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사후 동유럽의 위기, 1953–1956
스탈린이 죽은 뒤 소련의 새 지도부가 동유럽에 요구한 「새 노선」과 탈스탈린화는 왜 1953년 동베를린과 플젠, 1956년 포즈난과 부다페스트의 봉기로 이어졌으며, 같은 해 폴란드는 타협으로, 헝가리는 무력 진압으로 끝난 까닭은 무엇인가?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말렌코프·베리야·흐루쇼프의 집단지도부는 동독과 헝가리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강행 공업화와 테러를 늦추는 「새 노선」을 지시했다. 그러나 개혁은 위기를 먼저 터뜨렸다. 5월 말 체코슬로바키아의 화폐개혁은 플젠 봉기를, 작업 기준량을 그대로 둔 동독의 새 노선은 6월 17일 봉기를 불렀고 둘 다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헝가리에서는 너지 임레가 총리가 되어 수용소를 닫고 사면을 폈지만, 베리야와 말렌코프가 차례로 밀려나자 라코시가 1955년 그를 몰아냈다. 1955년 바르샤바 조약, 오스트리아 중립화, 유고슬라비아와의 화해에 이어 1956년 2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은 스탈린의 후계자들을 흔들었다. 폴란드에서는 비에루트가 죽고 6월 포즈난 봉기를 거쳐 10월 고무우카가 돌아왔고, 흐루쇼프는 바르샤바까지 날아왔다가 무력 개입을 접었다. 폴란드를 지지하는 부다페스트의 시위는 혁명이 되었지만, 너지 정부가 바르샤바 조약 탈퇴와 중립을 선언하자 소련군은 11월 4일 이를 진압하고 카다르 정권을 세웠다.
스탈린의 죽음과 모스크바의 「새 노선」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각료회의 의장과 당 서열 1위 서기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3월 14일 간부회 동료들은 그에게 서기국에서 물러나게 했고, 당 제1서기 대행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돌아갔다. 한동안 나라는 말렌코프(정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외교), 라브렌티 베리야(내무부와 비밀경찰)의 3인 체제로 움직였다. 말렌코프는 중공업 대신 소비재 생산을 늘려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고, 농민 세금을 깎고 국가 수매가를 올리자고 주장했다. 1
스탈린식 경찰 테러의 화신이던 베리야는 이 석 달 동안 오히려 개혁가로 나섰다. 4월 4일 「의사들의 음모」 사건 피해자들을 풀어 주었고, 굴라크 수감자의 거의 절반인 약 120만 명을 내보내는 사면을 공포했다. 독일 문제에서도 그는 동독을 「소련군이 지탱하는, 진짜 국가도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그가 독일 통일을 미국의 지원과 맞바꿀 생각을 한다고 의심했다. 2
새 집단지도부는 위성국들의 사정이 폭발 직전이라고 보았다. 4월 초 독일 주재 소련 통제위원회가 보낸 보고서는 동독 경제의 참상을 상세히 전했다. 동독을 떠난 사람은 1951년 16만 명, 1952년 18만 2,000명이었고, 1953년에는 넉 달 만에 12만 2,000명이었다. 6월 2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와 오토 그로테볼에게 소련 지도부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정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에 관하여」라는 지시를 건넸다. 「가속적 사회주의 건설」, 강제 집단화와 사기업 탄압, 교회 압박을 중단하고 중공업 대신 소비재에 투자하라는 내용이었다. 말렌코프는 바꾸지 않으면 파국이 온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시에는 노동자들이 가장 싫어하던 작업 기준량 인상을 되돌리라는 요구가 없었다. 3
헝가리 지도부도 같은 「협의」에 불려 갔다. 6월 13일부터 16일까지 크렘린에서 말렌코프·베리야·몰로토프·흐루쇼프·불가닌·미코얀은 라코시 마차시를 비롯한 헝가리 노동인민당 지도자들을 질책했다. 라코시는 소련식 집단지도를 받아들여 당 지도자 자리는 지키되 총리직은 너지 임레에게 넘겨야 했다. 이렇게 소련에서 시작된 「새 노선」은 동독에서 처음 공표된 뒤 다른 동구권 나라들로 퍼졌다. 소비재 확대, 테러 중단, 이념 통제 완화가 그 세 축이었다. 4 5 6
야노시 라이너가 회의록으로 재구성한 크렘린 회담은 거의 공개 재판이었다. 말렌코프는 헝가리 동지들이 결함을 과소평가한다고 잘랐고, 가장 많은 숫자를 들고 나온 베리야는 「인구 950만의 헝가리에서 150만 명을 기소한 것이 용납되는가」라고 물으며 라코시가 국가보안기관을 직접 지휘하고 수사에 개입했다고 비난했다. 국방장관 퍼르커시 미하이는 버터 이슈트반으로 바뀌어야 했다. 참석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베리야는 라코시가 돕지 않으면 「등뼈를 부러뜨리겠다」고까지 말했다. 라코시는 「이런 가르침을 진작 받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답했다. 4
1953년: 플젠, 동베를린, 부다페스트
첫 폭발은 새 노선이 닿기도 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다. 1953년 5월 31일 밤 10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부는 오래 부인해 온 화폐개혁을 발표했다. 저축은 50 대 1, 임금은 5 대 1로 바뀌었고, 값싼 배급이 끝나고 작업 기준량이 올라갔다. 플젠의 슈코다 공장 야간조가 파업에 들어갔고, 이튿날 시내로 행진한 노동자들은 시청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쌓았으며 일당 지배를 끝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정부는 경찰 2개 대대 약 8,000명과 전차 80대를 갖춘 군 병력 2,500명을 보내 진압했다. 부상자는 200여 명이었고 사망자는 없었으며, 2,000명 넘게 붙잡혔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대공장 19곳에서도 파업이 일어나 약 36만 명이 참여했다. 7
당은 사건을 「제국주의 첩자」의 도발로 규정했고 이 공식 설명은 1989년까지 유지되었다. 6월 8일 화폐개혁을 뺀 5월 31일의 다른 조치들이 철회되었다. 파업 물결과 모스크바의 압력이 겹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도 생활수준 개선에 초점을 둔 새 노선 쪽으로 조심스럽게 돌아섰다. 1953년 9월 정부는 소매가 인하와 이듬해 주택 4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1956년 가을까지 소매가는 여섯 차례 내렸다. 7
동독에서는 새 노선이 도리어 불을 댕겼다. 사회주의통일당은 6월 11일 당 기관지에 새 노선을 실어 지난 잘못을 인정했지만, 10퍼센트 작업 기준량 인상은 그대로 두었다. 기준량 인상과 물가 인상을 합치면 월급을 33퍼센트 깎는 셈이었다. 6월 16일 동베를린 스탈린알레 건설 현장 노동자 300명이 파업에 나섰고, 이튿날 시위는 전국 약 700곳에서 100만 명 넘게 참여한 봉기로 번졌다. 인구 5만이 넘는 도시 24곳 모두에서 소요가 일었고, 베를린 밖에서만 약 33만 9,000명이 시위에, 22만 5,000명 넘게 파업에 나섰다. 소련군 전차가 동베를린에 들어와 계엄을 선포하고 군중에게 발포했다. 사망자는 독일의 국제방송 도이체벨레가 확인한 민간인 55명에서 최근 추산 최소 125명까지 갈리고, 최대 1만 명이 구금되었다. 봉기의 경과는 「1953년 동독 6월 봉기」 항목에, 그 배경이 된 국가 건설은 「동독: 소련 군정에서 독일민주공화국까지」 항목에 있다. 3
봉기는 울브리히트의 몰락으로 이어질 뻔했다. 동베를린의 소련 대표들은 6월 24일 모스크바에 그를 서기장에서 물리고 집단지도로 가자고 보고했다. 그러나 6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베리야가 체포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7월 2일 소련 지도부는 동독의 정치 개편을 미루고, 인기는 없어도 경험 많고 믿을 만한 스탈린주의 지도자를 밀어주는 쪽을 택했다. 울브리히트는 7월 말 빌헬름 차이서와 루돌프 헤른슈타트 등 반대파를 정치국에서 몰아냈고, 소련은 경제 원조를 늘리고 배상금 징수를 그해 말에 끝내기로 했다. 베리야는 12월 23일 처형되었다(「베리야의 몰락」). 3 2
헝가리에서는 개혁이 위로부터 왔다. 7월 4일 국회에서 선출된 너지 정부의 강령 연설은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가을까지 사면 조치가 약 74만 8,000명에게 미쳤고, 수감자 약 4만 명 가운데 1만 5,761명이 풀려났으며, 호르토바지 강제이주 수용소와 국가보안기관(ÁVH)의 수용소들이 문을 닫아 헝가리의 굴라크는 사실상 사라졌다. 농민들은 협동조합을 떠나기 시작해, 1953년 말까지 조합원이 37만 6,000명에서 25만 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라코시는 당 제1서기로 남아 있었다. 그 과정은 「헝가리의 새 노선」 항목에 있다. 4 5
후퇴와 재반격, 1954–1955년
새 노선의 운명은 모스크바의 권력투쟁에 묶여 있었다. 라코시는 자신을 가장 매섭게 공격하던 베리야가 사라지자 반격에 나섰고, 부당한 재판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위원장 자리를 차지해 숙청 피해자의 복권을 되돌리려 했다. 1955년 2월 말렌코프가 소비재 편중과 베리야와의 친분을 이유로 총리에서 물러나자 그의 경공업 우선 정책도 버려졌다. 헝가리에서는 3월 9일 중앙지도부가 너지를 「우익 편향」으로 단죄했고, 4월 14일 당직을 박탈당한 너지는 18일 총리에서 해임되었다. 후임은 라코시의 측근인 헤게뒤시 언드라시였다. 5 1 8
그러나 1953년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었다. 스탈린이 아니라 흐루쇼프가 소련을 이끄는 한 라코시는 너지를 쇼 재판에 세울 수 없었고, 사람들은 이미 「살 만한」 공산주의를 맛본 뒤였다. 너지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답하는 글들을 써서 100명 가까운 사람에게 돌려 읽혔고, 그 둘레에 당내 반대파가 모였다. 이 글들은 1957년 서방에서 『공산주의에 관하여: 새 노선을 위한 변호』로 출간되었다. 폴란드에서는 비밀경찰 간부 유제프 시비아트워의 망명과 폭로로 공안부가 약해졌고, 1951년부터 갇혀 있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1954년 풀려났다. 5 9 10
1955년 5월에는 동유럽의 국제적 틀이 바뀌었다. 5월 9일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자, 5월 14일 소련과 동구권 7개국은 바르샤바에서 「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회원국의 독립과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을 원칙으로 내걸었다. 이튿날인 5월 15일에는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이 조인되어 점령군이 그해 10월 25일까지 철수했고,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을 선언했다. 소련이 군대를 빼고 중립을 받아들인 이 선례는 1년 반 뒤 헝가리에서 다시 불려 나온다(「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11 12 8
흐루쇼프는 유고슬라비아와도 화해했다. 1955년 5월 27일부터 6월 2일까지 베오그라드를 찾은 그는 티토와 「베오그라드 선언」에 서명해 유고슬라비아 내정 불간섭과 각국의 서로 다른 사회주의 발전 경로를 인정했다. 1948년 이래의 단절(「티토-스탈린 결별」)을 끝낸 1949년 러이크를 「티토의 사냥개」로 몰아 처형하며 반티토 숙청의 본보기로 삼았던 라코시는 헝가리·유고슬라비아 화해의 걸림돌이었고, 1956년 7월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미코얀의 사퇴 권고 뒤에 「티토가 내 목을 요구했다」는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1956년 4월 17일에는 유고슬라비아 파문의 무대였던 코민포름이 해산되었다. 13 14 5 15
1956년 2월: 비밀연설의 충격
1956년 2월 25일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보고로 스탈린의 숙청과 개인숭배를 고발했다. 연설은 「공개 금지」로 분류되었지만 소련 곳곳의 당 회의에서 낭독되었고, 몇 주 만에 서방에 알려져 6월 5일 『뉴욕 타임스』에 전문이 실렸다. 흐루쇼프는 동유럽 동맹국과 상의 없이 연설했고, 스탈린의 후원으로 권좌에 오른 지도자들은 하루아침에 기반을 잃었다. 대회와 연설의 내용은 「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 항목에 있다. 16
충격은 폴란드에서 가장 컸다. 대회에 참석했던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서기장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독감이 폐렴으로 번져 모스크바에 남았다가 3월 12일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례에 온 흐루쇼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3월 20일 중앙위원회는 개혁파(푸와비파)와 강경파(나톨린파) 사이의 절충 후보로 에드바르트 오하프를 제1서기로 뽑았다. 당 서기국은 동구권에서 유일하게 비밀연설을 널리 돌리기로 했고,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전국에서 열린 수천 차례의 당 회의에서는 카틴 학살과 소련군 주둔, 고무우카 투옥 같은 금기가 거론되었다. 17 18 10
헝가리에서는 라코시가 3월 28일 1949년 쇼 재판으로 처형된 러이크 라슬로를 복권하면서도 자기 책임은 덮으려 했다. 그러나 비판은 당 조직과 작가동맹, 신문으로 번졌고, 너지 시절에 만들어진 토론 모임 페퇴피 서클이 되살아났다. 6월 28일 언론 자유 토론회에서는 너지의 복귀를 외치는 목소리가 나왔다. 모스크바는 6월 미하일 수슬로프를, 7월에는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부다페스트에 보냈고, 7월 18일 라코시는 제1서기에서 물러나 소련으로 떠났다. 후임은 그의 측근 게뢰 에르뇌였다. 라코시 체제와 그 몰락은 「헝가리: 소농당의 승리에서 러이크 재판까지」와 「헝가리 혁명」 항목에서 이어진다. 14 19 5
게뢰의 양보는 오히려 위기를 키웠다. 10월 6일 러이크와 다른 숙청 희생자 세 명의 유해가 부다페스트에 다시 묻힐 때 수십만 명이 지켜보았다. 크레이머에 따르면 게뢰는 이 재매장을 티토의 환심을 사고 긴장을 누그러뜨릴 기회로 보았지만, 12일 소련 대사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그것이 당 지도부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너지는 10월 13일 당에 복귀했고, 게뢰는 10월 15일부터 22일까지 유고슬라비아에 머물렀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폴란드의 소식이 헝가리를 달구었다. 19 9
폴란드: 포즈난에서 10월로
1956년 6월 28일 포즈난의 체겔스키 공장(당시 이름은 스탈린 금속공장) 노동자들이 임금과 세금 문제로 거리에 나섰고, 미츠키에비치 광장 일대에 약 10만 명이 모였다. 시위는 공안부 건물을 둘러싼 총격전으로 번졌고,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가 지휘한 군과 국내보안군 약 1만 명과 전차 수백 대가 도시를 진압했다. 사망자는 국가기억연구소(IPN) 연구자 우카시 야스트솜프의 57명에서 같은 연구소 스타니스와프 얀코비아크의 100여 명까지 추산이 갈린다. 당은 처음에 시위대를 「도발자이자 제국주의 첩자」로 몰았으나 곧 임금 인상과 개혁을 약속했다. 봉기와 재판은 「포즈난 봉기」 항목에 있다. 20 10
포즈난 이후 개혁파는 고무우카의 복귀를 원했다. 1948년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밀려나 1951년 투옥되었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추문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혁파와 강경파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고무우카는 개혁을 실행할 실권을 요구했고, 특히 포즈난 진압에 군을 보낸 소련 원수 출신 국방장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를 정치국과 국방부에서 내보내라는 조건을 걸었다. 오하프는 이를 받아들여 10월 19일 열린 중앙위원회 제8차 전원회의에 고무우카를 제1서기 후보로 내세웠다. 10 21 22
같은 날 흐루쇼프는 미코얀·불가닌·몰로토프·카가노비치·코네프를 이끌고 바르샤바로 날아왔다. 폴란드 주둔 소련군 기갑사단들은 기지를 떠나 수도로 움직였고,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바르샤바에서 100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다. 크레이머에 따르면 로코솝스키의 영향은 정규군에 머물렀고, 내무부 소속 국내보안군(KBW) 부대들은 새 지도부를 지키려고 바르샤바 둘레에 진지를 잡았다. 폴란드가 소련과 충돌하는 동시에 내전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무우카는 개혁은 내정 문제이며 폴란드는 공산주의도 소련과의 조약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10 19
10월 21일 소련 공산당 간부회는 만장일치로 「군사 개입을 삼가고」 「인내를 보이기로」 결정했다. 흐루쇼프는 24일 간부회에서 「폴란드와 무력 충돌할 구실을 찾기는 쉽지만, 그 충돌을 끝낼 길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같은 날 바르샤바 집회에 약 50만 명이 모였고, 고무우카는 소련과의 정치·군사 유대를 강조하며 바르샤바 조약에서 멀어지려는 이들을 비판했다. 중국 공산당도 고무우카를 지지했다. 11월 중순까지 폴란드는 대소 채무 탕감, 강제 집단화 포기,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완화를 얻어 냈고, 로코솝스키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으며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이 풀려났다. 19 10
헝가리 혁명과 두 개의 결말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대학생들은 폴란드의 변화를 지지하고 같은 변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오후 벰 장군 동상 앞에 약 2만 명이 모였고, 저녁에는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 국가보안기관과 군중 사이에 총격이 시작되었다. 게뢰는 그날 소련군 개입을 요청했고, 24일 새벽 소련군 전차가 부다페스트에 들어왔다. 같은 날 너지가 총리가 되었다. 전국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위원회가 당 기구를 대신해 지방 행정을 넘겨받았다. 혁명의 전개와 진압은 「헝가리 혁명」 항목에 있다. 19 8
모스크바는 한동안 흔들렸다. 10월 28일 휴전 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30일 소련 정부는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평등 원칙 위반」을 인정하고 바르샤바 조약국 주둔 소련군의 재검토를 약속하는 선언을 냈다. 크레이머는 말린 메모를 근거로 30일 간부회에 철수 쪽 합의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31일 흐루쇼프는 태도를 뒤집었다.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했고, 30일 영국과 프랑스가 최후통첩을 보낸 뒤 31일 이집트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크레이머는 수에즈 위기가 헝가리 문제를 빨리 결판내야 한다는 강한 동기가 되었다고 본다. 반면 베케시 처버가 정리한 연구에 따르면 헝가리 사태는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비밀리에 계획한 공격의 시점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사이 게뢰 등 강경파는 소련으로 떠났고, 너지 정부는 30일 1945년 연립 정당들에 기초한 복수정당제를 되살리겠다고 발표했다. 11월 1일 너지 정부는 바르샤바 조약 탈퇴와 중립을 선언했다. 19 8 23 9
개입 결정 뒤 흐루쇼프는 동맹국의 동의를 모았다. 모스크바에 머물던 류사오치는 그동안 헝가리 노동계급이 스스로 봉기를 수습하게 두자는 마오쩌둥의 견해를 전해 왔지만, 31일 간부회는 공항에서 중국 대표단에 새 결정을 알렸다. 흐루쇼프는 브레스트에서 고무우카를,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 지도자들을 만났다. 폴란드 정치국은 11월 1일 소련군 투입을 비판했다가 헝가리의 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 뒤 태도를 바꾸었다. 11월 2일 밤 브리오니 섬에서 열 시간 동안 흐루쇼프와 말렌코프를 만난 티토는 개입에 동의했고, 새 정부 수반으로 페렌츠 뮌니히 대신 숙청 피해자였던 카다르 야노시를 추천했다. 19 8 23
11월 4일 새벽 코네프 원수가 지휘한 「회오리바람」 작전으로 17개 사단까지 늘어난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공격했고, 카다르는 솔노크에서 「혁명 노동자·농민 정부」를 선포했다. 저항은 체펠과 두너우이바로시 등에서 며칠 더 이어졌다. 사상자 집계는 자료마다 다르다. 헝가리인 약 2,500명과 소련군 약 700명이 죽었다는 추산이 널리 쓰이고, 소련 자료는 소련군 전사 669명, 부상 1,450명, 실종 51명과 헝가리인 희생자 약 4,000명을 든다. 약 20만 명이 나라를 떠났고 대부분 오스트리아로 갔다. 8 23
왜 폴란드는 타협으로 끝나고 헝가리는 진압되었는가. 크레이머는 폴란드의 결말이 「어디까지 허용되는가」의 선례가 되었다고 본다. 고무우카는 공산당 체제를 지키고 바르샤바 조약에 남겠다고 약속했지만, 소련 간부회는 곧 헝가리를 「폴란드와 비교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폴란드 10월」을 다룬 연구들은 헝가리에서는 사회적 항의가 정치체제를 무너뜨렸고 폴란드에서는 체제 안에 흡수되었다고 정리한다. 조해나 그랜빌은 두 위기를 비교하며 기존의 「역사적 요인」, 「인물」, 「중립 선언」 설명을 검토하고, 새 문서들이 이 설명들을 근본적으로 뒤집지는 않지만 고무우카의 입지가 생각보다 불안했고 너지가 처음에는 그가 내린 것으로 기억되는 결정들에 반대했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19 10 24
결과와 해석
헝가리에서는 보복이 뒤따랐다. 1990년대 초 연구를 정리한 베케시에 따르면 1956~1959년 3만 5,000명이 혁명 활동으로 조사받았고 2만 6,00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2만 2,000명이 형을 받았으며, 1957~1960년 1만 3,000명이 구금되었다. 처형된 사람은 229명이라는 집계와 280~300명이라는 집계가 함께 쓰인다.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을 나서다 납치되어 루마니아로 끌려갔고, 1958년 6월 16일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카다르는 라코시의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을 「우리에게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으로 바꾸어 국내 합의를 구했지만, 대외정책에서는 소련에 끝까지 충실했다. 23 8 9 25
폴란드의 성과도 제한적이었다. 토니 켐프웰치는 1956년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사회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다고 인정했으며, 당이 개인농과 가톨릭 교회를 겨냥한 운동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두 세력에게 「사회주의 질서」 안의 영구적 자리를 약속했다고 쓴다. 그러나 경제 합리화에 대한 노동자의 기대와 더 자유로운 공적 생활에 대한 지식인의 열망은 곧 실망으로 끝났고 1970년대에야 되살아났다. 고무우카의 「해빙」은 1960년대에 경직되었고, 경제난과 민심 이반 속에 1970년 권좌에서 밀려났다. 노먼 데이비스는 1956년의 변화를 폴란드가 꼭두각시 국가에서 종속 국가로 바뀐 것이라고 요약했다. 26 10
1956년은 서방의 한계도 드러냈다. 베케시가 소개한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1956년 7월 위성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개입을 배제했고, 서방은 부다페스트의 봉기에 놀라 소련을 자극하지 않는 신중한 불개입을 지켰다. 서유럽 공산당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공산당은 수천 명의 당원을 잃었고, 진압을 보도한 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 특파원 피터 프라이어는 기사가 검열되자 사직했다가 제명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역사가 에마뉘엘 르루아라뒤리 같은 당원들이 당을 떠났다.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폴란드와 헝가리의 사태를 중공업만 앞세우고 민생을 소홀히 한 데서 온 위험으로 읽었다. 23 8 10
1990년대 동유럽과 러시아 문서가 열리면서 해석도 달라졌다. 크레이머는 말린 메모가 보여 주는 10월 30일의 철수 합의를 근거로 「아주 희박하나마」 1989년의 사건이 33년 일찍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고 쓴다. 동독 연구에서는 역사가 코리 로스가 사회주의통일당이 1953년에서 두 교훈을 얻었다고 정리한다. 공장 불만이 번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속적 사회주의 건설」 같은 강행은 다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장 감시가 강화되고 노동계급 전투단이 만들어졌으며 국가보안부가 커졌다. 1953년과 1956년의 위기는 모스크바가 허용하는 탈스탈린화의 폭을 정했고, 그 경계는 12년 뒤 「프라하의 봄」에서 다시 시험되었다. 19 3
결과
1956년 말 동유럽의 공산당 정권은 모두 살아남았지만 스탈린 시대의 방식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폴란드는 고무우카 아래 개인농과 교회를 인정받고 소련 고문단을 내보냈으며, 헝가리는 수만 명이 재판받고 20만 명이 망명한 뒤 카다르의 타협 체제로 들어섰다. 동독의 울브리히트는 1953년 봉기 뒤 오히려 입지를 굳히고 감시 체계를 키웠다. 소련은 체제와 동맹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자기 길」을 허용한다는 경계를 그었고, 서방은 그 경계 안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1956년은 서유럽 공산당의 대량 탈당으로도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 11953.03.05스탈린 사망
말렌코프가 총리가 되고 말렌코프·몰로토프·베리야의 3인 체제가 들어섰다.
- 21953.06.01플젠 봉기
화폐개혁에 맞선 슈코다 공장 노동자들이 시청을 점거했다가 진압되었다.
- 1953.06.02동독 지도부에 내려진 지시
소련 지도부가 울브리히트와 그로테볼에게 「가속적 사회주의 건설」 중단을 지시했다.
- 1953.06.13크렘린의 헝가리 회담
소련 지도부가 라코시 등을 질책하고 총리직을 너지에게 넘기게 했다.
- 31953.06.17동독 6월 봉기
동베를린 건설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 봉기로 번졌고 소련군 전차가 진압했다.
- 1953.06.26베리야 체포
베리야가 체포되었고, 이 일로 울브리히트와 라코시가 숨을 돌렸다.
- 41953.07.04너지 정부의 강령 연설
너지가 국회에서 새 노선을 밝히는 강령 연설을 했다.
- 1955.04.18너지 해임
말렌코프의 실각 뒤 너지가 「우익 편향」으로 몰려 총리에서 해임되었다.
- 51955.05.14바르샤바 조약
소련과 동구권 7개국이 바르샤바에서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이튿날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이 조인되었다.
- 61955.06.02베오그라드 선언
흐루쇼프와 티토가 내정 불간섭과 서로 다른 사회주의의 길을 인정했다.
- 1956.02.25비밀연설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을 고발했다.
- 1956.03.12비에루트 사망
폴란드 지도자 비에루트가 모스크바에서 숨지고 오하프가 뒤를 이었다.
- 71956.06.28포즈난 봉기
체겔스키 공장 노동자의 시위가 총격전으로 번졌고 군이 진압했다.
- 1956.07.18라코시 퇴진
미코얀의 압력으로 라코시가 물러나고 게뢰가 제1서기가 되었다.
- 81956.10.06러이크 재매장
복권된 러이크의 장례에 수십만 명이 모였다.
- 91956.10.19흐루쇼프의 바르샤바 방문
고무우카 복귀를 막으려 흐루쇼프가 날아왔고, 21일 소련 간부회는 개입을 삼가기로 했다.
- 101956.10.23부다페스트 시위
폴란드 지지 시위가 라디오 방송국 앞 총격 뒤 혁명으로 번졌다.
- 111956.11.02브리오니 회담
티토가 흐루쇼프의 헝가리 개입에 동의하고 카다르를 추천했다.
- 121956.11.04소련군의 부다페스트 공격
소련군이 혁명을 진압하고 카다르 정부가 세워졌다.
관련 인물 25명
지도부4
집행 · 지휘4
참여14
사면과 동독·헝가리 지도부 질책에 앞장섰다가 1953년 6월 체포되었다.
소련 외무장관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3인 체제의 일원으로 1953년 크렘린 회담과 1956년 바르샤바 방문에 함께했다.
소련 부총리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1956년 7월 라코시의 퇴진을 이끌고 10월 부다페스트에 파견되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미하일 수슬로프1902–19821956년 6월과 10월 부다페스트에 파견되었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발터 울브리히트1893–19731953년 6월 봉기 뒤 해임될 뻔했으나 베리야의 몰락으로 살아남았다.
동독 총리오토 그로테볼1894–19641953년 6월 모스크바에서 새 노선 지시를 받았다.
헝가리 노동인민당 제1서기라코시 마차시1892–19711953년 총리직을 잃었으나 1955년 너지를 몰아냈고 1956년 7월 물러났다.
헝가리 노동인민당 제1서기게뢰 에르뇌1898–1980라코시의 후임으로 러이크 재매장을 허용했고 10월 23일 소련군 개입을 요청했다.
헝가리 혁명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카다르 야노시1912–198911월 4일 소련군과 함께 정권을 잡고 보복과 타협을 함께 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서기장볼레스와프 비에루트1892–1956제20차 당대회 뒤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에드바르트 오하프1906–1989비밀연설을 널리 돌리게 하고 10월 고무우카에게 자리를 넘겼다.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1955년 소련과 화해했고 1956년 11월 브리오니에서 헝가리 개입에 동의했다.
중국 공산당 부주석류사오치1898–19691956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헝가리 문제에 관한 마오쩌둥의 견해를 전했다.
동독 반대파루돌프 헤른슈타트1903–19661953년 7월 말 차이서와 함께 정치국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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