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당 지도부

19 명

소속 인물

천두슈

陈独秀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

리다자오

李大钊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889–1927 ✕ 처형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껴안고 마오쩌둥 세대를 길러낸 베이징대학 도서관장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1913톈진 북양법정전문학교 정치경제학 전공
  • 1913–1916와세다대학 유학, 반위안스카이 학생운동 지도
  • 1918–1927베이징대학 도서관장·역사학 교수, 『신청년』 편집위원
  • 1919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조직자
  • 1920베이징 공산주의 소조 창립, 보이틴스키와 천두슈 연결
  • 1921중국공산당 공동 창립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
  • 1922–1924제1차 국공합작 주창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 1926–1927농민무장혁명론 전환, 소련대사관에서 지하활동 지도

마오쩌둥

毛泽东
중공 당 지도부 중국(청 제국 출생, 중화민국 시기 활동,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중국 후난성 샤오산 1893–1976 ○ 자연사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장궈타오

张国焘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897–1979 ↓ 실각 1938 · 자연사

창당 대회 의장에서 대장정 중 마오와 결별해 국민당으로 간 홍군 지도자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의장
  • 1931–1935어위완 소비에트 · 제4방면군 지도자

류사오치

刘少奇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898–1969 ○ 옥사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1925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 전권대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
  • 1936중국공산당 북방국 서기 (화북 항일 저항 지도)
  • 1941–1943신사군 정치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에 관하여」 보고, 마오쩌둥 사상 당규약 명문화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1959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원수)
  • 1968모든 당내외 직위 박탈 및 제명

취추바이

瞿秋白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899–1935 ✕ 처형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22《천바오》 모스크바 특파원
  • 1922모스크바에서 중국 공산당 입당
  • 1923CCP 중앙위원, 선전·기관지 편집 책임
  • 1927–1928CCP 임시 정치국 수장 (사실상 당 지도자)
  • 1928–1930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CCP 대표단 단장
  • 1930–1931CCP 중앙위원, 좌경폭동주의 비판 후 해임
  • 1931–1934상하이 좌익작가연맹 지도, 루쉰과 공동 활동, 번역·문예비평
  • 1934–1935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교육인민위원, 《붉은 중국》 편집

리리싼

李立三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899–1967 ✕ 실각 1930 · 자살

1930년 도시 봉기 노선 「리리싼 노선」으로 당을 이끌다 실각한 노동운동 지도자

후난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 입당했고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 1925년 5·30 운동의 조직자였다. 1928년 이후 당 중앙의 실권을 쥐고 1930년 혁명의 고조가 왔다며 창사·우한 등 대도시 공격을 명령했으나 실패했고, 코민테른의 비판으로 실각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5년 동안 소련에 머물며 소련인 아내를 맞았고 1946년 귀국해 노동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박해 속에 1967년 자살했으며 1980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1930중공 중앙 선전부장 · 실질적 지도자
  • 1949–1954노동부장

장원톈

张闻天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00–1976 ↓ 실각 1959 · 심장마비

쭌이 회의 뒤 총서기를 맡은 「28인의 볼셰비키」,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 편에 섰다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으로 쭌이 회의 뒤 보구를 대신해 총서기가 되었고,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가 1976년 우시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 대신 마오를 지지해 당 총서기(총부책)를 맡았다. 옌안에서 선전·이론 부문을 이끌었고 정풍운동 이후 마오에게 실권을 넘겼다. 건국 후 주소련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을 비판해 펑더화이와 함께 「반당집단」으로 몰려 실각했다. 문화대혁명기 유배지에서 197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1979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1943중공 중앙 총서기
  • 1951–1955주소련 대사
  • 1954–1959외교부 부부장

펑전

彭真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02–1997 ○ 혈액암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타이위안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산시성 창립 당원
  • 1929–1935베이징·톈진에서 투옥, 옥중에서도 지하활동 지속
  • 1937–1941화북국 조직부장 겸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경구 서기
  • 1941–1944중앙당교 부교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당교 숙청 주도
  • 1945정치국원 선출; 동북국 서기 파견 — 1946년 군사적 패배로 해임
  • 1951–1966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
  • 19665인 소조 조장, 「2월 강요」 기초; 5월 회의에서 숙청, 문화대혁명 개막
  • 1979–1988전인대 법제위 주임, 중앙정법위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

라오수스

饶漱石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03–1975 ↓ 체포 1955 · 옥사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건국 후 첫 고위 숙청에 걸린 화둥의 지도자

장시 출신으로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국공내전기 화둥국 서기로 천이와 함께 화둥을 관할했다. 건국 후 화둥 군정위원회 주석과 중앙조직부장을 맡았다. 1953년 가오강과 함께 류사오치·저우언라이를 밀어내려 했다는 이유로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비판받고 1955년 체포되었다. 재판 없이 수감되었다가 1975년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가오강과 달리 공식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1952화둥 군정위원회 주석
  • 1953–1954중공 중앙 조직부장

런비스

任弼时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04–1950 ○ 뇌출혈

옌안 시기 「5대 서기」의 한 사람이었던 조직가, 건국 이듬해 요절했다

1940년 옌안으로 돌아온 뒤 서기처와 조직부에서 일했고,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혀 마오쩌둥·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 다음 서열에 올랐다. 1950년 10월 27일 베이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후난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배우고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대장정 때 허룽과 함께 제2방면군을 지휘했고 1938년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1943년부터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 조직과 재정을 맡아 마오·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와 함께 「5대 서기」로 불렸다. 1949년 건국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0년 뇌출혈로 46세에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1940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43–1950중앙서기처 서기

왕밍

王明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한족) 1904–1974 ○ 사망

'28인의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마오쩌둥의 최대 정적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코민테른에 충실한 교조주의 노선을 들여와 중공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의 노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상징으로 제거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1929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 1931.1중공 중앙정치국원 선출
  • 1931–1937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37–1938중공 장강국 서기
  • 1949–1956중앙법제위원회 주임
  • 1956–1974소련 망명, 반마오 선전 활동

덩샤오핑

邓小平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04–1997 ○ 자연사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궤도를 바꾼 실권자

1978년 이후의 전환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차례 실각 뒤 복귀해 1978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주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학습
  • 1978–1992중국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개혁개방 주도
  • 1979미국 방문과 대외 개방의 상징적 출발

보구

博古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한족) 1907–1946 ✕ 추락사

코민테른 노선을 대표한 중공의 젊은 총서기이자 당 언론의 설계자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1926상하이대학 수학, 5·30 운동 참여
  • 1926–1930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28인의 볼셰비키' 결성
  • 1931–1935중공 중앙 총서기 (중앙총책임자)
  • 1935.1쭌이 회의에서 실각, 정치국원 유임
  • 1937–193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41–1946『해방일보』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
  • 1946충칭 정치협상회의 중공 대표, 귀환 중 순직

후야오방

胡耀邦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15–1989 ↓ 실각 1987 · 심장마비

문화대혁명 피해자의 복권과 사상 해방을 이끈 개혁파 총서기, 그의 죽음이 1989년 시위를 불렀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다음 날 비공식 추모 집회가 정부에 그의 업적 재평가를 요구했고, 일주일 뒤 10만여 학생이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후난 출신으로 열네 살에 소년 홍군이 되어 대장정에 참여했고 건국 후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으며 1977년 중앙조직부장으로 수백만 건의 억울한 사건을 재심해 복권시켰고, 1978년 「진리 기준」 논쟁을 조직해 덩샤오핑의 복귀를 뒷받침했다. 1981년 당 주석, 1982년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했으나 1986년 말 학생 시위 뒤 「자산계급 자유화」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사임을 강요당했다.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추모 집회가 톈안먼 시위로 번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77–197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81–1982중공 중앙 주석
  • 1982–1987중공 중앙 총서기

자오쯔양

赵紫阳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19–2005 ↓ 실각 1989 · 연금 중 사망

쓰촨의 농업개혁에서 총서기까지, 1989년 계엄에 반대해 15년 연금으로 생을 마친 개혁가

1980~1987년 총리, 1987년 총서기로 정치체제 개혁을 맡았으나 1989년 톈안먼 시위 지지로 실각해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있었다

허난 출신으로 광둥의 지방 간부였다가 문화대혁명에서 실각했고, 1975년 쓰촨 제1서기로 복귀해 농가생산책임제와 기업 자율화 실험으로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으라」는 말을 낳았다. 1980년 총리, 1987년 총서기가 되어 가격개혁과 정치체제 개혁 구상을 추진했다. 1989년 5월 학생 시위에 대한 계엄에 반대해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뒤 실각했고, 이후 2005년 죽을 때까지 베이징 자택에 연금되었다. 몰래 녹음한 회고록이 사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5–1980쓰촨성 당위원회 제1서기
  • 1980–1987국무원 총리
  • 1987–1989중공 중앙 총서기

화궈펑

华国锋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21–2008 ↓ 퇴임 1981 · 자연사

「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76–1980국무원 총리
  • 1976–1981중공 중앙 주석

장쩌민

江泽民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26–2022 ○ 자연사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9–2002중공 중앙 총서기
  • 1993–200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왕훙원

王洪文
중공 당 지도부 중국 중국 1935–1992 ↓ 체포 1976 · 병사

상하이 노동자 반란파에서 당 부주석까지 오른 「헬리콥터」, 4인방의 최연소

지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상하이 면방직공장의 보위 간부였다. 1966년 노동자 반란 조직 「공총사」를 이끌어 1967년 1월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한 「1월 폭풍」의 주역이 되었고,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함께 상하이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오가 「노동자 출신 후계자」로 발탁해 1973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헬리콥터」라 조롱받았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92년 옥중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부주임
  • 1973–1976중공 중앙 부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