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1989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강대국은 왜 국경 너머의 수렁으로 걸어 들어갔는가?

1979년 12월, 소련은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우스티노프·그로미코가 주도한 이 결정은 짧은 안정화 작전으로 기획됐으나, 무자헤딘의 저항과 미국·파키스탄의 지원 속에서 10년에 걸친 소모전이 됐다.

왕정의 종말에서 4월 혁명까지: 전쟁의 무대가 된 나라

197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1974년 세계은행 추산 1인당 GNP는 70달러로, 83개 저개발국 중 73위였다. 1971~1972년의 극심한 가뭄은 이 취약한 경제를 더욱 갉아먹었다. 인구의 약 98%가 무슬림(80% 수니파, 18% 시아파)이었고, 파슈툰족이 약 55%, 타지크족이 약 20%를 차지하는 다민족 사회였다. 문자해독률은 10%에 불과했고, 카불의 도시 엘리트와 전통적 부족 질서가 지배하는 농촌 사이의 간극은 깊었다.

1933년부터 통치해 온 무함마드 자히르 샤 국왕의 입헌군주제는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1964년 헌법이 약속한 '민주주의의 10년'은 정부와 의회가 서로를 보이콧하는 교착 상태, 연이은 총리 교체, 그리고 무능한 중앙정부로 귀결됐다. 1973년 7월 17일, 국왕의 사촌이자 1953~1963년 총리를 지낸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자히르 샤의 이탈리아 요양 중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우드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쿠데타의 성공에는 두 세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나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좌파 장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1965년 창립된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이었다. PDPA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이끄는 급진적 칼크파와 바브라크 카르말이 이끄는 온건한 파르참파로 1967년 분열되어 있었다. 칼크파는 주로 농촌 출신 파슈툰족 교육자와 하급 군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파르참파는 도시 중산층·타지크족·지식인을 기반으로 했다. 두 분파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했으나, 칼크파가 즉각적인 혁명을 요구한 반면 파르참파는 점진적 개혁과 '통일전선'을 주장했다.

소련은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원조국이었다. 1954년 이후 소련은 군사 훈련과 장비를 제공했고, 1973년까지 아프간 현역군의 3분의 1이 소련 땅에서 훈련을 받았다. 소련은 도로, 교량, 수력발전소(1967년 완공된 나글루 댐은 카불 전력의 40% 이상을 공급), 공장, 학교를 건설했고, 1978년까지 약 70개의 산업·교통 시설을 완공했으며 6만여 명의 아프간 전문가를 양성했다. 소련은 아프간 대외무역의 약 40%를 차지했고 전체 외국 차관의 54%를 제공했다. 지리적으로 소련과 2,350km에 걸친 국경을 접한 아프가니스탄은 냉전의 완충지대였고, 소련 지도부는 이곳을 자국의 안보 울타리로 간주했다.

다우드는 집권 후 점차 좌파 동맹자들을 축출했다. 1974~1975년 사이 파르참파 각료와 주지사들이 대거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다우드의 바라크자이 씨족과 보수적 충성파로 채워졌다. 1975년에는 이슬람주의 조직 '무슬림 청년단'이 판지시르에서 무장봉기했으나 진압됐다. 이 반군 지도부(부르하누딘 라바니, 굴부딘 헤크마티야르 등)는 파키스탄으로 도피했고, 파슈투니스탄 문제로 다우드와 갈등하던 파키스탄은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무자헤딘 지원망의 시초다. 1977년 2월, 다우드는 새 헌법을 통과시켜 대통령 1인 독재체제를 공식화했고, 자신이 창당한 '민족혁명당'만 합법 정당으로 인정했다.

1977년 4월 다우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브레즈네프는 그에게 서방 전문가들을 줄이고 소련에 더 의존할 것을 요구했다. 다우드는 "아프가니스탄은 독립국이며 자국의 이익에 따라 정책을 수행한다"고 응수하며 사실상 선언적 독립을 선포했다. 모스크바는 이에 위기감을 느꼈고, 소련의 중재로 같은 해 7월 칼크파와 파르참파는 10년 만에 재통합되었다. 타라키가 통합 PDPA의 서기장이 되고 카르말은 3인의 중앙위원회 서기 중 하나가 되었다. 양측은 다우드 정권 전복에 합의했고, 하피줄라 아민이 이끄는 칼크파의 군부 침투 작전이 가속화됐다.

촉발제는 1978년 4월 17일, 파르참파 지도자 미르 아크바르 하이바르의 의문스러운 암살이었다. 4월 19일 그의 장례식은 약 3만 명이 참여한 반정부 시위로 변했다. 위협을 느낀 다우드는 4월 26일 타라키·카르말 등 PDPA 지도부 7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체포 직전 가택연금 상태였던 아민이 아들을 통해 군부 내 칼크파 장교들에게 봉기 명령을 전달했다. 4월 27일 아침, 카불 군사기지의 친PDPA 부대가 대통령궁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 다우드와 그의 가족 18명이 궁 안에서 사살되었다. PDPA는 권력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갔다.

한 발의 총성이 바꾼 나라: 하이바르 암살에서 대통령궁 함락까지

1978년 4월 17일, 카불의 한 거리에서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파르참파의 이데올로그 미르 아크바르 하이바르가 권총에 맞아 숨졌다. 이 사건은 PDPA가 정권을 잡는 4월 혁명의 직접적 방아쇠였다. 암살 배후는 오늘날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우드 정권은 성명을 내고 이슬람주의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를 지목했으나, PDPA 지도부는 다우드의 비밀경찰 소행으로 믿었다. 서독 경찰 고문이 후일 미국 외교관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하이바르 암살에 사용된 총기는 몇 주 전 항공노조 파업 지도자를 살해한 것과 동일한 무기였다. 정부 연루설에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하이바르의 장례식은 4월 19일, 2만여 명이 운집한 반정부 시위로 폭발했다. PDPA는 1977년 소련의 중재로 칼크파(타라키)와 파르참파(카르말)가 겨우 재통합한 상태였고, 다우드가 양쪽을 모두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당의 결집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시위 규모에 충격을 받은 다우드는 4월 26일 밤 PDPA 지도부 체포를 명령했다. 누르 무하마드 타라키와 바브라크 카르말이 먼저 붙잡혔고, 이미 가택연금 중이던 하피줄라 아민도 몇 시간 후 수감됐다.

그러나 아민은 체포되기 전 아들에게 이미 작성해둔 봉기 명령서를 건넸다. 칼크파가 수년간 군 장교들 사이에서 구축한 조직망이 즉시 가동됐다. 4월 27일 오전 10시경, 아슬람 와탄자르가 지휘하는 제4기갑여단의 T-55·T-62 전차들이 카불 시내로 진입했다. 압둘 카디르가 MiG-21 전투기를 갖춘 제322항공연대를 장악했고, 사이드 무함마드 굴랍조이는 Su-7 전투기로 대통령궁 아르그를 폭격했다. 다우드는 전날 한 전차 지휘관으로부터 카불 공격 첩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전차들을 궁 주변에 배치해두었는데, 그 조언을 한 지휘관 자신이 이미 칼크파로 전향한 상태였다는 점은 이 쿠데타의 냉혹한 아이러니다.

전투는 밤새 이어졌다. 제7사단이 충성파로 남아 카불로 진격하려 했으나 반란군의 공중 공격에 분산됐다. 4월 28일 새벽, 제444코만도여단의 이마무딘 중위가 이끄는 부대가 아르그 내부로 진입했다. 다우드는 항복을 거부하고 권총을 발사했고, 병사들은 그와 동생 나임, 국방장관 라술리, 내무장관 누리스타니, 부통령 압둘릴라를 사살했다. 다우드가 안전을 위해 궁으로 불러들인 부인과 자녀들도 함께 죽었다. 152년 만에 바라크자이 왕조의 집권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쿠데타 당일 저녁, 반란군은 국영 라디오 방송을 장악하고 '칼크'(민중)가 다우드 정권을 전복했다고 선언했다. '칼크'라는 말 자체가 PDPA의 주도임을 분명히 했다. 사흘간 압둘 카디르의 군사평의회가 통치한 후, 4월 30일 민간정부가 출범했다. 타라키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카르말이 수석부수상, 아민이 외무장관에 올랐다.

소련은 이 쿠데타를 사전에 알았을까? 오늘날까지의 증거는 '알았으나 계획하지는 않았다' 쪽으로 기운다. 모함마드 라피와 굴랍조이가 쿠데타 이틀 전 KGB에 이를 알렸다. 그러나 외무차관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소련 지도부가 로이터 통신의 보도를 통해 쿠데타를 처음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은 이 사건을 '군사 쿠데타'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소련이 개입했다면 썼을 '인민혁명'이라는 표현과 거리가 멀었다. 미 국무부도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이 직접 개입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했다. 정치학자 윌리엄 말리는 소련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다우드와의 긴장 고조가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막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게 만들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혁명 직후의 일시적 화합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민과 와탄자르는 당 간부회의에서 '이 혁명은 칼크의 작품이며 파르참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1978년 7월, 파르참파 지도부는 대거 숙청됐다. 카르말은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됐고, 압둘 카디르마저 투옥됐다. PDPA는 집권과 동시에 스스로를 찢기 시작했고, 그 균열은 1년 8개월 뒤 소련군이 직접 카불로 들어와야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거절에서 침공까지: 열두 통의 요청과 한 장의 수기 결의

1979년 3월, 아프가니스탄 서부 헤라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소련 군사고문과 가족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정권은 소련에 군대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 3월 18일 알렉세이 코시긴은 전화로 타라키에게 "우리 군대가 들어가면 적들의 선전에 이용될 뿐"이라며 거절했고, 이튿날 정치국 회의에서 브레즈네프는 "지금 우리가 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1979년 한 해에만 아프간 지도부는 20차례 이상 소련군 파병을 호소했다. 9월, 타라키가 모스크바 방문에서 돌아온 직후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타라키를 체포하고 10월 9일 살해했다. KGB 카불 주재부는 모스크바에 "아민의 지도는 가혹한 탄압, 그 결과로 저항 세력의 활성화와 결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치국은 이미 3월에 안드로포프, 그로미코, 우스티노프, 포노마료프로 구성된 아프가니스탄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10월 29일 이 위원회는 중앙위원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반혁명의 승리나 아민의 정치적 방향 전환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가을 내내 KGB는 아민이 1960년대 CIA와 접촉했으며 주미국 아프간 대사 시절 미측과 비밀 접촉을 가졌다는 정보를 브레즈네프에게 올렸다. 후일 KGB가 심어놓은 이 정보가 CIA의 '블로백'으로 증폭되었음이 밝혀졌지만, 당시 크렘린은 아민이 '또 하나의 사다트'가 되어 미국 편에 설 가능성을 진지하게 두려워했다. 12월 초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에게 보낸 개인비망록에서 아민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미국이 파키스탄을 통해 개입을 확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국 내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참모총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는 12월 8일 정치국에 소환되어 "제한된 병력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반대했고, 이튿날 브레즈네프 앞에서도 "동방 이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부관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도 제안된 7만5천-8만 병력 규모로는 상황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다. 지상군 총사령관 이반 파블롭스키는 현지 실사를 마치고 "아프간인들은 외국 군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트로이카는 이 모든 경고를 묵살했다. 브레즈네프는 이미 만성 질환으로 실무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였고, 안드로포프가 정보 흐름을 통제했다.

12월 12일, 브레즈네프 집무실에서 안드로포프, 우스티노프, 그로미코, 수슬로프, 체르넨코가 모였다. 체르넨코는 회의 결과를 손으로 직접 썼다. "'A' 정세에 관하여: 안드로포프, 우스티노프, 그로미코 동지가 제시한 고려사항과 조치들을 승인한다." 이 한 장짜리 수기 문서, 단 세 문장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승인한 유일한 공식 문서였다. 포노마료프는 배제됐다. 국제부의 전문가 카렌 브루텐츠가 침공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행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12월 초, 중앙아시아 출신 소련군으로 편성된 '무슬림 대대'(154독립특수목적부대)가 바그람에 비밀 배치됐고, 12월 10일 우스티노프는 투르키스탄군관구와 중앙아시아군관구 예하 부대의 동원을 명령했다. 12월 13일 KGB는 아민 암살을 시도했으나 독약이 코카콜라에 중화되어 실패했다. 12월 25일, 제40군이 국경을 넘었다. 12월 27일 저녁 7시, KGB 특수부대 '제니트'와 '그롬', 그리고 GRU 무슬림 대대가 타지베크 궁전을 습격해 아민을 사살했다. 작전명 '슈토름-333'. 동시에 바브라크 카르말이 카불 라디오를 통해 "아민의 범죄 정권이 전복되었다"고 선언했다. 소련은 국제법적 근거로 1978년 소련-아프간 우호조약을 내세웠지만, 그 조약을 발동하기로 한 결정은 한 방의 사무실에서, 한 장의 종이에, 다섯 줄의 문장으로 끝났다.

12월 31일 안드로포프, 그로미코, 우스티노프, 포노마료프는 중앙위에 "아민은 개인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반소련 중상모략을 퍼뜨렸으며 주아프간 미국 대리대사와 비밀 회동을 가졌다"고 보고했다. 아민이 실제로 미국과 내통했다는 증거는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산맥의 교착: 아홉 번의 공세와 무너지지 않은 골짜기

1980년 봄, 소련군이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 자체가 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제40군은 10만 명을 넘겼지만, 전차와 장갑차에 의존하는 소련군 교리는 힌두쿠시 산맥의 좁은 협곡과 비포장 오솔길에서 무력했다. 무자헤딘은 300여 개의 유격대로 나뉘어 10명에서 20명 단위로 움직이며 매복·지뢰·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소련군이 장악한 것은 국토의 약 20%, 즉 주요 도시와 간선도로뿐이었다.

이 소모전의 축소판이 판지시르 계곡이었다. 카불에서 북쪽으로 70킬로미터, 살랑 고개를 끼고 소련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이 계곡에서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아홉 차례의 소련 대규모 공세를 견뎠다. 첫 번째 공세(1980년 4월)는 소련군 3개 대대와 아프간 정부군 1,000명이 투입되어 나흘 만에 계곡을 휩쓸었지만, 철수하는 순간 매복에 걸렸다. 다섯 번째 공세(1982년 5월)는 1만 2,000명의 병력과 104대의 헬리콥터가 동원된 최대 규모였고, 헬기로 4,200명을 계곡 깊숙이 투하하는 입체 작전이었다. 소련군은 계곡 바닥에 거점을 구축했으나 능선은 여전히 무자헤딘의 손에 있었다. 소련군은 마을을 폭격하고 민간인을 추방하는 초토화로 대응했으나, 마수드는 1983년 1월 소련군과 6개월간의 휴전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일곱 번째 공세(1984년 4월)에서는 투폴레프 Tu-16 폭격기까지 동원한 사전 폭격 뒤 1만 3,000명이 투입되었지만, 마수드는 민간인 3만 명을 미리 대피시키고 계곡 전체에 지뢰를 매설한 뒤 소규모 지연조만 남겼다. 소련군은 계곡을 점령했으나 대가를 치렀다: 682차량화소총연대 1대대는 하자라 계곡에서 하루 만에 60명이 전사했다.

1985년 봄, 소련군은 작전 개념을 바꾸었다. '자베사(Завеса·장막)' 작전으로 11개 차량화소총대대와 특수부대(스페츠나츠) 8개 대대를 동원해 파키스탄에서 무자헤딘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봉쇄하려 했다. 하루에 최대 180곳의 매복조를 배치했고, 실제로는 30~40곳이 매일 가동되었다. 이는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근본적 교착을 깨지는 못했다.

1986년 가을, 전쟁의 공중전 구도가 흔들렸다. CIA가 무자헤딘에 FIM-92 스팅어 지대공미사일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몇 달간 소련 헬리콥터와 수송기의 손실이 급증했고, Mi-24 하인드 공격헬기는 더 이상 저공에서 안전하지 않았다. 소련 공군은 신속히 적응했다: 배기구에 적외선 차폐판을 달고, 플레어를 장착했으며, 작전 고도를 스팅어의 사정거리(약 3,000미터) 위로 올렸다. 고공 폭격은 정확도가 떨어졌고, 위험한 저공 임무는 점점 아프간 정부군 공군에 넘겨졌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1987~1988년 모든 원인으로 손실된 항공기는 35대의 고정익기와 63대의 헬리콥터로, 미측 주장보다 훨씬 적었다. 고르바초프는 2010년 인터뷰에서 스팅어가 자신의 철군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쟁의 향방을 바꾼 것은 미사일이 아니라, 8년 동안 아무리 큰 작전을 펼쳐도 사라지지 않았다가 소련군이 떠나면 다시 계곡을 채우는 게릴라들의 존재 자체였다.

제네바에서 우정의 다리까지: 약속된 철수와 마지막 갈림길

1988년 4월 14일, 소련과 미국이 보증한 가운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제네바 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9개월 안에 전군을 철수하고, 파키스탄은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무기와 전투원의 월경을 차단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미 2월 8일 성명을 통해 철수 시작일을 1988년 5월 15일로 공표한 상태였다.

철수는 두 단계로 진행됐다. 첫 3개월 동안 제40군 병력의 절반인 5만 183명이 철수했고, 나머지 5만 100명은 1988년 8월 15일부터 1989년 2월 15일까지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협정은 내전의 핵심을 비껴갔다. 무자헤딘은 협상 당사자가 아니었고, 아프가니스탄의 미래 정부 구성은 의제에서 제외되었다. 파키스탄은 월경 차단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미국은 무기 공급 중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철수하는 소련군 부대는 계속 공격을 받았다.

1988년 가을, 상황은 더 악화됐다. 8월 7일 무자헤딘이 쿤두즈를 점령하고 인근 도시들이 잇따라 함락되자, 11월 5일 소련은 철수를 중단했다. 이때 정치국 내에서 결정적인 균열이 벌어졌다.

1989년 1월,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과 크류치코프 KGB 의장은 카불로 날아갔다. 그들이 돌아와 1월 23일 정치국에 제출한 메모에는 다섯 가지 선택지가 담겼다. 그중에는 소련군 1개 사단을 카불-하이라탄 고속도로 방어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잔류시키는 방안과, '국제주의 자원병' 명목으로 군인들을 남기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셰바르드나제는 철군 완료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지불라는 소련군을 붙잡아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군부는 달랐다. 제40군 사령관 그로모프, 국방부 작전집단장 바렌니코프, 소련군 수석 고문 소츠코프는 일치하여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외교 보좌관 체르냐예프는 셰바르드나제의 자원병 구상에 반대하는 메모를 작성해 "제네바 협정 위반"이며 "또 수십 명의 우리 젊은이들 목숨"이라고 썼다.

1989년 1월 25일, 정치국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소련은 제네바 협정에 충실할 것이다." 국방장관 야조프가 카불로 가서 전면 철군을 확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고르바초프는 역설적인 결정을 내렸다. 살랑 고개를 통제하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병력을 겨냥한 마지막 공세, 태풍 작전을 1월 23일 개시한 것이다. 마수드는 이미 GRU와의 접촉을 통해 철수 부대의 통과를 보장하고 있었지만, 군부와 KGB, 나지불라는 서로 다른 이유로 그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전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사에 마지막 장을 장식한 무의미한 폭력이었다.

1989년 2월 15일, 보리스 그로모프 중장은 아무다리야 강 위의 우정의 다리를 걸어 테르메즈로 들어왔다. 아들이 건넨 붉은 카네이션을 받아들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련 TV 기자들이 달려들자 그는 욕설을 퍼부었다. 2014년 인터뷰에서 그는 그 말의 진짜 대상은 "전쟁을 시작해놓고 남에게 수습하라고 떠넘기는 나라의 지도부"였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국경수비대가 그날 오후까지 아프간 측에 남아 있었고, 포로로 잡힌 소련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 위의 그 장면은 9년 50일간의 전쟁이 끝났음을 세계에 선언하는 상징이 되었다.

끝나지 않은 전쟁: 평결은 왜 갈리는가

1989년 2월 15일 보리스 그로모프가 우정의 다리를 걸어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들어왔을 때, 전쟁은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질문들, 즉 누가 이겼는가, 왜 시작했는가, 소련 붕괴와 어떤 관계인가는 철군 이후에도 닫히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첨예하게 갈렸다.

소련이 스스로에게 내린 첫 평결은 1989년 12월 24일, 침공 10주년 되는 날 인민대표대회가 채택한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평가에 관한 결의」였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가 이끈 위원회는 당시 헌법상 전쟁 결정 권한이 최고회의에 있었는데 정치국 소수, 즉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우스티노프·그로미코가 독단했다고 결론 내렸다. 결의는 찬성 1,678표, 반대 18표로 통과됐다. 이튿날 최고회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범한 범죄에 대해 전역 군인을 사면하는 별도 결의를 채택했는데, 이 모순적 조합, 즉 정치적 결정은 불법이지만 수행한 자는 면책이라는 구조는 이후 러시아의 기억 정치를 예고했다.

그 기억 정치는 30년 동안 완전히 뒤집혔다. 2001년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은 군사적으로 패배하지 않았고 설정한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2018년 국가두마는 1989년 결의가 "역사적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사실상의 폐기를 추진했고, 2019년 철군 30주년을 앞두고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전쟁을 두고 한 나라의 최고 입법기관들이 정반대 평결을 내린 셈이다.

학계의 핵심 쟁점은 전쟁이 소련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었는가이다. CIA 분석가 앤서니 아널드는 『운명의 조약돌』(1993)에서 전쟁이 소련 경제, 민족 관계, 군산복합체의 모순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베트남"을 넘어 소련 체제의 사형선고였다. 그러나 개방된 소련 기록을 연구한 후속 세대는 더 신중하다. 세스 존스는 소련 붕괴가 정치·이념·경제·민족 요인의 복합적 결과이며, 철군 결정(1985년)과 소련 해체(1991년) 사이에 6년의 간극이 있다고 지적한다. 야코프 로이는 1992~1993년 구소련 전역에서 수집한 참전군인 인터뷰를 분석해, 전쟁이 소련 사회에 깊은 균열을 냈지만 그 균열을 폭발시킨 것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이었음을 보여준다.

스팅어 미사일 논쟁도 진행 중이다. 찰리 윌슨 하원의원은 "스팅어 이전에 무자헤딘은 소련군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으나, 이후에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서방 군사 분석가들은 스팅어의 격추율을 약 70퍼센트로 본다. 그러나 러시아 군사 기록에 따르면 1987~1988년 소련 항공기 손실은 모든 원인을 합쳐 고작 35대의 비행기와 63대의 헬리콥터였다. 더 결정적인 반론은 시기다: 고르바초프는 무자헤딘이 첫 스팅어를 발사하기 1년 전인 1985년 10월 이미 철군 원칙을 승인했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2010년 인터뷰에서 "스팅어는 내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즈비그니에프 브제진스키가 1998년 프랑스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고백은 또 다른 층위를 더했다.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그는 1979년 7월 3일, 즉 소련 침공 6개월 전에 대통령이 무자헤딘 비밀 지원을 승인했다고 인정하며 "우리는 러시아인들에게 개입하라고 밀지 않았지만, 그들이 개입할 확률을 의도적으로 높였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소련의 침공을 순수한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보는 서방의 표준 서사에 균열을 냈고, 냉전의 또 다른 대리전이 누구의 덫이었는지를 묻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미해결 질문은 전장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 62만 명의 소련 시민이 이 전쟁을 통과했다. 그들 중 1만 4,453명은 귀환하지 못했고, 살아 돌아온 이들은 낯선 나라가 되어버린 조국에서 "우리가 너희를 거기 보낸 적 없다"는 말을 들었다. 1990년대 초 테스트에서 참전군인의 35~40퍼센트가 전문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소련은 사라졌지만, 아프간치는, 그리고 전쟁 자체에 대한 평가의 진자 운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무엇을 무너뜨렸는가: 붕괴의 원인인가, 붕괴가 드러난 무대인가

이 전쟁이 소련을 무너뜨렸는지는 30년 넘게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소련의 베트남'이라는 별칭은 이미 하나의 평결을 함축한다. 언론인이자 아프간 참전 용사였던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훗일 이렇게 썼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는 반군 부대와 그들의 대상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상까지도 폭격했다." 패전도 승전도 아닌 채 끝난 10년이 체제의 정당성을 어디까지 허물었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전쟁을 붕괴의 '촉매'로 보는 입장은 라파엘 르베니와 아심 프라카시의 1999년 논문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됐다. 이들은 전쟁이 네 가지 경로로 해체를 가속했다고 본다. 첫째, 붉은 군대가 작은 게릴라 집단에 고전하는 모습은 '무적'이라는 이미지를 깨뜨렸고, 이것이 비러시아 공화국들의 독립 의지를 키웠다. 둘째, 다민족 군대 내에서 '이건 러시아인의 전쟁인데 왜 우리가 싸우냐'는 불만이 번졌다. 셋째, 전쟁에 대한 공식 거짓말이 누적되면서 체제의 도덕적 권위 자체가 침식됐다. 넷째, 제대 군인들(아프간치)이 비공식 조직을 결성해 공산당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균열을 냈으며, 이것이 글라스노스트의 초기 동력 가운데 하나가 됐다. 야아코브 로이는 2022년 저서 『피 흘리는 상처』에서 이를 사회사적으로 보강해, 아프간치가 귀환 후 접한 소비에트 청년 문화의 서구화, 전쟁이 폭로한 군대와 민간 부문의 부패, 그리고 반전 여론과 민족 문제의 결합을 방대한 설문조사로 입증했다.

반대편에서는 전쟁의 재정적·구조적 부담이 붕괴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작았다고 지적한다. CIA의 1987년 추산에 따르면 전쟁 비용은 연간 소련 군사비의 약 2.5%에 불과했고, 총액으로도 아프가니스탄보다 동유럽 위성국 지원에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갔다. 세르게이 라드첸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을 파산시켰다는 증거는 없다"고 단언한다. 스티븐 코트킨블라디슬라프 주보크 같은 연구자들은 소련 붕괴를 주로 내부 요인, 즉 계획경제의 구조적 한계, 고르바초프 개혁의 의도치 않은 폭발력, 그리고 민족 공화국들의 누적된 원심력으로 설명하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지나가는 언급에 그친다.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전쟁이 소련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고 썼다.

양쪽 다 틀렸다기보다, 질문의 초점이 다르다. 전쟁을 붕괴의 충분 원인으로 보는 진지한 연구자는 사실상 없다. 논쟁의 실질적 쟁점은 이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미 구조적 교착에 빠져 있던 소련 체제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단지 그 교착이 가시화된 여러 무대 중 하나였는가, 아니면 교착을 돌이킬 수 없는 붕괴로 밀어넣은 가속기였는가. 로이의 설문조사가 보여주듯, 중앙아시아 공화국 주민들은 전쟁 내내 러시아인보다 개입을 더 지지했고 전쟁 후에도 그 격차는 유지됐다. 이것은 '전쟁이 비러시아 민족의 이반을 초래했다'는 단선적 서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반면 1984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에 실린 기사 「의무」가 촉발한 충격, 그리고 귀환한 아프간치들이 보여준 조직화된 정치 참여는, 전쟁이 글라스노스트의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하나의 시동 장치였음을 말해준다.

전쟁은 소련을 혼자서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자신의 취약성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만든 결정적 경험이었으며, 그 경험이 낳은 사회적 균열은 1991년을 향한 경로에서 지울 수 없는 한 축이었다.

정리된 것과 정리되지 않은 것: 이 전쟁이 남긴 확실한 유산과 아직도 갈리는 평결

이 전쟁이 확실히 남긴 것은 숫자로 정리할 수 있다. 1979년 12월 25일부터 1989년 2월 15일까지 소련군 62만 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했고, 공식 사망자는 1만 4,453명, 부상·질병 제대자는 46만 명 이상이다. 아프간 측 사망자는 전쟁 기간 중 민간인 56만 2천 명에서 200만 명 사이, 무자헤딘 전사자 약 9만 명으로 추산된다. 전쟁 전 인구 1,350만 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50만 명이 난민이 됐다. 1989년 2월 15일 보리스 그로모프가 우정의 다리를 건넜을 때,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육군 한 개 사단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철수했다. 초강대국이 국경 밖에서 벌인 전쟁에서 이만큼 명확한 철수를 수행한 사례는 드물다.

그러나 '군사적 패배였는가'는 지금도 갈린다. 그로모프 자신은 회고록에서 "제40군은 패배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부가 군대에 승리할 수 없는 과업을 부여했을 뿐"이라고 썼다. 1988년 마기스트랄 작전은 소련군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줬고, 철군 직후인 1989년 봄 잘랄라바드 전투에서 나지불라 정권군은 무자헤딘의 대대적 공세를 격퇴했다. 러시아 군사사가들 사이에서는 '소련군은 전투에서는 지지 않았고, 정치에서 졌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서방의 지배적 평가는 이것이 소련의 정치적·군사적 패배였다고 본다. 알리 잘랄리의 『아프가니스탄 군사사』(2017)는 이 전쟁을 두고 "현대 문헌은 분열되어 있다. 어떤 이는 소련의 정치적 패배이자 군사적 무승부로, 다른 이는 정치·군사 양면의 패배로 본다"고 정리한다. 이 간극은 '승리'와 '패배'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상대를 전멸시켜야 승리인가, 철수 자체가 패배인가.

소련 붕괴와의 인과관계도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전쟁이 소련을 무너뜨렸다'는 통념에 대해 마크 갈레오티는 『아프가니스탄: 소련의 마지막 전쟁』(1995)에서 "이것은 비교적 작은 군사 모험이었다. 전쟁 자체가 소련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구체제의 무능을 드러내는 창이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화가 체제의 정당성을 잠식했다"고 반론한다. 라파엘 레우베니와 아심 프라카시는 1999년 논문에서 전쟁의 효과를 인식 효과, 군사 효과, 정당성 효과, 글라스노스트 효과로 분해해 분석하면서도 "전쟁이 단독 원인은 아니지만 붕괴를 가속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쟁은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가장 깊이 갈리는 평결은 이 전쟁의 장기적 파급에 관한 것이다. 소련이 철수한 후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에 빠졌고,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으며, 그 잿더미에서 알카에다가 9·11 공격을 기획했다. 이 연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소련의 10년 점령과 초토화 작전이 아프간 사회를 파괴하고 급진 이슬람주의의 온상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미국과 파키스탄이 무자헤딘에 스팅어 미사일과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지하드의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반론도 있다. 즈비그니에프 브제진스키는 1998년 인터뷰에서 "소련 제국의 붕괴와 중부 유럽의 해방, 냉전의 종식보다 더 중요한 역사가 어디 있는가? 흥분한 무슬림 몇 명인가, 탈레반인가?"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이 전쟁의 평결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평결을 내리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확실한 것은 이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넘도록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다.

패배인가, 붕괴의 촉매인가: 역사가들이 갈리는 지점

소련군은 전장에서 패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놀랍도록 갈린다. 1989년 2월 보리스 그로모프 장군이 우즈베키스탄 국경의 '우정의 다리'를 걸어서 건넜을 때, 서방 언론은 이를 '소련의 베트남'이라 불렀다. 그러나 2011년 주모스크바 영국대사였던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아프간tsy』에서 이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소련군은 단 한 번도 주요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나지불라 정권은 소련군 철수 후에도 3년 이상 버텼다. 브레이스웨이트에게 이 전쟁의 실패는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보 판단과 정치적 판단의 실패였다.

반면 러시아군 총참모부 자체 분석을 편찬한 레스터 그로우는 『소련-아프간 전쟁: 초강대국이 어떻게 싸우고 패배했는가』라는 제목에서 보듯 군사적 패배로 규정한다. 알리 아흐마드 잘랄리는 교착 상태로 본다. 윌리엄 말리는 "결정적 전투 하나 없이 중간 강도의 교전이 누적된" 전쟁이었으며, 어느 쪽도 전략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전쟁의 성격 자체가 전통적 승패 개념을 적용하기 어려운 대반란전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갈리는 지점은 이 전쟁과 소련 붕괴의 인과관계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2월 제27차 당대회에서 전쟁을 "피 흘리는 상처"라고 불렀고, 1989년 12월 24일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1,678 대 18로 1979년 파병 결정이 "정치적·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결의했다. 이 전쟁이 소련 체제에 치명타를 입혔다는 데는 이견이 적다. 그러나 그것이 붕괴의 원인이었는지, 촉매였는지, 아니면 붕괴가 임박했음을 드러낸 증상이었는지는 첨예하게 나뉜다.

야아코프 로이는 2022년 저서 『피 흐르는 상처』에서 1992-93년 구소련 11개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전쟁이 "소련 붕괴로 이끈 전개 과정의 촉매였다"고 주장한다. 아프간 참전용사들(아프간tsy)의 사회 복귀 실패, 전쟁이 폭로한 군대와 민간 부문의 부패, 민족 갈등과 반전 여론의 결합이 체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잠식했다는 것이다. 반면 아르테미 칼리놉스키는 『기나긴 작별』에서 철군 결정의 정치 과정을 추적하며, 전쟁보다 고르바초프의 국내 개혁이 결정적 변수였다고 본다. 경제사 학자들은 1980년대 중반 유가 폭락과 계획경제의 구조적 경직성을 더 무거운 요인으로 꼽는다.

세 번째 논쟁은 냉전의 프레임을 벗어나면 더 복잡해진다. 소련이 1989년 이후에도 나지불라 정권에 매달 3억 달러의 군사·경제 원조를 계속 제공했고, 이 지원이 1991년 12월 소련 해체와 함께 중단되자 정권은 4개월 만에 무너졌다. 소련의 '패배'는 전장이 아니라 모스크바의 재정 파탄과 정치적 와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또한 2018년 러시아 하원은 1989년 인민대표대회의 파병 비난 결의를 "역사적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공식 철회를 추진했고, 푸틴 대통령은 2001년 "소련은 군사적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고 공개 발언했다. 러시아 국내 여론도 1991년 88%가 파병을 비난했으나 2019년에는 반대가 42%로 줄었다. 기억의 정치가 역사가의 평결을 덮어쓰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전쟁에 관해 확실히 정리된 것은 몇 가지에 불과하다. 소련은 당초 목표였던 안정적인 친소 정권 수립과 신속한 철수를 달성하지 못했고, 약 1만 5천 명의 자국 군인과 측정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수의 아프간 민간인을 희생시켰으며, 이 전쟁이 소련 체제에 가한 부담이 붕괴를 앞당겼다는 데는 대체로 합의가 있다. 그러나 '군사적 패배였는가',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자료가 축적될수록 답이 단순해지기보다 더 미묘해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전쟁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가들의 작업장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결과

약 1만 5천 명의 소련군과 훨씬 많은 아프간인이 죽었고, 전쟁은 소련의 국력과 위신을 갉아먹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철군을 명령했고, 이 전쟁은 「소련의 베트남」으로 불리며 체제 위기의 한 원인이 됐다.

연표

  1. 1978
    4월 혁명

    아프가니스탄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내부 분열과 반란에 직면했다.

  2. 1979.12
    소련의 개입

    소련군이 카불로 진입해 아민을 제거하고 카르말 정권을 세웠다.

  3. 1980–1988
    소모전

    무자헤딘의 저항이 미국·파키스탄의 지원 속에 이어졌다.

  4. 1989.02
    철군

    고르바초프의 결정으로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관련 인물 38명

참여14

철군을 명령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

1989년 소련군의 완전 철수를 명령해 전쟁을 끝냈다.

철군 외교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1928–2014

외무장관으로 소련군 철수를 위한 제네바 협정 외교를 이끌었다.

공군 총사령관으로 아프간 전쟁 공중 작전 지휘파벨 쿠타호프1914–1984

1979년 침공부터 1984년 사망까지 소련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공중 작전을 총괄했다.

KGB 대표로 슈토름-333 작전 정보 부문 지휘바딤 키르피첸코1922–2005

1979년 12월, KGB 제1총국 제1부국장으로서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아민 궁전 습격 작전(슈토름-333)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으며, 자신이 1945년 복무했던 제103근위공수사단과 KGB 정찰·파괴 부대를 통합 배치했다.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 아프간 작전 지휘 및 BMP-2 배치 추진미하일 자이체프1923–2009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제40군의 작전을 감독하고 직접 전투 작전을 지휘했다. BMP-1의 산악전 부적합을 발견하고 중앙에 BMP-2의 긴급 대량생산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철군 외교를 현장에서 집행한 주아프가니스탄 대사율리 보론초프1929–2007

1988–1989년 외무부 제1차관 겸 주아프가니스탄 대사로 부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하는 소련군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소련군의 안전한 철수와 대규모 유혈사태 방지, 난민 대량 발생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외 선전·정보전 총괄레오니트 자먀틴1922–2019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으로서 1980년 1월 소련 고위 관리 최초로 아민이 CIA 요원이라는 주장을 공개 제기하며 침공의 선전 공세를 이끌었다.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올레크 셰닌1937–2009

주아프가니스탄 대사니콜라이 예고리체프1920–2005

제40군 사령관빅토르 두비닌1943–1992

KGB 의장, 병력 잔류 주장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

1989년 1월 셰바르드나제와 함께 카불을 방문해 나지불라 가족의 모스크바 대피를 제안했으며, 1월 23일 소련 사단 잔류를 포함한 다섯 가지 선택지를 정치국 메모에 공동 서명했다.

국방장관, 철군 메모 공동 서명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

1987년부터 국방장관으로서 1989년 1월 23일 철군 5개 선택지 메모에 공동 서명했고, 1월 25일 정치국 결정 후 카불을 방문해 전면 철군을 확정했다.

판지시르 사령관, 소련군과 휴전아흐마드 샤 마수드c. 1953–2001

GRU 접촉을 통해 철수 부대의 살랑 고개 통과를 보장했으나, 나지불라와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겨냥한 소련의 마지막 공세 태풍 작전을 강행했다.

제네바 협상을 중재한 유엔 특사디에고 코르도베스1935–2014

1982년부터 제네바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대표단 사이를 오가며 소련군 철수를 틀 지운 협정을 중재했다.

목격 · 증언7

주아프가니스탄 대사, 침공 직전 소환알렉산드르 푸자노프1906–1998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로 재직하며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내 군사 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아민은 푸자노프가 반대파를 지원한다고 비난하며 교체를 반복적으로 요구했고, 소련군 침공을 앞둔 1979년 11월 소환되었다.

『아프간츠이』의 저자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1932–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한 적 없이 철수했다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제시한 『아프간츠이』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소련판 베트남전’ 서사에 대한 주요 반론으로 인용된다.

소련 붕괴 인과 모델의 공동 저자라파엘 레우베니1957–

1999년 논문에서 소련-아프간 전쟁이 소련 붕괴로 이어지는 인식, 군사적, 정당성, 글라스노스트 효과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소련 철수 과정을 분석한 냉전사 학자아르테미 칼리놉스키1979?–

2011년 저서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전장 못지않게 국내 정치에 의해 결정되며 '기나긴 작별'이었음을 주장했다.

전쟁의 사회사 연구자야아코브 로이1932–

《피 흘리는 상처》(2022)에서 전쟁의 국내적 영향과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태도 차이를 분석했다.

전쟁 기록을 남긴 장군 역사가알렉산드르 랴홉스키1946–2009

러시아어 다큐멘터리 연구서 《아프간의 비극과 용기》를 저술했다.

철군 교훈 분석가마크 N. 카츠1954–현재

나집불라 정권이 소련 지원으로 철군 후 3년 이상 생존했음을 분석했다.

관련 용어

출처: Rodric Braithwaite, Afgantsy: The Russians in AfghanistanEncyclopaedia Britannica: Soviet invasion of Afghan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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