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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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니콜라이 스코블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백군 장교로, 코르닐로프 타격사단을 이끈 젊은 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망명 뒤 그는 러시아 전군사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협력자로 포섭되어 백계 러시아인 망명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사건을 둘러싼 독일 측 문서와 정보가 스탈린의 숙청을 촉발했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주도 아래 조작·활용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1937년 예브게니 밀러 납치에 관여한 뒤 사라졌으며, 그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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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1933–1934OGPU 부의장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 특별 트로이카 의장으로 탄압을 주도한 뒤, 1937~1938년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볼린현 돌스크의 우크라이나인 농업노동자 집안에서 루카 그리추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8년 입당해 두브로비차 봉기를 조직했다. 1920년부터 체카에서 일하며 튜튜닉 장군을 폴란드에서 끌어낸 작전에 참여했다. 1934~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를 이끌며 공화국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년 10월부터 NKVD 감옥부 부부장,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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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두브로비차 봉기의 조직자·지도자로 활동한 뒤 붉은군대에 복무했다.
1920–1934체카·GPU·OGPU에서 근무했고, 카바르다발카르 OGPU 지역부서장까지 올랐다.
1934–1937카바르다발카르 자치주·공화국 국가보안부서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1938카바르다발카르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뒤 소련 NKVD 감옥부 부부장과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1939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1936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피고들의 진술을 짜고 연습시켰으며, 이듬해 숙청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펜자현 인사르의 산림 감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프리놉스키의 도움으로 적위대 사무소에 들어갔고 1921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1929년 알마아타에 유배된 트로츠키를 비밀리에 오데사로 옮겨 국외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오게페우 참사회와 NKVD의 비서,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로 야고다의 신임을 받았고,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피고마다 진술을 연습시켰다. 1937년 3월 해임되어 체포되었고,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불리한 상세한 진술을 한 뒤 1938년 3월 15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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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펜자현 체카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해 말 전러시아 체카 비밀정치부로 옮겼다.
1929알마아타에서 유배 중이던 트로츠키를 오데사로 비밀리에 이송하고 소련에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1929–1934오게페우 참사회 비서, 이어 제1비서를 지냈다.
1934–1937NKVD 비서와 NKVD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대본을 작성하고 피고들의 진술을 연습시켰으며, 1937년 3월 해임·체포되었다.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대한 증언을 한 뒤, 3월 13일 사형을 선고받아 15일 총살되었다. 1988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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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1934–19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1936.09내무인민위원
1936–19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