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1939년 4월 1일의 마지막 전황 보고, 그가 직접 서명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가 되고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국민군은 최후의 군사 목표에 도달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6년의 독재가 시작됐다.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경력을 쌓아 서른셋에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된 직업군인. 1934년 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하면서 우파에게 「질서의 회복자」로 각인됐고, 1936년 7월 군부 반란에 합류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날아가 독일·이탈리아 수송기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해 10월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이 되었고, 1937년 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묶어 개인 지배를 굳혔다. 1939년 승리 뒤에는 정치책임법을 앞세운 대규모 처형과 투옥이 이어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에서는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을 보냈고, 1953년 미국과의 마드리드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전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안정화 계획 이후의 고도성장은 체제를 지탱한 또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975년 사망과 함께 체제도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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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갈리시아 페롤의 해군 집안에서 출생
1907–1910톨레도 보병사관학교 수학
1912–1926모로코 식민지 전쟁 참전,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을 거쳐 서른셋에 준장
1928–1931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임
1934.10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
1935–1936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인민전선 정부에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
1936.07.18–19군부 반란에 합류, 전세기 드래건래피드로 모로코로 이동해 아프리카군 공수를 조직
1936.10.01부르고스에서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으로 선포됨
1937.04.19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단일 「국민운동」으로 통합
1939.04.01전쟁 종료 선포, 정치책임법에 따른 대규모 처형·투옥 개시
1940–1943앙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 파병
1953–1955미국과 마드리드 협정, 교황청과 정교협약 체결; 1955년 유엔 가입으로 고립 탈출
1959안정화 계획으로 자립경제 노선을 접고 고도성장기에 진입
1969–1973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 1973년 총리 카레로 블랑코가 ETA에 암살됨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로널드 스코비는 제1·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영국 육군 장군으로, 토브루크와 몰타를 거쳐 제3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1944년 해방 직후 그리스에서 영국의 군사 개입을 대표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12월 1일 ELAS 무장해제 명령은 국민해방전선과 영국·그리스 정부 세력의 충돌을 촉발했고, 스코비는 아테네 전투에서 영국군 작전을 지휘했다.
경찰은 1940년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 《리조스파스티스》를 내세워 당원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4·8월 독재에서 공안과 반공 탄압을 조직한 핵심 관료였다. 그는 아시팔리아의 정보망과 고문, 섬 강제추방을 결합해 그리스 공산당(KKE)의 공개 활동과 지도부를 무력화했다. 1940년에는 경찰이 통제하는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된 《리조스파스티스》를 만들어 당원들을 혼란시키려 했다. 해방 뒤에도 반공주의를 정치 자산으로 삼아 의원이 되었고, 독재 시기의 책임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스테판 로베츠키는 폴란드의 직업군인이자 독일 점령기 국내군의 초대 총사령관으로, 분산된 저항 조직을 통합된 지하군으로 묶은 인물이다. 그는 독일군의 패퇴와 소련군의 진입이라는 상반된 조건 속에서 봉기를 구상했고, 1942년 국내군 창설 뒤 전면 봉기 계획을 발전시켰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된 뒤 독일의 반소 협력 제안을 거부했으며, 바르샤바 봉기 직후 작센하우젠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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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제5 보병연대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1919–1920폴란드군 참모장교로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
1923–1926군사교육과학연구소 학술부장, 군사 주간지 《프셰글롱트 보이코비》 창간·편집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나카 류키치 장군은 전후 증언에서 '대미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주장한 단 한 사람이 쓰지 마사노부였다'고 밝혔다.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는 스스로 작성한 국경 방침서로 1939년 할힌골 사건을 일으켜, 아래로부터의 월권(게코쿠조)으로 소련과의 국경전쟁을 밀어붙였다. 할힌골 패배 뒤에는 소련의 화력을 목격한 경험을 근거로 대소전을 반대하면서도, 도리어 대미 개전의 가장 강경한 주창자가 되었다. 말레이 작전 입안자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숙칭 학살의 주모자였던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주했다가 귀국해 중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맥나마라가 전황 측정 지표에 적어둔 'X 인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랜스데일은 '베트남 농촌 서민들의 감정'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연필로 그 항목을 지워버렸다.
미 공군 소장으로, 광고계에서 군 정보장교로 전향한 후 필리핀 훅발라합 반란 진압에서 심리전을 무기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군사임무단을 이끌며 응오딘지엠 정권을 뒷받침했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몽구스 작전의 6단계 계획을 제출해 그해 10월 쿠바 내 반란과 정권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엠 축출에 반대하며 1963년 강제 전역했고, 말년에는 심리전과 대분란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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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7육군 군사정보대 및 OSS 복무, 소령 진급
1947–1950미 공군 대위로 전군, 전략정보학교 교관
1950–1954필리핀 합동군사원조단, 훅발라합 반란 진압 심리전 지휘, 막사이사이 대선 승리 지원
1954–1957사이공 군사임무단장, 지엠 정권 수립 지원, 북부 가톨릭 남하 작전 주도
1957–1961국방부 특수작전 부차관보, 해외 대분란전 기획
1961–1963몽구스 작전 작전책임자,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 제출(1962.2)
베러 키라이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경력을 거쳐 해방 뒤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과 확대에 참여한 장성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전방 경계와 지휘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고, 서울 철수 과정의 한강교 조기 폭파 명령에도 책임이 있었다. 개전 직후 해임된 그는 경남 방어전선에 투입되었고,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1917년 10월에 일어난 것은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였다... 거짓 구호 아래 현대 국가의 신경 중추를 은밀히 장악한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가로, 소련학 '전체주의 학파'의 지적 설계자였다. 그의 2권짜리 대작은 10월 혁명이 대중 봉기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 지식인들의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 통치는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팀B(1976) 책임자와 레이건 행정부 NSC 소련·동유럽 국장(1981~82)을 지내며 자신의 학문을 대소 강경 정책으로 옮겼고, 이는 훗날 소련 붕괴를 앞당긴 요인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