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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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 드미트리예비치 데리바스

Терентий Дмитриевич Дериба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38 ✕ 처형

극동의 보안 총독

1937년 8월 11일, 예조프가 류시코프의 전보를 스탈린에게 전달하자, 스탈린은 여백에 직접 써넣었다. "데리바스를 체포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 몰로토프와 보로실로프가 '찬성'을 덧붙였고, 데리바스는 다음 날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출신으로 1929년부터 극동 OGPU-NKVD 전권대표를 맡아 대일 방첩 작전과 BAM 강제노동 건설을 지휘했다. 8년간 '극동의 총독'으로 불렸으나 대숙청에 휩쓸려 1938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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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GPU·OGPU 비밀국장
  • 1927–1929OGPU 비밀작전총국 제1부국장
  • 1929–1934극동변경주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4BAM 건설 책임자
  • 1934–1937극동변경주 NKVD 관리국장 겸 극동군 특별부장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나프탈리 아로노비치 프렌켈

Нафталий Аронович Френкель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자연사

죄수에서 총국장으로, 제 침대에서 죽은 굴라크 행정가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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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솔로프키 수용소 죄수에서 행정가로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공사 책임자
  • 1933–1937BAM 수용소장
  • 1937–1947NKVD·MVD 철도건설총국장
  • 1947중장 계급과 연금으로 퇴역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쿨로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Ак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소련 검찰제도의 창설자, 국가보안과 사회주의 적법성의 틈바구니에서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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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b) 입당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운동
  • 1917–1918우랄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18–1920뱟카·오렌부르크 현당 위원회 서기
  • 1920–1921키르기스 당뷰로 서기
  • 1921–1922크림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22–1927도네츠크 광산노조 위원장
  • 1927–1931전우크라이나 노조평의회 의장
  • 1930–1931노농감찰 부인민위원 ·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1–1932OGPU 제1부의장
  • 1933–1935소련 검찰총장 (초대)
  • 193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라자리 이오시포비치 코간

Лазарь Иосифович Ког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처형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자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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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OGPU 굴라크 수장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건설 책임자
  • 1932–1936굴라크 부수장
  • 1936–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39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바노비치 리조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ыж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심문 중 사망

예조프 곁에서 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뒤 심문실에서 죽어 간 측근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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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군사위원·군관구 행정직
  • 1930년대 초농업 행정과 모스크바시 행정 근무
  • 1937.07–08NKVD 총무경리국(AKhU)장
  • 1937.08–12소련 내무부인민위원
  • 1937.12–1938.10소련 임업인민위원

레프 니콜라예비치 벨스키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Бель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41 ✕ 처형

소비에트 민병대를 관장한 부인민위원

1931년 야고다의 '베스나' 사건 조작에 항의했다 해고된 인물이, 6년 후 예조프 휘하에서 대숙청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체카 출신으로 1934년 소비에트 민병대 총국장, 1936년 예조프 휘하의 내무부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기 지방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1939년 체포돼 1941년 처형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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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NKVD 노농민병대 총국장
  • 1936–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39철도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체포, 재판과 처형

유벨리안 다비도비치 숨바토프-토푸리제

Ювельян Давидович Сумбатов-Топур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계 모친) 1889–1960 ○ 구금 중 사망

대량작전기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된 체키스트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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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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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40 ✕ 처형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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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프세볼로트 아폴로노비치 발리츠키

Всеволод Аполлонович Бали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37 ✕ 처형

우크라이나 보안기구의 지배자

1937년 7월 7일, 하바롭스크 역에서 후임 류시코프를 마중 나갔다가 예조프 서명의 체포영장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자신의 45번째 생일에 '특별절차'로 사형 집행.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1923~1937)으로 공화국 보안의 실권자. 홀로도모르 시기 탄압을 지휘하고 정치국 트로이카 일원으로 사형 처결권을 행사했으며, 민족주의 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1935년 국가보안위원 1급, 1937년 체포·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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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볼히니아·키예프 체카 의장, 전우크라이나 체카 부의장
  • 1923–1931우크라이나 GPU 의장
  • 1924–1930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겸임
  • 1931–1934OGPU 부의장
  • 1932–1934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4–193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7극동 전출, 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리트빈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Литв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8 ✕ 자살

예조프의 인사책임자, 14,000명 체키스트를 숙청

1938년 여름, 예조프의 다차에서 동료 체키스트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해 11월 모스크바行 기차를 한 시간 앞두고 권총 자살로 그 말을 실행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예조프 측근으로 1936년 NKVD 인사국장이 되어 야고다 계열 14,000명을 숙청하고 부하린 재판을 주도했다. 레닌그라드 NKVD 국장이던 1938년 예조프 몰락 직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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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인쇄노조 위원장
  • 1920–1921극동전선 군사위원·체카 수사관
  • 1930중앙아시아 당국 분배부장
  • 1931–1933볼셰비키 중앙위 간부분배부문 차장
  • 1936–1937NKVD 인사국장
  • 1937–1938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레닌그라드 NKVD 국장

스타니슬라프 프란체비치 레덴스

Станислав Францевич Реден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2–1940 ✕ 처형

스탈린의 처남이자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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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크림 체카 의장
  • 1928–1931자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1–1933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8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
  • 1937–1938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 1938카자흐 내무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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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사회혁명당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사회혁명당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사회혁명당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스코블린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кобл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93–1937/1938? ✕ 실종, 사망 경위 불명

백군 장군이 된 비밀 협력자

1937년 밀러를 만나게 한 뒤, 스코블린은 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니콜라이 스코블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백군 장교로, 코르닐로프 타격사단을 이끈 젊은 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망명 뒤 그는 러시아 전군사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협력자로 포섭되어 백계 러시아인 망명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사건을 둘러싼 독일 측 문서와 정보가 스탈린의 숙청을 촉발했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주도 아래 조작·활용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1937년 예브게니 밀러 납치에 관여한 뒤 사라졌으며, 그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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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7–1918코르닐로프 타격부대 대대장
  • 1918–1920코르닐로프 타격연대·사단 지휘관, 백군 소장
  • 1920–1929갈리폴리·불가리아 망명, 코르닐로프 연대 지휘
  • 1929–1937파리 러시아 전군사연합 코르닐로프 연대장
  • 1935–1937ROVS 내부선 방첩 책임자
  • 1937밀러 납치 작전 협력 뒤 실종

카를 빅토로비치 파우케르

Карл Викторович Паукер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스탈린의 경호를 맡은 작전국장

1936년 12월 체카 기념 만찬에서 파우케르는 지노비예프 처형을 재연했다. 두 동료에게 끌려가 무릎 꿇고 "제발 스탈린 동지를 불러주시오!"라 애원했고, 스탈린은 포복절도했다.

렘베르크 출신 유대인 이발사·분장사로, OGPU·NKVD 작전국장과 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를 지내며 대숙청기 체포·처형을 관장했다. 스탈린의 신임을 받았으나 1937년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돼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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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3OGPU 작전국 부국장
  • 1923–1936OGPU·NKVD 작전국장
  • 1924–1937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제1부장
  • 1937체포와 처형

야코프 사울로비치 아그라노프

Яков Саулович Агр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3–1938 ✕ 처형

체카의 정치수사 설계자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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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 1933–1934OGPU 부의장
  •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니콜라이 이오시포비치 안토노프-그리추크

Николай Иосифович Антонов-Грицю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893–1939 ✕ 처형

카바르다발카르 트로이카 의장에서 NKVD 감옥부장이 된 체키스트

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 특별 트로이카 의장으로 탄압을 주도한 뒤, 1937~1938년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볼린현 돌스크의 우크라이나인 농업노동자 집안에서 루카 그리추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8년 입당해 두브로비차 봉기를 조직했다. 1920년부터 체카에서 일하며 튜튜닉 장군을 폴란드에서 끌어낸 작전에 참여했다. 1934~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를 이끌며 공화국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년 10월부터 NKVD 감옥부 부부장,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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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두브로비차 봉기의 조직자·지도자로 활동한 뒤 붉은군대에 복무했다.
  • 1920–1934체카·GPU·OGPU에서 근무했고, 카바르다발카르 OGPU 지역부서장까지 올랐다.
  • 1934–1937카바르다발카르 자치주·공화국 국가보안부서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 1937–1938카바르다발카르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뒤 소련 NKVD 감옥부 부부장과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 1938–1939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자콥스키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Зак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4–1938 ✕ 처형

레닌그라드의 해머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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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라트비아 볼셰비키 활동, 체포와 유형
  • 1918–1921체카 전권대표, 전선 특별부서장
  • 1921–1925우크라이나 포돌·오데사 GPU 의장, 몰도바 전권대표
  • 1926–1932시베리아·서시베리아 OGPU 전권대표, 특별3인조 의장
  • 1932–1934벨라루스 OGPU 전권대표, 벨라루스 NKVD 인민위원
  • 1934–1938레닌그라드 NKVD 수장, 키로프 사건 수사·대규모 추방
  • 1938.01–04내무부인민위원·모스크바 NKVD 수장
  • 1938.04–08해임·체포·총살, 복권 거부

세르게이 나우모비치 미로노프

Сергей Наумович Миро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94–1940 ✕ 처형

서시베리아에서 대량작전의 포문을 연 '북캅카스인' 체키스트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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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8–1921붉은군대 입대, 국내전 참전
  • 1921–1931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1–1933카자흐스탄 OGPU 전권대표부 부대표
  • 1933–1936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GPU·NKVD 지도자
  • 1936–1937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
  • 1937서시베리아 트로이카 의장, 레닌훈장 수훈
  • 1937–1938몽골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8–1939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
  • 1939–1940체포, 총살

샬바 오타로비치 체레텔리

Шалва Отарович Церетели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4–1955 ✕ 처형

제정군 장교에서 베리야의 비공식 집행자가 된 국가보안 장교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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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정 러시아군 소위, 포로
  • 1937–1938그루지야 민병대 책임자,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
  • 1939–1941자캅카스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 1941–1946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
  • 1946–1953그루지야 부국가보안장관, 국경경비대 지휘 겸임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자루빈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Заруб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4–1972 ○ 자연사

게슈타포 첩자를 운용한 소련 원자력 스파이의 대미 레지던트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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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참전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남부전선 참전
  • 1920–1925체카·OGPU 내부보안·경제부서 근무 (블라디보스토크)
  • 1925–1927INO OGPU 합법 레지던트: 중국, 핀란드
  • 1927–1929비합법 레지던트: 덴마크, 독일 (체코인 신분)
  • 1929–1933비합법 레지던트: 프랑스 (암호명 '베티')
  • 1933–1937비합법 레지던트: 베를린, 게슈타포 요원 빌리 레만 운용
  • 1939–1940NKVD 장교,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 심문
  • 1941NKGB 제1총국 부국장, 중국 특수임무 (발터 슈테네스 접촉)
  • 1941–1944NKVD/NKGB 대미 수석 레지던트 (신분: 부영사 바실리 주빌린)
  • 1945–1948NKGB/MGB 대외정보 부국장 겸 비합법정보 부국장
  • 1948건강 문제로 예편, 이후 KGB 훈련기관 강사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7 ✕ 처형

경제 파괴 사건을 만들어 낸 부인민위원

1934년 미국 《타임》지는 프로코피예프를 "공장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사보타주'로 총살하는 일을 관장하는" OGPU 산업 담당 인민위원으로 묘사했다.

OGPU 경제국장으로 소련 기술 전문가들을 겨냥한 '파괴 공작' 사건들을 조작한 체키스트. NKVD 제2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야고다 실각 후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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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6OGPU 비밀국장, 이어 정보국장
  • 1926–1931OGPU 경제국장
  • 1932–1934OGPU 부의장
  • 1932–1934노농민병대 총국장 겸임
  • 1934–1936내무 제2부인민위원
  • 1936–1937체신 제1부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파벨 페트로비치 불라노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Бул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야고다의 비서로 모스크바 재판을 준비하다 스스로 피고가 된 체키스트

1936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피고들의 진술을 짜고 연습시켰으며, 이듬해 숙청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펜자현 인사르의 산림 감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7년 프리놉스키의 도움으로 적위대 사무소에 들어갔고 1921년부터 체카에서 일했다. 1929년 알마아타에 유배된 트로츠키를 비밀리에 오데사로 옮겨 국외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오게페우 참사회와 NKVD의 비서,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로 야고다의 신임을 받았고,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피고마다 진술을 연습시켰다. 1937년 3월 해임되어 체포되었고,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불리한 상세한 진술을 한 뒤 1938년 3월 15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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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펜자현 체카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해 말 전러시아 체카 비밀정치부로 옮겼다.
  • 1929알마아타에서 유배 중이던 트로츠키를 오데사로 비밀리에 이송하고 소련에서 추방하는 일을 지휘했다.
  • 1929–1934오게페우 참사회 비서, 이어 제1비서를 지냈다.
  • 1934–1937NKVD 비서와 NKVD 특별협의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1936년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대본을 작성하고 피고들의 진술을 연습시켰으며, 1937년 3월 해임·체포되었다.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야고다에 대한 증언을 한 뒤, 3월 13일 사형을 선고받아 15일 총살되었다. 1988년 사후 복권되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피의 난쟁이’, 당 인사기구가 키운 대숙청의 집행자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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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 1934–19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 1936.09내무인민위원
  • 1936–19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 1937–1938대숙청 집행: 「예조프시나」
  • 1938.11수리교통인민위원으로 전보(사실상 실각)
  • 1939체포
  • 1940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