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1933)
인물빌리 뮌첸베르크,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룀, 에트문트 하이네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파울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하인리히 브뤼닝,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그레고어 슈트라서, 빌헬름 프리크, 로베르트 라이, 오토 벨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에른스트 톨러 용어갈색책 (1933),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1933),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 (1933), 돌격대 (SA), 친위대 (SS), 강제적 동질화, 1933년 나치 분서, 성과학 연구소 사건나치 집권과 수권법,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지은이와 출판사의 머리말
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기록의 책을 펴내겠다는 뜻을 출판사가 알리자, 수백 명이 자원해 함께 일하겠다고 나섰다. 히틀러 테러에 쫓겨 독일을 떠난 작가, 노동자, 의사, 변호사들이 일손을 보탰다. 그들은 자료를 구하고, 추려 내고, 검증했으며, 독일과의 연락을 맡고, 글을 썼다. 이 책을 만든 것은 망명자들만이 아니다. “제3제국”이라 자칭하는 거대한 갈색 감옥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협력자를 얻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독일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자료를 구해 주었고, 우리가 보낸 자료가 믿을 만한지 검증해 주었다. 이렇게 이 책은 태어났다. 반파시스트들의 공동 작업으로, 히틀러 파시즘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독일을 이루려 힘쓴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된 독일 안팎 투사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것은 독일의 책이다. 독일인들이 이것을 겪고 견뎠다. 독일인들이 이것을 썼다. 이것은 국제적인 책이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미국의 반파시스트들이 이 책의 출간을 도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와 말리 경이 이끄는 「히틀러 파시즘 희생자를 위한 세계 위원회」[1]가 이 책에 힘을 보탰다. 명망 높은 각국 작가들이 기고로써 히틀러 테러의 희생자들과의 연대, 히틀러 파시즘에 맞선 투쟁과의 연대를 밝혀 주었다. 이것은 국제적인 책이다. 독일에 살든, 미국에 살든, 영국이나 이탈리아에, 폴란드나 프랑스에 살든, 이 책은 모든 독자에게 파시즘의 위험을 보여 준다. 위험만이 아니다. 이 책에는 다섯 달의 히틀러 파시즘이, 다섯 달의 히틀러 지옥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기록의 책이다. 이 책의 모든 주장은 기록 자료에 근거한다. 박해받은 이나 목격자의 이름과 주소를 늘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 주장의 증거를 공증인에게 맡겨 두었다.
『갈색책』은 히틀러 독일에 관한 총서의 첫째 권이다. 다른 책들이 뒤따를 것이며, 거기서는 히틀러 독재가 독일의 노동자, 농민, 중간층에게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무엇을 빼앗았는지 보여 줄 것이다. 히틀러 독재 아래서 빠른 속도로 계속되는 독일의 빈곤화가 이 책들에서 그려질 것이다. 따로 한 권을 내어 히틀러 파시즘에 맞선 독일 안의 투쟁을 묘사할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히틀러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갈색 지옥에 갇히고 고문당한 이들을 위해, 히틀러 테러에 남편과 아버지를 빼앗긴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강철 회초리와 강제수용소로도 투쟁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수백만 반파시스트 투사들을 위해. 히틀러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독일 안에서 판가름 난다. 갈색 치욕의 이 기록, 『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이 독일로 들어갈 길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1933년 7월. 지은이들과 출판사.
말리 경의 머리말
잘 조직된 테러 아래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 진실한 사실을 알아내기란 언제나 어렵다. 전문 지식을 갖춘 노련한 기자들조차 진실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그토록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감시망은 그토록 빈틈없이 돌아간다. 독일에 있는 몇몇 외국 특파원들이 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그만큼의 진실을 국경 너머로 가져온 것은 특별한 공로다. 「독일 파시즘 희생자를 위한 세계 위원회」는 진실한 기록을 많이 넘겨받았다. 일부는 기자들에게서, 일부는 진실에 이르는 특별한 길이 열려 있으면서도 독일에서는 정보를 감히 발표하지 못하고 발표할 수도 없는 의사와 변호사들에게서 왔다. 또 다른 기록들은 고문당하고 괴롭힘당한 이들 자신이 보내왔다. 위원회가 얻은 자료의 대부분은 목숨을 걸고 독일에서 일한 위원회 자체의 통신원들 덕분이다. 우리는 이 기록들 가운데 가장 선정적인 것을 쓰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진술은 꼼꼼히 검증되었고, 비슷한 여러 사례를 대표하는 전형이다. 훨씬 더 끔찍한 개별 사례를 실을 수도 있었지만, 바로 그것들이 개별 사례였기 때문에 싣지 않았다. 여기 실린 사례 가운데 예외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우리 위원회나 각국 구호 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사례의 전형이다. 파시즘에 관한 이 증언들은 끔찍하다. 그러나 대중의 기억은 짧고, 여론은 안타깝게도 기정사실(fait accompli)에 너무나 쉽게 순응한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 책은 나치 정부가 걸어온 범죄의 길을 언제까지나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책은 히틀러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 바치는 하나의 기여다. 이 투쟁은 독일을 겨눈 것이 아니다. 이 투쟁은 참된 독일을 위해 벌어진다.
런던 SW1 상원, 히틀러 파시즘 희생자를 위한 세계 위원회 위원장 말리 경[2].
1 권력에 이르는 길
1919년 1월 뮌헨에서 “독일 노동자당”이 창립된다. 같은 해 7월, 당시 국가방위군의 “교육 장교”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이 당에 들어간다. 그는 훗날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싹이 된 이 모임의 일곱 번째 당원이다. NSDAP의 창립자와 첫 당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느 계층 출신이며 어떤 이해를 대변하는가?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환멸을 안고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병사와 장교들이다. 네 해 동안 그들은 국수주의 구호를 정직하게 믿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강대한 대독일의 쟁취”를 위해 싸웠다. 그들은 평화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가 “매국노”로서 독일 전선을 등 뒤에서 찔러 패전을 불러왔다는 전설을 믿었다. 이 “귀향병”들은 지배계급의 무력함에, 황제의 배신과 도주에, 소리 소문 없이 폐위된 군주들에게, “11월의 범죄자들”을 쇠주먹으로 때려눕히지도, 책임을 묻지도, 군법회의에 세우지도 않은 대전의 장군들에게 깊이 분개해 있었다. 이렇게 뼛속까지 환멸에 빠진 병사와 장교들은 다시는 시민 생활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예전에 가졌던 직업 가운데 일부는 이제 아예 없었다. 직업 군인, 군인 출신 공무원 지망자, 여러 부류의 관리들이 특히 그랬다. 여기에 뿌리 뽑힌 귀족, 전쟁으로 학업에서 끌려 나온 대학생, 몰락하고 급진화된 소시민, 이제 발밑의 땅을 송두리째 잃기 시작한 중간계급 사람들이 합류했다. 이 모든 분자들은 당시 숱하게 생겨나던 자유군단, 주민 방위대, 철모단(1919년 창립된 전선 병사 동맹), 에르하르트 여단에도 모여들었으며, 처음에 공식적으로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협회」라고 자칭했던 이 젊은 당의 첫 간부진도 이루었다.
창립 뒤 처음 두 해 동안 NSDAP는 보잘것없는 집단에 머물렀다. 1918/19년의 11월 혁명은 진압되었고,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사회주의의 쟁취는 저지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낡은 금융자본 세력의 지배가 다시 굳어진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기업가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미 1918년 11월 트러스트의 거두 후고 슈티네스와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인 사회민주주의자 카를 레기엔 사이에 합의된 “중앙 노동 공동체”가 그것이다.[3] 그러니 히틀러가 그 무렵 독일 자본주의의 지도 집단들에게 무엇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때만 해도 아직 NSDAP가 필요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협회는 처음에는 아무런 의의도 얻지 못했다. 히틀러 자신은 1920년 4월까지도 국가방위군에 복무하면서 그 병사들에게 정치 강연을 했다. 그는 국가방위군의 지시를 받아 정치 단체와 집회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는 보고서와 정보를 넘겨주었다. 히틀러는 이런 식으로 “독일 노동자당”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NSDAP의 정치적 의의는 곧 커졌다. 베르사유 강화 강압 조약과 패전의 숨 막히는 결과가 피부로 느껴질수록 독일의 정치 정세는 바뀌어 갔다. 수십억의 배상금이 요구되었고 지불되었다. 중요한 경제 지역들이 떨어져 나갔다. 알자스로렌, 오버슐레지엔, 자르 지방, 포젠과 서프로이센(이른바 “폴란드 회랑”), 단치히, 오이펜말메디가 그것이다. 유럽과 해외 판매 시장의 상당 부분과 식민지를 잃으면서 독일의 판로는 더욱 좁아졌다. 동원 해제 비용, 특히 전쟁 산업 전환 비용이 일하는 납세자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독일 독점자본의 결정적 집단들은 배상금 수십억과 그 밖의 모든 손실을 노동자와 중간계급의 어깨에 떠넘기려고 쉴 새 없이 애썼다. 이 흐름은 인플레이션에서 첫 정점에 이르렀다. 인플레이션은 이미 1917년 전쟁 중에 빌헬름 정부가 시작했지만, 1921/22년에야 대중이 뚜렷이 느끼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은 1923년 가을에 가장 파국적으로 치솟았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더욱 궁핍해졌고, 중간계급은 깊이 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 수백만의 작은 생계가 인플레이션으로 말 그대로 마지막 재산까지 빼앗겼다. 은행과 대공업가들은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였다. 국가는 그들에게 루르 점령에 대한 “보상”으로 6억 금마르크를 지불했고, 인구 대다수는 빈손으로 남았다.
경제 혼란은 심각한 정치적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에르츠베르거와 라테나우가 “이행 정책가”로 몰려 민족사회주의 살인자들의 총탄에 쓰러진다.[4] 1919년 1월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 투쟁, 1920년 3월 카프 폭동 때의 루르 봉기, 1921년 3월의 노동자 봉기에 대한 기억이 새롭고 거센 힘으로 되살아난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많이 사회민주당을 떠나 처음에는 독립사회민주당으로, 그리고 1920년 가을 독립사회민주당이 분열한 뒤로는 갈수록 더 공산당으로 옮겨 간다. 강력한 반파시즘 시위가 벌어진다. 1923년 10월 함부르크 봉기로 치닫는 거대한 대중운동 속에서, 혁명적 노동자들은 에베르트와 국가방위군 장군들의 독재에 맞서 싸운다.
1.1 25개 조항 – NSDAP의 강령
이 시기에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첫 번째 상승기를 맞는다. 1920년 2월, 당의 “강령”, 이른바 “25개 조항”이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의 집회에서 히틀러 자신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문장과 요구의 뒤범벅이다. NSDAP의 정치적 실천은 한 번도 그것과 일치한 적이 없다. 강령 끝에 거창하게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한들 히틀러와 그 가신들이 무슨 상관을 했겠는가.
“당의 지도자들은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위 조항들의 실현을 위해 가차 없이 나설 것을 약속한다.”
이것은 NSDAP 지도자들이 해 놓고 지키지 않은 유일한 약속이 아니었다. 1926년 5월 당 총회에서는 강령의 “불변성”이 다시 한번 명시적으로 결의되었다. 게다가 25개 조항의 공동 작성자이자 NSDAP의 “이론가”인 고트프리트 페더는 자신의 강령 해설에서 “단호하기 그지없이”, “굽힘 없이 분명하게” 이렇게 강조했다.
“이 강령의 기초와 근본 사상은 흔들어서는 안 된다. 행여 유용성을 따져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일도, 가장 중요한 조항들, 특히 오늘날의 국가·경제·사회 질서에 불편한 조항들을 놓고 숨바꼭질하는 일도, 신념이 흔들리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유대인 문제에서, 고급 금융에 맞선 우리의 투쟁에서, 도스 협정과 궁핍화 정책에 맞선 투쟁에서, 또는 그 밖의 강령 문제에서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우리의 길과 목표에 동의할 수 없다고 믿는 자, 국제연맹이나 로카르노를 통해, 타협과 비겁을 통해 독일 민족의 자유를 살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우리에게서 찾을 것이 없으며, NSDAP 바깥에 서 있는 자다.”[5]
이 모든 요란한 말로도, NSDAP 지도부가 실제 정치에서 그들 자신의 타협적이고 어정쩡한 “강령”을 거듭 부인하고 실천에서는 그 반대를 해 왔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기만은 첫 두 조항부터 시작된다. “민족 자결권에 따라 모든 독일인을 하나의 대독일로 통합한다”(제1조), “다른 민족들에 대한 독일 민족의 동등한 권리, 베르사유와 생제르맹 강화조약의 폐기”(제2조). 이 두 강령 요구 가운데 어느 것도, 히틀러가 권력 장악 이전에도 이후에도 베르사유 조약 서명국들과 타협하고, 대리인을 통해 국제연맹과, 프랑스·폴란드·영국·이탈리아와 협상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남티롤을 무솔리니에게 팔아넘길 때에도 이런 “실오라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페더의 강령 해설 초판에는 아직 “우리는 남독일에서, 알자스로렌에서, 남티롤에서, 폴란드에서, 국제연맹 식민지 오스트리아에서, 옛 오스트리아의 후계 국가들에서 단 한 사람의 독일인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페더의 글 제2판과 그 뒤의 모든 판에서는 “남티롤에서”라는 말이 지워져 있다! 그러면서도 페더는 제5판 서문에 감히 이렇게 썼다. “여기저기 표현상의 몇몇 흠(!)과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대목만 고쳤을 뿐이다.”
강령의 다른 조항들, 무엇보다 경제·사회 정책 요구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노동도 수고도 없는 소득의 폐지”, “이자 노예제의 타파”(제11조), “모든 전쟁 이득의 남김 없는 몰수”(제12조), “(지금까지) 이미 사회화된(트러스트) 모든 기업의 국유화”(제13조), “대기업의 이윤 분배 참여”(제14조), “노령 연금의 대폭 확충”(제15조), “건전한 중산층의 창출과 유지, 대형 백화점의 즉각 공영화와 소규모 영업자에 대한 저가 임대, 국가·주·지방자치단체 납품에서 모든 소규모 영업자의 최대한 우대”(제16조), “우리 민족의 필요에 맞춘 토지 개혁, 공익 목적의 토지 무상 수용을 위한 법률 제정, 지대의 폐지와 모든 토지 투기의 방지”(제17조).
이 강령 조항 하나하나를 여기서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다. 일부 조항, 예컨대 유대인 문제(제4~8조와 제23조)는 이 책의 뒷장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민족사회주의 강령의 기본 성격을 그리고, 그것을 한 조항씩 왜곡하고 배반하는 NSDAP 지도자들의 파렴치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요구 자체는 일부가 소시민적·반동적이다. 제16조에서 내건 요구(“건전한 중산층의 창출과 유지”)가 그렇다. 여기서도 강령 전체의 특징인 어정쩡함과 모순이 보인다. NSDAP가 중산층이 점차 사라지게 되는 전제, 곧 중간계급이 프롤레타리아화되는 전제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원칙적으로 긍정한다면, 어떻게 “중산층”을 유지한다는 말인가? 민족사회주의 농업 정책의 기초가 되어야 할 제17조에도 같은 말이 들어맞는다. 히틀러가 사유재산의 토대 위에 절대적으로 서 있다면, 땅이 적은 소농을 위해 대토지 소유를 무상 수용한다는 말은 꺼낼 수도 없다면, 그는 어떻게 농민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히틀러는 1928년 4월에 NSDAP가 생산수단의 사유재산을 온 힘을 다해 지킬 결의가 되어 있다고 다시 한번 명시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바로 이 제17조에 관한 성명에서, “무상 수용”이라는 구절은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되었거나 민족의 복리라는 관점에 따라 관리되지 않는 토지를 필요하다면(!) 수용할 수 있는 법적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만을 가리킨다고 힘주어 말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 유대인 토지 투기 회사들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온 전선에 걸친 모순과 타협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NSDAP의 경제·사회 정책 조항들에서 시민적·자유주의 정당들의 강령과 — 바이마르 헌법에서 익히 알려진 낡은 재고품들을 발견한다. 제13조(트러스트 국유화)는 1919년 독일 민주당 강령에서 그대로 훔쳐 온 것이다! 다른 조항들은 바이마르 헌법이 끝내 지키지 않은 약속들로 등장한다. 제15조(노령 연금 확충), 제20조(“유능한 자에게 자유로운 길을!” — 제국 헌법과 1924년 제국 청소년 복지법 참조), 제21조(국민 건강의 향상, 어머니와 아이의 보호), 제24조(“사익보다 공익” — 헌법 제156조 참조)가 그렇다.
1.2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첫 상승
이 강령을 가지고, 25개 조항의 정신으로 행한 연설을 가지고, 히틀러는 NSDAP의 첫 상승기에 처음으로 비교적 큰 집회들에 나섰다. 거기서는 베르사유 반대 선동이 단연 앞자리를 차지했다.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서 소시민층의 동요가 커질수록 민족사회주의 집회로 몰려드는 사람도 늘었다. 그러나 소시민 대중 속에서는 배상금과 화폐 가치 하락과 루르 점령으로 입은 물질적 피해만이 아니라, 베르사유 강화 강압 조약과 프랑스군의 독일 영토 침입으로 민족 감정이 상처 입은 것도 분명 한몫했다. 1921년 2월, 배상 협상 직후에 크로네 서커스의 거대한 공간에서 첫 히틀러 집회가 열린다. 주제는 “미래냐 몰락이냐”! 처음으로 갈고리 십자가 깃발을 휘날리는 트럭들이 집회를 선전하려고 뮌헨 거리를 누빈다. NSDAP는 혁명적 노동자들의 선동 방식을 흉내 낸다. 그들은 큰 집회를 알리는 새빨간 포스터를 붙이는데, 그 선동적인 문구는 이렇다.
“남자와 여자, 노인부터 젊은이까지 6000만이 한마음으로 결연하게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면, 이 수백만의 의지는 적어도 하나만은 지켜 낼 것이다. 이 채찍에 입 맞추는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존중을. 우리는 사람이지 개가 아니다. 6000만은 제국 정부가 똑똑히 깨닫게 해야 한다. 협상하는 자는 무너진다는 것을!”
서커스 집회는 히틀러의 성공이었다. 특히 아직 전쟁 이전의 낡은 방식으로 움직이던 다른 시민적·민족주의 정당과 단체들에 견주어 그랬다. 그들은 이 “젊은이”가 제국 정부의 이행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당장 조직하자고 제안했을 때 깔보듯 웃었고, 그들이 머뭇거리다 대놓고 거절한 뒤 그가 아직 약한 자기 집단만으로 모험을 감행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대부르주아·융커 반동의 이 정당들의 강령은, 훗날 민족사회주의자들이 25개 조항과 파렴치한 선동 방식으로 손에 넣을 줄 알았던 소시민층 속의 거점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기에 알맞지 않았다. 1920년 3월 카프 폭동의 실패가 이미 그것을 증명했다.
동요하는 중간계급과 아무런 연계도 없이, 오로지 대토지 소유자들과 국가방위군 및 고위 관료 일부, 그리고 몇몇 자유군단과 무장 단체에만 기댔던 부르주아지 융커 분파의 이 복고 시도, 카프 폭동은 독일 노동자들에 의해 24시간 만에 좌절되고 진압되었다.
철모단도 농민과 시민 청년의 일부, 그리고 가장 뒤떨어진 노동자층(어용 단체와 회사 조합의 구성원, 농업 노동자) 사이에서 얻은 제한된 영향력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NSDAP는 달랐다. “국제 유대 은행·증권 자본”에 맞선 거짓 투쟁으로, 모든 계급이 그들 위에 선 강력한 국가 아래 평화롭게 함께 살아야 한다는 “민족 공동체”라는 구호로, 이 당은 더 넓은 층에 파고들 수 있었다. 이 당은 소시민 대중의 꽤 큰 부분을 자기 깃발 아래 모으는 데 성공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커진다. 1921년 당원 수는 3000명에서 6000명으로 두 배가 된다. NSDAP의 활동 범위는 당시 거의 바이에른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북독일에서는 그레페, 불레, 헤닝, 레벤틀로 백작이 이끄는 푈키시(민족주의) 운동이 훨씬 강하다.[6]
종전 두 해 뒤 첫 대회와 전당대회가 열린다. 1920년 잘츠부르크에서 회의가 열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민족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 함께 협의한다. 옛 오스트리아 땅에서 이 운동은 이미 훨씬 오래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 노동자당”은 이미 1904년에 창립되었고, 1918년 5월 빈 회의에서 다른 집단들과 합쳐 “오스트리아 민족사회주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민족사회주의의 시작은 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먼저 민족들의 낡은 감옥 오스트리아에서, 민족 문제가 특별한 역할을 한 보헤미아에서 펼쳐졌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히틀러는 거기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보헤미아 당의 지도자 융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 민족사회주의가 발전한 것은 다른 조건 속에서였다.
다음 대회는 1921년 라이헨할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백위대 단체들과 함께 열렸다. 악명 높은 헤트만 스코로파츠키가 연사들 가운데 있었다. 발트인으로서 훗날 《푈키셔 베오바흐터》 편집장이자 NSDAP의 외교 정책가가 된 민족사회주의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함께, 백위대 망명자들은 마지막 간섭군을 막 나라에서 몰아낸 젊은 소비에트 국가에 맞선 간섭 계획을 짠다. 로젠베르크는 이미 그때 소비에트 공화국의 광포한 적인 데테르딩, 그리고 독일 대공업가 레히베르크와 연줄을 맺었다.[7] 그는 《푈키셔 베오바흐터》에 첫 반볼셰비키, 친폴란드(!) 선동 기사를 쓴다.
이어 1922년 1월 뮌헨에서 NSDAP의 첫 공식 전당대회가 열린다. 아직 당 안에서 단독 독재 지배를 얻으려고 싸워야 했던 히틀러는 전당대회에 즈음한 포고문에서, 운동을 깨끗이 쓸어 내야 한다고 선언한다. 운동이 “선의를 지녔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위험한 바보들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히틀러의 새롭고 파렴치한 방식을 따라갈 수도 없고 따라가려 하지도 않았던 당의 옛 공동 창립자들, 그 가운데서도 안톤 드렉슬러와 쾨르너를 겨냥한 것이었다.
뮌헨 국가방위군 사령부의 영향력 있는 고위 장교들이 오래전부터 이 젊은 운동을 후원해 왔다. 그 가운데에는 1919/20년 시절 히틀러의 옛 전우들도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본래의 당 조직과 언론·선전 기구 말고도 세 번째 조직을 세웠는데, 이것은 이미 이 첫 상승기에 그에게 뛰어난 투쟁 도구가 되었다. 바로 돌격대(SA)다. 원래 NSDAP는 1920년 여름에 “빨갱이”의 습격으로부터 집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질서 부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다른 민족주의 무장 단체들에 견주어 너무 작고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1921년 8월 독자적인 민족사회주의 무장 단체인 돌격대, SA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돌격대는 NSDAP의 테러 전투 부대이며 정치 지도부에 종속된다.
1.3 누가 히틀러에게 돈을 댔는가?
곧 특히 남독일의 여러 자본가도 히틀러와 NSDAP를 자기들의 반동 정치에 봉사하게 하려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계급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데 민족사회주의 운동이 지닌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NSDAP를 “후원”하고, 무엇보다 돈으로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뒷날의 히틀러·루덴도르프 재판(1924)에서, 히틀러가 바이에른 공업가 연합회 이사인 추밀 고문관 아우스트, 연합회 법률 고문 쿨로 박사, 피아노 공장 베히슈타인의 소유주, 대공업가 마파이(뮌헨), 공장주 호른슈(쿨름바흐)와 그란델(아우크스부르크)에게서 당을 위한 상당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히틀러는 은행가와 대토지 소유자와 공업가들의 고급 클럽에서도 “자신의 목표”에 관해 강연했다. 그 대가로 그는 민족사회주의 언론과 그 밖의 비슷한 목적을 위한 돈을 받았다.
히틀러는 베를린의 이름난 대공업가로서 사회 정책의 강경파로 알려진 독일 사용자 단체 연합회 회장 보르지히에게서도 이미 그 무렵 보조금을 받았다. 스위스에 있던 히틀러의 대리인 간서 박사는 당시 헨리 포드의 지원과, 바이에른 분리주의에 기대를 건 프랑스 자본가 집단의 돈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노동자 지도자” 히틀러의 이 모든 어두운 자금원을 문서로 하나하나 증명하는 일은 아마 다가올 사회주의 노동자 독일에서 기록 보관소가 거리낌 없이 열린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증명은 이미 오늘 가능하다. 훗날 대자본가 집단(티센, 샤흐트 등)에게서 공공연한 공감 표명까지 얻어 낸 NSDAP의 정치 전체가, 지배계급이 이 당을 후원하는 데 얼마나 큰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해 준다. 히틀러의 빚, 선전과 돌격대 유지에 드는 엄청난 비용은 1923년에 일정한 역할을 했고, 그가 거사에 나서게 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4 1923년 11월 9일의 폭동
NSDAP의 이 첫 상승기의 정점이자 마무리는 1923년 11월 9일의 뮌헨 폭동이었다. 1923년 내내 히틀러는 바이에른 정부와 국가방위군 안의 동맹자들에게 거사하라고 거듭 다그쳤다. 11월 초 그는 마침내 전투 단체들을 동원했고,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린 뮌헨 애국 단체들의 대규모 집회에서 바이에른 국가 총위원 폰 카르, 머뭇거리던 루덴도르프 장군, 바이에른 국가방위군 사령관 폰 로소프 장군을 기정사실 앞에 세웠다. 참석자 대부분이 놀라는 가운데 히틀러는 “민족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는 에베르트를 파면하고, 자신을 제국 총리로, 카르를 섭정으로, 뮌헨 경찰청장 푀너를 총리로, 루덴도르프를 국방 장관으로 “임명”한다. 바이에른 총리 폰 크닐링, 장관 귀르트너·슈바이어·부첼호퍼와 폰 로소프 장군이 체포되지만, 불과 몇 시간 뒤 루덴도르프가 “명예를 건 약속”을 받고 풀어 준다. 카르는 처음에는 히틀러의 제안에 응하지만, 밤중에 로소프와 자이서 대령과 함께 제19보병연대 병영으로 간다. 셋은 무선 전보로 히틀러 폭동을 거부한다고 알린다. 카르는 폭동에 대한 자신의 동의가 뮌헨 뷔르거브로이에서 무력으로 강요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한다. 새벽 세 시, 국가 총위원 폰 카르는 두 번째 성명을 작성한다. 거기에는 “신의도 약속도 저버린 야심가 무리”가 독일의 재각성을 위한 집회를 역겨운 폭력의 장면으로 만들었으며, 카르와 로소프와 자이서가 “권총을 들이댄 채 강요당한 성명”은 무효라고 적혀 있다.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전투 동맹 “오버란트”와 “제국기”는 해산된 것으로 선포된다.
이 통보와 해산 명령은 11월 9일 아침에 이미 뮌헨 신문들에 실린다.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필사적인 폭력 행동을 꾀한다. 히틀러는 몇 달 전 바이에른 내무 장관 슈바이어에게 폭동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명예를 걸고 약속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전투 단체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한다. 국가방위군은 중립을 지킨다. 행진하는 자들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 바이에른 주 경찰이 펠트헤른할레에서 히틀러의 행렬을 기다린다. 경찰은 일제 사격을 한다. 히틀러 무리는 열다섯 명이 죽는다. 히틀러 자신은 달아났다가 며칠 뒤 오스트리아 국경에 이르기 전에 어느 공주의 호화 별장에서 체포된다. 괴링은 이탈리아로, 나중에는 스웨덴으로 달아난다. 루덴도르프는 구금을 면한다.
11월 9일 폭동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은 1924년 봄 뮌헨 인민 법정에서 열린다. 판사들은 너그럽고 상냥하다. 모두가 “오로지 최선을 원했을 뿐인” “민족적 신념을 지닌” 피고들이니 그럴 수밖에. 히틀러, 보병대장 루덴도르프, 경찰 관리 프리크(1933년 제국 내무 장관), 룀 대위, 루덴도르프의 의붓아들인 페르네트 중위 등이다. NSDAP의 역사가들은 피고들이 즐거운 기분으로 웃고 농담했다고 전한다. 히틀러는 요새 금고 5년을 선고받되, 형기 일부를 마치면 집행유예로 풀려난다는 조건이 붙는다. 불과 몇 달 뒤인 1924년 12월 그는 이미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풀려난다. 룀, 프리크, 브뤼크너는 요새 금고 겨우 석 달로 끝난다. 루덴도르프는 “범행 순간의 정신 착란”을 이유로 무죄 선고를 받는다. 당시 아직 오스트리아 국적이던 히틀러는 독일에 계속 머물러도 되고 추방되지 않는다. 반동적인 독일 사법부는 이 “혁명가”에게 자기가 무엇을 빚졌는지 잘 알고 있다.
1.5 NSDAP가 한동안 무대에서 사라지다
1923년의 실패한 폭동은 히틀러 운동의 “전복기”를 마무리했다. “베를린의 유대인 정부”에 맞서 무장 봉기하겠다는 불법적이거나 반쯤 합법적인 계획의 시대는 모두 지나갔다. NSDAP의 이 시대는 독일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으로 넘어가고 소시민 대중 속의 동요의 물결이 가라앉으면서 완전히 끝났다. NSDAP는 깊은 쇠퇴기를 거치며 몇 해 동안 정치 무대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 1924년 5월 제국의회 선거에서도 190만 표(32석)를 얻었던 푈키시 세력과 민족사회주의자 연합은 같은 해 12월에는 제국의회 의석 14석(84만 표)밖에 얻지 못한다. 그들은 군소 정당으로 떨어지고, 독일 국가인민당은 100석 넘게, 사회민주당은 120석을 차지한다.
다음 몇 해는 개별 푈키시 집단과 민족사회주의 집단 사이의 내분으로 흘러간다. 1925년 여름 독일 민족자유당과 갈라선다. 그때 그 당의 이전 지지자 가운데 상당수가 히틀러에게 넘어온다. 그사이 자본주의 세력은 1918년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마지못해 내준 양보를 계속 허물어 간다. 1925년 1월 독일 국가인민당이 이끄는 반동적 시민 블록 정부가 꾸려진다. 석 달 뒤 육군 원수 힌덴부르크가 연합 우파에 의해 에베르트의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차 투표에서 가망 없는 루덴도르프 후보를 지지했던 민족사회주의자들도 2차 투표에서는 힌덴부르크에게 표를 던졌다. 시작되고 있던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탈바꿈을 보여 주는 특징적인 장면이다.
1.6 군주들 편에 선 NSDAP
1926년 군주 재산 몰수를 위한 국민 투표[8] 때, NSDAP는 독일 국가인민당부터 중앙당과 민주당에 이르는 모든 시민 정당과 한목소리로 “군주 재산 몰수는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의 도둑질이다!”라고 외쳤다. 덧붙이자면 NSDAP는 그 뒤로도 당시의 이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프로이센 주의회 교섭단체 대표로서 훗날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지사가 된 쿠베의 입을 빌려, 이 당은 군주 재산의 무상 몰수와 옛 황제 및 귀족 영주들에게 승인된 수백만 마르크 연금의 지급 중단을 요구한 공산당 발의안에 대해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군주 재산 몰수에 관한 공산당 발의안을 우리는 정의감(!)에서 거부한다. 독일 사회주의는 호엔촐레른가의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
독일 군주들과 옛 귀족 영주들 — 몇 사람만 들자면 호엔촐레른가 출신으로 전 황제의 아들인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카를 에두아르트 공작, 1933년 6월 괴링에게서 헤센나사우 주지사로 임명된 헤센의 빌헬름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크리스티안 왕자(근래에는 옛 황태자도 NSDAP 자동차 군단에 들어가 이 당 지지를 밝혔다) — 그들은 모두 NSDAP의 이런 태도에 보답하여 자기들의 “보상”금에서 수백만을 이 당에 내주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전 황제 빌헬름 2세도 돌격대 자금 조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시민 정당들에 발맞추는 새 정치로 히틀러는 자신의 폭동 노선 때문에 흔들린 부르주아지의 신뢰를 되찾으려 한다. 그는 합법 노선을 취한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지배계급의 호의와 지원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공업가 클럽에서 강연하며, 굴뚝 남작들에게 자기 “사상”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매국적 사회민주당”보다 NSDAP와 함께하는 편이 그들에게 얼마나 나은지 설명한다. 이번에 “지도자”는 남독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루르의 공업 영주들을 그들의 성채로 찾아가려고 서쪽으로 간다. 1926년 그는 에센과 쾨니히스빈터에서 초청받은 사람들 앞에서 두 번 연설하고, 1927년 4월에는 다시 에센의 크루프 홀에서 연설한다. 중공업계 신문 《라인베스트팔렌 차이퉁》은 공업가들이 히틀러의 연설을 박수로 맞았다고 보도한다.
1.7 슈트라서와 괴벨스가 “사회주의” 장사를 하다
같은 무렵 – 그리고 이것은 민족사회주의 선전의 이중적이고 파렴치하게 선동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전형이다 – 히틀러의 측근 가운데 하나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북독일과 동독일을 돌아다니며 “독일 혁명”이라는 “사회주의적” 구호를 퍼뜨린다. 그 무렵 라인란트 출신의 젊은 가톨릭 문필가 요제프 괴벨스도 등장한다. 1925년 10월 슈트라서는 《민족사회주의 서한》을 창간하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NSDAP “좌”파의 이론 기관지가 된다. 처음에 《민족사회주의 서한》의 편집자였던 괴벨스는 1926년 10월 대관구 지도자로서 아직 운동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한 베를린으로 간다. 그는 1927년 7월부터 “억압받는 자들을 위하여! 착취자들에 맞서!”라는 사이비 사회주의 표어를 내걸고 《앙그리프》이라는 자기 주간지를 낸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사회민주당원 출신인 아우 오토와 함께 베를린에 작은 언론 그룹인 투쟁 출판사를 세운다. 그는 일간지 세 개를 낸다. 베를린의 《민족적 사회주의자》(NS), 브란덴부르크주를 위한 《마르크 관찰자》, 그리고 《작센 관찰자》다. 이것들은 당시 중부와 북부 독일에서 유일한 민족사회주의 일간지였다. 투쟁 출판사에서는 그 밖에도 주간지 세 개와 여러 권의 책과 소책자가 나왔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당시 북독일에서 “지도자”와 경쟁하려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히틀러와 일정한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다시 그의 권위에 복종했다(물론 그는 거듭 독자적인 정치를 하려 했고, 결국 슐라이허 장군과 너무 가깝게 엮이자 1932년 말 히틀러에게 직무를 박탈당했다. 1932년 12월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일단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투쟁 출판사의 모든 출판물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어조가 울려 퍼졌다. 독자에게는 “노동자의 벗”, 아니 “계급 투사”가 자기에게 말을 건다는 인상을 주어야 했다. 슈트라서의 출판사에서 나온 소책자 『민족적 사회주의냐 국제적 사회주의냐』에는 “민족사회주의당은 창조적 노동의 계급 정당(!)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 소책자를 쓴 사람은 주데텐 지방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초대 위원장인 융이다.[9]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구호는 “자유와 빵”이고, “망치와 칼”이 그의 출판물의 상표다. 괴벨스도 같은 장단을 친다. 그는 소책자 『나치·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를 위한 문답』에 이렇게 쓴다.
“뚱뚱하고 잘 먹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사상에 항의하는 것보다 더 거짓된 것은 없다…. 너는 무슨 권리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맞서 민족적 책임감으로 부푼 가슴을 내미는가? 부르주아 국가야말로 거의 60년 동안 조직된 계급 국가였고, 그 국가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사상을 제 안에서 낳은 것이 아닌가? … 잘 먹은 중부 유럽인으로서, 영양이 모자라고 눈이 퀭하고 굶주린 실업자 프롤레타리아들 앞에서 계급투쟁과 싸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노동자 국가라고 부른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노동자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을 해방하려 하기 때문이며, 우리에게는 창조적 노동이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요소이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노동은 재산, 교양, 수준, 시민적 출신보다 더 많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노동자당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스스로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동정이라는 거짓에 항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 신념 따위를 원하지 않는다. 너희가 ‘사회 입법’이라고 부르는 시시한 것은 집어치워라. 그것은 살기에는 너무 적고 죽기에는 너무 많다 … 우리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것과 우리가 주먹과 이마의 노동으로 만들어 낸 것의 수확에서 온전한 몫을 원한다. 그것이 사회주의다! … 우리는 계급투쟁 사상에 항의한다. 우리 운동 전체가 계급투쟁에 맞선 하나의 거대한 항의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제 이름으로 부른다. 왼쪽에서 1700만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에서 마지막 구원을 본다면, 그것은 오직 오른쪽에서 60년 동안 실천으로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먼저 부르주아 계급 국가가 원칙적으로 분쇄되고 독일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편성으로 대체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디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사상에 맞서 돌진할 도덕적 정당성을 얻겠는가.”
이것을 쓴 것은 훗날 독일 제국의 국민 계몽 선전 장관이 된 자이며,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는 25개 조항과는 다른 언어다. 괴벨스가 요구한 부르주아 계급 국가의 분쇄(!)를, 제25조에서 이렇게 말하는 NSDAP의 공식 당 강령과 비교해 보라.
“이 모든 것(강령 전체)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을 요구한다. 강력한 제국 중앙 권력의 창출. 제국 전체와 그 조직 일반에 대한 정치적 중앙 의회의 무조건적 권위. 제국이 제정한 기본법을 개별 연방 국가들에서 시행하기 위한 신분 및 직능 회의소의 구성.”
괴벨스의 구상 옆에 놓으면 1920년 히틀러의 강령은 빛바래고, 판에 박히고, 소시민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보인다. “뚱뚱하고 잘 먹은 부르주아”에 맞선 괴벨스의 호소는 히틀러의 25개 조항에 견주어 더 교묘한 형태의 파시즘 “강령”이며, 그 25개 조항보다 공업화된 독일, 특히 베를린에 훨씬 더 알맞다.
1.8 새로운 패배: 1928년
그러나 라인란트와 루르 지방의 “잘 먹은 부르주아”들 앞에서 강연한 히틀러도, 슈트라서와 괴벨스도 NSDAP의 대중적 영향력을 넓히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이 몇 해 동안 당 내부가 어느 정도 다져진 것은 사실이다. 당원 수는 1만 7000명(1926)에서 4만 명(1927)으로 늘어난다. 1926년 바이마르와 1927년 뉘른베르크에서 두 차례 전당대회가 열린다. 돌격대가 다시 창설된다. 당은 “선의를 지녔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위험한 바보들” 여럿을 털어 낸다. 무엇보다 튀링겐의 “인종 연구가” 딘터가 쫓겨난다.[10] 또 당을 점잖은 사교계에 내놓을 만하게 만들려고 1927년 악명 높은 페메(비밀 처형) 살인자 하이네스를 제명한다. 물론 그의 비겁한 살인 행각도 히틀러가 나중에 그를 다시 받아들여 브레슬라우 경찰청장과 북독일·동독일 전체의 최고 돌격대 지휘관으로 삼는 것을 막지 못했다. NSDAP는 1928년 5월 다시 한번 아주 심각한 선거 패배를 당했다. 제국의회 의석을 12석밖에 얻지 못한 것이다. 파시즘 운동이 자라날 객관적 상황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1924~1927년에 경제생활이 어느 정도 다시 살아났고, 그것이 소시민층과 노동자의 일정한 부류에게도 얼마간 숨통을 틔워 주었던 것이다.
1.9 독일의 경제 위기
그러나 겉보기 경제 호황은 이미 정점을 지나 있었다. 독일은 밀어닥친 세계 경제 공황에 휩쓸린 첫 유럽 나라다. 생산이 줄어든다. 실업이 늘어난다. 1930년 겨울 독일에는 벌써 실업자가 300만 명이 넘는다. 기업가들은 임금을 거듭 깎아 내리는 대공세를 시작한다. 베를린의 《재정 정책 통신》이 계산한 바에 따르면 공업 노동자의 평균 주급은 1929년 여름 44.60라이히스마르크였는데, 1930년 3월에는 39.05라이히스마르크로 떨어져 있었다. 1928년과 1929년에 아직 42–45마르크이던 주급의 연평균은 1930년 37마르크, 1931년 30마르크로 떨어졌다. 마침내 파펜–슐라이허 정부 아래에서 평균 주급은 1928/29년에 비해 절반 넘게 깎였다. 1932년 8월에 그것은 20.80라이히스마르크였고, 그 뒤로도 더 떨어졌다. 《재정 정책 통신》의 계산으로는 1929년 7월부터 1932년 7월까지 독일 노동자와 사무직원에게서 깎아 낸 임금과 봉급의 총액이 약 380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임금과 봉급의 삭감과 손을 맞잡고 실업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1931/32년 겨울 실업자 수는 – 제국 노동부의 공식 발표로도 – 600만 명 선을 넘었다. 그러나 관영 「경기 연구소」는 이 공식 수치가 실업의 실제 규모를 보여 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가 직업소개소에 신고한 실업자만 셌기 때문이다(지금도 그렇게 센다). 그래서 통계에는 실업자의 일부만 잡혔다. 경기 연구소의 표현대로라면 “보이는” 실업과 나란히 “보이지 않는” 실업이 있었다. 이것은 취업자를 모두 잡는 의료보험 조합의 통계와 견주어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실업은 약 200만 명이었다. 그러니까 공식 통계는 1931/32년 겨울 약 600만 명, 1932년 여름 500만 명 이상의 실업자를 내놓았지만, 「경기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실업자는 1931/32년 겨울 거의 800만 명, 1932년 3분기에는(가장 좋은 철인데도!) 700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 수치조차 실제 형편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여기에는 “거지”가 되어 도시의 거리를 메우거나 “떠돌이”가 되어 독일 온 땅을 헤매는 수십만 명의 장기 실업자도, “버려진” 아이들도, 학교를 마치고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소년 실업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굶주리며 살아가고 사실상 실업 상태인 수십만 명의 영세 상인과 행상, 예전의 “자영업자”, 이른바 자유직 종사자도 이 수치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업자의 실제 수는 약 900만 명(1932/33년 해가 바뀔 무렵)으로 어림해야 한다!
중간 계급의 처지도 갈수록 나빠졌다. 독일에서 이 중간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테오도어 가이거의 통계 연구(『독일 민족의 사회 계층』, 슈투트가르트, 1932)에 따르면 취업자 전체 가운데 여러 계급이 차지하는 비율은 다음과 같다. 자본가 0.84퍼센트, “구중간층”(생산수단의 소유주) 18.33퍼센트, “신중간층”(사무직원, 공무원 따위) 16.04퍼센트, “준프롤레타리아”(제 계산으로 일하는 날품팔이, 영세 상인 따위) 13.76퍼센트, 프롤레타리아트 51.03퍼센트.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율은 분명 지나치게 높게 잡혔다. 그래도 이 구분은 대체로 현실에 들어맞는다.
공황은 중간 계급의 더 많은 층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었다.
파산이 늘었고 강제 경매가 일상이 되었다. 도시 소부르주아지와 소농이 특히 심하게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공황은 지금까지 그것을 비켜 갔고 상대적 안정기에 처지가 탄탄해졌던 층까지 덮쳤다. 이제 실업의 채찍은 정신노동자라는 혜택받은 층에도 떨어진다. 교사, 기술자, 의사, 변호사, 작가, 예술가의 생활 수준이 자꾸만 낮아진다. 대학 졸업자의 4분의 1이 일자리가 없다. 이를테면 공과대학과 공업학교 졸업자(1931/32년) 8000명 가운데 제 직업에서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1000명뿐이었다. 1500명은 궁핍을 견디며 “당분간” 공부를 이어 가고, 또 다른 1500명은 한동안 거리 행상, 웨이터, 접시닦이, 댄스 파트너 따위로 버텼다. 그러나 4000명은 일자리 없이 거리에 나앉아 있다. 공인된 의사 직능 단체인 하르트만 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1932년 독일 의사의 70퍼센트가 한 달에 170마르크도 벌지 못했다. 「독일 변호사 협회」도 변호사 직군에 대해 비슷한 사실을 확인했다. 프로이센 문화부의 발표에 따르면 작년에 수련을 마친 젊은 교사 2만 2000명 가운데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990명뿐이었고, 그것도 거의 모두 대리 교사나 보조 교사였다. 그것도 프로이센 한 곳에서만! 고용된 기술자와 화학자 사이의 실업은 1930년 4월 1일부터 1932년 4월 1일까지 500퍼센트 늘었는데, 같은 기간 모든 범주의 사무직원 실업은 “겨우” 150퍼센트, 기술직 사무원의 실업은 200퍼센트 늘었다. 아직 일자리에 있는 대학 졸업자의 처지도 해마다 나빠졌다. 노동시간은 늘어났고 봉급 삭감은 가차 없이 단행되었다. 이를테면 프로이센 중등학교 시보 교사의 봉급은 1932년 가을에 1927년보다 24퍼센트 넘게 낮았다. 여기에 조업 단축까지 더해졌다. 수많은 사업장에서 일주일에 3–5일밖에 일하지 않았다.
엄청난 배상금 부담이 공황을 더욱 깊게 했다. 도스안과 로카르노 조약(1924/25)에 걸었던 약속과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9년 영안으로 새로운 국제 “채무 조정”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자본가 계급에게 근로 대중에게 수십억의 부담을 지울 새로운 기회를 준다.
빈곤에 빠진 노동자들 사이로 새로운 급진화의 물결이 지나간다. 1928년 5월 사회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노동 대중은 다시 공산당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무관심하던 도시 소부르주아지의 여러 층도 공황이 깊어지면서 정치화된다. 농민들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1929년 북독일에서 봉기가 일어난다. 근로 농민들은 외양간의 마지막 소를 압류하고 강제 경매를 하려는 집행관들을 쫓아낸다. 세무서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경찰과 유혈 충돌이 벌어진다. 마침내 폭탄 테러가 잇따른다.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서는 군청과 다른 관청 건물을 폭파하려는 시도가 벌어진다.
부르주아지는 1918년의 양보를 없애려는 목표를 품고 억압 정책을 이어 간다. 인민당의 루터(지금의 주미 대사)와 중앙당 지도자 마르크스가 이끈 부르주아 블록 정부들은 1928년 중공업의 독일인민당에서 사회민주당까지 아우르는 “대연정” 정부로 바뀐다. 사회민주당 당수 헤르만 뮐러가 제국 총리가 된다. 그와 나란히 사회민주당원 세 사람이 제국 내각에 앉는다. 제베링(내무장관), 힐퍼딩(1923년처럼 재무장관), 비셀(노동장관). 독일인민당 지도자 슈트레제만이 외무장관, 그의 당 동지 쿠르티우스 박사가 경제장관, 민주당원 게슬러(지금은 파시스트)가 국방장관이다. 헤르만 뮐러 정부 아래에서 영안이 “완전히 매듭지어진다.” 파리 영 회의의 수석 대표는 제국은행 총재 샤흐트다. 그는 1930년에 물러났다가 1933년 히틀러 지지자로서 다시 제국은행 총재가 되었다.
1.10 브뤼닝 시대
1929년 12월 재무장관 힐퍼딩이 실각한다. 비과세 공채를 발행해 대은행들에 엄청난 이익을 몰아주었는데도 그렇다. 그의 자리는 몰덴하우어 교수가 차지한다. 몰덴하우어는 독일 최대의 트러스트인 이게파르벤의 감사회 위원이다. 몇 달 뒤인 1930년 3월 뮐러 내각은 브뤼닝 정부로 교체된다. 사회민주당은 꾀에 밀려 제국 정부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제국의회에 다수를 갖지 못한 브뤼닝–그뢰너–슈테거발트 정부를 사회민주당은 기꺼이 지지하고 “용인”한다. 동시에 이 정부는 벌써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을 끌어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1933년 6월 게레케 재판[11]에서 전직 장관 트레비라누스는 브뤼닝이 이미 그때 NSDAP를 함께 “끌어들일” 뜻을 품고 있었다고 분명히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 사회민주당은 브뤼닝 정부를 순전한 파시스트 부르주아 블록 내각에 견주어 “차악”이라며 근로 대중 앞에 내민다.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프로이센의 브라운–제베링 정부는 브뤼닝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민주주의”의 시기는 독일의 금융·공업·농업 자본가들이 경제 공황으로 내몰린 곤경 속에서 끝났다. 브뤼닝은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로 통치한다. 바로 그 헌법을 정지시키는 조항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위험해지기 시작한 정치 흐름을 비상사태와 민주적 권리의 정지로 “바로잡아야” 했던 것은 독일 부르주아 공화국의 역사에서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사회민주당 출신 제국 대통령 에베르트 아래에서 제48조는 이른바 생활 필수 사업장의 파업을 금지하고, 「기술 긴급 구조대」[12]라는 파업 파괴 부대를 조직하고, 1923년 국방군을 작센과 튀링겐에 “헌법 질서 회복”을 위해 진주시키고, 폰 젝트 장군에게 군사 독재자로서 독일 공산당을 금지할 권한을 주는 수단이 되었다. 전직 노동조합 지도자인 사회민주당원 베를린 경찰청장 최르기벨은 1929년 베를린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시위를 금지한다. 노동자들이 금지를 뚫고 시위를 벌이자 그는 경찰 부대를 투입한다. 그들의 총탄에 베를린 노동자 33명이 쓰러진다. 며칠 뒤 제베링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반파시즘 방위 조직인 적색 전선 투사 동맹[13]을 금지한다. 그런데 프로이센에서 돌격대는 합법적으로 전투 부대를 계속 키워 나가도 된다.
브뤼닝은 제국의회를 배제한다. 사회민주당은 이에 동의한다. 브뤼닝은 제48조에 근거한 긴급명령으로 통치한다. 그는 실업 수당 삭감을, 전쟁 희생자·상이자·노인·과부·고아의 쥐꼬리만 한 연금 삭감을 명령한다. 그는 새로운 대중 과세를 강요한다. 인두세, 공황세, 독신세. 그는 긴급명령으로 관세를 올리고, 그와 함께 식료품값을 올린다. 그는 세입자 보호를 없앤다. 은행과 공업 콘체른은 수백만 마르크의 보조금을 받는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근로자들의 희생으로 제 살림을 바로 세운다. 이른바 「동부 원조」[14]에서 그들은 수백만 마르크를 받는다. 그리고 절반 넘게 사회민주당 당원인 경찰청장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 운동을 매우 가혹하게 억누르고, 공산당 신문을 금지하고, 노동자들에게 시위 금지령을 내린다.
이 정책으로 사회민주당은 독일에서 반동 세력과 파시스트 세력의 성장을 실제로 도왔을 뿐 아니라,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체제”의 실패를 겨냥한 선동을 퍼부을 구실까지 주었다.
사회민주당은 대중 수탈을 견딜 수 없는 데까지 몰아붙이고, 독재적으로 통치하고, 민족사회주의자들을 정부 권력에 끌어들일 준비를 한 브뤼닝 정부조차 용인했다.
이 시기에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두 번째 상승이 시작된다. NSDAP는 엄격한 합법 노선을 지킨다.
중공업과 대토지 소유의 반동 분파를 대표하는 후겐베르크와 함께, 철모단과 다른 민족주의 단체들과 함께, NSDAP는 영안에 반대하는 국민 청원을 시작한다.
후겐베르크의 독일국가인민당이 1925년 도스안 통과를 돕도록 원내 의원의 절반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잊혔다.” 수백 개 신문에 영향을 미치고 자체 통신사인 전신 연합(TU)을 거느린 후겐베르크 콘체른의 거대한 선전 기구가 이제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이익을 준다. 국민 청원은 실패하지만,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작센과 튀링겐의 주의회 선거와 프로이센의 지방 선거에서 어느 정도 첫 선거 성과를 거둔다.
1930년 1월 프리크가 튀링겐의 내무장관 겸 문화장관이 된다. 독일에서 장관 자리에 오른 첫 민족사회주의자다. 이때 NSDAP는 튀링겐에서 독일인민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익 정당과 연정을 맺는데, 독일인민당은 같은 시기 제국에서는 사회민주당과 연정을 하고 있다. 불과 1년 전 괴벨스는 『민족사회주의자의 작은 기초 상식』에서 독일인민당을 대자본의 이익 대변자라고 불렀다. 이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대표가 독일인민당의 대표들과 한 정부에 나란히 앉는다.
1.11 히틀러가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오토 슈트라서가 이끄는 NSDAP 안의 “사회주의자”들 일부는 더는 합법 노선을 따를 수 없다고 여겨, 1930년 5월 “사회주의자들은 NSDAP를 떠난다”는 구호를 내걸고 당을 떠난다. 그에 앞서 슈트라서는 히틀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동자 대중은” — 히틀러는 슈트라서에게 말했다 — “빵과 서커스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상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노동자들을 상당한 정도로 얻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새로운 지배층(!)의 선발입니다. 당신처럼 동정의 도덕에 휘둘리지 않는 지배층 말입니다.”
슈트라서는 이어서 히틀러에게 이런 것들을 물었다. “당신이 내일 독일의 권력을 잡는다면, 모레 이를테면 크루프 주식회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곳의 주주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소유와 이윤과 경영에 관한 모든 것이 지금 그대로 남습니까, 아닙니까?” 그러자 히틀러가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내가 경제를 망칠 만큼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민족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지 않을 때만 국가가 개입할 겁니다. 그러나 그러는 데는 수용도 공동 결정권도 필요 없고, 강한 국가가 그 일을 합니다. 오직 강한 국가만이 이해관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큰 관점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는 나쁜 말이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이 사업체들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화할 수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곧 그것들이 민족의 이익을 거스를 때 말입니다. 그러지 않는 한 경제를 망치는 것은 그저 범죄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본보기가 있습니다. 바로 파시즘입니다! 파시스트들이 이미 해낸 그대로, 우리 민족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기업가와 노동자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나란히 설 것이고, 분쟁이 생기면 강한 국가가 결정을 내려 경제 투쟁이 민족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이 신앙 고백으로 히틀러는 독일 금융 자본의 지배층에게 다시 한번 자신을 천거했다. 그는 민족사회주의 경제 강령이 파시즘의 경제 강령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다시 굳히는 것만을 보장하려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했다.
그때 한 약속을 그는 지켰다!
1.12 1930년 9월 선거
NSDAP는 1930년 9월 제국의회 선거에서 첫 큰 승리를 거두었다. 640만 표(107석)를 얻어 사회민주당에 이은 제2당이 된 것이다. 공산당은 60만 표를 더 얻었다. 독일국가인민당은 의석의 절반을, 독일인민당은 3분의 1을 잃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거둔 성공은 급진화한 소부르주아 대중을 얻는 데 온통 맞춘 선전 덕분이었다. 그 선전은 모든 직업층에 대한 터무니없는 약속과, 자본가 후원자들에게서 나온 엄청난 자금으로 벌어졌다. 나치는 베르사유와 영안에 반대하는 선동으로, 온갖 쇼비니즘에 넘어가기 쉬운 소부르주아 층을 끌어들일 줄 알았다. 그들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노동자에게는 더 높은 임금을, 기업가에게는 더 높은 이윤을, 세입자에게는 더 낮은 집세를, 집주인에게는 더 높은 집세를, 농민에게는 더 높은 농산물값을, 소부르주아에게는 더 싼 식료품을. 그런데도 그들은 노동자 대열을 실제로 뚫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저 부르주아 정당들의 예전 유권자 상당 부분을 제 쪽으로 끌어왔을 뿐이다.
1.13 히틀러를 제국 총리로 삼을 것인가?
브뤼닝은 계속 통치하며 새 긴급명령을 냈다. 사회민주당은 그의 긴급명령 정책 집행을 지지했다. 민족사회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민족사회주의자들을 공공연히 끌어들이는 문제가 거듭 떠올랐다.
1932년 4월 힌덴부르크가 “힌덴부르크를 뽑는 자는 히틀러를 친다!”는 구호 아래 사회민주당의 표로 두 번째로 제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32년 5월 동프로이센 융커들의 획책으로 제국 총리 브뤼닝이 실각했다. 그 뒤를 파펜–슐라이허 정부가 이었다.
새 정부는 독재 조치를 강화하는 시기를 열었다. 1932년 7월 20일 파펜이 프로이센 제국 판무관에 임명되었다.[15] 대위 한 명과 국방군 병사 세 명이면 사회민주당 출신 프로이센 장관들의 “저항”을 꺾기에 충분했다.
잠시 동안 베를린–브란덴부르크에는 군사 비상사태도 선포된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아직 프로이센과 제국의 다른 여러 주에서 보안경찰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는데도, 그리고 민주파 경찰 장교들이 무장 저항을 하자고 거세게 다그쳤는데도, 저항 없이 물러선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호소하는 공산주의자들을 공공연히 “도발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힘을 마비시키고, 그래도 몇 자리라도 건져 볼까 하여 제 진지를 내준다. 프로이센이라는 “민주주의의 보루”는 싸움 없이 반동의 손에 떨어진다.
1932년 8월 — 7월에 NSDAP가 두 번째로 큰 선거 승리를 거둔 뒤(1350만 표 = 제국의회 225석)[16] — 처음으로 히틀러를 제국 총리로 임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힌덴부르크는 아직 망설인다. 그러나 NSDAP를 끌어들이라는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이 무렵 독일 공업 제국 연맹의 비공개 사설 통신인 《독일 지도자 서한》에 주목을 크게 받은 기사가 실리는데, 이 기사는 결정권을 쥔 자본가 집단의 계획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재공고화」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옮긴이] 원서는 여기서 이 기사를 두 쪽 가까이 인용한다. 필자 알프레트 존레텔(1899~1990)의 저작권이 남아 있어 인용문은 싣지 않고 요지만 적는다. 기사는 경제를 쥔 부르주아지가 너무 좁아서 혼자 힘으로는 지배를 떠받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자기 편이 아니면서 그 지배를 민중 속에 뿌리내려 줄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후 첫 시기에 그 구실을 한 것은 사회민주당이었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의 기세를 임금·사회정책상의 성과로 바꾸었다. 그 성과가 일종의 「수문 장치」가 되어 조직된 취업 노동자와 실업 대중을 갈라놓았고, 노동조합 관료와 그들이 이끄는 노동자들을 부르주아 국가에 묶어 두었다. 그런데 공황이 그 성과를 부숴 버려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고, 부르주아 지배는 군사 독재라는 비상수단 직전까지 몰렸다. 기사는 이제 민족사회주의가 노동조합을 「구속된 사회 체제」로 끌어들여 사회민주당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며, 그러면 앞으로의 부르주아 지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자리를 얻게 되리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부르주아 지배의 재공고화와 공산주의 혁명 사이에 제3의 길은 없다”는 말로 맺는다.
이 문장들은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다. 이 문장들은 독일 경제를 움직이는 세력의 계산을 보여 준다.
1.14 파펜–슐라이허 시대
파펜–슐라이허 정부는 히틀러 독재로 가는 길의 새 단계였다. 그 긴급명령들은 히틀러의 직접적인 본보기다. 대역죄에 사형, “정치적 유혈 범죄”에 사형, 가벼운 “범행”에도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하는 특별 법정의 도입. 그러나 대부르주아지와 융커와 장군들의 이 정부에는 대중적 지지 기반이 없다. 철모단과 독일국가인민당으로는 모자란다. 1932년 9월 거창하게 발표된 파펜의 경제 강령은 대중에게는 새 부담을, 가진 자들에게는 선물로 새 수백만 마르크를 안긴다. 의회 밖에서 파시즘에 맞서 진지한 투쟁을 벌이는 유일한 당인 공산당의 지도 아래 강력한 반파시즘 반격 행동이 일어난다. 그 행동은 1932년 11월 베를린 교통 노동자 파업[17]에서 정점에 이르고, 이 파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세 앞에서 정부가 무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공황이 곧 끝나리라는 파펜의 희망이 얼마나 헛된지 날마다 드러난다.
같은 시기 민족사회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겪는다. 1932년 11월 선거에서 NSDAP는 200만 표 가까이 잃는다. 공산당에는 600만 표가 던져진다.
11월 말 파펜이 실각한다. 12월 초 슐라이허가 뒤를 잇는다. 무대 뒤에서 다시 협상이 시작된다. 노동조합과도, 민족사회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문제를 두고도. 슐라이허의 말대로 어떤 정부도 총검 끝 위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총리 장군은 망설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파펜의 긴급명령 몇 가지를 누그러뜨릴 뿐이다. 1월 22일 민족사회주의자들은 노골적인 도발을 감행한다. 그들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인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 앞 뷜로 광장에서 시위를 연다. 슐라이허 장군은 경찰 전체를 동원해 대규모 프롤레타리아 맞불 시위로부터 이 도발을 지켜 준다.
상황이 날카로워진다. 슐라이허 장군은 군사 독재를 곧바로 선포하는 일을 만지작거린다. 파펜은 히틀러, 후겐베르크와 협상하며 슐라이허의 계획을 거스르는 공작을 벌인다. 독일의 지배층은 이제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표현대로 “어둠 속으로 뛰어들기”를 감행한다. 1월 30일 사회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힌덴부르크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제국 총리에 임명한다.
2 국회의사당은 불타야 한다!
장군 총리 슐라이허가 무너지기에 앞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관저에서는 몇 달에 걸친 막후 공작이 벌어졌다. 파펜의 “경제 부양”은 실패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쌓여만 갔다. 슐라이허는 걸음마다 장애물에 부딪혔는데, 그것은 전임자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끼치는 큰 영향력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파펜은 물러난 순간부터 후임자 슐라이허를 무너뜨리려고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2.1 대통령 관저의 게임
겉만 보는 사람에게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몇 달 동안 독일 정부의 막후에서 벌어진 일들이 뒤죽박죽인 정치 음모극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힌덴부르크 주위에는 크든 작든 굳어진 여러 파벌이 있어 서로 싸웠다. 이 싸움에서 승패를 가른 것은 개인적인 반감이나 호감이 아니었다. 문제는 지배계급의 부분적 이해관계,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들의 특수한 이해관계였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은 국방군에서 독일 총리 자리로 올라선 사람이었다. 라디오로 발표한 정부 성명에서 스스로를 “사회적 장군”이라고 내세운 이 사람은, 열네 해 동안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발전을 반동 쪽으로 한 걸음 더 밀어붙여야 할 때면 언제나 그 능란한 손을 정치 게임에 넣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1918년 11월 혁명을 진압할 때 최고 사령부와 사회민주당 인민 대표들 사이의 연락원으로 등장한다. 이 젊은 참모 대위의 이름은 그 무렵 힌덴부르크, 그뢰너, 에베르트의 이름 곁에 나타난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국방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된다. 1923년 10월 에베르트가 모든 집행권을 국방군 장군 폰 젝트에게 넘겨 인플레이션의 참상에서 솟구치던 혁명의 물결을 꺾으려 했을 때, 비상사태를 실제로 집행한 것이 그였다. 슐라이허는 소령으로서 국방부 장관실장이 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힌덴부르크와, 그리고 — 제3근위보병연대와 참모본부에서 함께 복무한 인연으로 — 그 아들 오스카어 폰 힌덴부르크 대령과 더없이 가까웠다.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에게 직접 보고하는 자리를 얻어 낸다. 1930년 3월 힌덴부르크가 헤르만 뮐러 총리에게 제국의회 해산권을 내주지 않고 사회민주당을 정부에서 쫓아낼 때, 실을 쥐고 있던 것은 그였다. 독일의 결정적인 자본가 집단들이 민족사회주의자들을 정권에 끌어들이는 쪽으로 점점 더 기울자, 슐라이허는 브뤼닝을 버린다. 슐라이허는 스스로 그뢰너를 대신해 국방부 장관이 되고, 그로써 “사무실 장군”으로서 참모 장교의 정치 기술을 남몰래 부리던 국방부의 어둠에서 나와 정치 무대의 눈부신 조명 아래로 들어선다.
슐라이허는 이미 파펜 총리 시절부터 정부 기구의 요직에 자기 심복들을 앉히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파업의 공세에 파펜 정부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장관이 파펜의 총리직은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선언하게 만든 결정타를 날린 것도 슐라이허였다. 슐라이허는 이제 더 드러내 놓고 앞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정부 집무실의 매끄러운 마룻바닥 위에서 술책을 부리기는, 깊어진 경제 공황의 비탈길 위에서 정치를 하기보다 쉬웠다. 강령도 없이, 뚜렷한 정책도 없이, 온갖 계획을 만지작거리며 — 그의 짧은 집권 기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의 정부는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본가 세력에게, 눈에 띄게 고조되는 노동자들의 혁명적 앙양에 맞서 더 날카로운 파시즘의 공격으로 넘어가기 위한 다리 노릇만 하면 되었다. 슐라이허 장군의 측근 패거리에는 전직 소령으로 총리실 차관인 플랑크, 그리고 슐라이허 정부 아래서 제국 공보국장이 된 마르크스 소령이 있었다.
힌덴부르크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무리에는 무엇보다 그 아들이자 개인 부관인 오스카어 폰 힌덴부르크 대령이 있었다. 그의 차관은 일찍이 에베르트도 섬긴 마이스너 박사다. 폰 파펜 씨는 실각한 뒤에도 힌덴부르크가 직접 믿는 무리에 속했다. 파펜에게는 정치인, 은행가, 산업가, 대지주, 고위 관리와 장교들의 매우 영향력 있는 모임인 신사 클럽[18]이 특별한 버팀목이었다. 파펜에게서 NSDAP로, 히틀러와 괴링에게로, 철모단으로, 후겐베르크가 이끄는 독일국가인민당으로 실이 이어져 있었다. 실각한 지 몇 주 뒤 파펜은 쾰른의 은행가 슈뢰더의 집에서 히틀러와 만났다. 11월 7일 성명에서 파펜에 맞서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선포했던 히틀러가, 은행가의 응접실에서 파펜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펜은 쾰른에서 도르트문트로 가서, 대산업가 슈프링고룸을 비롯한 라인·베스트팔렌 중공업 자본의 대표들과 정부 문제를 두고 비밀 회담을 열었다.
슐라이허 역시 NSDAP와, 특히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사회주의”로 분칠한 당내 분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11월 6일 200만 표를 잃은 것으로 드러난 NSDAP의 위기를 자기 정부의 정책에 이용하려 했다. 그는 사회민주당원으로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 위원장인 라이파르트, 기독교 노동조합, 독일 국민 상업 사무원 연맹에 연줄이 닿아 있었다. 그는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노동조합에서 NSDAP의 “사회주의” 분파에 이르는 이 “가로지르기 연결”로 일종의 노동조합 대중 기반을 만들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슐라이허는 융커들에게 수백만, 또 수백만의 “재건” 선물을 안겨 주었다. 중개인들이 이 집단들 사이를 오갔다. 날마다 새 연합이 맺어졌다가 다시 풀렸다. 날마다 정세가 바뀌었다. 신문은 주인을, 편집자는 정치적 신념을 바꾸었다. 울슈타인 그룹과 루돌프 모세 출판사의 자유주의 신문들을 두고 파벌 싸움이 들끓었다. 한때 슈트레제만의 기관지였던 《테글리헤 룬트샤우》는 슐라이허의 대변지가 되었다. 국방군의 두둑한 금고에서 이 신문으로 돈이 흘러들어 갔다는 말이 돌았다. 《테글리헤 룬트샤우》의 편집장이 된 사람은 이른바 「타트 서클」의 지도자이자 그 잡지 《디 타트》의 주관자인 한스 체러였다. 이 잡지는 사이비 혁명의 색채를 띤 특이한 형태의 파시즘을 선전했다[19]. 파펜은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에 영향력을 뻗치려 했다. 수출 산업가들, 대형 해운 회사들, 제국 철도(지멘스)는 오래전부터 보조금을 대 온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을 기관지로 삼고 있었다.
그 몇 주 동안 슐라이허 뒤에는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씨와 I. G. 파르벤 공업 주식회사의 추밀고문관 뒤스베르크, 곧 독일 산업 전국 연맹의 지도자들이 서 있기는 했다. 그러나 파펜은 슈프링고룸과 티센, 후겐베르크와 대농장주들과 더 단단히 이어져 있었다. 모든 집단이 민족사회주의자들을 부르주아 독재 정부의 정치적 버팀목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했다. 의견이 갈린 것은 그들이 정권에 참여하는 형태와 범위였다. 대통령 관저의 게임, 천 가지 음모는 이 차이를 비추어 보여 주었다.
2.2 동부 원조 추문
1933년 1월 말, 슐라이허는 파펜과 그와 손잡은 대농장주들의 책동이 자기 정부를 점점 더 위협한다는 것을 느꼈다. 힌덴부르크 측근 무리에게서 점점 더 밀려나자, 그는 여러 해 동안 효과를 본 술책 하나로 반격에 나섰다. 대농장을 거느린 융커들의 “동부 원조”[20] 부정에 관한 어마어마한 자료가 신문에 흘러나갔다. 근로 대중은 분노했다. 제국의회에 조사 위원회가 꾸려졌다. 추문은 힌덴부르크 자신까지 그 소용돌이로 끌어들일 기세였다.
헤르만 뮐러 총리 시절에 이미 융커들은 이른바 동부 원조로 파산한 영지를 살린다며 수백만을 받았다. 돈을 나눌 때 소농들은 거의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큰 나리들이 몫의 대부분을 챙겼다. 그런데 1933년 1월 말 제국의회 조사 위원회에서, 그 밖에도 부유한 대지주들이 “부당하게” 수십만 마르크씩을 받아 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들은 이 돈을 말 그대로 사기 쳐서 얻어 냈다. 여섯 개의 기사령 영지를 가진 백만장자이자 힌덴부르크의 개인적 친구이며 영지 이웃인 시종관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는 허위 신고로 62만 1000마르크를 손에 넣었다. 볼프 폰 카이저링카스터하우젠 백작과 아달베르트 폰 카이저링카스터하우젠 백작은 70만 마르크를 가져갔다. 루핀 세무서의 자료에 따르면 노름과 계집질과 술로 재산을 탕진한 폰 크바스트라벤스레벤이라는 자는 28만 1000마르크를 “마련했다”. 동부 원조 지역 사무소장이던 브란덴부르크의 브론자르트와 슈테틴의 폰 볼프는 스스로 자기 빚을 재조정해 수만 마르크를 제 주머니에 넣었다. 벨라우 군의 기사령 영지주 크로크는 동부 원조금 15만 4000마르크를 챙기려고 가축을 아내 명의로 돌려놓았다. 그런데도 그는 파산했다. 그의 아내는 가축을 헐값에 팔아 치우고 그 돈을 딸에게 넘겼고, 딸은 경매에서 그 영지를 헐값에 부모 몫으로 되사들일 수 있었다.
“동부 원조 추문”에 얽힌 새 이름이 날마다 튀어나왔다. 노이데크 영지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찾아 드나들던 영지 이웃들이었다. 힌덴부르크 집안은 몹시 불안해졌다. 힌덴부르크의 80세 생일에 산업 단체들과 개인들을 움직여 그의 조상 대대의 영지 노이데크를 대통령에게 선물로 바치게 한 것이 바로 지금 정체가 드러난 융커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 영지에 대해서는 증여세가 한 푼도 납부되지 않았다 — 게다가 영지는 대통령이 아니라 그 아들인 대령 겸 부관의 명의로 넘겨졌다. 그러니 국가는 앞으로 받을 상속세까지 사기당한 셈이었다. 융커와 산업가들은 노이데크 영지의 장비와 건물을 새로 하라며 이미 두 번이나 돈을 모았다. 그들은 영지의 수익을 더 높이려고 세 번째로 돈을 모았다. 동부 원조 추문의 진흙탕 물결이 대통령 관저까지 밀려들었다.
융커들은 의논했다. 슐라이허는 물러나야 한다! 일찍이 브뤼닝도 대농장주들의 책동으로 — 그때는 슐라이허의 도움을 받아 — 총리실에서 쫓겨났다.
2.3 히틀러가 총리가 되다
1월 28일 아침, 힌덴부르크가 장군 총리에게 제국의회 해산권을 내주지 않자 슐라이허 정부는 물러난다. 대신 파펜이 힌덴부르크에게서 “민족 집중” 정부 구성을 두고 히틀러와 교섭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전례 없는 긴장으로 가득 찬 이틀. 공산당은 닥쳐오는 히틀러 독재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하는 전단을 뿌린다. 슐라이허는 라이파르트와 교섭한다. 막후의 싸움은 첨예해지고, 1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밤 슐라이허는 군사 독재를 곧바로 선포하고 포츠담 수비대를 베를린으로 진군시킬 생각을 만지작거린다. 어느 시간에든 뜻밖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그때 힌덴부르크는 일정한 조건을 붙여 히틀러에게 곧바로 총리직을 넘기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1월 30일 아침, 서둘러 히틀러–파펜–후겐베르크 정부가 들어선다.
1932년 6월 파펜–슐라이허 정부는 민족사회주의당의 묵인에 기대고 있었다. 괴벨스는 나중에 신사 클럽 사람들이 “NSDAP의 넓은 등을 밟고 날쌔게 관직으로 기어올랐다”고 비난했다. 1932년 11월까지도 프로이센 주의회의 민족사회주의 교섭단체 대표 빌헬름 쿠베는, 민족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후겐베르크와 함께, 증권거래소와 자본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행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폰 파펜 씨는 몇 달에 걸친 막후 작업으로, 힌덴부르크가 부르면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그 우렁찬 선언과 비장한 맹세를 쓸데없는 짐짝처럼 배 밖으로 내던지도록 준비해 두었다.
총리직은 영웅적 투쟁의 열매로 히틀러의 무릎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1월 30일에 일어난 일은 과감한 공격으로 권력을 쟁취한 “민족 혁명”이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뜻밖에 총리 자리를 얻은 것은, 지배계급의 주도 집단들이 노동자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라고 다그쳤을 뿐 아니라 동부 원조 추문의 악취를 서둘러 덮어 버리려 했을 때였다.
1월 30일 저녁 돌격대와 철모단이 활활 타는 횃불을 들고 빌헬름 거리를 행진하며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에게 환호를 보낼 때, 그들은 실제로 벌어진 일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민족 궐기의 날”을 경축하던 돌격대원과 철모단원들은 그날을 낳은 산파가 이윤욕과 부패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4 저항의 물결이 솟구치다
공산당은 1933년 1월 30일 사회민주당 당 집행부와,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노동조합 및 기독교 노동조합의 집행부에 히틀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총파업을 함께 조직하자고 공식 제안했다.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대답은 이러했다.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집권했다. 그가 합법성을 깨뜨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금 싸워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당 신문들의 논조는 히틀러가 곧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독일 노동자의 상당수가 이 성명을 믿었다. 공산당은 아직 자기 힘만으로 노동계급의 다수를 투쟁으로 이끌지 못했다. 서둘러 이어 붙인 히틀러 정부는 2월 초순 독일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쳐 들이닥쳤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격대는 막 심한 위기를 겪어 곳에 따라서는 대원의 절반까지 잃은 터였다. 경찰 기구는 아직 새 정부의 손에 확실히 들어오지 않았다. 새 정부는 슐라이허의 국방군과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즉각적인 총파업이 일어나지 않은 덕분에 히틀러 정부는 이제 자기 권력 수단을 펼칠 시간을 벌었다.
그런데도 베를린에서, 함부르크에서, 루르에서, 니더라인에서, 중부 독일에서, 그리고 나라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커져 갔다. 히틀러 독재가 맞선 것은 투쟁력이 아직 꺾이지 않은 노동계급이었다. 노동자들은 1월 22일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21]. 이제 그들 사이에서는 더욱 날뛰는 돌격대 테러에 맞서 통일된 투쟁 행동을 바라는 열망이 널리 퍼져 갔다. 사회민주당, 기독교, 공산당 노동자들이 신문사 건물과 노동조합 회관을 지키며 형제처럼 손을 잡았다. 히틀러가 신문을 금지하고, 시위 금지령을 내리고, 돌격대를 노동자 구역으로 보내도 —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솟구치는 노동자들의 반파시즘 통일 투쟁의 물결이었다.
2.5 도발의 강박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상황은 그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새 내각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공고했다. 파펜의 테러 명령들이 더 가혹한 형태로 되살아났다. 동부 원조 추문은 비밀 위원회 안에 묻혔다. 히틀러는 라디오에서 흐릿한 말로 있지도 않은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몇 개의 긴급명령과 막연한 약속으로는 “독일 사회주의”의 실현을 바라던 수백만 유권자 대중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히틀러는 1월 말 힌덴부르크의 옥죄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정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때 타협할 마음을 먹은 데에는 여러 까닭이 있었다. 당원과 지지자들의 불만, 돌격대의 위기와 잇따른 탈퇴, 갚지 못한 NSDAP의 수백만 마르크 빚. 부르주아 계층에서는 예전 나치 유권자의 일부가 독일국가인민당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11월 6일 공산당은 제국의회 의석을 11석 늘렸고, 민족사회주의자들은 35석을 잃었다. 새 정부에서는 민족사회주의 장관 3명이 독일국가인민당과 철모단 대표 8명과 마주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의 동의 없이는 내각을 조금도 바꿀 수 없었다.
노동자들 사이에 반파시즘 투쟁 기운이 높아 가는 가운데 히틀러의 선거 전망은 좋지 않았다. 후겐베르크와 독일국가인민당은 정부 안의 경제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고, 많은 민중은 히틀러가 가장 악랄한 자본가 강경파의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았다. 대중의 환멸은 3월 5일 선거 결과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득표가 다시 늘어날 위험이 있었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는 대규모 도발로 상황을 바꾸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생겼다. 선거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한 포그롬 분위기 속에서 치러져야 했다. 동시에 정부 안에서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지위를 단번에 강화해야 했다[22].
괴벨스는 지배계급이 밀려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써 온 모든 도발 가운데 가장 비열한 도발의 계획을 내놓았다. 제국의회 의장이자 프로이센 경찰의 총지휘자인 괴링은 이 음흉한 계획이 정확히 실행되도록 챙겼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애초에 3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에 돌격대 전체를 베를린으로 진군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국방군을 돌격대에 맞서 출동시키겠다는 동맹자들의 위협에 그 뜻은 꺾였다. 이제 대규모 도발 계획으로, 정권 전체를 차지하고 아무 거리낌 없는 돌격대 테러를 풀어놓으려는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열망에 길을 터 줄 수단을 찾아낸 것이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은 행동에 들어갔다. 독일국가인민당 소속 베를린 경찰청장 멜허 박사는 마그데부르크로 전보되었다. 그 자리에는 민족사회주의자인 퇴역 해군 소장 폰 레베초가 앉았다. 2월 24일,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인 베를린의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이 또다시 경찰의 수색을 받았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은 이미 몇 주 동안 경찰에 점거되어 있었고 아무 성과 없는 수색 끝에 다시 비워졌는데도, 이번에는 갑자기 “중대한 혐의를 입증하는” 자료가 발견되었다. 국회의사당 화재 전날, 모든 부르주아 신문에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의 “비밀”, “지하 통로”, “대역 자료”, “볼셰비키 전복 계획”에 관한 거대한 머리기사가 실렸다. 신문들은 동프로이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철도 테러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이 테러는 나중에 다시는 거론되지 않았다!). 1월 25일[23] 베를린 궁전에서 작은 불이 났는데, 이것이 “공산주의자의 행동”으로 선정적으로 포장되었다. 이렇게 신문에서 신문으로, 날마다 대중은 “큰 일격”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정부가 도발을 꾸미고 있다는 믿을 만한 소식을 받았다. 의원 빌헬름 피크가 스포츠 궁전에서 이에 관해 연설했다. 그는 선거 며칠 전에 공산당 금지를 끌어내려고 나치가 히틀러 암살 기도를 꾸며 내거나 다른 도발을 벌일 계획을 폭로했다. 공산당 제국의회 교섭단체도 외국 언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비슷한 성명을 냈다.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신문들은 명령받은 대로 혁명적 노동자들을 향한 선동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독일에서 정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터질 듯이 팽팽해진 정치 상황을 느꼈다. 누구나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때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라디오가 독일의 모든 방송국을 통해 알렸다.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다!”
3 판데르루버, 그 도구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밤, 독일 국회의사당의 회의장과 돔이 불길에 휩싸인다. 한 회랑에서 방화범 가운데 한 명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붙잡힌다. 관영 프로이센 공보처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네덜란드 공산당 당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라디오, 전신, 전화, 신문과 통신사가 히틀러 정부의 명령을 받아 온 나라에 고함친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국회의사당 안에서 이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발견된 일은 히틀러 정부에게 형식상·법률상의 구실이 되었다. 독일 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과 유대인에 대한 전대미문의 포그롬, 대량 체포, 단체 금지, 고문과 살해의 구실이. 이 일들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서 히틀러 독일이라는 이름은 가장 잔혹한 야만이라는 개념과 하나로 묶였다. 이 판데르루버는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불타는 국회의사당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3.1 판데르루버의 젊은 시절
1909년 1월 13일, 행상인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가 레이던 호적 사무소에 사내아이의 출생을 신고한다. 증인으로는 실업자 이사크 코르넷과 거리 청소부 헤라르뒤스 뵈르서가 선다.
아이는 마리뉘스라는 이름을 받는다. 어머니 페트로넬라 판한덜에게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와의 결혼은 두 번째였다. 노르트브라반트의 부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식민지군 하사관 판푀터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다. 판푀터는 식민지에서 얻은 병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의 미망인은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던에서 가게를 꾸리던 행상인 판데르루버와 혼인했다. 이 결혼에서 아들 셋이 태어났다. 마리뉘스는 페트로넬라 판한덜의 일곱째이자 막내였다.
판데르루버 부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남편은 일 때문에 며칠씩, 몇 주씩 근방 마을을 돌며 농민들에게 방물을 판다. 거래는 대개 여관이나 선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술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거래를 성사시키는 수단일 뿐이던 술이 장사하는 시간 밖에서도 벗이 된다.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는 술에 빠져든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장사로 번 돈은 대부분 선술집으로 흘러 들어간다. 살림 돈은 어쩌다, 그것도 조금밖에 내놓지 않는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돈은 어머니가 벌어야 한다. 낮에는 레이던의 작은 가게 계산대 뒤에 서고, 저녁에는 집안 살림을 챙기고 깁고 꿰매고 바느질을 한다. 그녀는 늘 심한 천식에 시달린다. 의사는 기후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은 브레다로, 나중에는 헤르토헨보스로 이사한다. 이사하고 얼마 안 되어 프란시스퀴스 코르넬리스 판데르루버는 가족을 떠난다. 그는 도르드레흐트에 자리를 잡고 작은 방물 가게를 여는데, 지금도 그 가게를 하고 있다.
페트로넬라 판한덜은 브레다에서, 나중에는 헤르토헨보스에서 작은 장사를 이어 간다. 아이들을 가르칠 시간은 그녀에게 없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는 것뿐이다. 시골에서, 친정에서부터 경건한 생활에 길든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소박한 믿음을 심어 주려 애쓴다. 소년 마리뉘스는 헤르토헨보스에서 포르후버 목사의 개신교 학교에 다닌다. 그는 글쓰기를 겨우겨우 배운다. 종교 수업에서는 손꼽히는 우등생이다. 그는 일요일마다 어머니와 형제들 곁에서 터벅터벅 교회로 간다.
판데르루버의 집에는 숨 막히는 분위기가 감돈다. 벽에 걸린 성화들은 경건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운다. 어머니는 끼닛거리를 살 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헤르토헨보스의 작은 가게로는 아들 여섯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아들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노동자가 되는 것. 출신과 교육 때문에 그 결심은 쉽지 않다. 판데르루버의 집은 쓰라린 가난에 시달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장사꾼의 갈망과 희망이 가득한 소시민의 집이다. 굶주림이 젊은 판데르루버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몰아넣는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공장들을 메우고, 농업 노동자로서 농가들을 메우는 수십만 대군 속으로 섞여 든다. 섞여 들기는 하지만 동화되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도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형제나 이복형제 가운데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소시민적 환상의 벽에 부딪힌다.
3.2 어머니의 죽음
마리뉘스의 이부누나는 레이던에서 세탁 노동자 스나르데인의 아내로 산다. 1921년 4월 16일 그녀는 어머니가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소식을 받는다. 어머니는 마리뉘스가 이부누나의 집에서 자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마리뉘스는 열한 살 소년으로 레이던 근처 우흐스트헤이스트에 있는 세탁 노동자 스나르데인의 집에 오게 된다. 비좁은 집에서 뛰노는 스나르데인네 세 아이에게 마리뉘스가 맏이로 끼어든다.
옛 동급생들의 이야기로 우리는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이미 학교 시절부터 남보다 두드러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안다. 맏이가 대여섯 살인 스나르데인네 아이들 사이에서 첫째가 되기란 쉬운 일이다. 마술 네 가지면 지배권을 손에 넣기에 충분하다. 마리뉘스는 그 지배권을 가혹하게 휘두른다.
누나는 임종하는 어머니에게 마리뉘스를 신앙 안에서 키우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다시 일요일마다 — 이번에는 누나와 그 아이들과 함께 — 교회에 간다. 누나의 말로는 그 무렵 그는 경건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그를 교회로 이끈 것이 정말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뿐이었을까? 혹시 그는 성직자가 신자들 사이에서 누리는 권세에 마법처럼 끌렸던 것은 아닐까? 그 무렵 그의 마음속에서는 성직자가 되겠다는, 자기를 무조건 따르는 신자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열두 살 소년인 그는 자기가 걸으려는 성직의 길에 대해 자주, 길게 이야기한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면 그는 곧잘 설교자 흉내를 낸다. 친구들은 설교를 좋아하는 그를 놀려 댄다.
친구들은 또 그가 여자아이들을 수줍어하는 것을 두고도 놀린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이 특이한 점은 너무나 두드러지고 눈에 띄었기에, 옛 학교 친구들은 지금도 한결같이 그 이야기를 한다. 그는 아무리 해도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사랑을 남학생들과 또래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찾았다. 성직의 길에 들어서려면 오랜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에는 돈이 든다. 세탁 노동자 스나르데인의 현실 감각 덕분에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열네 살에 돈벌이에 나선다. 그는 어느 가게의 견습생이 되어 그곳에서 두 해 동안 일한다. 가게 문을 닫은 뒤에는 가톨릭 야학에 다닌다. 개신교 교육을 받고 자란 마리뉘스는 여기서 지금까지 낯설던 세계와 만난다.
판데르루버는 가게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장사꾼 기질을 물려받은 것은 분명하고, 계산대 뒤에 서서 손님에게 되도록 많이 파는 일이 즐겁기도 하지만, 앞날의 전망이 너무 보잘것없다. 마리뉘스는 매형 스나르데인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새 직업의 가능성을 따져 본다. 매형 스나르데인의 말에 따르면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가장 대담한 계획과 가장 소박한 계획을 나란히 세웠다. 꽃 가게를 차리겠다 — 세계 일주를 하겠다 — 그의 꿈은 그만큼 넓은 폭에 걸쳐 있다. 그 바람들은 미장이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끝난다.
열여섯 살의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소년으로, 체격이 얼마나 우람한지 친구들은 그를 “뎀프시”[24]라고 부른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자기 힘을 과시한다. 그러니 이제 함께 일하게 된 미장이 직인들로서는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여자들을 그토록 수줍어하는 것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마리뉘스의 직장 동료들은 그 시절 그와 나눈 대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그들이 대화를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많은 것을 잊었고, 하찮은 것이 기억에 남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모두 한결같이 말한다. 그들은 모두 남보다 두드러지려는, 남들과 달라 보이려는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욕구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그의 광적인 열망을 이야기한다.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든 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든 친척들의 이야기든 너무나 분명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젊은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허영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3.3 큰 사고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 노동자들과 날마다 부대끼면서 마리뉘스의 삶에는 여러 변화가 생긴다. 지금까지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선 가운데 가장 높은 선이라고 듣고 배웠다. 일요일의 교회 나들이는 그에게 필요한 일이었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질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다른 견해들과 맞닥뜨린다. 일하다 쉬는 시간에는 하느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임금 사정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온다. 지금의 질서는 당연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 질서를 뒤엎는 것은 필연이다. 젊은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날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만 소화하지는 못한다. 그도 형제들과 마찬가지다. 그는 노동자가 되지만 소시민으로 남는다.
우연한 일이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점심시간에 동료 둘이 그의 머리에 빈 자루를 뒤집어씌운다. 그러다 석회 덩어리가 그의 눈에 들어간다. 마리뉘스는 세 주 동안 눈병을 앓는다. 얼마 뒤 그는 훨씬 더 심한 사고를 또 겪는다. 양동이에서 다시 석회가 튀어 눈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심한 눈병을 얻어 다섯 달 동안 레이던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세 번 수술을 받는다. 병원을 나설 때 그의 두 눈은 시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 실명할 위험이 있다.
눈병은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질인 명예욕과 허영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늘 첫째가 되려 애쓰고 남보다 두드러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젊은이 앞에 갑자기 눈이 멀 위험이 닥친다. 그는 삶을 끝까지 살아 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햇빛이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몰아댄다. 그의 목표?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있는가? 그는 길을 보고 있는가? 삶의 목표와 의미는 그에게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를 지배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생각,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려는” 욕망이다.
그 큰 사고를 당하기 얼마 전,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레이던의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한다. 네덜란드 공산당은 그 무렵 조직을 막 갖추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레이던의 청년동맹도 이제 막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동맹에 가입한 것은 운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운동의 힘을 느끼지만, 공산당이 당원들에게 요구하는 꿋꿋함은 지니지 못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공산주의 청년 조직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다. 가입하면서 그는 빨리 출세하리라고 믿는다. 그는 조직에서 자기 야심을 시험할 실험장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바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는 탈퇴서를 쓴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는 레이던의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네 번 탈퇴하고 세 번 다시 가입했다. 탈퇴할 때마다 그에 앞서 지도권을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의 첫 탈퇴는 1929년 1월이었는데, 소년단 조직의 책임자로 임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레이던 청년동맹에 써 보낸 수많은 편지 가운데 하나만 여기 싣는다. 이 편지는 판데르루버의 처신을 잘 보여 준다.
레이던, 1929년 12월 13일.
레이던 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부
상임위원회 앞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확대 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달라는 저의 요청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편지에 이어, 저는 여러분이 확대 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달라는 저의 요청을 대체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거부가 의식적이든 아니든 조직의 관점에서 중대한 오류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H. H. 회의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여러분이 이 거부를 고집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입장과 지부의 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편지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보낸 글과 그 밖에 제가 보낸 두 편의 글을 다시 토론하려면(제 생각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확대 위원회 회의와 이 문제에 대한 최종 표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제 처지가 어떤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반면 제가 바라는 이 회의가 열리지 않는다면 저는 이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러면 이 문제를 당원 총회에 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는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여러분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 일요일에 상임위원회 회의(곧 확대 위원회 회의)를 열자고 제안합니다(이것은 조건입니다). 제가 달리 행동한다면 지부 전체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르크 판로이언의 요구에 대한 제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동봉합니다.
동지적 인사를 보내며
(판데르루버의 서명이 이어진다.)
추신. 이번에 보낸 디르크 판로이언에 관한 성명서만은 빠짐없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3.4 인정을 좇아
큰 사고 이후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삶은 인정받으려는 끝없는 사냥이자 비범한 것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다. 이 들뜬 방황 속에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은 거의 없다. 그는 여러 직업에 손을 대 보지만, 단번에 자기를 맨 앞줄에 세워 줄 한 방을 꿈꾼다. 1927~28년 겨울에는 레이던 역 식당에서 임시 웨이터로, 1928년 여름에는 노르트베이크의 ‘호프 판홀란트’에서 호텔 잡역부로 일한다. 그 사이사이 장사도 한다. 몇 주 동안 혼자 감자 장사를 한다. 그다음에는 노르트베이크와 사선헤임 사이로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는 나룻배의 뱃사공으로 일한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늘 큰 한 방에 대한 생각뿐이다. 1929년 12월, 그는 청년동맹과 또 갈등을 빚는다. 제멋대로 전단을 찍어 자기 이름으로 서명해 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무렵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 자기비판에 빠진 김에 공산주의에 대한 자기 입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이 편지에서 말한다.
“이런 것들은 제가 좋은 볼셰비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 저는 분명히 그렇지 않으며(자본주의와 그에 얽힌 모든 것에 대해 저는 매우 급진적인 입장이지만) 어쩌면 영영 그렇게 될 수 없으리라고 느낍니다. 지금 저는 이따금 진영(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완전히 이방인처럼 느낍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내면은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그의 무정부적 사고, 위로 올라서려는 충동, 규율 없음은 그를 당의 진영 안에서 이방인으로 만든다. 그 당은 당원들에게 가장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며, 대의를 위해 그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3.5 해협 횡단 수영
1930년 여름 판데르루버는 칼레로 길을 떠난다. 돌아와서 그는 칼레에서 토목 인부로 밥벌이를 하면서 해협을 헤엄쳐 건너려고 몇 번 시도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판데르루버가 정말 그런 시도를 했는지 꼼꼼히 조사했다. 우리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도를 했든 안 했든, 이 일화 전체는 판데르루버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그에게 결정적인 것은 성취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바라던 명성은 오지 않는다. 칼레에서 돌아온 판데르루버가 늘어놓으며 뽐내려 한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불신과 비웃음을 산다. 마리뉘스는 1930년에 다시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했지만, 그와 다른 동맹원들 사이의 유대는 점점 느슨해진다. 그사이 조직은 훨씬 탄탄해졌다.
판데르루버는 갈수록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모든 것이 그가 머지않아 조직에서 완전히 떠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3.6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의 집
위테르스터 흐라흐트 56번지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집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레이던 사람과 이 집 이야기를 해 보면, 그것이 특별한 집, 기묘한 사람들이 살고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집을 악덕의 소굴로 여기는 레이던 시민들도 있다. 이 집에는 판제이프라는 이름의 고지식한 부부가 산다. 남편은 낮에 일하러 나가고, 제이프 부인은 살림을 맡는다. 그녀는 이 집의 방 몇 칸을 세놓는다. 방들은 매우 소박하고 편안하지 않다. 세가 싸서 주로 학생과 실업자들이 살았고 지금도 산다. 이따금 매춘부도 산다. 판데르루버는 오랫동안 판제이프 부인의 세입자 가운데 하나였고, 이사 나간 뒤에도 거의 날마다 이 집에 드나들었다. 그와 같은 무렵 학생 피트 판알바다와 운전사 이작 핑크가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에 살았다. 한동안은 “수수께끼 같은” 독일 학생 하나도 판제이프 부인의 세입자였다. 방금 이름을 든 세입자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성질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동성애자였고, 그 가운데 한두 명은 어쩌면 양성애자였다. 그 자체로는 이 사실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언급할 만한 것도 아니다. 우리 보고에서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동성애가 판데르루버를 훗날 독일 여행길에서 나치와 이어 주었기 때문이다.
피트 판알바다는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의 집에서 나간 뒤 결혼했고, 운전사 이작 핑크도 지금은 한 여자와 함께 산다. 그렇지만 판데르루버가 이 두 사람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도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작 핑크는 우리 통신원에게 판데르루버와 자주 한 침대에서 잤다고 말했다. 피트 판알바다는 레이던의 한 대학 교수와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 판데르루버는 그 본성 전체로 보아 동성애자다. 그의 태도는 계집애 같고, 그가 여자들 앞에서 삼가고 수줍어한다는 것은 수많은 증언으로 뒷받침되며, 남자들에게 기대고 애정을 바라는 그의 욕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위테르스터 흐라흐트의 집 사정을 잘 알고 판데르루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 네덜란드의 한 작가는, 판데르루버가 자기에게 다가오고 싶어 하면서도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느낌을 늘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판데르루버의 동성애에 대한 증거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판데르루버는 여행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떠돌이 직인과 젊은 노동자들과 어울렸다. 국회의사당 화재와 관련하여 그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자, 독일의 한 젊은 노동자가 우리를 찾아왔다. 이 젊은 노동자는 1931년에 판데르루버와 함께 한 유스호스텔에서 밤을 보냈다. 그는 판데르루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이 대화에 대해 공증인 앞에서 진술해 조서를 남겼다. 그 조서 가운데 여기서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 네덜란드 노동자는 제 쪽으로 바싹 다가왔습니다. 그는 여러 번 제 성기를 만지려 했습니다. 제가 그런 일에는 응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야 그는 그만두었습니다.”
이 책에 맡겨진 과제는 판데르루버의 삶을 마지막 세부까지 밝혀낼 것을 요구한다. 판데르루버의 동성애는 그의 인정 욕구와 더불어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여기서 사생활 이상의 것이다.
3.7 유럽 “연구 여행”
해협 횡단 수영은 성취로서도, 유명해질 계기로서도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의 머릿속에 레이던 사람들을 감탄시킬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판데르루버는 유럽과 소련을 두루 도는 대규모 “노동자·스포츠·연구 여행”을 계획한다. 그는 자기와 여행 동반자 홀베르다의 모습을 담은 엽서를 찍게 한다. 그에게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엽서다. 두 젊은이의 머리 위에서는 신비로운 별 하나가 빛난다. 이 엽서에는 판데르루버와 H. 홀베르다가 유럽과 소련을 여행하려 한다는 말이 네 가지 언어로 적혀 있다.
그들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을까?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판데르루버의 친구들은 홀베르다가 레이던에서 판 엽서 대금을 가로챘기 때문에 다툼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홀베르다의 친구들은 판데르루버가 엽서를 판 수입을 제 몫으로 써 버렸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홀베르다가 레이던에 남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판데르루버는 이 여행을 혼자서라도 할 생각이었을까? 그는 실제로 1931년 4월 독일로 갔다. 엽서에는 1931년 4월 14일 레이던에서 여행을 떠난다고 적혀 있다. 우리는 판데르루버가 포츠담에서 홀베르다 집안에 보낸 그림엽서 한 장을 가지고 있다. 이 엽서의 날짜는 1931년 4월 14일, 곧 레이던에서 도보 여행이 시작되었어야 할 바로 그날이다. 1931년 4월 28일 판데르루버는 베스트팔렌의 그로나우에서 체포된다. 자기와 친구 홀베르다가 찍힌 엽서를 길거리에서 팔았기 때문이다. 뮌스터 법원은 무허가 엽서 판매 혐의로 그에게 벌금형을 선고한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에 히틀러 정부는 판데르루버가 1931년 그로나우에서 공산주의 문서를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퍼뜨렸다. 그 공산주의 문서란 판데르루버와 홀베르다가 찍힌 엽서 한 장이었다.
5월 초에 판데르루버는 다시 레이던에 와 있었다. 유럽 여행은 “해협 횡단 수영”과 똑같이 끝났다.
3.8 공산주의 청년동맹 탈퇴
1931년 4월 초, 그가 처음 독일로 떠나기 얼마 전에, 판데르루버와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겉으로 드러난 결별도 이루어졌다. 판데르루버는 이미 오래전부터 레이던의 젊은 공산주의자들과 아무것으로도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청년 조직과 공산당에서 제명될 처지였다. 그는 그보다 먼저 탈퇴를 선언했다. 그날부터 그는 기회만 생기면 언제나 네덜란드 공산당과 싸웠다.
그가 마음속으로 공산주의 운동과 갈라선 것은 이미 두 해 전이었다. 1929년 1월 21일, 어떤 갈등으로 탈퇴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비관주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그것과 싸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겉모습이 내면의 상태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 한 젊은이의 기묘한 모습이 드러난다. 힘세고, “뎀프시”라고 불릴 만큼 힘세고, 건강하고, 겉보기에는 삶을 정복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그가 삶을 감당할 힘은 전혀 없다. 판데르루버와 자주 상대했던 레이던의 작가 E. 크뉘털은 그를 대략 이렇게 묘사한다.
“판데르루버와 어떤 문제를 놓고 오래 토론하면 그는 동의합니다. 그를 설득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튿날 판데르루버에게서 편지가 옵니다. 자기는 원래 입장을 고수한다는 편지가.”
이 고집과 나란히, 동성애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묘한 나약함이 있다. 그 곁에는 거짓말하고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판데르루버를 아주 잘 아는 판제이프 부인은 그가 진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미장이 하르터펠트, 운전사 이작 핑크와 그 형제 코스 핑크도 판데르루버의 허영을 확인해 주는데, 그 허영 때문에 그는 자주 거짓말과 과장을 한다.
3.9 판데르루버와 벨 박사의 만남
1931년 봄 첫 독일 여행에서 레이던으로 돌아온 판데르루버는 친구들에게 어떤 신사 이야기를 했다. 그 신사가 자기를 자동차에 태우고 먼 길을 함께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판데르루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라이프치히에서 왔다는 이 신사를 그가 지어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그러나 판데르루버가 이 첫 독일 여행에서 한 사내를 알게 되었고, 그 만남이 판데르루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만은 안다.
이 무렵 귀화한 스코틀랜드인 게오르크 벨 박사가 민족사회주의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약 1년 뒤 몇몇 친구와 함께 일부 돌격대 지휘관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아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그가 살해된 경위는 다른 곳에서 서술한다. 그의 친구 몇 사람이 벨 박사의 인맥과 민족사회주의당 안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에 관해 우리에게 중요한 진술을 했다. 벨 박사의 친구 W. S. 씨는 진술조서에서 벨과 판데르루버가 알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혔다. 조서의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 기억이 맞다면 1931년 5월이었는데, 벨은 마음에 쏙 드는 네덜란드 젊은 노동자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베를린이나 포츠담 근처를 자동차로 달리다가 마주쳤을 겁니다. 길에서 떠돌이 직인을 만나 차에 태웠다는데, 그게 네덜란드 젊은 노동자였습니다. 그 젊은 네덜란드인은 나중에 뮌헨으로 벨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벨은 그를 레뉘스 또는 리뉘스라고 불렀습니다. 그와 자주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판데르루버는 벨 박사와 줄곧 편지를 주고받았다. 1931년 9월에는 벨과 직접 만나는 관계를 다시 이어 갔다.
3.10 뮌헨 여행
판데르루버는 레이던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1931년 9월 그는 다시 독일로 길을 떠난다. 그는 친구 코스 핑크에게 자기 앞으로 나오는 주 7휠던의 장애 연금을 대신 받아 맡아 두라고 부탁한다.
라인 지방을 떠돌던 판데르루버는 라인강 변 바하라흐에서 오토바이를 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같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헤이그 블룸폰테인스트라트 24번지에 사는 전차 운전사 플루흐크였다. 플루흐크는 마리뉘스를 사이드카에 태워 준다. 두 사람은 로텐부르크오프데어타우버에서 밤을 보낸다. 플루흐크는 호텔에서, 마리뉘스는 유스호스텔에서. 플루흐크는 우리 통신원에게 판데르루버와 나눈 대화를 몇 가지 알려 주었다. 플루흐크가 독일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판데르루버는 일자리를 찾는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편이 더 쉽지 않으냐고 되묻자, 판데르루버는 독일에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차 운전사 플루흐크는 우리 통신원과 이야기하면서, 그 단호함에 몹시 놀랐다는 점을 힘주어 말했다.
플루흐크는 로텐부르크를 거쳐 뮌헨으로 계속 달렸다. 그는 판데르루버를 뮌헨까지 태워 주었다. 두 사람은 시 경계에서 헤어졌다.
판데르루버는 뮌헨에 며칠 머물렀던 것이 틀림없다. 돌아온 뒤 친구들에게 이 도시를 아주 자세하고 길게 묘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겪은 큰일들과 그곳에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 이야기도 여러 번 했다. 그 진술조서를 우리가 이미 한 대목에서 공개한 바 있는 그 청년 노동자는 조서에서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 네덜란드인은 뮌헨에서 아주 잘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B. 박사가 자기를 돌봐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B. 박사를 통해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을 내비쳤습니다. 그는 이 B. 박사 이야기를 열광하듯 했습니다.”
이 B. 박사는 다름 아닌 벨 박사, 판데르루버가 뮌헨으로 찾아간 그 사람이다. 벨 박사는 그를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무엇보다 히틀러의 참모장 룀에게도 소개했다. 당시 벨 박사는 아직 히틀러의 참모장 룀의 외교 정책 고문이었고 룀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얼마나 가까웠던지, 나중에 룀은 그에게 국기단 소령 마이어와 줄을 대라는 은밀한 임무를 맡겼다. 당시 룀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의 페메(비밀 처형)에 쫓기고 있다고 느꼈고, 벨의 주선으로 마이어에게서 보호를 구했다. 이 모든 사실은 1932년 10월 룀 대위가 사회민주당 신문 《뮌헨 포스트》를 고소했을 때 공개 법정에서 마이어와 벨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벨은 룀의 외교 정책 고문이었을 뿐 아니라 연애 문제의 심복이기도 했다. 《뮌헨 포스트》와 다른 신문들은 1932년에 룀이 젊은 남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공개했고, 거기서 룀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벨 박사는 룀의 뚜쟁이였다. 그는 룀이 젊은 남자들과 맺은 관계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 대부분을 그 자신이 룀에게 데려다주었기 때문이다. 벨은 자기가 룀에게 데려다준 젊은이들을 모두 꼼꼼히 명단으로 적어 두었다. 벨은 머잖아 자기와 민족사회주의 지도자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푈키셔 베오바흐터》 편집장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심복이었고, 민족사회주의당의 지시로 데테르딩[25]과 관계를 튼 뒤로는 데테르딩의 끄나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적들이 있었다. 벨은 이 명단으로 룀을 영원히 고분고분하게 만들려 했다. 이 명단은 언제든 룀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가 될 터였다.
그 명단은 오늘날 더는 남아 있지 않다. 1933년 4월 벨은 살해 위협을 피해 오스트리아 쿠프슈타인으로 달아났지만, 그곳에서 돌격대 무리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그때 벨이 지니고 있던, 민족사회주의당을 겨냥해 쓰려던 약점 서류들이 모조리 강탈당했다. 그 명단도 함께.
벨의 친구 W. S.는 그 명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벨 박사는 비밀 금고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습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게 룀의 연애 명단이야. 이걸 공개하는 날이면 룀은 끝장이지.’ 그는 내게 명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름이 서른 개쯤 적혀 있었습니다. ‘리뉘스’라는 이름 하나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 뒤 괄호 안에 ‘판데르’로 시작하는 네덜란드 성이 적혀 있었습니다.”
“리뉘스”는 마리뉘스의 준말이다. 룀의 연애 명단에는 판데르루버의 이름도 있다.
판데르루버는 뮌헨에서 출발해 요란하게 예고했던 그 “노동자·스포츠·연구 여행”의 일부를 실제로 했다. 우리는 그가 크라쿠프에서 보낸 엽서를 한 장 갖고 있다. 우리 통신원은 그가 부다페스트에서 한 친구에게 쓴 편지와 베오그라드에서 보낸 엽서도 보았다. 1932년 1월이나 2월에 레이던으로 돌아온 판데르루버는 여행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는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에 젊은 떠돌이 직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누이가 부다페스트의 사창가에 있었다고 한다. 판데르루버는 그 아가씨를 사창가에서 구해 내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에게 사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와 한방에서 하룻밤을 자면서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그러고는 길을 떠났다고 한다. 구원받아야 할 아가씨 이야기는 전형적인 동성애자의 이야기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이것을 「파르치팔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3.11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강
판데르루버의 여행담 가운데, 그의 친구 여럿이 우리 통신원에게 한결같이 전해 준 한 대목은 특히 짚어 둘 만하다. 판데르루버는 자기가 폴란드에 가서 소비에트 러시아 국경까지 갔었다고 말했다. 거대한 강 하나가 폴란드와 소련을 가르고 있다고 했다. 루버는 소련으로 건너가려고 그 강을 헤엄쳐 건너려 했다고 한다. 폴란드 국경 수비병들의 총격에 쫓겨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거기서 강 건너편의 소련 초병들이 보였다고 한다. 그다음 추방되었다고 했다.
판데르루버의 친구들은 폴란드와 소련 사이에 거대한 국경 강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 통신원에게서 듣고 몹시 놀랐다. 이 이야기 역시 루버의 거짓말 버릇과 허풍을 잘 보여 준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판데르루버는 소련 땅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다. 그토록 허풍을 떨고 싶어 하던 그조차 자기가 소련에 가 보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우리 통신원이 본 엽서와 편지들은 판데르루버가 1931년 마지막 몇 달과 1932년 초에 실제로 헝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의 몇몇 도시에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는 여행하면서 부유한 신사들을 여럿 사귄 듯하다. 돌아와서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떤 신사가 새 구두를 선물해 주었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또 다른 신사가 차표를 사 주었다고 말했다. 벨 박사는 판데르루버를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루버는 그때부터 그들과 줄곧 연락을 이어 갔다. 그의 지인들은 루버가 독일에서 편지를 아주 많이 받았다고 한결같이 전한다. 루버는 독일에서 온 편지들을 친구와 지인들에게 숨기려고 늘 전전긍긍했다.
3.12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손님으로
판데르루버는 1932년 1월이나 2월에 레이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랄 만큼 빨리 돌아왔다. 판제이프 부인의 말로는, 그가 베를린에서 엽서를 보냈는데 엽서가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그 자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베를린에서 레이던까지 기차나 자동차로 온 것이 틀림없다. 그 돈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두 달쯤 뒤 판데르루버는 세 번째 독일 여행에 나섰다. 떠나기 전 그는 구호 기금 사무소와 충돌했다. 연금 인상을 거절한 구호 기금 사무소에 가서 유리창 몇 장을 깨뜨린 것이다. 네덜란드 법원은 그에게 징역 3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형을 살기 전에 독일로 떠났다. 이 여행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베를린과 작센에 갔다는 것이다. 1932년 6월 1일과 2일 그는 쇠르네비츠(작센주 마이센 관구)에서 묵었고, 그곳에서 읍 의회 의원 조머, 원예업자 슈만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두 사람 다 민족사회주의자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 읍 의회 의원 조머는 브로크비츠 읍장에게 판데르루버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고 알렸다. 마이센 관구청의 행정관 헤르틀 박사가 이 사실을 조서로 남겼다. 조서는 작센 내무부로 넘어갔고, 작센 내무부는 제국 내무장관 프리크에게 비망록으로 이를 알렸다. 이 사실은 작센 주의회의 한 사회민주당 의원이 낸 질의로 알려졌다. 어느 쪽에서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 질의를 보도한 신문들은, 읍 의회 의원 조머가 판데르루버의 쇠르네비츠 체류를 보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 보도 역시 반박되지 않았다. 판데르루버는 쇠르네비츠에 머문 뒤에도 며칠 더 독일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네덜란드로 돌아오던 그는 6월 21일 위트레흐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위트레흐트에서 9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형을 살러 헤이그('s-Gravenhage)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3.13 판데르루버, 공산당 공격의 수위를 높이다
1932년 10월 2일 판데르루버는 헤이그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레이던으로 왔다. 그해 말까지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했다. 도르드레흐트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암스테르담과 헤이그에도 갔다. 이 모든 도시에서 그는 여러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그의 연설은 공산당에 대한 맹렬한 공격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판데르루버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증거를 갖고 있다. 1932년 10월 6일 그는 레이던 곡물 거래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는데, 이 집회의 주 연사는 네덜란드 파시스트 지도자 J. A. 바르스였다.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히틀러 언론이 판데르루버를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자, 이 집회에 왔던 사람 몇이—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은 이들이다—공증 조서로 이 집회에서 판데르루버가 보인 태도를 증언했다. 판데르루버는 그때 파시스트 지도자가 방해받지 않고 말하게 두자고 나섰다. 그는 장내에 있던 반파시스트들이 바르스의 말을 끊으려는 시도를 모두 막아섰고, 자기 연설에서도 파시스트를 겨냥한 공격은 일절 하지 않았다. 공증 조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26]
천구백삼십삼 년 삼월 십사일 오늘, 레이던에 주재하는 공증인인 나 헨드릭 마리뉘스 마르퀴서 앞에, 뒤에 이름을 적는 두 증인이 입회한 가운데 다음 사람들이 출석하였다.
1. 피터르 다니엘 하암커 씨, 목수, 레이던 롬복스트라트 11번지 거주.
2. 야코바 마리아 판베이크 양, 가정부, 레이던 레벤달 156번지 거주.
3. 빌헬뮈스 플라스메이어르 씨, 사환, 레이던 레벤달 63a번지 거주.
4. 요하너스 코르넬리스 뵈르서 씨, 배관공, 레이던 드리프트스트라트 13a번지 거주.
5. 야코뷔스 마레이트 씨, 도장공, 레이던 프린선스트라트 36번지 거주.이들은 공증인인 나와 뒤에 이름을 적는 증인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출석인들은 모두 천구백삼십이 년 십월 육일 레이던 곡물 거래소에서 열린 파시스트 공개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이 집회에서는 파시스트 지도자 J. A. 바르스가 연사로 나섰다.
출석인들은 이 집회에 당시 레이던에 거주하던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씨가 참석해 있었음을 확인하였으며, 그는 자신들이 보기에 이 집회에서 파시즘에 결코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출석한 많은 노동자가 파시스트 지도자 바르스의 연설에 불만을 표시하자, 그는 의자 위로 뛰어올라 발언권을 얻은 뒤 그들에게 연사의 말을 조용히 들으라고 당부하였다.
둘째, 그는 결코 네덜란드 공산당의 이름으로 하지 않은 토론에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파시스트들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일절 삼갔다. 그가 말한 바로는 파시스트들도 결국 노동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 증서를 작성한다.
원본으로 작성하여 첫머리에 적은 날짜에 레이던에서, 우흐스트헤이스트에 거주하는 공증인 후보 클라스 홀트캄프 씨와 레이던에 거주하는 무직 프레데릭 요하너스 란트자트 씨를 증인으로 하여 집행하였다. 두 증인은 출석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증인인 나와 면식이 있다.
낭독한 뒤 곧바로 이 증서에 출석인, 증인, 공증인인 나가 서명하였다. P. D. 하암커, J. M. 판베이크, W. 플라스메이어르, J. C. 뵈르서, J. 마레이트, K. 홀트캄프, F. J. 란트자트, H. M. 마르퀴서.
천구백삼십삼 년 삼월 십오일 레이던에서 등기, 제8권 40장 17번, 한 장, 정정 기재 하나. 수수료 일 휠던 오십 센트(f 1.50) 수령. 수령인, 드코닝.
등본으로 발급함. [공증인 H. M. 마르퀴서 인장, 레이던] [서명]
우리가 다른 곳에 전문을 싣는 또 다른 보고서는 1932년 12월 헤이그에서 열린 파업 운전사 집회에서 판데르루버가 보인 행태를 전한다. 여기서 판데르루버는 앞선 집회들에서보다 한층 더 나아갔다. 그는 공산당을 극렬하게 공격했다. 공산당의 정책을 더없이 날카로운 말로 비난했고, 파업 중인 운전사들에게 공산당의 뜻을 거슬러 테러 행동을 벌이라고 부추겼다. 이 집회 참석자 스무 명가량이 조서를 작성해 판데르루버의 행태를 자세히 증언했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정당에 속해 있다. 몇몇은 당적이 없다. 이들 모두가 이 집회에서 판데르루버가 한 연설이 공산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는 데 한목소리를 낸다. 이 참석자들의 보고서는 다음 장에 실려 있다.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온 뒤 판데르루버의 행태에는 한 줄기 곧은 선이 그어져 있다. 그는 집회를 거듭할수록 당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높인다. 1932년 마지막 몇 달 동안 그가 연단에서 내세운 논거들은 뚜렷이 민족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다. 증인들은 그가 연설에 반유대주의적 언사를 끼워 넣었다고 전한다. 그는 민족사회주의 선전의 어휘에서 그대로 가져온 표현으로 말했다. 그가 연설에서 “약탈하는” 자본과 “창조하는” 자본을 구분했다는, 다시 말해 민족사회주의의 용어와 꼭 맞아떨어지는 용어를 썼다는 진술들이 있다. 적어도 1932년 마지막 몇 달 동안 판데르루버가 민족사회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있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환멸에 빠진 소시민은 “제 집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3.14 1933년 2월, 마지막 독일 여행
1933년 1월 판데르루버는 레이던 병원에서 다시 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눈병이 더 나빠져 있었다. 그는 4주 동안 입원했다. 그 기간에 그는 독일에서 편지를 많이 받았다. 2월 중순쯤 그는 퇴원했다. 그때 히틀러는 이미 독일 총리였다. 판데르루버는 몇몇 지인에게 독일에 가야 한다고 말했고, 이번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음을 내비쳤다. 판데르루버의 지인 몇 사람은 그가 독일 친구들이 어서 독일로 오라고 재촉한다고 말했다고 우리 통신원에게 한결같이 밝혔다. 판데르루버가 그때 이미 자기가 “큰일”에 쓰이도록 점찍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는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이 일자리와 자리를 마련해 주리라고 기대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번 독일 여행에 큰 기대를 걸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떠나기 직전 판제이프 부인과 나눈 대화도 이를 말해 준다. 그녀는 우리 정보 제공자에게 이 대화를 전했다. 판데르루버는 그녀에게 여권 기한이 곧 끝난다고 말했다. 그녀는 꼭 가야 하느냐고, 레이던에 남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판데르루버는 독일에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대답했다. 여권은 이번 한 번, 마지막으로만 쓰면 된다고 했다.
판데르루버는 1933년 2월 중순 레이던을 떠났다. 1933년 3월 2일 자 《포시셰 차이퉁》 보도에 따르면, 그는 2월 17일 베르더 근처 글린도에서 묵었고 2월 18일 베를린으로 계속 갔다. 베를린에서 그는 벨의 주선으로 알게 된 민족사회주의자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곧바로 헬도르프 백작을 둘러싼 무리와 다시 연락을 텄다.
3.15 도구 판데르루버
2월 27일 판데르루버는 불타는 국회의사당에서 체포된다. 화재의 불길은 한 편의 기만극의 배경이 되고, 몇 시간 동안 그 주인공은 판데르루버다. 그다음 그는 진짜 주연들에게 무대를 넘겨주어야 한다. 진실의 탐조등이 거짓의 어둠을 찢고, 판데르루버를 도구로 쓰려 했던 자들을 무자비한 빛 속으로 끌어낸다. 괴링과 괴벨스를.
왜 판데르루버가 도구로 골라졌는가? 판데르루버는 1931년 4월까지 네덜란드 공산당원이었다. 괴링과 괴벨스의 하수인들은 이 사실 하나면 국회의사당 화재의 죄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뒤집어씌우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판데르루버가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맺은 동성애 관계,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기대고 있던 처지가 그를 방화범들의 뜻에 매인 고분고분한 종으로 만들었다.
판데르루버의 네덜란드 국적은 바라던 덤이었다. 그 덕에 괴링과 괴벨스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국제적 음모로 꾸며 내기가 한결 쉬웠다. 괴링과 괴벨스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국제 공산주의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려 했다. 그래서 세 불가리아인도 국회의사당 화재와 아무 관련이 없었는데도 체포되어 공범으로 몰렸다.
이 모든 이유로 판데르루버는 방화의 도구로 골라졌다.
음모의 주역들을 보라.
방화 계획을 짜낸 자는 거짓과 도발의 광신적 투사, 괴벨스 박사.
작전을 지휘한 자는 모르핀 중독자, 괴링 대위.
방화조의 인솔은 페메 살인자에게 맡겨졌다. 에트문트 하이네스.
도구는 작고 반쯤 눈먼 남창이었다.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1886년 시카고 경찰이 돈으로 산 도발자들을 시켜 폭탄 테러를 연출해 많은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을 때, 그 도발이 밝혀지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27] 도구들을 잘 고른 것이다. 국회의사당 화재 뒤에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확신을 온 세계에 심어 주기에. 도구 판데르루버는 너무 잘못 고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