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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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입장(선택됨)
국적
출신 배경
시대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소볼레프

Аркад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ол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3–1964 ○ 자연사

유엔헌장을 공동 기초한 소련 외교관, 냉전기 유엔의 소련 얼굴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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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외무인민위원부 사무총장
  • 1942–1945주영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45–1946소련군정청(독일) 정치국장
  • 1946–1949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
  • 1949–1950소련 외무부 유엔국장
  • 1950–1951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51–1953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53–1954소련 외무부 미주국장
  • 1954–1955소련 유엔 차석대표
  • 1955–1960소련 유엔 상임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대표
  • 1960–1964소련 외무차관

세묜 아리예비치 코스베르크

Семён Ариевич Косберг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5

3단 로켓엔진으로 루나와 가가린을 우주로 밀어올린 OKB-154 수석설계자

1941년 겨울, 베르츠크의 텅 빈 엘리베이터 건물. 밤새 기초공사를 파던 지친 직원들 앞에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타났다. 수석설계자의 목소리: "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네!"

슬루츠크의 유대인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야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전시에는 직접분사장치를 개발해 La-5·La-7 전투기에 독일기를 압도할 상승력과 기동성을 부여했고, 이 공로로 붉은별훈장과 조국전쟁훈장을 받았다. 전후 OKB-154(현 KБХА)를 보로네시로 옮겨 액체로켓엔진으로 전환했고, 1958년 코롤료프와 만난 지 9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우주공간에서 점화되는 3단 엔진 RD-0105를 완성해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했다. 이후 RD-0109로 가가린의 보스토크 상단을 추진했고,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전체의 상단 엔진을 공급하는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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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직접분사장치 연구
  • 1940제33공장 OKB 부수석설계자, 직접분사 설계국장
  • 1941–1946OKB-154(베르츠크) 수석설계자: ASh-82FN용 NV-3U 직접분사장치, La-5·La-7·Tu-2에 탑재
  • 1946–1954OKB-154 보로네시 이전, 터보제트·터보프롭 연료장치 및 액체로켓엔진 전환
  • 1958–1959RD-0105 개발(9개월): 루나 1·2·3호 3단 엔진, 세계 최초 우주 점화
  • 1960레닌상 수상, 기술과학 박사학위
  • 1961RD-0109: 보스토크 3단, 가가린 궤도 진입.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2–1965소유즈·몰니야·프로톤 상단 엔진 개발 주도

니콜라이 일리치 벨랴예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Беля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6 ↓ 실각 1960

흐루쇼프를 지킨 측근, 테미르타우로 무너지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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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9서시베리아 협동조합·당 경제사업
  • 1939–1943노보시비르스크 식품공업 담당 당서기
  • 1943–1955알타이 지방당 제1서기
  • 1955–1958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57–1960정치국원 ·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6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 후 연금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체르카소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Черкас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66 ○ 폐기종·심부전

〈변신의 배우〉: 넵스키 훈장에 얼굴이 새겨진 소련의 국민 배우

저는 이반 뇌제의 형상을 영화만이 아니라 극장에서도 다뤄왔고, 이 형상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우리의 시나리오 개작이 올바르고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드린스키 무대와 소련 영화를 오간 배우. 예이젠시테인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와 〈이반 뇌제〉 주연으로 국가 서사시의 얼굴이 되었고, 파가넬부터 돈키호테까지 이르는 변신의 폭으로 스탈린에게서 「변신할 줄 아는 배우」라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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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마린스키 극장을 비롯한 페트로그라드 극장들의 단역·마임 배우로 출발
  • 1926레닌그라드 무대예술대학 졸업, 레닌그라드 청소년관객극장(TYuZ) 배우
  • 1933레닌그라드 푸시킨 연극극장(알렉산드린스키) 입단, 이후 26개 배역
  • 1938예이젠시테인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 주연
  • 1944〈이반 뇌제〉에서 이반 뇌제 역
  • 1947소련 인민예술가 칭호
  • 1957〈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 역
  • 1964레닌상 수상

루돌프 헤른슈타트

Rudolf Herrnstadt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산주의 동독 독일 (유대계) 1903–1966 ○ 자연사

1953년 신노선을 함께 쓰고 울브리히트 퇴진을 꾀하다 숙청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글라이비츠의 유대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특파원으로 일하며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이 되었다. 1939년 소련으로 망명해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의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귀국해 《베를리너 차이퉁》을 이끌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창간에 참여했으며, 그 편집장으로서 늘 모스크바의 노선을 따랐다. 1953년 6월 차이서와 함께 울브리히트에 맞섰고,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신노선을 함께 썼다. 봉기 뒤 집단지도를 제안했으나 7월 「반당 분파」로 몰려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고, 1954년 1월 당에서 제명되었다. 메르제부르크의 문서고에서 일하다 1966년 죽었고, 1989년에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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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GRU 요원으로 포섭
  • 1943《자유 독일》 편집장
  • 1945《베를리너 차이퉁》 편집장
  • 1950–1953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후보위원
  • 1953「반당 분파」로 중앙위원회에서 축출
  • 1954당에서 제명
  • 1989사후 복권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크릴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ры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72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략로켓군까지, 핵 3축의 세 번째 기둥을 세운 원수

1966년, 드골의 노보시비르스크 미사일 사단 시찰 중 브레즈네프의 신호에 지하 사일로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불쑥 솟아올랐다. "파리도 겨냥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브레즈네프는 연기나는 발사대를 가리켰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16세에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한 크릴로프는 내전부터 만주 작전까지 소련의 모든 주요 분쟁을 관통한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추이코프의 제62군 참모장으로서 시가전을 지휘했고, 바그라티온 작전과 만주 공세에서 제5군을 이끌어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원수로 진급한 뒤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에 올라, 쿠바 위기 이후 열세였던 소련 핵전력을 지하 사일로 기반의 전투태세를 갖춘 군종으로 탈바꿈시켰다. 9년간의 재임기는 전략로켓군의 창설기이자 가장 집중적인 성장기로서, 소련 핵 3축의 한 기둥을 완성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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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6세에 붉은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 1941–1942연해군 참모장,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 1942–1943제62군 참모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3–1945제5군 사령관, 바그라티온·동프로이센·만주 공세
  • 1947–1960극동·우랄·레닌그라드·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62소비에트연방원수
  • 1963–1972전략로켓군 총사령관, 핵전력 전투태세화 주도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

Аверкий Борисович Арист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73 ○ 자연사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레지디움 위원, 낚시를 사랑한 당 조직관리자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증언: "아버지가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에 대해 실망을 표하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었다. 사업 얘기를 꺼내면, 그는 매번 낚시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스트라한 빈농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금속공학자에서 당 기구로 진입하여 스탈린 말기 프레지디움 위원과 중앙위 서기에 발탁되었다. 말렌코프 집권 직후 실각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1957년 반당 그룹 격파 후 다시 프레지디움에 진입, 러시아공화국 당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랴잔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1961년 폴란드 대사로 좌천시켰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플레넘에선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문구를 결의안에 삽입할 것을 정식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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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스베르들롭스크·케메로보·크라스노야르스크 당 서기
  • 1946–1950첼랴빈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0–195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프레지디움 위원 겸 중앙위 서기, 당·노조·콤소몰 담당
  • 1955–1960중앙위 서기 (재임명)
  • 1957–1961프레지디움 위원 (재진입), 러시아공화국 당국 부의장
  • 1961–197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71–1973주오스트리아 소련 대사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3–1974 ○ 자연사

소련 리투아니아를 34년간 통치한 공산주의자

1949~50년,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의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려 하자 스니에치쿠스는 스탈린에게 직접 맞섰다. 리투아니아는 구시대 공산주의자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공화국이 되었다.

34년간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소련 최장수 공화국 지도자다. 지하운동 출신으로 소비에트화를 주도했으나, 이후 모스크바 간섭을 완충하며 리투아니아어와 문화 공간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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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리투아니아 공산당 알리투스 지하위원회 책임자
  • 1921–1925스몰렌스크에서 리투아니아 공산당 출판국 근무
  • 1925–1926코민테른 집행위 내 리투아니아 공산당 대표부 근무
  • 1933–1936코민테른 집행위 내 리투아니아 공산당 대표부 근무
  • 1927–1930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지하), 선전·조직 담당
  • 1936–1939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비합법, 카우나스)
  • 1940.06–08리투아니아 국가보안국장
  • 1940–1974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34년)
  • 1942–1944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라오수스

饶漱石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03–1975 ↓ 체포 1955 · 옥사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건국 후 첫 고위 숙청에 걸린 화둥의 지도자

천이와 함께 화둥 당을 이끌다 1953년 중앙조직부장으로 베이징에 갔다. 1954년 가오강과 함께 숙청되고 1955년 당적이 박탈되었으며, 1975년 구금 중 사망했고 복권되지 않았다.

장시 출신으로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국공내전기 화둥국 서기로 천이와 함께 화둥을 관할했다. 건국 후 화둥 군정위원회 주석과 중앙조직부장을 맡았다. 1953년 가오강과 함께 류사오치·저우언라이를 밀어내려 했다는 이유로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비판받고 1955년 체포되었다. 재판 없이 수감되었다가 1975년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가오강과 달리 공식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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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화둥 군정위원회 주석
  • 1953–1954중공 중앙 조직부장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그레치코

Андрей Антонович Греч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76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 초의 국방장관

1968년 8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최종 결정한 정치국 회의에서 그레치코는 '이 침공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더라도 감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병대 사병으로 남북전쟁에 뛰어든 후 정규 군사교육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카프카스 방어·키예프 해방·프라하 진격을 지휘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1967년 소련 국방장관에 올라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사상 최대 규모의 재래식 증강을 주도했으며, 1968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직접 기획하고 집행한 핵심 책임자였다. 1973년에는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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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에서 군·전선 지휘관으로 성장, 카프카스와 우크라이나 작전 지휘
  • 1953–1957동독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 1957–1960지상군 총사령관
  • 1960–1967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
  • 1967–1976국방장관, 브레즈네프 시대 군사력 확대를 대표

프레트 욀스너

Fred Oelßner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03–1977 ○ 자연사

195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의 수석 이데올로그였다가 쉬르데반 사건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난 경제학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19년 독립사회민주당, 1920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당 신문 편집자로 일했다. 1926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와 붉은 교수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33년 망명해 파리에서 울브리히트의 비서로 일했고, 1936년 모스크바에서 「이념적 일탈」로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전쟁 중에는 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당 선전·교육을 맡았고, 1950년 정치국원, 1950~1955년 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어 당의 수석 이데올로그로 통했다. 1953년 6월 할레에서 봉기 진압 지휘부를 꾸렸다. 1956년 뒤 농업 전면 집단화에 반대하다 1958년 정치국에서 쫓겨났고,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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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독일 공산당 입당
  • 1926–1932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붉은 교수 연구소
  • 1941–1944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
  • 1950–1958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 1950–1955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8–196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03–1978 ○ 자연사

아르메니아 선율을 소비에트 교향악에 녹여낸 작곡가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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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 부의장
  • 1943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4아르메니아 SSR 국가 작곡
  • 1950그네신 음악교육원 교수
  • 1951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54소비에트 인민예술가
  • 1957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서기
  • 195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5소집)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레온티예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Леонть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3–1979 ○ 자연사

활동 이론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학자

인간은 인격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되어 간다.

소비에트 심리학자·철학자로, 레프 비고츠키·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문화역사적 심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인간 의식이 외부 세계와의 능동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활동 이론의 창시자다. 1930년대 하리코프 학파를 이끌며 아동 발달·기억·의지 연구를 주도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소비에트 심리학 제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저 『활동·의식·인격』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고전으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으며, 비고츠키 사후 그 이론을 독자적 방향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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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모스크바국립대 졸업, 심리학연구소 연구원
  • 1924–1930비고츠키·루리야와 공동 연구
  • 1931–1934하리코프 심리학파 지도
  • 1934–1941모스크바 복귀, 심리학연구소 연구 지속
  • 1941–1966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철학부 심리학과장
  • 1950–1957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심리학부 학술서기
  • 1959–1961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6–1979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

이사 알렉산드로비치 플리예프

Исса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ли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오세트인) 1903–1979 ○ 자연사

유일한 기병 출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쿠바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가다

1942년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 교두보. 플리예프의 기병군단 병사들이 돈 전선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쳤다. 독일 6군 33만 명을 가둔 포위환이 처음으로 닫힌 순간이었다.

북오세티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붉은군대에 입대한 후 소련 최고의 기병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독소전에서 도바토르 휘하 모스크바 방어전을 시작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그의 부대가 독일 6군 포위를 최초로 완성했고, 이후 기계화기병집단을 이끌며 우크라이나·벨라루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종심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만주에서는 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을 지휘해 관동군을 격파함으로써, 붉은군대에서 유일하게 기병 장군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아나디리 작전의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핵전쟁 직전의 긴장을 직접 관리했고, 같은 해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봉기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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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5기병사단 작전과장, 몽골 군사고문, 48기병연대장
  • 194150(후일 3근위)기병사단장 —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방어
  • 1942–19433근위기병군단장 — 스탈린그라드, 독일 6군 포위 최초 완성
  • 1944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 — 오데사 해방 (1차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4–19451근위기계화기병집단 — 바그라티온·데브레첸·부다페스트·프라하
  • 1945.08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 사령관 — 관동군 격파 (2차 영웅)
  • 1958–1968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62–1963아나디리 작전 —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

보리스 파블로비치 베셰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ещ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1 ○ 자연사

29년간 소련 철도를 이끈 최장수 장관

1930년대 후반, 젊은 엔지니어의 열차 편성 시간 단축 제안을 검토한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적었다: '베셰프 동지의 재능과 연구 자질을 키워줘야겠다.'

철도 전문 엔지니어 출신 최초의 소련 철도장관으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28년 7개월간 재임하며 소련 장관 중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세웠다.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하여 1950년까지 철도 화물 회전율을 전쟁 전보다 45% 끌어올렸고, 이후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전기 견인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주도해 철도 수송 비용을 약 3분의 1 절감했다. 재임 기간 소련 철도 화물 회전율은 8배 증가했고 2만 3,500km의 신규 간선이 건설되었으며, 56개로 분산된 철도국을 26개 대간선으로 통합했다. 바이칼-아무르 간선(BAM)의 설계·측량 작업을 재개시키고 철도 전산화와 고속 운행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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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레닌그라드 철도운수기사 연구소 졸업, 모스크바 호브리노 역 선임기사
  • 1937–1940오르조니키제 철도국장
  • 1940–1941옥탸브리스카야 철도국장
  • 1941–1942교통인민위원부 특별전권대표, 레닌그라드 전선 군수수송 및 대피 총괄
  • 1942–1944쿠이비셰프 철도국장
  • 1944–1946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운수관리국장
  • 1946–1948교통부 제1차관
  • 1948–1977소련 교통부 장관 (28년 7개월)

사르디온 니콜라예비치 나다라야

Сардион Николаевич Надарая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3–1982 ○ 자연사

베리야의 경호를 맡은 내부감옥 책임자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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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 부책임자, 이어 책임자
  • 1939–1946베리야 개인 경호 부책임자
  • 1946–1952MGB 경호총국 장교
  • 1952–1953MGB 제41 경호대 부책임자
  • 1953베리야 개인 경호 책임자
  • 1953–1965체포, 십 년형 복역

유리 예브게니예비치 막사료프

Юрий Евгеньевич Максар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3–1982 ○ 자연사

T-34 대량생산을 조직한 전차공업의 핵심 책임자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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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8키로프 공장: 직장·공장장·전차부장
  • 1938–1941하리코프 제183전차공장장
  • 1941–1942니즈니타길 제183공장장 (1942년 2월 해임)
  • 1942–1946우랄 제183전차공장장 (스탈린 기념)
  • 1946–1949소련 수송기계공업부 차관
  • 1950–1953소련 수송기계공업장관
  • 1957–1959소련 각료회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 1961–1978소련 각료회의 발명발견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사망, 사망일 이견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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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버시 졸탄

Vas Zoltán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903–1983 ○ 자연사

라코시 시대 계획청장, 실각 뒤 너지 임레의 사람

1919년 16세에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가 평의회 공화국 적군에서 싸웠고, 호르티 시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0년 라코시와 함께 석방되어 소련으로 갔다가 1944년 소련군 장교로 귀국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시장, 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1945~1949), 국가계획청장(1949~1953)을 지내며 5개년 계획을 짰고 당 핵심 「모스크바파」로 꼽혔다. 1953년 2월 모든 직위를 잃은 뒤 너지 임레 노선에 붙어 각료회의 사무국장(1954~1955)을 맡았고, 1955년 1월 소련 간부회는 그를 너지와 함께 비판했다. 1956년 11월 너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에 억류되었고, 이후 정치에서 밀려나 글을 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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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헝가리 공산당 입당, 평의회 공화국 적군 복무
  • 1925–1940코민테른 임무로 귀국했다 체포, 15년 가까이 복역
  • 1945부다페스트 시장
  • 1945–1949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
  • 1949–1953국가계획청장, 노동인민당 정치국원(1951~)
  • 1954–1955너지 정부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6–1958유고슬라비아 대사관 피신, 루마니아 억류

보니파티 미하일로비치 케드로프

Бонифатий Михайлович Кед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5 ○ 자연사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고 '케드로프 삼각형'을 정립한 과학철학자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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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셰비키 입당; 『프라우다』 책임비서 M.I. 울리야노바 보좌, 체카 근무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과 졸업; 화학 준박사 (깁스 역설)
  • 1935–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과학부 지도원
  • 1939–194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1946년 철학 박사; 1941–1945년 붉은군대
  • 1947–1949『철학의 제문제』(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 창간 편집장
  • 1955–1972과학사연구소(IIET) 선임연구원 → 소장(1962–1972)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7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лмого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7 ○ 자연사

현대 확률론의 공리적 기초를 세운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증언했다: "30년 동안 나는 콜모고로프의 논문을 읽을 때면 이것이 내 생각이라고 느낀다.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1933년 『확률론의 기초개념』에서 측도론 기반 공리계를 제시해 확률론을 엄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소련 수학자다. 위상수학의 코호몰로지, 고전역학의 KAM 이론, 난류 이론, 알고리즘 복잡도, 힐베르트 제13문제 해결 등 수학 전 분야에서 근본적 성과를 남겼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1935년 확률론 학과를 창설해 30년간 이끌었고, 1939년 35세로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소련 수학 올림피아드 체계와 콜모고로프 기숙학교를 설계한 영재 교육의 설계자였으며, 1964~1985년 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확률론을 포격 통계에 적용해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했고, 전후 중등 수학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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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87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35–1965모스크바 국립대학 확률론 학과장
  • 1939–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39–1942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64–1966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
  • 1974–1985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
  • 1963–1987콜모고로프 기숙학교 (제18학교) 창립자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노비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Нов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9 ○ 자연사

케넌의 장전보에 맞선 노비코프 전보: 냉전 개막을 쓴 소련 외교관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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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동양학원 졸업,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기관에서 근무
  • 1935세계경제·세계정치 적색교수연구소 입소
  • 1938외무인민위원부 제1동방부 책임고문
  • 1941–1943외무인민위원부 제4유럽부장
  • 1943–1944주이집트 소련 대사 (그리스 대사 겸임)
  • 1946–1947주미국 소련 대사
  • 1947대사직 해임, 중앙위 간부예비역으로 전출
  • 1950소련 작가동맹 가입, 학술·문학 활동 전념

아나톨리 페트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94 ○ 자연사

소련 원자력 해군을 창시하고 체르노빌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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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 1975–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6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즈나이다 바실리예브나 예르쇼바

Зинаида Васильевна Ершо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3–1995 ○ 자연사

소련 원자력 계획을 개척한 방사화학자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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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학생, 방사화학 연구
  • 1930–1937모스크바 희소원소 공장 방사늄 부문, 물리实验실장
  • 1936–1937파리 라듐연구소 연수, 이렌 졸리오퀴리 지도
  • 1938–1945기레드메트 라듐 연구실장, 우라늄 카바이드·금속 우라늄 생산
  • 1946–1948특수금속연구소 NII-9 제1방사화학연구실장
  • 1947–1954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생산 기술 연구, 스탈린상 수상
  • 1960년대–1989전러시아 무기재료연구소에서 폴로늄 화학과 동위원소 전원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