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1975

비소련 반혁명 진영 73명

소련 밖에서 혁명과 사회주의 진영에 맞섰던 지배자와 군인들.

야코프 알렉산드로비치 슬라시초프

Яко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лащё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85–1929 ✕ 피살

페레코프를 지킨 백군 장군

1921년 귀환을 호소하며 말했다. “소련 정권은 러시아와 그 인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권이다.”

야코프 슬라시초프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백군 장군으로, 남러시아 내전에서 크림 방어를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말 페레코프 지협의 방어선을 장악하고 1920년 초 붉은 군대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 열세한 병력으로 브랑겔의 크림 거점을 지탱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벌어진 가혹한 진압과 약탈 의혹은 군사적 역량과 함께 백군 통치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망명 뒤 소련으로 돌아가 전술을 가르치며, 패배한 진영의 군사 지식이 새 국가에 흡수되는 역설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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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핀란드 연대 소위
  • 1911–1917니콜라이 군사참모 아카데미 수학, 파제스 군단에서 전술 교육
  • 1917모스크바 근위연대 지휘관
  • 1918의용군 합류, 슈쿠로 유격대 참모장 및 쿠반 부대 지휘
  • 1919제4보병사단장, 남러시아군 제3군단장
  • 1919–1920크림 방어 지휘관, 페레코프 지협 방어선 운용
  • 1922–1929소련 군사학교 ‘비스트렐’ 전술 강사

고마쓰바라 미치타로

小松原 道太郎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계 1885–1940 ○ 자연사

노몬한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 장군

사단이 궤멸하던 1939년 8월 22일, 고마쓰바라는 일기에 "사이다병으로 지근거리 공격을 해도 효과가 없었고, 장병들은 절망 속에 남겨졌다"고 남겼다.

미치타로 고마쓰바라는 러시아를 연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정보와 참모 업무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제23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의 국경전쟁을 대규모 작전으로 이끌었지만, 주코프의 포위 공세 속에서 사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그의 경력에 책임을 묻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는 1940년 예편한 뒤 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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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육군사관학교 졸업
  • 1909–1910러시아 주재 무관보
  • 1919–1929육군참모본부 대소 정보 담당 및 모스크바 무관
  • 1932–1934만주국 하얼빈 특별기관장
  • 1934–1937제8보병여단 및 근위 제1여단 지휘관
  • 1937–1939관동군 제23사단장, 육군중장
  • 1939–1940할힌골 패전 뒤 관동군 참모, 예편

프랑수아 드 라 로크

François de La Rocque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5–1946 ○ 억류 후유증으로 병사

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돌린 불의 십자단의 대령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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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로리앙에서 장군의 아들로 출생
  • 1907–1918생시르 졸업, 모로코 근무와 1차 대전 복무
  • 1919–1928참모 근무를 거쳐 중령으로 예편
  • 1929–1931불의 십자단 가입, 회장 취임
  • 1931–1936불의 십자단을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확대
  • 1934.02.06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해산시킴
  • 1936.06동맹 해산령 뒤 프랑스사회당(PSF) 창당
  • 1936–1939PSF를 프랑스 최대 우파 정당으로 키움
  • 1940–1942페탱 지지, 비시 국민평의회 참여
  • 1942–1943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 운영, 1943년 3월 게슈타포에 체포
  • 1943–1945독일로 이송되어 억류
  • 1945–1946해방 후 프랑스 당국에 구금, 이듬해 병사
  • 1961저항 강제이송자로 사후 인정

알베르트 케셀링

Albert Kesselring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5–1960 ○ 전쟁범죄 유죄, 1952년 석방

이탈리아 방어선을 지휘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

1947년 베네치아 재판은 그를 이탈리아 점령지의 불법적 억압을 막지 않은 지휘관으로 유죄 판결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독일 제국군과 국가방위군을 거쳐 루프트바페 건설에 참여한 나치 독일의 고위 지휘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지중해 전구와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을 지휘하며 구스타프선과 고딕선 방어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 민간인과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전과 학살이 벌어졌고, 전후 재판은 그가 불법적 억압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1947년 사형 선고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52년 석방되었지만, 그는 전쟁 수행과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철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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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바이에른군 제2 야전포병연대에 입대
  • 1933제국항공성 행정국장, 루프트바페 창설 준비
  • 1936–1937루프트바페 참모총장
  • 1939–1941제1·제2 항공함대 지휘, 폴란드와 서부 및 동부 전선
  • 1941–1943남부 총사령관, 지중해 전구 독일군 지휘
  • 1943–1945남서부 총사령관 겸 C집단군 사령관, 이탈리아 방어
  • 1945서부전선 총사령관, 5월 미군에 항복
  • 1947–1952전쟁범죄 유죄 판결, 1952년 석방

헤르만 호트

Hermann Hoth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5–1971 ○ 전쟁범죄 유죄, 1954년 석방

기갑전의 성과와 동부전선 범죄가 겹친 독일 장군

1942년 12월, 호트의 제4기갑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헤르만 호트는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국방군의 기갑 지휘관으로 성장한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빠른 기동작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블라우 작전의 남부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구출 시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절멸전으로 이해했고 정치위원 명령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를 전달·집행했다. 전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조기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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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프로이센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및 야전 지휘
  • 1935–1938제18보병사단 지휘
  • 1939–1940제15군단 지휘,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 참가
  • 1941제3기갑집단 지휘, 민스크와 비테프스크 점령
  • 1941–1942제17군 사령관
  • 1942–1943제4기갑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구출 작전 지휘
  • 1948–1954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 유죄 판결과 란츠베르크 수감
  • 1956『기갑작전』 출간
  • 1971고슬라에서 사망

스타니슬라프 체체크

Stanislav Čeček
반혁명 세력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886–1930 ○ 자연사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휘관

1918년 5월 펜자에서 약 8,000명의 군단 병력이 체체크의 지휘 아래 집결했다.

체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체코 민족운동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연결한 장교였다. 1918년 그는 펜자에 집결한 약 8,000명의 최대 군단 집단을 지휘했고, 사마라 점령을 통해 코무치 정부가 세워질 조건을 열었다. 그의 행보는 군단 지휘관들이 볼셰비키 군대와의 충돌에서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 준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군 참모와 항공 행정을 맡으며 군단의 전투 경험을 국가 군사체계 건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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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프라하 제102보병연대 중위
  • 1914러시아군 체코 수렵대 참가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제4연대 지휘관
  • 1918펜자 집단 지휘관, 코무치 인민군 볼가 전선 총사령관
  • 1920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차장
  • 1921–1923프랑스 육군대학 유학
  • 1924–1926대통령 군사실장, 국방부 항공부서장
  • 1929–1930제5보병사단장 겸 체스케부데요비체 군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Gotthard Heinrici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6–1971 ○ 자연사

동부전선의 방어전문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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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프로이센 육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동부전선 복무, 참모 장교
  • 1937–1940제16보병사단 사단장
  • 1940–1941제12군단장, 프랑스 전역과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4제4군 사령관, 동부전선 방어전 지휘
  • 1944–1945제1기갑군 사령관, 폴란드·슬로바키아 방면 후퇴전 지휘
  • 1945.03–04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 제로 고지 전투와 베를린 방어 지휘
  • 1945–1948영국군 포로, 1948년 석방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87–1945 ✕ 자결

오키나와 소모전을 지휘한 일본군 장군

패전이 확정된 뒤에도 그는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 명령으로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오키나와에 배치된 뒤 제32군을 이끌며 해안 결전 대신 남부의 종심 방어와 소모전을 택했지만, 그 방어 체계는 주민 동원과 전투 편입을 수반했다. 1945년 5월 슈리에서 남부로 철수한 결정은 전투를 연장했으나 피란민을 전장에 몰아넣어 주민 희생을 키웠고, 그는 항복을 거부한 채 6월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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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제28기 졸업
  • 1918–1919시베리아 출병군 참모, 수송·배치 담당
  • 1937–1939제36보병여단장, 중국 전선 지휘
  • 1939–1941제11사단장, 만주국 호림 주둔
  • 1942–1944육군사관학교장
  • 1944–1945제32군 사령관, 오키나와 방어 지휘
  • 1945육군대장 승진, 마부니에서 자결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Heinrich von Vietinghoff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7–1952 ○ 자연사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 항복을 대표한 장군

1945년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그의 대리인들이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프로이센 군인 가문 출신인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는 제국군과 국가방위군을 거쳐 국방군의 상급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 침공과 소련 침공에 참여했고, 1943년부터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카세르타에서 연합군과 항복 조건을 조율하고 군을 대표해 서명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는 절차의 핵심 당사자가 되었다. 전후에는 포로 생활 뒤 서독 재무장 논의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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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프로이센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9–1935국가방위군 장교, 육군부와 군단 참모 복무
  • 1938–1939제5기갑사단 사단장
  • 1940–1942제46기갑군단 사령관, 발칸 및 동부전선 지휘
  • 1942–1943제9군 및 제15군 사령관
  • 1943–1944이탈리아 제10군 사령관, 구스타프선과 고딕선 방어
  • 1944–1945육군집단 C 및 남서방면군 최고지휘관
  • 1945카세르타 항복 협정에서 독일군 대표

피에르 테탱제

Pierre Taittinger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7–1965 ○ 병사

청년애국단을 세운 의원, 거리의 부대와 의사당 의석을 함께 가진 사람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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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918파리 출생, 1차 대전 참전
  • 1919–1940하원의원
  • 1924청년애국단 창설
  • 1925–1936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동맹을 지휘
  • 1934.02.06청년애국단이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로 참가
  • 1940.07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
  • 1943–1944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
  • 1944–1945해방 후 구금되었다가 석방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Alexander Vandegrift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네덜란드인 1887–1973 ○ 자연사

과달카날을 지키고 해병대를 지킨 장군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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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
  • 1912–1914쿠바·니카라과·멕시코 원정 복무
  • 1915–1923아이티 점령 및 헌병대에서 복무
  • 1942제1해병사단장, 과달카날 상륙과 방어 지휘
  • 1943제1해병상륙군단장, 부건빌 상륙 지휘
  • 1944–1947제18대 미국 해병대 사령관
  • 1945현역 해병 최초로 대장 진급
  • 1964회고록 《Once a Marine》 출간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7–1973 ○ 1949년 전범 유죄, 53년 석방

나치 독일 최고의 작전 전략가이자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정점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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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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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하노버 경보병대대 장교
  • 1914–1918제1차세계대전 참전, 통신·참모 장교
  • 1927–1931육군수송·차량화 부대 참모 및 교관
  • 1935–1938제2기갑사단 지휘관, 차량화 부대 감찰관
  • 1938–1940제19군단 사령관, 서부전역 기갑 지휘
  • 1941제2기갑집단 사령관, 바르바로사 작전
  • 1943–1945기갑부대 총감찰관,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9–1945 ✕ 자살

인종주의 전쟁국가를 만든 독재자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둘로 나누어 석유와 스탈린그라드를 동시에 추격하게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을 이끌어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인종주의·반공주의를 국가 통치와 팽창 전쟁의 원리로 만든 독재자였다. 그의 정권은 홀로코스트와 다른 대규모 학살을 조직했으며, 유럽 전쟁의 확산에 핵심 책임을 졌다. 1942년 여름 그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의 석유와 스탈린그라드를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과도하게 늘어난 보급선과 분산된 목표는 제6군의 포위와 패배로 이어졌다. 패전이 확실해진 1945년 4월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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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1918오스트리아 출생,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복무
  • 1919독일노동자당 가입, 정치 활동 시작
  • 1921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지도자
  • 1923–1924뮌헨 폭동 실패, 투옥 중 《나의 투쟁》 집필
  • 1933독일 국가수상, 나치 독재 수립
  • 1934–1945총통 겸 국가원수, 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2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분할, 스탈린그라드·코카서스 공세 지시
  • 1945베를린에서 자살

이시와라 간지

石原莞爾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89–1949 ○ 자연사

만주 침략을 설계한 이론가

“기름이 필요하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있는가.”

이시와라 간지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군사사상가로, 만주를 장차 미국과 맞설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1931년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철도 폭파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시작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면전에는 반대하며 자신의 팽창 구상이 초래한 결과와 충돌했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한 뒤 예비역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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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육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소위
  • 1915–1918육군대학교 수학, 2등 졸업
  • 1921–1925육군대학교 교관, 독일 주재 유학
  • 1928–1931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작전과장
  • 1935–1937참모본부 작전과장, 작전부장
  • 1937–1938관동군 참모부장 대리
  • 1939–1941육군 중장, 제16사단장, 예비역 편입
  • 1941–1945입명관대 국방학 연구소장, 동아연맹 운동 지도

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90–1946 ✕ 전범 판결 · 교수형

나치 전쟁기획의 실무 책임자

1940년 6월 30일 그는 “영국에 대한 최종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썼다.

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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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바이에른 제4야전포병연대에서 군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포병 장교
  • 1932–1935육군 작전부 근무
  • 1935–1939국방군 최고사령부 국가방위부 책임자
  • 1939–1945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
  • 1944육군 상급대장 진급
  • 1945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독일 항복문서 서명
  • 1946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90–1957 ○ 자연사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 야전사령관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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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제국군 제111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
  • 1935–1939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제10군 참모장
  • 1939–1940제10군, 이후 제6군 참모장
  • 1940–1941독일 육군 총참모부 작전 병참 담당 차장
  • 1942–1943독일 국방군 제6군 사령관
  • 1943상급대장, 1월 30일 야전원수로 승진
  • 1954–1957동독 군사사 연구 및 강의

에리크 하인리히스

Axel Erik Heinrichs
반혁명 세력 핀란드 핀란드계 1890–1965 ○ 자연사

전쟁과 외교의 경계에 선 핀란드 장군

1941년 한여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사상 최대인 10만 병력의 카렐리야군을 하인리히스에게 맡겨 스비르 강과 오네가 호수 방면 공세를 맡겼다.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만네르헤임과 가까이 일하며 전쟁 지휘와 군사참모 업무를 함께 맡았다. 겨울전쟁에서 카렐리야 지협 방어를 지휘한 그는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조율한 뒤 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공세를 이끌었다. 전후에는 무기 은닉 사건의 여파로 군 경력을 마쳤지만, 1948년 모스크바 협상과 만네르헤임 전기 집필에 참여하며 군사 전문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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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에서 핀란드 엽병으로 군사훈련과 동부전선 전투에 참여
  • 1918핀란드 내전에서 제7 엽병대대 지휘
  • 1931–1938제1사단 사령관
  • 1939–1940겨울전쟁에서 제3군단과 카렐리야 지협군 지휘
  • 1940–1941핀란드 육군 총참모장,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의에 참여
  • 1941–1942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동카렐리야 공세 지휘
  • 1942–1944총참모장으로 전쟁 수행과 독일군 연락 담당
  • 1945핀란드 국방군 총사령관, 무기 은닉 사건 뒤 사임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반혁명 세력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1891–1938 ✕ NKVD 암살 · 로테르담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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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 1891–1945 ✕ 전사, 사후 대장 추서

미국을 알았던 이오지마 방어 지휘관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므로 일본은 가능한 한 이 나라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관찰한 드문 일본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오지마에서 해안의 결전을 피하고 지하호와 종심 방어를 결합해 압도적 전력에 맞서는 소모전을 설계했다. 그 방어는 일본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미국군의 상륙과 섬 점령에 큰 비용을 부과했으며, 동시에 병사들에게 만세 돌격과 무의미한 자결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지휘 원칙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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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소위
  • 1923육군대학교 졸업, 성적 2위
  • 1927–1930미국 주재 무관보, 하버드에서 수학
  • 1931–1933캐나다 주재 무관
  • 1941–1943제23군 참모장, 홍콩 전투에 참전
  • 1943–1944근위 제2사단장
  • 1944–1945제109사단장, 오가사와라 병단장, 이오지마 수비 지휘
  • 1945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사후 육군 대장 추서

발터 모델

Walter Model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91–1945 ✕ 루르 포위망에서 권총 자살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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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

헬무트 바이들링

Helmuth Weidling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91–1955 ○ 옥사, 25년형

붕괴하는 제국의 마지막 베를린 방위 지휘관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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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8프로이센군 포병 및 비행선 부대 장교
  • 1919–1938국가방위군 포병 장교, 연대 지휘관
  • 1939–1941폴란드·프랑스 전역 및 동부전선 포병 지휘
  • 1942–1943제86보병사단 사단장
  • 1943–1945제41기갑군단 사령관
  • 1945.04제56기갑군단 사령관, 오데르 전선과 베를린 전투
  • 1945.04.23–05.02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 주둔군 항복 명령
  • 1952–1955소련 수감 중 전쟁범죄 유죄 판결, 복역

나폴레온 제르바스

Ναπολέων Ζέρβας
반혁명 세력 그리스 그리스인 1891–1957

점령기 저항과 반공 정치 사이의 군인 지도자

1942년 11월, 그는 영국 공작대와 ELAS의 아리스 벨루히오티스 부대가 합류한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자기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나폴레온 제르바스는 1941년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세우고 점령에 맞선 비공산주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작전에서 영국 특수작전집행부, ELAS와 협력했지만, 곧 영국의 지원과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을 중시하며 공화주의에서 왕정 지지로 선회했다. 해방 뒤에는 우익 정치인과 공공질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저항운동의 군사적 권위를 내전기의 국가 탄압과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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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지원병으로 입대해 발칸전쟁에 참전하고 하사관학교를 졸업했다.
  • 1916–1920국방운동에 가담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 1925–1926판갈로스 정권 아래 아테네 수비대 사령관과 공화국수비대 대대장을 지냈다.
  • 1941베니젤로스파 장교들과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창립했다.
  • 1942–1944EOEA를 조직해 에피루스에서 무장 저항을 지휘하고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참여했다.
  • 1946–1947국회의원이 되어 막시모스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과 공공질서 장관을 맡았다.
  • 1950–1951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내각에서 공공사업 장관을 지냈다.

햘마르 프리돌프 실라스부오

Hjalmar Fridolf Siilasvuo
반혁명 세력 핀란드 핀란드인 1892–1947 ○ 자연사

수오무살미에서 두 개 소련 사단을 모티 전술로 궤멸시킨 핀란드의 예거 중장

사단도 채 갖춰지기 전이었다: 실라스부오는 완편되지 않은 제9사단으로 소련 163사단을 연말까지 격파했고, 이어 라테 도로에서 44사단을 포위해 모티 더미로 만들었다.

헬싱키 출신의 예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예거대대에서 훈련받고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중대장으로 싸웠다. 겨울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9사단을 지휘, 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에서 소련 제163·제44 사단을 모티 전술로 포위·궤멸시켜 오울루를 향한 소련의 핀란드 분단 계획을 무너뜨렸다. 이 전공으로 소장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수오무살미 전투』를 썼으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에서 제3군단장으로 북부 전선과 독일군 축출을 지휘했으며, 1944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받고 5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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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훈련, 동부전선 참전
  • 1918핀란드 내전 백군 중대장, 탐페레·비푸리 전투
  • 1934–1939북포흐얀마 군관구 사령관, 오울루 시의원
  • 1939–1940제9사단장, 수오무살미·라테 도로에서 소련 2개 사단 격멸
  • 1941–1942제3군단장, 북부 핀란드-소련 전선 지휘
  • 1944카렐리야 지협 제3군단장, 부오크시 방어전
  • 1944–1945라플란드 전쟁 핀란드군 총괄 지휘관, 독일군 축출
  • 1944–1947제1사단장; 194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