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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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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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0–1950 ✕ 처형

차르친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대장, T-34·카추샤를 거부한 원수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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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제1기병군 포병대장
  • 1926–1929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2–1936제3소총군단장 겸 군사위원
  • 1937–1941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9–1941소련 국방 제1인민위원 대리
  • 1941제54군 사령관
  • 1943제4근위군 사령관
  • 1944–1945군 편성·충원 총국 부국장

비탈리 그리고리예비치 흘로핀

Вита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Хлоп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0–1950 ○ 사망

라듐연구소를 이끌며 소련 핵물리학의 제도적 토대를 놓은 방사화학자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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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베르나츠키의 초청으로 과학아카데미 방사선연구소에서 연구 시작
  • 1921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 획득
  • 1922–1935라듐연구소 부소장 겸 화학부장
  • 1936–1950라듐연구소 소장
  • 1940과학아카데미 우라늄 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43스탈린상 수상
  • 1946두 번째 스탈린상 수상
  • 1949세 번째 스탈린상 수상
  • 1945레닌그라드대학에 소련 최초의 방사화학 강좌 개설

레프 모이세예비치 크비트코

Лев Моисеевич Квит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0–1952 ✕ 처형

소비에트 유대 문화를 노래한 이디시 시인

그의 시 「에텔레」는 나치가 살해한 유대인 희생자를 이디시어와 유대적 기억으로 애도했다.

레프 크비트코는 이디시어로 시와 아동문학을 쓴 소비에트 유대계 시인으로, 혁명과 유대인의 삶을 함께 노래했다. 전시에는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와 기관지 《에이니카이트》에서 활동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전후 국가의 반유대주의적 전환 속에서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2년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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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키예프에서 첫 시 발표, 첫 시집 《노래들》 출간
  • 1917–1921키예프 그룹의 이디시 시인
  • 1921–1925베를린·함부르크 체류, 독일공산당 가입 및 노동자 선전 활동
  • 1928–1941자전적 운문소설 《젊은 시절》 집필
  • 1941–1948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 및 《에이니카이트》 편집위원
  • 1947–1948문학예술 연감 《헤임란트》 편집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사건으로 수감, 군사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 1952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처형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86 ○ 자연사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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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19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1949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3–1956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출당
  • 198422년 만에 복당

예브게니 브로니슬라보비치 파슈카니스

Евгений Брониславович Пашуканис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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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 1922스투치카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 공동 창설
  • 1924『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출간 — 법의 상품형태론 정립
  • 1927–1930공산아카데미 정회원 → 부원장
  • 1931–1936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
  • 1936–1937소련 법무부인민위원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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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체르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ер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8 ✕ 처형

곡물조달에서 VDNKh까지, 2차 5개년 농업을 이끈 인민위원

1935년 2월 17일, 콜호스 충격노동자 대회에서 체르노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시회 조직 포고령에 서명했다. 훗날 VDNKh의 출발이었다.

직공 가정 출신으로 1909년 멘셰비키로 시작해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곡물조달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34년 야코프 야코블레프의 뒤를 이어 농업인민위원이 되었고, 콜호스 체제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농정을 주도했다. 1935년 전연방농업전시회(VDNKh)를 제안해 조직 준비를 총괄했으며, 농업아르텔 모범정관 제정도 이끌었다. 1937년 체포되어 21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총살,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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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3–1925도네츠크 현집행위원회 의장
  • 1925–1928우크라이나 SSR 국내무역인민위원
  • 1930–1932소련 공급부인민위원
  • 1933–1934농산물조달위원회(KomzagotSTO) 의장
  • 1934–1937소련 농업인민위원 · 중앙위원회 위원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총살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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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 1907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07.04'독일 첩보기관 요원'과 반소련 파괴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02.26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에서 사형 판결, 당일 총살; 1955년 복권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40 ✕ 처형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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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페틀랴코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Петля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42 ✕ 항공사고

샤라슈카에서 태어난 Pe-2: 소련 최고의 전술폭격기를 만든 죄수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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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11–19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 1921–19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 1936–1937항공공장 수석설계자, ЦАГИ 부소장
  • 1937–1940체포·수감, NKVD 샤라슈카에서 VI-100 → Pe-2 설계
  • 1940–1942석방, 제22공장 수석설계자 — Pe-2 대량생산, Pe-3 개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51 ○ 심근경색

초기 원자력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물리학자-행정가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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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복무, 공병·기술 부대
  • 1918–1932모스크바대학·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 강사, 물리·생물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32소련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45국립광학연구소(GOI) 과학 지도자
  • 1934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 공동 발견
  • 1934–195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
  • 1945–1951소련과학아카데미 총재,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러시아 1891–1953 ○ 뇌출혈

혁명과 이민과 귀환을 가로지른, 20세기 소비에트 음악의 거장

「작곡가는 시인·조각가·화가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고 지켜내야 한다.」 — 1951년 수필 「음악과 삶」에서

혁명 후 18년간 서방에서 활동하다 1936년 귀환한 작곡가. 『로미오와 줄리엣』, 『피터와 늑대』, 『알렉산드르 넵스키』로 소비에트 모더니즘을 구축했고, 1948년 형식주의 공격에도 창작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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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4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랴도프 등에게 사사, 작곡과 피아노로 졸업
  • 1914–1918『스키타이 모음곡』, 『고전 교향곡』, 제1바이올린 협주곡 발표 — 러시아 모더니즘의 기수로 부상
  • 1918–1936미국·독일·프랑스에서 망명 활동 — 디아길레프와 협업,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제3피아노 협주곡, 『방탕한 아들』 발표
  • 1936소련으로 영구 귀환 — 『피터와 늑대』 초연, 『로미오와 줄리엣』 전막 초연
  • 1938–1945예이젠시테인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이반 뇌제』 음악, 오페라 『전쟁과 평화』, 제5교향곡 발표
  •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자'로 공격받고 여러 작품 연주 금지, 이후 비밀 명령으로 철회됨
  • 1949–1953제7교향곡, 『돌꽃』, 첼로 교향협주곡 등 후기 걸작을 작곡하며 스탈린과 같은 날 사망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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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크료비셰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крёбыш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65 ○ 자연사

스탈린의 그림자: 25년간 정보를 걸러내고 헌법과 당사를 쓴 비서실장

딸 나탈리야의 증언: 「아버지는 거의 24시간 일하셨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오전 10-11시에 다시 출근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스탈린의 개인비서로 25년간 특별섹터를 이끌며 모든 정보를 여과했다. 1936년 헌법과 『당사 소사』를 집필했으며, 아내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베리야의 음모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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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펠트셰르 → 투르케스탄군 정치부 → 즐라토우스트 현 혁명위 의장
  • 1922–1928중앙위 업무관리국장 → 서기장(스탈린) 보좌관
  • 1928–1934스탈린 개인비서, 중앙위 비밀부 부장 → 비밀부장
  • 1934–1952중앙위 특별섹터장 — 25년간 스탈린 비서실 총괄
  • 1939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최고회의 대의원
  • 1941–1945전쟁기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회·국장단 서기 → 베리야 음모로 해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고르바토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Горба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73 ○ 자연사

콜리마에서 살아 돌아와 베를린을 점령하고, 스탈린 시대 억압을 증언한 육군 대장

돈바스 탄광 갱목용 목재를 금지령을 어기고 반출한 사건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고르바토프는 무덤만이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리사욕이 없었음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전해진다.

1891년 블라디미르현 파호티노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2년 제정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을 받으며 상급 하사관까지 올랐다. 1919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에서 기병연대장과 바슈키르 기병여단장을 지켰으며, 1937년 해임되고 1938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콜리마 수용소 15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3월 석방되었으며, 1943년부터 종전까지 제3군을 지휘했고 1945년 베를린 사령관이 되었다. 전후 공수군과 발트 군관구를 지휘하고 1955년 육군 대장이 되었으며, 1964년 회고록으로 1930년대 대숙청을 상세히 밝힌 초기 소련 국가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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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17 체르니고프 후사르 연대, 1차대전 참전 —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게오르기 메달
  • 1919–1921붉은군대 입대, 58기병연대장·바슈키르 기병여단장으로 내전 참전 — 적기훈장
  • 1933–1937제4 투르케스탄 산악기병사단장, 제2기병사단장 (1935년 콤브리그)
  • 1938–1941체포·고문, 콜리마 수용소 15년형 선고 (1939), 1941년 3월 복권·석방
  • 1941–1943제226소총사단장, 제24군 부사령관, 제20근위소총군단장
  • 1943–1945제3군 사령관 — 오룔·브랸스크·바그라티온·동프로이센·베를린 작전, 소련영웅 (1945.4)
  • 1945–1946베를린 사령관, 제5충격군 사령관, 메클렌부르크 소련군정청장
  • 1950–1958공수군 사령관 (1950–54), 발트 군관구 사령관 (1954–58), 1955년 육군 대장
  • 1958–1973국방부 감찰총국 감찰고문, 1964년 회고록 《내 생애의 세월》 출간

표트르 이오노비치 바라노프

Пётр Ионович Бар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2–1933 ✕ 항공사고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

1930년 8월 2일, 바라노프는 보로네시 비행장에서 무장 낙하산병의 첫 전투 투하를 명령했다 — "적 영토에서의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무장 낙하산병 집단 투하를 시연하라" — 이날은 소련 공수군(VDV)의 탄생일이 되었다.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을 맡아 조직적·산업적 기초를 구축했다. 1932년부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으로 항공기·엔진 생산 확대를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을 떠받칠 항공산업 토대를 놓았다. 1930년 8월 2일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 최초의 전투 낙하산병 투하를 지시해 공수군(VDV) 창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비밀 리페츠크 독일 항공학교 설립 협정에도 서명했다. 초기 로켓 연구(GIRD)와 성층권 비행선 개발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하리코프·카잔 항공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1933년 항공 사고로 아내와 함께 사망,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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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1913년 체포·페테르부르크 추방
  • 1915–1917제국군 징집, 혁명 선동으로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루마니아 전선 병사대표소비에트 전선부 의장; 제4도네츠크군 사령관
  • 1919–1921제8군·동부전선 남부집단·투르케스탄 전선·제1군·제1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크론슈타트 진압 참가(적기훈장)
  • 1921–1922투르케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바스마치 토벌 지휘(호레즘 공화국 군사훈장)
  • 1923–1924노농적군 기갑부대장 겸 정치위원; 공군 부사령관 겸 사령관 대행
  • 1924–1931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 1925년부터 소련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3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

카를 야노비치 바우만

Карл Янович Баума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2–1937 ○ 옥사

집단화를 밀어붙인 당 조직가

1930년 그는 집단농장 편입률 82.4%를 보고받고도 “너무 적다”고 답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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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불법 정치활동 시작
  • 1917키예프에서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3쿠르스크 губерния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쿠르스크 губком 책임서기
  • 1928–1930중앙위원회 농촌사업 담당,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 1929–1930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31–1934중앙아시아국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 1934–1937중앙위원회 과학·기술 및 계획·재정·무역 부서 책임자
  • 1937체포 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 1955년 복권

프세볼로트 아폴로노비치 발리츠키

Всеволод Аполлонович Бали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37 ✕ 처형

우크라이나 보안기구의 지배자

1937년 7월 7일, 하바롭스크 역에서 후임 류시코프를 마중 나갔다가 예조프 서명의 체포영장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자신의 45번째 생일에 '특별절차'로 사형 집행.

우크라이나 GPU·NKVD 수장(1923~1937)으로 공화국 보안의 실권자. 홀로도모르 시기 탄압을 지휘하고 정치국 트로이카 일원으로 사형 처결권을 행사했으며, 민족주의 조작 사건을 주도했다. 1935년 국가보안위원 1급, 1937년 체포·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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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볼히니아·키예프 체카 의장, 전우크라이나 체카 부의장
  • 1923–1931우크라이나 GPU 의장
  • 1924–1930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겸임
  • 1931–1934OGPU 부의장
  • 1932–1934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4–1937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7극동 전출, 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리트빈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Литв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8 ✕ 자살

예조프의 인사책임자, 14,000명 체키스트를 숙청

1938년 여름, 예조프의 다차에서 동료 체키스트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해 11월 모스크바行 기차를 한 시간 앞두고 권총 자살로 그 말을 실행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예조프 측근으로 1936년 NKVD 인사국장이 되어 야고다 계열 14,000명을 숙청하고 부하린 재판을 주도했다. 레닌그라드 NKVD 국장이던 1938년 예조프 몰락 직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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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인쇄노조 위원장
  • 1920–1921극동전선 군사위원·체카 수사관
  • 1930중앙아시아 당국 분배부장
  • 1931–1933볼셰비키 중앙위 간부분배부문 차장
  • 1936–1937NKVD 인사국장
  • 1937–1938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레닌그라드 NKVD 국장

스타니슬라프 프란체비치 레덴스

Станислав Францевич Реден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2–1940 ✕ 처형

스탈린의 처남이자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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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크림 체카 의장
  • 1928–1931자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1–1933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8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
  • 1937–1938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 1938카자흐 내무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41 ✕ 전사

키예프 포위망에서 전사한 남서전선 사령관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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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제국군 징집, 하사관·연대위원장
  • 1918–1921붉은군대 입대, 쇼로스 사단에서 대대장·제22연대장
  • 1927–19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44소총사단 참모장 등
  • 1934–1939카잔 보병학교 교장
  • 1939–1940제70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소련영웅 수훈
  • 1940.04–06제49소총군단장
  • 1940–1941.01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01–06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 (주코프 후임)
  • 1941.06–09남서전선 사령관 — 브로디·우만·키예프 전투
  • 1941.09.20키예프 포위망 탈출 중 전사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폴리카르포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92–1944 ○ 위암

10년간 소련 전투기 전력을 지배한 '전투기 왕'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과 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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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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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사회혁명당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사회혁명당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사회혁명당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주크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Жу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57 ○ 자연사

굴라크 수로를 설계한 스탈린 시대의 수석 수력기술자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장으로 보내진 지 1년 반 만에 '건설 현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백군 포로 출신 죄수가 20년 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크렘린 벽에 안장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의 수력기술자이자 공병 소장. 백군 장교 출신으로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에 투입된 후 탁월한 공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1932년 조기 석방 및 전과 말소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운하, 볼가-돈 운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등 소련의 대표적 수리 시설들의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으로서 소련 수력공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강제노동에 의존한 공사 방식은 솔제니친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소련 내륙 수운 체계와 수력발전 인프라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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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알렉세옙스크 군사공병학교 졸업, 시베리아 공병대대 복무
  • 1918–1919백군 콜차크 군대 공병 장교 (소위)
  • 1921–1930적군 공병 교관, 키예프·수미·폴타바 군사학교에서 교편
  • 1931–1932OGPU 체포(사건 '봄'), 벨로모르스트로이 부수석기사로 징역 중 1932년 가석방
  • 1932–1933OGPU 정식 간부, 벨로모르-발트 운하 부수석기사
  • 1933–1935모스크바 운하 건설 수석기사
  • 1935–1937우글리치·르빈스크·이반코보 수력발전소 건설 수석기사
  • 1937–1939쿠이비셰프 수력발전단지 건설관리국 수석기사 겸 국장대행
  • 1939–1941NKVD 글라브기드로스트로이 수석기사 겸 제1부국장
  • 1941–1942NKVD 방어공사총국(GUOBR) 수석기사 겸 부국장
  • 1942–1957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 (1942년 설립부터 사망까지)
  • 1944–1957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기술경제평의회 위원
  • 1948–1952볼가-돈 운하·치믈랸스크 수력발전소 수석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