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1848년 혁명과 제1차 독립전쟁
1848년 1월 팔레르모에서 유럽 혁명의 첫 불꽃이 오르고 밀라노와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는데도, 왜 이탈리아의 혁명은 교황의 이탈과 사르데냐 왕의 패전, 프랑스 공화국의 로마 원정 앞에서 1년 반 만에 모두 무너졌으며, 농민이 빠진 이 실패는 통일의 길과 그람시의 「수동 혁명」론에 무엇을 남겼는가?
빈 체제 아래 오스트리아가 북부를 지배하고 여러 군주국으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에서 1848년 1월 12일 팔레르모 봉기가 일어나자 나폴리·토스카나·사르데냐·교황령의 군주들이 잇달아 헌법을 내놓았다. 3월 밀라노 5일과 베네치아 봉기로 오스트리아군이 사각 요새지대로 물러나자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선전포고해 제1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으나, 비오 9세의 4월 29일 훈시와 나폴리 반혁명으로 연합이 무너졌고 피에몬테군은 7월 쿠스토차에서 패해 살라스코 휴전으로 물러났다. 「인민의 전쟁」은 로시 암살과 교황의 가에타 도피 뒤 1849년 2월 마치니의 로마 공화국과 토스카나 공화국으로 이어졌지만, 3월 노바라 패전과 브레샤 진압, 5월 시칠리아 함락에 이어 7월 프랑스 원정군이 로마를 점령했고, 8월 콜레라에 시달린 베네치아가 마지막으로 항복했다.

빈 체제 아래의 이탈리아와 청년 이탈리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1814~1815년 빈 회의는 나폴레옹 이전처럼 이탈리아 반도를 여러 나라로 나누어 놓았다. 북쪽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직접 다스렸고, 파르마·모데나·토스카나의 공국도 합스부르크 가의 간접 지배 아래 있었다. 그 남쪽으로 반도 한가운데를 교황령이,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부르봉 왕가의 양시칠리아 왕국이 차지했으며, 서북쪽의 사르데냐 왕국(피에몬테)만이 사보이아 왕가 아래 독자 세력을 이루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에서는 무거운 세금과 10만 명의 상주군이 오스트리아 지배를 떠받쳤다. 베네치아 쪽 기록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50년 동안 이 지역에서 쓴 돈보다 4,500만 오스트리아 리라를 더 거두어 갔고, 신용을 얻지 못한 베네치아 상공업은 숨이 막혔다. 1 2 3
통일의 구상은 셋으로 갈렸다. 피에몬테의 사제 빈첸초 조베르티는 1842년 『이탈리아인의 도덕적·시민적 우위』에서 교황이 이끄는 이탈리아 국가 연합을 제안했다(신겔프주의). 체사레 발보는 피에몬테가 이끄는 국가 연합을 중간안으로 내놓았다. 주세페 마치니와 카를로 카타네오는 공화국을 원했는데, 대부분의 민족주의자에게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안이었다. 1820년대부터 혁명 운동을 이끈 것은 비밀 결사 카르보나리였다. 중간 계급의 전문직·사업가·지식인이 모인 이 결사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에 영감을 받았고 강하게 반교권적이었으며, 1820~1821년과 1830~1831년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1 4
제노바 출신의 변호사 마치니는 카르보나리에 들어갔다가 1830년 체포되었고, 이듬해 망명을 택해 1831년 7월 마르세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를 세웠다. 모든 회원은 이탈리아를 「하나의, 자유롭고 독립된 공화국」으로 만들겠다고 서약했고, 구호는 「신과 인민」이었다. 1833년 회원은 약 6만 명에 이르렀으나, 그해 피에몬테에서 꾸민 봉기 음모가 발각되자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12명을 총살하고 한 사람도 사면하지 않았다. 마치니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834년 2월 스위스에서 사부아로 쳐들어간 원정도 실패했다. 이 봉기에 가담한 젊은 선원 주세페 가리발디도 사형을 선고받고 남아메리카로 달아나 14년 동안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전쟁에서 싸웠다. 그가 몬테비데오에서 꾸린 이탈리아 군단의 붉은 셔츠는 훗날 그의 의용군의 상징이 되었다. 5 6 7 8
1840년대의 봉기도 잇따라 실패했다. 1844년 청년 이탈리아 회원인 베네치아의 반디에라 형제가 약 20명을 이끌고 칼라브리아에 상륙했다가 사로잡혀 동료 9명과 함께 총살되었고, 그 순교는 이탈리아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정체를 깬 것은 1846년 6월 16일 비오 9세의 교황 선출이었다. 새 교황은 정치범을 사면했고, 언론 자유를 허용하고 외국인 용병 대신 시민군을 두었으며 각료 회의를 만들었다. 로마 시민은 이틀 밤 횃불을 들고 퀴리날레 궁으로 몰려가 그를 환호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페라라 점령에 항의하자 애국자들은 그를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떠받들었다. 망명 중인 마치니는 1847년 그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고, 가리발디는 몬테비데오에서 자기 군단을 교황에게 바치겠다고 편지를 썼으며, 카를로 알베르토도 교황에게 지지를 약속했다. 교황 자신은 「사람들이 가난한 시골 신부에 불과한 나를 나폴레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1 9 7 5 8

팔레르모에서 토리노까지: 1848년 초의 헌법 물결
1848년 유럽 혁명의 첫 봉기는 1월 12일 팔레르모에서 일어났다. 날짜는 일부러 팔레르모 태생인 페르디난도 2세의 생일에 맞추었고, 거사를 알리는 벽보는 사흘 전부터 거리에 붙었다. 시칠리아인의 반감은 자치의 억압과 나폴리 출신의 지배, 섬의 빈곤, 가혹한 경찰 통치에 뿌리를 두었고, 약 7만 명이 죽은 1837년 콜레라 때 정부가 일부러 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이 이를 키웠다. 봉기는 1월 22일 지르젠티, 29일 카타니아·메시나로 번졌고, 한 달 만에 100개가 넘는 코무네가 팔레르모의 혁명위원회에 합류했다. 부르봉 군대는 섬에서 물러났지만 메시나의 성채만은 끝까지 지켰다. 혁명위원회는 1월 23일 부르봉 왕정의 폐위를 선언했고, 다시 소집된 시칠리아 의회는 1812년 헌법을 되살려 3월 25일 시칠리아 왕국을 선포했으며, 4월 13일 페르디난도와 그 왕조를 영원히 폐위했다. 사실상의 국가 원수는 루제로 세티모였고, 혁명 정부는 트리나크리아를 그려 넣은 이탈리아 삼색기를 썼다. 10 11 12
시칠리아의 소식은 1월 17일 칠렌토의 봉기와 나폴리의 소요를 불렀고, 페르디난도 2세는 1월 29일 1830년 프랑스 헌장을 본뜬 헌법을 약속해 2월 10~11일 공포했다(영어 문헌에는 1월 23일이라는 날짜도 있다). 다른 군주들도 뒤따랐다. 토스카나의 레오폴도 2세가 2월 11일(17일이라는 자료도 있다), 피에몬테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2월 8일 칙령과 3월 4일 전문 공포로, 비오 9세가 3월 14일 「교회 국가 세속 통치 기본 헌장」으로 헌법을 내놓았다. 2월 23일 파리 혁명이 터졌을 때 이미 이탈리아의 세 나라(시칠리아를 따로 치면 넷)가 헌법을 갖고 있었다. 3월에는 파르마의 카를로 2세가 쫓겨났고, 모데나의 프란체스코 5세도 피를 흘리지 않으려 헌법과 사면을 약속하고 3월 21일 볼차노로 떠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12 13 14 15 1 2
그 가운데 오래 살아남은 것은 사르데냐 왕국의 알베르토 헌장뿐이었다. 1월 7일 토리노의 언론인 모임에서 신문 『일 리소르지멘토』의 편집인 카보우르 백작이 헌법을 청원하자고 제안했고, 각료 다수도 민중이 헌법을 강요하기 전에 내주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퇴위까지 고민하다가 2월 7일 밤샘 국가평의회 끝에 가톨릭의 국교 지위와 왕권의 명예가 보장된다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헌장은 집행권과 군 통수권을 왕에게 두고, 입법권을 선출 하원과 국왕 임명 상원에 맡겼으며, 언론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했다. 선거권은 25세 이상의 부유한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첫 입헌 정부인 발보 내각이 3월 16일 출범했다. 이 헌장은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기본법이 되어 1948년까지 효력을 지녔다. 7 16 2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에는 이런 양보가 없었다. 밀라노 시민은 1월 1일부터 해마다 500만 리라 넘게 국고에 들어오던 담배와 복권을 사지 않는 불매 운동을 벌였다. 1월 3일 시민들이 오스트리아 병사들에게 욕설과 돌을 퍼붓자 병사들이 칼과 총검으로 군중에게 돌격해 5명을 죽이고 59명을 다치게 했다. 라데츠키는 병사들을 닷새 동안 병영에 가두었고 시위는 가라앉았다. 2월 8일 파도바에서도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가 하루의 전투 끝에 진압되었다. 두 달 뒤 빈 봉기와 메테르니히 실각 소식이 닿자 밀라노와 베네치아가 다시 거리로 나섰다. 17 13

밀라노 5일과 산마르코 공화국
3월 17일 메테르니히 사임 소식이 밀라노에 퍼지자, 이튿날 총독 관저 앞에서 언론 자유와 경찰 해산, 시민 방위대 창설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곧 관저 습격으로 바뀌었고, 3월 18일 밀라노 전역에서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여든을 넘긴 노장 라데츠키는 처음 8,000명(나중에 1만 8,000~2만 명)을 거느리고 스포르체스코 성에 들어앉아 성벽과 공공건물을 지켰다. 시민들은 19일까지 약 1,700개의 바리케이드를 쌓고 창문과 지붕에서 총을 쏘았으며, 박물관의 소총까지 꺼내 들었다. 대주교가 시민 편에 섰고 적어도 100명의 사제가 싸움에 가담했으며, 바리케이드 위에는 비오 9세의 흉상이 올려졌다. 20일에는 루이지 토렐리와 스키피오네 바가자가 대성당 첨탑 꼭대기에 삼색기를 내걸었다. 고아원 아이들인 「마르티니트」가 전령으로 시내를 뛰어다녔다. 18 17 2
3월 20일 카를로 카타네오와 엔리코 체르누스키 등 젊은 민주파가 타베르나 궁에 전쟁위원회를 세워 전투를 지휘했고, 21~22일 밤에는 포데스타 가브리오 카사티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섰다. 라데츠키가 휴전을 제안하자 위원회는 둘로 갈렸다. 카사티와 귀족들은 휴전을 받아들이고 사르데냐 왕에게 개입을 청하자고 했는데, 피에몬테군으로 혁명의 「탈선」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다. 카타네오는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완전히 물러날 것을 고집하며 「굶어 죽는 편이 교수대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맞섰고, 그의 주장이 이겼다. 22일 밤 루치아노 마나라가 이끈 시민들이 토사 문(뒤의 비토리아 문)을 빼앗자, 라데츠키는 포위될 것을 두려워해 그날 밤 인질을 데리고 동쪽 120km의 「사각 요새지대」로 물러났다. 싸움에 진 쪽은 오스트리아였지만, 정치에서는 카타네오가 졌다. 위원회는 결국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롬바르디아로 들어와 달라는 청원을 보냈다. 1861년 기념비에 새겨진 전사자는 352명이다. 18 19 17
베네치아에서는 1월 18일 대역죄로 체포된 변호사 다니엘레 마닌이 3월 17일 시민들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이튿날 산마르코 광장에서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시위대에 발포해 8명이 죽었다. 3월 22일 마닌은 시민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감독관을 싫어하던 조선소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해군 조선소를 손에 넣고 옛 공화국의 구호 「산마르코 만세」를 외쳤다. 오스트리아군은 26일 베네치아에서 물러났고, 사각 요새의 베로나를 뺀 파도바·비첸차·트레비소·우디네 등 베네토의 도시들이 석호 편에 서서 마닌을 산마르코 공화국 대통령으로 뽑았다. 1797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하며 사라진 베네치아 공화국이 51년 만에 되살아난 셈이었다. 마닌의 지도력은 중간 계급의 지지에 기대었고, 하층민을 돌보면서 부르주아지에게 법과 질서를 약속해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혁명가들은 본토의 농민을 거의 모병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군 안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병사도 대부분 황제에게 충성했다. 20 3 21


「왕의 전쟁」: 사르데냐의 참전에서 살라스코 휴전까지
밀라노 5일이 끝난 이튿날인 3월 23일,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그의 동기는 자기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봉기를 틈타 영토를 넓히려는 데 있었다. 그는 사보이아 문장을 얹은 삼색기를 군기로 삼고 롬바르디아·베네토 주민에게 「형제가 형제에게 기대하는 도움」을 주러 간다고 선포했다. 피에몬테군은 약 6만 5,000명이었다. 여론에 밀린 다른 군주들도 군대를 보냈다. 교황군 1만 7,000~1만 8,000명(두란도의 정규 사단과 페라리의 의용 사단), 토스카나군 약 6,400명이 왔고, 나폴리는 2만 5,000명을 약속했으나 굴리엘모 페페가 이끈 약 1만 1,000명만 보냈다. 롬바르디아·나폴리 의용병과 산마르코 공화국 군대도 있었지만, 이 군대들은 서로 조율되지 않았고, 사르데냐 합병파에서 이탈리아 공화파까지 정치적 이상도 제각각이었다. 카타네오는 「적이 달아나니 이제야 왕이 온다」고 비꼬았다. 15 7
연합은 곧 무너졌다. 비오 9세는 4월 29일 추기경 회의 훈시에서 교황군의 베네토 진입을 부인했다. 가톨릭 강국 오스트리아와 싸울 수 없고 오스트리아 가톨릭과의 분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연설은 5월 2일 피에몬테 사령부에 닿았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독립의 대의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탄식했다. 교황이 이끄는 이탈리아라는 신겔프주의의 꿈이 여기서 깨졌다. 나폴리에서는 5월 15일 새 의회가 처음 열리기로 한 날 페르디난도 2세가 의원 선서 문제를 빌미로 의회를 해산했고, 톨레도 거리의 바리케이드를 스위스 용병의 대포로 무너뜨려 약 500명의 애국자를 죽였다. 그는 같은 날 북부로 보낸 군대를 불러들였고, 5월 21일 페페에게 귀환 명령이 닿았다. 페페와 일부 장교는 명령을 거부하고 베네치아로 가서 산마르코 공화국을 지켰다. 15 13 12 4
전장에서도 형세가 바뀌었다. 피에몬테군은 4월 30일 파스트렌고에서 이겼으나 5월 6일 베로나 앞 산타루치아에서 결판을 내지 못했고, 5월 25일 베네토를 거쳐 온 오스트리아 증원군이 베로나의 라데츠키와 합류했다. 5월 29일 쿠르타토네와 몬타나라에서는 피사 대학생 대대를 포함한 토스카나·나폴리 의용군 5,400명이 2만 명의 오스트리아군을 막아 서다 전사 166명, 부상 518명, 포로 1,178명을 내고 물러났다. 그들이 번 시간 덕분에 피에몬테군은 이튿날 고이토에서 이기고 페스키에라 요새를 손에 넣었으며, 병사들은 「이탈리아 왕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카를로 알베르토는 퇴각하는 적을 쫓기보다 점령지의 합병 투표를 먼저 챙겼다. 파르마는 5월 2일, 롬바르디아는 6월 8일 압도적 다수로 사르데냐와의 합병을 의결했고, 베네치아 의회도 7월 4일 127 대 6으로 마닌의 합병안을 받아들였다. 그 사이 오스트리아군은 6월 10일 비첸차를 빼앗았다. 15 7 3
7월 20일 양쪽은 7만 5,000명 대 7만 6,000명으로 거의 같은 병력이었다. 라데츠키는 7월 23일 피에몬테 제2군단을 쳐서 민초강 너머로 몰아내 적을 둘로 갈랐고, 24~25일 쿠스토차에서 피에몬테 주력을 꺾었다(전투 전체를 22~27일로 잡기도 하며, 오스트리아군 손실이 오히려 더 컸다). 피에몬테군은 질서 있게 물러났지만 아다강 방어선도 무너져 8월 4일 밀라노 성벽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탄약과 식량이 없어 왕은 이튿날 도시를 넘기고 군대를 안전하게 빼내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끝까지 싸우자는 밀라노 군중은 그레피 궁을 에워싸고 발코니의 왕에게 총을 쏘았고, 왕은 밤에 군대를 이끌고 빠져나갔다. 인구의 약 3분의 1이 망명자로 군대를 따라 떠났고, 6일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에 들어왔다. 8월 9일 살라스코 장군이 맺은 휴전으로 사르데냐군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전역에서 철수했다. 빈에서는 8월 31일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승리를 축하하며 처음 연주되었다. 15 22 7

「인민의 전쟁」: 교황의 도피와 로마 공화국
왕의 전쟁이 멈추자 민주파는 「인민의 전쟁」을 외쳤다. 피에몬테 정부에 퇴짜를 맞고 밀라노 임시정부 밑에서 의용병 5,000명을 모았던 가리발디는 휴전을 따르지 않고 8월 15일 루이노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냈으나, 26일 모라초네 전투 뒤 스위스로 피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휴전 소식에 사르데냐 판무관들이 떠나자 마닌이 3두 정치로 정부를 되찾았고, 페페가 군대를 지휘했다. 10월 마치니는 스위스에서 850명을 이끌고 코모 호수 쪽 인텔비 계곡으로 내려왔으나 주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토스카나에서는 레오폴도 2세가 10월 27일 민주파 주세페 몬타넬리를 총리로 임명해야 했다. 15 8 20
로마에서는 11월 15일 의회가 다시 열리던 날 교황 정부의 각료 펠레그리노 로시가 칼에 찔려 죽었다. 온건 자유주의자인 그는 신겔프주의 지지자였으며, 범인은 민중 지도자 치체루아키오의 아들로 추정된다. 이튿날 군중이 퀴리날레 궁으로 몰려가 민주 정부와 사회 개혁,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했고, 궁에 포격이 가해져 사상자가 나자 교황은 그들이 내민 각료 명단을 받아들였다. 스위스 근위대는 무장 해제되었고 교황은 자기 궁의 포로가 되었다. 11월 24일 밤 비오 9세는 평범한 사제로 변장해 로마를 빠져나가 양시칠리아 왕국의 요새 가에타로 갔고, 페르디난도 2세가 그를 맞았다. 교황은 가에타에서 로마의 새 정부를 「신성 모독」이라 선언했고, 그를 데려오려던 로마 시장의 사절단도 국경에서 돌려보냈다. 토스카나의 레오폴도 2세도 1849년 1월 30일 피렌체를 떠나 가에타로 갔고, 2월 15일 게라치·몬타넬리·마초니의 3두 정치 아래 토스카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23 14 9 4 15 13
로마의 임시 정부위원회는 21세 이상 모든 남성 시민이 투표하는 제헌의회 선거를 1849년 1월 21일로 잡았다. 교황이 가톨릭 신자의 투표를 금지해 교황령 어디에서도 투표율은 50%에 못 미쳤고, 그 결과 공화파가 우세한 「저주받은 자들의 의회」가 나왔다. 의원은 법률가 53명, 지주 27명, 의사 21명, 장교 19명, 교수 12명 등으로 부르주아와 전문직이 다수였고, 귀족도 25명 있었다. 2월 8일 열린 의회는 9일 자정이 지나 로마 공화국을 선포했다. 비테르보 출신 의원 카를로 루치아노 보나파르트는 호명에 「공화국 만세!」로 답했다. 공화국은 교황이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남을 권리를 보장했지만 교황의 세속 권력은 폐지했다. 망명 중 「로마 시민」으로 추대된 마치니는 3월 초 로마에 들어왔다(공화국 선포 당일 도착했다는 서술도 있다). 23 1 15
3월 29일 마치니는 카를로 아르멜리니·아우렐리오 사피와 함께 3두 정치의 한 사람이 되었고, 곧 정부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공화국은 무거운 세금을 없애고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교회의 대토지 일부를 몰수해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감옥과 정신병원을 개혁하고 언론 자유와 세속 교육을 도입했지만, 프랑스에서 루이 블랑의 국립 작업장이 실패한 것을 본 마치니는 「노동권」은 피했다. 세금을 낮추고 지출을 늘린 재정은 돈을 찍어 메웠고, 통화 가치가 떨어지며 물가가 치솟았다. 함락 직전 공포된 헌법은 종교의 자유(공식적으로는 시민에게 가톨릭과 유대교만 허용), 국가의 세속성, 사형과 고문의 폐지, 검열 폐지, 남성 보통선거, 교회 재산 징발을 통한 토지 개혁과 주거권을 담았다. 영어판 위키백과는 헌법으로 사형을 폐지한 세계 최초의 사례로, 이탈리아어판은 토스카나에 이은 두 번째 사례로 본다. 23 2 14 5

노바라에서 팔레르모까지: 1849년 봄의 반혁명
카를로 알베르토는 첫 전역의 패배를 씻으려 했다. 1849년 3월 1일 하원이 94 대 24로 전쟁 재개를 의결했고, 그는 12일 휴전 파기를 통고했다. 휴전 조건에 따라 여드레 뒤인 3월 20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실권을 폴란드 장군 보이치에흐 흐샤노프스키에게 넘겼다. 명목상 15만 명이던 피에몬테군은 병자와 휴가자를 빼면 11만 5,000명, 그 가운데 전선 병력은 6만 2,000명이었고, 라데츠키는 파비아에 7만 3,000명을 모아 두었다가 곧바로 티치노강을 건넜다. 3월 23일 노바라 남동쪽 비코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병 4만 5,000명의 피에몬테군은 보병 7만 명의 오스트리아군에게 무너졌다(전체 병력 추정은 피에몬테 4만 5,000~5만 9,000명, 오스트리아 4만 1,000~7만 명으로 엇갈린다). 피에몬테군은 전사 578명, 부상 1,405명, 탈주·포로 409명을, 오스트리아군은 전사 410명, 부상 1,850명, 포로·탈주 963명을 냈다. 그날 밤 왕은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왕은 내 아들 비토리오다」라며 퇴위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24일 비냘레에서 라데츠키와 휴전했다. 8월 6일 밀라노 강화로 사르데냐는 배상금 6,500만 프랑을 물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포르투갈 포르투로 망명해 7월 28일 그곳에서 죽었다. 15 24 7
엥겔스는 「신라인 신문」에서 이 퇴위를 이렇게 읽었다. 「이 패배 뒤 토리노에서 혁명과 공화국 선포가 예상된다는 것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맏아들에게 양위함으로써 그것을 막으려 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피에몬테 공화국은 생기지 않았다. 4월 1일 제노바가 헌장이 폐지되고 도시가 오스트리아에 넘어간다는 소문에 들고일어났으나, 알폰소 라 마르모라는 도시를 포격하고 약탈하게 한 뒤 6일 항복을 받았고 450명이 미국 배로 망명했다. 그래도 새 왕은 다른 이탈리아 군주들과 달리 알베르토 헌장을 거두지 않았고, 사르데냐는 반도에서 유일하게 삼색기와 대의제를 지킨 입헌국가로 남았다. 24 15 13
노바라 전투가 끝난 3월 23일, 아직 패전 소식을 모르던 브레샤가 티토 스페리를 앞세워 봉기했다. 누겐트의 오스트리아군은 성으로 물러나 시내에 포격을 퍼부었고, 증원군이 도시를 에워싼 뒤 율리우스 폰 하이나우 장군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시민들이 거부하자 싸움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4월 1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군이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을 학살했다. 열흘 동안 약 1,000명의 시민이 죽었고, 하이나우는 「브레샤의 하이에나」라는 별명을, 도시는 「이탈리아의 암사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부에서도 복고가 이어졌다. 토스카나에서는 온건파가 대공을 다시 불렀지만 다스프레의 오스트리아군 1만 8,000명이 들어와 5월 10~11일 리보르노를 포격하고 점령했다(당대 자료는 총살 317명, 사망 800명을 전한다). 교황의 공개 요청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은 2월 18일 페라라를 점령한 뒤 5월 8~16일 볼로냐, 5월 25일~6월 21일 안코나를 포위해 떨어뜨렸고, 8월 8일 볼로냐에서 사제 우고 바시를 총살했다. 25 26 15 14
시칠리아도 무너졌다. 페르디난도 2세는 1848년 9월 카를로 필란제리에게 군대를 주어 메시나를 치게 했다. 6~7일 메시나가 포격 끝에 함락되고 약탈되었는데, 함대는 수비대가 항복한 뒤에도 여덟 시간 동안 포격을 멈추지 않았고 영국 제독 파커는 그 잔인함을 비난했다. 이 포격으로 페르디난도는 「폭탄 왕(레 봄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칠리아 쪽의 요청으로 9월 18일 휴전이 맺어졌다. 1849년 2월 28일 페르디난도가 1812년 헌법을 본뜬 자치 법령을 제안했으나 팔레르모 정부는 거부했고, 3월 하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848년 12월부터 시칠리아군 참모장이던 폴란드 망명 장군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가 약 6,000명으로 필란제리군(영어판 1만 3,500명, 이탈리아어판 2만 4,000명)에 맞섰지만 4월 7일 카타니아가 떨어졌다. 의회는 4월 14일 왕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5월 15일 부르봉 군대가 팔레르모에 들어왔다. 루제로 세티모 등 사면에서 제외된 43명은 몰타로 망명했다. 나폴리에서도 왕은 1849년 3월 13일 의회를 해산했고, 1851년까지 약 2,000명이 투옥되었다. 11 10 12 15 14 27


로마 포위: 프랑스 원정군과 가리발디
가에타의 교황은 가톨릭 나라들에 군사 원조를 청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발이 묶여 로마까지 점령할 여유가 없었다. 결정적인 개입은 뜻밖에도 공화국 프랑스에서 왔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은 젊은 시절 교황령 봉기에 가담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을 압도적으로 찍어 준 교황 지상주의 가톨릭 유권자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줄이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다. 4월 24~25일 우디노 장군이 이끄는 7,000~1만 명의 프랑스군이 로마 서북쪽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했다. 스페인도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아래 군대(영어판 4,000명, 이탈리아어판 9,000명)를 가에타로 보냈고, 나폴리군 8,500명이 남쪽에서 공화국으로 쳐들어왔다. 교황이 복위될 것이라는 프랑스의 통고에 로마 의회는 「전쟁!」을 외치며 무력 저항을 결의했다. 23 15 14
공화국의 결의를 굳힌 것은 4월 27일 마침내 로마에 들어온 가리발디와 29일 도착한 마나라의 롬바르디아 저격병대였다. 4월 30일 낡은 지도를 들고 막힌 성문으로 행군한 우디노의 군대를 트라스테베레의 시민과 가리발디 군단, 시민병이 산판크라치오 문 앞에서 격퇴해 바다 쪽으로 쫓아 버렸다. 포로들은 「프랑스는 결코 어떤 인민의 자유에도 그 힘을 쓰지 않는다」는 프랑스 헌법 제5조를 인용한 전단과 함께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프랑스 공화국과 친구가 되기를 바란 마치니는 가리발디의 추격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가리발디는 5월 9일 팔레스트리나와 19일 벨레트리에서 나폴리군을 몰아냈고, 그 사이 프랑스는 페르디낭 드 레셉스를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벌었다. 23 8 15
증원군으로 3만 명과 강력한 공성포를 갖춘 우디노는 6월 4일까지 휴전을 지키겠다고 해 놓고 3일 새벽 빌라 팜필리를 기습했다. 16시간의 싸움 끝에 로마 쪽은 적어도 700명(가리발디 군단 500명, 마나라 부대 200명)을 잃었고, 프랑스군은 250~400명을 잃었다. 「이탈리아인의 노래」를 지은 시인 고프레도 마멜리도 이 무렵 다리에 입은 상처로 7월 6일 죽었다. 한 달 가까운 포위전 끝에 6월 29일 프랑스군이 우세를 굳혔다. 30일 의회에서 피투성이로 들어온 가리발디는 아펜니노산맥으로 물러나 싸움을 잇자며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로마다」라고 외쳤다. 7월 1일 휴전이 맺어졌고, 마치니와 3두 정치는 항복에 서명하지 않고 물러났다. 2일 가리발디가 약 4,000명을 이끌고 로마를 떠났고, 3일 프랑스군이 들어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렸다. 의회는 해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공화국 헌법을 의결해 캄피돌리오 발코니에서 낭독하게 했고, 7월 4일 저녁 해산을 요구한 프랑스군에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문명 세계 앞에서」 항의문을 남겼다. 28 14 23 8 15
가리발디는 오스트리아·프랑스·스페인·나폴리 군대에 쫓기며 베네치아로 가려 했다. 고된 행군 끝에 그는 남은 250명과 함께 중립국 산마리노로 피했고, 다섯째 아이를 밴 아내 아니타는 코마키오 근처에서 죽었다. 사르데냐 땅에 이른 그는 9월 16일 추방되어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마치니도 7월 12일 마르세유를 거쳐 스위스로 떠났다. 루이 나폴레옹은 8월 교황에게 대사면과 세속 행정, 나폴레옹 법전, 자유주의 정부를 요구했지만, 비오 9세는 「붉은 3두 정치」라 불린 추기경 셋에게 로마를 맡겼다가 1850년 4월 12일에야 돌아왔다. 그는 1848년의 헌법을 사실상 폐기하고 사형제를 되살렸으며, 유대인을 다시 게토에 가두었다. 프랑스군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질 때까지 로마에 남아 교황 정부를 떠받쳤다. 8 15 5 23 9 14

베네치아의 최후와 반동
노바라 뒤 사르데냐 함대가 베네치아 앞바다를 떠나야 했지만, 베네치아 의회는 4월 2일 마닌의 연설을 듣고 봉쇄 속에서도 싸움을 잇기로 의결했다. 브레샤를 진압한 하이나우가 3만 명을 이끌고 왔다. 본토의 마르게라 요새는 나폴리 출신 지롤라모 울로아의 약 2,000~2,500명이 지켰는데, 4월 28일 포위되어 5월 4일부터 포격을 받았고, 처음 3주 동안 6만 발의 포탄이 베네치아 쪽으로 날아왔다. 요새는 22일을 버티다 5월 26일 버려졌다. 6월 하이나우는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러 떠났다. 7월 12일 오스트리아군은 폭탄을 매단 무인 기구를 석호의 프리깃함에서 띄웠는데, 바람 때문에 도시에 떨어진 것은 없었지만 일부 역사가는 이를 역사상 첫 공중 폭격 시도로 꼽는다. 7월 28일부터 도시 자체가 포격을 받았다. 3 15
식량이 바닥나고 콜레라가 돌았다. 8월 22일까지 콜레라로 죽은 베네치아인은 2,788명이었다. 마닌은 끝까지 싸우자는 표결이 나오면 사임하겠다며 의회에 항복을 제안했고, 의회는 그에게 교섭 권한을 주었다. 조건은 8월 22일 합의되었고(항복 날짜를 24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27일 라데츠키가 베네치아에 들어왔다(오스트리아군 입성을 24일이나 28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17개월의 산마르코 공화국이 끝났다. 마닌은 가족과 동료 39명과 함께 프랑스 배로 망명했고, 그의 아내는 배가 떠난 지 몇 시간 만에 콜레라로 죽었다.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버틴 이탈리아의 깃발이 내려지면서, 1848~1849년 이탈리아 혁명은 모두 진압되었다. 3 15 20 1
반동은 길었다. 라데츠키는 1848년부터 1857년까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을 지내며 공개 태형, 무장 봉기에 대한 사형, 혁명 음모에 대한 종신형을 도입했다. 「도적 진압」이라는 명목 아래 처형이 이어졌고, 1852년 만토바의 「벨피오레의 순교자들」이 그 상징이 되었다. 남쪽에서는 1848~1851년 페르디난도 2세의 정책으로 많은 사람이 망명했고, 1850년 나폴리를 본 영국 정치가 글래드스턴은 부르봉 정부를 「체계로 세워진 신의 부정」이라고 고발했다. 망명자들은 흩어졌다. 카타네오는 스위스 루가노에, 마치니는 런던에, 세티모는 몰타에 자리 잡았고, 가리발디는 뉴욕에서 안토니오 메우치의 양초 공장에서 일했다. 29 13 12 8
평가
1848~1849년의 이탈리아 혁명은 영토로 보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되찾았고, 쫓겨난 군주들은 오스트리아·프랑스·스페인·나폴리 군대를 등에 업고 돌아와 헌법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치의 지형은 바뀌었다. 교황이 이끄는 이탈리아 연방이라는 신겔프주의는 4월 29일 훈시와 가에타 도피로 무너졌고, 반교권 좌파는 이를 교황권이 본질적으로 반동이라는 증거로 보았다. 마치니의 공화국은 로마와 피렌체에서 짧게 실현되었다가 외국군에게 짓밟혔다. 남은 것은 헌장과 삼색기를 지킨 사르데냐 왕국이었고, 주도권은 사보이아 왕가와 카보우르에게 넘어갔다. 이탈리아어판 위키백과의 요약대로, 이탈리아는 인민의 덕이 아니라 외교와 프랑스의 군사 원조, 사르데냐 왕국으로의 합병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마닌조차 파리 망명 중 공화주의를 버리고 사보이아 왕가 아래 통일을 내건 이탈리아 국민협회를 세웠다. 1 4 13 20
패배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는 농민이 있다. 역사가 프랑코 델라 페루타는 농민 대중의 부재가 이미 1848년 직후 당대인들에게 문제로 의식되었다고 지적한다. 1849년 마치니파 신문 「이탈리아 델 포폴로」의 한 익명 필자는 「밀라노 임시정부가 택한 계급 정치가 롬바르디아 농민을 민족 전쟁에 냉담하게 만들었다」고 썼고, 카타네오도 「자유의 벗들이 교외와 농촌의 인민을 무기를 드는 데 부르지 않았다」고 자책했다. 1851년 카를로 피사카네는 농민에게 「삽을 총으로 바꾸는 것이 그들의 이익」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세페 페라리는 「주권자 인민이 굶어 죽는데 공화국을 말해 봐야 소용없다」고 썼다. 실제로 밀라노 주변 농촌에서는 피에몬테군이 물러나자 「지주를 타도하라, 도시민을 타도하라, 라데츠키 만세」라는 외침이 나왔다. 오스트리아는 자유주의 지주에 맞서 농민에게 토지 개혁을 내비치며 그들의 환심을 샀다. 13
이 문제를 이론으로 끌어올린 것은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 멤버이자 한때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1930년대에 쓰였으나 1948~1951년에야 출간된 『옥중 수고』에서 그는 리소르지멘토를 「실패한 농업 혁명」으로, 통일을 주로 부르주아 출신인 지배 계급이 인민 대중 위에 우위를 굳힌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나폴리의 자유주의자 빈첸초 쿠오코가 1799년 나폴리 혁명을 두고 쓴 「수동 혁명」이라는 말을 빌려, 프랑스 혁명처럼 아래로부터의 능동적 혁명과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엘리트가 대중을 정치 경험에서 떼어 놓은 채 낡은 지배 계급의 지위를 지키며 조금씩 개혁하는 길을 걸었다고 분석했다. 그것은 「프랑스의 자코뱅 시기 같은 정치 경험을 인민 대중이 거치지 않게 하는」 길이었다. 반대편에는 민주파·민중·온건파·자유주의 정치가가 사보이아 왕가의 중재로 만나 섭리처럼 통일을 이루었다는 니코메데 비앙키·카를로 티바로니의 서술, 자유주의 소수의 업적을 높이 산 크로체와 오모데오, 리소르지멘토를 왕조 전쟁으로 찬양하며 파시즘의 전사로 삼은 볼페가 있다. 전후에는 데니스 맥 스미스, 루시 리올 등이 통일 과정을 다시 따졌다. 13 30 31 1 32
이 절의 출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의 이탈리아 1848년 논평으로 확인되는 것은 많지 않다. 엥겔스는 노바라 뒤의 퇴위를 공화국 혁명을 막으려는 수로 읽었다. 마치니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적대로 굳었다. 마치니는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1871년 파리 코뮌을 비난했으며, 마르크스는 마치니의 사상이 「중간 계급 공화국이라는 낡은 이념」에 지나지 않으며 1848년 이후 반동이 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1849년 로마의 방어자 가리발디는 코뮌을 지지하며 인터내셔널을 「미래의 태양」이라 불렀고, 그의 제자 다수는 바쿠닌의 사상으로 넘어갔다. 로마 공화국 헌법의 사형 폐지와 세속 국가, 남성 보통선거는 교황의 반동으로 지워졌고, 이탈리아어판 위키백과는 이런 개혁이 유럽 전역에서 현실이 되기까지 한 세기 넘게 걸렸다고 평한다. 오스트리아가 1849년 여름 로마와 베네치아, 헝가리를 함께 상대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의 패배는 1848년 혁명 전체의 운명과 맞물려 있었다. 24 5 8 14 15
결과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되찾아 라데츠키의 총독 통치로 탄압했고, 복위한 군주들은 헌법을 거두었으며, 교황은 프랑스군의 보호 아래 1870년까지 로마를 다스렸다. 마치니·가리발디·카타네오·마닌은 망명했다. 알베르토 헌장과 삼색기를 지킨 사르데냐 왕국만이 남아 통일의 주도권이 사보이아 왕가와 카보우르에게 넘어갔고, 신겔프주의와 마치니의 공화주의는 모두 힘을 잃었다. 농민 대중이 혁명에서 빠졌다는 문제는 당대인의 자기비판에서 그람시의 「수동 혁명」론까지 리소르지멘토 해석의 중심 쟁점으로 남았다.
연표와 지도
1848.03.22 밀라노 5일과 베네치아 봉기 뒤: 사각 요새지대로 물러난 오스트리아군
- 그 밖의 이탈리아 군주국 (교황령·양시칠리아·토스카나·파르마·모데나)과 복고 정부
- 이탈리아 혁명 정부 (밀라노·산마르코 공화국·시칠리아·로마 공화국·토스카나)
- 사르데냐 왕국
- 오스트리아 제국
- 프랑스 원정군
경계는 근사치이며, 영어판·이탈리아어판 위키백과의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밀라노 5일·산마르코 공화국·로마 공화국·시칠리아 혁명 항목의 작전 기록을 바탕으로 손으로 그렸습니다. 1859년 이전의 국경은 현대 국경과 달라 티치노강·포강·아펜니노산맥·트론토강을 따라 따로 그렸고, 오늘날 프랑스 땅인 니스·사부아는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1848년 3월 파르마·모데나의 임시정부는 혁명 쪽으로, 1849년 5월 오스트리아군이 들어간 토스카나는 오스트리아 쪽으로 칠했습니다. 1849년 7월 움브리아와 남부 라치오의 교황령 복고 지역(스페인·나폴리군 진주)은 회색으로 두었습니다. 지도 출처: ; ; ; ; ;
- 1831-07청년 이탈리아 창립
망명 중인 마치니가 마르세유에서 통일 공화국을 목표로 한 비밀 결사 「청년 이탈리아」를 세웠다.
- 11846-06-16비오 9세 선출
개혁 교황으로 기대를 모은 비오 9세가 선출되어 정치범을 사면했다.
- 21848-01-03밀라노 불매 운동과 유혈 충돌
담배·복권 불매 운동 중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군중을 공격해 5명이 죽었다.
- 31848-01-12팔레르모 봉기
페르디난도 2세의 생일에 맞춘 봉기가 1848년 유럽 혁명의 첫 불꽃이 되어 시칠리아 전역으로 번졌다.
- 41848-01-29나폴리 헌법 약속
칠렌토와 나폴리의 소요에 밀린 페르디난도 2세가 1830년 프랑스 헌장을 본뜬 헌법을 약속했다.
- 51848-03-04알베르토 헌장 공포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헌법을 공포했다. 이 헌장만이 혁명 뒤에도 살아남았다.
- 1848-03-14교황령 기본 헌장
비오 9세가 교황령에 헌법인 「기본 헌장」을 내렸다.
- 61848-03-18밀라노 5일 시작
메테르니히 실각 소식 뒤 평화 시위가 시가전으로 번졌고, 시민들이 약 1,700개의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 71848-03-22라데츠키 철수와 산마르코 공화국
밀라노 시민이 토사 문을 빼앗자 라데츠키가 사각 요새지대로 물러났고, 베네치아에서는 마닌이 조선소를 장악해 공화국을 세웠다.
- 81848-03-23사르데냐의 선전포고
카를로 알베르토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해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 1848-04-29비오 9세의 훈시
교황이 가톨릭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부인해 교황이 이끄는 통일이라는 신겔프주의의 꿈이 깨졌다.
- 91848-05-15나폴리의 반혁명
페르디난도 2세가 첫 회의 날 의회를 해산하고 톨레도 거리의 바리케이드를 포격으로 무너뜨렸으며, 북부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 101848-05-30고이토 승리와 페스키에라 함락
쿠르타토네와 몬타나라에서 의용군이 시간을 번 뒤 피에몬테군이 고이토에서 이기고 페스키에라 요새를 차지했다.
- 111848-07-25쿠스토차 전투
라데츠키가 쿠스토차에서 피에몬테 주력을 꺾어 전세를 뒤집었다.
- 1848-08-09살라스코 휴전
밀라노를 넘긴 사르데냐군이 휴전에 따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전역에서 물러났다.
- 121848-09-07메시나 포격과 함락
필란제리의 부르봉군이 메시나를 포격 끝에 차지했고, 페르디난도 2세는 「폭탄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 131848-11-15로시 암살
의회가 다시 열리는 날 교황 정부의 각료 펠레그리노 로시가 칼에 찔려 죽었다.
- 141848-11-24교황의 가에타 도피
비오 9세가 사제로 변장해 로마를 빠져나가 양시칠리아 왕국의 가에타로 피신했다.
- 151849-02-09로마 공화국 선포
남성 보통선거로 뽑힌 제헌의회가 교황의 세속 권력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 161849-02-15토스카나 공화국
대공 레오폴도 2세가 피렌체를 떠난 뒤 토스카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 171849-03-23노바라 패전과 카를로 알베르토 퇴위
전쟁을 재개한 피에몬테군이 노바라에서 대패했고, 카를로 알베르토가 그날 밤 아들에게 양위했다. 같은 날 브레샤가 봉기했다.
- 181849-04-01브레샤 함락
하이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이 열흘 동안 버틴 브레샤를 약탈했다. 약 1,000명의 시민이 죽었다.
- 191849-04-24프랑스군의 치비타베키아 상륙
루이 나폴레옹이 보낸 우디노의 원정군이 교황 복위를 내걸고 상륙했다.
- 201849-04-30산판크라치오 문의 승리
가리발디의 군단과 로마 시민이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 211849-05-15팔레르모 함락
부르봉 군대가 팔레르모에 들어와 16개월의 시칠리아 혁명을 끝냈다.
- 221849-06-03로마 포위 재개
3만 명으로 늘어난 프랑스군이 휴전 약속을 어기고 빌라 팜필리를 기습했다.
- 231849-07-03프랑스군의 로마 입성
가리발디가 4,000명을 이끌고 빠져나간 이튿날 프랑스군이 들어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렸다.
- 1849-08-06밀라노 강화
사르데냐가 오스트리아에 배상금 6,500만 프랑을 물기로 하고 전쟁을 끝냈다.
- 241849-08-22베네치아 항복
포격과 기근, 콜레라(사망 2,788명) 끝에 산마르코 공화국이 항복 조건에 합의했다.
관련 인물 34명
이탈리아 혁명 정부와 민주파 (밀라노 임시정부·산마르코 공화국·시칠리아·로마 공화국·토스카나)16명
지도부11
1831년 청년 이탈리아를 세워 통일 공화국 운동을 이끌었고, 1849년 3월 로마 공화국 3두 정치의 일원으로 정부를 이끌었으나 프랑스군의 포위에 무너졌다.
밀라노 의용군 장군, 로마 공화국 방어 사령관주세페 가리발디1807–1882남아메리카에서 돌아와 1848년 밀라노 임시정부의 의용군을 이끌었고, 1849년 4월 30일 프랑스군을 격퇴했으며 함락 직전 4,000명을 이끌고 로마를 빠져나갔다.
산마르코 공화국 대통령다니엘레 마닌1804–18571848년 3월 해군 조선소를 장악해 베네치아 공화국을 되살렸고, 17개월 동안 오스트리아의 포위를 버티다 1849년 8월 항복을 교섭했다.
밀라노 5일 전쟁위원회 지도자카를로 카타네오1801–1869밀라노 5일의 전쟁위원회를 이끌며 라데츠키의 휴전 제안을 거부했고, 사르데냐 왕정의 개입에 맞서 연방 공화국을 주장했다.
시칠리아 혁명 정부 수반루제로 세티모1778–18631848~1849년 시칠리아의 실질적 국가 원수였고, 사면에서 제외된 43명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몰타로 망명했다
밀라노 임시정부 수반가브리오 카사티1798–1873밀라노 포데스타로 임시정부를 이끌며 귀족 온건파와 함께 사르데냐 왕의 개입과 합병을 밀었고, 7~8월 사르데냐 총리를 지냈다
토스카나 총리, 토스카나 공화국 삼두주세페 몬타넬리1813–18621848년 10월 27일 레오폴도 2세가 총리로 임명했고, 1849년 2월 토스카나 공화국에서 게라치·마초니와 함께 삼두를 맡았다
로마 공화국 3두 정치카를로 아르멜리니1777–1863교황이 로마를 떠난 뒤 1848년 12월 교황 정부의 내무장관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준비했고, 1849년 3월 29일 마치니·사피와 함께 3두 정치의 일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국 3두 정치아우렐리오 사피1819–1890제헌의회 의원과 내무장관을 거쳐 1849년 3월 29일 마치니·아르멜리니와 함께 3두 정치의 일원이 되었고, 공화국이 무너진 뒤 마치니를 따라 망명했다
롬바르디아 저격병대 지휘관루치아노 마나라1825–18491848년 3월 22일 밤 밀라노 시민을 이끌고 토사 문을 빼앗았고, 1849년 4월 29일 저격병 600명을 이끌고 로마에 들어가 가리발디의 참모장이 되었으나 6월 30일 스파다 저택을 지키다 전사했다
「브레샤의 10일」 봉기 지휘자티토 스페리1825–18531849년 3월 23일 노바라 패전 소식을 모르던 브레샤의 봉기에서 반란군의 싸움을 앞장서 지휘했고, 4월 1일 도시가 항복한 뒤 마치니파 음모로 1853년 벨피오레에서 처형되었다
집행 · 지휘2
참여2
사르데냐 왕국6명
지도부4
알베르토 헌장을 공포하고 1848년 3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으나, 쿠스토차와 노바라에서 패하고 1849년 3월 23일 퇴위했다.
사르데냐 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20–1878쿠스토차 등에서 싸웠고, 노바라 패전 뒤 즉위해 비냘레에서 라데츠키와 휴전했다
사르데냐 첫 입헌 총리체사레 발보 (사르데냐 총리)1789–1853피에몬테가 이끄는 국가 연합을 주장했고, 1848년 3월 16일 첫 입헌 내각을 이끌었다
사르데냐군 참모장보이치에흐 흐샤노프스키1793–18611848년 휴전 뒤 카를로 알베르토가 불러들인 폴란드 장군으로, 1849년 전쟁에서 사르데냐군의 실권을 쥐었으나 3월 23일 노바라에서 라데츠키에게 완패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2명
반혁명 군주국과 개입군 (양시칠리아·교황·프랑스 원정군·스페인)8명
지도부4
개혁 교황으로 통일의 희망이 되었으나 1848년 4월 29일 훈시로 전쟁에서 물러났고, 로시 암살 뒤 가에타로 피신해 가톨릭 나라들의 무력 개입을 청했다.
양시칠리아 왕페르디난도 2세1810–18591848년 1월 헌법을 약속했다가 5월 15일 나폴리 의회를 해산하고 북부의 군대를 불러들였으며, 메시나 포격과 1849년 5월 팔레르모 점령으로 시칠리아 혁명을 진압했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1808–1873가톨릭 유권자와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 우디노의 원정군을 보내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교황을 복위시켰다.
토스카나 대공레오폴도 2세 (토스카나 대공)1797–18701848년 헌법을 내리고 롬바르디아에 군대를 보냈으나, 1849년 가에타로 피신했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돌아왔다
집행 · 지휘3
4월 24~25일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했고 4월 30일 가리발디 군단과 시민에게 격퇴되었다. 3만 명과 공성포로 증강한 뒤 6월 4일까지 공격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6월 3일 공격해, 7월 3일 로마에 들어가 로마 공화국을 끝내고 교황권을 되살렸다.
시칠리아 원정군 사령관카를로 필란제리1784–18671848년 9월 포격 끝에 메시나를 점령했고, 1849년 4월 카타니아를 함락해 시칠리아를 되찾았다
스페인 원정군 사령관페르난도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1809–18831849년 5월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리려 스페인군을 이끌고 가에타로 가 비오 9세 휘하에 들어갔다(병력은 영어판 4,000명, 이탈리아어판 9,000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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