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1989년 톈안먼 시위와 6·4 진압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던 학생들은 왜 계엄군과 마주쳤고, 진압은 중국의 길을 어떻게 정했는가?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1989년 봄의 시위는 부패 척결·표현의 자유·자치 조직의 인정을 요구하는 학생·노동자·시민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당 지도부는 대화와 계엄을 놓고 갈렸으나 덩샤오핑과 원로들은 군 투입을 결정했다. 6월 3~4일 군의 베이징 진입 과정에서 광장 주변과 시내 도로에서 대규모 살상이 일어났고, 남은 학생들은 협상 뒤 광장을 떠났다. 사망자 총수는 독립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개혁의 성과와 정치적 불만

1989년 봄의 시위는 개혁개방으로 사회가 바뀌는 가운데 일어났다. 농촌과 도시의 생활 수준이 높아졌지만 가격 통제와 시장 가격이 공존하면서 간부가 가진 허가권·유통망이 이익으로 바뀌었다. 학생과 시민이 비판한 ‘관다오’는 이런 권력과 거래의 결합을 상징했다. 임금과 장학금이 물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불만, 지식과 전문성이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지식인의 불만도 겹쳤다. 성장의 성과와 분배·발언권의 문제는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1

1988년 가격개혁 구상은 인플레이션 우려와 사재기를 불렀고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은 약 18%에 달했다. 당 지도부 안에서도 시장화의 속도와 사회적 안정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노동자에게 물가는 장바구니와 실질임금의 문제였고 학생에게는 졸업 뒤 취업과 사회적 지위의 문제였다. 이후의 시위를 처음부터 단일한 이념과 계층이 주도한 운동으로 설명하기보다, 다른 생활 경험에서 나온 불만이 부패 비판과 정치 개혁 요구로 만나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 1 2

정치적으로는 1986년 학생 시위와 1987년 후야오방의 실각이 가까운 기억이었다. 후야오방은 사상 통제에 비교적 관대한 지도자로 받아들여졌지만 자산계급 자유화를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고 총서기에서 물러났다. 1989년 초 팡리즈는 덩샤오핑에게 웨이징성 등 정치범의 석방을 요청했고 다른 지식인들도 공개 청원에 동참했다. 당 밖의 정치적 결사와 표현의 자유는 제한된 상태였으므로 추모나 청원은 사회적 요구를 드러낼 수 있는 드문 통로가 되었다. 3 4 1

1989년은 5·4 운동 7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40주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겹친 해였다.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와 국가의 발전, 신권위주의와 점진적 개혁을 논쟁했고 대학 안에서는 공개 토론과 대자보가 이어졌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말이 모두에게 같은 제도를 뜻하지는 않았다. 당의 틀 안에서 부패를 고치려는 요구와 더 넓은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입장이 함께 있었고, 이 차이는 정부와의 대화·단식·광장 철수를 놓고 되풀이되었다. 1 5

후야오방의 죽음과 거리의 청원

후야오방은 4월 8일 정치국 회의 중 심장 질환으로 쓰러졌고 4월 15일 사망했다. 쓰러진 날과 사망일을 같은 날로 적으면 사건의 출발점이 어긋난다. 그의 죽음은 1976년 저우언라이 추모 때처럼 공식 의례를 넘어 정치적 표현의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 화환과 추도문·대자보가 나타났고, 베이징대학과 인민대학 등에서 모인 학생들은 애도를 후야오방에 대한 정치적 재평가와 연결했다. 당국이 허용한 추모와 학생들이 원하는 공적 토론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3 1

4월 17~18일 학생들의 행진은 톈안먼 광장과 인민대회당으로 향했다. 요구에는 후야오방 재평가, 부패한 간부와 가족의 재산 공개, 언론의 자유, 교육 예산과 지식인 처우 개선, 시위에 대한 공정한 보도가 포함되었다. 목록은 집단마다 조금씩 달랐고 처음부터 정권 전복이라는 하나의 강령으로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청원을 받고 누가 학생을 대표하는지, 당국이 학생들의 말을 정당한 요구로 인정하는지가 빠르게 핵심 쟁점으로 바뀌었다. 1 5

신화먼은 당·국가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의 문이어서 청원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4월 20일 전후 이곳의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학생들은 폭행과 연행을 문제 삼았다. 22일 국장 날에는 많은 학생이 광장에 모였으며 대표 세 명이 인민대회당 계단에서 무릎을 꿇고 청원서를 들었다. 정부 책임자와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원하는 학생과 응답하지 않는 권력이라는 장면은 캠퍼스의 분노를 키우고 추모를 장기 시위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이 시기 다른 도시에서도 학생 집회가 나타났고 시안·창사 등에서는 충돌과 상점 약탈 같은 사건이 함께 보고되었다. 이런 상황은 정부가 운동을 질서의 위기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으나, 개별 도시의 소요를 베이징의 모든 참가자에게 그대로 돌릴 수는 없었다. 베이징 학생들은 수업 거부와 자치 조직을 통해 행동을 조정하려 했다. 당이 승인한 학생회와 별개의 조직을 인정할 것인지는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라 독립적인 사회 조직의 정당성을 둘러싼 문제였다. 1 5

4·26 사설과 애국적 운동의 주장

자오쯔양이 조선을 방문한 사이 리펑과 베이징시 지도부는 덩샤오핑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베이징 시장 천시퉁 등은 시위를 위험한 정치적 도전으로 보았고, 덩은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동란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 판단은 4월 26일 《인민일보》 사설 「기치를 선명히 하여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에 반영되었다. 사설은 학생 다수와 극소수 선동자를 구분한다고 했지만 운동의 전체 성격을 부정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이후 대응의 기준이 되었다. 6 7 1

학생들에게 동란이라는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이 공식 평가로 남으면 학교의 징계와 정치적 불이익,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사설을 철회하라는 요구는 자신의 안전과 운동의 정당성을 보장하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4월 27일 학생들은 경찰의 차단선을 지나 대규모 행진을 벌였고 길가의 시민들은 물과 음식을 건네며 지지했다. 정부가 시위를 고립시키려던 시점에 오히려 시민의 공감과 참가가 늘어났다는 역설이 드러났다. 6 1

귀국한 자오쯔양은 충돌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풀려 했다. 5월 4일 아시아개발은행 회의에서 학생들의 주된 요구를 애국적이라고 평가하고 합법적 질서 안의 대화를 강조했다. 이는 사설의 동란 규정과 긴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당 지도부가 사설을 공식 철회한 것은 아니었고 학생들이 요구한 독립적 대표와의 동등한 대화도 쉽게 성립하지 않았다. 학생과 지식인 일부는 온건한 대응을 기대했지만 실제 정책 결정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불분명한 상태였다. 8 6 1

5월 초에는 일부 학생이 수업으로 돌아가고 시위가 약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운동의 조직자들은 정부의 부분적 양보를 받아들일지 더 강한 행동을 할지 논쟁했다. 대화 대표단, 대학별 조직, 자치연합회는 서로 겹치면서도 같은 조직은 아니었다. 당국이 공식 학생조직을 대화 상대의 기준으로 삼고 자치 조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절차를 둘러싼 다툼도 계속되었다. 이런 교착 속에서 단식은 도덕적 긴급성을 만들어 정부를 움직이려는 새로운 전술로 등장했다. 5 1

학생·노동자·시민, 하나가 아니었던 운동

베이징 대학생 자치연합회, 흔히 고자련이라 부르는 조직은 대학 사이의 연락과 대표 선출을 시도했다. 왕단과 우얼카이시 등은 대학과 광장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모든 참가자가 한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단식단과 광장 방어 본부가 따로 만들어졌고 차이링 등이 점거 지도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별·지역별 참가자의 유입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누가 철수를 결정할 수 있는지도 논쟁이 되었다. 조직의 복수성은 운동의 활력과 의사 결정의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5 9 10 11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지원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제기했다. 한둥팡 등이 참여한 베이징 노동자 자치연합회는 물가와 실질임금, 간부의 특권, 작업장 권력의 불평등과 독립적인 대표성을 논의했다. 당이 지도하는 중화전국총공회가 있는 상황에서 자치 노동조직의 출현은 별도의 정치적 도전이었다. 노동자를 학생들의 배후 동원 인원으로만 보면 이들의 독자적 목소리와 진압 뒤 받은 무거운 처벌을 놓치게 된다. 두 자치연합회는 이름이 비슷해도 서로 다른 조직이었다. 2 12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에는 연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 지도부 일부는 운동의 질서와 애국적 이미지를 지키려 했고 노동자 조직과 같은 공간에서 행동하거나 총파업으로 확대하는 데 신중했다. 노동자들은 교육받은 학생만 정부와 대화할 자격이 있는 듯한 태도에 반감을 갖기도 했다. 이런 차이는 운동의 실패를 어느 한 집단 탓으로 돌리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요구한 운동 안에서도 대표성과 사회적 위계가 문제였음을 보여 주는 단서다. 2 5

언론인과 국가기관 직원, 교사, 의료진도 시위의 일부가 되었다. 공정한 보도와 거짓 보도의 중단을 요구하는 언론인의 행렬은 정보 통제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고 병원과 시민은 단식자를 돌보았다. 교통과 식량, 확성기와 인쇄물을 유지하는 일상적 지원이 광장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모든 베이징 시민이 같은 요구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고 생활·교통의 혼란에 지친 사람도 있었다. 참가 규모를 말할 때도 특정 날짜의 거리 인원과 수주간 운동에 관여한 전체 인구를 섞지 않아야 한다. 1 2

단식과 중소 정상회담

5월 13일 수백 명의 학생이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고 참가자는 수천 명으로 늘었다. 고르바초프의 방중 이틀 전이라는 시점은 국내 여론과 국제 언론의 관심을 결합했다. 단식자들은 건강을 건 도덕적 호소로 정부의 응답을 요구했고 가족과 시민의 동정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응급차와 의료진이 광장을 오갔으며 노동자와 공무원까지 지지 행진에 나섰다. 17~18일 베이징 거리의 인원은 당시 보도에서 1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었지만 정확히 집계된 수치는 아니었다. 1 5

고르바초프는 5월 1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중소 지도자의 정상회담은 오랜 분열을 끝내는 외교적 전환이었으나 광장 점거 때문에 예정된 환영 의전의 일부가 변경되었다. 방중을 취재하러 온 외신은 시위를 함께 보도했고 중국의 정치적 위기는 세계의 화면에 등장했다. 시위대는 소련의 개혁과 공개성을 참고했지만 고르바초프가 중국 학생을 지휘하거나 요구를 대신 정한 것은 아니었다. 정상회담이라는 국가 외교 일정이 국내의 정당성 위기와 충돌한 것이 중요했다. 13 1

5월 16일 자오쯔양은 고르바초프와 만난 자리에서 중요한 문제에서는 덩샤오핑의 판단이 결정적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공식 총서기가 따로 있는데도 은퇴한 원로의 권위가 최종 결정을 좌우하는 구조를 드러낸 발언이었다. 뒤에 자오는 덩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발언의 동기를 단정하기보다 당시 당·국가의 공식 직위와 실질 권력의 차이, 덩의 중앙군사위원회 지위와 원로들의 영향력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8 13 1

5월 18일 리펑과 학생 대표들이 만났고 대화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환자복 차림의 우얼카이시는 학생들이 이미 정부를 기다려 왔다고 항의했고 리펑은 질서 회복과 단식 중단을 강조했다. 단식자의 건강과 사설의 재평가, 학생 대표의 지위가 한꺼번에 걸린 회담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정부와 운동 모두 내부가 분열된 상황에서 공개 대화의 장면은 상대에게 양보할 여지를 넓히기보다 각자의 정당성을 대중 앞에 주장하는 무대가 되었다. 10 14 1

계엄 결정과 첫 번째 군 진입의 좌절

5월 17일 덩샤오핑 자택에서 열린 지도부 회의는 군 투입을 향한 전환점이었다. 리펑·야오이린과 자오쯔양·후치리의 입장은 갈렸고 차오스의 태도와 회의의 절차에 대해서도 회고마다 차이가 있다. 확실한 것은 자오가 계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대했고 덩과 군사·당 원로들이 군 투입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양상쿤 등 중앙군사위원회 지도부가 동원에 관여했다. 이를 정상적인 공개 의회 표결처럼 단순화하면 공식 기구와 원로 권위가 겹친 결정 구조를 놓치게 된다. 8 15 16 1 17

자오는 지지 기반을 잃은 뒤 5월 19일 새벽 광장을 찾아 단식 학생들에게 건강을 지키고 돌아가라고 호소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공개 활동이 되었다. 바오퉁 등 자오의 보좌진도 정치적 공격과 구금의 대상이 되었고 후치리는 뒤에 최고 지도부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당내 온건파를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지도부의 내부 분열은 운동에 타협의 가능성을 보이게 했지만 그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8 18 15 1

19일 밤 리펑은 지도 간부 회의에서 강경한 연설을 했고 20일부터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이 시행되었다. 여러 군구에서 온 부대가 시내로 들어가려 했으나 시민들은 도로에 차량과 장애물을 놓고 병사들을 둘러싸 설득했다. 처음에는 많은 부대가 발포하지 않았고 식량과 물을 주는 시민과 병사가 대화하는 장면도 나타났다. 군은 진입을 중단하거나 물러났다. 이 첫 대치의 상대적 평온은 이후 진압이 불가피한 자연적 귀결이 아니라 별도의 정치·군사적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14 1 19

군 안에서도 모든 지휘관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제38집단군 군장 쉬친셴은 병원에 있던 상황에서 출동 명령의 절차와 무력 사용에 문제를 제기하고 동원을 거부했다. 그는 교체되어 재판과 수감을 겪었지만 후임 지휘부가 이끈 제38집단군은 6월 진압에 참여했다. 천짜이다오를 비롯한 퇴역 장성들의 무력 사용 반대도 있었다. 개인의 항명이나 원로의 이견을 군 전체의 거부로 확대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군을 내부 토론이 전혀 없는 하나의 의지로 볼 수도 없다. 20 1

교착, 철수 논쟁과 마지막 단식

군의 첫 진입을 막은 뒤 광장은 약 2주 동안 교착 상태에 놓였다. 축제 같은 지지와 해방감이 있었지만 위생·물자·건강 문제가 쌓였고 참가자는 늘고 줄기를 반복했다. 일부 지도자는 대학으로 돌아가 장기적인 조직과 토론을 만들자고 했고 다른 이들은 정부가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채 물러나면 운동이 패배한다고 보았다. 어느 집단도 모든 참가자에게 철수를 강제할 수 없었다. 지방에서 새로 올라온 학생과 처음부터 광장을 지킨 학생의 경험도 같지 않았다. 1 5

5월 23일 마오쩌둥 초상에 물감을 던진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붙잡혀 공안에 넘겨진 일은 운동 안의 경계선을 보여 준다. 일부 참가자는 정치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국가와 혁명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했고, 운동이 무차별적인 반체제 행위로 보이는 것을 경계했다. 5월 30일에는 중앙미술학원 등 미술대학 학생들이 제작한 약 10미터 높이의 민주의 여신상이 마오 초상을 마주 보도록 세워졌다. 이 조각은 지친 광장의 결속을 높이고 국제 보도에 강한 상징을 제공했다. 1 21

6월 2일 류샤오보·허우더젠 등 네 사람은 단식을 시작하고 비폭력과 민주적 책임을 호소했다. 이들은 학생과 당국 모두가 적대와 폭력의 논리를 줄여야 한다고 보았고 이후 광장 철수 협상에도 관여했다. 이는 운동 내부에도 점거 지속만을 유일한 길로 여기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인 지식인 몇 명의 호소가 복수의 학생 조직과 거리의 시민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었다. 자발적인 대중운동의 책임과 대표성 문제는 마지막 순간까지 풀리지 않았다. 22 23 1

당·군 지도부는 그 사이 군을 재편성하고 시내 진입을 준비했다. 원로들은 상하이에서 강경하게 질서를 유지한 장쩌민을 자오의 후임자로 검토했으며, 군에는 수도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고 광장을 비우라는 목표가 주어졌다. 6월 3일 낮에도 군 병력과 시민의 대치, 무기와 차량을 둘러싼 충돌이 보고되었다. 외교 전문과 초기 언론 보도에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부대 이동과 소문이 섞여 있다. 진압 계획의 존재와 현장 상황에 대한 즉각적 보고의 정확성은 구분해야 한다. 1 19 17

6월 3~4일, 시내의 발포와 광장의 철수

6월 3일 밤 군은 서쪽과 다른 여러 방향에서 베이징 중심부로 전진했다. 무시디를 비롯한 창안제 서쪽 지역에서 실탄 발포가 일어나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시민과 구경하던 사람, 부상자를 옮기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병원에는 총상을 입은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제38집단군 등 여러 부대가 진압에 참여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병사와 시민이 계속 대치했다. 모든 장면을 광장 한 지점의 사건으로 그리면 군의 시내 진입 경로와 시민의 피해가 사라진다. 1 19 24

일부 군용 차량이 불타고 병사들이 공격받아 사망한 일도 있었다. 당국은 이런 장면을 반혁명 폭란의 증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군인에 대한 폭력과 그 발생 순서를 살피는 일은 비무장 시민에게 가한 광범한 발포를 정당화하는 것과 다르다. 현장에는 평화적으로 군을 막던 사람과 분노해 공격한 사람, 대치를 지켜보던 사람이 섞여 있었다. 군과 시위대를 전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 두 진영으로만 단순화하면 행위·책임·피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1 19 25

6월 4일 새벽 군은 광장을 포위했고 남아 있던 학생들은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에 모였다. 허우더젠 등은 군과 접촉해 철수를 협상했고 소등과 긴박한 대치 뒤 다수의 학생이 남쪽으로 빠져나왔다. 광장에 남은 학생 전체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이 철수 과정에 대한 여러 목격 증언과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광장 밖의 대규모 살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톈안먼 학살’은 광장을 중심으로 벌어진 진압 전체의 이름이며 피해 장소를 엄밀히 구분해야 이해가 더 정확해진다. 23 22 1 19

철수 뒤에도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류부커우에서는 광장에서 나가던 사람들에게 전차가 돌진해 사상자가 났다는 증언이 남았고, 도심의 발포와 통행 제한은 4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외교관과 언론인의 보고는 자신이 본 장면, 병원·목격자에게 들은 내용,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함께 담았다. 6월 초의 문서에 적힌 숫자와 부대 번호를 곧바로 최종 사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시각·위치의 증언을 맞추고 나중에 확인된 피해 기록과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 19

6월 5일 창안제에서는 흰 셔츠를 입고 가방을 든 한 남자가 전차 행렬 앞을 막아섰다. 여러 외신 기자의 사진과 영상은 이른바 탱크맨을 세계적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신원과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많고, 널리 유통되는 왕웨이린이라는 이름도 확정된 신원이 아니다. 한 사람이 거대한 군사력에 맞선 장면의 힘과, 그 장면만으로 수많은 사망자와 노동자·시민의 조직적 저항을 대신할 수 없다는 한계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 26 1

사망자 집계, 전국의 탄압과 지도부 재편

사망자 총수는 독립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시민 200여 명과 군인 수십 명의 사망을 발표했지만 이 집계는 발표 시점과 포함 범주가 제한되어 있었다. 병원과 목격자, 인권단체의 자료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더 큰 피해를 추정한다. 중국 적십자의 초기 2,600명 추정으로 전해진 숫자는 곧 철회·부인되었고 영국 외교 전문의 1만 명 주장도 정보원에게 전해 들은 추산이었다. 서로 다른 수치를 단순히 평균 내거나 가장 큰 숫자를 확정치로 삼을 수는 없다. 1 19 27

딩쯔린은 6월 3일 밤 아들 장제롄을 잃은 뒤 다른 유가족을 찾아 나섰다. 이 연결망에서 발전한 톈안먼 어머니회는 200명이 넘는 희생자의 이름과 사망 경위를 확인하는 기록을 쌓았다. 이 명단은 특정 시점에 확인된 개별 피해의 집합이며 사망자 전체를 추계하는 통계와 성격이 다르다. 유족은 조사·책임 규명·배상과 당국의 대화를 요구하면서 감시와 구금을 겪었다. 이름을 확인하는 작업은 공식 총계와 외국의 추정치 사이에서 실제 사람과 가족의 경험을 남기는 방법이었다. 28 29

시위와 진압은 베이징에만 머물지 않았다. 상하이·청두·시안 등 여러 도시에서 학생·노동자·시민이 행진하거나 도로와 철도를 막았다. 베이징의 발포 소식은 분노와 연대를 낳았고 당국은 각지에서 집회 해산과 체포를 벌였다. 청두에서는 6월 초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및 사망이 보고되었지만 규모와 경위에 관한 초기 보도는 서로 달랐다. 베이징의 사건을 전국에 똑같이 복제된 하나의 작전으로 보지 않고, 도시별 시위와 국가의 대응을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 1 24

진압 뒤 수배 명단과 체포가 이어졌다. 왕단은 은신하다 체포되어 뒤에 재차 수감되었고 한둥팡은 자수한 뒤 장기 구금과 질병을 겪었다. 노동자와 시민 가운데에는 신속한 재판과 사형을 당한 이들이 있었으며 유명 학생 지도자의 해외 망명만으로 이 후속 탄압을 설명할 수 없다. 홍콩의 지원자들이 꾸린 황작행동은 일부 수배자를 해외로 탈출시켰다. 팡리즈 부부는 다른 경로로 베이징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약 13개월 뒤 출국했으므로 모든 망명을 한 구조 작전의 성과로 묶어서는 안 된다. 9 12 30 4 24

6월 9일 덩샤오핑은 계엄군 간부를 만나 진압을 정당화하고 4·26 사설의 동란 규정이 옳았다고 강조했다. 6월 하순 당 중앙위원회 4차 전원회의는 자오쯔양을 총서기 등 지도부 직책에서 해임하고 장쩌민을 후임으로 세웠다. 자오는 2005년 죽을 때까지 연금되었고 후치리와 바오퉁 등도 각기 다른 처분을 받았다. 이 과정은 거리의 시위 진압이면서 당내 정책 노선과 권력 승계의 재편이었다. 공식 직위·군 통제·원로 정치가 결합해 개혁의 허용 범위를 다시 정했다. 8 15 18 25 17

평가: 경제개혁, 국가폭력과 기억

서방 여러 나라는 진압을 규탄하고 무기 거래와 고위급 접촉 등에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제재가 중국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조지 H. W. 부시는 공개 비판과 제재를 유지하면서 스코크로프트와 이글버거를 비밀리에 베이징에 보내 지도부와 접촉했다. 워싱턴은 인권 문제와 함께 중소 관계, 지역 안보, 장기적인 양국 관계를 계산했다. 정부의 공개 언어와 비공개 외교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제사회의 대응도 하나의 도덕적 의지로 단순화하기 어렵게 한다. 1 31 32

중국 내부에서는 자산계급 자유화와 화평연변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었고 정치적 조직 자율성의 공간은 크게 줄었다. 경제정책도 한동안 보수적 조정과 논쟁을 거쳤지만 덩은 1992년 남순강화로 시장 개혁을 다시 밀어붙였다. 따라서 사건의 결과를 모든 개혁의 중단으로 요약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경제 개방과 당의 정치적 독점이 함께 지속되는 경로가 더 뚜렷해졌다. 이 경로는 같은 해 동유럽의 정권 교체나 뒤이은 소련 해체와 대비되지만 결과가 달랐다는 사실만으로 각 사회의 조건을 같게 놓을 수는 없다. 1 25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이 사건은 집권 공산당과 노동자·학생의 관계를 묻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참가자 가운데에는 사회주의의 평등과 인민의 권리를 근거로 간부의 특권을 비판한 사람도 있었고 자유주의적 제도 개혁을 요구한 사람도 있었다. 당국은 당의 권력 유지와 사회주의 체제의 방어를 같은 것으로 제시했지만 운동의 모든 요구를 하나의 서방식 체제 전환 계획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독립 노동조직에 대한 탄압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 누가 노동자를 대표하는가라는 문제를 드러냈다. 2 5 25

사료를 읽을 때는 관찰과 해석, 공식 선전과 개인의 회고를 구분해야 한다. 중국 정부의 보고, 자오쯔양의 회고, 외국 대사관의 전문, 인권단체 조사, 유족과 현장 참가자의 증언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만들어졌다. 일부 외교 전문이 광장에서 대규모 사살을 보지 못했다고 적은 것은 해당 관찰자의 위치와 시간에 관한 증언이지 베이징 전체에서 살상이 없었다는 증명이 아니다. 반대로 현장 소문을 전한 전문의 숫자도 국가 문서라는 이유만으로 확정적 증거가 되지 않는다. 1 19 17 27

중국 대륙에서는 사건에 대한 공개 토론과 추모가 오랫동안 억제되었고 교육·언론·온라인 공간에서 관련 기억이 제한되었다. 홍콩에서는 오랫동안 대규모 촛불 추모가 이어졌으나 2020년 이후 금지와 수사·기소로 그 공간도 축소되었다. 톈안먼 어머니회와 해외 기록, 망명자들의 서로 다른 회고는 기억을 보존했지만 어느 하나가 운동 전체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불확실한 총계와 논쟁을 숨기지 않으면서 확인된 행위와 피해, 책임을 구체적으로 남기는 일이 이 사건을 다루는 역사 서술의 과제다. 1 29 27

결과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자오쯔양은 실각했다. 장쩌민이 총서기가 되었으며 수배·체포·처형과 망명이 이어졌다. 경제개혁은 조정기를 거쳐 다시 추진되었으나 독립적인 정치·노동 조직의 공간은 크게 축소되었다. 사건의 진상과 책임을 요구하는 유족의 기록 및 해외 자료는 공식 서술과 다른 기억을 보존했다.

연표와 지도

톈안먼 광장 베이징대학 무시디 시안 상하이 청두 홍콩 7 덩샤오핑 자택 13 창안제 1 톈안먼 광장 2 톈안먼 광장 3 톈안먼 광장 5 톈안먼 광장 8 톈안먼 광장 9 톈안먼 광장 10 톈안먼 광장 12 톈안먼 광장 4 인민대회당 6 인민대회당 14 베이징 11 계엄군 · 서쪽 창안제 → 무시디 → 광장 (개략) 계엄군11
  1. 1989.04.08중국
    후야오방이 회의 중 쓰러짐

    후야오방은 정치국 회의 중 심장 질환으로 쓰러졌고 일주일 뒤 사망했다.

  2. 11989.04.15중국
    후야오방 사망

    심장마비로 죽은 전 총서기를 추모하는 화환과 대자보가 대학과 광장에 나타났다.

  3. 21989.04.17중국
    추모 행진과 정치적 요구

    학생들이 광장으로 행진하며 후야오방 재평가와 부패 척결 등을 요구했다.

  4. 1989.04.20중국
    신화먼 앞 충돌

    경찰과 청원 학생의 충돌 뒤 폭행·연행 문제가 대학의 항의를 키웠다.

  5. 31989.04.22중국
    국장과 인민대회당 앞 청원

    학생 10만 명이 광장에 모였고 대표 세 명이 계단에 무릎을 꿇고 청원서를 올렸다.

  6. 1989.04.23중국
    대학생 자치 조직의 등장

    대학별 대표들이 공식 학생회와 별개인 자치 조직을 만들었다.

  7. 1989.04.26중국
    『인민일보』 「동란」 사설

    덩샤오핑의 발언에 따른 사설이 시위를 「계획적 음모·동란」으로 규정했다. 이튿날 최대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8. 1989.04.27중국
    4·26 사설에 항의하는 행진

    학생들은 동란 규정의 철회를 요구했고 많은 시민이 지지했다.

  9. 41989.05.04중국
    5·4 70주년과 자오쯔양의 연설

    자오쯔양이 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서 학생들의 요구가 애국적이라며 대화를 제안했다.

  10. 51989.05.13중국
    단식 시작

    학생 수백 명이 광장에서 단식에 들어갔고 3천 명으로 늘었다. 시민의 지지가 폭발했다.

  11. 61989.05.15–18중국
    고르바초프 방중

    30년 만의 중소 정상회담이 광장의 시위 때문에 환영식을 옮겨야 했다. 외신 1천 명이 시위를 세계에 전했다.

  12. 1989.05.16중국소련
    자오쯔양·고르바초프 회담

    자오는 중요 문제에서 덩샤오핑의 판단이 결정적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13. 71989.05.17중국
    덩샤오핑 자택 회의: 계엄 결정

    100만 명이 거리에 나온 날, 원로들과 상무위원이 계엄을 결정했고 자오쯔양은 반대했다.

  14. 1989.05.18중국
    리펑·학생 대표 TV 대화

    우얼카이시 등 학생 대표와 리펑의 공개 대화가 합의 없이 끝났다.

  15. 81989.05.19중국
    자오쯔양의 마지막 광장 방문 · 리펑의 계엄 연설

    새벽 자오쯔양이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했고, 밤에 리펑이 계엄을 선포했다.

  16. 1989.05.20–23중국
    시민이 군을 막다

    베이징 시민이 교외에서 계엄군의 진입을 막았고 부대는 철수했다.

  17. 1989.05.20중국
    계엄 시행

    리펑의 전날 밤 연설 뒤 베이징 일부 지역에서 계엄이 시행되었다.

  18. 1989.05.21중국
    퇴역 장성들의 무력 사용 반대

    천짜이다오 등 퇴역 장성들이 군의 시민 진압에 반대했다.

  19. 1989.05.28중국
    바오퉁 체포

    자오쯔양의 정치 비서이자 정치개혁 연구 책임자가 체포되었다.

  20. 91989.05.30중국
    민주의 여신상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이 세운 10미터 조각상이 마오의 초상을 마주 보았다.

  21. 101989.06.02중국
    지식인 네 명의 단식

    류샤오보·허우더젠 등 네 명이 비폭력과 대화를 호소했다.

  22. 111989.06.03–04중국
    6·4 진압

    밤 10시경 무시디에서 군이 발포하며 시내로 진입했고 새벽 광장이 비워졌다. 사망자는 수백~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23. 121989.06.04중국
    협상 뒤 광장 철수

    새벽 군과의 협상 뒤 남은 학생 다수가 남쪽으로 철수했다. 시내의 살상과 구분되는 과정이다.

  24. 131989.06.05중국
    「탱크맨」

    창안제에서 한 남자가 탱크 행렬을 막아선 사진이 세계에 퍼졌다.

  25. 1989.06.09중국
    덩샤오핑의 계엄군 연설

    덩은 진압을 정당화하고 4·26 사설의 동란 규정을 재확인했다.

  26. 1989.06.13중국
    학생 지도자 수배 명단

    학생 지도자에 대한 수배와 전국적 체포가 이어졌다.

  27. 141989.06.24중국
    4중전회: 자오쯔양 해임, 장쩌민 총서기

    자오쯔양이 「동란 지지와 당 분열」로 해임되었고 상하이의 장쩌민이 발탁되었다.

  28. 1989.07.01중국미국
    미국의 비밀 접촉

    스코크로프트·이글버거가 중국 지도부와 비밀 접촉했다.

관련 인물 27명

민주화 운동과 동조자13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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