다르게 전한다. 2월 28일 자 《프라거 타크블라트》는 발화 지점이 스무 곳이라고 하는 반면, 《타임스》의 베를린 특파원은 2월 28일 자 조간에서 근무 중이던 경찰 장교들이 불은 네댓 군데에 놓였다고 알려 주었다고 밝힌다. 《시카고 트리뷴》은 발화 지점이 열 곳이라고 전한다.

불이 번진 속도로 보아 발화 지점이 많이 설치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4.5 좌파에 대한 포그롬이 시작된다

국회의사당의 불은 아직 타오르고, 불타는 건물 앞에는 아직 천 명의 군중이 서 있다 – 그런데 벌써 경찰차와 오토바이와 돌격대 부대들이 길을 나서 있다.

첫 체포는 자정이 조금 지나서 이루어진다. 날이 밝아 경찰청의 어두운 복도들을 비출 무렵, 복도의 긴 의자에는 수백 명의 체포자가 앉아 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작가, 의사, 변호사들이 밤사이 잠자리에서 끌려 나와 경찰청으로 끌려왔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라디오가 국회의사당 화재 소식을 퍼뜨릴 때 자고 있었다.

점심 신문들이 체포자들의 첫 이름을 알렸다. 그 가운데에는 작가 루트비히 렌, 에곤 에르빈 키시, 에리히 바론, 카를 폰 오시에츠키, 오토 레만루스뷜트, 의사 뵌하임, 슈민케, 호단, 변호사 리텐, 바르바슈, 펠릭스 할레, 공산당 의원 발터 슈퇴커, 에른스트 슈넬러, 프리츠 에메리히, 오토마르 게슈케, 빌리 카스퍼가 있었다. 국회의사당 방화의 공범으로 지목된 제국의회 의원 토르글러는 2월 28일 아침 혐의에 항의하려고 스스로 경찰청에 간다. 그는 구금된다. 공산당 신문과 사회민주당 신문은 2월 28일에 더는 나오지 않는다. 《포어베르츠》와 《베를린 암 모르겐》, 《벨트 암 아벤트》의 인쇄소는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안에 점거되고, 이미 찍어 놓은 조간 부수는 압수된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 있던 《로테 파네》의 인쇄소는 이미 며칠 전에 경찰에 점거되었다. 《로테 파네》는 국회의사당 화재 전에 이미 금지되어 있었다.

4.6 긴급명령, 죽음의 명령

국회의사당의 불은 화재가 난 그날 밤에 꺼졌다.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뒤, 제국 대통령은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저 야만적인 법령에 서명했다.

“제국 헌법 제48조[32]에 근거하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주의자의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제1조. 독일 제국 헌법 제114조, 제115조, 제117조, 제118조, 제123조, 제124조, 제153조[33]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효력을 정지한다. 따라서 인신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권리, 결사와 집회의 권리에 대한 제한, 서신·우편·전신·전화의 비밀에 대한 침해, 가택 수색과 압수의 명령, 재산권의 제한은 이에 관해 달리 정해진 법률상의 한계를 넘어서도 허용된다. 제4조. 주 최고 관청이나 그 하급 관청이 이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내린 지시, 또는 제국 정부가 제2조에 따라 내린 지시를 어기는 자, 또는 그러한 위반을 선동하거나 부추기는 자는, 그 행위가 다른 규정에 따라 더 무거운 형에 처해지지 않는 한, 1개월 이상의 금고 또는 150라이히스마르크 이상 15000라이히스마르크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1항에 따른 위반으로 사람의 생명에 공공의 위험을 일으킨 자는 징역에, 정상을 참작할 경우 6개월 이상의 금고에 처하고, 그 위반이 사람의 죽음을 일으킨 때에는 사형에, 정상을 참작할 경우 2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이와 함께 재산 몰수를 선고할 수 있다. 공공에 위험한 위반(제2항)을 선동하거나 부추기는 자는 징역에, 정상을 참작할 경우 3개월 이상의 금고에 처한다. 제5조. 형법전 제81조(대역), 제229조(독물 투여), 제307조(방화), 제311조(폭발), 제312조(범람), 제315조 제2항(철도 시설 손괴), 제324조(공공에 위험한 독물 혼입)가 무기징역으로 처벌하는 범죄는 사형에 처한다. 다음에 해당하는 자는, 지금까지 더 무거운 형이 정해져 있지 않은 한, 사형 또는 무기징역 또는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1. 제국 대통령, 제국 정부나 주 정부의 각료 또는 판무관을 죽이려고 꾀하는 자, 또는 그러한 살해를 선동하거나, 자청하거나, 그러한 자청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과 그러한 살해를 공모하는 자. 2. 형법전 제115조 제2항(중대 소요) 또는 형법전 제125조 제2항(중대 공안 교란)의 경우에, 무기를 들고 또는 무장한 자와 알면서 의도적으로 함께하여 그 행위를 저지르는 자. 3. 감금(형법전 제239조)을 당한 사람을 정치 투쟁의 인질로 이용할 의도로 감금을 저지르는 자.”

4.7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선동

호외로, 장관들의 연설로, 라디오로, 벽보로 이렇게 선포된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국회의사당 화재 다음에는 봉기와 내전이 뒤따를 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여러분의 아내를 욕보이고 여러분의 아이들을 죽이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물물과, 식당과 급식소의 음식에 독을 타려 했다! 시간마다 독일의 신문 독자와 라디오 청취자의 머릿속에 “공산주의자들의 범죄”가 두들겨 박힌다.

선동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언론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에 관한 끔찍한 소식이 넘쳐흐른다. 1933년 3월 1일 자 《포시셰 차이퉁》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이렇게 보도한다.

“정부는 – 강조된 바에 따르면 – 사태로 보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위험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보고 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나온 자료는 지금 제국 검찰총장이 검토하고 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 자료에는 공산주의자 쪽에서 국민과 국가를 엄청난 위험에 빠뜨릴 만한 규모로 테러 행동을 체계적으로 준비해 왔다는 증거가 들어 있다고 한다. 압수된 공산주의 자료에는 인질, 주로 특정 인물들의 처자식을 붙잡을 구체적 계획, 공공건물 방화에 관한 내용, 특정한 공공장소에, 그것도 보안경찰·돌격대·철모단의 제복을 입고 투입될 테러 집단에 대한 지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설명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이 계속될 것이며 이 행동의 중앙 지휘부가 어쩌면 베를린 밖으로 옮겨질지 모른다는 근거 있는 혐의가 있다고 한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처럼 다른 곳에도 지하 둥근 천장 방과 통로가 있어 공산주의자들이 위험한 순간에 그리로 사라진다고 볼 근거도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수상한 사람들이 외국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독일 국경에서 필요한 대비를 마쳤다는 점이 강조된다. 국회의사당 방화에 관해서는, 공산당 제국의회 교섭단체 의장인 토르글러 의원이 방화범과 함께 몇 시간 동안 국회의사당 건물 안에 머물렀으며 방화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밝힌다. 다른 범인들은 어쩌면 국회의사당 난방 설비와 이어져 국회의사당 건물과 제국의회 의장 관저를 잇는 지하 통로로 달아났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와 관련해,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전화를 걸어 괴링 제국의회 의장을 방화의 교사자로 몰아가려 한 두 사람이 체포된 일을 들며, 여기서 사회민주당과 그 언론과의 연관이 드러났다고 강조한다. 담당 기관들은 이제 공산주의에 맞선 싸움을 가장 가차 없이 벌일 것이라고 밝힌다.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하는 자, 또는 그들과 함께 일한다는 충분한 혐의가 있는 자는 공산주의자 자신과 똑같이 엄하게 다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정부 기관들의 설명에서 동시에 드러나는 것은 선거가 어떤 일이 있어도 치러지리라는 점이다.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명령과, 국가 반역과 대역을 지금보다 훨씬 무겁게 처벌하는 명령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담당 제국 기관들은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명령 가운데 특히 공산주의를 겨냥한 개별 조항들이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된 개별 문서들 때문에 필요했다고 밝힌다. 특히 형법전에 정해진 독물 투여와 공공에 위험한 독물 혼입의 죄에 더 무거운 형벌을 매긴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독살을 계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대중 급식과, 미움받는 정치인들이 드나드는 식당의 음식에 독을 타는 일 따위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헤르만 괴링 제국 장관은 3월 1일 베를린에서 독일의 모든 방송국을 통해 연설한다. 신문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괴링은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전단과 신청서로 병역에 적합한 노동자들을 붉은 대중 자위대에 끌어들였다. 이 조직은 혁명적 공산주의자 대중을 동원해 국민과 국가에 맞선 싸움에 투입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솔직히 말하겠는데, 우리는 방어전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라 전선 전체에서 공격으로 넘어가려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서 뿌리 뽑는 것이 나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쳐부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아야 할, 민족적 독일의 저 세력들도 동원했다.

괴링은 또 이렇게 주장한다.

2월 15일, 독일 공산당이 200명에 이르는 테러 집단을 꾸리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집단들의 임무는 돌격대 제복을 입고 자동차, 백화점, 상점 따위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철모단 같은 동맹 단체와 민족주의 정당들에 대해서도 그런 습격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민족 운동의 단결을 깨뜨리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철모단 제복을 입은 테러 집단들이 비슷한 짓을 하게 되어 있었다. 체포될 때에는 가짜 신분증을 내보이게 되어 있었다. 나아가 돌격대 지휘관과 철모단 지휘관의 위조 명령서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서는 돌격대에게 3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에 베를린을 점령할 채비를 하라고, 그것도 무기를 가차 없이 쓰고 모든 저항을 짓밟는 따위로 하라고 수상쩍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 위조 명령서들은 관청과 시민들에게 뿌려져, 민족사회주의 쿠데타라는 공포의 유령을 불러일으키고 노동자들을 필요한 만큼 혼란에 빠뜨리는 데 쓰였다. 장갑차를 내주라는 경찰 명령서도 위조되었다. 2월 18일 독일 공산당의 한 회의에서는 부르주아지와 파시스트 국가들에 맞선 단결한 프롤레타리아의 명시적인 공격 협정이 거론되었다. 같은 날, 다량의 폭약이 없어져 혐의를 받은 교량 폭파 대원의 우두머리가 체포된다. 곧이어 독을 써서 행동하기로 한 독일 공산당 조직 하나가 적발된다. 라인강 변 쾰른에서 그러한 독살 계획이 적발되면서, 돌격대와 철모단의 공동 급식에 독을 쓰려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 다른 자료는 지도적 인사들의 처자식뿐 아니라 경찰관의 처자식까지 인질로 잡아, 시위 때 살아 있는 방벽으로 앞세우려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살인 조직의 지휘권은 코뮌 우두머리 뮌첸베르크의 손에 있었다. 2월 22일 중앙위원회는 노동자 무장의 구호를 내렸다. 그에 해당하는 지시에는 “테러를 쓰는 데에는 모든 수단과 모든 무기를 이용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대중 파업이 명령되었다. 연대 파업을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신고하게 되어 있었고, 모든 것을 비합법 활동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괴링은 이어서 무장봉기를 위한 조직 계획에 관해 말했다. 거기에는 무장봉기가 내전의 첫 단계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작은 테러 집단들의 투입에 관한 지시, 수천 수만 곳에 불을 지르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행동들의 목적은 경찰과 국방군을 시골로 꾀어낸 다음, 텅 빈 도시들에서 폭동을 부추기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인질을 이용할 때에는 어떤 인도주의에도 이끌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괴링은 이렇게 끝맺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말해 두겠다. 내 신경은 아직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으며, 나는 그들의 범죄적 책동에 맞서 버틸 만큼 강하다고 느낀다!”

4.8 방화범은 누구인가?

국회의사당 화재 소식과 동시에 세계 언론에는 이런 물음이 돈다. 방화범은 누구인가? 독일 신문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히틀러 정부의 발표를 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와 반대로 외국 언론은 모두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공식 발표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고, 소식이 쌓여 갈수록 이 회의는 얼마 안 가 공식 주장에 대한 공공연한 조롱으로 바뀌었다. 《르 탕》은 3월 1일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해 이렇게 보도한다.

“공식 성명은 분명히 주민을 광분하게 만들어 좌파 반대 세력에 맞서도록 부추기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경찰의 주장을 검증할 수단은 없다. 다만 국회의사당 화재가 선거를 앞둔 정부 선전에 아주 안성맞춤이라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선 행동의 구실이 되며, 돌격대 부대와 철모단을 무장 병력과 한 줄에 세우는 목적에도 쓰인다.”

《르 탕》의 같은 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베를린의 민주주의 진영과 좌파 진영은 국회의사당 화재의 원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튿날 호에서 《르 탕》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판데르루버의 체포와 그의 자백만으로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둘러싼 베일을 걷어 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런던의 《이브닝 스탠더드》는 3월 1일 이렇게 쓴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공산주의자 방화범들의 소행이라는 히틀러 씨의 설명을 세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놀랄 것이다.”

같은 날 런던의 《뉴스 크로니클》은 이렇게 밝힌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화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소리다…”

공식 통신사인 로이터는 3월 1일 다음과 같은 보도를 퍼뜨린다.

“독일의 수백만 명이, 방금 막아 냈다는 빨갱이 혁명에 관한, 공식 소식통에서 나온 이야기를 믿을 수도 없고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엄청나게 많은 언론의 목소리 가운데 고른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독일 밖에서는 히틀러 정부의 공식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외국 전체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확신했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세계 여론을 특히 간명하게 보여 주는 신문 하나만 더 인용하겠다.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3월 3일 이렇게 쓴다.

“국회의사당에 공산주의자들이 불을 질렀다는 이론은 오늘날 이미 분별 있는 독일인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사이에, 괴링 대위[34]가 마치 그날 밤 베를린에서 뭔가 떠들썩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국회의사당 화재 이전에 이미 일련의 명령과 탄압 조치를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난 지 사흘도 안 되어, 히틀러 정부는 외국에서는 아무도 자기들의 보고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서게 된다. 넘을 수 없는 불신의 벽이 독일 둘레에 솟아오른다. 날마다 수백 편의 열차가 독일 국경을 지나는 것은 사실이다. 베를린에서 세계 곳곳으로 전신과 전화가 오가는 것도 사실이다. 독일에서 편지가 쓰이고 부쳐지며, 독일로 가는 편지도 쓰이고 부쳐진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오는 열차는 죽음과 감옥을 피해 달아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독일로 들어가는 열차는 거의 비어 있다. 그 열차를 타는 몇 안 되는 승객은 독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신문사와 단체의 의뢰를 받고 오는 사람들이다. 독일에서 외국으로 건너오는 편지들은 하나같이 경악의 비명이다.

4.9 국회의사당 화재가 누구에게 필요했는가?

범죄 수사관이라면 누구나 맨 먼저, 그 범죄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를 묻는다. 여기서도 이 물음을 맨 먼저 던져야 한다.

히틀러 정부는 2월 28일의 공식 보고에서 국회의사당 화재가 공산주의자들이 지른 것이며 피비린내 나는 폭동과 내전의 봉화가 될 참이었다고 주장한다. 공산당이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에 “피비린내 나는 폭동”으로 넘어가려 했다는 증거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공산당의 전술은 이 주장을 단호히 반박한다. 공산당의 공식 간행물에는,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다수를 싸움으로 이끌 수 있을 때에만 권력을 위한 최후의 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이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독일 공산당은 이제 막 이 다수를 얻어 가는 길에 있었다.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1933년 3월 25일 자 독일 공산당 성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산주의의 원칙,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독일 공산당의 결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 테러, 방화, 사보타주 행위 따위의 방법이 공산주의 운동의 전술 수단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공산당은 언제나 자신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행이라고 밝혀 왔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독일 공산당은 혁명적 대중 투쟁의 전술을 쓴다. 선동과 선전으로, 무엇보다도 근로 대중의 당면 이익을 위한 일상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대중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 운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칙에 따라 모든 나라에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는 전술이다. 국회의사당 방화가 공산주의 운동에 아무런 생각할 수 있는 의미도 목적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이 성명이 옳다는 것은 공산당이 생겨난 날부터의 역사가 확인해 준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술을 바꾸어 갑자기 개인 테러 행동에 나섰다는 증거는 털끝만큼도 없다 — 그것은 그들의 정책과도 완전히 어긋날 것이다.

독일 공산당은 최근 몇 해 동안 쉼 없이 상승하고 있었다. 당은 1932년 3월의 첫 대통령 선거에서 자기 후보 에른스트 텔만에게 496만 표를 모았다. 1932년 7월 31일의 제국의회 선거에서는 이 득표를 약 530만으로 늘렸다. 1932년 11월 6일 선거에서는 600만 표에 이르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좋은 전망을 안고 1933년 3월 5일의 새 선거에 나섰다. 거의 모든 외국 언론이 그들의 큰 득표 증가를 점쳤다.

사회민주당 진영의 불만은 커져 갔다. 나치의 끊임없는 도발, 그리고 프로이센에서 자기 당 장관들이 대위 한 명과 병사 세 명에게 쫓겨나는 것을 내버려 둔[35] 노동조합 지도자와 당 지도자들의 수동성이 사회민주당 유권자의 넓은 대중을 공산주의자들 쪽으로 몰아갔다.

민족사회주의 진영의 불만도 그에 못지않았다. 1932년 11월 선거에서 히틀러는 200만 표 넘게 잃었다. 와해 과정이 커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지지자 가운데 많은 사람은 결정적인 호전을 기대했다. 그것은 오지 않았다. 민족사회주의 유권자들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더 빠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히틀러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의도를 증명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로 소책자 『봉기의 기술』도 꼽는다. 그러나 바로 이 소책자에는 무엇보다도 레닌의 다음 문장이 실려 있다.[36]

“결전이 완전히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모든 계급 세력이 충분히 갈팡질팡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서로 충분히 맞붙어 싸우고 제 힘에 부치는 싸움으로 충분히 약해졌을 때, 동요하고 불안정하고 줏대 없는 모든 중간 분자들, 곧 부르주아지와 구별되는 소부르주아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인민 앞에 충분히 정체를 드러내고 실천에서의 파산으로 충분히 망신을 당했을 때,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가장 단호하고 헌신적으로 대담한 혁명적 행동을 지지하려는 대중의 기분이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 일어나 거세게 부풀기 시작했을 때다. 바로 그때 혁명은 무르익은 것이며, 바로 그때 … 우리가 위에서 말한 모든 … 조건을 올바르게 헤아리고 시기를 올바르게 골랐다면,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다.”

그리고 레닌은 이 소책자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전위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계급 전체가, 광범한 대중이 전위를 직접 지지하지 않거나 적어도 전위에 대해 호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동안에 전위만을 결전에 내던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범죄이기도 할 것이다.”

괴링이 『봉기의 기술』을 대충이라도 읽어 보았다면, 그것을 공산당에 불리한 증거로 쓰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살이 쏜 사람에게 되돌아왔다.

4.10 히틀러는 후겐베르크의 포로인가?

…이른바 “민족 집중” 정부가 구성되었다.[37]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내건 조건은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몹시 가혹했다. 내각에서는 독일국가인민당 출신 장관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부총리 폰 파펜 씨는 프로이센 제국 판무관에 임명되었다. 앞선 정부들에서는 총리 자신이 프로이센 제국 판무관직을 맡았는데도 말이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권력 투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기들 몫으로 요구했던 국방부는 힌덴부르크에게 충성하는 폰 블롬베르크 장군의 손에 넘어갔다. 1월 30일 힌덴부르크가 새 내각의 선서를 받을 때, 히틀러는 모든 각료가 지켜보는 앞에서,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정부 구성에 아무런 손도 대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약속해야 했다. 민족사회주의자 장관 셋, 히틀러와 프리크와 괴링은 정부 안에서 독일국가인민당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경제 부처 전부와 외교 지휘권과 국방부는 독일국가인민당 쪽에 넘어가 있었다. 독일국가인민당의 계획대로라면 지도자 히틀러는 그들의 포로가 될 터였다. 힌덴부르크는 파펜이 함께 있을 때만 히틀러를 만나 주었다. 일찍이 어느 총리에게도 이토록 숨 막히는 조건이 붙은 적은 없었다.

합법적인 길로는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독일국가인민당은 약속 증서를 내세웠다. 철모단의 제2 단장 뒤스터베르크 중령은 히틀러를 못 박아 두려고 2월 12일 한 선거 집회에서, 내각 구성을 바꾸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구속력 있는 약속을 공개했다. 저울은 독일국가인민당 쪽으로 기울었다.

히틀러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 괴벨스와 괴링은 1월 30일 이래 히틀러를 독일국가인민당의 손아귀에서 풀어내려고 쉴 새 없이 애썼다.

압박은 날마다 커졌다. 정부 안의 권력 배분을 바꾸는 것만이 많은 민족사회주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커져 가는 불만을 누를 수 있었다. 폭력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국방군과 철모단은 힌덴부르크 편에 서 있었다. 공공연한 싸움이 벌어지면 국기단마저 국방군과 철모단 편에 서서 민족사회주의자들에 맞서리라고 보아야 했다.

4.11 오버포렌 박사의 비망록

이런 상황에서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꾀가 많은 괴벨스 박사가 닥쳐오는 사태를 가장 똑똑히 내다보았다. 단번에 민족사회주의의 정치적 처지를 바꿔 놓을 대규모 일격의 계획이 맨 처음 떠오른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였다. 우리는 이 대규모 일격과 그 발생과 실행에 관한 증언 하나를 가지고 있다.

독일국가인민당 의원 오버포렌 박사[38]는 1933년 3월 5일 선거 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독일국가인민당의 거점을 하나하나 빼앗아 가자, 히틀러에 맞선 독일국가인민당과 철모단의 투쟁을 조직하려 했다. 후겐베르크의 측근이었던 그는 내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는 국회의사당 화재 준비에 관해 아는 바를 비망록에 적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오버포렌 박사의 이 비망록은 은밀한 경로로 외국에 흘러 나갔다. 비망록의 몇몇 대목이 영국, 프랑스, 스위스 신문에 필자를 밝히지 않은 채 익명으로 실렸다.

며칠 뒤, 나중에 나치로 넘어간 한 독일국가인민당 의원이 오버포렌의 비망록을 “비밀 국가경찰” 손에 넘겼다. 그날부터 필자를 쫓는 사냥이 시작되었다. 오버포렌 박사는 5월 7일 자기 집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경찰 보고는 오버포렌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관청 발표는 오버포렌의 집에서 아무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실제로는 오버포렌은 나치에게 살해되었다. 히틀러 정부에 불리한 서류는 모두 오버포렌을 죽인 자들이 빼앗아 갔다.

오버포렌은 비망록 첫머리에서, 베를린 경찰청장 멜허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을 여러 차례 수색하게 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그는 비망록에서 민족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국회의사당 방화 계획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묘사한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괴벨스 박사는 곧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을 실행하면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선동을 막으라는 NSDAP의 요구에 대한 독일국가인민당의 저항을 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이 완전히 성공하면 공산당 금지까지 밀어붙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자료가 발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공산주의자들의 범죄적 의도를 입증하고, 공산주의 봉기가 바로 눈앞에 닥쳤으며 따라서 지체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말이다. 멜허의 경찰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또다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으므로, 베를린에는 새 경찰청장을, 그것도 민족사회주의자들 가운데서 들여야 했다. 폰 파펜 씨는 자기가 앉힌 멜허를 경찰청에서 내보내는 것을 몹시 꺼렸다.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헬도르프 백작을 경찰청장에 임명하자는 NSDAP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결국 온건한 편인 폰 레베초 제독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는 NSDAP 당원이었지만 독일국가인민당 쪽과도 여전히 끈이 닿아 있었다. 비어 있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 자료를 몰래 들여놓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경찰은 이 사무용 건물의 설계도를, 따라서 그 지하실의 위치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필요한 문서를 그곳에 들여놓기란 쉬운 일이었다. 괴벨스는 처음부터, 발견된 서류 – 그가 위조한 서류 – 가 심각하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암시에 그치더라도 이런저런 행동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에서도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2월 24일 경찰은 몇 주째 비어 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 들이닥쳐 수색하고 봉인했다. 같은 날, 대역죄를 입증하는 자료가 산더미처럼 발견되었다는 관청 발표가 나왔다. 2월 26일에는 정부 통신사인 콘티가 이 작전의 결과를 아주 자세히 발표했다. 이 상세한 보도를 다시 옮길 가치는 없다. 이 보도들의 싸구려 소설 같은 문체는 선입견 없는 독자의 눈에도 띄었다. 비밀 통로, 비밀 차단 장치, 탈출용 지하도, 카타콤, 지하 궁륭 따위가 장황하게 보도되었다. 이를테면 사무용 건물의 지하실을 “지하 궁륭”이니 “카타콤”이니 하는 말로 부른 것을 보면, 보도의 꾸밈새 전체가 그만큼 더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잘 가려졌다는 지하실 곁방에서 다가올 혁명을 실행할 아주 정확한 지침 수백 첸트너가 경찰 손에 들어왔다는 대목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스운 것은, 이 비밀 궁륭에서 발견된 물건들로 “공산당과 그 산하 단체들이 겉으로 드러난 존재 밑에서 제2의 불법적 존재를 이어 가고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는 발표였다. 베를린 경찰청장 폰 레베초 제독은 2월 26일 일요일 오후, 내무장관 직무대행 괴링 씨에게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된 것들을 보고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 수색 결과를 두고 연립 정부 안에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파펜과 후겐베르크와 젤테는 괴링 씨가 이런 사기꾼 수법을 쓴다고 그를 거세게 나무랐다. 그들은 발견되었다는 문서들이 너무 서툴게 위조되어 결코 공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예전에 영국 보수당이 지노비예프 편지를 위조했을 때[39]처럼 좀 더 솜씨 있게 했어야 한다고 했다. 콘티 통신사에 넘겨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 묘사의 조잡함도 비판받았다. 독일국가인민당과 철모단은 공산주의자들이 하필이면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 불법 거점을 차리리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다. 좀 더 솜씨 있게 위조해서, 불법 거처를 다른 어느 구역에서 적발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미 세상에 공개되고 만 뒤라, 독일국가인민당도 발견된 자료를 근거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법령을 더 강화하는 데 동의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봐주느냐 마느냐는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일 처리의 조잡함을 나무랐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떻게든 공산당이 선거에 참여하게 두기를 바랐다. 공산당을 배제함으로써 민족사회주의자들이 혼자서 제국의회의 절대다수를 얻게 되는 일을 막으려 한 것이다.

4.12 괴벨스 계획의 실행

오버포렌 박사는 비망록에서, 괴벨스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되었다는 자료의 효과를 어떤 행동으로 더 키워야 한다고 보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연쇄 방화에서 가장 큰 성과를 기대했다. 이 방화들은 – 어디까지나 오버포렌의 비망록에 따르면 – 국회의사당 화재 전 마지막 몇 주 동안 일어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로 정점을 찍도록 되어 있었다. 국회의사당 방화의 날짜는 2월 27일로 정해졌다. 민족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인 히틀러, 괴링, 괴벨스는 이날 선거 집회 연설 약속을 하나도 잡지 말고 베를린에 머물기로 약속이 되었다. 아래에 민족사회주의 선전 책임자가 2월 10일에 발표한 히틀러의 선거 연설 예정표를 싣는다. 히틀러가 2월 25일부터 27일까지를 비워 두었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2월 23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2월 24일 뮌헨
2월 28일 라이프치히
3월 1일 브레슬라우
3월 2일 베를린
3월 3일 함부르크
3월 4일 쾨니히스베르크

이어서 이런 발표도 있었다.

“2월 25일과 26일에도 선거 집회가 잡힐 수 있다. 시간대는 대개 8시에서 9시 사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만일을 위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를 비워 두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히틀러가 2월 27일에는 선거 집회에서 연설할 수 없다는 것만은 미리부터 못 박아 두었다.

4.13 관청 보도의 모순들

공산주의자들의 무죄와 나치의 국회의사당 방화 죄를 입증하면서 우리는 영향받지 않은 증인들의 진술과 우리 손에 있는 문서에만 기대지 않는다. 우리는 히틀러 정부의 관청 발표를 가지고서도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히틀러 정부의 관청 발표에는 모순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만으로도 진짜 방화범을 어느 진영에서 찾아야 하는지 충분히 드러난다.

첫 관청 발표는, 한 경찰관이 어두운 건물 안에서 불붙은 횃불을 든 사람들을 보았고 범인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또 범인은 국회의사당 지하실에서 발견되었고 아무 저항 없이 체포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3월 4일에는 판데르루버의 체포가 이렇게 묘사된다.

“치안 경찰관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쪽에서 국회의사당 안의 불을 보았다. 경찰관 가운데 한 명이 횃불을 똑똑히 보고 총을 쏘았다. 처음에는 이 사실관계를 얼마간 의심했다. 그러나 그사이 실제로 탄흔이 발견되었다. 치안 경찰관들은 그 뒤 국회의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처음 보도된 것처럼 지하실이 아니라 이미 로비에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를 발견했고, 그는 그곳에서 상당한 저항 끝에 한 경찰관에게 제압되었다.”

이것이 관청 보도의 첫째 모순이다.

4.14 토르글러와 쾨넨에 대한 혐의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1933년 3월 1일 저녁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의 대규모 방화에 관해 지금까지 관청이 조사한 결과, 발화 재료를 들여오는 데만 적어도 7명이 필요했고, 거대한 건물 안에 불씨를 나누어 놓고 동시에 불을 붙이는 데는 적어도 10명이 필요했을 것으로 밝혀졌다. 방화범들이 넓은 건물의 구석구석을 그토록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모든 방을 이처럼 확실히 아는 것은 여러 해 동안 거리낌 없이 드나들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혐의는 공산당 의원들에게 강하게 쏠린다. 이들은 특히 최근 들어 갖가지 핑계로 눈에 띄게 자주 국회의사당 건물에 모였다. 국회의사당 건물과 직원들의 근무 배치를 이처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은, 지금까지 현장에서 붙잡힌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한 명만 체포할 수 있었던 사실도 설명해 준다. 그는 건물 구조를 몰랐기 때문에 범행 뒤 달아나지 못했던 것이다. 체포된 자는 네덜란드에서도 특히 과격하기로 알려져 있으며, 공산주의 행동 위원회의 회의에 줄곧 참석했고, 자기도 방화에 끼워 달라고 고집해 관철했다. 조사 결과 또 드러난 바에 따르면, 화재가 일어나기 몇 시간 전인 저녁 8시에 목격자 세 명이 체포된 네덜란드인 범인이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토르글러와 쾨넨과 함께 국회의사당 복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방화범의 생김새로 보아 목격자들이 잘못 보았을 리는 없다. 더욱이 국회의사당 의원 출입구는 저녁 8시에 닫히는데, 공산당 의원 토르글러와 쾨넨은 8시 반쯤 외투를 자기들 방으로 가져오게 했고 10시쯤에야 다른 출입구로 국회의사당을 떠났으므로, 이 두 공산주의자에게는 가장 강한 혐의가 있다. 바로 이 시간에 불이 놓였기 때문이다. 토르글러 의원이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야 변호인을 통해 신변 안전 보장을 요청했다. 신변 안전 보장은 거부되었고, 의원은 체포되었다.”

3월 4일 정치경찰 책임자는 보고를 내놓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제3자의 가담에 관해 근거 있는 혐의점이 드러난 데 대해서는, 진행 중인 절차와 국가 안전을 위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3월 1일에는 토르글러와 쾨넨에게 강한 혐의가 있고, 그 혐의가 무엇에 근거하는지 알리는 것을 국가 안전이 막지 않는다. 그런데 3월 4일에는 혐의점을 알리면 국가 안전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 모순이다. 앞서 인용한 3월 1일 자 “프로이센 공보처” 발표에는 토르글러와 쾨넨이 저녁 10시에 국회의사당 건물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관영 볼프 전신국[40], 전신 연합, 외국 특파원들의 보도에 따르면 불은 9시에서 9시 15분 사이에 발견되었다. 소방대는 9시 15분에 활동을 시작했다. 경찰은 거의 같은 시각에 국회의사당을 에워싸고 누구도 국회의사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발견되고 몇 분 뒤 괴링이 화재 현장에 도착했고, 조금 뒤 히틀러, 괴벨스, 파펜,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41]가 왔다. 그런데도 토르글러 의원과 쾨넨 의원이, 경찰이 봉쇄하고 수천 명의 군중이 둘러싼 불타는 국회의사당을 태연하게 걸어 나왔는데, 누구 한 사람 그들에게 질문 하나 던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것이 셋째 모순이다.

4.15 토르글러와 쾨넨의 빈틈없는 알리바이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의 아싱어 식당 웨이터 두 명이 조서에서, 제국의회 의원 토르글러와 쾨넨이 2월 27일 8시 30분에 이미 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고 선서에 갈음해 보증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관청 보도가 주장하듯 10시가 아니라 늦어도 저녁 8시 조금 지나서는 국회의사당을 떠났어야 한다.

더구나 아래에 싣는 제국의회 의원 빌헬름 쾨넨의 선서 진술서를 보면, 두 사람이 저녁 8시 10분에서 8시 15분 사이에 국회의사당을 떠났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제국의회 의원 빌헬름 쾨넨의 선서 진술서를 빠짐없이 싣는 것은, 쾨넨이 2월 27일 저녁 6시 반쯤 국회의사당에 와서 그때부터 밤 1시 반까지 토르글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알리바이에는 빈틈이 없으며, 토르글러와 쾨넨에 대한 히틀러 정부의 혐의에 참말이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그것이 증명한다. 쾨넨 의원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빌헬름 쾨넨(1886~1963)의 선서 진술서 전문을 싣는다. 필자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쾨넨은 2월 27일 오후 경찰청에서 브라슈비츠 경감과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의 선거 자료 반출을 협의했다고 진술한다. 6시 반 조금 전 국회의사당에 들어가 토르글러를 만났고, 토르글러가 기다리던 전화 때문에 함께 남았다. 7시 반쯤에는 경찰청의 딜스와, 7시 45분쯤에는 토르글러가 로젠펠트 변호사와 통화했다. 8시 조금 넘어 5번 현관 수위실에서 기다리던 전화를 받은 뒤 두 사람은 의사당을 나왔다. 다리에 정맥염을 앓던 원내 비서와 함께였기 때문에 「도망치듯」이 아니라 여느 때보다 훨씬 천천히 걸었다고 한다. 이어 프리드리히 거리 역의 아싱거 식당에서 동지들과 저녁을 먹었고, 10시가 넘어 새로 온 웨이터에게서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관청 보도의 넷째 모순을 드러낸다.

4.16 에른스트 토르글러는 자진 출두했다

1933년 3월 1일 자 “프로이센 공보처” 발표에는 토르글러가 자진 출두한 것이 아니라 체포되었다고 되어 있다. 토르글러와 함께 경찰청에 갔던 변호사 쿠르트 로젠펠트 박사[42]의 아래 선서 진술서는 이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선서 진술서

이에 다음 사실을 선서에 갈음해 보증한다. 국회의사당 화재 다음 날 아침, 에른스트 토르글러 씨가 내게 전화를 걸어, 자기와 함께 경찰청에 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국회의사당 화재와 관련해 자기에게 씌워진 혐의를 반박하러 그곳에 가려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고, 곧바로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토르글러와 함께 곧 가겠다고 알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형사 경정 헬러와 통화했다. 그러고 나서 토르글러 씨와 함께 자동차로 경찰청에 가서 헬러 씨에게 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기 토르글러 씨가 왔으니, 그가 어떤 식으로든 국회의사당 화재에 가담했다는 혐의에 관해 그를 신문해 달라고. 토르글러가 신문을 받으러 자진해서 나타났다는 소식에, 경찰관 여럿이 내가 있던 방으로 들어와 “토르글러가 정말 제 발로 왔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그 뒤 헬러 씨는 토르글러 씨와 함께 다른 방으로 갔고,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한참 뒤 토르글러 씨가 그 방에서 다시 나왔고, 우리는 함께 기다렸다. 이윽고 헬러 씨가 우리 둘을 다른 방으로 불러,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토르글러 씨에게 체포를 선언했다.

서명 쿠르트 로젠펠트

로젠펠트 박사의 이 진술에서 토르글러가 자진 출두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것이 다섯째 모순이다. 1933년 3월 1일 자 “프로이센 공보처”는 토르글러 의원이 방화범들과 함께 몇 시간 동안 국회의사당 건물에 머물렀고, 방화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보도한다. 토르글러가 정말로 국회의사당 방화의 공범이었다면, 가장 초보적인 분별만 있어도 판데르루버와 함께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여섯째 모순이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3월 1일 자 보도에는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들이 국회의사당 건물과 직원들의 근무 배치를 잘 알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들은 국회의사당 직원들의 근무 배치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제국의회 의장단에 자리가 없었고, 제국의회 운영을 다루는 모든 위원회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뒤에서 보여 주겠지만, 국회의사당 직원들의 근무 배치는 국회의사당 화재 당일 민족사회주의자인 청사 관리관이 바꾸어 놓았다. 그러니 이 변경을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제국의회 의장 괴링이었지, 공산당 의원들이 아니었다.

이것이 일곱째 모순이다.

4.17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2월 28일 자 발표에는 판데르루버가 “네덜란드 공산당 당원이라고 자백했다”고 되어 있다. (판데르루버가 네덜란드 공산당 당원증을 지니고 있었다는 라디오 판본은 너무 믿기지 않는 것이어서 화재가 난 그날 밤에 벌써 거두어들였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 판데르루버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기자는 암스테르담 신문 《더 텔레흐라프》의 통신원이었는데, 그는 3월 2일 자기 신문에 이렇게 썼다.

“마리뉘스는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어느 정당의 당원도 아니라고 내게 말한다. 그는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자기 나라 사람 앞에서 판데르루버는 맡은 배역에서 벗어나 모처럼 한 번 진실을 말한다. 실제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1931년 4월, 제명당하기 전에 먼저 레이던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탈퇴했다.

이것이 여덟째 모순이다. 볼프 전신국은 1933년 3월 2일 암스테르담발로 이렇게 보도한다.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들이 판데르루버를 떼어 내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헤이그 경찰청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과격한 생각을 네덜란드에서 시행되는 신중한 당 전술에 굽히려 하지 않던 루버는 당 지도부에게서 결코 제명된 것이 아니라 그저 최전선에서 빠지고 한직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그러니까 독일 관청은, 네덜란드 공산당이 “한직으로 밀어낸” 공산주의자(실제로 판데르루버는 1931년 4월부터는 네덜란드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맹원이 아니었다)가 독일 공산당에 의해 테러 행위에 끌려 들어갔다고 믿게 만들려는 것이다. 공산당들은 모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부일 뿐이고 그들 사이에는 더없이 긴밀한 유대가 있다고 여러 해 동안 주장해 온 것은 바로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아니었던가? 한직으로 밀려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를 독일 공산당 지도부가 두 팔 벌려 맞아들이고 가장 은밀한 임무를 맡겼다는 것이 이 주장과 어떻게 들어맞는가?

이것이 아홉째 모순이다.

4.18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섰다

볼프 전신국의 같은 보도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루버는 1932년 12월 22일에도 헤이그에서 열린 파업 중인 택시 운전사들의 집회에 참석해 긴 공산주의 연설을 했다. 네덜란드 경찰의 이 통보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조직된 공산주의 테러 공격으로 판단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정말로, 루버가 그 집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국회의사당 화재를 판단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판데르루버는 택시 운전사들의 집회에서 공산주의 연설을 하기는커녕, 전에도 자주 그랬듯 네덜란드 공산당을 공격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판데르루버의 언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공산당 기관지 《트리뷔너》의 헤이그 통신원 A. 테롤이 3월 12일에 쓴 서명 보고서를 싣는다. 필자의 생몰을 확인할 수 없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테롤은 판데르루버가 1932년 12월 22일 헤이그 인민회관의 택시 운전사 집회에서 공산주의 연설을 했다는 경찰 발표가 거짓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그 집회를 취재했지만 지면 사정으로 실리지 못한 자기 기사를 공개한다. 기사에 따르면 집회는 파업위원회와 생디칼리스트 노조가 열었고, 판데르루버는 자유 토론에 끼어들었다가 주제에서 벗어난다며 의장에게 여러 번 제지를 받았다. 그의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일곱 달 끈 파업은 실패했다. 노조들은 운전사들을 등 뒤에서 팔아넘겼고, 공산당도 다른 조직과 다름없이 노동자를 속였다. 파업의 시대는 지났으니 생디칼리스트 조직까지 포함해 모든 조직을 부수고 새 투쟁 형태를 찾아야 한다. 테롤은 판데르루버가 모든 조직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보고, 공산당은 대중 행동을 지지하며 개인 행동에는 반대한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아래 서명인들은 이 보고서가 다루는 공개 집회에 참석했으며, 판데르루버가 이 모임에서 보고서에 옮겨진 대로 발언했음을 밝힌다.

택시 운전사 집회의 독립적인 참석자들이 여기서 열째 모순을 드러낸다.

정치경찰 책임자의 3월 4일 자 발표에서는 판데르루버가 독일어를 능숙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친구들 모두의 이야기에서도, 감옥에서 그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기자들의 진술에서도, 판데르루버가 독일어를 더듬더듬밖에 못 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2월 28일 자 《로칼안차이거》 보도에는 판데르루버를 통역의 도움을 받아서야 신문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열한째 모순이다. 정치경찰 책임자의 같은 발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게다가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 선동가로 경찰에 알려져 있다. 그는 1931년 4월 28일 베스트팔렌의 그로나우에서 공산주의 경향의 그림엽서를 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실제로 판데르루버가 그로나우에서 판 것은 우리 책에 실은 그림엽서, 그와 그의 친구 홀베르다가 찍힌 엽서였다. 이 엽서에는 판데르루버와 그의 친구가 찍혀 있다. 엽서에는 네 가지 언어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와 H. 홀베르다의 유럽·소련 노동자 스포츠 및 연구 여행. 1931년 4월 14일 레이던에서 출발.”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 밖에는 한 마디도 없고, 공산주의 선동을 가리킬 만한 표시는 털끝만큼도 없다. 덧붙이자면 판데르루버가 체포된 것은 그림엽서 노상 판매 허가가 없었기 때문일 뿐이다.

이것이 열두째 모순이다.

베를린 정치경찰 책임자 딜스 고등 행정관[43]은 또 이렇게 발표했다.

“그(판데르루버)는 신문에서 목격자들에 의해 입증된 범위까지만 사실관계를 시인했다.”

같은 발표의 몇 줄 뒤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판데르루버)는 폭넓게 자백했다.”

히틀러 정부는 방화의 목격자를 한 명도 내세우지 않았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조차 판데르루버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붙이는 것을 경찰이나 다른 누가 보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딜스 고등 행정관의 발표대로라면 그는 국회의사당 방화를 전혀 시인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같은 딜스 씨가 다른 한편으로는 판데르루버가 폭넓게 자백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열셋째 모순이다.

4.19 루버는 소련에 간 적이 없다

우리는 2월 28일 저녁 자 《로칼안차이거》[44]의 보도를 싣는다. 이 보도는 판데르루버가 모스크바에 가서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보도는 소련을 겨냥한 대대적인 선동에 이용되었다.

《로칼안차이거》는 이 보도를 가장 크게 실었다.

실제로는 네덜란드 경찰이 1933년 2월 28일 자 《로칼안차이거》에 실린 이런 발표를 한 적이 전혀 없다. 판데르루버 자신조차 소련에 갔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판데르루버는 소련 땅을 밟은 적이 없다.

이것이 열네 번째 모순이다.

판데르루버는 2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레이던을 떠났다. 1933년 3월 2일 자 《포시셰 차이퉁》 보도에 따르면, 그는 2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밤을 베르더 근처 글린도의 한 숙소에서 보냈다. 2월 18일에 그는 걸어서 베를린으로 계속 갔다. 형사 경감 하이지히[45]는 3월 13일 네덜란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판데르루버가 실업자 신고소[46]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공산주의 “행동위원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밝혔다. 판데르루버는 아무리 일러도 2월 18일 토요일 저녁에야 베를린에 닿았다. 그다음 날인 2월 19일 일요일에는 실업자 신고소가 문을 닫았다. 그러니 경찰의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그가 실업자 신고소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일러도 2월 20일 월요일이다. 생각해 보라. 독일어를 더듬더듬 하고 네덜란드 공산당의 신분증명서 하나 갖지 않은 한 네덜란드인이 2월 20일 베를린의 실업자 신고소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알게 되고, 그들의 손에 당의 최고 지도부와 이어지고, 그 지도부에게서 2월 27일에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라는 임무를 받는다니!

이것이 열다섯 번째 모순이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1933년 3월 1일 발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체포된 자는 공산주의 행동위원회의 협의에 줄곧 참석했고, 방화에 자기도 끼워 달라고 밀어붙여 관철했다.”

이에 대해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33년 3월 3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회의사당에서 체포된 판데르루버가 참석했다는 공산주의 행동위원회 회의 따위는 국회의사당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당연히 열린 적이 없다. 첫째, 공산주의 행동위원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그 정치국이 있을 뿐이다. 둘째, 공산당의 회의나 공산당의 어떤 기관의 회의에도, 독일 공산당 당원도 아니고 코민테른의 다른 어느 지부 당원도 아닌 아무 개인이 참석하는 일은 없다.”

괴링의 주장에 대한 이 대답은 열여섯 번째 모순을 드러낸다.

4.20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의 “지하 묘굴”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1933년 2월 28일 발표는 이렇다.

“경찰이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을 수색하면서 찾아낸 100첸트너의 체제 와해 선전물 가운데에는 볼셰비키식으로 공산주의 테러를 수행하라는 지령이 들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정부 청사, 박물관, 궁성, 생활에 꼭 필요한 사업장에 불을 질러야 한다. 또한 소요와 충돌이 벌어질 때 테러 집단 앞에 여자와 아이들, 될 수 있으면 경찰관의 아내와 아이들을 앞세우라는 지령도 있다. 이 자료를 찾아냄으로써 볼셰비키 혁명의 계획적 수행이 저지되었다.”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33년 3월 3일 이렇게 밝혔다.

“독일 공산당은 이미 1933년 1월 30일에 현재의 정치 활동과 관계된 모든 자료를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치웠고,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의 사무 활동을 모두 멈추었다. 중앙위원회와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구 지도부의 사무실에 업무 정리와 문의·방문객 따위의 전달을 위해 한두 사람씩 남겨 두었을 뿐이다.”

2월 내내 공산당의 지도적 간부로서 마지막까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일한 제국의회 의원 빌헬름 쾨넨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 가택 수색에 관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쾨넨이 엮은이들에게 보낸 서명 진술을 싣는다. 필자(1886~1963)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쾨넨에 따르면 2월 17일 오전 대규모 경찰이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을 점거하고 지하실까지 몇 시간 동안 샅샅이 뒤졌다. 그때 압수된 문서 가운데 『무장봉기의 기술』이나 이른바 「군대 해체 선동물」은 없었고, 경찰 발표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그런데 이레 뒤인 2월 24일 경찰청은 「지하 묘굴」에서 그 책이 나왔다고 발표했다. 쾨넨은 그 무렵 거의 날마다 회관에서 경찰과 선거 자료 반출을 협의하고 있었는데도 수색에 불려 가지도, 발견 사실을 통보받지도 못했다. 2월 25일 그가 그 「묘굴」이 어디냐고 묻자, 담당 경감은 경비실 바닥의 1미터 남짓한 뚜껑문을 보여 주었다. 함께 있던 오랜 일꾼 하나가 그것은 옛 맥주 저장고로 내려가는 문이라고 외쳤고,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두 해명은 관영 발표의 열일곱 번째 모순을 폭로한다.

4.21 “내전의 봉화”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1933년 2월 28일 이렇게 주장한다.

“… 국회의사당 화재는 피비린내 나는 폭동과 내전의 봉화가 될 것이었다. 이미 화요일 아침으로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약탈이 잡혀 있었다. 오늘부터 독일 전역에서 개별 인사들을 겨냥하고, 사유재산을 겨냥하고, 평화로운 주민의 몸과 목숨을 겨냥한 테러 행위가 시작되어 전면적 내전을 불러일으킬 예정이었음이 확인되었다.”

1933년 3월 4일 자 《포시셰 차이퉁》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찰의 활동 덕분에 지금까지 이 자료가 모든 공산주의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자료는 암호문으로 극소수 간부들의 손에만 있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의 마지막 수색은 2월 24일에 있었다. 이 수색 때 테러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치경찰은 테러 지령이 모든 공산주의자의 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몇몇 간부만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독일 공산당은 2월 24일부터 27일까지 사흘 동안

  • 첫째,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독일의 모든 지구로 자료를 실어 날라야 했을 것이고,
  • 둘째, 그동안 테러를 실행할 집단들을 꾸려야 했을 것이며,
  • 셋째, 이 집단들에게 테러 행위의 실행을 지시하고 훈련시켜야 했을 것이고,
  • 넷째, 나머지 당원들을 테러 행위로 불붙은 내전에 대비시키고 조직해야 했을 것이다.

독일 공산당은 2월에 독일 전역에 흩어진 30만 명이 넘는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관영 발표가 덮어씌우는 모든 계획을 사흘 안에 실행하려면 독일 공산당은 기적을 일으켜야 했을 것이다.

두 관영 주장을 맞대어 보면 열여덟 번째 모순이 드러난다.

4.22 괴링은 “유죄 증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3월 1일 저녁 다음과 같은 발표를 냈다.

“프로이센 내무부는 공산주의의 위험에 맞선 2월 28일 자 제국 정부 긴급명령에 관해, 이 명령이 여러 범죄를 특히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게 한 것은 충분히 입증된 크고 급박한 위험과, 비인간적이며 면밀히 준비된 무한한 공산주의 테러 체계 때문이라고 밝힌다. 독일을 볼셰비즘의 혼돈 속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민족과 국가의 개별 지도자들을 노린 암살 기도, 생활에 꼭 필요한 사업장과 공인을 노린 테러, 인질 납치, 저명인사들의 아내와 아이들의 납치로 민족에게 공포와 경악을 안기고 시민계급의 모든 저항 의지를 마비시키려 했다. 프로이센 내무부 제국 판무관 괴링 제국장관은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취해진 모든 조치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문서들을 공중 앞에 내놓을 것이다. 지금은 매우 방대한 자료를 추려 내고, 공개로 인해 국가 안보가 더 위태로워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해 마지막 검토를 하는 일만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은 오늘날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이것이 열여덟 번째 모순이다.

4.23 괴링은 자기 말을 스스로 부인한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테글리헤 룬트샤우》는 1933년 3월 2일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다음 발표를 실었다.

“외국의 몇몇 신문에서 독일 마르크스주의자 쪽이, 국회의사당 건물의 불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사회주의자 쪽이 질렀다는 중상적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이 중상의 장본인들은 이미 체포되었으며, 수사가 끝나는 대로 마땅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체포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가 실은 첩자 선동꾼(agent provocateur)이며 민족사회주의 지도부 쪽의 꼬드김으로 불을 질렀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 근거로는, 방화범이 자기 웃옷과 셔츠는 불쏘시개로 썼으면서도 그의 몸에서 나온 공산당 신분증명서와 여권은 버리지조차 않았다는 점을 든다. 또 경찰 당국이 방화범의 사진과 그에게서 압수한 문서를 공개하지 않았고, 범인에 관해 자세한 정보를 주고 그가 공산주의·사회민주주의 정치가들과 맺은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현상금도 걸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한다. 큰 형사 사건에서 매우 이례적인 이런 처리는, 당국이 민족사회주의자의 도발 행위를 반마르크스주의 행동의 구실로 악용하려고 범죄의 규명을 방해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관계 당국은 이런 중상적 짜맞추기가 물론 아무 근거도 없다고 밝힌다. 범인의 사진과 그에게서 압수한 문서의 사진은 오로지 수사를 위해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다. 공개는 오늘 중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외국 언론의 베를린 특파원들도 오늘 중으로 경찰청 IA과에서 사진 복제본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그 사진은 오늘 중으로 네덜란드 경찰에 보내져, 범인이 판데르루버라는 인물과 동일인임을 네덜란드에서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더 이상의 중상은 발붙일 곳을 잃게 될 것이다. 이를 퍼뜨리는 일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다른 독일 신문들이 이 발표를 싣기도 전에 그 전재가 금지되었다. 괴링은 볼프 전신국[47]을 시켜,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테글리헤 룬트샤우》가 공산주의자의 위조에 넘어갔다고 퍼뜨리게 했다.

그러니까 괴링은 아무나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여기는 프로이센 공보처”라고 말하기만 하면 어떤 소식이든 내보낼 수 있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는 통신사와 신문사 사이의 전화 연락은 아주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편집국 속기사는 발표를 받아 적기 전에 먼저 확인 질문을 한다. 괴링의 부인은, 그가 처음에는 프로이센 공보처의 발표로 세상을 속이려 했고, 큰 위험을 깨달은 뒤에야 — 물론 너무 늦게 — 그 발표를 거두어들였다는 사실을 덮어 감출 수 없다.

이것이 스무 번째 모순이다.

4.24 공범 사냥

관영 볼프 전신국의 콘티 통신은 1933년 3월 4일 이렇게 알렸다.

“…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슈만이 2월 24일 게렌(튀링겐)에서 열린 공산당 선거 집회에서 이미 국회의사당 건물 화재를 예고했다. 슈만은 말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밤 국회의사당이 불탈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무도장이 불타 버리면 우리는 흔들 마루를 얻게 될 테니까.’”

1933년 3월 5일 자 《포시셰 차이퉁》은 이렇게 보도한다.

“튀링겐에서,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 극악한 방화가 일어난 날 저녁 게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린 공산당 선거 집회에 관한 보고서가 튀링겐 아른슈타트 군청에 들어왔으며, 집회를 감시하던 지역 경찰관이 그 보고서에 연사인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슈만의 발언, 즉 국회의사당 화재를 미리 예고한 발언을 적어 두었다는 소식이 퍼졌고 라디오로도 전해졌다. 《튀링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알리는 바에 따르면, 그사이 진행된 조사에서 그 집회가 열린 음식점에 라디오 설비가 있었고, 음식점 주인이 라디오 보도를 듣고 연설 도중의 연사에게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다고 전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당 경찰관이 보고서에서 시각을 한 시간 잘못 적었으며, 슈만 의원은 저녁 10시 15분쯤에야 그 발언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라디오 보도를 전해 들은 상태였다고 확실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물한 번째 모순이다.

1933년 3월 7일 자 《포시셰 차이퉁》은 경찰 정보에 근거해 이렇게 보도한다.

“뒤렌, 3월 6일 — 벨기에 국경에서 멀지 않은 독일 국경 마을 라머스도르프에서 어제저녁, 국회의사당 건물 방화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러시아 망명자 한 사람이 체포되었다. 그는 그 직전 벨기에의 한 우체국에서 파리로 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벨기에 국경 관리들에게 독일로 추방되자 국경 이쪽에서 체포가 이루어졌다. 신문에서 그는 러시아 출신이며 오랫동안 베를린에 머물렀다고 진술했다. 그의 팔과 다리에는 상당한 화상이 있었다. 이 수수께끼의 외국인은 오늘 낮에 검찰에 넘겨졌다. 그는 여전히 수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진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이름도 아직 밝히지 않았다.”

1933년 3월 8일 《포시셰 차이퉁》은 아헨 행정구 장관의 발표를 전한다.

“아헨 행정구 장관은, 프링스하우스 근처에서 체포된 러시아 국적자가 조사 결과 국회의사당 방화범으로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알린다. 당사자가 독일 공산당(KPD)에서 집필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그는 1년 전에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밖에는 그에게 불리한 것이 없다. 추방은 그사이 집행되었다.”

이것이 스물두 번째 모순이다.

4.25 판데르루버는 혼자 불을 질렀는가?

히틀러 정부는 3월 초 형사 경감 하이지히를 레이던에 보내 판데르루버라는 인물을 조사하게 했다. 하이지히 경감은 네덜란드 언론 대표들과 인터뷰를 했고, 그 인터뷰는 3월 14일 여러 신문에 실렸다. 거기에는 말 그대로 이렇게 쓰여 있다.

“루버에게 조력자나 나아가 공범이 있었느냐는 중요한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불은 그가 혼자 질렀지만 준비 조치는 조력자들이 해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이지히 경감의 이 말은, 그 거대한 건물에서 여러 발화점에 동시에 불을 붙이려면 적어도 10명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3월 1일의 관영 주장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래서 예심판사인 제국법원 판사 포크트[48]는 서둘러 3월 14일 저녁 사법 공보실을 통해 하이지히 경감의 말을 부인하게 했다.

“여러 신문에서 판데르루버가 국회의사당에 혼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국법원 예심판사의 조사 결과, 판데르루버가 제 발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믿을 만한 단서가 나왔다. 지금은 수사를 위해 세부 사항을 알릴 수 없다.”

이것이 스물세 번째 모순이다.

4.26 루버와 사회민주당의 “관계”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2월 28일, 판데르루버가 자백에서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를 시인했다고 발표했다.

사회민주당 당 집행부는 2월 28일 성명을 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언론 전체가 14일 동안 금지되었다. 금지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체포된 한 남자가 국회의사당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그전에 사회민주당과 어떤 관계에 있었다고 자백했다는 주장이다. 사회민주당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자들과 무슨 관계라도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당은 거부한다.”

사회민주당 집행부의 이 성명은 제국법원 예심판사 포크트의 발표로 확인되었다. 이 발표는 1933년 3월 22일 공개되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국회의사당 건물 방화범으로 체포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판데르루버는 화재 직전 기간에 독일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외국 공산주의자들과도 연락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1926년 소피아 대성당 테러[49]로 사형 또는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은 자들도 있다. 해당 인물들은 구금되어 있다. 공산주의가 아닌 집단이 국회의사당 화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데 대해서는 조사에서 털끝만 한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2월 27일에 판데르루버는 사회민주당원들과의 관계를 시인했다고 했는데, 3월 22일에는 이 주장에 털끝만 한 근거도 없었다.

이것이 스물네 번째 모순이다.

4.27 판데르루버와 불가리아인들

앞에 인용한 제국법원 판사 포크트의 발표는, 판데르루버가 소피아 대성당 테러범들과 연락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판데르루버는 실업자 신고소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공산주의자들을 거쳐 이레 만에 독일 공산당 지도층과 연결되는 기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그 기간에 소피아 대성당 테러를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불가리아인들까지 찾아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것이 스물다섯 번째 모순이다.

체포되어 국회의사당 화재의 공범으로 고발된 불가리아인들의 이름은 디미트로프, 포포프, 타네프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3년 불가리아 노동계급의 봉기에 참가했다. 1923년 이후 그는 불가리아 땅을 다시 밟은 적이 없다. 그는 소피아 대성당 테러에 어떤 식으로도 가담하지 않았다.

블라고이 포포프는 1924년 10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고, 1930년 말에야 불가리아로 돌아왔다. 그 역시 1925년의 소피아 폭탄 테러에 가담하지 않았다.

체포된 세 번째 불가리아인 타네프는 불가리아 민족주의 정당에 속해 있다.[50] 그의 이름 역시 소피아 테러와 관련해 거론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국법원 예심판사 포크트도 이 사실들을 우리만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국회의사당 방화를 국제 공산주의 음모로 보이게 하려고, 디미트로프와 포포프와 타네프를 일부러 소피아 테러의 공범으로 내세운다.

이것이 스물여섯 번째 모순이다.

예심판사는 디미트로프가 2월 26일 오후 3시 뒤셀도르퍼 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판데르루버와 함께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심판사는 그날 루버가 디미트로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맹세한 여자 증인도 내세웠다. 그 증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슬그머니 사라졌다. 디미트로프가 2월 26일에 베를린이 아니라 뮌헨에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물일곱 번째 모순이다.

4.28 대형 공산주의자 재판을 위한 자료는 없다

제국법원 판사 포크트는 3월 27일까지만 해도 형사 구속영장은 지금까지 판데르루버에게만 발부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4월 3일에는 국회의사당 방화로 모두 다섯 건의 판사 구속영장, 곧 판데르루버, 불가리아 공산주의자 세 사람, 공산당 제국의회 의원 토르글러에 대한 구속영장이 나와 있다고 알리게 한다. 토르글러는 2월 28일에, 불가리아인들은 3월 3일에 체포되었다. 3월 27일까지, 곧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던 기간에는 토르글러와 불가리아인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없었다. 구속영장은 판데르루버에게만 형사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사실이 세계 언론에서 화제가 된 뒤에야 발부되었다.

이것이 스물여덟 번째 모순이다.

제국법원 판사 포크트의 4월 3일 발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 밖의 몇몇 혐의자에게는 당분간 보호 구금 명령만 내려져 있다.”

6월 2일에는 관영 발표가 나온다.

“… 국회의사당 방화 및 대역죄 혐의로 기소된 판데르루버, 토르글러, 디미트로프, 포포프, 타네프에 대한 제국법원 판사 포크트의 예심이 6월 1일 종결되었다. 기록 일체는 이제 라이프치히의 제국 검찰총장에게 송부되었다.”

4월 3일에는 아직 “그 밖의 몇몇 혐의자”가 있었다. 6월 1일에 그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스물아홉 번째 모순이다.

4월 22일 제국법원 판사 포크트는 수사 진행에 관해 다음과 같은 관영 보도를 퍼뜨리게 한다.

“제국법원은 공산당원들에 대해 계류 중인 수많은 대역죄 사건의 수사를 하나의 큰 통합 사건으로 묶을 계획이다. 8주에서 10주 안에 수사가 마무리되어 대역죄 사건 전체를 제국법원이 다룰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대상은 독일의 정권 교체와 관련된 모든 대역죄 사건, 곧 1월과 2월 기간의 모든 범죄다. 그렇게 되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이 아주 빠르지 못했던 것은 관련자들, 특히 체포된 불가리아인들이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제국의회 의원 토르글러가 가담했다는 혐의점은 짙어졌다.”

한 달 뒤인 5월 25일에는 대형 공산주의자 재판 이야기가 더는 나오지 않는다. 히틀러 정부는 한 의회 통신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소식을 퍼뜨리게 할 수밖에 없다.

“그 밖에, 때때로 주장되었듯이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이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해 계류 중인 다른 사건들과 묶여 하나의 대형 공산주의자 재판이 되리라고 볼 수는 없다. 판데르루버와 그 조력자들에 대한 공판은 필요한 준비 작업이 끝나는 대로 오히려 제국법원이 따로 진행할 것이다.”

이것이 서른 번째 모순이다.

히틀러의 공식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3월 3일 정부 소식통에게서 나온 다음 발표를 실었다.

“민족사회주의 제국의회 교섭단체의 공보 책임자는 공산당 의원 토르글러의 방 위쪽 유리 지붕에서 유리 한 장이 떼어진 것을 발견했고, 더 찾아본 끝에 그 위에서 큰 사다리 하나를 발견했다. 사다리는 3층에 있는 한 공산당 의원 방의 창문 아래 놓여 있었다. 형사 경감들이 곧바로 정밀 조사에 나섰다. 그러니 방화범들은 범행 전에 이곳으로 내려왔거나 범행 뒤에 이곳으로 빠져나갔음이 틀림없다.”

3월 1일 괴링은 방화범들이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괴링의 관저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로 달아났다고 주장했다. 이 말로 그는, 국회의사당 방화범들이 그의 관저를 거쳐 국회의사당에 들어갔다가 그의 관저를 거쳐 달아났다는, 많은 사람이 품고 있던 짐작을 확인해 준 셈이다. 괴링의 발표가 준 치명적인 인상을 누그러뜨리려고 민족사회주의 교섭단체의 공보 책임자를 내세웠고, 그가 갑자기 깨진 유리창과 사다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형사경찰은 사흘 동안 철저히 뒤지고도, 제국 공보 책임자의 날카로운 눈이 단번에 찾아낸 것을 놓쳤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서른한 번째 모순이다.

4.29 판데르루버는 요구받는 것을 자백한다

오버포렌 박사는 비망록에서, 괴벨스의 계획이 잇따른 방화를 일으키고 국회의사당 화재로 그 정점을 찍는 것이었다고 적는다. 방화에는 방화범이 필요하다. 판데르루버는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한다. 판데르루버는 2월 25일 베를린 궁성에 불을 지르려 했다고 자백한다. 신문들은 2월 27일 궁성 화재에 관해 이렇게 보도한다.

“이제야 알려진 바에 따르면, 토요일 베를린 궁성 6층의 한 사무실에서 작은 불이 났으나, 궁성에 배치된 소방관 한 사람이 주의 깊게 살핀 덕분에 금방 꺼졌다. 발화 원인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방화로 추정된다. 불이 나기 한 시간 전 관리인이 궁성 순찰을 시작했고 그 사무실도 지나갔다. 그때는 아직 수상한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 뒤 방 안에서 불이 났다. 알고 보니 창턱 위에, 그리고 창문 아래와 스팀 난방기 위에도 불붙은 숯 착화제가 놓여 있었다. 경찰 수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판데르루버는 2월 25일 노이쾰른 복지 사무소에 불을 지르려 했다고 자백한다. 판데르루버는 2월 25일 베를린 시청에 불을 지르려 했다고 자백한다.

이 판데르루버라는 자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하루에 베를린의 세 군데 다른 곳에 불을 지르다니! 게다가 이 사내는 독일어를 더듬더듬 한다. 그는 1933년 2월 18일에야 베를린에 왔다. 이레 뒤에는 벌써 궁성과 시청과 복지 사무소에 불을 지를 만큼 지리를 훤히 알았다. 국회의사당 건물을 제집처럼 드나들 만큼 알아 두는 데에는 고작 아흐레가 걸렸다.

판데르루버는 순종 “공산주의자”로 통해야 한다. 괴벨스 박사의 생각으로는 “공산주의자”에게는 위조 여권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판데르루버는 여권에 적힌 자기 이름을 고쳐야 한다. 그는 “u”를 “ü”로 만든다. 이렇게 점 두 개로 진짜 여권이 “위조” 여권이 된다.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 전단”을 기꺼이 국회의사당에 가지고 들어간다. 일찍이 어떤 범죄자도 이토록 “신분증명서”를 완벽히 갖추고 경찰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

4.30 국회의사당 화재 전날 밤 토르글러와 나눈 대화

에른스트 토르글러는 공산당 제국의회 교섭단체 의장으로서 신문사와 기자들의 문의에 답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는 2월 24일 공산당 제국의회 교섭단체의 기자 회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나치가 계획한 도발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그 자리의 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는 그때 무엇보다 히틀러 암살 기도를 꾸며 보이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전했다. 외국 언론 전체와 독일 언론 일부가 토르글러의 이 발언을 크게 실었다. 이 기자 회견이 있고 얼마 뒤, 《포시셰 차이퉁》의 의회 담당 기자 아돌프 필립스보른이 토르글러 의원에게,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비밀 책동과 계획에 관해 이야기할 만남을 청했다. 아돌프 필립스보른은 토르글러와 한 이 마지막 인터뷰를 1933년 7월 1일 자 《반격》[51]에 적었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필립스보른의 《반격》 기고를 길게 인용한다. 필자의 생몰을 확인할 수 없어 인용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필립스보른은 화재 하루 전인 2월 26일 포츠담 광장의 카페에서 열한 살 난 딸을 데리고 나온 토르글러를 만나 두 시간가량 정국을 이야기했다고 쓴다. 공산당이 선거 전에 무슨 행동을 꾸민다는 소문을 묻자, 토르글러는 그런 일은 정부가 기다리는 공산당 금지의 구실을 줄 뿐인 미친 짓이라고 답했다. 정치적 대중 파업은 요구하지만 노동조합이 함께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이 감시받고 도청당하는 줄 알기에 놓인 덫에 걸려들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공산주의의 반대자라고 밝힌 필립스보른은 토르글러가 진실을 말했다고 확신한다며 “토르글러에게서 손을 떼라, 그는 무죄다!”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필립스보른의 이 보고는 에른스트 토르글러의 무죄를 보여 주는 증거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제 발로 출두한 이 사람은 국회의사당 화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의 동지 쾨넨이나 체포된 불가리아인들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공산당이 수많은 성명으로 개인 테러에 반대하고 그것을 규탄해 왔음을 입증했다. 괴링 씨가 이제 토르글러와 쾨넨에게 풀어놓는 모든 “증인”은(쾨넨은 경찰 앞잡이들의 손을 빠져나가 반파시즘 투쟁을 이어 가고 있다), 돈을 받고 미리 꾸민 진술로 이 두 사람의 죄를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에른스트 토르글러, 빌헬름 쾨넨, 디미트로프, 포포프, 타네프는 판데르루버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독일 국회의사당의 방화범이 아니었다.

4.31 나치가 유죄라는 증거

히틀러 정부가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발표에서 빠져든 모순들만으로도 진짜 국회의사당 방화범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기에 이미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들을 넘어서, 국회의사당 화재에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유죄라는 직접 증거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증거를 모두 여기에 내놓지는 않는다.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것들만 이 책에 실었다.

독일 국회의사당의 불은 9시 16분에 발견되었다. 베를린의 대량 검거는 자정이 조금 지나 시작되었다. 거의 모든 구속영장에는 체포할 사람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영장 날짜는 잉크로 써넣었다. 2월 28일 베를린에서만 약 1500명이 체포되었다. 세 시간 안에 구속영장 1500장을 채워 넣고 서명하고 그 대부분에 사진을 붙일 수 있는가? 해고된 경찰관들의 제보가 이 날랜 솜씨를 설명해 준다. 구속영장은 국회의사당 화재 전 며칠 동안 준비되었다. 날짜만 비워 두었다. 2월 27일 아침에는 구속영장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영장들은 날짜를 써넣기 전에 이미 서명되어 있었다.

2월 22일 프로이센 정부는 보조 경찰로 경찰력을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보조 경찰관으로는 이른바 민족 단체들, 곧 돌격대와 철모단의 단원만 임명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보조 경찰관 임명을 행정구 장관이 승인해야 했지만, 내무장관 직무대리 괴링은 베를린의 보조 경찰관 임명권을 자신이 직접 쥐었다. 이 결정은 국회의사당 화재 이틀 전인 2월 25일에 공표되었다.

괴링은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첫 관영 발표에서, 자기가 단행한 보조 경찰 도입이 정당하고 근거 있는 조치였음이 증명되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과 장관들은 보조 경찰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2월 27일 베를린의 돌격대 전체가 숙소와 병영에 집결해 있었다. 3월 말 독일에서 도망쳐 나온 한 돌격대원은 파리의 《랭트랑지장》에 돌격대의 비상대기 상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2월 27일 낮에 우리는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숙소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리 지어 거리에 나서는 것은 엄금이었다. 모금함을 든 모금원들과 특별 명령을 받은 몇몇 사람만 외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 채 기다렸다. 그러다 갑자기 저녁 10시에 명령이 떨어졌다. ‘전원 구보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무기는 집에 두고! 차단 근무다.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다!’ 베를린 집단 지도자 에른스트[52]는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을 빌헬름 거리와 도로테엔 거리 모퉁이의 맥줏집에 불러 모았다. 그는 우리에게 여러 시구로 달려가 술집과 길모퉁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확실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 요컨대 이튿날 신문에 실린 모든 것을 — 퍼뜨리라고 맡겼다. 그 시각에는 판데르루버가 네덜란드인이라는 것도, 토르글러 의원이 마지막으로 국회의사당을 떠났다는 것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확정된 사실로, 그것도 얼마나 확신에 차서 전해 들었는지 모두가 방화범들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쏜살같이 달려 나가 불같은 열성으로 임무를 해치웠다. 내 이야기는 되풀이할수록 더 자세해졌고, 머지않아 나는 내가 방화를 직접 본 목격자라도 되는 것처럼 느꼈다.”

집단 지도자 에른스트는 히틀러 운동의 위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10시 몇 분 뒤에 벌써 토르글러가 마지막으로 국회의사당을 떠났다는 것을 알려면 집단 지도자의 지혜만으로는 모자란다. 집단 지도자 에른스트는 괴벨스와 괴링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돌격대원들을 “공산주의자” 방화의 전령으로 만드는 특별한 역할이 맡겨졌다.

4.32 히틀러가 제 입으로 드러내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탄다. 1933년 2월 27일, 선거전이 제국 전역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도 민족사회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은 베를린에 있다. 히틀러는 2월 27일 어느 집회에서도 연설하지 않는다. 괴벨스는 2월 27일 어느 집회에서도 연설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베를린에 있다. 둘 가운데 누구도 2월 27일 저녁에 회의도, 공무상의 모임도, 일도 없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신고되고 몇 분 뒤 괴링이, 그 직후 히틀러와 괴벨스가 화재 현장에 나타난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베를린 특파원 세프턴 델머[53]가 그들과 함께 있다. 파시스트 신문인 런던의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영국에서 몇 안 되는 히틀러 우호지 가운데 하나다. 세프턴 델머는 히틀러에게 각별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1933년 2월 28일 자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보도는 이날 나온 적대적 외국 신문들의 보도보다 히틀러에게 더 불리하다.

세프턴 델머는 화재 현장에서 보낸 보도에서 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것은 화재가 발견되고 20분에서 30분쯤 뒤에 벌어진 일일 수밖에 없다. 방금 화재 현장에 도착한 히틀러가 폰 파펜 부총리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신이 내린 신호입니다. 이제 아무도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쇠주먹으로 섬멸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델머를 돌아보며 히틀러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독일 역사의 위대한 새 시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불이 그 시작입니다.”

제3제국의 총리가 이 말을 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죄”가 아직 전혀 확인될 수 없었던 때, 판데르루버가 이제 막 통역의 도움을 받아 신문을 받기 시작했던 때였다. 체포 직후 판데르루버에게 시작된 신문은 신문들의 일치된 보도에 따르면 새벽까지 이어졌다. 판데르루버가 체포된 것은 저녁 9시 20분쯤이었다. 그러니 히틀러가 방금 인용한 말을 한 시각에 판데르루버는 아직 히틀러의 발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비난의 근거가 될 만한 “전면적 자백”을 했을 리가 없다.

히틀러는 자제력이 없어서 공산주의자들의 죄를 너무 일찍 입에 올렸다. 그는 제 신호를 기다리지 못했고, 그 네 문장을 예정보다 일찍 말해 버렸다.

히틀러는 1930년 제국재판소에서, 민족사회주의 운동에서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54] 이 주장은 적어도 국회의사당 방화에는 들어맞는다. 히틀러는 그 증거도, 그에 관한 진술도 가지고 있을 수 없었던 때에 공산주의자들을 국회의사당 방화범으로 몰았다. 여기서 히틀러가 괴링과 괴벨스의 계획을 알고 승인했다는 것 말고 무슨 다른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제3제국”의 총리는 방화범들의 공모자다.

4.33 동맹자가 나치를 방화범으로 고발하다

중공업의 신문인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1930년부터 히틀러에게 정부를 맡기라고 요구해 왔다. 중공업은 독일국가인민당과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독일국가인민당과 권력을 나누는 데 만족하리라는 환상에 기대고 있었다.

민족 정부의 첫 몇 주 만에 벌써 연립 정부 안의 심각한 대립이 드러났다. 오버포렌의 비망록에는 이 대립이 아주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독일국가인민당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애썼다. 이 신문은 민족 정부 초기에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정부 안에서 우세를 쥐게 되자, 괴링의 발표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죄에 의문을 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신문은 1933년 3월 2일 이렇게 썼다.

“정치적으로 보아 국회의사당 화재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단 하나다. 그런 범죄를 저지를 만큼 어리석은 공산주의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통일전선이라는 것은 몇몇 연설과 신문 기사와 발의 말고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그 통일전선이 하필이면 독일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있을 법하지 않다. 내무 담당 제국 판무관의 저 잘 알려진 발언의 전제들을 꼼꼼히 검증하면 이 비난이 성립할 수 없음이 드러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런 비난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신문의 보도가 아니다. 이것을 쓴 것은 중공업의 신문이다. 신사들은 제가 벌인 장난에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사는 오버포렌의 보고를 뒷받침한다. 너무 늦었다. 오버포렌은 살해되었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국회의사당 화재 몇 달 뒤 획일화되었다. 그 편집국장 프리츠 클라인 박사는 해임되었다. 후겐베르크마저 무대 뒤로 사라지기 얼마 전의 일이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보도에 담긴 은근한 위협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국가인민당의 해산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사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동맹자가 괴링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공산주의자들의 죄를 의심한다. 이것을 외교적이지 않은 말로 옮기면, 나치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4.34 괴링은 왜 국회의사당을 무방비로 두었는가?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2월 28일 발표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된 자료 가운데 국회의사당 방화 지시도 들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 수색은 1933년 2월 24일에 있었다. 부르주아 신문 전체가 이미 2월 24일과 25일에 공산주의자들의 이른바 살인 계획을 대서특필했다. 베를린 경찰청장은 2월 26일,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의 “카타콤”에서 발견되었다는 자료에 관해 괴링에게 보고했다. 괴링은 내무장관 직무대행으로서 프로이센 경찰을 지휘했다. 괴링은 제국의회 의장으로서 국회의사당의 관리 책임자였다. 그만큼 국회의사당을 습격에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렇게 할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괴링은 국회의사당 건물을 지키려고 경찰을 부르지도 않았고, 국회의사당 안에서 아무런 경비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되었다는 자료에 관한 발표가 사실이라면, 괴링 씨는 적어도 중대 범죄를 방조한 죄를 지은 셈이다. 괴링이 국회의사당을 지키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되었다는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의 자료는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의 보도 속에만 존재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를 의도도 없었고 그런 준비를 한 적도 없다. 반면에 괴링은 국회의사당이 불타 없어지도록 모든 것을 갖추어 놓았다.

4.35 괴링이 국회 직원들을 일찍 집으로 돌려보내다

괴링은 화재 당일 국회 직원들이 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에 국회의사당을 떠나도록 손을 쓰기도 했다. 2월 27일 민족사회주의자인 건물 관리 감독관은 근무 중인 직원들을 벌써 낮 1시에 퇴근시켰다. 직원들은 근무를 일찍 끝내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민족사회주의자인 건물 관리 감독관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그날 근무는 끝내라고 명령했다.

3월 중에 외국의 가장 큰 신문들이, 국회 직원들이 2월 27일 일찍 퇴근 조치되었다는 소식을 실었다. 히틀러 정부는 이 보도를 감히 부인하지 못했다.

4.36 겜프 소방 총감이 괴링을 고발하다

3월 24일, 베를린 소방대장인 베를린 소방 총감 겜프[55]가 자기 관할 안에서 공산주의 책동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일단 직무 정지되었다는 뜻밖의 발표가 나왔다. 겜프 소방 총감이 묵인했다는 공산주의 책동이란, 그가 소방대 감독관과 화재 지휘관들과의 회의에서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해 전문가로서 보고를 했고, 그 보고가 화재 현장에서 괴링이 보인 행동을 이상한 빛 속에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겜프의 보고는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겜프 씨는 물러나기 얼마 전 감독관과 화재 지휘관들과의 회의에서, 소방대에 출동 경보가 너무 늦게 내려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소방대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 20명쯤 되는 돌격대 분대가 이미 발화 지점에 와 있었던 것도 그래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겜프 씨는 또 프로이센 내무장관 직무대행 괴링이 즉시 최고 경보 단계를 발령하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소방 인력을 투입하는 것을 그에게 명시적으로 금지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끝으로 겜프 씨는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부서지지 않은 부분에 쓰이지 않은 방화 재료가 대량으로 널려 있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여러 방에, 장롱 밑과 안 따위에, 그것만으로도 트럭 한 대를 가득 채웠을 만한 양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옮긴 보도는 4월 25일 《자르브뤼커 폴크스슈티메》에 실렸고, 거기서부터 온 세계로 퍼졌다.

괴링은 《자르브뤼커 폴크스슈티메》의 보도에 그 주장들이 거짓이라는 성명으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빌미로 겜프에게 배임 혐의를 씌웠다. 1933년 4월 29일 자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괴링이 《폴크스슈티메》의 폭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려 준다.

“특임 국가 판무관 리페르트 박사[56]는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올해 3월 24일 특임 국가 판무관 리페르트 박사가 일단 직무 정지한 베를린 소방대장 겜프 소방 총감에게는 자기 관할 안에서 공산주의 책동을 묵인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어 있었다. 이에 겜프는 자신에 대한 징계 절차를 개시해 달라고 신청했다. 이 신청은 겜프에게 다른 비위 혐의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기각되었다. 이제 그가 당시 담당관이던 사회민주당 소속 시 참사관 아렌스에 의한 자동차 구입 건에서 형법 제266조에 따른 배임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그에 대한 징계 절차가 개시되었다.’”

거북한 적수를 형사 혐의로 쓰러뜨리는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이 수법은 겜프의 경우에만 쓰인 것이 아니다. 같은 혐의로 시의 소방 업무 담당관 아렌스 시 참사관도 체포되었다. 그 역시 소방대에 출동 경보가 너무 늦게 내려졌다고 비판했던 사람이다.

겜프가 괴링에게 제기한 고발을 보면, 괴링이 화재를 막는 데가 아니라 화재가 번지는 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국회의사당에서 불이 저지른 파괴는 될 수 있는 대로 크고 인상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불을 너무 일찍 꺼서는 안 되었다. 국회의사당 화재 사흘 뒤에 벌써 화재 현장이 일반인 관람에 개방되었다. 2월 27일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켰던 바로 그 민족사회주의자 건물 관리 감독관이 이제 파괴된 국회의사당 건물의 안내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수만 명씩 화재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안내인은 “전문가답게” 불이 어떻게 “공산주의자들” 손에 놓였는지 설명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에 관한 끔찍한 지어낸 이야기로 설명을 꾸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르브뤼커 폴크스슈티메》의 주장을 제 입으로 부인할 용기도 없었던 괴링은 겜프 소방 총감에게 부인 성명을 내도록 강요했다. 겜프 씨는 오랫동안 버틴 것으로 보인다. 벨, 하누센, 오버포렌이 이미 살해된 뒤인 1933년 6월 18일에야 겜프의 성명이 독일 신문들에 실렸는데, 그는 거기서 자르브뤼켄 《폴크스슈티메》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밝혔다. 부인된 보도가 옳다는 것을 오히려 확인해 주는 부인 성명이 있다. 겜프의 뒤늦은 부인 성명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신에게 제기된 고발의 압박 아래, 그를 위협하던 징역형이 두려워, 겜프는 괴링의 요구에 굴복했다.

4.37 이 습격의 장본인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하인리히 폰 글라이헨[57]이 펴내는 보수 주간지 《데어 링》 3월 둘째 호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국회의사당 화재는 제국 정부의 가장 강경한 대응 조치를 불러왔다. 관청들은 최고 경계 상태에 있다. 독일 여론과 사설들은 다시 이 물음으로 떠들썩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정말로 눈먼 닭들의 민족이란 말인가? 이 습격의 장본인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그 반작용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목표를 정확히 겨냥해 움직였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모든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확인해 둔다. 우리에게는 영국인과 다른 민족들이 가진 것 같은 정보기관이 없다… 우리에게 그런 기관이 있었다면, 국회의사당 화재의 장본인들을 어느 방향에서 찾아야 하는지 오늘 이미 아주 정확히 알 것이고, 아니, 실제 인물들까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독일 또는 국제 상류 사회의 일원일지도 모른다.”

하인리히 폰 글라이헨은 “신사 클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원 가운데 하나다. 파펜이 총리가 된 뒤로 폰 글라이헨은 정부 정책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 관저와의 관계는 아주 좋다는 말로도 모자란다. 우리가 인용한 《데어 링》의 글에서 폰 글라이헨은 히틀러 정부가 국회의사당 화재를 규명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그는 습격의 장본인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 반작용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목표를 정확히 겨냥해 움직였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의 거점을 하나하나 정확히 손에 넣으려고 불을 질렀다는 뜻 말고 달리 무슨 뜻일 수 있겠는가?

《데어 링》은 이 글이 나간 뒤 발행 금지되었다.

4.38 벨 박사가 비밀을 누설하다

갈색 살인을 다룬 우리 장에서 벨 박사 사건과 그가 돌격대 손에 죽은 경위를 자세히 서술했다. 여기서는 국회의사당 화재에서 벨이 한 역할만 다룬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벨 박사가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화재 한 시간 전에 이미 몇몇 영국과 미국 기자들에게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다고 알렸다고 주장하는 보도들은 쓰지 않겠다. 이 소문은 히틀러 정부가 계획적으로 퍼뜨린 것이다. 나치는 손쉽게 부인 성명을 낼 구실을 마련하고, 그렇게 해서 벨의 진짜 주장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 했다.

벨 박사는 판데르루버를 아주 잘 알았고, 판데르루버가 베를린과 뮌헨에서 돌격대 쪽 사람들과 맺은 관계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벨 박사는 1년쯤 전부터 민족사회주의당 지도부와 대립하고 있었지만, 민족사회주의당 안에 아직 연락원이 많았다. 그들을 통해 그는 국회의사당 화재 때 벌어진 일을 알았다. 벨은 1933년 3월 3일인가 4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거리의 민족 클럽에서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해 아는 것을 한 인민당 정치인에게 털어놓았다. 이 정치인은 몇몇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벨이 들려준 진짜 방화범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 편지 가운데 하나가 비밀 국가경찰 책임자 달뤼게[58]의 손에 들어갔다.

그 편지가 벨의 목숨을 앗아 갔다. 4월 3일 그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쿠프슈타인에서 뮌헨에서 온 돌격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4.39 하누센 살해

하누센 살해 이야기도 다른 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는 하누센이 국회의사당 화재와 관련이 있는 한에서만 그를 이야기한다. 투시가 에리크 하누센[59]은 국회의사당 화재 하루 전, 베를린의 새 집(리첸부르거 거리 16번지)에서 집들이를 했는데, 그는 그 집을 “오컬트 궁전”이라고 불렀다. 집들이 잔치에는 헬도르프 백작을 비롯한 몇몇 돌격대 지도자들과 예술가, 배우, 기자들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에는 《12시 신문》의 기자도 있었다. 하누센은 이 잔치에서 연 투시 강령회에서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 “큰 집이 불타는 것이 보인다.”

하누센은 자기 주간지 《하누센의 다채로운 주간 화보》 3월 첫째 호에 정치 정세에 관한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 되었다고 썼다.

하누센의 가장 친한 친구인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헬도르프 백작은 국회의사당 방화범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누센은 국회의사당 화재 전에 헬도르프에게서 정보를 얻었고, 그 덕분에 “투시”를 할 수 있었다. 하누센은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우리가 《12시 신문》의 전 편집국장 프란츠 횔레링 박사[60]에게서 받은 선서 진술서에서 드러난다.

신문 편집국들에 국회의사당 화재에 관한 첫 막연한 소식이 막 들어오던 때에, 하누센은 벌써 국회의사당 화재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며 심각한 결과를 낳으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누센의 이 발언은 그에게 정보를 준 자를 돌격대 고위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유대인 하누센은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히틀러의 지배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1933년 4월 7일 그의 주검이 바루트에서 노이호프로 가는 국도 옆 작은 전나무 조림지에서 발견되었다.

하누센은 나치의 손에 죽었다.

4.40 오버포렌 박사가 살해되다

벨 다음에 하누센, 하누센 다음에 오버포렌 박사. 국회의사당 화재의 비밀을 정확히 알고 있던 이 세 사람 가운데 오버포렌 박사가 가장 위험했다. 벨은 정치 모험가로, 하누센은 사기꾼으로 치워 버릴 수 있었다. 오버포렌 박사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 독일국가인민당 제국의회 원내 교섭단체의 지도자였다. 1933년 2월만 해도 그는 선거 연설에서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히틀러 정부는 지금의 구성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었다. 오버포렌 박사는 골수 반동이었다. 그의 비망록을 보면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직 독일국가인민당의 권력 거점을 지키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망록의 마지막 부분은 제국 정부 안에서 벌어진 싸움의 마지막 국면을 보여 준다. 그 비망록이 오버포렌 박사의 목숨을 앗아 갔다!

독일국가인민당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강경한 조치에는 찬성하지만, 연립 동지들의 방화는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화요일 각료 회의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그리고 일부는 사회민주당원들에 대한 가장 강경한 조치에 동의가 이루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방화가 외국에서 민족 전선의 위신을 더없이 크게 해치리라는 데에는 조금의 의심도 남기지 않았다. 이 각료 회의에서는 규탄하는 데 가장 날카로운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민족사회주의 장관들은 공산당 금지를 밀어붙이는 데 실패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독일국가인민당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얻지 못하게 하려면 공산당 의원들이 필요했다. 각료 회의에서는 동시에 괴링 씨에게,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에서 발견했다는 위조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했다. 이 조잡한 위조 문서들을 공개하면 정부에 더 큰 짐만 지우게 되리라는 지적이 나왔다. 공산당 의원이자 공산당 제국의회 원내 교섭단체 의장인 토르글러가 화요일 아침 경찰에 출두한 것도 정부로서는 특히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도망쳤더라면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그런 범죄 혐의를 받은 그가, 수천 명의 공산당 간부가 체포되고 즉결 군사재판이 닥쳐오는 가운데, 자기 당에 대한 혐의에 맞서려고 경찰에 출두했다는 사실은 정부에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괴링 씨는 토르글러 의원이 자진 출두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국회의사당 화재 뒤 세계 언론의 반응은 뜻밖에도 한목소리여서, 민족 정부의 위신은 크게 흔들렸다. 괴링과 괴벨스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선거 선전이 멈춘 것을 반겼고, 소시민·사무직·농민의 광범한 대중이 국회의사당 화재의 풍문을 믿고 그에 따라 볼셰비즘에 맞서는 투사인 NSDAP에 표를 던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들은 내각에서 독일국가인민당 장관들이 취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공산당 금지는 이번에도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끝없는 요구를 품은 채 독일국가인민당과 철모단과 국방군의 쇠 같은 포위에 갇혀 있다고 느끼며 분통을 터뜨렸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포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분명해졌다. 이리저리 의논이 오갔다. 마침내 그 무리들은 3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에 폭력적 일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정부 청사 구역을 점령하고 폰 힌덴부르크에게 정부 개편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폰 힌덴부르크는 제국 대통령직의 대행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넘기고, 같은 순간 아돌프 히틀러가 괴링을 제국 총리로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의논은 이 행동을 경우에 따라서는 3월 3일 금요일, 돌격대와 친위대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경의를 바치는 행사를 겸해 베를린을 관통하는 대규모 선전 행진 때 실행하자는 쪽으로도 나아갔다. 이 대규모 선전 행진은 이제 온갖 수단을 다해 준비되었다. 이미 지방의 돌격대 부대가 많이 시내에 들어와 있었고, 개선 행진이 지나갈 거리는 경찰이 경비를 섰고, 교통은 우회되었고, 수천 명이 빌헬름 거리에서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앞을 지나는 분열 행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행진 때 정부 청사 구역을 점령하리라는 소문이 짙어지자, 독일국가인민당 장관들이 마지막 순간에 아돌프 히틀러가 빌헬름 거리 분열 행진을 포기하도록 관철했다. 빌헬름 거리의 수천 명은 돌격대 행렬이 다른 길로 가서 빌헬름 거리를 지나지 않고 프린츠알브레히트 거리를 거쳐 서쪽으로 빠진다는 뜻밖의 통보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그 대신 독일국가인민당도 자기 쪽에서 철모단이 정부 청사 구역을 지나 행진하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철모단의 이 행진은 선거 날 힌덴부르크에게 경의를 바치는 행진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철모단 지도자들은 이 변경에 동의했다.

독일국가인민당 장관들의 처지는 극도로 심각했다. 리페데트몰트 선거 결과[61]는 독일국가인민당 유권자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민족사회주의자들 쪽으로 넘어갈 위험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었다. 게다가 독일국가인민당의 선전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의 거침없는 선전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신사 클럽, 철모단 주변의 무리들, 독일국가인민당 지도자들이 의논했다. 금요일 오후 정부 청사 구역 점령을 간신히 막아 낸 뒤, 3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에 닥쳐올 위험에는 국방군과 철모단만으로 대비할 수는 없었다. 대중이 이제 늙은 원수가 아니라 자기들의 우상 아돌프 히틀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대중과 이 대중의 분위기에 맞서 무기만 들이대는 것은 헛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괴링과 괴벨스가 국회의사당 화재 때 그랬던 것만큼 거리낌 없이 나아가야 했다. 다음과 같은 계획이 정해졌다. 여론에 방화범 수사의 지금까지의 결과에 관한 공식 발표를 내놓는다. 이 발표는 필요할 때 언제든 그것을 가리키며, 이미 그때 민족사회주의자 범인들의 꼬리를 잡고 있었다고 확인할 수 있도록 작성한다. 그런 공식 발표는 민족사회주의 장관들이 정말로 정부 청사 구역 점령 계획을 밀어붙이려 할 경우, 3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에 그들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민족사회주의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될 수 있으면 독일국가인민당이 이끄는 민족 전선과 힌덴부르크 편으로 끌어오려 했다. 그에 맞추어 민족적 독일을 향한 호소문도 준비되었다. 거기서 힌덴부르크는 폭력적 권력 장악 계획을 폭로하고, 앞서 발표된 공식 성명을 들어 괴링과 히틀러와 괴벨스를 방화범으로 고발하고, 수백만 민족사회주의자에게 마르크스주의에 맞서는 민족 전선을 구하기 위해 한 덩어리가 되어 원수의 지도 아래 서라고 촉구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민족적 대중이 원수가 이끄는 군사 독재를 지지할 태세를 갖추게 하려 했다. 원수 자신은 철모단의 경축 행진에 나가지 않고,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을 시외에서 국방군의 보호를 받으며 보내고, 국방군은 출동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게 되어 있었다.

4.41 페메 살인자 – 방화범

브레슬라우 경찰청장의 집무실에는 젊은이 다섯이 찍힌 액자에 든 큰 사진이 놓여 있다. 이 젊은이 다섯은 1932년 슐레지엔의 포템파 마을에서 폴란드인 노동자 한 사람을 범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짐승같이 살해했다.[62] 법원은 살인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파펜 총리는 그들의 감형을 받아 냈으며, 히틀러 총리는 그들에게 다시 자유를 주었다. 그들의 사진이 브레슬라우 경찰청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포템파의 살인자들과 경찰청장 에트문트 하이네스는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한다. 그 역시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역시 사면되었고, 그 역시 감옥에 오래 있지 않았다. 하이네스 중위는 히틀러의 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괴링이나 폰 에프 장군과 똑같이 돌격대 상급 집단 지도자다. 오버포렌 박사는 비망록에서 하이네스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그 무리의 지휘자였음을 입증했다.

오버포렌은 비망록에 이렇게 썼다.

“그사이 괴링 씨의 하수인들은 슐레지엔 돌격대 지휘관인 제국의회 의원 하이네스의 지휘 아래, 제국의회 의장 관저에서 난방 통로를 지나 지하 통로를 거쳐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엄선된 돌격대·친위대 지휘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디서 손을 써야 할지 정확히 지정되어 있었다. 전날 예행연습이 있었다. 판데르루버는 다섯째나 여섯째로 갔다. 국회의사당 안의 감시조가 이상 없다고 알리자, 방화범들은 일에 착수했다. 불을 지르는 일은 몇 분 만에 끝났다. 일을 마친 그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판데르루버만 홀로 국회의사당 건물에 남았다.”

하이네스가 방화조의 지휘자였다는 오버포렌 박사의 주장은 다른 내막을 아는 사람들도 확인해 준다. 무엇보다 벨 박사는 친구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마지막 소식에서, 방화조의 지휘가 하이네스 손에 있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이네스는 이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이네스는 용병 기질의 사내다. 그는 명령을 받으면 죽이고, 명령을 받으면 쏘고, 명령을 받으면 불을 지른다.

4.42 방화범들의 전략 거점

나치의 관청 보도에 담긴 모순들을 폭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우리가 제시한 정황 증거로, 국회의사당 화재에 대한 나치의 죄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증거들이 없다 하더라도, 괴링의 도구들이 도발을 더 꼼꼼히 준비했다 하더라도, 나치가 불을 질렀다는 결정적 증거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증거를 이야기하겠다.

1933년 3월 1일 자 《포시셰 차이퉁》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이렇게 보도했다.

“공산당 제국의회 원내 교섭단체 의장 토르글러 의원이 방화범과 함께 몇 시간 동안 국회의사당 건물에 머물렀고, 방화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한다. 덧붙여, 다른 범인들은 국회의사당 건물 자체와 제국의회 의장 관저를 잇는, 국회의사당 난방 설비와 연결된 지하 통로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장 첫머리에서 보였듯이,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제국의회 의장 관저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는 실제로 있다. 국회의사당 화재 당시 이 직책을 맡고, 지하 통로가 이어지는 이 집에 살던 사람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범인들이 빠져나간 바로 그 집에 산다.

헤르만 괴링은 프로이센 총리이자 경찰 장관이자 제국의회 의장일 뿐만이 아니다. 헤르만 괴링은 동시에 돌격대 상급 집단 지도자다. 헤르만 괴링은 돌격대의 특별 중대인 G 중대를 마음대로 부린다. 그의 집은 적어도 30명으로 이루어진 경호대가 늘 지키고 있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방화 재료를 나르는 데 적어도 일곱 명이 필요했고, 불을 놓는 일은 열 명이 맡았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이 관청 발표를 받아들인다 해도, 적어도 열 명이 국회의사당 방화에 직접 가담한 셈이다.

독일 국회의사당에서는 건물 곳곳의 여러 군데에 수많은 발화점이 놓였다고 보아도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큰 건물에서 불이 그토록 빨리 번진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많은 발화점에는 방화 재료가 대량으로 필요했다. 방화 재료의 무게는 몇 첸트너는 되었음이 틀림없다. 겜프 소방 총감은 화재 감독관과 화재 지휘관들 앞에서 한 전문가 보고에서, 화재 뒤에도 타지 않은 방화 재료를 대량으로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재료를 실어 내는 데 트럭 한 대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겜프의 이 발언은 방화범들이 방화 재료를 대량으로 국회의사당 안에 들여왔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4.43 방화 재료는 어떻게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왔는가?

우리는 이 장 첫머리에서, 방문객이 독일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려면 넘어야 하는 어려움을 서술했다. 방문객이 국회의사당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5번 출입구뿐이다. 그는 여러 국회 직원 앞을 지나야 한다. 국회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일곱에서 열 명의 사내가 방화 재료를 몇 첸트너씩 국회의사당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접수 직원 단 한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무리 편파적인 사람이라도, 어떤 방화범도, 어떤 방화범 무리도 감히 방화 재료를 5번 출입구로 나를 수는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의원 출입구인 2번 출입구도 마찬가지다. 2번 출입구로는 제국의회 의원들만 드나들 수 있다. 2번 출입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제국의회 의원들이 방화 재료를 몇 첸트너씩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여왔다는 생각은, 방화 재료가 5번 출입구로 국회의사당 안에 운반되었다는 생각 못지않게 터무니없다.

그러므로 방화범들은 다른 길을 골라야 했다. 근무 중인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고 들키지 않은 채 국회의사당에 들어가 방화 재료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비밀 통로 말이다.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비밀 통로는 단 하나뿐이다. 제국의회 의장 관저와 국회의사당 건물을 잇는 지하 통로다. 지하 통로가 방화조의 전략적 진격로였다.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지하 통로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먼저 괴링의 집, 제국의회 의장 관저를 지나야 한다. 그러니 그는 괴링의 집을 늘 지키는 경호대 앞을 지나야 한다. 게다가 그는 괴링의 집에 사는 사람 누군가의 눈에 띌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경호대(30명이다!)에게 제지당하고 체포되지 않고 괴링의 집을 가로질러 지하 통로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자들이 경호대에게 제지당하고 체포되지 않고 괴링의 집을 가로질러 방화 재료를 몇 첸트너씩 나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자들이 괴링의 집을 거쳐 달아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2월의 그 무렵 괴링의 집에 발을 들이려 한 공산주의자는 누구든 체포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로서는 괴링의 집을 거쳐 지하 통로를 지나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능했는가?

경호대의 털끝만 한 의심도 사지 않고 가장 눈에 띄지 않게 괴링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뿐이었다. 이 집에서는 괴링과 민족사회주의 최고위 간부들 사이에 많은 회의가 열렸다. 어느 돌격대원도, 자기 당에서 높은 자리에 있고 괴링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자주 본 사람들을 막아 세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고위 돌격대 간부들에게 해당한다. 그들은 경호대의 “상관”으로서 괴링의 집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방화 재료를 조금씩 아무 어려움 없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괴링의 집에 들여올 수 있었다. “서류”라고, 아니 “무기”라고 적힌 상자 여러 개가 집 지하실에 쌓인다 해도 경호대 눈에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그 무렵 나치 진영에서는 어디서나 무기 운반이 일상이었다).

괴링의 집은 국회의사당 공격의 요충지였다. 괴링의 집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국회의사당 건물을 상대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괴링의 집은 방화조가 돌격에 나선 교두보였다. 괴링의 집은 그들의 방화 재료 창고였다. 괴링의 집은 일을 마친 그들이 달아나 숨을 수 있는 안전한 항구였다.

4.44 방화조

앞에서 말했듯이, 의심을 사지 않고 괴링의 관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돌격대 지휘관들뿐이었다. 오버포렌[63]도 비망록에서 엄선된 돌격대·친위대 지휘관들을 이야기한다. 분명한 일이다. 국회의사당 방화 계획을 꾸미고 조직한 민족사회주의 지도부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친위병들에게 계획의 실행을 맡겨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괴벨스와 괴링은 아무 돌격대 중대에나 제 운명을 맡길 수 없었다. 괴벨스와 괴링은 불만을 품은 돌격대원 하나가 진짜 방화범들을 배신할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괴벨스와 괴링은 최고위 간부들 가운데서 조력자를 찾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범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저지른 숱한 범죄로 민족사회주의 지도부와 그 운명에 단단히 묶여 있어 배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내들을 찾아내야 했다. 민족사회주의 지도부에는 이 조건을 갖춘 사내들이 넘쳐난다. 그들 가운데에는 하이네스 중위와 슐츠[64] 중위 같은 페메(비밀 처형) 살인자, 라이 박사와 카우프만 같은 형사범, 헬도르프 백작 같은 타락하고 도착된 귀족이 있다. 생존과 목숨이 나치 지도부에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여 있는 이 무리 가운데서 방화조가 꾸려졌다. 오버포렌의 보고로 우리가 알듯이, 지휘는 페메 살인자 하이네스가 맡았다. 그의 첫째 조수는 페메 살인자 슐츠였고, 그의 지휘 아래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헬도르프 백작이 일했다.

4.45 방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다음에 싣는 한 형사 전문가의 도식은 방화의 첫 단계를 보여 준다.[65] 방화조는 괴링의 관저에 모였다. 하이네스, 슐츠, 헬도르프와 나머지는 괴링의 경호대를 아무 제지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경호대는 그들을 돌격대 지휘관으로 알고 있었다. 판데르루버는 아마 헬도르프 백작과 함께 괴링의 관저에 왔을 것이다.

이제 방화조가 처리해야 할 첫 과제는 방화 재료를 나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방화범들은 괴링의 관저에서 국회의사당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이용했다. 아마 그 길을 여러 번 오가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떠났다고 알리는 약속된 신호에 맞춰 일을 시작했다. 근무 중인 의사당 직원들에게 들킬 위험은 없었다. 민족사회주의자인 건물 관리 감독관이 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에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방화 재료를 여러 곳에 나누어 놓고, 불붙기 쉬운 재료에 석유와 벤진 따위를 끼얹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적어도 20분은. 그런 다음 발화점들에 불을 붙였다.

경찰과 소방대의 첫 보고들은 방화범이 일곱에서 열 명이고 발화점이 여럿이라고 했다. 방화범들이 보통의 길로 국회의사당에 들어왔다가 보통의 길로 달아났다고 믿는 사람은 독일에 아무도 없었다. 방화범들이 어떻게 빠져나갔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 신문 기사 하나하나가 언제든 뜻밖의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괴링은 극도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낡은 수법을 꺼내 들었다. 다른 누군가가 방화범들이 지하 통로로 달아났다고 말하기 전에 괴링 자신이 먼저 말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닥쳐오는 위험을 막고, 몹시 수상쩍은 일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보이게 하려 했다. 괴링 자신이 방화범들이 지하 통로로 빠져나갔다고 입 밖에 냈다. 그는 이 발언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수법은 실패했다. 그 뒤로 장관 연설에서도, 공식 보고서에서도 괴링의 관저로 이어지는 이 지하 통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괴링의 발언은 잊혀야 했다.

우리는 그 발언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 방화범들은 지하 통로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그 통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괴링의 관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괴링의 관저란 그들에게 곧 안전을 뜻했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2월 28일, 방화범들이 그곳 지리를 훤히 알고 있었다고 썼다. 그곳 지리를 훤히 익히고 지하 통로를 구석구석 살피고 연구하기가 제국의회 의장 괴링의 친구들보다 더 쉬운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그는 국회의사당의 주인이었다. 그는 설계도를 펴 놓고 친구들에게 구석구석을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는 제국의회 의장 관저의 주인이었다. 그는 친구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 방화 재료를 숨기고 쌓아 둘 곳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프로이센 내무장관이었다. 그는 프로이센 전역의 경찰권을 쥐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방화를 준비할 모든 수단이 괴링의 손에 모여 있었다.

4.46 불타는 국회의사당 안의 판데르루버

프로이센 공보처는 판데르루버가 그곳 지리를 전혀 몰라서 달아나지 못했다고 여론을 속이려 했다. 프로이센 공보처와 괴링의 말대로라면 판데르루버의 다른 조력자들은 모두 그곳 지리에 밝았다. 그렇다면 판데르루버를 데리고 나가 “구해” 주기는 그들에게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데르루버는 “구해”져서는 안 되었다. 판데르루버는 방화조에 끼어 함께 행진한 동성애자 돌격대 지휘관들이 이 일의 도구로 추천한 자였다. 방화 현장에서 그라는 인물이 공산주의를 대표하게 되어 있었다. 허영심 많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 안달하는, 반쯤 눈먼 이 도구에게 그가 “큰 역할”에 뽑혔다고 납득시키기는 쉬웠다. 판데르루버는 불타는 국회의사당에 남겨져야 했고, 실제로 남겨졌다. 그가 공산주의자들을 옭아맬 증거물이었기 때문이다. 판데르루버는 할 수 있는 만큼 자기 역할을 해냈다. 그는 불타는 국회의사당에서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방화범”의 “진짜” 모습을 연출하려고 셔츠와 웃옷을 벗어 던졌다. 그는 국회의사당 방화를 자백했다. 그는 바라는 대로 어떤 방화든 자백했다. 노이쾰른 복지청, 베를린 시청, 베를린 왕궁의 방화까지. 그리고 판데르루버는 앞으로도 배후의 지시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백할 것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지시자들이 시키는 대로 토르글러에게 불리한 진술을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는 바라는 대로 디미트로프에게 불리한 진술을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이 파멸시키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죄를 씌울 것이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이 감싸려는 사람이면 누구의 죄든 벗겨 줄 것이다.

4.47 헤르만 괴링

판데르루버가 아무리 자백을 해도, 그에게 맡겨진 둘째 임무가 실패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임무란 그가 앞에 나섬으로써, 그가 선선히 자백함으로써 진짜 방화범들을 세상의 눈에서 가리는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판데르루버”라는 인물은 너무 보잘것없었고, 그의 역할은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다. 세상은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다. 세상은 누가 그 뒤에 숨어 있는지 알아차렸다. 세상은 보았다. 헤르만 괴링 대위를. 돌격대 상급 집단 지도자, 독일제국 장관, 프로이센 총리 겸 내무장관, 독일 제국의회 의장을.

괴링 대위는 『제국의회 편람』에 자기 약력을 내놓았다. 그것은 훈장의 역사다. 이 사람의 삶에는 훈장 수여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하다. 그와 같은 옛 장교 출신인 그의 가까운 친구들조차 『제국의회 편람』에 실린 약력에서 자기 훈장 이야기는 빼 버렸다. 헤르만 괴링만이 훈장을 모조리 늘어놓았다.

괴링 대위는 1893년 1월 12일 바이에른의 로젠하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약력을 보지 않고도, 그가 유년 사관학교에서 길러졌다는 것은 한순간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괴링의 “전기 작가들”은 전쟁 때 전투기 조종사로서 그가 세운 무훈을 즐겨 이야기한다. 그들은 괴링이 모르핀에 취한 채 전투 비행을 했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는다. 모르핀 주사기는 그의 변함없는 길동무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괴링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1924~1925년에 로마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들은 그가 1923년 히틀러 폭동이 실패하자 독일에서 도망쳤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는다. “세계대전의 영웅”, “구름을 휘젓는 용사”는 몇 달의 성채 금고형[66]이 닥쳐오자 탈주했다. 그는 독일 안팎에서 목숨을 걸고 히틀러 파시즘과 싸우는 독일 노동자 지도자들처럼 죽음의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괴링은 가벼운 성채 금고형 앞에서 탈주했다.

그의 “전기 작가들”은 괴링이 1925~1926년에 스톡홀름에 있으면서 그곳의 한 항공사에서 일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스톡홀름 경찰청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헤르만 괴링이 1925년 한 의사에게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아 랑브로 요양원에 수용되었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는다. 그는 나중에 스톡홀름 근교의 콘라드스베리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보인 행동 때문에 다시 랑브로로 이송되어 감금되어야 했다. 직원들이 그를 감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립 요양원에서는 더는 그를 돌볼 수 없었다. 랑브로에서도 그가 어찌나 심하게 광란 발작을 일으켰던지 중증 환자 병동으로 옮겨야 했다.

우리는 도판 부분에 괴링이 랑브로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실을 알려 주는 색인 카드를 싣는다. 괴링이 아무리 부인하고, 이 소식을 실은 신문들을 상대로 스웨덴 정부를 통해 아무리 소송을 걸게 해도 헛일일 것이다. 『갈색책』은 괴링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는 반박할 수 없는 문서 증거를 공개한다.

괴링의 “전기 작가들”은 카린 폰 포크와 그의 결혼을 즐겨 이야기한다. 그녀는 첫 결혼에서 스웨덴의 칸초브 대위와 부부였다.[67] 이혼 뒤 전남편과 전처는 아들 토마스의 후견권을 두고 소송을 벌였다. 1926년 4월 22일 열린 공판 가운데 하나에서, 법의 카를 A. 룬드베리의 감정서가 법원에 제출되었다. 우리는 이 감정서를 도판 부분에 싣는다. 이 감정서에는 괴링이 중증 모르핀 중독자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그러니 괴링의 모르핀 중독은 법원이 공인한 사실이다. 법원은 괴링을 소년 토마스의 후견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결정했다. 민족사회주의는 모르핀 중독자 괴링에게 6000만 독일인의 후견을 맡겼다.

1933년 3월 10일 괴링은 에센에서 연설을 했는데, 거기서 그는 무엇보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신경줄을 놓친 적이 없다.” 그는 이 얼버무리는 대답으로 자기 신경 상태에 관한 외국 신문들의 보도를 잠재우기를 바랐다. 그는 그때 자기 신경 상태, 정신 이상, 모르핀 중독에 관한 문서 증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은 괴링의 사생활에서 선정적인 세부를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은 민족사회주의가 어떤 사내들에게 권력을 쥐여 주었는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제3제국”에서 아돌프 히틀러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사람은 이름난 모르핀 중독자, 스웨덴 법원이 후견 능력을 부정한 자, 정신 이상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던 인간이다.

바로 이 괴링이 제3제국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는 1918년부터 쉬지 않고 권력을 노려 온 옛 프로이센 장교단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다. 그에게는 요 몇 달 동안 수천 건의 살인과 수만 건의 잔인하고 끔찍한 학대를 낳은 장교들의 가학성이 구현되어 있다. 그에게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하고, 헝가리에서 피의 강물을 흘리고, 핀란드에서 백색 교수대를 세우고,[68] 히틀러 독일 전체를 갈색 지옥으로 만든 저 장교 패거리가 구현되어 있다.

괴링에게는 민족사회주의 정치의 본뜻이 구현되어 있다. 민족사회주의가 대변하는 것은 노동자도, 사무직원도, 중간 계층도 아니다. 민족사회주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지배자 신분의 이익을 대변한다. 민족사회주의가 정치권력을 손에 넣은 것은 기존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밀려드는 사회혁명의 힘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가 안에서 제게 주어진 녹봉 자리를 지키기 위해, 민족사회주의는 최고위 간부들을 옛 장교단과 귀족과 고위 관료층에서 데려왔다. 끝까지 잔인하고, 끝까지 거짓되고, 끝까지 비겁한 이 괴링 대위가 민족사회주의의 참얼굴을 하고 있다.

이 괴링 대위가 국회의사당 방화의 조직자다. 그의 당 동지 괴벨스가 계획을 고안했고, 괴링이 그것을 실행했다. 그의 손에 모든 가능성이 모여 있었다. 그의 손에 필요한 모든 권력이 주어져 있었다. 그의 손에서 모든 실마리가 하나로 모였다. 모르핀 중독자 괴링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5 합법 노동자 조직의 파괴

“이제 결산의 시간이 왔다. 우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결론을 끌어낼 것이다. 이 결산이 자연스럽지 않은 끝을 맞을 수도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지지 마라. 혁명의 끝은 11월 범죄자들의 끝이요, 이 체제의 끝이요, 이 시대의 끝이다! 우리는 이자들을 마지막 은신처까지 쫓아갈 것이며, 이 독이 우리 민족체에서 남김없이 제거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1933년 5월 7일 킬에서 히틀러)

히틀러는 이미 저서 『나의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근절을 민족사회주의자들의 결정적 강령 항목으로 선포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가르침에 대한 죽음의 증오를 설교했다. 그는 노동계급의 80년에 걸친 경험과 이념과 조직을 피와 쇠로 독일의 삶에서 뿌리 뽑으려 한다.

왜 히틀러 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 노동조합, 소비조합, 스포츠·문화 조직을 온갖 수단을 다해 파괴하고 근절하려 들 수밖에 없는가? 히틀러 파시즘은 노동자의 신문이 계속 나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파업도, 경제 투쟁 운동도, 자주적인 문화 활동도, 노동자의 정치적 자유 의지도 용납할 수 없다. 이것들을 억누르는 일은 히틀러 파시즘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다. 지배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단으로는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 권력을 파시즘을 통해 폭력적이고 독재적으로 유지하려 한다. 우리는 이 책의 뒤 장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독일 현대 노동운동의 조직들과 지도 간부들을 섬멸하려고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비열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얼마나 끔찍한 학대와 고문과 감옥의 만행을 거듭했는지를.

공황의 궁핍과 절망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던 수백만 명이 히틀러에게 갔다. 그들은 사회적·민족적 해방을 믿고 바라며 그에게 왔다. 그들은 자기들이 반동의 길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운동, 그들의 반자본주의적 증오, 갈색 부대들 속에 뭉친 그들의 힘이 히틀러와 괴링 같은 자들의 주먹에 쥐인 도끼가 되어 노동자 조직들 위로 내리찍히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폭력의 방법에 사회적 기만을 교묘하게 짝지우는 것은 파시즘의 본질에 속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군 조직들의 폐허 위에 갈고리십자가 깃발을 단, 겉보기에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새 조직들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모든 직업 계층의 신분 조직을 “전체 국가”, 곧 절대적 파시즘 독재 국가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괴벨스 씨의 선전부는 요란한 말로 “노동의 새 귀족”을 찬양하지만, 독일의 사업장들에서는 낡은 착취 관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새로운 사이비 노동자 조직들은 독재 정권의 보조 부대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나치 지도자들이 이따금 늘어놓는 반자본주의적 말투를 그들 정책의 본질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치가 몇몇 소기업가들의 “부패”를 들추어냈다고 해서 속아서는 안 된다. 1933년 6월 10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전선”의 지도자 라이 박사가 「신분제 편성과 독일 노동전선에 관한 기본 구상」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글에 스스로 최고의 강령적 의의를 부여한다.[69] 아니, 민족사회주의 특유의 허풍으로 그는 이 글을 “여러 세대가 수백 년 뒤까지 새로이 쌓아 올릴 수 있는 토대”라고까지 치켜세운다. 이 이른바 참신하다는 “토대”의 핵심 대목인 「사업장의 지도자 원리」는 이렇다.

“사업장의 지도자 원리. — 그러므로 신분제 편성은 무엇보다 먼저 사업장의 타고난 지도자, 곧 기업가(!)의 손에 다시 온전한 지도권을 쥐여 주고, 그와 함께 온전한 책임도 지울 것이다 … 결정은 오직 기업가만이 할 수 있다.”

이 강령에 걸맞게, 공산당에서부터 노사 협조를 따르는 기독교 노동조합과 직인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동자 조직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히틀러 파시즘은 공산당에서 — 거짓과 중상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박해와 테러의 집중 포화 속에서 — 비합법 상태에서도 흔들림 없이 유일하게 대중의 저항을 조직하는 조직을 보고,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공산주의에 대한, 그 조직과 신문들에 대한 나치의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증오가 한데 모인다.

그러나 갈고리십자가 무리의 박해 작전은 사회민주당에도 향한다. 사회민주당은 몇 해 전부터 더없이 분명하게 부르주아 국가에, 그리고 “노사 평화”의 수호에 충성을 맹세해 왔는데도 말이다. 박해 작전은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노동조합들도 가차 없이 공격한다. 이 노동조합들은 국회의사당 화재 뒤 처음 두 달 동안 회람과 기사와 공식 성명에서 히틀러의 지도 아래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는데도 말이다. 박해의 물결은 기독교 노동조합 조직, 가톨릭 직인 협회, 그리고 독일 국가인민당 지도자들이 NSBO의 경쟁자로 만든 국가인민당 계열 사업장 조직에까지 미친다.[70]

파시즘 독재는 무엇보다 노동운동이 스스로 만든 조직들을 — 그 정책이 아무리 “국가 수호적”일지라도 — 박해하고 없애려 한다. 그 조직 하나하나에서 반파시즘·반자본주의 세력의 저수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과 기독교 노동조합의 대열에는 반파시즘 성향의 노동자가 수백만 명 있다. 바이마르 “민주주의”가 무력하게 몰락한 뒤, 히틀러 정부가 이 조합원들이 더욱 급진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자들이 통일전선의 구호 아래 이 모든 조직 안에서 히틀러 정권에 맞서 끈질긴 계몽·동원 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이 조직들이 모두 반파시즘 저항의 중심이 될까 봐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려움, 두려움, 그리고 또 두려움 — 노동자의 모든 자주적인 움직임과 조직에 대한 두려움이 독일 파시즘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독일 파시즘은 독일 노동자의 사회적·민족적 사활 문제를 단 하나도 해결할 수 없다.

5.1 히틀러가 수용한다!

히틀러는 “약탈 자본 타도!”라는 구호로 흰 바탕에 검은 갈고리십자가를 그린 붉은 깃발 아래 수백만 명을 모았다. 히틀러는 트러스트를 하나도 국유화하지 않았고, 금융왕을 하나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집권 첫 몇 달 동안 노동자들의 푼돈을 모아 힘겹게 일군 정치·노동조합 노동자 조직들의 재산에 대해 대대적인 수용 작전을 벌였다.

국회의사당 화재가 난 그날 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신문이 단번에 모조리 금지되었다.

독일 공산당(KPD)의 중앙 기관지 《붉은 깃발》과 그 지방 신문이 모조리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SPD)의 중앙 기관지 《전진》과 그 지방 신문 역시 모조리 금지되었다.

혁명적 노동자층과 가까운 신문 《벨트 암 아벤트》, 《아침 베를린》, 《노동자 화보 신문》이 금지되었다.

정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 잡지가 금지되었다.

히틀러 정부의 1933년 2월 5일 자 긴급명령에 따라, 국회의사당 화재가 난 그 주에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이 “국가에 적대적인 책동의 소굴”로 몰려 수용되었다.[71]

같은 긴급명령에 따라 전국에 있는 공산당의 인쇄소와 인쇄소 건물이 모조리 수용되었다. 《벨트 암 아벤트》와 그 자매지들의 출판사에도 같은 방법이 쓰였다.

5.2 노동조합 회관 습격

국회의사당 화재 이전부터 이미 돌격대 부대들이 전국 곳곳의 노동조합 회관과 인민 회관을 계획적으로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모든 정파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켐니츠에서는 3월 9일 사회민주당 인쇄소를 점거하던 돌격대가 인쇄소 지배인 란트그라프를 쏘아 죽였다. 같은 날 부르첸에서는 노동자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밀려드는 돌격대에 맞서 노동조합 회관을 지켰다. 브라운슈바이크에서는 돌격대가 사회민주당 《인민의 벗》 건물을 점거하면서 광고 책임자 한스 자일레를 쏘아 죽였다. 같은 날 드레스덴 노동자의 일부가 인민 회관 약탈에 항의해 파업했다. 베를린 노동조합 회관은 이날 반달족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노동조합 회관과 오토 브라운 회관 점거에 관해 한 목격자는 이렇게 전한다.[72]

“총연맹(보건 부문)이 정례 월례 회의를 열었고, 늘 그랬듯이 이어서 친목 모임을 가졌다. 그사이 밤의 어둠을 틈타 돌격대원들이 노동조합 회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미리 하나뿐인 경비원의 무장을 해제했던 것이 틀림없다. 회의 참석자들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 사정을 훤히 아는 자들만이 그렇게 몰래 숨어들 수 있었다. 갑자기 양쪽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모두 권총으로 무장한 60명가량이 큰 홀로 밀고 들어와 천장과 벽에 여러 발을 쏘았다. 튕겨 나온 총알에 다섯 사람이 다쳤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몹시 크게 다쳤다. 그러고 나서 강도들은 권총을 들이대고 여자와 남자들을 홀에서 거리로 몰아냈다. 사람들의 외투와 소지품은 압수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얇은 옷차림으로, 남자들은 모자도 외투도 없이 더러는 아주 먼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다음 노동조합 사무실들을 샅샅이 뒤지고 완전히 때려 부쉈다. 분명히 밝혀 두건대, 회관 안에는 국기단 경비대가 없었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회의 참석자들이 반드시 알아챘을 것이다. 식당 관리인조차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토 브라운 회관을 점거할 때는 일이 다르게 벌어졌다. 밤 11시 20분,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나타나 그곳에 배치된 야간 경비원에게서 권총을 빼앗고 그를 인질로 선언하며 말했다. ‘분명히 일러두는데, 이 건물 안에서 무장한 자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우리는 당신을 쏘아 죽일 수밖에 없소.’ 10분 뒤 강력한 돌격대 부대가 나타나 곧바로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건물 안에는 야간 경비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같은 건물에 관리인 니스반트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돌격대원 세 명이 그의 집으로 가서 관리인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당장 모든 사무실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이제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파괴가 시작되었다. 짐승처럼 된 무리는 먼저 국기단 사무실에 덤벼들었다. 미리 가져온 도끼로 가구를 모조리 박살 냈고, 값비싼 큰 그림들을 망가뜨렸으며, 금고를 부수어 열고 책상도 모조리 부쉈다. 사무실은 그야말로 잔해 더미다. 사회민주당 지구 사무실에서도 비슷하게 모든 것이 부서졌다. 자유사상가 연맹 사무실에서도 똑같이 행패를 부렸다. 유골함들은 이 패거리가 특히 노린 대상이었다. 그다음 《쾨니히스베르크 인민 신문》 출판사 지배인이 돌격대원 세 명에게 권총으로 위협당하며 끌려 내려왔고, 쏘아 죽이겠다는 협박을 끊임없이 들으며 거의 네 시간 동안 모든 방을 끌려다녔다. 지배인 블랑크는 마당에 있는 임대 차고들도 열고 그 안에 있는 차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거기에는 차고를 빌린 민간 회사와 개인들의 차가 서 있었다. 민간인의 차까지 수색해야 했다. 이렇게 넋이 나갈 듯한 괴로움 속에서 지배인 블랑크는 권총 세 자루를 마주한 채 흑적황 깃발을 거리에서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건물은 세 해 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돌격대 강도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더없이 좋은 상태였다. 이제는 쑥대밭이 된 도적 소굴과 같다.”

보훔의 광산 노동자 연맹 건물 점거에 관해 자르브뤼켄의 사회민주당 신문 《인민의 소리》는 3월 13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그들의 전국 본부, 곧 보훔에 있는 광업 노동자 연맹 본부가 돌격대와 친위대의 히틀러 강도들에게 습격당해 위에서 아래까지 박살 나고 파괴되었다. 문서는 모조리 불태워졌고, 그 바람에 건물 일부도 함께 불탔다. 그리고 손이 닿는 대로 중앙 집행부 전원이, 맨 앞에는 위원장인 제국의회 의원 후제만이, 돌격대와 친위대에게 끌려갔다.”[73]

이 몇 가지 예는 그 무렵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일들의 아주 작은 단면을 보여 줄 뿐이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모든 노동조합 회관, 인민 회관, 신문사 건물 위에 강제로 갈고리십자가 깃발이 내걸렸다.

5.3 도덕적 도발

민족사회주의자들은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갈색 방화대를 써서 성공한 도발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덕적 도발이라는 수단을 집어 들었다. 그들은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을 “호르스트 베셀 회관”이라고 부르고 정치경찰의 본부로 삼았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라는 이름은 온 세계 노동자들이 안다. 이 고결하고 사심 없는 혁명가의 이름은 독일 국경 너머 멀리까지 수백만 노동자에게 거룩하다. 계엄령에도 아랑곳없이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수백만을 죽이는 학살에 맞선 일하는 인류 전체의 대변자가 된 카를 리프크네히트 — 이 이름은 온 세계의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드높이 울린다.

민족사회주의의 “영웅” 호르스트 베셀, 민족사회주의 역사 제조업자들이 만든 이 전설적 인물은 누구였는가? 호르스트 베셀은 학업을 내팽개친 대학생이자 목사의 아들이었고, 베를린 뮌츠슈트라세 일대의 포주였다. 밤마다 자기 돌격대를 이끌고 “마르크스주의자” 사냥에 나서던 “영웅” 호르스트 베셀이 매춘부 한 사람의 벌이로 먹고살았다는 사실은 나치조차 부인하지 못한다. 그는 그 거리의 여자 집에서 그 여자의 예전 포주에게 살해당했다. 민족사회주의 전설 작가들은 호르스트 베셀이 그저 그 창녀의 “영혼”을 “구원”하려 했을 뿐이라고 전한다. 민족사회주의 신문들은 호르스트 베셀이 공산주의자들의 희생자로 쓰러졌다고 주장했고 — 그것이 공식 전설이 되었다.

이제 독일 공산당의 옛 본부 건물이 이 “영웅”의 이름을 달고 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이름은 지워졌다.

5.4 조직 해산, 사업장의 테러

독일에서 공산당에 대한 공식 금지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가혹하기 짝이 없게 벌어진 테러 작전 속에서 공산당 지도자와 간부는 모두 법의 보호 밖에 놓였다. 계급투쟁적이라는 혐의를 받은 조직은 모두 불법화되었다.

광산 노동자 통일 연맹, 베를린 금속 노동자 통일 연맹 같은 혁명적 노동자층의 노동조합 조직들, 그리고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RGO) 전체가 비합법 상태로 내몰렸다.[74] 초당파적인 혁명적 노동자 조직들, 곧 반파시즘 투쟁 동맹, 적색 스포츠 통일 투쟁 공동체, 작가·미술가·노동자 사진가 등의 혁명적 연맹들도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공산당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정치범과 그 가족을 돕는 프롤레타리아 구호 조직이자,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사법의 희생자가 된 근로인들을 보살피는 연대 조직인 독일 적색 구원회가 비합법 상태로 내몰렸다. 히틀러 야만의 희생자들을 돕는 가장 소박한 일조차 비합법으로 조직해야 한다. 수많은 경제 투쟁에서 “파업 노동자의 식량 수송대”라는 이름을 얻은 국제 노동자 구원회도 마찬가지로 불법 단체로 선언되었다. 그 재산은 압수되었고, 간부와 회원들은 박해받았다.

파시즘의 탄압은 노동자의 모든 사회·문화 조직을 겨누었다. 어린이 조직, 모성 보호 동맹, ARSO(사회 정책 조직 협의회)가 그 대상이었다. 그와 함께 탄압은 모든 평화주의 조직, 곧 인권 연맹, 독일 평화 협회 등도 겨누었다.

3월 말의 경영 평의회 선거는 이미 노동자 조직에 대한 가장 광포한 탄압 아래 치러졌으므로, 노동자들의 실제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선거가 어떤 상황에서 치러졌는지는 도르트문트 우니온 금속 공장에서 온 보고가 잘 보여 준다. 이 보고는 독일 거의 모든 사업장의 “경영 평의회 선거”에 전형적이다.

“도르트문트의 ‘우니온’에서는 선거 전날 선거 관리자와 여러 해 동안 경영 평의회 대표를 맡아 온 디크만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나치가 선거 관리 위원회를 차지하고 노동자들에게 투표하라고 요구했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민족 정부의 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했다. 투표대는 무장한 나치들이 에워쌌다. 투표하러 온 사람은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되었고, 그가 어느 투표용지를 봉투에 넣어 투표대에 내는지 감시당했다. 투표가 끝나자 나치 두목이 투표함을 가져가 자기 패거리와 함께 선거 결과를 확정했다. 결과를 확정하는 자리에 다른 조직의 노동자는 단 한 사람도 입회하지 못했다.”

이런 방법을 썼는데도 나치는 이 경영 평의회 선거에서 — 도르트문트 우니온에서도 그랬듯이 — 대다수 사업장에서 소수에 머물렀다. 선거 때 협박과 공갈과 조작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나치는 4월 한 달 동안 노골적인 폭력으로 해치웠다. 자유 노동조합 계열과 혁명파 경영 평의원들을 경영 평의회에서 “숙청”한 것이다. 반파시스트로 알려진 기독교 계열 경영 평의원들도 직무에서 쫓겨났다. 돌격대가 경영 평의회 사무실로 행진해 들어갔고, 선출된 경영 평의원들은 학대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죽이겠다는 위협 속에 사퇴를 강요당했다. 선거 결과를 “바로잡기” 위해 모든 사업장에 나치 임시 “경영 평의원”이 앉혀졌다.

5.5 노동조합의 파괴

5월 1일 “민족 노동의 날”에는 수십만 명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위협 아래(특히 국영 사업장, 시영 사업장, 소규모 사업장에서) 공식 행진에 억지로 참가해야 했다. 이날은 히틀러 정부에게 더 큰 작전을 준비하는 데 쓰였다. 5월 2일 돌격대가 노동조합 사무실들을 점거했다. 지금까지 같은 형태의 노동조합을 없앤다는 것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 노동 보호 위원회”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ADGB)이 5월 1일 히틀러 시위에 참가하라고 호소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독일 노동자는 5월 1일 신분 의식을 품고 시위해야 한다.” 노동조합 사무실들은 점거되었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학대당했다. “독일 노동전선”이 노동조합 기구 전체를 넘겨받았다.

이 파괴 작전이 어떤 방법으로 벌어졌는지에 관한 문서 몇 가지를 아래에 싣는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자유 노동조합을 접수하다. 지도자들 체포 — 전국에서 작전.” (1933년 5월 2일 자 《독일 일반 신문》 제목)

“물론 우리는 권력을 쥐었다. 그러나 아직 민족 전체를 얻지는 못했다. 노동자여, 우리는 아직 그대를 백 퍼센트 얻지 못했다.”

(1933년 5월 2일 라이 박사의 호소문에서)

“자유 노동조합의 숙청과 노동자 조직의 건설. 돌격대가 모든 노동조합 회관을 점거 — 노동조합 지도자 50명 체포.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제2단계.”

(1933년 5월 3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 제목)

“5월 1일 독일이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노동자 정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민족사회주의적 이해를 받아들였다고 고백한 뒤, 5월 2일 운동은 이 인식에서 결론을 끌어냈다. 이른바 자유 노동조합은 그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자신과 노동조합 사상을 국제 마르크스주의에 팔아넘겼다.”

(1933년 5월 3일 《푈키셔 베오바흐터》에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NSBO의 잡지 『노동자 정신』, NSBO의 이론과 실천을 위한 지면이 오늘부로 ADGB와 AfA 연맹의 공식 기관지가 된다.”[75]

(1933년 5월 2일 라이 위원회의 호소문)

“마르크스주의의 노동자 선동이라는 장은 끝났다.”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에 대한 작전이 민족 안에서, 특히 노동자층 안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독일 기독교 노동조합 총연맹, 독일 직원·노동자·공무원 연맹 노동조합 연합(히르슈둥커), 직원 노동조합 동맹, 그 밖의 작은 연맹들은 이 거대한 민족 운동의 압력에 못 이겨, 자기들이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며 그가 임명한 독일 노동 보호 행동 위원회의 지시를 아무 유보 없이 따르겠다고 서면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33년 5월 4일 라이 박사의 성명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 지도부의 끝없는 부패 사례 — 대차대조표 은폐와 수상한 금융 거래 — 조직된 근로인 800만 명이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 아래로.”

(1933년 5월 5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 제목)

“독일 노동 보호 행동 위원회”의 지도자 라이 박사의 첫 호소문은 몹시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가락을 띠었다.

“우리는 우리 민족에게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것을 결코 파괴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민족사회주의의 원칙이다. 이는 고생해서 벌고 입에 들어갈 것을 아껴 모은 그 많은 노동자의 푼돈으로 세워진 노동조합에 특히 해당한다. 아니다, 노동자여, 그대의 기관들은 우리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거룩하며 손댈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이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어서 궁핍을 안다. 나 자신이 독일에서 손꼽히게 큰 사업장에서 7년을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만 짚어 두자면, 라이 박사는 한 번도 노동자로 일한 적이 없다. 그는 7년 동안 I. G. 파르벤 공업 주식회사에서 보수를 아주 많이 받는 고위 직원으로 일했고, 많은 퇴직금을 받고 그곳을 떠났다. 라이 박사는 숱한 난동과 수상한 사건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가장 최근에는 고주망태가 되어 쾰른에서 사회민주당 의장 벨스를 습격했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을 폭력으로 강탈하는 그 순간, 노동조합에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사회 정책적 시설을 유지하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하는 전술을 썼다. 동시에 민족사회주의 신문들에서는 “노동조합 사무실의 부패”를 폭로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돌격대는 노동조합원들에게 나치가 노동자에게 우호적이라는 믿음을 리볼버와 몽둥이로 심어 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몇 주 뒤 라이 박사가 (6월 10일) 「신분제 편성에 관한 기본 구상」에서 사업장 안에서 기업가의 절대적 독재를 선포했을 때, 노동조합 조직의 “거룩함”과 “손댈 수 없음”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노동조합은 파시즘 독재 국가의 보조 도구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민족사회주의 지도부의 약속은 이렇게, NSDAP의 진짜 정책을 기만적으로 위장한다는 목적을 다하고 나면 늘 연기처럼 사라진다.

5.6 “숨통을 끊는 한 발”

“우리는 그것(마르크스주의)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용납하느니 차라리 숨통을 끊는 마지막 한 발을 쏘겠다. 라이파르트나 그라스만 같은 자들이 아무리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척해도 — 그들은 보호 구금 속에 있는 편이 낫다.[76]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패거리의 손에서 주된 무기를 쳐서 떨어뜨리고, 그로써 그들이 다시 힘을 기를 마지막 가능성을 빼앗는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악마의 가르침은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뒈져야 한다.”

(1933년 5월 2일 라이 박사의 호소문에서)

5.7 “부패” — 그리고 부패

민족사회주의자들의 투쟁 방법 가운데 하나는 정적들에게 부패 혐의를 씌워 “해치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방국장 겜프처럼 국회의사당 방화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77] 그렇게 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많은 관리들과, 아직 “균질화”되지 않은 부르주아 조직의 많은 지도자들을 해치웠다. 그렇게 해서 고용 창출 판무관 게레케에게도 앙갚음했다. 그가 1932년 힌덴부르크 선거 위원회의 책임자였고, 따라서 히틀러의 대통령 입후보에 맞선 주요 투사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라이 박사의 지휘 아래 자유 노동조합과 그 조직 기구 전체가 “균질화”되자,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급여를 늘리고 조합비를 낮추겠다던, 곧 잊힌 약속에 덧붙여 “노동조합 부패”를 폭로하는 대대적인 작전을 시작했다. 파시즘 신문들의 자세한 르포는 여러 노동조합의 중앙 사무실이 얼마나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는지를 묘사했다. 신문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높은 급여에 관해 몇 단씩 보도했다. 빼앗은 노동조합 조직 기구를 파시스트 판무관들의 관료적·정치적 지휘 아래 둔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은, 급진적인 분위기의 노동조합원들이 지도자들의 관료화에 대해, 그리고 지난날 파업 투쟁에서 그들이 펼친 노사 협조 정책에 대해 품은 분노를 교묘하게 파시즘의 “숙청” 작전에 이용하려 했다. 파시즘 신문들은 조합원들의 곤궁과, 지난 경제 투쟁에서 그들에게 지원이 거부된 일을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호사스러운 생활과 맞세웠다.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굵은 활자로 AfA 연맹 의장 아우프호이저가 물러나면서 월급 940제국마르크씩 18개월분, 모두 1만 6920제국마르크를 받고 “정산”했다고 외쳤다.[78] 《도르트문트 종합 신문》은 7월 16일 「쓰레기 무리」라는 제목 아래 라이파르트가 ADGB 의장으로 취임할 때 월급 4천 마르크를 고집하는 편지를 실었다 — 그리고 그 편지가 쓰인 1921년에는 이 금액이 금마르크로 240마르크의 가치였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은 잊었다.

부패 비슷한 사실을 위선적으로 우려먹는 것 말고도, 민족사회주의 “폭로자”들은 부패 사례를 아예 지어냈다. 나치의 정치적 입맛에 맞지 않는 자금 사용은 무엇이든 “배임”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대통령 선거 때 ADGB의 노동조합 자금 30만 마르크가 힌덴부르크 정책을 지원하라고 사회민주당에 건네졌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직원 중앙 연맹은 1932년 봄 국기단에 5만 제국마르크를, 그 밖에 1932년 7월과 11월에 각각 1만 5천 제국마르크를 사회민주당 금고에 넘겼다.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의 대표들은 노동조합 조합비를 부르주아·사회민주주의 정치의 목적에 낭비하는 데 늘 맞서 싸워 왔다. 그러나 계급투쟁적 노동조합의 파괴자인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이 노동조합 자금을 계급투쟁이 아닌 목적에 쓰는 데 반대하는 수탁자 행세를 한다면, 그것은 물론 정치적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5.8 사회민주당과 국기단의 재산 압수

“노동자의 푼돈을 지키는” 일을 걱정한다고 내세우며 나치는 노동조합과 소비조합에 대한 작전을 벌였다. 다음 일격은 사회민주당과 국기단의 전 재산 압수였다.

“베를린,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제1 검찰청장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그 신문들, 그리고 국기단과 그 신문들의 전 재산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압수의 근거는 NSBO가 노동조합과 노동자 은행을 접수하면서 드러난 수많은 배임 사건이다. 사회민주당 재산 압수에 관해 덧붙여 알릴 것은, 사회민주당과 가까운 조직들의 재산도 마찬가지로 압수되었다는 점이다.”

(1933년 5월 10일 자 《앙그리프》)

같은 날 우편 대체 사무소, 당 출판사, 노동자 은행에 있던 사회민주당의 돈이 모조리 압수되었다. 사회민주주의 조직들, 국기단, 사회민주당 신문들의 사무실이 폐쇄되었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는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인 라이파르트에 대해 “상당한 금액의 노동조합 자금이 규정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임과 사기 혐의”의 소송 절차가 시작되었다고 알렸다.

조치는 사회민주당과 가까운 모든 조직을 겨냥했다. 노동자 체조·스포츠 동맹, 독일 자유사상가 연맹, 노동자 복지회 등을 차례차례 겨누었다. 5월 11일에는 소비조합을 “안전한 손”에 넘긴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소비조합의 시설에 묶여 있으며 틀림없이 위태로운 큰 가치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총통과 제국 경제 장관과 그 밖의 관계 기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소비조합을 정리할 목적으로 안전한 손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소비조합이 당분간 그 활동에서 방해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비조합을 더 확장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 필요한 조치의 시행은 독일 노동전선 지도자 라이 박사 당원 동지가 노동자 은행장 카를 뮐러 당원 동지에게 맡겼다.”

(1933년 5월 12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

이어서 “부패 척결”의 깃발 아래 노동조합 재산이 압수되었다.

“프로이센 법무부의 부패 담당 부서는 사회민주당과 국기단의 재산을 압수한 데 이어 이제 노동조합의 전 재산을 압수했다. 이 작전의 지휘는 독일 노동전선 지도자 라이 박사가 맡았다.”

(1933년 5월 13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

1933년 6월 23일 히틀러 정부는 지금 흔히 쓰는 형식으로 사회민주당의 해산을 명령했다. 당의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그 대표들은 모든 의회에서 배제되었다. 5월 17일 제국의회에서 히틀러의 외교 정책 성명에 사회민주당이 찬성한 일도, 새 당 지도자 뢰베가 망명한 일부 사회민주당 집행부와 절연함으로써 히틀러 정부의 묵인을 얻으려 애쓴 일도 헛수고였다.[79]

5.9 공산당 재산의 수용

공산당과 그 기관지·관련 조직들의 손에 잡히는 재산이 이미 몇 달 동안 모조리 압수된 뒤인 5월 27일, 공산당 재산의 몰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제국 법률이 공포되었다.

공산당 재산 몰수에 관한 제국 법률

제1조 (1) 주 최고 관청 또는 주 최고 관청이 지정한 기관은 독일 공산당과 그 보조 조직 및 대체 조직의 물건과 권리, 그리고 공산주의적 책동을 촉진하는 데 쓰였거나 쓰일 예정인 물건과 권리를 주를 위하여 몰수할 수 있다. (2) 제국 내무 장관은 주 최고 관청에 제1항에 따른 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제2조 제1조는 임대되었거나 소유권 유보 아래 인도된 물건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다만 임대인 또는 공급자가 그 물건을 내줌으로써 공산주의적 책동을 촉진할 의도를 가졌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3조 몰수된 목적물에 존재하는 권리는 소멸한다. 그러나 토지의 몰수로 그 토지에 존재하는 권리는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몰수하는 관청은 그 대가를 내줌으로써 공산주의적 책동을 촉진할 의도가 있었던 경우 그러한 권리를 소멸한 것으로 선언할 수 있다.

제4조 가혹함을 피하기 위하여 몰수된 재산에서 몰수 당사자의 채권자에게 변제할 수 있다 …

제7조는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제8조는 프리크 박사 제국 장관에게 이 법률의 시행과 보완을 위한 법규와 행정 규칙을 제정할 권한을 준다.

공산당 재산 또는 이른바 공산당 재산의 수용은 베를린에서 가장 널리 읽히던 계급투쟁적 노동자 신문 《벨트 암 아벤트》에도 미쳤다. 이 신문은 “코스모스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었다. 히틀러 독재의 첫 몇 달 동안 민족사회주의 공식 신문들이 노동자 독자 대중에게 파고들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자, 괴벨스 씨의 선전부에서 새로운 사기극이 꾸며졌다. 5월 말, 옛 《벨트 암 아벤트》와 비슷한 꾸밈새에 똑같은 제호를 단 새 민족사회주의 신문이 옛 이름으로 나왔다. 이 신문은 처음 며칠 동안 내용으로도 위장하여, 소련에 관해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척하고 노동자 독자들에게 거듭 호소했다. 그러나 이 민족사회주의 신문은 불과 며칠 만에 공개 성명을 내어, 베를린 노동자들이 비합법 전단으로 벌인 폭로에 맞서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5.10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신분제” 목표

민족사회주의 정부의 첫 다섯 달이 이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을 하나도 극복하지 못하며 독일을 파국으로 몰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할수록, 나치는 더욱 잔인하게 독재 권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권력의 전체성을, 자기 당과 자기 사이비 노동자 조직들의 독점적 지위를 밀어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부총리 폰 파펜이 공식 연사로 나섰던 뮌헨의 가톨릭 직인 대회를 경찰을 시켜 해산시켰다. 기독교 조직들에는 종교 활동 말고는 어떤 활동도 금지되었다. 자라나던 경쟁자인 국가인민당 계열 사업장 조직과 방위 조직은 경찰력으로 분쇄되었다. 새로 만든 “노동 대평의회”, 곧 “균질화”된 모든 노동조합의 최고 기구에 있던 몇 안 되는 기독교 노동조합 대표들은 6월 23일 라이 박사의 명령으로 “민족 정부의 적”이라 하여 평의회에서 쫓겨났다.

처음에 언급한 「신분제 편성과 독일 노동전선에 관한 기본 구상」(1933년 6월 8~10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에서 라이 박사는 합법 노동자 조직을 없앤 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할 “신분제” 목표를 강령으로 밝힌다. 라이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a) 노동자들에게 임금 인상 투쟁을 금지한다. 그것은 “돈 욕심”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라이는 말 그대로 이렇게 쓴다.

“우리는 이윤 정신이 인간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는지 안다. 우리는 돈 욕심이 모든 인간 안에 어떻게 살아 있는지 안다. 어떤 이는 더 많은 임금을, 어떤 이는 더 많은 배당을 바란다. 그러나 바로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개개인 안에 있는 이 ‘비열한 개’를 인위적인 조직으로 더 길러서는 안 되며, 이 인간적 결함을 억누르고 고삐를 채우고 필요하다면 잔인하게(!) 울타리와 한계를 지우는 것이 더 높은 국가 지도의 과제라는 것을 그만큼 분명히 인식한다 …”

b) 사업장에서 기업가의 “지도자 원리”를 무제한으로 세운다. 라이 박사는 말한다.

“그러므로 신분제 편성은 무엇보다 먼저 사업장의 타고난 지도자, 곧 기업가의 손에 다시 온전한 지도권을 쥐여 주고, 그와 함께 온전한 책임도 지울 것이다. 한 공장의 경영 평의회는 노동자와 직원과 기업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경영 평의회는 자문권만 가진다. 결정은 오직 기업가만이 할 수 있다. 많은 기업가가 여러 해 동안 ‘집안의 주인’을 외쳐 왔다. 이제 그들은 다시 ‘집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

c) 지난날의 “경직된” 단체 협약은 박살 내야 한다. 단체 협약은 “되도록 생동하고 유연해야” 한다.

d) 지금까지의 노동 법원에서 독립성의 마지막 겉모습마저 빼앗는다. 그 자리에 이른바 “신분 법원”이 들어서는데, 여기에는 기업가 대표와 나란히 노동자·직원 대표의 탈을 쓴 엄선된 파시스트들이 들어앉게 된다.

라이 박사의 강령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히틀러의 위임을 받은 당 공식·정부 공식 작업이다. 그 노동자 적대성과 기업가 친화성은 뻔하다. 계급 분열과 계급투쟁을 극복한다는 “신분제 편성”은 모든 분야에서 기업가의 계급 독재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 뿐이다.

독일 모든 지구에서 노동 조건을 독재적으로 정할 수 있는 “노동 관재인” 12명을 임명한 것도 같은 목적에 쓰인다.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조건을 정하는 일에서 모든 공동 결정권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80] 노동조합의 모든 자리, 국가와 조직의 모든 직위를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차지하면서 민족사회주의 관료층이 두텁게 길러진다. 이 독점은 그것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서, 아래로부터의 모든 통제를 폭력으로 배제한 가운데, 가장 고약한 부패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다.

독일의 하루하루가 증명한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의 파괴욕과 자의와 살인욕으로도 독일의 계급투쟁적 노동운동을 섬멸하는 데 성공할 수 없음을. 그 합법 조직들은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에 찬 사회주의의 투사 수만 명이 비합법으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