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NATO·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1988년 11월 7일과 1989년 11월 20일, 사수응게소 대통령에게 전국 원탁회의 개최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풀주의 킨칼라구 음볼로키 출신의 콩고 정치인으로, 일당제 시절에 콩고민주통합발전운동(MCDDI)을 창설하고 다당제 도입을 요구했다. 1991년 주권 국민회의에서 정당 연설을 개막하고 앙드레 밀롱고의 과도 총리 선출을 지지하는 등 민주화 이행의 야당 축이었다. 1992년 대선 결선에서 리수바에게 패했고, 1997년 내전 중 리수바의 민족통합정부 총리가 됐다가 사수응게소 충성 세력에 축출되어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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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콩고민주통합발전운동(MCDDI) 창설, 당 규약을 내무부에 제출
1991주권 국민회의에서 정당 연설 개막
1992대선 1차 20.32%로 2위, 결선에서 리수바에 패배
1994브라자빌 시장 선출
1997리수바에 의해 민족통합정부 총리로 임명됨, 사수응게소 충성 세력의 점령으로 축출·망명
4인방의 최연소자. 상하이 면방직공장 보위 간부에서 1966년 11월 노동자 반란 본부를 세우고 상하이 코뮌을 조직했으며, 38세에 당 제2부주석까지 올랐다가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로 체포되었다.
지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상하이 면방직공장의 보위 간부였다. 1966년 노동자 반란 조직 「공총사」를 이끌어 1967년 1월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한 「1월 폭풍」의 주역이 되었고,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함께 상하이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오가 「노동자 출신 후계자」로 발탁해 1973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헬리콥터」라 조롱받았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92년 옥중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회의 전날 아침, 그는 레바논 공산당 지도자 조지 하위에게 "오늘 구체적 제안을 할 텐데, 알리 나세르가 거부하면 권총을 뽑아 내 머리를 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예멘 민족해방전선 유격대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인민민주공화국의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냈다. 소비에트 모델로 군대를 재편하고 1978년 살림 루바이 알리 축출과 1980년 이스마일 퇴진을 주도하며 권력 핵심에 섰다. 훗날 알리 나세르 무함마드의 경제 자유화에 반대해 반대파의 중심이 되었고, 1986년 1월 13일 정치국 회의장에서 대통령 경호원의 총격에 사살되자 장교단이 대통령에게서 이탈하며 남예멘 내전이 불붙었다.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
1992년 11월 앙카라를 방문해 아느트카비르에서 아타튀르크의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그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로 적었다.
1938년 6월 24일 나흐치반 칼라키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22일 앙카라에서 사망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 바쿠 국립대학교에서 아랍어문헌학을 전공했고 1969년 역사학 후보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투르크주의자·반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어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했다. 1989년 인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 1990년 1월 국방위원회를 조직했고,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진 위기의 중심 인물이었다. 1992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카라바흐 전선의 패배와 후세이노프의 반란 속에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승계했다. 1997년 바쿠로 돌아와 야당을 이끌었다.
MFM이 마침내 혁명전선에 들어오자 라치라카는 '더 이상 MFM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몽자 자오나의 모니마에서 정치에 입문한 농학대 교수 라코토니리나는 1972년 5월 시위를 조직해 치라나나 정권의 퇴진을 이끈 학생세대의 지도자였다. 1972년 12월 마오쩌둥주의 좌파 정당 소민 권력 투사(MFM)를 창당했으나 1976년 라치라카 정권에 해산·연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혁명전선(FNDR)에 합류해 혁명최고평의회 경제위원장으로 국유기업을 맡았다. 이후 자유주의로 돌아서 1991년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2009년 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86년 1월 무력 충돌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살아남아 2월 예멘사회당 서기장에 올랐다.
남예멘의 혁명 지도자로 예멘사회당 서기장으로서 남예멘의 마지막 시기를 이끌었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의 동맹자로 1986년 1월 아덴 무력 충돌에서 살아남아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 세력이 패퇴한 뒤 당·국가 지도권을 장악했다. 1990년 통일 예멘의 초대 부통령이 됐으나 1993년 사임하고, 1994년 내전에서 단명한 예멘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망명 뒤에는 남부 독립운동 알히라크를 이끌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1977년 8월 체포와 그 뒤의 소식 단절은 더르그의 탄압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을 넘어 자기 협력자였던 메이손 지도부로 돌아선 전환점이었다. 1979년 무렵의 사망은 여러 사료가 전하지만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으로, 전에티오피아사회주의운동(메이손)의 지도자이자 의장이었다. 오로미아 월레가 아르조 출신으로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혁명 직후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었다. 1975년 12월 더르그가 세운 대중조직사무국(POMOA) 의장을 맡아 1976년 4월 20일 발표된 민족민주혁명 강령을 기초했다. 1977년 8월 26일 체포되어 구 게비에 구금되었으며, 수개월의 구금 끝에 사라졌다고 기록된다. 1979년 무렵 사망했다는 서술은 날짜와 경위가 확정되지 않았다. 라틴 문자 쿠베 철자법의 선구자로 '쿠베의 아버지'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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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유럽 에티오피아 학생연맹 제8차 대회에서 메이손 창립에 참여하고 유럽 오로모 학생 학습반을 조직·지도
1973파리에서 쿠베로 쓴 오로모어 문법서 『히르마타 두비 아파안 오로모』를 출간
1974–1975에티오피아로 귀국해 네게데 고베제와 진보서점을 열어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보급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