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로부터 민중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다」
1949년 보병장교로 임관해 루마니아 공산군에서 승진을 거듭, 1985년 차우셰스쿠에 의해 국방장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혁명이 발발하자 티미쇼아라 진압을 지휘했지만 17일 정치집행위원회에서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우셰스쿠에게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개 질책을 받았다. 22일 아침 차우셰스쿠와의 마지막 대면 직후 CC 청사에서 권총으로 가슴을 쏴 사망했고, 그의 죽음이 보도되자 루마니아군은 일제히 혁명 대열에 합류해 독재 정권 붕괴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