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톈안먼 시위와 6·4 진압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던 학생들은 왜 계엄군과 마주쳤고, 진압은 중국의 길을 어떻게 정했는가?
1989년 4월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는 학생 집회가 부패 척결과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로 번졌고, 4·26 사설의 「동란」 규정과 5월 단식으로 100만 명이 광장에 모였다. 고르바초프 방중 중 지도부는 계엄을 결정했고 자오쯔양은 반대하다 실각했다. 6월 3~4일 밤 군이 시내로 진입해 수백~수천 명이 죽었다.
1989년 봄의 조건
1988년의 인플레이션(공식 18%)과 가격개혁 실패, 「관다오」로 상징되는 간부 부패, 1987년 후야오방 실각 이후 좁아진 정치 공간이 배경이었다. 지식인들은 1989년 초 팡리즈의 공개서한을 시작으로 웨이징성 등 정치범 석방을 청원했고, 5·4 운동 70주년과 건국 40주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겹친 해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1986년 시위의 기억과 「신권위주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근거 1 · 근거 2
4월 15일 후야오방이 정치국 회의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자 그의 죽음은 1976년 저우언라이 추모가 그랬듯 정치적 표현의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대학과 인민대학에 대자보가 붙었고 17~18일 학생들이 광장으로 행진해 후야오방 재평가, 언론 자유, 간부 재산 공개, 교육 예산 증액 등 7개 요구를 냈다. 20일 신화먼 앞의 충돌과 22일 국장 날 인민대회당 계단에 무릎 꿇은 세 학생의 청원은 정부의 무응답과 함께 분노를 키웠다. 근거 1 · 근거 3
4·26 사설과 5·4
자오쯔양이 북한을 방문한 사이 리펑과 베이징 시 지도부는 덩샤오핑에게 시위를 보고했고, 덩의 발언을 바탕으로 4월 26일 『인민일보』 사설은 시위를 「극소수가 계획한 음모이자 동란」으로 규정했다. 사설은 학생들을 분노하게 했다. 27일 5만 학생과 수십만 시민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행진했으며, 이는 정부가 「동란」 규정을 철회하라는 요구가 이후 협상의 핵심 쟁점이 된 이유였다. 근거 1 · 근거 4
귀국한 자오쯔양은 5월 4일 아시아개발은행 총회 연설에서 학생들의 요구가 애국적이며 「법과 질서 안에서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 4·26 사설과 다른 노선을 공개했다. 학생 조직 「고자련(高自聯)」은 대화 채널을 요구했고 언론인들은 「우리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며 보도 자유를 요구했다. 5월 초 시위는 소강 상태였으나 정부의 대화 거부와 4·26 사설 고수가 다음 단계를 불렀다. 근거 5 · 근거 1
단식과 고르바초프
5월 13일 왕단·우얼카이시·차이링 등이 이끄는 학생 수백 명이 고르바초프 방중을 이틀 앞두고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은 도시의 동정을 폭발시켜 노동자·지식인·언론인·심지어 당 기관 직원까지 행진에 나섰고, 17~18일에는 100만 명이 거리에 나왔다. 베이징 노동자 자치연합회가 결성되어 학생 운동을 넘어선 조직이 나타났으며 상하이·청두·시안 등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근거 6 · 근거 7)
15일 도착한 고르바초프의 환영식은 광장을 피해 공항에서 열렸고, 30년 만의 중소 관계 정상화는 시위에 가려졌다. 방중 취재를 위해 온 외신 1천여 명이 광장을 생중계했다. 16일 자오쯔양은 고르바초프에게 「중요 문제는 덩샤오핑 동지가 결정한다」고 말했고, 이는 뒤에 덩에게 책임을 돌리려 했다는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18일 리펑과 학생 대표의 텔레비전 대화는 결렬되었다. 근거 8 · 근거 9
계엄: 5월 17일에서 6월 3일까지
5월 17일 덩샤오핑 자택에서 열린 회의에서 덩은 「후퇴할 곳이 없다」며 계엄을 결정했고 상무위원 표결에서 자오쯔양과 후치리가 반대했다. 자오는 사직 의사를 밝힌 뒤 19일 새벽 광장을 찾아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했다. 그날 밤 리펑은 텔레비전으로 계엄을 선포했고 20일 발효되었다. 그러나 베이징 시민은 교외 도로를 막고 병사들을 설득해 부대의 진입을 막았으며, 군은 일단 물러났다. 근거 5 · 근거 1
2주의 교착 동안 광장의 학생 수는 줄었고 지도부는 철수를 놓고 갈라졌다. 30일 「민주의 여신」이 세워졌고, 지방 학생들이 계속 유입되었다. 원로들은 상하이의 장쩌민을 후임 총서기로 낙점했고 전국 군구에서 부대가 베이징으로 집결했다. 6월 2일 덩과 원로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광장을 비우기로 결정했고, 3일 오후 군의 진입 명령이 내려졌다. 근거 10 · 근거 11
6월 3~4일 밤
3일 밤 10시경 서쪽 창안제의 무시디에서 제38군이 실탄을 발사하며 시민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했고, 동·남쪽에서도 부대가 진입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광장이 아니라 무시디·시단·난츠쯔 등 시내 대로에서 총에 맞은 시민과 노동자였다. 새벽 1시 반 군이 광장을 포위했고 4시 소등 뒤 남은 학생들은 협상 끝에 5시경 남쪽으로 철수했다. 5일 창안제에서 탱크 행렬을 막아선 한 남자의 사진이 세계에 퍼졌다. 근거 1 · 근거 12
사망자 수는 확정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6월 말 「시민 200여 명과 군인 수십 명」이라 발표했고, 중국 적십자의 초기 추정 2,600명은 곧 철회되었으며, 영국 대사의 전문은 1만 명을 전했고 「톈안먼 어머니회」는 200명 이상의 이름을 확인했다. 진압 뒤 전국에서 수만 명이 체포되었고 베이징 노동자 자치연합회 회원 등 노동자들이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다. 6월 9일 덩샤오핑은 계엄군을 치하하며 사건을 「서방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다. 근거 13 · 근거 14
결과: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6월 하순 4중전회는 자오쯔양을 총서기와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하고 장쩌민을 총서기로 선출했다. 자오는 2005년 죽을 때까지 자택에 연금되었고, 팡리즈 부부는 미국 대사관에 13개월 피신했으며 학생 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홍콩을 거쳐 망명했다. 서방은 무기 금수와 제재를 가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스코크로프트를 비밀리에 보내 관계를 유지했다. 당 안에서는 「자산계급 자유화」 척결과 「화평연변」 경계가 강조되었다. 근거 1 · 근거 15
진압은 소련·동유럽의 1989년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몇 달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권력을 지켰고, 덩은 1992년 남순강화로 경제개혁을 재개하면서 정치 개혁은 봉인했다.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원칙, 애국주의 교육, 인터넷 검열은 이 사건의 유산이다. 중국에서 6·4는 공식 기억에서 지워졌고 홍콩의 촛불 추모도 2020년 이후 금지되었으나, 「톈안먼 어머니회」와 해외의 기록은 계속되고 있다. 근거 1 · 근거 16
결과
당은 자오쯔양을 해임하고 장쩌민을 총서기로 세웠으며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원칙 아래 경제개혁을 재개하되 정치 개혁을 봉인했다. 사건은 중국에서 공식 기억에서 지워졌고, 소련·동유럽의 1989년과 대비되는 중국 체제의 궤적을 결정했다.
연표와 지도
- 1989.04.15후야오방 사망
심장마비로 죽은 전 총서기를 추모하는 화환과 대자보가 대학과 광장에 나타났다.
- 11989.04.22국장과 인민대회당 앞 청원
학생 10만 명이 광장에 모였고 대표 세 명이 계단에 무릎을 꿇고 청원서를 올렸다.
- 1989.04.26『인민일보』 「동란」 사설
덩샤오핑의 발언에 따른 사설이 시위를 「계획적 음모·동란」으로 규정했다. 이튿날 최대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 1989.05.045·4 70주년과 자오쯔양의 연설
자오쯔양이 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서 학생들의 요구가 애국적이라며 대화를 제안했다.
- 21989.05.13단식 시작
학생 수백 명이 광장에서 단식에 들어갔고 3천 명으로 늘었다. 시민의 지지가 폭발했다.
- 1989.05.15–18고르바초프 방중
30년 만의 중소 정상회담이 광장의 시위 때문에 환영식을 옮겨야 했다. 외신 1천 명이 시위를 세계에 전했다.
- 1989.05.17덩샤오핑 자택 회의: 계엄 결정
100만 명이 거리에 나온 날, 원로들과 상무위원이 계엄을 결정했고 자오쯔양은 반대했다.
- 31989.05.19자오쯔양의 마지막 광장 방문 · 리펑의 계엄 연설
새벽 자오쯔양이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했고, 밤에 리펑이 계엄을 선포했다.
- 1989.05.20–23시민이 군을 막다
베이징 시민이 교외에서 계엄군의 진입을 막았고 부대는 철수했다.
- 41989.05.30민주의 여신상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이 세운 10미터 조각상이 마오의 초상을 마주 보았다.
- 51989.06.03–046·4 진압
밤 10시경 무시디에서 군이 발포하며 시내로 진입했고 새벽 광장이 비워졌다. 사망자는 수백~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 1989.06.05「탱크맨」
창안제에서 한 남자가 탱크 행렬을 막아선 사진이 세계에 퍼졌다.
- 1989.06.244중전회: 자오쯔양 해임, 장쩌민 총서기
자오쯔양이 「동란 지지와 당 분열」로 해임되었고 상하이의 장쩌민이 발탁되었다.
관련 인물 12명
주도 · 집행4
참여3
반대 · 저항2
대상 · 피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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