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빌노 근교의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87년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처형된 바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다.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로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내고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단을 이끌었으나, 그에게 사회주의는 갈수록 독립의 수단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세워 러시아와 싸웠고, 1918년 11월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를 아우르는 연방으로 러시아를 밀어낸다는 구상 아래 1920년 키예프로 진공했다가 바르샤바 앞까지 몰렸으나, 8월의 반격으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리가 조약의 국경을 얻어냈다. 192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26년 5월 쿠데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폴란드를 통치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35년 5월 병사했다. 소비에트의 선전과 수사 문서에서 그는 폴란드 반동의 화신이자 「폴란드 군사조직」의 창설자로 살아남아,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근거 서사에까지 등장한다.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요새도, 대포도, 외국의 원조도, 모든 병사 각자가 자신이 조국의 수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30년간 복무한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으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중장까지 올랐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총사령관으로 적위대를 진압하고 섭정이 되어 독립을 공고히 했으며,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사명은 볼셰비즘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에 맞서 싸웠고, 독일과 공동전선을 폈으나 레닌그라드 공격은 거부했다. 1944년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독일군을 축출하여,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점령을 면한 국가로 핀란드를 남겼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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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1943년 9월 8일 휴전이 발표됐을 때, 바돌리오 정부는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보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전쟁의 지휘관으로,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제국의 폭력을 집행했다. 그는 무솔리니 체제의 핵심 군사 관료였지만, 1940년 그리스 전역의 실패 뒤 사임하고 왕실의 정권 교체에 참여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뒤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발표와 군 지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독일군의 무장해제와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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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시카고의 갱스터들이 차에 방탄유리를 달 수 있다면, 우리 조종사들도 같은 것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 공군 장교 휴 다우딩은 전투기 중심의 방공을 일찍 중시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전투기지휘부에서 레이더, 관측망, 습격 plotting, 무선통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소수의 전투기로 독일 공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1940년 영국 전투에서 예비 전력과 조종사를 보존한 신중한 운용은 방어의 지속성을 높였지만, 전후에는 대형 편대 전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지휘권을 잃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출발한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민족주의 혁명으로 전향해 파시즘을 창시했다. 그는 1922년 로마 진군 뒤 총리가 되었고, 폭력과 제도 개편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일당 독재로 바꾸었다. 식민 전쟁과 나치 독일과의 동맹,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탈리아를 심각한 군사적·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1943년 실각한 뒤 독일 점령지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이끌었으나, 1945년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자 항공전력의 가능성을 일찍 파악한 전략가였다. 미국의 산업력과 석유 우위를 직접 관찰해 장기전의 승산을 낮게 보았지만, 전쟁이 결정되자 일본의 우세를 단기간에 확보할 방도를 찾았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진주만 공격을 밀어붙여 남방 자원 공세의 시간을 벌려 했고, 그 선택은 전술적 성공과 미국의 전면 참전을 함께 낳았다. 1942년 미드웨이 패배 뒤에도 전쟁을 지휘하다 1943년 미군의 요격으로 전사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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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