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1933)
인물빌리 뮌첸베르크,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룀, 에트문트 하이네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파울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하인리히 브뤼닝,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그레고어 슈트라서, 빌헬름 프리크, 로베르트 라이, 오토 벨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에른스트 톨러 용어갈색책 (1933),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1933),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 (1933), 돌격대 (SA), 친위대 (SS), 강제적 동질화, 1933년 나치 분서, 성과학 연구소 사건나치 집권과 수권법,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8 히틀러 독일의 유대인 박해
튀링겐의 새 민족주의 주 정부가 맨 처음 한 일 가운데 하나는 튀링겐 주 전역에서 C. V.(유대교 신앙 독일 국민 중앙 협회)[118]를 금지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냈다.
“C. V.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는 반유대주의와 싸우는 것이다. 독일에는 반유대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C. V.는 더 이상 존재할 근거가 없다. 따라서 C. V.는 오늘 날짜로 해산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한 고문, 학대, 권리 박탈, 굶주림에 관한 믿을 만한 보고와 증언은 “잔학 선전”과 소름 끼치는 현실 사이의 경계를 정확히 보여 줄 것이다. 이른바 “잔학 선전”이 이런저런 경우에 부정확하고 과장되었을지는 몰라도, 실제의 만행을 오히려 너무 약하게 그려 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다. 이를테면 어떤 코엔 씨가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혔다고 보도되었다. 알고 보니 이 코엔 씨는 다친 데 없이 벌써 오래전에 외국에 가 있다. 그 대신 레비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는 머리카락을 뽑혔을 뿐 아니라 한쪽 눈까지 얻어맞아 빠졌고, 그래서 치명상을 입은 채 몇 주째 어느 병원에 누워 있다. 사람이나 장소를 잘못 짚은 일은 있었다. 그러나 틀렸거나 과장된 것으로 드러난 사건 하나마다,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문과 살해와 약탈 사건이 백 건씩 있다. 피해자들이 죽이겠다는 위협에 눌려 히틀러 독일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범죄의 진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보고는 “유대인 문제”의 여러 문제와는 상당히 떨어져서 할 수 있다. 독일 유대인의 처지에 대한 분석은 많은 책에서, 여러 관점에서 시도되어 왔다. 우리는 여기서 문제의 범위를 좁게 한정한다. 그렇지만 히틀러 운동과 반유대주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해서는 먼저 아주 짧게라도 말해 두어야 한다.
8.1 민족사회주의의 한 토대로서의 반유대주의
대중이 자신들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체제에 품는 불만을 진짜 원인에서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은 지배층의 오래된 수법이다. 왜 이런 눈 돌리기 작전이 수백 년 동안, 중세 내내, 그리고 근대에 들어 다시 하필 유대인을 겨냥했는지 – 예전에는 종교 공동체로서, 오늘날에는 주로 “인종”으로서 – 여기서 필요한 만큼 학문적으로 철저하게 밝힐 수는 없다. 이 작업은 청년 마르크스의 천재적 구상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가 이미 대신해 주었다. 마르크스의 근본적 인식 위에서 그 뒤 이 문제를 사회적 연관 속에서 다룬 수많은 저작이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유대인 문제의 핵심을 “인종, 민족, 민족 공동체, 종교 공동체 등등”이라는 여러 복합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채 뒤엉킨 데서 찾지 않고, 그것이 사회 문제로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찾는다(그 안에는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요소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 문제의 분석은 일반적인 사회 관계의 분석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8.1.1 새 독일의 반유대주의
히틀러주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소시민층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의 한 특징적인 형태로서, 그 선구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새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지난 세기의 마지막 4분의 1에 궁정 설교사 아돌프 슈퇴커[119]의 지도 아래 불타오른 반유대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운동의 원인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한 뒤 창업 시대의 거리낌 없는 투기에 이어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쳤고, 노동자층과 더불어 무엇보다 소시민층이 그 피해를 입었다. 궁정 설교사 아돌프 슈퇴커는 사회 정치 활동에 대한 열의가 기업가들과 정부의 엄중한 경고에 꺾여 움츠러들자, 성공이 기대되는 새 구호인 유대인 증오 선동을 찾아낸다.
에른스트 오트발트[120]는 뛰어난 연구서 『독일이여 깨어나라』에서 이렇게 쓴다. “경제의 기본 사실을 내다볼 눈이 전혀 없었던 슈퇴커는 독일 제국 안에서 조금이라도 건강하지 못하고 해로워 보이는 것은 모두 유대인의 영향 탓으로 돌린다. 동부 프로이센 여러 주의 농민들이 진 빚 – 세계 곡물 생산 증가의 필연적 결과 – 에 대해서도 슈퇴커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책임을 지운다. 유대인이 농민에게 돈을 꾸어 주었다가 나중에 악마 같은 심보로 집과 농장에서 내쫓는다는 것이다. 독일 산업 노동자층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서도 슈퇴커는 생산 수단의 완성이 만들어 낸 한 유형의 기업가가 지닌 이윤욕을 보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 기업가만 볼 뿐이고, ‘모든 것은 유대인 탓’이다.”
8.1.2 유대인의 앞잡이 비스마르크
소란 반유대주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속아 넘어간 소시민층의 첫 혁명적 격앙이 가장 약한 지점, 곧 유대인 소수자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아돌프 슈퇴커가 재산 있고 힘 있는 유대인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하자,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계급적 연대가 더 강하게 꿈틀거린다. 비스마르크가 몸소 개입하고, 선동가가 되어 버린 궁정 설교사는 밀려난다. 이 시기의 반유대주의 운동이 비스마르크에게도 등을 돌려 그를 “유대인의 앞잡이”라고 고발했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1878년의 한 소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유대인과 그 동료들을 독일의 지배 도당으로 끌어올린 공은 비스마르크 공작에게 돌아가야 한다. … 유대인 비호는 비스마르크의 영광스러운 제국이 지닌 가장 시커먼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그 결과는 일하는 민중의 빈곤화, 사회 모든 계층의 타락, 돈과 혈통 귀족의 역겨운 결합이다. … 그리고 비스마르크 공작은 유대인의 영향에 굴복했다. 유대인과 유대인의 동료들이 그의 교제 상대이고, 그가 날마다 어울리는 사람들이며, 그의 정치 고문이자 그의 주요 문화 투쟁가들이다.”
그 시절의 이 “민중 운동”은 불가피하게 폭력 사태로 흘러갔다. 포메른의 작은 도시 노이슈테틴에서 신호처럼 유대교 회당이 불타오른다(이미 그때에도 “민족적” 분노는 방화로 시작되었고, 그때에도 범인들이 아니라 – 유대인들이 기소되었다. 유대인들이 앙심을 품고 자기네 성전에 직접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포그롬이 일어난다. “민중 운동”이 이미 시들어 갈 무렵 – 경제 위기는 지나갔다 – 이 반유대주의는 정당의 형태로 합법화되고, 곧 거기에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대 주는 자들도 나타난다. 오이겐 뒤링 교수[121]가 저서 『인종적 성격의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로 반유대주의의 새 시대, “인종 반유대주의”의 시대를 연다. 그 뒤로 유대인이 하나의 인종, 그것도 이질적이고 저열하며 범죄적인 인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많은 잉크가 쏟아졌다. 체임벌린의 재치 있는 주장들을 빼면, 이 “학문”은 대체로 조잡한 농담에 만족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히틀러 독일에서 개가를 올리고 있으며, 제3제국에서 이 부정직한 방식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꽤 많을 것이다.
8.1.3 새 독일 반유대주의 선동의 형태
히틀러의 승리로 정점에 이른 새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학문적” 논거를 대느라 크게 애쓴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운동의 독특한 특징은 처음부터 한 번도 “증명”한 적이 없고 언제나 “주장”만 해 왔다는 데 있다. 그 성공은 혼란을 일으키는 데, 실제 관계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 이 반유대주의는 언제나 소란 반유대주의라는 가장 역겨운 모습으로 으스대 왔다. 1920년 초, 카프 폭동 때 에르하르트 여단[122]의 철모에서 저 기묘한 반유대주의 상징, 곧 하켄크로이츠가 처음으로 넓은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때 처음으로 증오와 선동의 노래들이 공공연히 불렸다. 제대로 된 “민족적” 사나이라면 이미 그때부터 “라테나우, 유대 돼지” 따위의 말로만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벌써 거리에서 반유대주의 노래를 배웠다. 오늘날 제3제국에서는 아이들이 모두 “유대인의 피가 칼에서 튀면, 일이 두 배로 잘 풀린다”는 후렴이 붙은 그 멋진 투쟁가를 알고 있다.
15년 전부터 히틀러의 당은 수만 번의 집회와 수만 편의 신문 기사에서 유대인을 가장 끔찍한 괴물로 꾸며 꾐에 넘어간 대중 앞에 내보여 왔다. 모든 것은 유대인 탓이다. 전쟁도 평화도, 자본주의도 혁명도, 가난도 부도 유대인 탓이다. 민족사회주의 선동에 따르면 어디에나 유대인이 숨어서 유대 민족의 과업, 곧 “유대인의 세계 지배”를 완성하는 일을 거든다. 히틀러와 그 일당에게 그것은 “세계의 파멸”을 뜻한다.
8.1.4 유대인에 관한 히틀러의 말
민족사회주의의 가장 공식적인 저작, 오늘날 수십만 부가 퍼져 있는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에서 몇 가지 예를 뽑아 보자. 다음 말을 들어 보라. “검은 머리의 유대인 젊은이는 얼굴에 악마 같은 기쁨을 띠고 몇 시간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를 노린다. 그는 자기 피로 그 처녀를 더럽히고, 그렇게 해서 처녀를 그녀의, 곧 그 처녀의 민족에게서 빼앗는다.” “흑인을 라인 강변으로 데려온 것은 유대인이었고 지금도 유대인이다. 언제나 똑같은 속셈과 목표, 곧 그로써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혼혈을 통해 자기들이 증오하는 백인종을 파괴하고, 그 문화적·정치적 높이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그 주인으로 올라서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그는 예술, 문학, 연극을 오염시키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우롱하며, 아름다움과 숭고함, 고귀함과 선함에 대한 모든 개념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사람들을 자기 자신의 저열한 본성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내린다.” “유대인이 이 세상에 저희끼리만 있다면, 그들은 오물과 쓰레기 속에서 질식할 것이며, 증오에 찬 싸움 속에서 서로 속이고 서로 뿌리 뽑으려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의 비겁함에서 드러나는 희생정신의 철저한 결여가 여기서도 그 싸움을 연극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대인은 정치권력을 쟁취하면 아직 걸치고 있던 몇 겹의 겉옷마저 벗어 던진다. 민주적 민중 유대인은 피의 유대인이자 민족들의 폭군이 된다. 그는 몇 해 안에 민족의 지성을 짊어진 자들을 뿌리 뽑으려 하며, 민족들에게서 그 자연스러운 정신적 지도력을 빼앗아 영원한 굴종이라는 노예의 운명에 무르익게 만든다.”
이 발언들이 어쨌든 대표성을 지니고, 대표성을 의식하며 쓴 책에 실려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 인용하는 것은 반유대주의 선동의 가장 온건하고 가장 절제된 형태다. 집회에서, 신문 기사에서는 이와 다른, 더 노골적인 말을 듣고 읽을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민족사회주의 신문들의 제목은 대략 “유대 암퇘지의 젖꼭지에 매달려” 또는 “유대인 세계 페스트” 따위였다. 끝으로, 히틀러 운동의 으뜸가는 함성이 “유다여 뒈져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NSDAP 간부용 지도·교육 서한》(1931년 3월 15일)에서 다음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유대인에 대한 농민의 타고난 적대감, 유대인의 앞잡이인 프리메이슨에 대한 그의 적대감을 광란에 이를 때까지 부추겨야 한다.”
8.2 “결산”
유대인 박해 소식에 대한 민족사회주의 권력자들의 부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아돌프 히틀러의 비호 아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얼마나 기괴한지 알아보려면 이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아야 한다. 15년 동안 유대인은 세계의 페스트로, 가장 짐승 같은 하등 인간으로 그려졌고,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추종자들에게는 유대인을 비방하고 박해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체계적으로 길러졌다. 15년 동안 “결산”이 약속되었다. 이른바 “민족 혁명”이 시작되면서 이 살인의 씨앗이 싹튼다고 해서 놀랄 일인가? 모든 젊은 민족사회주의자에게, 유대인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행위이며 민족적 독일인으로서 그가 부름받은 최고의 과업이라고 지칠 줄 모르고 설명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젊은 돌격대원에게, 권력을 손에 쥔 오늘날에는 유대인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키겠다는 말인가? 젊은 돌격대원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그것도 기꺼이 내버려 둔다 – 그에게 약속한 모든 것 가운데 채워 줄 수 있는 욕망은 오직 이 하나, 그의 살인욕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사회주의 추종자에게 빵과 일자리를 줄 수는 없고, 경제 위기를 없앨 수도 없으며, 했던 약속은 하나도 지킬 수 없다 – 그러나 소시민 대중에게 유대인을 박해하고 두들겨 패도록 허락하는 동안은, 이 대중이 자신들도 희생자인 거대한 사기에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히틀러 독일에서 유대인 증오 선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 박해가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때의 일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끔찍한 착각일 것이다. 그것은 체계적인, 그리고 거대한 민중 기만의 틀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정치적 수단이다. 괴벨스 장관 나리가 소책자 『나치-조치』(에허 출판사, 뮌헨)에서 무어라 말했던가.
“독일 민족의 자유는 유대인에 맞서서만 완성될 수 있다. 물론 유대인도 사람이다. … 그러나 벼룩도 동물이다 – 다만 유쾌한 동물이 아닐 뿐이다. … 우리 자신과 우리의 양심 앞에서 우리에게는 … 그를 해롭지 않게 만들 의무가 있다.”
8.3 “유대인들이 너를 바라본다”
반유대주의 선동이 결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온갖 수단으로 조직적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우리는 다시 한번 권력 장악 이후에 나온 출판물 가운데 하나만 골라 든다. 요한 폰 레어스 박사[123]라는 자가 쓴 『유대인들이 너를 바라본다』라는 책이다. 이것은 “독일 민족”에게 공포의 형상으로 보여 줄 작정인 사진들을 꽤 닥치는 대로 모아 놓은 것이다. 독일인과 외국인을 찍은 60장가량의 사진 가운데에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 가톨릭 지도자 에르츠베르거, “유대인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찾아낼 수 없는 빌리 뮌첸베르크, 그제진스키[124], 가톨릭교도인 쾰른 시장 아데나워, 목사의 아들 에르빈 피스카토어의 사진도 있다. 이들은 모두 민족사회주의 인종론의 의미에서 보더라도 “순혈” 독일인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아주 특징적이다. 히틀러 독일에서는 주장의 바탕이 되어야 할 가장 초보적인 사실조차 확인하려는 수고를 아예 하지 않는다. 주장하기만 하면 된다, 비방하기만 하면 된다. 히틀러 체제에 거슬리는 자는 이 체제에게 “유대인”이다. 그걸로 끝이다. “책임”이라는 개념은 이 민족사회주의 “작가”들에게 완전히 낯설다. 그들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있다. 누가 그들에게 해명을 요구하면, 거슬리는 질문자를 누구든 입 다물게 하는 데는 민족사회주의 돌격대로 충분하다. 그래서 아무도 가장 터무니없는 주장에조차 감히 반박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으니 선동에 넘어간 대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이 책은 – 새 체제를 움직이는 “정신”에 대해 참으로 계몽적인 효과를 낼 터이니 가장 널리 퍼지기를 바라야 할 책인데 – 그 밖에도 로자 룩셈부르크, 아인슈타인 교수, 게오르크 베른하르트, 리온 포이히트방거, 테오도어 볼프, 에밀 루트비히, 막스 라인하르트, 찰리 채플린, 알프레트 케르, 그리고 미국 은행가 오토 H. 칸의 사진을 싣고 있다. 민족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이 사진들에서 거부감을 일으킬 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은 이마가 높고, 영리하며 매우 진지한 눈빛을 지닌, 참된 지적 의의를 가진 남자들의 훌륭한 얼굴이다.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레어스 박사 나리가 이 사진들에 붙인 설명문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옆에는 “처단됨”이라고 적혀 있다. 레비네 옆에는 “처형됨”. 에르츠베르거 옆에는 “마침내 처단됨. 그를 쏘아 죽인 젊은 독일인들은 1933년 민족 혁명 뒤 소추를 면했다.” 아인슈타인 옆에는 짤막하게 “아직 교수형 안 당함”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이 레어스 나리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아직 살해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붙인다.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그의 저열하고 영혼 없는 예술 등등”이라고 한다. 채플린은 “지루한 만큼 역겨운 꼼지락거리는 꼬마 유대인”으로 불린다. 톨러에 대해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 뒤 제때 가둘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조차 사실이 아니다. 에른스트 톨러는 그때 이미 독일에 있지도 않았다. 목사의 아들 에르빈 피스카토어는 “볼셰비키 예술 유대인”으로 불린다. 은행가 막스 바르부르크와 카를 멜히오르 박사에게는 “매우 위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8.4 “유다여 뒈져라”
민족사회주의 “해외 언론 책임자” 한프슈텡글[125] 씨는 1933년 3월 27일 반관영 통신사 “텔레그라펜 우니온”의 미국인 대표에게 반공식 인터뷰를 했다. “유대인 학대에 관한 보도는 사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총리께서 몇 분 전, 베를린에서 도착하신 뒤 뮌헨 비행장에서 제가 뵈었을 때, 이 모든 보도가 통틀어 비열한 거짓말이라고 당신께 밝혀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유대인 박해에 관한 개별 질문에 한프슈텡글은 이렇게 답했다.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베를린 공사관이 조사한 결과,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살해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8.5 살해된 사람들
우리가 확인한, 돌격대에 사살되거나 맞아 죽은 유대인 명단에는 지금까지 43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43명의 피살자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유대인으로서 살해된 경우들이다. 이 43건의 믿을 만한,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한 사례는 실제 숫자의 한 단면, 한 조각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히틀러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더 정확히 개관할 수 있게 되면 그 숫자는 틀림없이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이 43명의 피살 유대인은 수백 명의 이름 가운데서 가려 뽑은 것이다. 아직 의심의 여지 없이 밝혀지지 않은 사례들은 모두 여기서 빼놓았다.
눈에 띄지 않는 부고가 그 “비극적 운명”을 알려 주는 유대인 견습공 킨더만은 1932년, 전혀 정치와 관계없는 유대인 체조 협회 “바르 코흐바”의 회원으로서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그 일로 민족사회주의자 한 명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에 “복수”하려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 젊은 킨더만은 베를린 헤데만 거리의 나치 병영으로 끌려가 말 그대로 맞아 죽었고, 거리에 내던져졌다. 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하켄크로이츠가 칼로 새겨져 있었다.
8.6 본보기 카셀
카셀의 O. M. 박사가 보낸 한 보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33년 3월 17일 금요일, 나치 무리가 카셀 시내를 휩쓸고 다니며, 무슨 이유에서든 자기들 눈에 거슬리는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끌어내 ‘재판’을 열었다. 눈여겨볼 점은 희생자들이 모두 한 번도 정치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학대의 원인은 언제나 NSDAP 유력 인사 한 사람의 쩨쩨한 앙심이었다. 특히 심각한 다음 사례들을 강조하고 싶다. 변호사 막스 플라우트 박사는 이날 큰 무리에게 사무실에서 끌려 나와 대열을 이룬 채 중심가를 지나 끌려갔다. 가는 길에 그는 고무 곤봉으로 얻어맞으며 ‘하일 히틀러’를 외치도록 강요당했고, 그럴 때마다 나치들 쪽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다음 플라우트는 NSDAP의 주된 집회장인 카를 거리의 뷔르거잘레로 끌려갔고, 거기서 이른바 즉결 재판이 그에게 열렸다. 확실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즉결 재판의 일원 가운데에는 현 카셀 국립극장 총감독인 전 오페라 가수 실링이 있었다고 한다. 플라우트는 직무상 비위를 저질렀다는 구실로 고무 곤봉 200대를 선고받았다. 형을 집행하려고 그를 집회장 밑에 있는 지하실로 데려가 형틀에 묶었다. 학대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거의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얼마 뒤 P.는 기절했는데, 물을 끼얹어 다시 의식을 되찾게 한 다음 이른바 간호사들이 술로 기운을 차리게 했다. 그가 어느 정도 다시 정신을 차리자 학대는 똑같은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 소름 끼치는 매질이 끝났을 때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피투성이가 된 채 한구석에 내버려졌다. 그 뒤 플라우트는 집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을 때까지 열흘을 더 앓아누웠다. 불려 온 의사들, 곧 신경과 의사 숄 박사와 주립 병원 원장 퇴니센 교수는 가장 끔찍한 부상을 확인했다. 내장, 특히 콩팥과 폐가 심하게 짓이겨진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등과 다리는 차츰 새까맣게 변했다. 플라우트는 병상에서 줄곧 마취 상태로 있어야 했다. 의식이 돌아오기만 하면 고통으로 거리에까지 들릴 만큼 끔찍하게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아주 건장한 사람이었던 플라우트 박사는 약 열흘 뒤 부상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같은 날 변호사 달베르크도 플라우트와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가장 심하게 학대당했다. 눈여겨볼 점은 달베르크가 얼마 전 법정에서 당시 변호사였던 현 국장 프라이슬러[126] 박사와 다툰 일이 있었고, 학대받는 동안에도 이 일로 추궁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베르크 변호사에 대한 고문이 당시 카셀 NSDAP의 최고 지도자였고 지금은 프로이센의 고위 관리인 이 자의 직접 명령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달베르크는 길게 기른 턱수염도 잘렸다. D.의 부상이 너무 심해서 의사들은 며칠 동안 다리 하나를 잘라 내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다리는 살릴 수 있었다. 달베르크는 지금도 학대의 후유증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다. 젊은 유대인 상인 모스바흐도 특히 심하게 학대당했다. 내가 아는 한 그에게 씌워진 죄는 기독교인 처녀와 사귀다 헤어졌다는 것뿐이었다. 나치들은 그의 집에 밀고 들어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를 끔찍하게 학대했고, 그는 머리와 척추에 중상을 입었다. 맨 처음 불려 온 의사 슈테판 박사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우파인 사람인데도, 전쟁 중에도 이렇게 소름 끼치는 광경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모스바흐는 오랫동안 생사의 갈림길을 헤맸지만 목숨은 건졌다. 또 같은 날 나치 집회장에서 상인 프로이덴슈타인이 몽둥이질로 중상을 입어 몇 주 동안 앓아누웠고, 상인 발도 그 뒤 꽤 오래 앓았다. 두 경우 모두 어떤 나치들의 개인적 복수였는데,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끝으로 예순이 넘은 은행가 플라우트 씨도 학대당했지만, 그렇게 심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헤센에서 나치의 만행은 결코 카셀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카셀 행정 구역에서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이런 일이, 그것도 때로는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과장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몇몇 마을에서는 남자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고향을 떠났고, 돌아왔다 해도 – 돌아온 경우에 한해서 –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8.6.1 강요된 진술서
베를린 남동구 스칼리처 거리에 사는 스물다섯 살의 기자이자 신문 《베를린 암 모르겐》의 기고자인 레오 크렐은 3월 16일 친위대원들에게 습격당해 끌려가 나치 병영에서 맞아 죽었다. 그의 시신은 유대인 묘지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다루는 것은 그 뒷이야기 때문이다. 늙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시체 안치소에서 확인하라는 편지가 왔다. 늙은 여인이 아들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과 온몸에 하켄크로이츠가 칼로 새겨지고 불로 지져져 있었다. 한때 그녀의 자식이었던 피범벅 덩어리가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이 일그러진 시신 앞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오랜 병 끝에 병원에서 죽었다”는 진술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런 진술서는 맞아 죽은 사람의 유족에게 어느 경우에나 요구된다. 유족 가운데 누가 좁은 테두리 안에서라도 진상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그는 “잔학 선동” 죄로 독일 법정에서 여러 달, 때로는 여러 해의 징역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대개는 가담한 돌격대원들이 친척에게 “주둥이를 닥치지” 않으면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될 거라고 위협한다.
8.6.2 확인된 300건의 야만적 학대
지금까지 확실히 신원이 확인된 훼손된 시신이 43구 – 그리고 반쯤 맞아 죽었거나 평생 불구가 된 사람은 몇천 명이란 말인가! 우리 손에 있는 300건이 넘는 확인된 소식 가운데 다음 것들을 싣는다. 4월 중순 여러 신문에, 여든이 넘은 대랍비 요나스 프렝켈이 베를린 중앙구 드라고너 거리 37번지의 자택에서 돌격대원들에게 습격당해 심하게 학대당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정부는 이 보도를 부인했다. 대랍비의 딸 엘라 프렝켈이 그 사실 경위를 자세히 전한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엘라 프렝켈의 서명 수기 「아버지는 어떻게 살해당할 뻔했나」를 싣는다. 필자의 생몰을 확인할 수 없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3월 7일 저녁 돌격대 보조경찰 세 명이 드라고너 거리 37번지 집에 들이닥쳤다. 둘은 딸에게 권총을 들이댔고, 셋째가 책상 앞의 아버지를 쏘았다. 총알 두 발이 머리를 스쳐 아버지는 피투성이로 쓰러졌다. 그들은 책상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 갔다. 거리는 나치와 경찰이 막고 있어 반 시간 동안 도움을 청해야 했다. 4월 8일 돌격대원들이 다시 와서, 유대인에게 습격당했다고 써 주면 앞으로는 건드리지 않겠다며 서명을 강요했다. 부녀는 서명 대신 도망을 택했다. 친구들이 아버지를 양탄자에 말아 대낮에 먼 동네로 옮겼고, 두 사람은 율법 두루마리만 챙겨 귀가 어두운 노인과 그를 돌보는 젊은 여자로 꾸민 채 기차를 탔다. 드레스덴 너머의 검문을 무사히 지나 국경을 넘었고, 라이헨베르크를 거쳐 프라하로 갔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가장 특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자세히 실었으며, 첨부한 사진과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여든이 넘은 노인, 대랍비가 죽은 줄 알고 내버려 둘 만큼 얻어맞고, 집은 약탈당한다 – 그런데도 부인 기계는 세계 언론에 이런 대랍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우겨 대는 뻔뻔함을 보인다!
8.6.3 회당에서 습격당하다
회당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 랍비 베라이시는 뒤스부르크에서 예배 중에 회당에서 습격당해 학대받았다. 그들은 그를 거리로 끌어내 검정·빨강·금색 깃발로 휘감았다. 그는 이런 차림으로 날뛰는 군중 한가운데서 매질의 줄을 지나가야 했다. 끝내 그는 “거리에서 공공의 소란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겔젠키르헨의 랍비는 안식일 예배 중에 신앙심 깊은 유대인 여럿과 함께 회당에서 쫓겨나 시내 거리를 지나 돌격대 병영까지 끌려갔다. 그곳에서 모두 얼굴을 벽에 대고 서서 무릎 굽혀 펴기를 해야 했다. 랍비가 이 만행에 항의하자, 그를 사다리 위에 눕혀 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풀려난 뒤 그는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서지도 앉지도 못할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풀려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체포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각서에 서명해야 했다.
8.6.4 포그롬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1933년 4월 24일 자는 이렇게 보도한다. “비스바덴, 4월 23일. 토요일 저녁 이곳에서 사망자가 난 습격 사건 두 건이 일어났다. 상인 잘로몬 로젠슈트라우흐와 우유 장수 막스 카셀의 사건이다. 경찰 보고는 카셀 살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토요일 23시 30분, 베버 골목 43번지 건물의 한 집에서 살려 달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동시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거리를 지나던 한 자동차 운전사가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살려 달라는 외침이 혼자 사는 쉰아홉 살의 우유 장수 막스 카셀의 집에서 나왔음을 확인했다. 집 안에 들어선 경찰관들은 카셀이 한 방의 바닥에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신에는 치명적인 총상이 있었다. 이어진 조사에서 여러 사람이 문의 유리와 문짝 판을 깨고 강제로 집에 침입해, 집의 창문 쪽으로 달아나던 남자를 쏘아 쓰러뜨렸음이 밝혀졌다. 총탄은 9밀리미터 구경 군용 권총에서 발사되었다. 조사 결과 범인들이 강도를 꾀했다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복수극으로 보인다.’
두 번째 사건에 대해 공식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토요일 21시 45분경 경찰은 빌헬름 거리 20번지에 사는 쉰여덟 살의 상인 R.의 집으로 불려 갔다. 집의 한 방에 R.이 겨우 숨만 붙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의사의 지시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송 도중 R.은 심장 마비로 숨졌다. 집에 남아 있던 가정부는 21시 10분쯤 젊은 남자 두 명이 현관문의 초인종을 누르고 R.을 찾았다고 진술했다. R.이 나타나자 두 남자는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그중 한 명이 R.에게 권총을 들이댔다. R.은 한 방으로 달아났고, 거기서 흥분한 나머지 쓰러졌다. 두 침입자는 찾아온 이유를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채 곧바로 집을 떠났다. 그 처녀의 묘사에 따르면 20세에서 23세 사이의 젊은이 둘이었다. 한 명은 회색 웃옷에 짙은 회색 바지, 회색 중절모 차림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짙은 회색 양복에 회색 모자 차림이었다.’”
이것은 당국이 스스로 공표한 몇 안 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감춰지고 알려져서는 안 되는 수천 건의 만행이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돌격대의 오락거리는 가지가지다. 어느 날 베를린의 한길에서 회당지기 P.의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돌격대원 무리에게 습격당했다. 그들은 이 불행한 젊은이를 붙잡았고, 독일의 쇄신자 가운데 한 명이 그 젊은이의 오른쪽 종아리를 두 번, 왼쪽 종아리를 두 번 총으로 꿰뚫는 “장난”을 쳤다. 회당지기 P.의 아들은 석 달이 지나도록 아직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성 헤드비히 병원에, 그다음에는 베를린 유대인 병원에, 마지막에는 정신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는 아마 평생 마비된 채 살게 될 것이다.
8.6.5 강간
젊은 유대인 재봉사 K. L.은 베를린 중앙구 아우구스타 거리 35번지의 집에서 끌려 나와 카스타니엔 가로수길의 돌격대 병영으로 끌려갔다. 그녀의 죄는 기독교인 청년과 친하게 지낸 것이었다. 병영에서 그들은 그녀를 돌격대원 서른 명쯤이 있는 방으로 데려갔고, 그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어 옷을 찢어 벗기고 두들겨 팼다. 그다음 그녀는 다른 사람 열 명쯤이 더 있던 계단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자 돌격대 지휘관 에리히 슐츠가 그녀를 데려가 강간했고, 다른 돌격대원 두 명을 더 데려오려고 자리를 떴다. 나중에 그는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앞으로 매일 저녁 자기에게 오기만 하면 더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외국으로 달아나려 하면 총살될 것이며, 그녀를 감시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그러자 K. L.은 풀어 달라고 빌었다. 에리히 슐츠는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나갔다가, 얼마 뒤 그녀를 데리러 돌아왔다. 그는 그녀를 돌격대 병영 맞은편에 있는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녀의 옷이 완전히 찢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거기서 새 옷을 얻어 입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8.6.6 소도시와 시골 마을
확인을 거친 다음 투고를 원문 그대로 여기에 싣는다.
“메르겐트하임 가까이 있는 뷔르템베르크의 작은 도시 니더슈테텐에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 그 구성원들은 대부분 상인이며, 당연한 일이지만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보다는 우파 정당 쪽에 더 가깝다. 니더슈테텐의 기독교도 주민과 유대인 주민 사이에는 아주 최근까지도 아무 탈 없는 관계가 이어졌다. 부활절을 여드레쯤 앞둔 어느 날 이른 아침, 돌격대 한 부대가 니더슈테텐에 나타나 시청을 점거하고 경찰권을 넘겨받았다. 그다음 유대인들의 집을 뒤져 공산주의 문서를 찾았다. 물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대인 열 명이 – 모두 자기 도시에서 존경받는 시민이었다 – 시청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한 사람씩 방에 데려가 재갈을 물리고 의자 위에 내던진 뒤, 거의 의식을 잃을 때까지 강철 회초리로 내리쳤다. 그런 다음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을 뿐인 이 불행한 사람들을 모두 시청 강당으로 데려갔고, 그들은 차례로 벽 앞에 – ‘통곡의 벽’ 앞이라고 그들은 비웃으며 말했다 – 줄을 서야 했다. 파시스트식 경례로 손을 든 다음에야 그들은 시청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학대를 당한 탓에 너무 쇠약해져서 가족들이 업어 가거나 차로 실어 가야 했다. 학대당한 사람은 모두 몇 주 동안 앓아누웠고, 그중 한 명은 말을 잃기까지 했다.
니더슈테텐의 비유대인 주민 전체가, 그것도 3월 5일 선거에서 대부분 민족주의 정당을 찍었던 그들이 이 사건에 경악했다는 점은 강조할 만하다. 한 늙은 농부는 고개를 저으며 ‘히틀러가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을 텐데.’ 하고 말했다. – 이 노인은 아무래도 라디오가 없는 모양이다. 라디오가 있다면, 이 ‘독일 사나이들’(듣자 하니 네카어 강변의 하일브론에서 왔다고 하며, 다른 곳에서는 더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이 지금 독일을 이끄는 자들이 저녁마다 요란한 연설로 자기들의 목표라고 선포하는 바로 그것을 실행했을 뿐임을 알 텐데.”
시골의 사정에 관한 이 보고들을 보충하려고, 우리는 “노이슈타트 암 아이히 유대인 퇴치 행동 위원회”가 1933년 5월 18일 이 소도시의 지역 신문에 낸 다음 호소문을 덧붙인다.
“… 우리의 투쟁 목표는 노이슈타트에서 유대인과 유대인의 앞잡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해당자들이 아직 알아듣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해, 우리는 이를 다시 한번 아주 분명하게 밝혀 두고자 한다. … 그런데도 여전히 유대인 편을 들어야 한다고 믿는 자는 우리 눈에 불한당이며, 우리는 그자를 유대인과 똑같이 다룰 것이다. …”
8.6.7 돌격대 병영에서
베를린 중앙구 X 거리 43번지의 K. W.는 베를린 Y 거리 돌격대 병영에서 겪은 일에 대해 무엇보다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스물여섯 살의 유대인 한 명도 끌려왔다. 그가 나중에 내게 이야기한 바로는,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체포되었고, 정치에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며 투표하러 간 적도 한 번도 없었다. 먼저 손톱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일부는 뽑아 버렸다. 그다음 보조 경찰들이 누가 그를 두들겨 팰지를 놓고 다퉜다. 그를 끌고 온 자들이 그 권리를 자기들에게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를 데려온 보조 경찰은 ‘패지도 못할 거면 이 유대인을 데려올 필요도 없었잖아.’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자들이 ‘너 취했어. 가서 술부터 깨고 와.’라고 했다. 보조 경찰 대부분은 술 냄새가 지독했다. 그다음 그 유대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얻어맞았다. 소 힘줄 채찍, 강철 회초리, 고무 곤봉으로. 그다음 맨 엉덩이에 알코올을 붓고 그러면서 때렸다. 그다음 가슴에 단검을 들이대고는 ‘이제 넌 찔려 죽는다.’라고 했다. 그들은 그에게 작은 상처를 내고 ‘내일 아침에 넌 찔려 죽는다.’라고 했다. 나는 5시 15분에 심문을 받으러 갔다. 내게서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자 나는 마흔 명쯤 누워 있는 침실로 보내졌다. 나 자신은 고무 곤봉으로 몇 대 맞고 발길질을 몇 번 당했을 뿐이다. 이른바 살인자 감방이라는 것도 있었다. 거기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맞았다. 그중 한 명은 벌써 끈으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아침 7시에 돌격대 당직 장교가 왔다. 그다음 우리는 아침밥을 받았다. 커피와 맨빵이었다. 그다음 마당에서 교련을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우리 총리 아돌프 히틀러에게 승리 만세!’를 외쳐야 했다. 교련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독일」과 「나에게는 전우가 있었네」를 불러야 했다. 그다음 폴란드와 전쟁이 나면 조국을 지키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예’라고 대답했다. 풀려나면 무엇을 하겠느냐, 돌격대에 들어가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역시 ‘예’라고 대답했다. 유대인들은, 열 명쯤이었는데, 따로 교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운동은 머리털을 나게 하고 배 근육을 튼튼하게 하며 엉덩이에 건강한 빛깔을 준다’ 같은 저속한 문구를 외쳐야 했다.”
8.6.8 폴란드의 항의
외국 관청들이 발표한 수많은 보도와 항의 가운데 다음 것을 옮긴다.
“베를린, 3월 30일. – 베를린 주재 폴란드 공사 비소츠키[127] 씨는 폴란드 국적 유대인들이 히틀러 무리에게 당하고 있는 박해에 대해 독일 정부에 항의했다. 비소츠키 씨는 무엇보다 베를린 시내에서 일어난 다음 사례들을 들었다. 3월 4일 이스라엘 바이스 씨는 집에서 끌려 나와 한 차고로 끌려갔고, 거기서 의식을 잃을 만큼 학대당했다. 그 뒤 그는 경찰서로 넘겨져 3월 6일까지 붙잡혀 있었다. 학대하는 동안 히틀러 추종자들은 그의 여권과 반지를 빼앗고 돌려주지 않았다. 3월 6일 아브라함 라이프 미텔만 씨가 습격당해 한 술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심하게 학대당하고 역겨운 액체를 마시도록 강요당했다. 이 학대로 라이프 미텔만은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7일 마이어 불켄과 그의 조카딸이 히틀러 무리에게 고무 곤봉으로 두들겨 맞아 두 사람 모두 의식을 잃었다. … 등등. 특히 켐니츠와 플라우엔에서 히틀러 추종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대미문의 잔인함을 보였다. 켐니츠에서 체포된 폴란드 국적 유대인들은 모두 감시를 받으며 시내로 끌려가, 선거 기간부터 남아 있던 공산주의 벽 구호를 지워야 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퍼붓는 더없이 상스러운 욕설을 들으며 이 일을 했다. 폴란드 국민 아달베르트 다프너는 말채찍으로 50대를 맞았다. 한 대 맞을 때마다 그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했다. 잘로 루빈슈타인은 학대를 당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도 몸에 수많은 상처와 흔적이 남아 있을 만큼 심하게 학대당했다. 히틀러 무리가 많은 유대인을 가두어 놓은 플라우엔 교도소에서는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폴란드 영사의 개입으로 츠비카우와 팔켄슈타인에서 폴란드 국적 유대인 여덟 명이 풀려났지만, 당한 학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12일 폴란드인 시몬 헤르‥안이 드레스덴의 자택에서 돌격대원들에게 습격당했다. 그는 끔찍하게 학대당하며 복도로 질질 끌려갔고, 복도에는 며칠 뒤에도 핏자국이 보였다.”
8.6.9 미국의 항의
3월 9일 베를린발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사 새킷은 미국 국민에 대한 학대에 항의했다. 그는 베를린에서만 며칠 사이에 일어난 여러 사례를 근거로 들었다.
“베를린에서 여러 유대인이, 그 가운데에는 미국 국적자도 몇몇 있었는데, 폭행을 당했다. 이를테면 집주인으로서 민족사회주의자 세입자를 집에서 내보내 달라고 신청해 허가를 받아 낸 미국 시민 막스 쉬슬러 씨에게 한밤중에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집 안에 들어가려고 경찰관을 사칭했다. 그들은 쉬슬러 부인의 침실에 밀고 들어가 그녀에게 자기들 앞에서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그다음 쉬슬러 씨에게 진술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그에 따라 민족사회주의자 세입자의 퇴거를 철회해야 했다. 또 다른 미국 시민 레오 야페 씨는 쿠르퓌르스텐담에서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얻어맞았다. … 등등.”
8.6.10 체코슬로바키아 공식 통신사의 4월 2일 보도
“바른스도르프 병원에 독일에서 온 학대당한 난민 네 명이 입원해 있다. 그들은 어젯밤 1시, 지금 강제 수용소로 쓰이는 작센의 하이네발데 성에서 돌격대원 열두 명에게 화물차에 실려, 바른스도르프 근처 작센의 그로스쇠나우 마을로 호송되었다. 이들은 유대인 네 명으로, 한 명은 오스트리아 국민, 두 명은 폴란드인, 네 번째는 무국적자다. 바른스도르프 근처 국경에서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네 사람은 차에서 내려져 풀밭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쪽으로 달아나려 하자 여러 발의 총탄 세례를 받았다. 네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그중 한 명은 다른 상처들 말고도 두개골 골절을 입어 신문을 받을 수 없는 상태다.”
8.6.11 국경에서
국경 마을의 돌격대와 친위대는 물론 갈색 테러의 희생자들이 달아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달아나려다 붙잡힌 독일 국민은 누구나 반역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외국 국민들조차 갈색 나리들의 횡포에서 안전하지 않다. 프라하에서 이런 보도가 들어왔다.
“날마다 아침이면 수백 명을 프라하로 실어 오는 베를린–아테네 급행열차가 4월 1일에는 한 시간 늦게, 승객 단 세 명만 태우고 프라하에 도착했다. 내린 승객들은 드레스덴에서 벌어진 장면을 공증인 앞에서 진술했다. 승강장에는 열차 양쪽에 민족사회주의자들이 늘어서 저지선을 쳤고, 다른 한 부대가 객차 안에 나타나 ‘유대인은 나와!’라고 명령했다. 유대인 승객은 외국인까지 모두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그다음 나머지 승객들의 서류도 조사했고, 그들 역시 내리도록 강요당했다. 승강장에서 승객들은 나란히 줄을 서야 했고, 이어서 ‘좌향좌, 앞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대열은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양옆을 둘러싸인 채 역 출구 쪽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강제로 독일을 떠나지 못하게 된 사람들 – 그 가운데에는 여자와 아이도 많았다 – 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8.7 프랑스 대랍비의 성명
프랑스 대랍비[128]는 독일 관청들의 부인 성명과 관련하여 《프티 주르날》의 기자에게 독일의 반유대주의 폭거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만행에 관한 보도가 절대적으로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와 사진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난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그것을 검증할 수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출처에서 나온 문서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출처를 당신에게 밝힐 수는 없습니다. 이 문서들 가운데 일부는 공식적 성격을 띠며 외국 정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까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라 희생자와 순교자를 낳는 잔혹한 박해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내몰린다면, 우리는 이 문서들을 공개할 것입니다.”
8.7.1 “훨씬 더 끔찍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은 이렇게 확인한다.
“선거 이래 나치가 저지른 테러 행위의 사례들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것들은 테러가 처음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보여 준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언론은 독일 언론이 주장하듯 사실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참상을 과소평가했다. 하기야 사실 자료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외국 언론에 알려졌으니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테러가 가장 극심하게 – 베를린보다도 더 극심하게 – 날뛴 곳은 카셀인 것 같고, 다음으로 사면받은 페메 살인자 하이네스가 갈색 셔츠단을 지휘하는 슐레지엔, 그리고 보름스와 그 밖의 많은 작은 도시와 마을들이다.
지난 4주 동안 오버헤센의 마을들에서만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그려 낸다면 소름 끼치는 보고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몇몇 개별 사례 이상을 정확히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보복 조치에 대한, 그리고 징역형에 대한 전반적인 공포 때문에 모든 조사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 남자가 한 유대인이 갈색 셔츠단에게 목매달렸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 ‘소문’은 실제로는 사실이었다.
그 유대인, 아무개 씨는 갈색 셔츠단에게 두들겨 맞고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렸고, 그의 머리는 땅바닥 위에 늘어져 있었다. 갈색 셔츠단이 하던 짓을 끝냈을 때 그는 죽어 있었다. 자기 나라에서 그 끔찍한 테러에 관해 참말 한마디를 하는 독일인은 무서운 학대와 오랜 징역, 심지어 죽음까지 무릅써야 한다. 누구에게도 그런 위험을 떠맡으라고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8.7.2 아인슈타인의 호소
살인과 공포의 이 장을 하나의 인간적인 기록, 독일에서 쫓겨난 아인슈타인 교수의 호소로 끝맺기로 하자.
3월 27일 이 학자는 증기선 벨겐란트호를 타고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그는 배 위에서 「국제 반유대주의 반대 연맹」 대표단의 환영을 받았고, 그들에게 손수 쓴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건넸다.
“독일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자유로운 정신과 유대인을 겨냥한 잔인한 폭력과 억압의 행위들은 다행히도 인도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충실한 모든 나라의 양심을 일깨웠다. 국제 반유대주의 반대 연맹은 이 독에 물들지 않은 여러 민족을 하나로 묶어 정의를 지켜 냄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이 반발이 유럽이 오래전에 지나간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만큼 강하기를 바란다. 이토록 심하게 위협받고 있는 우리 문명의 모든 벗이 이 세계의 정신병을 없애는 데 힘을 모으기를. 나는 여러분과 함께한다.”
8.8 보이콧
민족사회주의는 존재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공격당하고 박해받고 위협받는 쪽으로 그려 내는 방법을 써 왔다. 히틀러주의가 조직한, 그 전까지 독일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정치 테러는 언제나 조직된 거짓말과 손을 맞잡고 움직였다. 유대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과 독일 유대인에 대한 예외 규정들은 이런 방법의 비할 데 없는 광경을 세계에 보여 준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강령에 들어맞는다, 독일에서 유대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은 여러 해 전부터 우리의 기본 요구다, 라고.
그러나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보이콧을 정당화하려고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공격당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우리 가엾은 독일인들을 절멸하려 한다! 우리는 극도의 정당방위로 행동하는 것이다!” 조직된 테러는 “방어 운동”이라고 불렸다.
“독일 민족 동지 여러분, 독일 여성 민족 동지 여러분! 이 미친 범죄, 이 비열한 만행 선동과 보이콧 선동의 책임자는 독일에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외국에 있는 자기 인종 동포들에게 독일 민족에 맞서 싸우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과 중상을 바깥으로 알렸습니다 … 그러므로 독일 자유 운동의 제국 지도부는 이 범죄적 선동을 막기 위하여 1933년 4월 1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모든 유대인 상점, 백화점, 사무소 등에 보이콧을 선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 여성과 남성 여러분, 이 보이콧을 따르라고 우리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유대인 상점과 백화점에서 사지 마십시오! 유대인 변호사에게 가지 마십시오! 유대인 의사를 피하십시오!”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제국 지도부는 3월 28일 모든 당 조직에 호소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독일 유대인들은 “민족 정부”에 맞선 “만행 선동”을 꾸며 냈다는 비난을 받았다.
8.8.1 11개 강령 조항
같은 날 보이콧 실행을 위한 악명 높은 11개 강령 조항이 발표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싣는다.
“1. NSDAP의 모든 지역 지부와 조직 단위에는 유대인 상점, 유대인 상품, 유대인 의사, 유대인 변호사에 대한 보이콧을 실제로, 계획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행동 위원회를 즉시 구성해야 한다. 행동 위원회는 보이콧이 무고한 사람에게는 미치지 않되 죄 있는 자에게는 그만큼 더 가혹하게 미치도록 책임진다.
2. 행동 위원회는 종파, 출신,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외국인을 최고도로 보호할 책임을 진다. 보이콧은 순수한 방어 조치이며, 오로지 독일 유대인만을 겨냥한다.
3. 행동 위원회는 선전과 계몽을 통해 보이콧을 즉시 대중화해야 한다. 원칙: 어떤 독일인도 더는 유대인에게서 사지 않으며, 유대인과 그 배후 인물들이 권하는 상품을 사지 않는다. 보이콧은 전면적이어야 한다. 보이콧은 온 민족이 떠받치는 것이며, 유대인을 가장 아픈 곳에서 타격해야 한다.
4.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뮌헨의 중앙 위원회에서 다른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 그런 상점에 대한 보이콧을 보류한다.
5. 행동 위원회는 신문들이 외국에서의 유대인 만행 선동에 맞선 독일 민족의 계몽 운동에 얼마나 참여하는지를 가장 엄격하게 감시한다. 신문이 이를 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만 한다면, 그 신문이 독일인이 사는 모든 집에서 즉각 치워지도록 살펴야 한다. 어떤 독일 남자도, 어떤 독일 상점도 그런 신문에 더는 광고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신문은 독일 민족이 아니라 유대인 인종 동포를 위해 쓰인 것으로서 공공의 경멸을 받아야 한다.
6. 행동 위원회는 유대인 만행 선동이 독일의 노동에, 따라서 독일 노동자에게 미치는 결과에 관한 계몽 선전을 사업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야 하며, 특히 독일의 노동을 지키는 방어 조치로서 민족적 보이콧이 필요하다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깨우쳐야 한다.
7. 행동 위원회는 특히 농촌에서 유대인 상인들을 타격하기 위해 가장 작은 농촌 마을에까지 뻗어 나가야 한다.
8. 보이콧은 흩어져서가 아니라 일거에 시작한다. 이런 뜻에서 모든 준비 작업을 즉각 갖추어야 한다. 돌격대와 친위대에는 보이콧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보초를 세워 주민들에게 유대인 상점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도록 하는 명령이 내려진다. 보이콧은 4월 1일 토요일 오전 10시 정각에 일거에 시작한다. 보이콧은 당 지도부의 명령이 해제를 지시할 때까지 계속된다.
9. 행동 위원회는 가장 작은 마을에까지 미쳐야 하는 수만 개의 대중 집회에서, 모든 직업에서 유대인의 고용을 독일 인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에 맞추는 상대적 수치를 도입하라는 요구를 즉시 선전한다. 행동의 타격력을 높이기 위해 이 요구는 우선 세 분야로 한정한다. a) 독일 중등학교와 대학교 재학, b) 의사 직업, c) 변호사 직업.
10. 행동 위원회는 나아가 외국과 어떤 연줄이든 가진 모든 독일인이 그 연줄을 이용하여 편지와 전보와 전화로 독일에는 평온과 질서가 지배하고 있으며, 독일 민족은 평화롭게 자기 일을 하며 다른 세계와 평화롭게 사는 것보다 더 간절한 소망이 없고, 유대인 만행 선동에 맞선 투쟁을 오로지 순수한 방어 투쟁으로서만 벌이고 있다는 진실을 계몽적으로 퍼뜨리도록 할 임무를 진다.
11. 행동 위원회는 이 투쟁 전체가 더없이 평온하게, 최대한의 규율 속에서 진행되도록 책임진다. 앞으로도 유대인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말라. 우리는 이 조치들의 단호한 위력만으로 이 선동을 끝장낼 것이다.”
이 호소문에는 장황한 성명이 따라붙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떳떳하지 못한 양심의 징표였다 — 그러나 이 신사들이 언제나 그렇듯 유별난 기세 좋음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여! 토요일 10시 정각,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누구에게 싸움을 걸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8.9 적임자!
“제3제국”의 신사들은 이 “방어 행동”의 우두머리로 뉘른베르크의 잡지 《데어 슈튀르머》의 발행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를 임명했다. 이 기관지가 한때 수십만 부에 이르는 발행 부수를 기록했는데도, 독일 바깥 세계에서는 《데어 슈튀르머》가 어떤 신문인지 모를 것이다. 《데어 슈튀르머》는 흔한 수준의 반유대주의 선동지가 아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독일에서 사람들이 읽어 온 온갖 추잡함을 훨씬 뛰어넘었다. 《데어 슈튀르머》는 언제나 시궁창의 산물이었다. 이 신문은 “유대인 문제”를 포르노그래피로 다루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추잡한 제목들 가운데 몇 개만 들어 보자.
「키칭겐의 하녀 능욕자 오스카 그로스」
「금발 소녀들, 국제 인신매매의 제물」
「야코프 광장의 속옷 추문」
「플라우엔 교회 광장의 사설 호텔」
「경찰의 금지령과 체펠린 들판의 매음굴」
이런 업적들이 슈트라이허 씨에게 NSDAP 대열 안에서 출세하고, 마침내 보이콧 운동의 위원으로 임명될 자격을 주었다. 슈트라이허는 중상, 협박, 그 밖의 “정치적” 범죄로만이 아니라 “공갈”로도 여러 번 유죄 판결을 받았다.
슈트라이허 씨는 지체 없이 자기 협력자인 《데어 슈튀르머》의 편집자 홀츠[129]를 행동 위원회의 자기 대리로 삼았다. 홀츠 역시 여러 번 형법과 충돌했다. 그는 “정치적 반대자를 고의로 거듭 중상”했다는 이유로 바이에른 법원에서조차 금고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만취와 난폭 행위로도 여러 번 처벌받았다. 그와 슈트라이허는 20세기에 와서 의례 살인이라는 동화를 아주 진지하게 새삼 퍼뜨렸다. 한 판결문에 따르면, 홀츠는 이 동화를 더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그것을 현재로 옮겨 놓았고, “조금의 근거도 없이 뉘른베르크의 존경받는 지도적 인사들을 거기 가담한 자로, 의례 살인자로 등장시켰다”.
슈트라이허 씨는 3월 30일 “민족 언론인”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독일 유대인들에게 예배 거행마저 힘으로 금지하고, 무장한 돌격대원들을 시켜 그들이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제 돌은 굴러가기 시작했으며, 만행 선전이 멈추든 말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외국의 이 반히틀러 선전은 반가운 구실을 주었을 뿐이고, 행동은 실행될 것이며, 돌격대원들이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이라고 했다. 그 자신, 슈트라이허는 사태의 진전에 아주 만족하며, 지난 몇 주 동안 그의 유일한 걱정은 유대인에 대한 절멸 투쟁이 혹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랬다면 – 이것이 그의 굳은 확신이다! – 민족 혁명은 자신의 불충분함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은 이제 마침내 결정적으로 제거되었으니, 자기가, 슈트라이허가 유대인을 상대로 철저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어 달라고 했다!
8.9.1 보이콧 준비
보이콧을 앞둔 마지막 며칠 동안 유대인 선동은 체계적으로 고조되었다. 그 본보기로 “대표적인” 연설 하나를 싣는다. 새로 임명된 프랑크푸르트 경찰청장 폰 베스트렘 장군[130]의 연설로, NSDAP 기관지 《프랑크푸르터 폴크스블라트》 3월 30일 자에서 옮긴 것이다.
“어떤 돌격대원도 유대인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유대 놈은 자기와 동격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독일 땅에서 태어난 짐승들이 사디즘적이고 아시아적인 도살법 아래 고통스럽게 죽어 가야 하는 것을 더는 참지 않겠다. 유대 놈이 우리 고기를 먹을 수 없다면, 세계대전의 굶주린 겨울에 여러분이 그랬듯 순무와 감자를 먹으면 될 것이다. 독일은 깨어났다. 유대인들이여, 떨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남을 것이다. 너무도 합법적이어서 그 합법성이 아마 너희에게 거북해질 것이다. 그러면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서로의 가죽을 벗기면 될 것이다!”
8.9.2 행동 위원회
민족사회주의 당 지도부의 명령이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곳곳에 행동 위원회가 꾸려졌고, 어떤 상점, 백화점, 변호사 사무소 등이 유대인 손에 있는지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대인 상점 보이콧 중앙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행동 위원회는 확인된 유대인 상점의 목록을 돌격대와 친위대에 넘겨, 이들이 1933년 4월 1일 토요일 오전 10시 정각에 감시 보초를 세울 수 있게 한다. 감시 보초의 임무는 자기들이 감시하는 상점이 유대인 상점임을 공중에게 알리는 것이다. 폭력으로 나서는 것은 금지된다. 상점을 닫는 것도 금지된다. 유대인 상점을 알리기 위하여 그 출입문에 검은 바탕에 노란 얼룩을 그린 포스터나 팻말을 붙여야 한다. 보이콧당하는 유대인 상점은 비유대인 직원과 노동자를 해고해서는 안 되며, 해고 통지를 해서도 안 된다. 행동 위원회는 금요일 저녁 모든 곳에서 정치 지도부와 협의하여 대규모 대중 집회와 시위 행진을 연다. 토요일 오전 늦어도 10시까지 도시와 마을의 모든 광고탑에 보이콧 호소문 포스터를 붙여야 한다. 같은 시각 화물 자동차에, 더 좋게는 이삿짐 차에 다음 현수막들을 여기 적힌 순서대로 달고 거리를 달려야 한다.
“유대인의 만행 선동과 보이콧 선동을 막아 내자”
“모든 유대인 상점을 보이콧하라”
“유대인 백화점에서 사지 말라”
“유대인 변호사에게 가지 말라”
“유대인 의사를 피하라”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
방어 운동의 자금을 대기 위해 위원회는 독일 상인들 사이에서 모금을 조직한다.
4월 1일을 앞둔 며칠 동안 제국의 모든 광고탑에는 이런 공고가 붙어 있었다.
“토요일 아침 10시까지 유대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다음엔 싸움이 시작된다! 온 세계의 유대인이 독일을 절멸하려 한다! 독일 민족이여! 너 자신을 지켜라! 유대인에게서 사지 말라!”
여러 부처도 저마다 소관에 따라 적용할 보이콧 조치에 관해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명령들은 「예외 “법”」 절에서 더 알게 될 것이다. NSDAP와 연계된 모든 단체, 모든 하부 부서, 대관구 등이 세세한 규정을 내렸다. 아무리 하찮은 당 관리라도 자기 지시를 내세워 잘난 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보이콧 진행에 관한 보도 가운데 특징적인 공식 보도 몇 가지를 싣는다. 이것들은 특히 중소 도시들에서 돌격대가 폭력을 쓰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콘티 통신(WTB)은 작센의 안나베르크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오늘 오전 이곳에서는 강력한 친위대와 돌격대 부대가 유대인 상점 앞에 진을 치고, 가게를 나서는 손님 하나하나의 얼굴에 ‘우리 배신자들은 유대인에게서 샀다’는 글귀가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NSDAP의 명령에 따르면 유대인 상점은 내일부터에야 보이콧될 수 있다. 콘티 통신이 들은 바로는 베를린에서도 안나베르크와 비슷한 조치가 예정되어 있다.”
독일 민족주의 계열의 《라이프치거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은 4월 1일 자로 카셀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방어 행동은 카셀에서도 오전 10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티츠 백화점 앞 프리드리히 광장에는 광장 한쪽 네모난 구역이 철조망으로 우리 모양으로 둘러막혔고, ‘유대인에게서 물건을 사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국민을 위한 강제 수용소’라는 글귀를 쓴 팻말이 붙었다. 철조망 우리 안에는 살아 있는 당나귀 한 마리가 들어 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신 연합[131]의 3월 31일 자 라이프치히발 다른 보도는 이렇다.
“가게에서 나오는 손님들은 사진이 찍혔다. 여러 백화점이 이미 문을 닫았다.”
8.9.3 “도발자들”
민족사회주의 당 지도부는 고삐 풀린 돌격대 무리의 피할 수 없는 만행과 폭거가 운동의 책임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두었다. 며칠 전부터 “공산주의 도발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나왔고, 그래서 이날 벌어진 짐승 같은 짓 대부분은 일관되게도 순전히 지어낸 이 “공산주의 도발자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돌격대 대열에 서 있는 자들이다. 돌격대 특공대가 중간급이나 고위 간부의 지시에 따라 “체포를 했고, 그때 이런저런 ‘유대 돼지’가 다쳤다”는 사실을 모든 경우에 부인할 수는 없었다.
8.9.4 쓰레기통에 실린 판사들
쾰른에서 한 목격자가 이렇게 전한다. “쾰른에서는 3월 31일 금요일, 라이헨스페르거 광장의 고등 법원 앞에서 형언할 수 없이 비열한 장면이 벌어졌다. 나치 녀석들이 고등 법원 건물로 쳐들어가, 미리 그곳으로 불러 놓은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을 힘으로 밖으로 몰아냈다. 밖에서 그들은 많은 구경꾼이 보는 앞에서 쓰레기 수거차에 실려 군중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변호사와 판사 몇몇은 아직 법복을 입고 있었다. 수레에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운송’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었다. 경찰은 손 놓고 구경했다. 그다음 수레들은 경찰청으로 갔고, 거기서 실려 온 사람들은 보호 구금될 예정이었다. 공식 보도는 뻔뻔한 날조로서 이러했다. 쾰른에서 친위대원들이 경찰과 협의하여, 법원 건물 앞에 많은 군중이 모여들자 상당수의 유대인 판사와 변호사를 그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보호 구금했다.”
이 보이콧에도 한계는 있었다 — 바로 이윤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이 모든 조치가 결과적으로 유대인 중간층과 프롤레타리아 유대인 계층만을 쳤을 뿐 유대인 자본가는 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앞으로 더 듣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관광업이 위협받는 듯 보이는 곳에서는 온갖 편견도, 온갖 인종 증오도 뒤로 물러나야 하고, 그곳에서는 갑자기 “유대 놈”이 더는 열등 인간도, 더는 “세계의 역병”도 아니고, 그저 대환영받는 돈 내는 휴양객일 뿐이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보도를 들어 보자.
“비스바덴, 5월 말. 올해 휴양 사업은 지금까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이를테면 외지인 수는 비스바덴에서 언제나 성수기인 5월 첫 주에 1744명에 그쳤고, 이어진 대축제 주간에도 1808명으로 오르는 데 그쳤으며, 그다음 주인 네덜란드 주간에는 다시 1760명으로 줄었다. 5월 중순까지 외지인 총수는 겨우 2만 7천 명이었다. 그러므로 시 참사회, 휴양 관리청, 민족사회주의 지구 지도부가 국내외의 모든 관계 기관에 보내는 호소문에서, 비스바덴의 온천과 그 밖의 치료 수단은 새 정부 아래서도 여전히 모든 나라에서 치료와 휴양을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제공되며, 이곳의 평온과 질서는 결코 깨진 적이 없다고 알리는 것은 휴양 산업의 이익에 맞는 일이다.” 이어서 이렇게 쓰여 있다. “비스바덴 행정을 책임진 기관들은 오래 머물든 잠시 머물든 비스바덴을 찾는 모든 이에게, 종파와 신념에 관계없이,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며 쾌적한 체류를 보장한다.”
8.10 예외 “법”
4월 1일의 공공연한 보이콧은 더 계속되지 않았다. 민족사회주의 언론과 당은 이 역사적인 토요일이 “일련의 조치를 위한 총연습으로만 여겨져야 하며”, 그 조치들은 “지금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계 여론이 결정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실행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도 말이다. 자, 세계 여론은 이날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제3제국”에 불리하게. 독일의 권력자들은 그것을 아주 빨리 알아챘다. 보이콧 전에 이미 알아챘고, 이런 공공연한 시위는 밑지는 장사라고 판단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도 원칙은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 원칙을 돈 받고 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이콧 전날들에 이미 슈트라이허 씨조차 – 분명히 정부의 압력을 받아 – 보이콧을 다시 벌일 필요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전과 국민 계몽” 담당 제국 장관은 3월 31일 저녁 외국 언론 대표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 제국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보이콧을 우선 4월 1일 토요일로 한정하기로 결정했고, 그 방식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보이콧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수요일까지 기다린다. 그때까지 국제 언론이 독일에 대한 선동을 그친다면 더 이상의 조치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독일 유대인을 완전한 절멸로 몰아넣을 보이콧이 시작될 것이다. 4월 1일에 유대인 회사들이 임금과 봉급을 두 달 치 미리 지급해야 한다는 명령은 철회되었다.”
이 통고의 마지막 문장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상황의 압력에 밀려 자기들의 명령을 하나하나 다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특히 똑똑히 보여 주었다. 원래는 모든 유대인 사업주가 모든 기독교도 직원에게 두 달 치 봉급을 미리 지급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그러자 은행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 명령을 서둘러 철회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파국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공공연한 보이콧은 시위였고, 시위로서는 헛손질이었다. 공공연한 보이콧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한 보이콧이 계속되었다. 돈이 들지 않는 보이콧, 크고 부유한 유대인 회사들보다는 수만, 수십만의 유대인 하급 직원, 의사, 변호사, 교사, 관리, 대학 교수 등을 치는 보이콧이었다. 이것은 밥그릇의 문제다. 수십만의 유대인이 밥줄을 잃는다 – 좋다, 그러면 민족사회주의 지망자들이 들어앉을 자리가 많이 생긴다.
8.10.1 유대인 변호사는 더 이상 허가되지 않는다
개별 장관, 대관구장 등의 명령이 꼬리를 물었고 일부는 서로 모순되었다. 베를린에서는 처음에 1200명이 넘는 유대인 변호사 가운데 35명만 허가를 유지했고, 쾰른에서는 유대인 변호사 넷만 변론을 계속할 수 있었다. 모든 유대인 판사는 “휴가 처리”되었다. 유대인 경쟁자를 떨쳐 낼 기회를 재빨리 붙잡은 민족사회주의 법률가들은 (독일 민족주의 계열의 《바르하이트》 1933년 3월 25일 자에 따르면) 3월 라이프치히에서 연 그들 연맹의 대회에서 그에 걸맞은 결의를 채택했다.
프로이센 법무부 제국 판무관[132]은 3월 31일 프로이센의 모든 고등 법원장, 검찰총장, 행형청장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직무 중인 유대인 변호사와 유대인 의사들의 오만한 행동에 대한 민중의 격분이, 특히 범유대적 만행 선전에 맞선 독일 민족의 정당한 방어 투쟁 시기에 민중이 자력 구제에 나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렇게 되면 사법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위험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직무 중인 모든 유대인 판사에게 즉시 휴가 신청을 내도록 권하고 그 신청을 즉시 받아들일 것을 당장 요청한다. 변호사 협회나 지역 변호사회와 오늘 안으로 합의하여, 내일 아침 10시부터는 특정한 유대인 변호사들만, 그것도 유대인 인구가 그 밖의 인구에 대해 차지하는 비율에 해당하는 비율로만 출정하도록 할 것을 요청한다. 내일 10시부터는 유대인 변호사를 국선 변호인이나 빈민 변호인으로 붙이거나, 필요적 변호인, 파산 관재인, 강제 관리인 등으로 선임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국가의 소송 대리를 유대인 변호사에게 맡긴 위임은 즉시 철회할 것을 요청한다. 변호사 협회 이사회의 총사퇴를 적절한 교섭으로 이끌어 낼 것을 요청한다. NSDAP 대관구 지도부와 지구 지도부에서 제복 입은 보초를 세워 법원 건물 안의 안전과 질서를 감시하겠다는 희망을 밝히면, 이 희망을 들어주어야 한다.”
유대인 의사들에게도 비슷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우선 하나도 빠짐없이 보험 진료 자격, 다시 말해 사회 보험에 든 환자, 곧 전체 환자의 대다수를 치료할 자격을 빼앗겼다. 프로이센의 대학 교원과 강사들에게는 문화부 장관 루스트[133]의 지시로 설문지가 배부되었는데, 문화부 장관은 이 설문지를 채우게 하여 대학 교원들의 인종적 혈통에 관해 알아내고자 한다.
8.10.2 공무원법
공무원에 관해서는, 4월 초 제국 법률 공보에 발표된 법률[134]로 “인종 문제”가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비아리아인 부모나 조부모, 특히 유대인 부모나 조부모의 혈통을 이은 자는 비아리아인으로 간주된다. 부모나 조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비아리아인이면 충분하다. 이는 특히 부모나 조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유대교를 믿었던 경우에 인정된다. 나아가 1914년 8월 1일 이전부터 이미 공무원이었던 자가 아니면 누구나 자기가 아리아인 혈통이거나, 전선 참전 군인이거나, 세계대전 전사자의 아들 또는 아버지임을 증명해야 한다(출생 증명서와 부모의 혼인 증명서, 군 복무 서류). 공무원의 아리아인 혈통이 의심스러우면 제국 내무부에 임명된 인종 연구 전문가의 감정을 받아야 한다.
제4조 제1문의 요건이 갖추어졌는지를 심사할 때에는 공무원의 정치 활동 전체, 특히 1918년 11월 9일 이후의 정치 활동을 고려해야 한다. 모든 공무원은 요구가 있으면 최고 제국 관청이나 주 관청에 자기가 지금까지 어떤 정당에 속했으며 어떤 방향으로 정치 활동을 했는지 알려 줄 의무가 있다. 이 규정의 의미에서 정당에는 국기단 흑적금, 공화주의 판사 연맹, 인권 연맹도 포함된다.”
이 명령이 특히 중요한 까닭은, 나중에 거의 모든 범주의 대학 졸업자 직업(의사, 변호사, 대학 교원 등)뿐 아니라 은행원, 사무직원 등도 이 명령의 선별 원칙에 따라 걸러졌기 때문이다.
8.10.3 유대인 의사에 대한 투쟁
의사에 관해서는 1933년 5월 20일 《대베를린 의사 신문 — 베를린 의사 통신》에 실린 다음 호소문을 읽는 것으로 아마 충분할 것이다. 필자 루핀 박사라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니라 브란덴부르크주와 그렌츠마르크주 의사 지방 연합의 판무관이다. 이 문서의 제목은 「유대인 의사를 몰아내라!」이다.
“유대인을 대학 졸업자 직업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 졸업자의 자유 직업, 특히 의사는 주민의 가장 넓은 층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의사로서 환자에게 신뢰받는 지위를 차지하는데, 이 지위는 그들에게 이 층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힘을 준다. 따라서 브란덴부르크 의사 지방 이사회는 우리의 민족주의 국가에서 유대인이 이런 길로 유대적 사고의 독을 퍼뜨릴 가능성을 계속 가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유대화 때문에 자유 직업의 넓은 층에서 예전의 이상적인 직업관이 이미 유대인의 장사꾼 정신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이 정신은 우리 의사 신분에서 뿌리 뽑혀야 하며, 그것이 되살아날 모든 가능성이 제거되어야 한다. 부패는, 이미 스며든 만큼, 가장 날카로운 수단으로 근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독일 의사들은 독일 민족 동지에 대한 의료 행위에서 모든 유대인을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유대인은 거짓과 사기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자유 직업의 신뢰받는 지위와 관련된 경범죄와 중범죄를 중징역과 즉각적인 직업 수행 허가 박탈로 처벌하는 형법 규정을 요구한다. 우리 의사들은 독일 제국의 모든 민족주의적 직업 단체에 우리의 요구에 동참하라고 호소한다.”
보충으로, 독일 의사단 상급 단체들이 그 아래 들어간 판무관 바그너 박사[135]의 훈령에서도 옮겨 보자.
“유대인에 대한 보이콧에 따라, 베를린 시립 의료 보험 공단은 시장과 협의하여, 4월 1일이나 그 뒤에 유대인 의사에게서 진료를 시작했음이 드러나는 조합원의 비용 상환 신청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각 부서에 지시했다. 이미 유대인 의사에게서 진료를 시작한 경우, 조합원들은 그 의사에게 계속 진료를 받을지 숙고해야 한다. 의료 보험 공단은 조합원들이 민족적 의무감에서 유대인 약국, 병원, 안경점, 목욕탕 주인, 치과 의사, 치과 기공사도 이용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8.10.4 유대인 교사 해고
독일에서 유대인 교사들이 앞으로 놓일 처지는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사회주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주의회 의원 뢰펠만 박사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 교사들이 프로이센의 교육 기관에서 직무를 보고 있는 반면, 독일의 전선 병사들은 자기 조국에서 보조 교사로서 불충분한 보수를 받으며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 귀하의 주의를 환기합니다. 우리는 나아가 프로이센의 교육 기관에서 유대인 남녀 학생들의 오만함을 아직도 어떻게든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상태로 여깁니다. 민족사회주의 프로이센 의원단의 이름으로, 우리는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조치를 기대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1. 모든 유대인, 다시 말해 유대인의 혈통을 이은 교원을 즉시 프로이센의 모든 교육 기관에서 휴직시키거나 감원한다. 2. 유대인 남녀 학생과 남녀 대학생에 대해서는 독일 제국 안의 유대 민족 인구에 맞춘 정원 제한(누메루스 클라우수스)을 도입한다. 다시 말해 한 기관 학생의 1퍼센트만이 유대인이거나 유대인 혈통일 수 있다.”
이 편지의 뜻에 따라 국공립 공공 기관에서 일하던 유대인 교사들은 거의 모두 우선 즉시 “휴가 처리”되었다. 브란덴부르크와 베를린의 주지사 훈령은 이 조치를 유대인 개인 교사들에게까지 넓혔다. 4월 25일 각료 회의에서 「독일 학교와 대학의 외래화를 막는 법률」[136]이 의결되었다. 교사라는 범주에 적용되는 규정들은 당연히 대학 교원들에게도 특히 강하게 적용된다. 해고되거나 “휴가 처리”된 유대인 강사의 명단은 이 『갈색책』의 앞선 장에서 실었다.
8.10.5 유대인 편집자와 기자 배제
1933년 4월 13일 자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이렇게 보도한다.
“독일 언론 제국 연맹 베를린 지구 연맹의 임시 회원 총회는 제국 연맹 대의원 총회에 디트리히 박사[137]를 제국 연맹 의장으로 추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독일 언론 제국 연맹 주 연맹 – 지구 연맹은 앞으로 이렇게 불린다 – 의 총회에 이어 새 이사회 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앞으로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 편집자는 주 연맹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나아가 대의원 총회, 곧 제국 연맹 대회에 올릴 안건으로,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 편집자는 독일 언론 제국 연맹에 가입할 수도 그 회원일 수도 없다고 요구하는 안건이 채택되었다. 이 안건 역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그사이 독일 신문사의 유대인 편집자는 거의 모두 해고되었고, 유대교를 믿거나 유대인 혈통인 자유 기고가들의 원고는 거의 모두 일관되게 거절당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유대인 신문 발행인들도 불명예스럽게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그 예로 만하임의 《노이에 바디셰 란데스차이퉁》의 유대인 발행인 귀터만의 처신을 들어 보자. 그는 이미 3월 1일에 자기 유대인 편집자와 직원 전원을 해고했다.
8.10.6 참심원과 배심원에서의 배제
모든 분야에서 유대인에 대한 조용한 보이콧이 계속된다. 그들은 공적 생활에서 솎아 내진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4월 12일 유대인이 배심원, 참심원, 상사 재판관 명부에서 배제되었다고 보도한다.
“제국 정부는 모든 참심원과 배심원의 현 임기를 1933년 6월 30일로 앞당겨 끝내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짜에 상사 재판관의 임기도 끝난다. 새 참심원과 배심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구성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지방 자치 단체들이 참심원 선출 기구에 당연히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참심원과 배심원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추천되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수는 상당히 적어질 것이며, 유대인도 아마 더는 선출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 임명될 상사 재판관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날 것이다. 방금 공포된 법률에 따라 새 선출 때까지 판사들은 시민 재판관의 소집에 관한 기존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특정 재판관을 건너뛸 수 있다.”
8.10.7 스포츠에서 “아웃캐스트”가 된 유대인
스포츠에서조차 유대인은 누구나 “아웃캐스트(outcast)”로 여겨진다. 미국에서조차 흑인 권투 선수들이 타이틀전에 나서는데, 유대교를 믿거나 유대인 혈통인 독일 권투 선수들은 독일의 링에 더는 오를 수 없다. 독일 미들급 챔피언 에리히 젤리히는 독일에서 자기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사이 프랑스에서 자기 기량을 증명해 보였다. 독일 테니스 챔피언으로 독일에서 단연 가장 뛰어난 선수인 다니엘 프렌은 국제 경기에 독일 대표로 더는 지명될 수 없다.
1933년 4월 28일 자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이렇게 보도한다.
“독일 수영 연맹은 다음과 같이 공표한다. ‘독일 수영 연맹은 아리아인 조항을 받아들였다. 스포츠 연맹들에, 따라서 수영 연맹에도 유대인이 소속하는 문제를 어떤 형태로 규정할지, 또는 아리아인 조항을 연맹 정관에 어떻게 넣을지는 정부가 내릴 규정에 따른다. 그때까지 나는 유대인을 연맹의 모든 지도적 자리에서 없애고 전선 뒤로 물리도록 정한다. 모든 대표 행사와 대표 경기에서도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게오르크 학스.’”
(독일 수영 연맹은 아직은 국제 수영 연맹에 속해 있는데, 아리아인 조항은 모든 이의 평등이라는 국제 수영 연맹의 정관에 어긋난다. 다만 국제 수영 연맹의 의장은 지금까지 독일 수영 위원장이었던 비너인데, 그는 그 “국제적” 태도 때문에 연맹 운영에서 배제되었다.)
“DSB[138] 안의 유대인 회원 자격. 제국 체육 판무관님의 최종 지침이 나올 때까지 DSB 소속 클럽의 유대인 회원에게는 공무원법의 규정을 적용한다. 따라서 경기 행사에서 스포츠 활동은 (종파가 아니라 인종 기준으로) 공무원법의 보호를 받는 유대인에게만 허용된다.”
8.10.8 “악의적인 소문”
물론 장사가 걸린 곳에서는 여기서도 다시 원칙에 대한 충실함이 금세 끝난다. 획일화된 《12시 신문》은 1933년 4월 19일 자에서 「악의적인 소문」이라는 제목 아래,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릴 제11회 올림픽에서 인종 문제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독일에 대한 외국의 보이콧 선전은 스포츠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최근 여러 외국 신문에서, 특히 북아메리카 합중국에서 1936년 베를린에 배정된 올림픽 경기를 다른 나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라는 기사를 여러 번 읽을 수 있었다. 독일에서 국제 경기에 유대인 선수들이 출전하는 것을 막는 조치가 취해졌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이에 관한 공식 문의에 대해 미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직접 관할한다고 밝혔다. 6월 빈에서 열리는 위원회가 틀림없이 이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개인적 의견은, 모든 인종의 평등이라는 올림픽의 기본 이념을 침해하는 나라에서는 경기가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미국 스포츠 지도자의 이 성급한 발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국제 경기 참가를 인종 문제에 따라 좌우하는 조치가 취해지지도 않았고, 앞으로 취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 베를린 올림픽 경기에 파견되는 사람은 누구나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손님으로 대우받고 맞아들여질 것임을 세계는 믿어도 좋다.”
8.10.9 유대인 여권
유대인 여권 소지자에게도 특별 규정이 적용된다. 브레슬라우 경찰청장은 이렇게 명령했다.
“유대교를 믿거나 이전에 유대교를 믿었던 독일 제국 국민으로서 여권을 가진 자는 늦어도 1933년 4월 3일까지 자기 주거지 관할 경찰서에 여권을 직접 제출해야 한다. 여권은 그 효력을 국내로 제한한 뒤 소지자에게 돌려준다.”
8.10.10 특별 목욕 시간
유대인 국민의 명예를 더럽히는 데 알맞은 훈령치고 어떤 관청, 어떤 행정 기관이 생각해 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팔츠의 슈파이어시는 이 시절의 역사에서 특히 기발한 곳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시는 독일 지방 자치 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 영예를 누린다.
“이에 따라 유대인은 공공질서를 위하여 시립 온천장을 정해진 시간에만 이용할 수 있다.”
다른 독일 지방 자치 단체들도 곧 이 본보기를 따랐다. 1933년 5월 24일 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이렇게 보도한다.
“5월 15일 튀빙겐 시의회 회의에서 NSDAP가 안건을 제출했는데, 거기에는 무엇보다 이렇게 쓰여 있다. ‘유대인과 이인종에게는 시립 야외 수영장 출입을 막아야 한다.’ 이 안건은 세 표를 뺀 모든 표로 가결되었다.”
얼마 뒤 오버슐레지엔의 신문들에서도 비슷한 명령들을 읽을 수 있었다.
8.10.11 유대인 직원 해고
독일 유대인의 배제가 지식인 직업에서만 밀어붙여졌다고 믿는다면 잘못이다. 유대인 하급 직원, 영세 상인, 유대인 노동자에 관해서는 너무 적게 이야기된다. 그러나 바로 이곳, 이 범주들에서 유대인 소시민층의 대중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비유대인 소시민과 노동자 대중과 똑같이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짓눌려 있다. 민족사회주의 사업장 세포 조직[139]은 유대인 하급 직원, 유대인 영세 상인, 유대인 노동자의 밥줄을 끊는 일에 아주 열심이었다. 3월 31일 베를린발 보도는 이렇다.
“민족사회주의 당 지도부의 지시로 사업장 세포 조직은 다음과 같이 알린다. 내일 민족사회주의 사업장 세포 간부들은 노동자 조직들과 함께 유대인 상점들을 찾아가 기독교도 노동자와 직원에게 두 달 치 봉급을 미리 지급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 밖에 모든 유대인 직원을 즉시 해고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따르지 않는 자는 즉시 지도부에 보고해야 하며, 지도부가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내일 오후 3시 정각, 모든 직원과 노동자는 손님 막기에 참여하기 위해 유대인 상점을 떠난다. 신문사와 생활 필수 사업장은 예외지만, 모든 유대인 직원은 즉시 해고해야 한다. 울슈타인 출판사에서는 이미 오늘 요직에 있는 유대인 혈통의 편집자가 모두 휴가 처리되었다.”
1933년 5월 28일 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이렇게 보도한다.
“독일 행상인·노점 영업자·장터 상인 연맹(본부 드레스덴)의 공식 기관지 《푀스네커 핸들러블라트》에 따르면, 이동 영업자 제국 연맹의 대관구 대회에서 앞으로 유대인 상인과 영업자를 박람회와 장터에 허가해야 하는지라는 질문이 나왔다. 대관구 지도자는 ‘유대인은 철저히 솎아 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8.10.12 장사는 장사다 — 반유대주의자에게도
4월 2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보이콧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유대인 없는 증권 거래소에서의 자발적인 시세 폭등”을 환호한다. 이 환호의 찬가가 무엇을 보여 주는지 우리는 안다. 투쟁이 체제에 맞서서도, 자본주의에 맞서서도, 자본주의의 지나친 폐해에 맞서서조차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협잡꾼들이 유대인 경쟁자에 맞서 벌이는 경쟁 투쟁이라는 것이다. “유대인 없는 증권 거래소”에서도 증권업자들은 장사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본에 맞서는 것이 아니고, 재산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인에게 맞서는 것이다. 속아 넘어가는 “아리아인” 노동자와 중간층에게, 파멸당하는 유대인 하급 직원과 상인에게 맞서는 것이다.
“아리아인”의 원칙은 철저히 돈지갑의 두께에 따른다. 일찍이 「도이체 방크 운트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이사 오스카 바서만 씨가 (1933년 3월 31일 자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에 실린) 성명에서, 자기는 조금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으며 자기에게는 사태의 변화가 사회적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자기 개인으로서는 정당하게, 옳게 지적했듯이, 오늘날 다른 유대인 자본가들도 환호해도 좋다. 민족사회주의 정부는 그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나선다. 정부는 반유대주의가 민족사회주의의 반자본주의적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었던 하급 기관들을 꾸짖어 질서를 잡는다. 정부는 유대인은 아니더라도 유대인의 돈은 지킨다. 자본주의는 이 “민족 혁명”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3월 27일 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과 같은 날짜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경제 담당 제국 판무관” 바그너 박사[140]가 “NSDAP 지방 정치국” 의장인 피엘러 시장(뮌헨)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실었다.
“최근 경제계의 여러 방면에서, 몇몇 지방 자치 단체가 많은 공장주와 그 밖의 경제 기업들에 보낸 회람을 나에게 보내왔습니다. 이는 그 기업들을 ‘독일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 회람에 담긴 질문들은 해당 회사의 자본이 어느 정도 독일 자본인지, 비아리아인과 비독일인 경영진이 어느 정도 있는지 등을 확인하려 합니다. 나는 물론 바로 지방 자치 단체들이야말로 독일 회사에만 일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착수된 절차는 중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람이 끄집어낸 문제 복합체 전체는 ‘예’나 ‘아니요’로, 또는 숫자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국 정부의 임무는 독일 안의 모든 기업이, 그 자본을 어디서 얻었든 누가 그 기업을 이끌든, 독일 국민 경제의 한 구성원으로 국민 경제에 편입되도록 하고, 모든 기업의 경영이 앞으로는 오로지 독일 국민 경제의 관점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별 기관들이 미리 경제생활을 뒤흔드는 기정사실을 만들어 놓는다면, 정부는 이 필연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방해만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독일 안의 기존 경제 기업들을, 비록 그것이 외국 자본으로 운영되고 지금까지 일부 외국인 인사들이 경영해 왔더라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업들이 독일적으로 행동하고, 그들 역시 우리 지도자의 위대한 원칙인 ‘사익보다 공익’에 종속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께서 지방 정치국의 책임자로서 독일 지방 자치 단체 지도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시어, 그런 회람이 더 이상 발송되지 않도록, 그리고 그런 조치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 같은 때에 아무리 좋은 뜻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경제생활 전반의 교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도” –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이 “민족 혁명”에서 어떤 자본가든 손해를 보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사회주의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맹세하는 사람들, 그가 농민에게는 더 높은 가격을, 그러면서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더 싼 식료품을, 노동자에게는 더 높은 임금을, 그러면서 동시에 기업가에게는 더 큰 이윤을, 공무원에게는 봉급 인상을, 그러면서 국가에는 절약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기적을 그에게서 기대하는 사람들 – 이 “기적을 믿는 자들”은 곧, “제3제국”에서는 유대교를 믿든 안 믿든 자본가 말고는 아무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냉혹한 사실 앞에서 소스라치며 깨어날 것이다. 그들은 제3제국에서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일을 겪으며, 유대인 사냥 전체가 그들을 진짜 죄인, 곧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에서 딴 데로 돌리는 것 말고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8.11 아리아인 조항과 인종청
우리는 새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생물학적 토대 위의 반유대주의, 곧 인종 반유대주의라는 것을 보았다. 이 생물학적 반유대주의는 궁정 설교사 슈퇴커[141]가 이끌던 반유대주의 물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결은 당시 오이겐 뒤링[142]의 글 『인종적 성격의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에서 자기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사이비 과학적 정당화를 얻었다. 한때 별난 문필가들의 도락이었고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던 “인종학”이 오늘날 새 독일에서는 공식 “학문”으로 선포되었다. 다시 말해 짭짤한 직업이 되었다.
8.11.1 “인종”으로서의 유대인
그런데 이 “학문”은 온갖 애를 썼는데도 지금까지 독일인이 하나의 인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 거꾸로 독일인이 혼합 민족이며, 스스로 “북방 인종”이라 부를 자격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이 괴상한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유대인이 정말로 하나의 “인종”이라는 것조차 증명하지 못했다.
우리가 인종 연구자들을 거들어 주기로 하자. 유대 인종을 두고 떠드는 소리에 무언가가 있기는 하다. 이 복잡한 문제를 따져 보려면 여기서도 사태를 물구나무 선 자세에서 두 발로 바로 세워 놓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인종은 본래부터 있던 산물이 아니라 육종의 산물이며, 발전 과정의 시작이 아니라 결과다. 오늘날 살아 있는 유대인을 그 조상, 곧 성서 속의 유대인에게로 거슬러 올라가 이으려 한다면 그것은 절망적이고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유대 역사에서 일어난 인종 혼합은 수없이 많고 걷잡을 수 없이 얽혀 있다. 그러나 대략 1000년 무렵부터, 개종 권유(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유대교 공동체로 넘어오는 일)가 끝나면서, 유대인은 자기들의 종교와 율법, 그리고 자기들이 살던 사회적 조건 때문에 “근친 교배”로 내몰렸다. 그 기간과 철저함으로 보아 유럽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인류학적 인종 특징은 이 시기에서 비롯한다. 거의 800년에 걸친 이 시기가 어떤 인간 유형, 바로 유대인 유형을 발달시킨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유대인의 인종 특징을 증명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을 얻느냐는 것이다. 반유대주의자들이 맞서 싸운다고 내세우는 유대인의 바로 그 특성들은 결코 인종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대인이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으로 설명된다. 유대인은 주변 세계가 일정한 생존 조건을 강요한 하나의 카스트였다. 이 강제가 사라지면 그 특성들도 거의 곧바로, 다시 말해 늦어도 더는 이 강제 아래 살지 않는 둘째 세대에 이르면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이론적 논의로 우리는 이미 민족사회주의의 실천에서 멀리 벗어났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훨씬 단순하고 훨씬 조잡하다. 민족사회주의는 어떤 문제에서도 자기 나름의 논증에 따라 행동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언제나 먼저 저지르고 나서야,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들을 시켜 자기들의 야만 행위를 “문화적 업적”이라고 확인받았다.
오늘날 독일에서 “인종 연구”가 “학문”이라고 나선다면, 그런 희극은 속을 들여다보면 단 하나의 목적만을 지닌다. 지배 체제의 짐승 같은 만행에 새 겉옷을 지어 입히는 것이다.
8.11.2 “인종청”의 실천
실천을 이야기해 보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1933년 5월 5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도르트문트, 5월 4일(TU[143]). 도르트문트시 국가 판무관은 도르트문트에 인종청을 세우는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그 책임은 보건 담당 보조 판무관인 의학 박사 브라우스에게 맡겨졌다. 그는 기자 간담회에서 인종 위생 문제에 관해 원칙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는 무엇보다, 도르트문트 학생 8만 명에 관한 건강 기록이 이미 있으며 이를 인종 위생 통계의 목적에 맞게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음 세대를 이룰 청소년이 맨 먼저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이미 공포된 법령에 따라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경우들, 곧 공무원직 지원자와 고등학교·대학교 학생을 처리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전체 주민을 파악하는 것이 앞으로 몇 년의 과제라고 했다.
아주 가까운 시일 안에 인종의 분리와 개량을 위한 법률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이 법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에서 인종 간 혼혈 결혼이 금지되리라는 것, 그리고 주민을 그 자손이 국가에 바람직한 가족과 그 자손이 민족의 짐이 되어 바람직하지 않은 가족으로 나누어야 하리라는 것이라고 했다.”
장사 수완 좋은 한 젊은이, 아힘 게르케[144] 박사 나리는 “제국 내무부 인종 연구 전문가 자격의 부처 보좌관”으로 임명되는 데 성공했다.
8.11.3 인간과 “하등 인간”
이 모든 것은 아직 비교적 “무해해” 보인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 주민의 경제적 절멸만을 겨냥할 뿐, 아직 몸과 목숨을 곧바로 겨냥하지는 않는다. 덜 무해해 보이는 것은 작은 쪽지 한 장이다. 이 쪽지는 모든 음식점에 수천 장씩 뿌려졌고, 특히 유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띈 독일 처녀들에게 빠짐없이 손에 쥐여졌다.
이 문서는 유대인과 사귄다는 끔찍한 혐의를 받는 젊은 처녀에게, 그 얼굴에 JH, 곧 “유대인의 창녀(Juden-Hure)”라는 머리글자를 낙인으로 찍겠다고 위협한다. 그리고 “이 위협은 빈말이 아니며, 해당 처녀가 한 번 더 유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띄면 어떤 일이 있어도 실행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여기서 벌써 인간과 “하등 인간”을 가르는 민족사회주의의 구분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하등 인간”이란 민족사회주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지 않는 모든 사람이다.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인간”과 “하등 인간”은 완전히 다른 두 집단이다.
제1집단에는 “북방 인종의 순수한 대표자들”이 속한다. 제2집단에는 (민족사회주의 의사들의 기관지 《목표와 길》 2권 2호에 따르면)
“술꾼, 모르핀 중독자, 상습범, 매춘부”와 나란히 “모든 이인종, 특히 유대인”
이 속한다.
민족사회주의 “인종 이론가” 슈테믈러[145] 교수는 민족사회주의 의사들의 위임을 받아 “인종 분리”를 위한 다음과 같은 법안을 내놓았다.
“1. 적어도 절반 이상 이질적인 피를 지닌 사람, 다시 말해 그 조상 가운데 부모 중 한 사람 또는 조부모 중 두 사람이 이인종이었던 사람은,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 상관없이 이인종으로 간주한다. 이때 모든 유색 인종, 그리고 유대인을 포함한 근동 인종과 오리엔트 인종을 이인종으로 간주한다. 2. 이에 따라 성년인 모든 독일 국적자는 관할 주민 신고소에 자기가 어느 인종에 속하는지 선서하고 신고해야 한다. 미성년자는 법정 대리인이 신고한다. 허위 신고는 중징역과 재산 몰수로 처벌한다. 3. 이인종으로 판정된 사람은 앞으로 자신을 독일인이 아니라 이인종(독일 출신 유대인 등)으로 칭해야 한다. 4. 기준일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부모가 모두 독일인일 때에만 독일인으로 간주한다. 다만 동생들은 신고로 소속이 확정된 손위 형제자매와 같은 민족 소속을 얻는다.”
8.11.4 육종 농장
앞서 말한 슈테믈러 교수 나리는 이렇게 쓴다. “육종 목표는 몸과 도덕과 정신이 건강한 북방 인종의 인간으로 좁혀진다.” 이 “육종 목표”를 북돋우려고 “육종 농장(Hegehöfe)”이 요구된다. 이 “육종 농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에른스트 베르크만[146]이라는 교수의 다음과 같은 토로에서 드러난다.
“지금 있는 부인과 처녀들과 교미할, 의욕 있고 부지런한(!) 남자와 젊은이는 얼마든지 있으며, 다행히도 활달한 청년 하나면 아이를 바라는 의지를 아직 죽이지 않은 처녀 10명에서 20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일부일처 영속혼이라는, 자연에 거스르는 문화적 헛소리만 없다면 말이다.(에른스트 베르크만 교수, 『인식의 정신과 어머니의 정신』.)”
이 야만의 산물들을 또 하나의 “인종 순수 보전 법안”으로 마무리하자.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 독일인과 이인종 사이의 혼인은 금지한다. 기존 혼인은 효력을 유지하되, 새로 혼인을 맺어서는 안 되며 맺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2. 독일인과 이인종 사이의 혼외 성교는 이인종 쪽은 중징역으로, 독일인 쪽은 징역으로 처벌한다. 매춘부는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3. 이인종의 입국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가한다. 이인종의 이민은 금지한다. 4. 대개 인종 소속을 숨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개명은 당분간 금지한다. 1914년 이후 이루어진 개명은 취소한다.”
이만하면 됐다! 어쩌면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정신병 병리학만이 다룰 수 있는 이런 광기는 결국 “백만 대중 운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이 “인종 위생학자”들은 변두리의 현상이며, 결국 운동이 그들에게 책임질 일은 없다고.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슈테믈러 교수 같은 사람은 이 문제에 관한 공식 고문이다. 그가 만든 “법안”들은 민족사회주의 제국의회 교섭단체가 제출했다. 그것들은 전형적인 만큼이나 선동 수단으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포르노 작가 한스 하인츠 에버스[147]가 오늘날 독일 문단의 공식 대표로 나서는 것과 똑같이, 피에 굶주린 모르핀 중독자 괴링이 제3제국에서 전능한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정신 장애로 해직된 교사 루스트[148](독일의 한 법원이 그의 정신적 책임 무능력을 인정했다)에게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 자리가 맡겨진 것과 똑같이, 고의적 비방, 명예 훼손, 횡령, 위조와 폭행죄로 독일 법원에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은 슈트라이허 같은 자가 유대인 불매 운동을 맡은 국가 판무관이 된 것과 똑같이 – 이 슈테믈러 교수도 오늘날 지배 체제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8.12 유대인 문제의 청산
이제 정리할 일이 남았다. 우리는 60만 독일 유대인에 맞선 절멸전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 아주 작은 단면들만을 보여 주었다. 인위적으로 길러 낸 저열한 유대인 증오의 전형적인 문서들이다. 유대인은 유럽 역사 앞에서 다시 한번 희생양이 되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볼 때 이 광신이 그것이 겨냥하도록 길러진 자들, 곧 증권 투기꾼, 대은행가, 대상인, 투기꾼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민중의 분노”는 또다시 힘없는 서민들, 유대인 중간층과 유대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로 돌려졌다. 오늘날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수백만 명이 자기도 모르게 섬기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8.12.1 강요된 부인 성명
그러면 독일의 유대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외국의 “잔학 선전”에 항의했다. 대기하고 있는 돌격대의 압력 아래, 그들은 죽음의 공포가 서린 문서들을 세계로 내보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필요한 것보다 더 멀리 나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최근에는 장사 수완 좋은 어떤 사람이, 독일 유대인들의 이 강요된 부인 성명을 모아 『잔학 선전은 거짓 선전이다 — 독일 유대인들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겠다는 생각까지 해냈다. 획일화된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는 이 “대단히 환영할 만한 책”에 관해 두 단짜리 기사를 싣는다. 그러나 세상의 누구도 속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목숨과 자유와 생계를 걱정하며 떨던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것과 반대로, 독일에는 유대인 박해가 없다는 거짓말을 퍼뜨려야 했다는 것을.
8.12.2 히틀러 편에 선 유대인들
다른 목소리도 있다. 히틀러 편에 선 유대인들이 있다. 정통파 유대인들의 기관지 《유대 신문(Jüdische Presse)》(빈·브라티슬라바, 1933년 3월 31일 자)에 한 랍비, 바인베르크[149] 교수 박사가 이렇게 쓴다.
“대체로 유대인 사회, 특히 정통파 사회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공감과 이해를 독일의 민족적 궐기에 보내고 있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바로 히틀러에게, 그가 공산주의에 맞서 정력적이고 단호하게 싸우는 데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독일 시온주의자들의 중앙 기관지 《유대 전망(Jüdische Rundschau)》도 아주 비슷하게 한다.
“유대 역사는 히틀러도 이해할 것이다. 유대 역사는 그를, 역사란 어떤 이념을 향한 인간의 고양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만든다는 증거로 들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념이든 상관없이.”
세 번째 동무가 빠질 수 없다. 유대 정통파와 유대 민족주의에는 유대인 자본가도 짝을 이룬다. 우리는 이미 도이체 방크 운트 디스콘토 게젤샤프트의 이사 오스카 바서만[150]의 성명을 인용했다. 자기는 조금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으며 사태의 변화가 자기에게는 “사교적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8.12.3 반유대주의에 관한 레닌의 말
우리는 이 목소리들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도 결국 인종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라는 증거다.
레닌은 말한다 — 그리고 그는 이 연설을 음반으로 퍼뜨리게 했다[151] —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퍼뜨리는 것을 말한다. 저주받을 차르 군주정이 마지막 시간을 맞고 있을 때, 그것은 무지한 노동자와 농민을 유대인에게 맞서도록 부추기려 했다. 차르 경찰은 지주·자본가와 손잡고 유대인 학살을 조직한다. 그들은 가난에 시달려 지친 노동자와 농민이 지주와 착취자에게 품은 증오를 유대인에게로 돌리려고 애썼다. 다른 나라에서도 자본가들이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채질해 노동자의 눈을 흐리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진짜 적인 자본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는 일을 흔히 본다. 유대인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적이 아니다. 노동자의 적은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이다. 유대인 가운데에는 노동자,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다수다. 그들은 자본에 억압받기 때문에 우리의 형제이며,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우리의 동지다. 유대인 가운데에도 다른 모든 민족 가운데와 마찬가지로 쿨라크, 착취자, 자본가가 있다. 자본가들은 서로 다른 신앙, 서로 다른 민족, 서로 다른 인종의 노동자들 사이에 적대감을 부채질하려고 애쓴다. 부유한 유대인은 부유한 러시아인, 그리고 모든 나라의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다 함께 손잡고 노동자를 짓밟고 억압하고 더럽힌다. 유대인을 괴롭히고 박해한 저주받을 차르 체제에 치욕과 수치를!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를 퍼뜨리는 자에게 치욕과 수치를! 자본 타도를 위한 투쟁에서 모든 민족의 형제적 신뢰와 투쟁 동맹 만세!”
레닌은 백군 간섭군의 학살에 맞선 소비에트 정부의 포고령[152]에 손수 이렇게 덧붙였다.
“인민위원회의는 모든 대의원 소비에트에 반유대주의 운동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다. 학살자와 학살 선동자는 법의 보호 밖에 둔다.”
9 강제수용소의 남녀 4만 명
여러 언론 보도와 간행물에 따르면, 7월 초 현재 히틀러 독일의 정치범 총수는 6만~7만 명으로 추산해야 한다. 그 가운데 3만 5천~4만 명의 여성과 남성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 파시즘 독일에서 이 강제수용소들은 어떤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파시즘 독일에서는 모든 법적 근거가 폐기되었으므로, 강제수용소 설치에도 법률상 근거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강제수용소 수감자의 권리를 규정하는 법률이나 명령조차 하나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독일의 강제수용소 설치는 히틀러 정부의 가장 악랄한 자의적 행위로 드러난다. 수감자의 구금 기간에 관해서도 아무런 법률 규정이나 명령이 없다.
9.1 “지도자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까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은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자세히 다룬 1933년 5월 8일 자 기사에서, 수감자들이 교화하기 쉬운 국민과 교화하기 어려운 국민으로 나뉘며 앞의 부류는 1년, 뒤의 부류는 3년 동안 보호 구금 상태로 있게 된다고 보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확인된 소식이 아니라 해당 특파원의 개인 의견일 뿐이다. 법률 규정은 없다.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일도, 강제수용소 구금 기간도 오로지 파시스트 상급·하급 지휘자들의 절대적 자의에 따라 정해질 뿐이다.
이 끔찍한 상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사람은 바덴의 호이베르크 강제수용소 책임자 가운데 하나인 민족사회주의 하급 지휘자 카우프만 중위다. 카우프만 중위는 4월 말 덴마크 신문 《폴리티켄》의 특파원이 “수감자들을 여기에 얼마나 오래 붙잡아 두실 생각입니까?”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지도자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까지.” 1933년 4월 30일 자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카우프만 중위의 이 말을 확인해 주며 이렇게 쓴다.
“…수감자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으므로, 많은 수감자에게 자유는 아직 한참 먼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9.2 “왜 나를 가둬 두는지 알기라도 했으면!”
독일 강제수용소에 갇힌 여성과 남성들은 파시즘 국가 원리에 비추어 보아도 아무 죄가 없다. 히틀러 정부가 보기에 파시즘 폭력 체제의 법률을 어긴 사회주의·공산주의 노동자와 지도자들은 모두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감옥과 징역원에 갇히고, 비상 법원과 특별 법원에서 소추되어 판결을 받는다. 강제수용소에 들어가는 것은 파시즘이 정치적으로 의심스럽다고 여기지만 파시스트 검사들조차 형사 소추의 꼬투리를 찾지 못하는 남녀뿐이다.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국회의사당 화재와 3월 5일 선거 직후에 곧바로 체포되었으므로, 아무리 그러고 싶었다 해도 파시즘 체제에 맞서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수감자들의 편지에는 이 점이 거듭 울려 나온다. 4월 말에 실린 덴마크 신문 《폴리티켄》의 보도에는 강제수용소에서 온 편지 몇 통이 공개되었다.
“왜 나를 여기 가둬 두는지 알기라도 했으면”이라고 한 젊은 노동자는 쓴다.
“이름 모를 자의 사사로운 복수만이 내가 갇힌 이유일 수 있다”고 체포된 한 의사는 쓴다.
“나는 스스로 탓할 일이 하나도 없다. 내가 왜 체포되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또 다른 목소리도 있다.
얼마나 하찮은 일로도 사람을 강제수용소에 보낼 수 있는지는 바이에른의 딩켈스뷜에 사는 유대교 종교 교사 카를 크레프스의 사례가 보여 준다. 크레프스는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자로, 한 살 때부터 독일에서 살아왔다. 그에게 다음과 같은 영장이 내려졌다.
“구금 영장: 딩켈스뷜의 유대교 종교 교사 카를 크레프스(체코 국적자)를 보호 구금한다. 크레프스는 1933년 3월 29일 닭 몇 마리를 유대교 의식에 따라 도살하여 주민들 사이에 매우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처벌할 만한 행위는 없다 하더라도, 외국 유대인들의 선동 선전에 주민들이 몹시 격앙되어 있는 터이므로 크레프스는 그러한 행위를 삼갔어야 했다. 주민들의 격앙이 대단하여, 크레프스를 폭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호 구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보호 구금 명령은 돌격대 최고 지도부의 수임자인 바서트뤼딩겐 시장 이타마이어 씨와 협의하여 내렸다. 딩켈스뷜, 1933년 3월 29일. 군청
대리 서명 이타마이어.”
이 사람은 오늘까지도 갇혀 있다.
모든 문명국가에서는 “법률 없이 범죄 없고 법률 없이 형벌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원칙이 통한다. 나쁜 신념이나 위험성이 아니라 실제로 법을 어긴 행위, 곧 죄만이 처벌받는다. 따라서 어떤 형법도 소급효를 가질 수 없다. 이 점에서는 고전학파와 근대학파, 결정론자와 긴장설 주창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형법 학파가 예외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이 원칙은 1927년의 새 러시아 소비에트 형법전도 일반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현행 1871년 독일 제국 형법전 제2조에 법률상 근거를 두고 있다. 제국 형법전 제2조는 오늘까지 입법 기관에 의해 폐지되지 않았으므로 유효하다. 여성과 남성을 체포하여 독일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는 것은 독일의 법과 법률에 비추어 법률 위반이자 불법이다.
9.3 수감자 징벌이 강제수용소의 목적
호이베르크 강제수용소 소장인 민족사회주의자 부크 대위는 강제수용소의 목적에 관해 《폴리티켄》 특파원에게 이렇게 밝혔다고, 그 특파원은 4월 말 발표한 글에서 전한다.
“수감자들을 징벌하는 것이 중요하다.”
석방된 사람들의 편지에 따르면, 몇몇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은 군대식으로 “죄수 아무개”라고 신고해야 한다. 징역형 규정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이기까지 했다.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1933년 4월 27일 자에서 빈 특파원 R. G. 가이데[153]의 전보로 이 사실을 확인한다. 이 죄수들은 판사를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이것이 순전한 행정 조치, 곧 보호 구금이라고 거듭 밝혀 왔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많이 잡아넣어야 했습니다. 민중의 복수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지요’라고 나치들은 덴마크 신문 《폴리티켄》의 특파원에게 말했다. ‘이 <범죄자들>을 11월 혁명의 장본인으로 보는 애국 군중이 그들을 린치했을 테니까요.’”
이 주장은 뻔뻔한 거짓말이다. 수용소를 유난히 엄중하게 경비하는 것은 체포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제수용소 앞의 기관총은 탈주와 구출 시도를 불가능하게 하려고 있는 것이다. 체포된 사람들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는 곳은 어디서나, 그 군중 집회와 소동 장면을 파시스트들이 조직했다. 대대적인 민중 오락거리로 꾸며진 전 사회민주당 장관 렘멜레[154]의 강제수용소 이송이 이를 똑똑히 증명한다. 1933년 5월 17일 자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공개 망신」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통신 기사를 싣는다.
“화요일, 전 주 대통령이자 장관이며 명예 박사인 아담 렘멜레 – 최근까지 함부르크의 독일 소비조합 구매 협동조합 회장이었고, 며칠 전 정부의 요청으로 그곳에서 카를스루에로 이송되어 왔다 –, 렘멜레가 내무부에 앉혔던 참사관 슈텐츠, 전 바덴 국무 참사이자 제국의회 의원 마룸[155], 사회민주당의 카를스루에 신문 《폴크스프로인트》 편집인 그뤼네바움, 퇴직 경찰관 푸러, 그리고 바덴의 국기단과 철의 전선 지도자가 다른 사회민주당원들과 함께 서부 시가지에 있는 감옥에서 지붕 없는 경찰차에 실려 경찰 본부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지금은 강제수용소가 된 키슬라우 교도소로 보내졌다. 감옥 앞에는 엄청난 군중이 모여 휘파람과 ‘우우’, ‘타도하라’ 하는 고함으로 체포된 자들을 맞이했다. 체포된 자들이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모자를 벗은 채 앉아 있는 첫 번째 경찰차 앞에는 친위대가 두 줄로 팔짱을 끼고 걸으며 길을 텄다. 첫 번째 경찰차 뒤로는 돌격대원들이 탄 두 번째 차가 따랐다. 그 밖에도 행렬의 양옆과 맨 끝을 돌격대원들이 따라갔다. 경찰차들은 흔히 여덟 겹이나 되는 빽빽한 인간 장벽 사이를 걸음걸이 속도로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가는 길 내내 쉬지 않고 ‘우우’, ‘타도하라’ 하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또 곳곳에서 「방앗간 일꾼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예전에 방앗간 일꾼이었고 한때 바덴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처벌을 걸고 금지했던 렘멜레를 빗댄 것이었다. 행렬은 무엇보다 주의회 건물, 주 정부 청사, 옛 노동조합 건물 앞을 지나갔고, 그때마다 잠깐씩 멈춰 섰다. 도중에는 악대들도 「방앗간 일꾼의 노래」를 연주했다. 구경꾼이 너무 몰려 전차와 자동차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도중에 ‘붉은 전선’을 외친 몇몇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체포되어 두 번째 경찰차에 함께 실려 갔다.”
이 보도는 이것이 미리 연습한 린치 고함을 곁들여 조직된 시위, 한마디로 제국 선전장관 괴벨스가 군중을 즐겁게 하고 한동안 굶주림을 잊게 하려고 벌이는 저 장면들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9.4 “보호 구금”
독일에서 보호 구금은 1849년의 인신 자유 제한에 관한 법률[156]로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 위협받는 사람만 보호 구금할 수 있다. 보호 구금은 그 목적을 넘어서 유지될 수 없으며, 어떤 경우에도 석 달을 넘길 수 없다. 법률은 이의 제기권과 법원의 결정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갇힌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 권력자들을 보호하려고 구금되어 있다. 그들은 석 달 넘게 붙잡혀 있다. 그들에게는 이의 제기권이 없다.
9.5 45개 강제수용소
강제수용소는 몇 개나 있고, 그 안에 몇 사람이나 갇혀 있는가? 독일 정부는 – 이것 역시 그 양심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 정확한 숫자를 밝히지 않으려고 각별히 조심한다. 모든 것이 통계로 잡히는 나라에 강제수용소 통계만은 없다. 독일 언론의 믿을 만한 몇몇 보도, 나치 지도자들의 이따금씩의 발언, 외국 기자들의 방문으로 전체를 훑어볼 수 있는 한에서, 오늘날(곧 1933년 7월 초) 적어도 45개의 강제수용소에 약 3만 5천~4만 명의 수감자가 있다. 그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수용소들이 있다.
- 뮌헨 근교 다하우(수감자 5000명)
- 오버바덴 호이베르크(2000명)
- 뷔르템베르크 그뮌트 근교 고테스첼
- 바덴 브루흐잘 근교 키슬라우(100명)
- 바덴 라슈타트(300명)
- 바덴 바트뒤르하임(500명)
- 팔츠(2000명)
- 프랑크푸르트 근교 긴스하임
- 프랑크푸르트 근교 뢰델하임
- 프랑크푸르트펙헨하임 가스 공장
- 헤센 오스트호펜
- 헤센 랑겐
- 카셀
- 라인 뮐하임(2000명)
- 베스트팔렌 반네아이켈
- 파더보른 근교 젠네라거(남성 900명, 여성 30명)
- 베스트팔렌 되르펜 근교 에스터베겐(500명)
- 하노버 근교 모링겐
- 엠슬란트 파펜부르크(수감자 4000명용으로 설치)
- 브레멘
- 올덴부르크 페히타
- 뤼네부르크 황야 빌제데(2000명)
- 함부르크 근교 풀스뷔텔
- 함부르크 근교 비트모어
- 베를린 근교 오라니엔부르크(1500명)
- 나우엔 근교 뵈르니케
- 프로이센 존넨부르크(414명)
- 튀링겐 오어드루프(1200명)
- 드레스덴 근교 마틸덴슐뢰스헨 교도소
- 작센 콜디츠
- 작센 치타우(300명)
- 작센 치타우 근교 하이네발데
- 작센 츠비카우 근교 오르텐슈타인성[157](200명)
- 작센 그륀하이니헨
- 작센 호엔슈타인 요새(800명)
- 작센 쾨니히슈타인 요새(200명)
- 에르츠산맥 작센부르크
- 브레슬라우
- 브레슬라우 근교 뒤르고이
- 쾨니히스베르크 근교 그룬다우
그 밖에도 다음 지역에 수용소가 있다.
- 브란덴부르크주(약 6개)
- 브라운슈바이크
- 루르 지방(약 5개)
- 동프로이센
- 슐레스비히
- 포메른
- 중부 독일(여러 곳)
독일 정부는 5월 중순 새 강제수용소 10곳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1933년 5월 30일 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오버바덴의 호이베르크에 겨울 전에는 석방할 계획이 없는 수감자들을 위한 두 번째 강제수용소가 세워진다고 보도한다.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수용소들의 수감자 수를 한 곳당 평균 700명으로만 잡아도, 독일 전체 수감자가 3만 5천~4만 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지나치게 많이 잡은 것이 아니다.
9.6 강제수용소의 여성과 지식인
강제수용소 수감자 가운데에는 수백 명의 여성이 있다.
붙잡을 수 있었던 공산당의 여성 제국의회 의원과 주의회 의원들은 강제수용소로 가기 전에 먼저 베를린 바르님 거리의 여자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 베를린 감옥은 체포된 여성들을 모아 두었다가 보내는 곳으로 꾸며졌다. 남부 독일에서는 6월 초에 여성 전용 강제수용소가 따로 세워졌다. 1933년 6월 5일 자 관청 발표는 이렇게 전한다.
“그뮌트 근교 고테스첼에 여성을 위한 뷔르템베르크 보호 구금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얼마 뒤 작센에도 두 번째 여성 강제수용소가 세워졌다. 모든 보고가 한결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감옥과 강제수용소의 여성들은 특별한 고통과 박해를 당하고 있다.
수감자 가운데에는 온갖 세계관, 온갖 직업, 온갖 연령층이 다 있다. 강제수용소에는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중앙당원, 평화주의자, 유대인, 젊고 늙은 노동자, 학자, 예술가, 학생, 의원, 변호사, 의사, 작가, 영세 상공인, 이름난 사람과 이름 한 번 들어 보지 못한 사람, 동조자와 투사가 한데 처넣어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벨트뷔네》의 발행인인 혁명적 평화주의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 무정부주의자 에리히 뮈잠, 바이에른의 의원 아우어, 민주당 제국의회 의원 피셔,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 로스만과 플뤼거, 변호사 한스 리텐[158], 의사 슈민케 박사와 뵌하임 박사,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이 있다.
9.7 진실은 길을 연다
히틀러 정부는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어둠으로 덮어 감추려 애쓴다. 그러나 수용소 안의 끔찍한 사실들에 관한 확실한 자료를 얻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 파시즘 희생자 위원회」는 탈출한 수감자들이나 수감자 가족들을 통해 독일 강제수용소의 소름 끼치는 사실들을 폭넓게 모을 수 있었다.
진실은 길을 연다. 돌격대가 수용소를 아무리 삼엄하게 지켜도, 진실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대열 속으로, 외국 여론 속으로 길을 찾아낸다. 진실은 가시철조망과 철조망 바리케이드를 뚫고 길을 찾는다. 민족사회주의 권력자들의 어떤 죽음의 위협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외국 기자들은 몇몇 “모범 수용소”, 곧 호이베르크·다하우·오라니엔부르크를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돌격대는 이 언론인들이 수용소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붙었고, 수용소는 이 방문객들을 위해 특별히 “손질되어” 있었다. 수감자와 기자 사이에 감시 없는 접촉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강제수용소에 관한 외국 특파원들의 묘사는 수용소의 실제 상태를 관찰한 것이라기보다 수용소 주변 경치에 대한 인상기일 때가 많다. 그러나 기자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수용소 사정을 객관적으로 그리려고 애쓰는 곳에서는, 또는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에드먼드 테일러처럼 외국어로 물어 짧은 몇 순간이나마 수감자들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곳에서는, 곧바로 비인간성의 심연이 눈앞에 열린다. 그럴 때는 신문 보도에서도 진실이 드러난다.
독일 강제수용소에 관한 진실에 이바지하려는 사람은 다음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 초당파적 구호 위원회 위원들로 꾸린 국제 위원회가 모든 수용소를 방문할 권리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문은 수용소장과 나치 판사의 감시 아래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위원회는 예고 없이 수용소에 나타나 그 안의 상태를 낱낱이 직접 조사하고 모든 수감자와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권리를 얻어야 한다!
9.8 무너져 가는 막사와 노역소가 숙소
존넨부르크와 풀스뷔텔 징역원은 중세식의, 위생이라고는 전혀 없는 감옥이라 이미 여러 해 전에 문을 닫았다. 흉악범조차 더는 그곳에 가둘 엄두를 내지 못했다. 풀스뷔텔에는 변소도 하수 시설도 없다. 이 징역원에 머무는 것은 특히 더운 계절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히틀러 정부는 이제 이 징역원들을 강제수용소로 꾸렸다. 존넨부르크에는 무엇보다 리텐, 카스퍼[159], 오시에츠키, 뮈잠이 갇혀 있다.
많은 수감자가 노역소에도 수용되어 있는데, 브루흐잘 근교의 키슬라우 노역소가 그 하나다. 노역소는 자본주의 국가가 더는 자유로운 일자리를 줄 수 없어 “반사회적”이라고 선언한 모든 사람의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상습 구걸, 부랑, “노동 기피”, 직업적 “음란 행위”가 독일 노역소를 채우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범죄”다. 한 독일 판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노역소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차라리 징역형을 내려 달라고 법정에 애원했다고 한다.
치타우 강제수용소는 예전에 민중 서점이었으니, 이 “수용소”가 얼마나 안락할지 짐작할 수 있다. 1933년 4월 25일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보도에 따르면, 다하우(바이에른) 강제수용소는 반쯤 무너진 낡은 막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라니엔부르크는 외국 기자 몇 사람에게 보여 준 바로 그 모범 수용소로, 나치는 그곳 사진을 많이 퍼뜨렸다.
“버려진 공장 – 예전에는 양조장이었다 –, 작업장들은 허물어졌고, 창문은 깨진 조각만 남았으며, 공장 마당에는 풀과 잡초가 무성하다.”
1933년 4월 30일 자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오라니엔부르크의 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한 외국인이 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를 방문할 때 통역으로 따라간 독일 여기자의 비밀 보고를 가지고 있다.
“마당에는 펌프가 단 하나뿐이다. 100~200명의 수감자가 마당에 내놓은 낡은 세숫대야 다섯 개로 씻어야 한다. 침실은 허물어져 가는 낡은 공장 작업장으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썩어 가는 짚이 몇 센티미터 깔려 있을 뿐이다.”
1933년 4월 30일 자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도 수감자들이 짚 위에서 자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다하우에서는 – 1933년 4월 25일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가이데가 묘사하기로는 – 작은 막사 하나에서 수감자 54명이 짚을 덮은 조잡한 나무판자 위에서 잔다.
앞서 말한 통역 여기자는 오라니엔부르크의 그런 침실이 얼마나 끔찍한지 이렇게 묘사한다.
“이미 저녁에 수감자들을 가두어 넣을 때면 마치 밀림의 짐승 떼가 이곳에서 밤을 지낸 것처럼 악취가 난다. 그러나 50명이 넘는 사람이 머물며 빨지 않은 옷과 땀에 젖은 몸에서 뿜어내는 공기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9.9 모범 수용소 호이베르크
호이베르크 강제수용소는 수용소들 가운데 자랑거리다. 외국 특파원들에게는 모두 이곳을 보여 준다. 이 방문객들이 내놓는 보도는 모두 수용소와 그 주변의 겉모습을 묘사할 뿐, 대개 거실과 침실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1933년 5월 말 호이베르크 수용소 방문기를 자세히 실었다. 이 묘사는 수감자들에 대한 극도로 삼엄한 경비와 군대식 훈련을 증언한다. 젊은 돌격대원들은 정치적 영향을 받을 위험을 막기 위해 수감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일절 금지되어 있다. 푀르츠겐[160]은 이렇게 쓴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자 헤르만 푀르츠겐의 방문기를 길게 인용한다. 필자의 저작권이 남아 있다고 보아 인용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기자는 해발 900미터의 옛 군 연병장에 자리한 수용소에 보호구금자 2000명이 좁은 방에 빽빽이 갇혀 있다고 쓴다. 건물들은 두 채씩 철조망으로 둘러막혀 있고, 돌격대 2인 초소와 보조경찰이 지키며, 밤에는 탐조등이 건물 정면을 비춘다.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방마다 서른여섯 명이 지내는데, 감독관이 들어서면 「차렷!」 소리와 함께 모두 일어선다. 수감자들은 손수 만든 체스를 두고, 신문은 방 전체가 한 부를 받아 한 사람이 읽어 준다. 편지는 두 주에 한 통만 쓸 수 있고 검열을 받는다. 농촌 출신의 젊은 보조경찰에게는 수감자와의 대화가 금지된 반면, 감독을 맡은 지휘관들은 방 사람들에게 「국가 정치적」 영향을 주고 편지와 대화를 살펴 누가 생각을 바꿀 가망이 있는지 가려내라는 임무를 받는다.
우리는 호이베르크 수용소의 한 수감자가 편지로 알려 준 내용으로 이 보도를 보충할 수 있다. (그 수감자는 아직 수용소에 있으므로 이름을 밝힐 수 없다.)
“호이베르크에는 계급 동지 2000명이 수용되어 있는데, 대부분 공산주의자다. 2층 건물 7~8채가 숙소로 쓰인다. 이중 동 하나와 단일 동 하나씩이 2미터 높이의 가시철조망으로 따로 둘러막혀 있다. 가로 12미터, 세로 8미터인 방 하나에 30명씩, 다락방에는 크기에 따라 4~12명씩 지낸다. 침대는 두 개씩 위아래로 놓였고, 짚 매트리스와 홑청 씌운 담요 두 장이 전부다. 목욕할 데는 없다. (암스테르담 《더 텔레흐라프》의 기자는 4월 5일 자 보도에서 한 달에 한 번 목욕을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 모든 수감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 편집자) 비누는 지급되지 않는다. 제대로 씻고 싶은 사람은 사야 한다. 속옷은 지급되지도 빨아 주지도 않는다. 수건은 모자란다. 늘 수감자 두 사람이 수건 한 장을 쓴다. 면도칼은 금지다. 면도하기가 어려워서, 턱수염이 최신 유행으로 부활을 축하할 판이다…”
수용소 소장 부크 대위는 1933년 4월 말 《폴리티켄》 특파원에게 호이베르크가 편의로 보나 위생으로 보나 요양원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의 말이 옳다. 이 수용소들은 몇 사람 빼고는 아무도 건강하게 나오지 못하는 전염병의 온상이다.
9.10 기관총과 경찰견을 거느리고 중무장한 순찰대가 수용소를 지킨다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한 경비는 극도로 삼엄하다. 어디서나 고무 곤봉, 카빈총, 권총으로 무장한 돌격대원들이 순찰한다. 많은 순찰대가 경찰견을 데리고 다닌다. 이는 공식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폴리티켄》, 《텔레흐라프》,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우리에게 이것을 전한다. 수감자의 편지마다 이것이 적혀 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 1933년 4월 27일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가이데가 보도하기로는 – 고압 전류가 흐르는 높은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본부 초소에는 언제든 쏠 수 있게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다.
《폴리티켄》(1933년 4월 말)과 《더 텔레흐라프》(1933년 4월 5일)의 특파원들 눈에는 호이베르크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뒤엉킨 가시철조망과 철조망 바리케이드가 띄었다. 밤이면 수용소는 거대한 탐조등으로 환히 밝혀진다. 눈부신 빛이 수감자들의 잠을 빼앗는다.
“바람을 들이려고 창문을 열면 총을 쏜다”고 《더 텔레흐라프》(암스테르담)는 1933년 4월 5일에 보도한다.
오라니엔부르크에서는 수용소 한쪽은 낮은 공장 담으로, 수감자들이 체조를 하는 다른 한쪽은 아주 낮은 덤불로 둘러싸여 있다. 수감자 가운데 아무도 달아나지 않는가? 외국 기자의 통역으로 오라니엔부르크를 본 그 여기자도 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 여기에는 탈주 위험이 없습니다. 간수들은 무장하고 있고, 수감자가 덤불로 표시된 경계를 넘으면 즉시 쏘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왜 달아나겠습니까? 여기서 이렇게 잘 지내는데요. 석방해 주어도 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질문: 그럴 리가요! 대답: 그저께 한 사람을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는 나가려 하지 않아서 억지로 역까지 데려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정말인지 물어보시지요.
여기자는 이어서 쓴다.
“실제로 수감자들이 자유를 마다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왜인가? 석방 명령은 대개 밤이나 아주 이른 새벽에 온다. 그때는 가는 길에 총에 맞기가 더 쉽고, 다음 날 신문에는 ‘마르크스주의자, 도주 중 사살’이라고 실린다.”
실로 그렇다. 이 낮은 덤불은 탈주를 부추기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탈주는 죽음을 뜻한다.
9.11 암실 구금과 체벌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낸 자의는 수감자들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곧 ㄱ) 쉽게 교정될 자(독일 국가인민당원, 바이에른 감시대[161], 동조자), ㄴ) 이른바 교정이 어려운 자, ㄷ) 교정 불가능한 자다. 마지막 범주에는 공산당 지도자, 간부, 좌익 지식인이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가장 가혹한 특별 규정이 적용된다. 앞서 말한 푀르츠겐의 호이베르크 수용소 보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확인해 준다.
“기존 서류와 보고에 비추어 교정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자는 ‘본관’의 19호와 23호로 옮겨진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훨씬 엄격하다. 감독관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운동 시간은 10분으로 제한된다. 흡연과 면회 허가는 더 드물게 나오며, 수감자들에게 몇 시간 몸을 움직일 기회를 주고 식량 추가 배급을 받게 해 주는 노동 봉사도 본관에서는 없다.”
이 기자의 건조한 보도도 우리는 호이베르크 수용소 한 수감자의 편지 원문으로 보충할 수 있다. 그의 비명은 가시철조망과 국경을 넘어 우리에게 닿았다.
“소중한 동지들! 이 구조 요청이 여러분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이곳 생활은 그야말로 끔찍합니다. 대우는 감옥이나 징역원보다 나쁘고, 전쟁 포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밤 8시 반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아침 5시 반에(6시가 아니라) 쫓겨 일어납니다. 밤에도 쉴 수가 없습니다. 밤중에 서너 번씩 막사 앞으로 내몰려 광장을 뛰어다니는 일이 잦은데, 그때 매질과 가장 상스러운 욕설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밤에 우리가 ‘쉬는’ 시간은 서너 시간뿐입니다. 한 가지 일을 말하겠습니다. 부대 전체가 밤중에 끌려 나와 교련을 해야 했는데, 나치 여섯 명이 고무 곤봉을 들고 권총을 들이대며 한 동지를 무지막지하게 때렸습니다. 그들은 저항이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그랬다면 틀림없이 그 동지를 쏘아 죽였을 것입니다. 그가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그들은 나중에 그를 다시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팼습니다. 이 동지에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평을 해도(beschweren) 되긴 하지. 하지만 소용없어. 우리는 당신을 모래주머니로 짓누를(beschweren) 수도 있거든.’ 에빙겐의 한 동지는 엿새 동안 암실 구금을 당하면서 먹을 것을 두 번밖에 받지 못해, 반쯤 굶어 죽은 몰골에 송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암실에서 그는 끔찍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뉘르팅겐 동지들은 미친 듯한 매질로 지금도 온몸이 시퍼렇습니다. 돌격대원들의 고함, 무방비 상태인 우리 동지들의 비명은 밤낮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천천히 굶어 죽으라고 정한 듯한 이 식사로는 아무리 강한 신경도 망가질 수밖에 없어서, 많은 동지가 자살을 생각하거나, 맞아 죽거나 총에 맞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저항하려 합니다. 이제 19a, 19b, 23a, 23b에서 새로운 처벌 강화가 시행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각 등급 안에서 나이별로 모아 둡니다. 그 목적은 젊은 동지들을 더욱 혹독하게 길들이고, 젊은 돌격대원들과 달리 거의 다 여러 해 동안 전선에 섰던 나이 든 동지들을 따로 떼어 다루려는 것입니다.
징벌동에는 아직 기자가 한 사람도 들어와 본 적이 없습니다. 기자들에게는 아마 1등급 건물을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1등급과 2등급의 특전은 수요일과 토요일에 담배 세 개비씩, 그리고 세 사람에 순대 하나입니다. 음식이 어찌나 좋은지 우리는 모두 영양실조에 걸려 몰골이 끔찍합니다. 음식 몇 가지를 들어 보지요. 국수 넣은 양배추, 아주 묽은 적양배추, 국수 넣은 감자 조각, 감자 넣은 단 쌀죽, 고기는 평균 3그램(글자로 써서 고기 3그램!)입니다. 11주 동안 우리는 제대로 된 고기와 사워크라우트를 두 번 받았습니다. 모든 음식에 기름기가 없고 맛도 없으며 소다가 잔뜩 들어 있습니다. 11주 동안 버터는 두 번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서서히 죽어 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수감자를 세 범주로 나눠 계획적으로 서로 반목하게 하려 한다. 수용소장들은 교묘하게 고안한 징계를 앞다투어 만들어 낸다. 수감자들의 자유 시간이 줄어든다. 편지 쓰기 허가가 제한되거나 아예 박탈된다. 면회 허가가 오랫동안 중지된다. 수감자들은 얼마 안 되는 자유 시간에 함께 모이는 것도 금지된다. 그들은 유난히 엄격한 격리와 감시를 받는다. 흡연이 엄격하게 금지된다. 하루 산책 10분만 허락되는 장기 구금이나 암실 구금이 내려진다. 흔히 쓰는 징계로는 몇 시간씩의 벌 교련, 징벌 체조, 노동 시간 연장, 특히 힘들고 익숙지 않으며 진을 빼는 노동이 있다. 몇몇 강제수용소에서는 특히 눈엣가시인 죄수들을 쇠사슬로 묶기에 이르렀다.
1933년 4월 27일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보도에 따르면, 이를테면 다하우에서는 반항하는 자들이 작은 막사를 아예 떠나지 못하고 바깥 공기도 쐬지 못한다. 앞서 말한 여기자의 보고는 오라니엔부르크에서 “교화가 어려운” 수감자들이 갇혀 지내야 하는 구금실을 묘사한다.
“쇠문으로 막아 놓은 벽 구멍으로, 문 말고는 아무 환기구도 없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 방을 빈 채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견학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서였으니, 분명 먼저 수감자들을 거기서 빼낸 것이다. 120명의 수감자 가운데 30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가서 보지 못하게 한 저 뚜껑문 아래에 있었던 것일까?”
호이베르크에서는 나이 든 변호사 한 사람이 형편없는 음식에 대해 불평했다. 이 불평 때문에 그는 막사 지붕 위에서 담요도 없이 보름 동안 자라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부크 대위는 네덜란드 신문 《더 텔레흐라프》의 기자에게 (1933년 4월 5일) 호이베르크 수용소에는 구금실이 아예 없다고 장담한다.
9.12 매질과 가학적 고문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모든 특파원이 입을 모으는 바다. “교정 불가능한 자”들은 육체적 파멸을 피할 수 없도록 다루어지고 있다.
그 목적은 뻔히 보인다.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뛰어난 간부들을 육체적으로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많은 편지에서 드러나듯, 강제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에 대한 극도로 심한 학대가 벌어지고 있다. 부크 대위는 《폴리티켄》 기자에게 강제수용소에서 학대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장담했다. “구타도 없고 체벌도 없다”고 그는 감히 주장했다. 실제로는 수감자들이 가장 끔찍한 학대를 받고 있으며 특히 3등급 수감자들이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독일 정부 언론만 들여다보아도 드러난다. 1933년 4월 1일 자 《앙그리프》는 이렇게 쓴다.
“국기단원 한 명이 신문을 받는다… 그는 건방지게 대답하지만, 그 자신의 고무 곤봉을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고무 곤봉을 가리키기만 해도 수감자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면, 이 수용소에서는 얼마나 심한 학대가 벌어졌겠는가.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1933년 4월 30일 자 보도에서 이렇게 확인한다.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가차 없이 엄하게 신문을 진행하고서야 비로소 지하 테러를 거의 전모까지 밝혀낼 수 있었다… 몇몇 수감자의 저항은 아직도 꺾어야 한다.”
이런 소식들은 신문에서 고문이 쓰인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우리는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 특파원 에드먼드 테일러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호이베르크 수용소의 수감자 몇 사람과 영어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데 성공해, 그를 따라다닌 돌격대원들은 그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여러 수감자가 이 수용소에서 심한 학대가 자주 벌어진다고 분명히 확인했다.
츠비카우 근교 오르텐슈타인성 수용소에서 온 보도도 다르지 않다. 이 수용소를 방문한 사람들은 수감자들의 팔과 손에서 피멍 든 채찍 자국과 시퍼런 멍을 보았다고 선서에 갈음하여 진술한다. 이 자국이 학대에서 생긴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감자 경비를 돌격대원들에게 맡겼던 동안 학대가 특히 끔찍했다. 돌격대가 경찰로 바뀌자 수감자들의 처지는 조금 견딜 만해졌다. 그러나 5월 초부터 다시 돌격대가 오르텐슈타인에 와 있다.
9.13 존넨부르크의 지옥
존넨부르크 강제수용소는 따로 다루어야 한다. 수감자들의 편지와 보고, 심지어 관청의 확인 조사까지도 존넨부르크가 진짜 고문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다. 노동자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가장 굴욕적인 학대를 당하고 있다. 독일 전역에서 이 수용소는 「존넨부르크의 지옥」이라고 불린다.
존넨부르크에서 몰래 내보낸 한 노동자의 편지는 그곳 사정을 가슴을 뒤흔들 만큼 그려 보인다.
“처음 들어온 수감자 수송대는 존넨부르크 역에서 돌격대 부대들과 특수 임무 보안 경찰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노래를 불러야 했고, 말 그대로 수용소까지 내내 두들겨 맞으며 끌려갔습니다. 존넨부르크 주민들이 이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수용소에 도착하자 수감자들은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마당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다음 첫 무리가 홀에 수용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층에서 짚을 직접 가져와야 했습니다. 계단에는 돌격대원들이 서서 고무 곤봉으로 수감자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홀에서 우리는 다시 의자 다리와 고무 곤봉으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몇몇 동지는 돌격대의 똥통을 닦아야 했고, 그러면서 또다시 짐승처럼 학대당했습니다. 돌격대원 하나가 수감자의 머리를 자기 두 다리 사이에 끼우면 다른 하나가 때렸습니다. 동지들은 맞는 대로 소리 내어 세어야 했습니다. 185대까지 맞은 수감자도 있습니다. 거기에 발길질과 그 밖의 학대가 더해졌습니다. 가장 많이 고통받은 것은 리텐, 비너, 베른슈타인, 카스퍼, 슈넬러[162] 동지와 유대인 수감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오랜 벗 뮈잠은 특히 심하게 고통받았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 대신 내가 신병이던 시절보다 더 지독한, 엄청나게 혹독한 군대식 훈련이 판을 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에서 교련하고 행진하고 노래하며 보내야 합니다. 처음 3주가 가장 끔찍했습니다. 독방에서 우리는 밤에 습격을 당해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등이 새까매진 동지들도 있었습니다. 리텐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검찰 참사관 미텔바흐에게 (존넨부르크에 갇힌 수감자 몇 사람의 아내들이 몹시 격분하여 베를린 경찰 본부에 강력히 항의한 끝에, 미텔바흐를 조사차 존넨부르크로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이 짐승 같은 학대를 견딜 수 없으니 차라리 머리에 총알을 박아 달라고 직접 부탁했습니다.”
이 묘사는 1933년 4월 7일 자 《존넨부르거 안차이거》의 보도로 보충된다.
“수감자들은 국가를 부르며 역에서 옛 징역원까지 행진해야 했는데, 그때 베를린 보조 경찰의 고무 곤봉이 거들어 주는 일이 잦았다.”
이 세 줄 속에 지옥 하나가 통째로 갇혀 있다.
9.14 뮈잠, 카스퍼, 베른슈타인, 오시에츠키가 야만스럽게 학대당하다
존넨부르크[163] 수감자의 이 묘사는 존넨부르크로 남편을 면회하러 갔던 뮈잠 부인과 카스퍼[164] 부인의 편지로 끔찍하게 확인된다. 뮈잠 부인은 이렇게 쓴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에리히 뮈잠의 아내 첸츨 뮈잠(1884~1962)의 편지를 인용한다. 필자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인용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그녀는 존넨부르크에서 남편을 다른 수감자들 사이에서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맞은 모습으로 보았다고 쓴다. 수염은 잘리고 이는 부러져 있었다. 이송 도중 짐 가방을 들고 가다 넘어지자 돌격대원들이 길바닥에 쓰러진 그를 두들겨 팼다고 한다. 아내를 본 뮈잠이 처음 한 말은, 어떻게 이 지옥에 왔느냐, 자기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보았으니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카스퍼를 보았을 때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 짜내야 했다. 사흘 전에 그를 본 터라 더욱 충격이 컸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얼굴은 핏기가 없고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시퍼렇게 멍든 한쪽 눈에서 입까지 피멍이 번져 있었다. 누가 얼굴을 짓밟기라도 한 듯 입에 피멍이 심하게 들어 있었다. 그는 말도 거의 못 했고, 온몸에 느끼는 고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치범 베른슈타인과 가이슬러의 아내들은 감독 관청을 졸라 존넨부르크 면회 허가를 받아 냈다. 베른슈타인 부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낯선 사람이 내 앞에 있는 줄 알았다. 두 눈과 그 둘레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심하게 부어 있었다. 얼굴 위로는 고무 곤봉에 맞은 넓은 줄 자국이 나 있었다. 남편 몸에 손을 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온몸이 그렇게 두들겨 맞았음이 틀림없었다. 면회 시간 내내 그는 이상한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다.”
가이슬러 부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보았을 때 남편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고 얼굴이 몹시 부어 있어서, 비통함에 소리 내어 울부짖지 않으려고 나 자신을 억눌러야 했다.”
존넨부르크를 탈출해 외국에 닿은 한 수감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존넨부르크 징역형 감옥에는 정치범 414명이 수용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는 2월 28일에 체포된 카를 폰 오시에츠키도 있다. 존넨부르크 감옥에서 열사흘을 지내고 이제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한 동료 수감자가 병동에서 오시에츠키를 보았다. 구부정한 자세, 움푹 꺼진 얼굴, 누렇고 병든 낯빛,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젓는 몸짓,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 그는 오시에츠키를 이렇게 묘사한다. 다른 존넨부르크 수감자들은 이렇다. 비너 박사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았다. 공산주의자 베른슈타인은 콩팥이 망가지도록 맞아 이제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한다. 공산주의자 카스퍼는 음모를 뽑혔다. 에리히 뮈잠은 카스퍼와 함께 자기가 묻힐 무덤을 파야 했는데, 이튿날 아침 둘 다 총살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에리히 뮈잠도 수염을 잘려 얼굴이 일그러져 보인다. 밤중에 그들은 카스퍼의 감방 창문을 깨고 권총을 들이밀며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러고는 감방으로 쳐들어와 고무 곤봉으로 카스퍼를 두들겨 팼다. 존넨부르크의 일과는 이렇다. 아침 5시 15분: 기상, 변기통 내가기(존넨부르크에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 감방 청소, 세면, 맨손 체조 등. 8시 30분: 아침 식사. 9~10시: 군사 훈련. 히틀러 노래 합창. 10시 30분~12시: 휴식, 이어서 점심. 12시 30분~5시 30분: 군사 훈련과 체조 놀이. 6시: 저녁 식사. 6시 30분~7시 30분: 교련. 7시 30분~8시 30분: 공동 모임.
존넨부르크 수용소의 학대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던지, 4월 11일 새로 부임한 수용소 경찰 지휘관이 상급 관청에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위의 명령에 따라 이 편지의 사본을 없애야 했다. 찢긴 이 사본의 조각 대부분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
“존넨부르크, 1933년 5월 18일. 건명: 1933년 4월 11일 경찰 구치소 인수 이후의 특이 사항. 1933년 4월 11일 부임하면서 본관은 이곳 경찰 구치소, 특히 돌격대 대원들 사이에 질서가 잡혀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이는 주로 다음 사항에 관한 것이었다. 1) 돌격대 대원들의 수감자 처우, 2) 돌격대의 행정 공무원에 대한 태도, 3) 돌격대 내부의 태도, 4) 돌격대의 대외적 태도, 5) 돌격대의 급여 사정.
1에 관하여. 수감자 일부, 특히 저명인사들이 돌격대원들에게 극히 심하게 학대당해 있었다. 학대가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부상한 수감자들은 이제 보안(빠짐)경찰관의 감시 아래 두었다. 본관은 돌격대원들에게 되풀이할 경우(빠짐) 위협했다. 밤낮으로 돌격대를 엄히 감시함으로써 수감자에 대한 (빠짐)이 줄어들었으나, 그런데도 본관은 두 건의 수감자 구타를 확인했다. 돌격대 대원들이 특히 이런 일에서는 서로 감싸 주는 까닭에, 범인을 찾으려는 조사는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본관은 이런 종류의 사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해당 경비조를, 경우에 따라서는 돌격대 대원 전체를 교체하겠다고 돌격대에 경고했다.
2)에 관하여. 급여 사정이 뒤틀려 있는 탓에 행정 공무원과 돌격대 대원들 사이에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적절한 선급금을 지급했는데도 돌격대원들은 자기들이 손해를 본다고 여겼고, 경찰 감독관 펠츠를 장본인으로 여겼다. 경찰 감독관 펠츠에 대한 그들의 행패는, 본관이 직접 나서서 엄하게 꾸짖어야만 돌격대가 정신을 차릴 정도에 이르렀다. 1933년 4월 24일 돌격대가 철수할 때, 본관은 폭행을 막으려고 무장한 보안경찰관 한 명을 시켜 펠츠 경찰 감독관을 그의 집에서 지키게 해야 했다.
3)에 관하여. 돌격대 대원들 안에서는 대체로 하찮은 이유로 다툼이 자주 벌어졌다.”
(보고는 여기서 끊긴다.)
9.15 “침묵과 매질”
젊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한 사람이 7주 동안 갇혀 있던 호엔슈타인[165] 수용소에서 얼마 전 탈출했다. 강제수용소의 쓸쓸한 하루 일과를 보여 주는 그의 보고는 담담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더 강하게 와닿는다.
“호엔슈타인에는 800명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 그리고 중앙당 사람도 몇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따로 갇혀 있다. 그들의 처지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아침 6시면 ‘하일 히틀러’ 하는 기상 구호에 침대에서 뛰어나와 침대 옆에 차렷 자세로 버티고 서야 했다. 그렇게 옷도 입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우리는 첫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우리 민족을 도우시고 우리 총리 히틀러를 지켜 주소서.’ 문구를 정확히는 모른다. 나는 그때마다 그저 웅얼거리기만 했다. 기도를 선창하는 것은 우리 조장이었다. 우리 조는 20명이었다. 6시 45분, 커피를 받으러 정렬. 따뜻한 검은 물(아무리 좋게 봐줘도 커피라고는 할 수 없다)과 빵 한 조각. 그다음 차렷 자세로 서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독일인의 노래」를 부른다. 7시, 마당으로 나가 맨손 체조, 무릎 굽히기, 군사 훈련. 엎드려, 일어서, 엎드려, 일어서… 뱃속에는 그 물 조금과 빵뿐인데. 중간에 축구와 이어달리기를 섞어 가며 이렇게 9시까지 간다. 이제 작업하러 정렬. 모래 나르기, 막사 짓기, 숲에서 나무 끌어 오기. 12시에 대열을 지어 돌아온다.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또 부르고, 식사 기도 ‘예수여 우리의 손님이 되시고… 우리 독일 민족을 지켜 주소서.’ 점심은 수프와 빵. 일주일에 두 번은 고기가 조금 나왔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다음엔 조마다 식기를 들고 설거지하러 간다. 12시 30분, 다시 놀이와 교련. 3시, 점호 사열. 지휘관이 대열 앞을 걸어 지나간다. 우리는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또… 5시까지 교련한다. 이제 마당을 ‘자유롭게’ 거닐어도 된다. 그러나 누구도 남과 한마디도 나눠서는 안 된다. 쉬는 지금도, 일할 때도.
6시 30분, 저녁 식사. 빵 한 조각, 운이 좋으면 소시지나 치즈 한 조각.
7시 30분, 모두 침대 곁에 정렬. 「독일인의 노래」를 또 부르고 기도를 줄줄 외고, 8시면 모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 밤새 방에 불이 켜져 있다. 카빈총을 든 돌격대 초병들이 우리를 지킨다. 누구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밤낮으로 침묵하도록 선고받았다.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구령, 욕설, 기도,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독일인의 노래」뿐이다. 나는 딱 한 번 맞았다. ‘이 빌어먹을 마르크스주의자 놈, 차렷 안 해? 본때를 보여 주마!’ 그러고는 고무 곤봉이 내 머리통에 내리꽂혔다. 우리는 자기 옷을 입고 있었는데, 단추만은 잘라 냈고 멜빵은 빼앗았다. 가족 면회는 한 달에 두 번 받을 수 있었다(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하거나 그 밖의 ‘불복종’을 하면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거나 감옥에 갇혔다. 호엔슈타인은 오래된 성이라, 지하에 아주 오래되고 축축하고 어두운 성 감옥이 있었던 것이다. 일곱 주 내내 그렇게 지나갔다. 차렷, 엎드려, 일어서, 민족 찬가 부르기, 일하기, 굶주리기, 그리고 — 침묵하기.”
또 다른 수감자는 쾨니히슈타인 강제수용소에서 이렇게 쓴다.
“이른 아침 6시에 우리는 경찰에 끌려간다. 경찰은 우리를 꽤 점잖게 대한다. 우리는 쾨니히슈타인 강제수용소로 넘겨진다. 이곳에는 수감자 200명이 있고, 감시하는 돌격대원이 60명이다. 우리는 사격장 짓는 일을 한다. 음식은 견딜 만하다. 끊임없는 학대만 없다면. 그러나 돌격대 간수들은 몇몇 예외(나이 든 사람들)를 빼고는 너무나 비열하다. 우리는 들어오자마자 혹독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먼저 45분 동안 구보를 해야 했고, 이어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차렷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그동안 권총으로 위협당하고 고무 곤봉, 승마 채찍, 카빈총으로 얻어맞았다. 그다음엔 머리를 땅에 숙인 채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이 동작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징 박은 구두로 뒷덜미를 걷어차였다. 그다음엔 다시 한 시간 동안 매질이었다. 몇몇은 반쯤 죽도록 맞았다. 머리카락을 잘라 우리 입에 쑤셔 넣었다. 이 모든 절차가 저녁 6시 15분부터 밤 2시 30분까지 이어졌다. 그 뒤 몇 주 동안에도, 특히 돌격대 소대장 푸르만이 나치와 다툰 일로 알려진 사람들을 유난히 심하게 학대했다. 그러다 하이데나우의 동지로 반파시스트 투쟁동맹의 지도자였던 굼베르트(41세)가 맞아 죽자 돌격대 상급 지휘관들이 개입했고, 그 뒤로 조금 나아졌다. 처음 며칠 밤은 춥고 젖은 방에서 담요도 없이 자야 했다. 나중에야 담요가 들어왔다. 온갖 고통에도 동지들의 자세는 꿋꿋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아직 정치적 환상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꿋꿋이 버틴다. 동지를 배신한 일은 없었다.”
“쾨니히슈타인”에서 벌어진 가장 비인간적인 만행에 관해서는 프라하의 《사회민주주의자》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실렸는데, 이 신문은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을 명시적으로 진다고 밝혔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증언되었다. “쾨니히슈타인에서 수감자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은 동료 수감자의 엉덩이를 핥도록 강요당했다. 수감자들은 돌격대원들이 갓 눈 똥 위에 세 시간 동안 얼굴을 대고 있도록 강요당했다. 술 취한 돌격대원들이 밤중에 수감자들을 깨워 험악하게 위협하며 쓰고 난 콘돔을 핥게 했다. 수감자들은 밤중에 고문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떨었다. 자기들이 가학적 난잡판의 제물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감자들은 고문자들이 보는 앞에서 수음하도록 강요당했고, 동료 수감자와 자연에 어긋나는 성교를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수감자들의 돈을 훔치고는 그들이 위조지폐를 가지고 있었다고 자백하게 했다. 수감자들을 ‘벌로’ 축축하고 차가운 지하실에 처넣고 잠잘 곳도 앉을 곳도 주지 않았다. 모든 수감자에게 석방될 때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고 확인하게 했다.” 이 모든 일은 쾨니히슈타인의 돌격대 지휘관 비네르트와 고틀로이바의 푸르만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이 두 “지도자”는 처벌받기는커녕 전보 발령을 받았을 뿐이다.
9.16 굶주림의 배급
《더 텔레흐라프》(1933년 4월 5일)와 《데일리 텔레그래프》(1933년 4월 27일)의 기자들이 음식이 어떠냐고 묻자 수감자들은 “좋습니다. 하지만 넉넉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는 음식은 좋지도 넉넉하지도 않다. 호이베르크[166] 강제수용소의 한 수감자는 몇 주 갇혀 있는 동안 몸무게가 30파운드나 줄었다. 그런데도 수용소 책임자의 한 사람인 카우프만 중위는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자(1933년 4월 8일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감자 대다수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음식은 좋습니다. 든든하고 넉넉한 단일 요리가 나오고, 고기는 일주일에 두 번입니다.”
반면 여러 수감자를 영어로 인터뷰한 에드먼드 테일러는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에 이렇게 쓴다.
“수감자들은 형편없는 급식을 두고 쓰라리게 불평했다. 음식은 대체로 멀건 보리죽이다.”
1933년 4월 27일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게디[167]는 “수감자들이 히틀러 생일을 기념해 — ‘이날은 어떤 독일인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 — 자우어크라우트를 받았다”고 보도한다. 자우어크라우트가 벌써 잔칫날 음식이라면, 보통 날의 수감자 급식은 대체 어떻겠는가? 한 수감자의 편지가 그것을 낱낱이 알려 준다.
“배를 곯는 것이 구호다. 음식은 지독하게 형편없다. 빵은 하루에 1파운드만 나온다. 지난주 우리 점심은 이랬다. 감자와 채소를 넣은 냄비 요리, 아니면 말린 과일을 조금 곁들인 찐빵, 아니면 감자를 넣은 렌즈콩. 처음엔 이 음식이 1리터씩 나왔다. 지금은 양이 줄었다. 고기와 기름을 아끼니 음식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다. 게다가 양도 너무 적다. 저녁은 더 나쁘다. 한두 번은 수프인데, ‘민족 교육’을 한다고 물에 끓인 하켄크로이츠 모양 국수가 들어 있다. 아니면 림부르크 치즈 100그램이나 블러드소시지 또는 간 소시지 80그램. 버터는 1그램도 없고, 마가린도 없고, 라드도 없다. 거기에 아침처럼 커피. 우리는 늘 배고픈 채 잠자리에 든다. 바깥 작업에 차출된 사람은 빵 반 파운드와 블러드소시지 80그램을 더 받는다.”
9.17 빵을 달라는 외침
모든 편지에서 되풀이되는 사실은 빈약한 음식에 기름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소다는 아끼지 않고 넣는데, 성욕을 줄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다는 생식 능력을 망가뜨리고 위벽을 해친다. 빵 배급조차 넉넉하지 않다. 수감자들의 모든 편지가 이를 확인해 준다. 《더 텔레흐라프》 기자(1933년 4월 5일)가 공산당 의원 아르놀트(울름)에게 음식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이 수감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기가 너무 적고, 빵이 너무 적고, 기름은 쩐내가 납니다.”
같은 기자는 1933년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의 주간 식단표를 옮겨 놓았다.
“날마다 빵 1파운드, 커피 10그램, 설탕 30그램, 버터 없음.
일요일, 점심 고기와 감자, 저녁 설탕 넣은 커피와 비스마르크 청어 한 마리. 월요일, 점심 고기, 저녁 걸쭉한 수프. 화요일, 점심 완두콩 죽과 소시지 100그램, 저녁 설탕 넣은 커피와 치즈 100그램. 수요일, 점심 보리, 감자, 마카로니, 저녁 커피와 소시지 100그램. 목요일, 점심 렌즈콩과 감자, 저녁 완두콩 수프와 베이컨 100그램.”
이 식단표는 틀림없이 기자의 방문에 맞춰 특별히 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식단표만 보아도 수감자 급식에는 생명에 꼭 필요한 영양소의 최소량조차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 12시간 일하는 사람에게 빵 1파운드! 신선한 채소는 없다! 일주일에 기름 100그램! 수감자들은 굶주리고 있다. 호엔슈타인 수용소의 한 젊은 수감자가 몰래 내보낸 쪽지(앞의 글 참조)는 그 자체가 하나의 비명이다.
9.18 여덟, 아홉 시간, 그 이상의 강제 노동
민족사회주의자 장관 프리크는 강제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목적에 맞는 노동을 통해 국가의 쓸모 있는 구성원으로 다시 교육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실제로는 여덟, 아홉 시간, 그 이상의 노동 시간은 괴롭힘의 수단일 뿐이다.
수감자 편지 몇 줄만으로도 이 “교육적” 노동의 모습을 그려 보기에 충분하다.
“5시 30분 기상. 작업장(땅 고르기, 도로 공사)까지 한 시간 반 행군, 그러고는 한 시간 쉬는 것을 빼고 2시 30분까지 일한다. 다시 한 시간 반 행군. 경비로는 카빈총, 권총, 고무 곤봉을 든 돌격대원이 20명씩 경찰 지휘 아래 따라간다.”
익숙지 않은 이 강제 노동의 고문에는 의사, 변호사, 작가 들도 내몰린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더는 젊지 않아 이런 노동의 고됨을 견뎌 내지 못한다. 호이베르크에서는 수감자들이 채석장 일을 해야 한다. 노이슈타트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비행장 땅을 골라야 했다. 온갖 교묘한 차단 조치에도, 고되고 사람을 짓이기는 강제 노동에 관한 소식이 바깥으로 새어 나온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자기네 화보 잡지에 기사를 실어 이 소식의 효과를 누그러뜨리려 한다. 연출된 사진 속에서 수감자들은 즐겁고 가벼운 일을 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 사진의 거짓말에 맞서, 우리는 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를 찾은 한 중립적 방문자의 묘사를 내놓는다.
“그 일이란 — 일단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 지키는 쪽에게나 지켜지는 쪽에게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의미한 짓이다. 젊은 노동자 셋이, 함께 실업 수당을 타던 동료 여섯을 몰아세워 풀줄기를 서둘러 땅에서 뽑게 한다. 여섯은 완전히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기어 다니며 돌 틈에 돋아난 봄 풀잎을 뽑고, 잔뿌리를 파내고, 모래에서 찌꺼기를 걸러 내 다시 꼼꼼히 포석 틈에 눌러 넣는다. 연장은 없다. 풀이 그냥 자라도 아무도 성가실 것이 없을 텐데도. 공장 건물 뒤에서는 물을 잔뜩 뿌려 댄다. 수십 명이 그 낡은 건물을 청소하는 데 매달려 있다. 건물이 대리석 궁전처럼 번쩍이지 않는 것이 그들 개인의 타락으로 돌려진다. 나무 부스러기 하나, 모래알 하나까지 치워야 한다. 벽에는 예전부터 소비에트 별 하나가 남아 있다. 없애라, 벽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도 일이 아니라 그저 시간 때우기일 뿐인 노동의 짐승 같은 무의미함. 이웃 숲을 개간하는 곳에서는 훨씬 더 고약하다. 나무는 이미 베어졌다. 겹겹이 감시받는 수용소 인원이 출동해 맨손가락으로 거대한 그루터기를 파낸다. 돌격대원들이 자기 할아버지뻘인 노동자들을 몰아붙인다. ‘늙은 돼지’, ‘빨갱이 돼지’, ‘불알 갈기’ — 이런 말은 제정 시대 군대의 어휘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만 더 거칠고 더 비열할 뿐이다.”
이것이 제국 내무부 장관 프리크의 “교육적 노동”이다!
9.19 강제 노동 뒤에는 징벌 교련
수감자에 대한 괴롭힘은 강제 노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은 시간은 교련으로 채워지는데, 이를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당치 않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오후 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가 교련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를 찾았던 여기자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전한다.
“이 터(작은 덤불로만 바깥 자유와 갈라져 있는 곳. — 편집자)에는 수감자들에게 시키는 운동을 위한 여러 기구가 세워져 있다.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 피상적인 관찰자는 수감자들이 마음껏 몸을 단련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운동을 하는 줄로 안다. 그러나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비열한 괴롭힘의 교묘한 체계임을 알아본다. 실제로 요구되는 동작들은 직업 운동선수에게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해내려면 체계적이고 꾸준한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별히 좋은 영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3월 21일부터 있었던 이 수용소에서는 모든 수감자가 예외 없이 이것을 해야 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4시간씩, 몇 주, 몇 달 동안, 다른 훈련, 행군, 노래 따위는 빼고서다… 오른쪽, 덤불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고정된 평행봉이 있다. 수감자는 저마다 먼저 이 평행봉에서 체조를 해야 한다. 10미터 더 가면 판자, 아니 나무 울타리(높이 2.5미터, 너비 3미터)가 있는데, 그다음 이것을 기어 넘어야 한다. 같은 거리에 다시 깊이 2미터, 너비 2~3미터의 도랑이 있는데, 바닥은 진흙투성이이고 이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곧 물이 가득 찰 것이다. 10미터 더 가면 이 도랑이 되풀이되는데, 실은 높이 2미터, 두께 80센티미터의 둔덕에 가까워 수감자들은 이것을 기어 넘어야 한다. 그리고 왼쪽 경계를 따라 길이 약 10미터, 깊이 70~80센티미터의 일종의 덫이 있어 수감자들은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야 한다. 이 덫 안에는 반 미터 간격으로 위와 아래에서 번갈아 판자가 튀어나와 있어,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기어야만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기어갈 틈이 너무 좁아서 아이라야 힘들이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뿐, 보통 체격의 남자는 거의 지나갈 수 없다. 이 덫을 빠져나오면 다시 높이 1미터와 반 미터의 장애물 두 개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 한 차례의 훈련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네 시간 동안,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우리는 이름난 스포츠 의학자 벨랭 뒤코토 박사[168]를 찾아가, 이런 교련 방식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소견을 내 달라고 부탁했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중립인 이 명망 있는 내과 의사에게, 우리는 그것이 독일의 파시스트 강제수용소 이야기라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 앞의 보고에서 드러나는 사실들만을 제시했다. 벨랭 뒤코토 박사는 우리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벨랭 뒤코토 박사가 1933년 5월 27일 파리에서 보낸 소견서를 싣는다. 필자의 생몰을 확인할 수 없어 전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박사는 장애물을 둔 장거리 달리기가 군대와 무장 단체에서 쓰는 고된 운동으로, 맥박을 분당 180~200회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건강 상태가 좋고 두 달가량 기초 훈련을 받은 사람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달리기는 하루에 세 번을 넘기면 해롭고, 한 번 할 때마다 적어도 한 시간은 쉬어야 하며, 할 때마다 의사의 검진을 받아야 하고, 아주 넉넉한 식사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수용소에서는 이 조건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엮은이들이 소견서를 실은 까닭이다.
9.20 강제수용소의 24시간
우리가 가진 보고들을 보면 강제수용소의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확히 그려진다.
5시 30분: 기상. 5시 30분~6시: 짚 깔개 치우기. 6시: 정렬, 군대식 자세, 히틀러식 경례로 손을 뻗어 든다. 민족 예배 시간, “민족” 노래 부르기. 6시~6시 30분: 맨 빵을 곁들인 커피. 6시 30분~7시 30분: 작업장까지 행군 또는 수용소 안 강제 노동. 7시 30분~12시 30분: 강제 노동(채석장, 도로 공사, 그루터기 캐기, 담벼락 닦기). 12시 30분~1시 30분: 전혀 모자란 점심. 멀건 냄비 요리 4분의 3리터로, 거의 언제나 고기도 기름기도 전혀 없다. 1시 30분~5시 30분: 잔인한 교련과 체조(네 시간!). 5시 30분~7시 30분: 강제 노동. 7시 30분~8시 30분: 저녁 식사(점심과 같다. 대개 맹물 수프나 죽, 소시지 몇 그램을 곁들인 맨 빵). 8시 30분: 귀영 나팔(옛 프로이센 군국주의가 병사들을 막사로 불러들이던 이 신호마저, 늘 수용소 안에 있는 수감자들에게 터무니없이 그대로 쓰인다). 9시~5시 30분: 환기도 잘 안 되고 수감자 수에 비해 너무 좁은 막사, 방, 허물어진 공장 홀에서 나무 침상과 짚 깔개 위에서 잠.
9.21 삶에서 뜯겨 나오다
앞에서 묘사한 육체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것은 수감자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의 고문이다. 삶과 직업에서 뜯겨 나온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육체적 욕구의 충족마저 포기해야 한다. 자유 시간도, 오락도, 휴가도, 기분 전환도, 더 배울 기회도 없다. 강제 노동과 교련 — 강제수용소 수감자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1933년 4월 5일 자 《더 텔레흐라프》가 이에 대해 몇 가지를 들려준다.
“화장실: 없음. 매점: 없음(호의로만 무언가를 구할 수 있다). 면회: 없음. 읽을거리: 나치 문서만, 고전 몇 권은 노동자에게 너무 어렵다. 흡연: 금지(호의로 예외적으로만 허용). 편지: 2주에 한 통, 검열. 음악과 운동: 전혀 없음. 목욕: 한 달에 한 번(다른 사람들 말로는 아예 없음). 식료품 소포: 하나도 전달되지 않음.”
덴마크 신문 《폴리티켄》의 기자는 강제수용소에 관한 기사에서, 호이베르크 수용소 검열실에서 본 수감자 편지들을 인용한다. 이 편지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가슴을 찢는 외침이다.
“아, 얼마나 많은 소망, 얼마나 많은 슬픔, 얼마나 많은 불행, 얼마나 많은 눈물인가…”
“이 감옥의 보이지 않는 창살 너머로 앙상한 팔을 뻗는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을 지켜 달라고 하늘에 올리는 기원은 또 얼마나 많은가.”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구절들을 인용한다.
“아, 우리 꼬마 헤트비히를 한 번만 더 가슴에 안아 볼 수 있다면…”
“부활절만이라도 너희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면…”
“가엾은 어머니, 드실 것은 있으세요?”
그렇게 그들은 며칠, 몇 주, 몇 달을 살아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철조망 바리케이드와 가시철사뿐이다. 그 뒤에서 그들은 멍하니 교련을 하거나 무의미한 일을 해야 한다.
9.22 죽음으로 가는 길
징역수는 누구나 자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셈해 볼 수 있다. 하루하루가 그를 석방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는 자기가 얼마 동안 갇혀 있을지 알지 못한다.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 희망이 타올랐다가 꺼진다. 이 불확실함이 그를 짓이겨 무너뜨리게 되어 있다.
강제수용소 지옥의 야만스러운 처우, 불확실함의 고통은 많은 수감자를 절망적인 행동으로 내몬다. 자살은 일상다반사다.
1933년 4월 5일 자 《더 텔레흐라프》는 “수감자 정신병”과 수많은 자살 시도와 자살을 이야기한다.
《폴리티켄》 기자는 1933년 4월 초 호이베르크 수용소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내 질문에 부크 대위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는 이 수용소에서 자살 시도가 드물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9.23 “도주 중 사살”
독일 관영 언론은 수감자들이 “도주 중 사살”되었다고 거듭 보도한다. 이 주장이 거짓임은 뻔하다. 수용소는 지극히 삼엄하게 감시된다. 중무장한 돌격대 순찰대, 경찰견, 밤이면 수용소를 대낮처럼 밝히는 탐조등. 수감자에게는 어떤 탈출 시도도 가망 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 탈출 시도는 아주 드물다. 그런데도 언론은 도주 중 사살을 자주 보도한다. 강제수용소의 살인은 정부가 익히 알려진 본보기를 따라 “도주 중 사살”로 둔갑시킨다.
9.24 살인 수용소 다하우
이 수용소에서는 살인이 횡행한다. 뮌헨 근교 다하우 수용소에서만도 몇 주 사이에 살인 사건 열네 건이 자세히 알려졌다.
4월 중순 관영 볼프 전신국이 이렇게 보도한다.
“뮌헨, 4월 14일(WTB). 뮌헨 근교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돌격대 경찰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격대 경찰은 공산주의자 넷을 쓰러뜨렸는데, 그 가운데 셋은 즉사했고 넷째는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다쳤다.”
다하우 수용소장은 영국 기자 게디에게 이 사건을 확인해 주었다(1933년 4월 27일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
WTB 보도는 사살된 사람들의 이름을 짐짓 감춘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로 불린다. 그러나 곧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전혀 아니라 유대인 시민 계층 수감자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새어 나왔다. 다하우에서 탈출한 한 수감자가 무방비 상태의 유대인 지식인 네 사람이 이렇게 야만스럽게 살해된 일[169]을 묘사한다.
“며칠 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작업하러 행진해 나갔다. 갑자기 유대인 수감자들, 곧 상인 골트만, 뉘른베르크의 변호사 베나리오, 상인 아르투어 칸과 에르빈 칸에게 대열에서 나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돌격대원 몇이 수감자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들은 도망치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넷 모두 즉사했다. 시신에는 모두 이마에 총상이 있었다. 시신은 아무도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채 공동묘지에 몰래 파묻혔다. 그러고는 우리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돌격대 소대 지휘관 하나가 연설을 하며, 이 유대 돼지 넷이 죽은 것은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민족에 낯선 분자들로서 독일에서 살 자격이 없었으며, 마땅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하우의 살인 연대기는 계속된다. 유대인 시민 넷이 살해된 지 얼마 뒤 WTB는 다시 “다하우 탈주”를 보도한다.
“뮌헨, 5월 19일(WTB).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바깥 작업을 하던 보호 구금자 하우스만이 오늘 도주를 시도했다. 하우스만은 경비 초병이 거듭 불렀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초병이 발포해 도주자를 맞혀 숨지게 했다.”
하우스만은 유대인 수감자 넷처럼 비겁하게 살해되었다. 다하우에서 우리에게 알려 온 스무 건이 넘는 다른 살인 사건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한 결과 사실로 드러난 것만 든다.
- 경찰 소령 훙링거, “자살”이라고 함
- 제바스티안 네프츠거, “자살”이라고 함
- 미하엘 지크만, 파징의 사회민주주의자
- 프란츠 레르부르거, 뉘른베르크의 공산주의자, “도주 중 사살”
- 안톤 하우스라덴, 공산주의자
- 프란츠 드레셀, 공산당 주의회 의원
- 요제프 괴츠, 공산당 주의회 의원
- 알프레트 슈트라우스 박사, 뮌헨의 변호사, “도주 중 사살”
- 빌헬름 아론, 밤베르크의 사법 연수생, “도주 중 사살”
또 다하우 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있다.
- 막스 홀리, 남바이에른 “적색 구원회” 서기
- 히르슈, 공산당 시의원
- 요한 비스만
9.25 주의회 의원 드레셀과 괴츠의 잔학한 살해
공산당 주의회 의원 드레셀과 괴츠의 살해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사건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이다. 이 살해를 눈앞에서 본 동료 수감자, 공산당 간부 바이물러[170]가 운 좋게 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했더라면, 두 의원의 이 짐승 같은 살해도 아마 알려지지 않았거나 정부 언론에 “도주 중 사살”로 보도되었을 것이다. 바이물러 역시 더없이 잔혹하게 학대당했고, 같은 운명의 동지 드레셀과 괴츠처럼 살해될 참이었으나, 심하게 다친 몸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바이물러는 드레셀 의원과 괴츠 의원의 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공산당 주의회 의원 드레셀은 이 짐승들에게 죽을 때까지 고문당했다. 그들은 그를 알몸으로 감방 바닥에 내던졌다. 몸은 끔찍하게 망가져, 온통 퍼렇고 검게 멍들고 상처와 검게 엉긴 피로 뒤덮여 있었다. 두 손은 수없이 얻어맞아 10센티미터쯤 부어올라 있었다. 다리와 팔은 검푸르게 부어 일그러진 자루 같았다. 시신은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어져 있었고, 한쪽 팔은 억지로 바깥쪽으로 비틀려 손목 동맥이 끊겨 있었으며, 게다가 팔에서 세모난 살점들이 도려내져 있었다. 그 옆에는 자살로 꾸미려고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드레셀을 때려죽이고 나자 친위대원들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며 그야말로 잔치를 벌였다. 드레셀은 5월 10일 다하우 근처의 작은 마을 브리텔바흐에 묻혔다. 친위대 짐승들은 알몸의 시신을 상자 하나에 던져 넣었다. 장례에 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공산주의자 제프 괴츠는 살해되기 몇 주 전부터 끔찍한 학대 때문에 이미 귀가 멀어 있었다. 나치들은 날마다 그를 계속 때렸고, 드레셀을 살해한 것과 거의 같은 무렵에 그를 쏘아 죽였다. 괴츠의 시신은 5월 12일 화장되었다. 공산주의자 바이물러는 다하우에 온 첫 나흘 동안 물도 빵도 받지 못하고, 맨몸에 목덜미부터 발바닥까지 매질만 당했다. 이 짐승들이 매질 도구로 쓴 것은 1미터나 되는 마디진 소꼬리 채찍이었다. 친위대 깡패들은 공산주의자 바이물러를 드레셀의 시신이 누워 있는 감방에 밀어 넣고, 죽은 이를 비웃듯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이놈처럼 해야 해.’ 시신 옆에 놓인 칼을 가리키며 그들은 말했다. ‘이 칼은 빵 자르라고 놓아둔 게 아니다.’ 그러고는 바이물러에게 목을 매라고 강요하려 했다. 이튿날 아침까지 스스로 목을 매지 않으면 자기들이 해 주겠다고 위협했다. 그랬다면 틀림없이 나치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어 주는 파렴치한 언론에 다시 이런 짤막한 기사가 실렸을 것이다. ‘공산주의자 바이물러가 감방에서 목을 맸다.’ 이 죽음의 위험 속에서 바이물러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가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알 만한 이유로 밝히지 않겠다. 바이물러는 양말 바람에 옷도 거의 걸치지 못한 채,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짓이겨지고 두들겨 맞은 몸을 뮌헨까지 끌고 갔다. 그곳에서 혁명적 노동자들이 그를 받아들여 다른 곳으로 옮겨 주었다.”
정부 언론은 드레셀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다하우는 예외가 아니다. 다른 수용소에서도 이런 살인이 벌어진다. 쾨니히슈타인 강제수용소에서는 하이데나우의 공산주의자 굼베르트가 맞아 죽었다. 다하우 수용소 한 곳에서만도 몇 주 사이에 살인 열네 건이 알려졌다면, 지금까지 그 사형 집행인들만이 알고 있는 45개 강제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쓰러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9.26 어떤 고문도 반파시즘 정신을 꺾지 못한다!
강제수용소에서 당하는 온갖 정신적·육체적 고문에도,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에도, 수감자들은 반파시즘 신념에 충실하게 남아 있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1933년 4월 30일에 이렇게 쓴다.
“마지막 무기 은닉처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볼셰비키식 실험의 시대가 독일에서 끝났다는 인식에, 악의와 완고한 광신이 아직도 저항하고 있다. 수감자들이 얼마 전까지도 친척 면회(?)를 통해 수용소 밖으로 비밀 쪽지를 빼돌릴 줄 알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부크 대위와 카우프만 중위는 《폴리티켄》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수감자들에 대해 증오 없이, 그러나 아주 날카로운 불신을 품고 이야기한다. 그 불신은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보다는, 나치 체제에 대한 호감을 품지도 않으면서 그런 척하는 ‘고약한 적들’을 향한다…
‘사람들이 조개 같습니다. 설득해서 마음을 열게 하려고 말을 걸면 무엇에든 “예, 아멘” 합니다. 우리 견해에 동의하는 것 같고, 마침내 좋은 대의 편으로 넘어온 것 같지요. 하지만 속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카우프만 중위가 말한다.
그리고 부크가 덧붙인다.
‘가장 고약한 것은 의사들과 지식인들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배우고 우리 지혜를 받아들여야 마땅할 텐데. 조금도 그러지 않아요. 분별이 없습니다. 그들을 가장 오래 여기 붙잡아 두어야 합니다.’”
브레멘과 다른 곳에서는 석방되었던 공산주의자들이 반파시즘 활동을 이어 갔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다. 뮌헨 경찰청장 힘러도 한 연설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간부들을 다시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몇몇을 시험 삼아 풀어 주어 보았더니, 그들은 계속 선동하고 조직하려 들었습니다.”
수감자들의 신념에 대한 충실함과 투쟁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다음의 소박한 편지는 프롤레타리아 투사 정신의 영웅 서사시다.
“온갖 괴롭힘에도 우리 동지들은 당에 충실하다. 우리와 연락이 썩 원활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모든 정치 문제에 대해 입장을 정한다. 《민족사회주의 쿠리어》가 그들에게 모든 사건을 알려 주고, 마르크스주의 교육이 그들에게 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할 능력을 준다. 게다가 검열과 고립에도 우리와의 연락을 끊을 수는 없다. 경비대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세한 것은 말하지 말자.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강제수용소는 동지들을 단련하고, 당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굳건하게 한다.”
9.27 미결 구금과 감옥에 갇힌 수만 명
오늘날 강제수용소에 빽빽이 갇혀 있는 3만 5000~4만 명의 수감자가 독일 정치범의 전부는 아니다. 미결 구치소에서 시들어 가는 사람들, 형을 선고받고 감옥과 징역형 감옥으로 이송된 사람들이 여기에 더해진다. 그 수는 계속 늘어난다. 날마다 언론은 새로운 대량 검거를 보도한다. 6월 마지막 몇 주 동안 새로 체포된 사람의 수가 특히 많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새로 체포된 정치범의 수가 하루에 1000명에 이른 때도 많았다. 이를테면 단 하루 동안 비밀 국가경찰이 체포한 사람은 이렇다.
젠프텐베르크(니더라우지츠 갈탄 지대의 작은 도시)에서 사회민주당 간부 267명, 브레멘에서 80명 넘게, 브라운슈바이크, 함부르크, 작센, 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또 수백 명.
미결 구치소와 징역형 감옥에 갇힌 정치범의 수는 공식 자료가 없어 어림할 수밖에 없다. 1만 2000~1만 5000명이라는 수는 많다기보다는 오히려 적게 잡은 것이다.
미결 구치소는 넘쳐 난다. 석방된 미결수들은 넘쳐 나는 감옥의 끔찍한 상황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이 쓰기에도 공간과 공기가 모자란 감방에 오늘날 다섯 명, 그 이상이 수용되어 있다. 수감자 일부는 침상이 없어 맨 돌바닥에서 자야 한다. 담요가 모자란다. 음식은 아주 모자라고 형편없다. 파시스트 정부는 제국과 각 주와 개별 도시마다, 자기가 만든 비밀 국가경찰의 특별 부서를 두었다. 이 부서들은 보안경찰, 보조경찰, 돌격대 경찰의 지원을 받아 노동자 구역 전체를 포위하고 대량 검거를 벌인다. 체포는 완전히 자의적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적 시기심에서 나온 밀고 하나면 체포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얼마나 잔인하게 일을 처리하는지는 헤센 경찰 담당 국가 판무관의 다음 공식 성명이 잘 보여 준다.
“불법 전단을 가지고 있다가 적발된 자는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경찰 구금한다. 전단을 경찰 당국에 넘기는 자는 문제 삼지 않는다. 어떤 구역(시나 군)에서 불법 전단이 뿌려지면, 즉시 해당 계열(독일 공산당, 사회민주당 등)의 모든 지도자를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엄중 경찰 구금(독방, 징벌식 등)한다. 3. 경찰관과 특별 기동대는 순찰 중 처음 불러 세웠을 때 응하지 않는 전단 배포자에게 즉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 미결 구금 중인 수감자들 가운데에는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름난 간부가 많고, 민주당, 인민당, 가톨릭 정당, 심지어 독일국가인민당 조직의 대표자들도 많다.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된 이들 중 하나가 독일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이었다. 에른스트 텔만은 3월 3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에서 붙잡혀 감옥으로 넘겨졌다. 정부에 충성하는 “획일화된” 모든 신문에는 이 체포가 국회의사당 화재와 관련해 이루어졌다고 발표되었다. 이로써 이 혁명적 지도자를 욕보일 수 있으리라 여긴 온갖 모욕을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며칠씩이나 돌격대원들을 열린 텔만의 감방 앞으로 줄지어 지나가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마치 사나운 짐승을 구경하러 가는 것처럼. 젊은 녀석들의 행렬이 노동자 계급의 대통령 후보요, 600만 표를 모은 정당의 지도자인 텔만 앞을 호기심에 차서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가도록 허락받는다.
9.28 체포의 테러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 경찰과 돌격대의 일상 업무가 된 체포의 수법을 외국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거리 구역에 불법 전단 한 장이 나돈다. 경찰관이나 나치 추종자 하나가 밀고한다. 곧바로 “특수 경찰대”의 차들이 달려와 그 구역 전체를 봉쇄하고, 모든 집을 지붕에서 지하실까지 뒤지고, 책과 타자기를 압수하고, 아무 관련도 없는 시민들까지 포로로 끌고 가는 일이 많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맞서면 곧바로 학대로 다스린다. 압수에 항의하면 수갑이 채워지고 체포된다.
며칠을 골라 아무렇게나 뽑은 신문 제목 몇 개가 박해 행동의 성격을 보여 줄 것이다.
“공산주의자 70명 체포”(《푈키셔 베오바흐터》, 1933년 4월 10일 자)
“에르푸르트, 드레스덴, 알토나에서 대규모 일제 단속”(《베를리너 타게블라트》, 1933년 4월 25일 자)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가택 수색”(《D. A. Z.》, 1933년 4월 29일 자)
“뮌헨 사회민주당 시의회 의원단 체포” — “사회민주당 시의원들 승인 거부”(《D. A. Z.》, 1933년 4월 12일 자)
“뷜로 광장 일제 단속” — “슈투트가르트에서 공산주의자 체포”(체포 270건, 가택 수색 400건) — “마이센에서 공산주의 음모 집단 검거” — “베를린 북부에서 대규모 일제 단속”(《D. A. Z.》, 1933년 4월 12일 자)
이런 소식 수백 건을 3월, 4월, 5월, 6월, 7월의 모든 독일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6월 말 사회민주당과 청년 국가인민당원 투쟁단[171]이 해산되면서 박해는 더 심해진다. 이제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은 수백이 아니라 수천이다.
히틀러 정부는 7월 초부터 망명한 노동자 지도자들의 친척을 인질로 잡아 가두기 시작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샤이데만의 친척 다섯 명의 체포인데, 이것도 비슷한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9.29 판결의 테러
검사들은 2월 27일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독일의 모든 대도시에서 특별 재판소가 열린다. 밀고의 홍수가 늘 새로운 희생자들을 나치 법정 앞으로 쓸어 온다. 기소는 판결만큼이나 자의적이다.
체포된 사람들이 몇 주씩 심문도 없이 감옥에 앉아 있다가 다시 풀려나는 일이 많다. 풀려난 뒤에도 그들은 날마다 위협을 받고, 많은 경우 경찰서에 정기적으로 출두해야 한다. 그들을 풀어 준 것은 오로지 감옥이 넘쳐 새 희생자들을 넣을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얼마나 하찮은 구실로 무거운 형이 선고되는지 몇몇 소식이 보여 준다.
“베를린 모아비트 특별 재판소는 실업 노동자 막스 치글러와 리하르트 슈뢰터에게 각각 징역 1년 3개월과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독일 공산당원인 치글러가 베를린 동부의 베버비제에서, 슈뢰터에게서 받은 불법 제작 《로테 파네》를 나누어 주었다는 이유였다.”
“다름슈타트 특별 재판소는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는 이유로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여성 맹원 한 명에게 징역 8개월, 남성 맹원 한 명에게 징역 5개월을 선고했다. 선고받은 이들은 16세다!”
“잔학 선전”을 이유로 한 유죄 판결도 숱하다.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모아비트 특별 재판소가 내린 판결 몇 건이 알려진다. 하루에 “잔학 선전” 판결이 네 건이다. 체포된 사람들의 가족에게서, 예심 판사가 4주가 지나기 전에는 구금에 대한 결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검찰이 인원을 두 배로 늘렸는데도 엄청난 서류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체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테러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체포된 사람들의 아내들이 하는 하소연이 증명한다. 그들은 기소된 반파시스트의 변호를 감히 맡으려는 변호사를 찾는 데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재판 건수는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수만 건에 이른다. 체포 건수는 히틀러 정부가 하루하루 이어질수록 늘어난다. “민족 봉기”의 정부가 계속 버티려면 “하나로 뭉친 독일 민족”을 수만 명씩 집에서 끌어내야 한다.
체포된 이들의 처지는 히틀러 정부가 “독일 적색 구원회”마저 금지했기 때문에 더욱 나빠졌다. 적색 구원회는 여러 해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정치범 가족들을 돌보아 왔다. 가장 혹독한 박해에도 “적색 구원회”는 독일에서 활동을 이어 간다. 그 일에서 적색 구원회는 모든 나라의 “적색 구원회” 조직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국제 노동자 구원회”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히틀러 파시즘 희생자 구원 위원회”의 형제적 지원을 받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 안보 보호를 위한” 법령[172]을 내린 그 순간부터 독일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해졌다. 수천 명이 경찰 감시 아래 살고, 수만 명이 체포를 기다리며 법적 안전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산다. 언제라도, 낮이든 밤이든, 갈색 하수인들이나 정식 경찰의 주먹이 어느 독일 집 문이든 두드릴 수 있다.
그동안 정부 포고는 경찰 말투로 알린다. “독일에는 평온과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평온. 징역형 감옥의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