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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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출신 배경
시대

발데마르 파프스트

Waldemar Pabst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0–1970 ○ 자연사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하고 카프 폭동에 가담한 자유군단 장교

1919년 1월 근위기병소총사단 참모장교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했다. 1920년 카프-뤼트비츠 폭동을 조직하고 오스트리아 향토방위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1월 최대 자유군단 부대인 근위기병소총사단의 참모 장교로, 붙잡혀 온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심문한 뒤 살해를 명령했다. 뒤에 「내가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고 자랑했다. 1920년 카프 폭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가 오스트리아로 가서 우익 향토방위대 조직을 도왔고 추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나치당과 느슨한 관계에 머물며 공적 무대에서 물러났다. 1962년 인터뷰와 회고에서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살해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고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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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3프로이센 참모본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 1914–1918대위 겸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 1918–1919근위기병소총사단의 제1참모장교로 베를린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체포 후 심문을 거쳐 살해를 명령했다.
  • 1919–1920민족주의 단체 국민연합의 상무이사로 카프-뤼트비츠 폭동의 기술·조직 준비를 맡았다. 폭동 실패 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 1921–1930티롤 향토방위대의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연방참모장이 되었다. 1930년 체포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 1930–1943베를린 라인메탈-보르시히에서 무기부문 책임자로 일했고 1938년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1943년 스위스에 남아 정치적 망명을 받았다.
  • 1955–19701955년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Władysław Sikorski
폴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폴란드 폴란드계 1881–1943 ✕ 추락사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주권을 지키려 한 장군

1943년 카틴 학살 조사를 요구하자 소련은 시코르스키의 망명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전간기 민주주의와 군부 권위주의의 충돌 속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 망명정부의 수상 겸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방 연합국에 폴란드의 국가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폴란드 포로 석방과 군대 창설의 길을 열었지만, 카틴 학살 조사 요구 뒤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다.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망명정부의 외교적 영향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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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비밀 독립운동 조직 ‘능동투쟁연맹’ 공동 창립
  • 1914–1916최고국민위원회 군무부장, 폴란드 군단 장교학교 지휘관
  • 1920폴란드-소련 전쟁, 바르샤바 전투 제5군 사령관
  • 1922–1923폴란드 공화국 수상 겸 내무장관
  • 1924–1925군무장관, 폴란드군 현대화 추진
  • 1939–1943런던 망명정부 수상,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41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 체결, 소련과 관계 복원
  • 1943카틴 국제 조사 요구 뒤 지브롤터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베르트 헨리크

Werth Henrik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독일계(슈바벤인) 1881–1952 ○ 소련 억류 중 사망

독일과의 동맹과 대소련 참전을 가장 강하게 주장한 헝가리군 참모총장

바나트의 레죄하저(오늘날 세르비아의 크니차닌)에서 슈바벤 독일계 가정에 태어나 1897년 빈에서 사관생도가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적군의 제1군단을 지휘하다가 6월 호르티의 국민군으로 넘어갔다. 1936년 정년 퇴역했으나 1938년 복귀해 참모총장이 되었고, 국방장관 버르터 카로이와 함께 독일과의 동맹을 가장 앞장서 주장했다.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합을 지휘했고, 1941년 6월 커셔 폭격 뒤 곧바로 소련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건의했다. 1941년 9월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1945년 2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으로 끌려가 1952년 그곳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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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1빈 보병 사관학교
  • 1914–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
  • 1919적군 제1군단장, 6월 국민군으로 전향
  • 1938–1941참모총장
  • 1945–1952소련군에 체포, 소련 억류 중 사망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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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야마다 오토조

山田乙三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81–1965 ○ 자연사

제국 육군의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 뒤 관동군의 항복을 명령했다.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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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12육군대학 졸업
  • 1934–1937참모본부 총무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 1937–1939제12사단장, 제3군 사령관,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 1939–1944교육총감, 군사참의관
  • 1944–1945관동군 총사령관,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 1949–1950하바롭스크 전범재판 피고인, 25년형
  • 1956소련 억류에서 귀환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으로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장군이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수장으로서 그는 범죄 명령에 서명하고 나치의 학살과 전쟁 수행에 책임을 졌다.

카이텔은 1938년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군 통수권 아래서 정책을 전달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동부 지역에서의 독일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한 관할권 명령, 소련 정치장교의 즉결 처형을 요구한 정치장교 명령, 야간과 안개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과 포고에 서명했다. OKW 수장으로서 그는 소련에서 아인자츠그루펜과 군대의 민간인 학살 협력 및 소련군 포로의 가혹한 처우에 책임이 있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네 혐의 모두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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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프로이센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다.
  • 1938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에 임명되었다.
  • 19455월 독일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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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美治郎

제국군의 명령과 항복 사이에 선 참모총장

1945년 9월 2일, 그는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우메즈 요시지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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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육군 소위, 보병 제1연대
  • 1919–1921스위스 주재 무관
  • 1934–1935지나 주둔군 사령관
  • 1939–1944관동군 사령관·총사령관
  • 1944–1945일본 육군참모총장
  • 1945대본영 대표로 항복문서 서명
  • 1948–1949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복역 중 사망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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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

Stanisław Bułak-Bałachowicz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까지 진영을 옮겨 다닌 반소비에트 유격 지휘관

필수드스키는 그를 '도둑이지만 도둑만은 아니고, 오늘은 러시아인, 내일은 폴란드인, 모레는 벨로루시인'이라고 평했다.

붉은 군대에서 백군으로 넘어가 1919년 프스코프를 점령하고 유데니치와 갈라져 에스토니아 편에 섰다가 1920년 폴란드로 옮겨 벨로루시 원정을 벌였다. 부대의 반유대인 폭력이 기록되어 있으며 1940년 독일 점령 바르샤바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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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차르 군대에 징집되어 게오르기 십자훈장·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8붉은 군대에 입대, 트로츠키의 승인으로 루가 기병연대 편성
  • 1918.11약 4백 명을 이끌고 백군으로 전향
  • 1919대령에서 소장으로 승진, 유데니치 공세에서 프스코프 점령
  • 1920.01유데니치를 체포하고 에스토니아 편에 섬
  • 1920폴란드 군에서 핀스크 점령, 러시아 인민의용군 편성
  • 1920.11소비에트 벨로루시로 침입해 스스로 벨로루시 국가 수반이라 선언, 패배 후 폴란드로 도피
  • 1939바르샤바 방어에 참가, 1940년 5월 살해

루돌프 뤼터스

Rudolf Lüters

파르티잔전쟁을 지휘한 독일 국방군 장성

뤼터스는 파르티잔의 전투 사기가 “놀라울 만큼 높다”고 평가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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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제국군 제118보병연대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중대·대대 지휘
  • 1920–1933국가방위군 제15보병연대 및 제5사단 복무
  • 1933–1938제1프로이센보병연대 지휘, 보충군관구 감찰
  • 1941–1942제223보병사단 사단장,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3크로아티아 독일군 사령관, 네레트바·수테스카 공세 지휘
  • 1943제15산악군단 초대 군단장
  • 1944–1945군에서 명예 전역, 소련군 포로로 수용 중 사망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

파시즘을 국가 권력으로 만든 독재자

1943년 7월 25일, 국왕은 무솔리니를 총리직에서 해임하고 체포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출발한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민족주의 혁명으로 전향해 파시즘을 창시했다. 그는 1922년 로마 진군 뒤 총리가 되었고, 폭력과 제도 개편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일당 독재로 바꾸었다. 식민 전쟁과 나치 독일과의 동맹,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탈리아를 심각한 군사적·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1943년 실각한 뒤 독일 점령지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이끌었으나, 1945년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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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 편집장
  • 1919전투 파쇼 결성
  • 1921국가파시스트당 지도자
  • 1922–1943이탈리아 왕국 총리
  • 1925–1943파시스트 독재자, 두체
  • 1940–1943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과 전쟁 지도
  • 1943–1945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수반

베르트람 램지

Bertram Home Ramsay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계 1883–1945 ✕ 추락사

됭케르크 철수를 조직한 해군 지휘관

도버성 아래 지휘부에서 램지와 참모들은 됭케르크 철수를 9일 밤낮으로 조정했다.

베르트람 램지는 영국 해군 장교로, 전시 해상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능력으로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됭케르크에서 그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동원해 포위된 영국·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해군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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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영국 해군에 입대
  • 1915–1919모니터함 M25 및 구축함 HMS 브로크 지휘, 도버 순찰대 복무
  • 1933–1935전함 HMS 로열 소버린 함장
  • 1939–1942도버 지휘관, 해협 방어와 됭케르크 철수 담당
  • 1942북아프리카 침공 부해군 총사령관
  • 1943시칠리아 침공 동부 기동부대 해군 지휘관
  • 1944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해군 총사령관

스토여이 되메

Sztójay Döme

베를린 주재 대사로 독일과의 동맹을 밀어붙이고 점령 뒤 총리로서 유대인 이송을 앞당긴 군인 외교관

베르셰츠(브르샤츠)의 세르비아계 가정에서 디미트리예 스토야코비치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본부의 정보장교로 일했다. 전쟁 뒤 호르티의 반혁명 군대에서 방첩을 맡았고, 1927~1933년 베를린 주재 무관을 지낸 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베를린 주재 대사로 있으며 독일과의 동맹을 밀어붙였다. 1944년 3월 독일 점령 뒤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정적을 투옥했으며, 유대인 강제 이송의 속도를 크게 높였다. 8월 호르티의 압력으로 물러났고, 전후 미군에 붙잡혀 헝가리로 넘겨진 뒤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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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본부 정보장교
  • 1919–1925국민군 정보·방첩 장교
  • 1927–1933베를린 주재 무관
  • 1935–1944베를린 주재 대사
  • 1944총리 겸 외무장관
  • 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야니 구스타브

Jány Gusztáv

1943년 1월 돈강에서 무너진 헝가리 제2군의 사령관

하우칭거라는 성으로 태어나 루도비카 사관학교와 빈 군사대학을 나왔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1924년 비테즈 기사단에 들어가며 어머니의 성 야니를 택했고, 1931~1936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이끌었다. 1940년 3월 제2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2년 군을 이끌고 돈강으로 갔다. 1943년 1월 소련 공세 때 후퇴 금지 명령을 고수하다 군이 무너지자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군령을 내렸다. 전후 스스로 귀국해 1947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고, 1993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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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1–1936루도비카 사관학교 교장
  • 1940–1943제2군 사령관, 돈강 전투
  • 1947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프리드리히 이슈트반

Friedrich István

1919년 8월 페이들 정부를 몰아낸 쿠데타 뒤 석 달 동안 헝가리 총리를 지낸 공장주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말라츠키에서 독일계 약사 집안에 태어났다. 공학을 공부해 베를린 AEG에서 일한 뒤 부다페스트 근교에서 기계 공장을 운영했다. 1912년 카로이 미하이의 독립당에 들어가 그의 가까운 벗이 되었고, 과꽃 혁명 뒤 국방차관을 지냈으나 점차 우파로 기울어 1919년 2월 해임되었다. 평의회 공화국 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탈출했다. 1919년 8월 우익 단체 「백악관 동지회」와 함께 페이들 정부를 몰아냈고, 8월 7일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1월 24일까지 재임했다. 1951년 라코시 정권에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그해 죽었으며, 1990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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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헝가리 축구 국가대표
  • 1912독립당 입당
  • 1918–1919카로이 정부 국방차관
  • 1919헝가리 총리
  • 1919–1920국방장관
  • 1920–1939국회의원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주만을 설계한 제독

“6개월이나 1년은 마음껏 날뛰겠지만, 2년째와 3년째에는 전혀 자신이 없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자 항공전력의 가능성을 일찍 파악한 전략가였다. 미국의 산업력과 석유 우위를 직접 관찰해 장기전의 승산을 낮게 보았지만, 전쟁이 결정되자 일본의 우세를 단기간에 확보할 방도를 찾았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진주만 공격을 밀어붙여 남방 자원 공세의 시간을 벌려 했고, 그 선택은 전술적 성공과 미국의 전면 참전을 함께 낳았다. 1942년 미드웨이 패배 뒤에도 전쟁을 지휘하다 1943년 미군의 요격으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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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해군병학교 졸업, 해군 장교로 임관
  • 1905쓰시마 해전 참가, 부상과 손가락 두 개를 잃음
  • 1919–1921하버드대학교 유학
  • 1925–1928주미 일본대사관 해군 무관
  • 1936–1939해군차관, 삼국동맹에 반대
  • 1939–1943연합함대 사령장관
  • 1941진주만 공격 계획을 관철하고 지휘
  • 1943부건빌 상공에서 미군 요격으로 전사

오스텐부르크모라베크 줄러

Ostenburg-Moravek Gyula
헝가리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1884–1944 부다페스트에서 사망

부대 장교들이 『네프서버』 기자 둘을 살해했고 1921년 카를 왕의 복귀 시도에 가담한 헌병 장교

마로시바샤르헤이에서 태어난 장교로,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쇼프론의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2월 17일 그의 장교 부대원들이 『네프서버』의 쇼모지 벨러와 버초 벨러를 살해해 호르티에 반대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고, 3월 섭정 선거 때는 그의 부대가 국민의회의 「질서」를 지켰다. 1921년 8월 쇼프론 철수를 거부해 이 도시가 헝가리에 남을 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 왕정주의 장교들과 함께 카를 왕을 불러들여 장갑열차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으나 부더외르시 전투에서 졌고, 사면을 받은 뒤 퇴역했다. 1932년 프로너이 팔과 함께 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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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쇼프론 헌병 사령관
  • 1920부대원들이 쇼모지·버초 살해
  • 1921쇼프론 철수 거부
  • 1921카를 왕의 두 번째 복귀 시도, 부더외르시 전투
  • 1932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 창당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북방 구상과 남방 팽창 사이에서 제국을 전쟁으로 이끈 군인 정치가

1941년 10월, 그는 철군 요구를 ‘심장’이라 부르며 양보를 항복으로 규정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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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육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소위 임관
  • 1919–1922스위스·독일 주재 무관 및 유럽 근무
  • 1935–1937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관동군 참모장
  • 1938육군차관, 육군 항공총감
  • 1940–1941제2·3차 고노에 내각 육군대신
  • 1941–1944일본 제40대 총리, 내무대신·육군대신 겸임
  • 1944육군 참모총장 겸임, 7월 내각 총사퇴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 처형

버르터 카로이

Bartha Károly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84–1964 ○ 이주지에서 자연사

베르트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대소련 참전을 주장하고 유대인 노동봉사를 가혹하게 만든 국방장관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4년 뫼들링 공병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호르티의 국민군에 들어갔다. 1938년 임레디 내각의 국방장관이 되어 1942년까지 자리를 지켰고, 참모총장 베르트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 전면 참여와 동부전선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커셔 폭격 뒤에는 소련이 폭격했다고 단정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1942년 노동봉사 대대 징집의 연령 상한을 없앴고, 6월 의회에서 유대인을 인종으로 정의하겠다고 밝혔다. 1942년 9월 지나친 친독 성향 때문에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군사법원에서 강등·제적되었고, 베네수엘라로 이주했다가 1964년 오스트리아 린츠를 방문하던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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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뫼들링 공병 사관학교 졸업
  • 1914–1918부다페스트·트리에스테 고위 지휘관
  • 1919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군과 전투, 국민군 합류
  • 1938–1942국방장관
  • 1945군사법원에서 강등·제적
  • 1950년대–1964베네수엘라 이주, 철도 기사

프란츠 할더

Franz Halder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84–1972 ○ 자연사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획하고 전후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주조한 독일 육군 참모총장

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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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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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페트르 젠클

Petr Zenkl
체코슬로바키아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884–1975 → 망명지에서 사망

1948년 2월 장관 사임을 이끌고 망명해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를 이끈 국민사회당 의장

1948년 2월 공산당의 헌정 질서 변경을 막으려 비공산당 장관들과 사임했다.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서방으로 탈출해 망명 정치를 이끌었다.

보헤미아 타보르의 소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37~1939년 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독일 점령 뒤 체포되어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갇혔다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장으로 다시 프라하 시장이 되었고, 1946년 선거에서 제2당을 이끌어 부총리가 되었다. 1947년 9월 마사리크·드르티나와 함께 폭발물 상자를 받았다. 1948년 2월 다른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했고,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망명해 1949~1974년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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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 1945–1946프라하 시장으로 복귀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 의장이 되었다.
  • 1946–1948부총리를 지냈다.
  • 1949–1974망명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고마쓰바라 미치타로

小松原道太郎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계 1885–1940 ○ 자연사

노몬한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 장군

사단이 궤멸하던 1939년 8월 22일, 고마쓰바라는 일기에 "사이다병으로 지근거리 공격을 해도 효과가 없었고, 장병들은 절망 속에 남겨졌다"고 남겼다.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러시아를 연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정보와 참모 업무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제23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의 국경전쟁을 대규모 작전으로 이끌었지만, 주코프의 포위 공세 속에서 사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그의 경력에 책임을 묻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는 1940년 예편한 뒤 그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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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육군사관학교 졸업
  • 1909–1910러시아 주재 무관보
  • 1919–1929육군참모본부 대소 정보 담당 및 모스크바 무관
  • 1932–1934만주국 하얼빈 특별기관장
  • 1934–1937제8보병여단 및 근위 제1여단 지휘관
  • 1937–1939관동군 제23사단장, 육군중장
  • 1939–1940할힌골 패전 뒤 관동군 참모, 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