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에베르트와 비밀 협약을 맺어 장교단을 지키고, 뒤에 바이마르 국방·내무장관을 지낸 장군
1918년 11월 10일 에베르트와 비밀 전화 협약을 맺어 군의 새 정부 지지를 약속하고 장교단의 지휘권을 보전했다.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참모 장교로 철도 수송 전문가였고, 전쟁 중 전시청을 맡아 군수 생산과 노동 동원을 지휘했다. 1918년 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부 제1병참감이 되었고, 11월 황제에게 군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알렸다. 11월 10일 밤 에베르트와 전화로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와 장교단 지휘 체계의 유지를 맞바꾸었다. 뒤에 교통장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지냈고 1932년 나치 돌격대 금지령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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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육군에 입대했다.
1912참모본부 철도부장이 되어 전시 병력 수송과 보급을 맡았다.
1918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제1병참감이 되었고, 휴전 뒤 에베르트와 협력해 병력 귀환 및 혁명 진압용 의용군 편성을 추진했다.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키워 1919년 좌파 봉기를 진압한 SPD 국방장관
1919년 베를린 봉기 진압을 지휘해 자유군단과 군대를 투입하고, 3월 사격 명령으로 군의 즉결 처형을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바구니 제조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1906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군사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1918년 11월 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 봉기를 수습하고 총독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위기 뒤 USPD가 떠난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를 맡았고,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조직해 1월 봉기와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19년 2월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1920년 카프 폭동 뒤 물러났다. 하노버 주지사를 지냈고 1944년 7월 음모 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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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바구니 제조공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협회 의장을 지냈다.
1906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해군·육군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918.11–12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들과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이끌었고, 12월 28일 군·해군 전국위원이 되었다.
1919.02–1920라이히스베어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유군단과 군대를 동원해 1월 봉기 및 베를린의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20년 카프 폭동 뒤 사임했다.
1920–1933프로이센 하노버 주의 고등행정관을 지냈으며, 1933년 9월 직업공무원 복구법에 따라 해임되었다.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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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독일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바이에른 혁명 정부의 교육 담당자로, 1919년 진압군에 살해되었다.
국가는 사회적 관계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국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란다우어는 국가를 단순히 전복할 권력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8년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워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주의 실천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으며, 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1918년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에 참여해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을 맡았고, 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5월 2일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살해되었다.
동프로이센 다르케멘에서 태어나 변호사 사무원으로 일하다 사무직 노동조합을 세웠고, 1908~1918년 자유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12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노동장관이 되었다. 1919년 6월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해 사임하자, 조약을 비판해 왔으면서도 후임 총리를 맡아 조약 비준을 이끌었다. 재정 개혁과 사회보험 확대를 펼쳤으나, 1920년 3월 카프 폭동 때 반란군과 협상한 일로 정부가 물러났다. 뒤에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바르마트 부패 사건으로 1925년 의원직을 내놓았다. 1944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11월 혁명의 혁명정부를 이끌며 평의회 운동을 의회 민주주의로 돌리고 초대 대통령이 된 SPD 지도자
1918년 11월 혁명 때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고 국민의회 선거를 추진했다. 1919년 초대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25년까지 재임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마구공으로 일하다 브레멘에서 당 활동가가 되었고, 1913년 베벨의 뒤를 이어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전쟁 중 전쟁공채와 「성내 평화」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9일 재상직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고, 그날 밤 그뢰너 장군과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좌우의 봉기를 군과 자유군단, 헌법 제48조의 긴급명령으로 눌렀다. 1925년 임기 중 맹장염 수술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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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1905SPD 당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1912독일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3SPD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11월 혁명 때 국가수상 막스 폰 바덴에게서 국정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다.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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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화가와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1917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8~1919년 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고, 1919년부터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당 대표단으로 참석했으나 코민테른 가입 조건과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재통합된 뒤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1933년 나치 집권 후 망명했다.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당 지도부에 올랐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외무장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처음 총리가 되어 좌파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장애인 고용, 초등교육, 실업급여와 노동자 사회보호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다시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었으며, 대공황과 실업보험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속에 연정이 붕괴하자 1930년 사임했다.
튀링겐 줄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재무부 관리로 1차 세계대전 초 독일의 식량 공급을 조직했다. 1917년 해운회사 함부르크-아메리카 노선에 들어가 사장이 되었다. 1922년 11월 의회 표결 없이 대통령령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최초의 무당파 총리가 되어 「실무 내각」을 꾸렸다. 1923년 1월 프랑스·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소극적 저항을 호소했고, 그 비용을 주로 돈을 찍어 대면서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파업의 물결 속에 8월 사회민주당이 낸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1932년 히틀러의 경제 자문에 참여했고 1933년 1월 죽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1907년 국민자유당 의원이 되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토 병합과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했다. 패전 뒤 독일인민당을 세웠고 점차 공화국을 받아들였다. 1923년 8월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루르의 소극적 저항을 끝내고, 공산당이 들어간 작센·튀링겐 정부를 군대로 몰아냈으며, 렌텐마르크로 초인플레이션을 잡았다. 11월 불신임으로 물러났지만 죽을 때까지 외무장관으로 남아 도스안과 로카르노 조약, 국제연맹 가입을 이끌었고 192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29년 뇌졸중으로 죽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재무장관을 지내고 1945년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을 세운 농업 정치가
쾰른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농학을 공부했고, 1911년부터 로마의 국제농업연구소에서 일했다. 1920년 가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식량장관이 되었고, 1922년부터 1923년 8월 쿠노 내각이 물러날 때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다. 나치 집권 뒤 체포되었고 콜롬비아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귀국한 뒤 괴르델러 일파와 이어져 7월 20일 사건 뒤 체포되었고, 1945년 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아내가 집행을 늦춰 붉은 군대의 베를린 점령으로 살아남았다. 1945년 6월 베를린과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의 첫 의장이 되었으나, 보상 없는 토지개혁을 비판해 12월 군정청에 의해 물러났다. 서독으로 옮겨 농민연맹 의장을 지내며 통일을 주장했다.
베를린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1918년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혁명사를 쓴 선반공
1918년 11월 혁명 때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부터 반전 정치파업을 조직했다.
튀링겐 농촌 출신의 선반공으로 베를린 금속노조 선반공 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쟁 중 공장 대표들의 비밀 조직인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 리프크네히트 체포 항의 파업, 1917년 4월과 1918년 1월의 대중 파업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 9일 밤 제국의회를 점거해 평의회 선거를 소집했고, 대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평의회 정권의 형식상 수반이 되었다. 뒤에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떠났고, 1924~1925년 세 권짜리 혁명사를 펴냈다.
1919년 1월 근위기병소총사단 참모장교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했다. 1920년 카프-뤼트비츠 폭동을 조직하고 오스트리아 향토방위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1월 최대 자유군단 부대인 근위기병소총사단의 참모 장교로, 붙잡혀 온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심문한 뒤 살해를 명령했다. 뒤에 「내가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고 자랑했다. 1920년 카프 폭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가 오스트리아로 가서 우익 향토방위대 조직을 도왔고 추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나치당과 느슨한 관계에 머물며 공적 무대에서 물러났다. 1962년 인터뷰와 회고에서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살해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고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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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3프로이센 참모본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1914–1918대위 겸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1918–1919근위기병소총사단의 제1참모장교로 베를린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체포 후 심문을 거쳐 살해를 명령했다.
1919–1920민족주의 단체 국민연합의 상무이사로 카프-뤼트비츠 폭동의 기술·조직 준비를 맡았다. 폭동 실패 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1921–1930티롤 향토방위대의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연방참모장이 되었다. 1930년 체포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1930–1943베를린 라인메탈-보르시히에서 무기부문 책임자로 일했고 1938년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1943년 스위스에 남아 정치적 망명을 받았다.
1955–19701955년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바나트의 레죄하저(오늘날 세르비아의 크니차닌)에서 슈바벤 독일계 가정에 태어나 1897년 빈에서 사관생도가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적군의 제1군단을 지휘하다가 6월 호르티의 국민군으로 넘어갔다. 1936년 정년 퇴역했으나 1938년 복귀해 참모총장이 되었고, 국방장관 버르터 카로이와 함께 독일과의 동맹을 가장 앞장서 주장했다.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합을 지휘했고, 1941년 6월 커셔 폭격 뒤 곧바로 소련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건의했다. 1941년 9월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1945년 2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으로 끌려가 1952년 그곳에서 숨졌다.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