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의 요청으로 중부군을 이끌고 합류해 서쪽 구릉에 포병을 배치했다. 탄약 마차 폭발로 동요한 보병을 안정시키고 'Vive la Nation'을 외쳐 사기를 결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철수했다.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작센 출신 가문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1750년(또는 1752년) 왕립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했고, 1788년 준장이 되어 구체제에서 장성이 된 유일한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89년 혁명에 호의적이었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중부군을 이끌어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공로로 '발미의 승리자'로 불렸다. 1793년 11월 불충성 혐의로 13개월 수감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석방·복직했다. 1804년 제국 원수, 1808년 발미 공작이 되었고 1814년 상원에서 나폴레옹 퇴위에 찬성한 뒤 루이 18세 치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792년 발미와 즈마프의 승리로 혁명을 구했으나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을 기도했고, 국민공회가 보낸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에 인도한 뒤 전향했다. 그 전향은 지롱드파를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정치인. 왕정 시대 왕군 장교로 7년 전쟁에 참전하고 셰르부르 항만 책임자를 지냈다. 혁명 후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지롱드파의 지지로 1792년 3월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겸했다. 루이 16세와 갈등해 사임한 뒤 북부군 사령관으로 켈레르만과 함께 발미(1792년 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즈마프(1792년 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과 국민공회 해산,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정 복고를 기도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서 사망했고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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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캉브레에서 출생. 출처에 따라 1월 25일·26일·27일로 생년월일 기록이 갈린다.
1792지롱드파 지지로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지냈다.
1793년 공안위원회의 병력·부대 이동 담당 위원으로 14개 군을 창설하고 1793년 가을 북부전선의 프랑스 부대를 지휘해 주르당의 와티니 승리에 기여했으며, 군대를 1793년 중반 약 64만 5천 명에서 1794년 9월 약 150만 명으로 늘렸다.
1753년 부르고뉴의 놀레에서 태어나 1823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죽은 프랑스의 수학자·군인·정치가다. 1791년 입법의회에, 1792년 9월 국민공회에 선출되었고, 1793년부터 공안위원회에서 병력과 부대 이동을 맡아 1793~94년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을 이끌어 '승리의 조직자'로 불렸다. 정직한 행정가이자 확고한 공화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고, 1794년 테르미도르에 로베스피에르와 결별해 그의 몰락에 가담했으며 총재정부의 초기 총재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97년 18일 프뤽티도르 쿠데타로 축출되어 망명했고, 1800년 잠시 전쟁장관을 지냈으며 제정 즉위에는 반대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백일천하 때 내무장관을 맡았으며, 왕정복고 뒤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죽었다.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헬베티아 방면군을 이끌고 코르사코프의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격파했고, 1800년 제노바를 약 60일간 방어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묶어 보나파르트의 마렝고 승리를 도왔다.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사령관. 1758년 5월 6일 니스(당시 사르데냐 왕국 니스 백작령)에서 출생명 안드레아 마세나로 태어났다. 구체제 왕립 이탈리아 연대의 사병으로 출발해 1784년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부사관 계급에 이르렀고, 1793년 8월 여단장, 같은 해 12월 20일 사단장이 되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창설한 최초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고, 1808년 리볼리 공작, 에슬링 대공 작위는 1809년(일부 문헌은 1810년 1월)에 받았다. 1817년 4월 4일 파리에서 58세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1794년 2월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했고, 1794년 12월–1795년 1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 위트레흐트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기병이 얼음 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사로잡았다.
1778–1804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드르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왕당파로 돌아섰고,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에서 카옌으로 유배되었으며, 런던으로 도피한 뒤 1799년 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804년 4월 감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이 혁명기의 대표적 순간이다. 1798년에는 오백인회에서 동료 의원 피에르 델브렐과 함께 20~25세의 독신·무자녀 남성을 징병하는 주르당법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복무했고 1804년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62년 리모주에서 외과의사 로크 주르당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혁명 전쟁에서 북부군을 이끌어 1793년 10월 와티니에서 승리하고 마우보주 포위를 깼다. 이어 삼브르에뫼즈군을 지휘해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총재정부 시기 자코뱅 정치인으로서 오백인회 의원(1797~1799)으로 일했고, 1798년 징병법(주르당법)을 입안했다.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했으나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했고, 사망할 때까지 앵발리드 총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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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1783보조루아 연대에 입대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 1779년 서배너와 서인도 제도에서 복무
17935월 27일 준장으로 진급하고 두 달 뒤 사단장이 되었으며, 9월 22일 북부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0월 와티니에서 승리
1794삼브르에뫼즈군(6월 29일 정식 편성)을 이끌고 6월 26일 플뢰뤼스에서 승리
1797–1799오백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798년 징병법을 발의·통과시켰고, 1799년 오스트라흐와 슈토카흐에서 패배
1804–1815나폴레옹에게 원수와 백작 작위를 받고 피에몬테 총독을 지냈으며, 1808년 스페인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참모장을 맡고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
1816–18331815년 이후 부르봉 왕가에 충성해 1816년 그르노블 총독, 1819년 프랑스 상원의원이 되었고,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해 잠시 외무를 맡은 뒤 앵발리드 총독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임
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
1800년 3월 유럽으로 돌아와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고, 6월 14일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우세하던 시점에 도착해 세 연대를 적 중앙에 투입했다. 승리 직전에 총탄에 맞아 죽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장군이다. 1768년 오베르뉴의 아야쉬르시울에서 태어나 에피아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왕립군에서 복무했다. 1792년 가족 대부분이 이민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라인군에 들어갔으며, 라우터부르크 전투의 공로로 준장이 되었다. 라인군과 1795~1796년 원정에서 복무하며 모로의 퇴각을 엄호했고, 잉글랜드 방면군 사령관을 지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맘루크의 공격을 맞았고 상이집트 원정으로 현지 주민에게 '정의의 술탄'이라 불렸다. 1800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마렝고에서 부데 사단과 함께 반격을 이끌었고 승리 직전에 전사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위대한 장군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이 과들루프에 파견한 원정군 사령관.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했으나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고, 반란은 1804년까지 이어졌다.
1770년 메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복무하던 콩티 용기병연대에 5세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혁명을 지지했고 1791년 소위, 1793년 대위, 1794년 기병대장을 거쳐 1796년 클레베르에 의해 준장으로 승진했다. 오슈 휘하에서 라인·삼브르뫼즈 군에서 복무하며 네우비트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1800년 모로의 라인 군에서 사단을 지휘해 12월 3일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우회 기습해 승리를 결정지었다. 1801년 라인 군 해산 뒤 바타비아 공화국 기병 총감독이 되었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은 그를 과들루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한 뒤 노예제 강제 재도입을 집행했다.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1940년 5월 16일 파리에서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가믈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