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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Воро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6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엮어낸 붉은군대 포병의 설계자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가 제64군에 사로잡힌 뒤, 보로노프는 자바리기노의 자크바냐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그를 신문해 저항 중인 북부 집단의 항복 명령을 요구했으나, 파울루스는 자신이 포로라 명령이 무효라며 거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우다 1920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포병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1937년 귀국해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면서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을 밀어붙였으며, 그해 처형된 전임자 로고프스키를 대신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타프카 대표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에 파견되어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감독했고, 1943년 파울루스의 신문에 참여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에 올랐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1968년 2월 악성 종양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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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1붉은군대 입대,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폴란드군 포로
  • 193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포병연대장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포병 고문 (암호명 '볼테르')
  • 1937–40적군 포병 총책임자, 할힌골·겨울전쟁 참전
  • 1941–50포병사령관 겸 국방부인민위원, 스타프카 대표로 주요 작전 지휘
  • 1943천왕성 작전 포병 계획 수립, 파울루스 직접 신문
  • 1944최초의 포병 총사령관 진급, 타임지 표지 인물
  • 1950–68포병과학아카데미 원장, 포병지휘아카데미장, 감찰장단

파벨 표도로비치 유딘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Юдин

스탈린주의 철학 정통을 세우고 말년에 소련 문화사의 토대를 잉태한 철학자 외교관

「유딘과 미틴은 하늘의 별을 딸 재목은 아니지만, 기술적으로는 일을 잘 안다」 — 스탈린, 두 철학자를 평가하며

1930년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를 숙청한 철학자.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하고 주중 대사로 중소 분열을 목격했다. 말년에 비정통파 문화사학자들을 보호해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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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제고로드 현 아프락시노 촌락 빈농 가정 출생, 1912년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이주하여 선반공 견습
  • 1918–1921붉은 군대 지원 입대, 콜차크군과 교전. RKP(b) 입당(1918.10), 정치지도원에서 제57소총사단 연대 정치위원까지 승진
  • 1921–1931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1924), 니제고로드 현당 선전선동부장·현신문 『즈베즈다』 편집국장(1924~1927),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1931)
  • 1930–1932미틴·랄체비치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대하여」(『프라우다』 1930.6.7) 발표 —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 숙청 개시
  • 1932–1938적색교수양성소 소장, 『문학비평가』 주필(1933~1937),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대회 조직위 책임서기, 아기트프롭 부장(1934~1937)
  • 1937–1947국립출판사연합(OGIZ) 소장, 1937년 「왜 RAPP를 해체해야 했는가」로 키르숀·아베르바흐 공격 — 키르숀은 이후 체포·처형됨
  • 1939–1944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통신회원(1939),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모스크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임(1943~1948)
  • 1950–1951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베이징 파견 — 마오쩌둥 『선집』 러시아어판 편집, 중국 각지에서 정치·이론 강연. 마오와 철학·정치 대화
  • 1952–1959CPSU 중앙위원(1952~1961), 당중앙 간부회의 후보위원(1952.10~1953.3). 주중 소련 대사(1953.12~1959.10) —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노선에 비협조, 중소 분열 초기 목격 후 소환
  • 1960–1968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인류와 문화' 4권 기획 참여. '세계 문화사' 프로젝트 지도 — 아베린체프·구레비치·카주단 등 비정통파 학자 기용, 사후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남김

필리프 세르게예비치 옥탸브리스키

Филипп Сергеевич Октябрь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69 ○ 자연사

흑해함대를 이끌고 오데사와 세바스토폴을 방어한 해군 제독, 그리고 대피 논쟁의 주인공

1941년 6월 22일, 적기 접근 보고에 옥탸브리스키는 "지시대로 행동하라"며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참모장이 독자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그 짧은 지연 동안 항만에 기뢰가 투하되었다.

소련 흑해함대의 전시 사령관. 1939년부터 흑해함대를 지휘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직후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진두지휘했고,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을 조직했다. 1943년 남오제레이카 상륙작전 실패로 경질되었다가 1944년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해 크림·오데사·야시-키시뇨프 작전에 기여했다. 1944년 제독으로 진급했고 전후 해군 제1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58년 영웅도시 세바스토폴의 방어를 이끈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자신과 지휘부만 빠져나오고 수만 명의 수비대를 남겼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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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발트함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 1920발트함대 기뢰학교 졸업
  • 1924이바노프에서 옥탸브리스키로 개명 (10월 혁명 기념)
  • 1938–1939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하산 호 전투 참전
  • 1939–1943흑해함대 사령관 —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
  • 1943–1944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경질 후 좌천)
  • 1944–1948흑해함대 사령관 복귀, 제독 진급 (1944.4.10)
  • 1948–1951해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나히모프 흑해고등해군학교장
  • 1960–1969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

Лев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леш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9–1970 ○ 자연사

〈쿨레쇼프 효과〉의 창안자, 편집이 촬영보다 의미를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아버지

“우리는 영화를 만든다 — 쿨레쇼프는 영화를 만들었다.” — 1929년 제자들이 스승의 저서 《영화의 예술(나의 경험)》 서문에 바친 헌사

소련 영화감독·이론가·교육자. '쿨레쇼프 효과'로 몽타주의 심리적 원리를 입증했고, 1919년 세계 최초 영화학교(VGIK)를 창설해 에이젠슈테인·푸돕킨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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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한존코프 영화사에서 예브게니 바우에르의 미술감독으로 영화계 입문
  • 1918첫 연출작 〈프라이트 기술사의 계획〉 — 초기 몽타주 실험을 담은 데뷔작
  • 1919국립영화학교(현 VGIK) 설립, 세계 최초의 체계적 영화 교육 시작
  • 1920〈붉은 전선에서〉 — 다큐와 극을 결합한 최초의 소비에트 영화, 쿨레쇼프 워크숍 결성
  • 1924〈볼셰비키 나라의 미스터 웨스트〉 — 쿨레쇼프 집단의 첫 장편으로 소비에트 영화의 국제 경쟁력 입증
  • 1939VGIK 교수 임명, 예술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941저서 〈영화 연출의 기초〉 출간 — 전 세계 영화학교의 표준 교재
  • 1944–1969VGIK 학장(1944), 이후 연출학과장으로 25년간 후진 양성; 노동적기훈장·레닌훈장·인민예술가 수훈

미하우 칼레츠키

Michał Kalecki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 1899–1970 ○ 자연사

케인스보다 먼저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마르크스주의 거시경제학자

칼레츠키는 1943년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공장 내 '규율'과 '정치적 안정'은 기업 지도자들이 이윤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가치다. 그들의 계급적 본능은 지속적인 완전고용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건전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케인스보다 앞서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윤·투자·소득분배를 계급 분석으로 설명하는 독자적 거시경제학을 구축했고, 사회주의 폴란드에서 계획경제 성장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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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바르샤바 경기순환·물가연구소 연구원
  • 1933「경기순환 이론 시론」 발표 — 유효수요 원리를 케인스보다 먼저 정식화
  • 1936–1945영국 이주; LSE,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통계연구소에서 연구
  • 1943「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 발표 —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저항을 예측
  • 1946–1954유엔 사무국 경제개발부 차장 (뉴욕); 매카시즘 압력으로 사임
  • 1955–1968폴란드 각료회의 경제고문,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바르샤바 대학 교수
  • 1957폴란드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68반유대주의 숙청에 항의하여 공직 사임

스레텐 주요비치

Сретен Жујовић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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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세묜 모이세예비치 크리보셰인

Семён Моисеевич Кривоше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78 ○ 자연사

구데리안과 함께 브레스트 열병식을 주관한 소련 기갑군 중장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도시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크리보셰인은 구데리안과 나란히 서서 나치 독일군과 붉은 군대의 합동 열병식을 주관했다.

소련 기갑군 중장. 보로네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북전쟁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후 기갑 부대로 옮겨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군 최초의 전차 지휘관으로 마드리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구데리안과 만나 독일군 철수와 합동 열병식을 함께 주관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 소속 제3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오보얀 축선을 방어, 호트의 주력 기갑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근위군단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베를린 공세에서 제1기계화군단을 이끌며 4월 25일 가장 먼저 시내로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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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붉은 군대 입대, 남북전쟁 참전 (제1기병군)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제7기계화연대 참모장
  • 1934제6기계화연대장
  • 1936–1937스페인 내전 참전,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전차부대 지휘
  • 1937제8독립기계화여단장 (곧 전차여단으로 개편)
  • 1938하산 호 전투 조사위원회 대표로 파견
  • 1939폴란드 진주: 제29전차여단 지휘, 브레스트에서 구데리안과 합동 열병식
  • 1939–1940겨울전쟁 참전, 비보르크 점령
  • 1940–1941소장 진급; 제15기계화사단장, 제2전차사단장, 제25기계화군단장
  • 1941–1943적군 기갑총국 전투훈련국장
  • 1943제3기계화군단장; 쿠르스크 오보얀 축선 방어; 중장 진급, 근위군단 승격
  • 1944제1기계화군단장; 바그라치온 작전에서 브레스트 탈환
  • 1945비스와-오데르·베를린 공세 — 4월 25일 베를린 최초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6–1949프룬제 사관학교 기갑전술학과장
  • 1950–1952오데사 군관구 기갑·기계화부대 사령관
  • 1953예비역 편입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네스메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Несмея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80 ○ 자연사

원소유기화학을 창시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1951년 총재 S. I. 바빌로프가 사망하자 정치국원 말렌코프가 네스메야노프를 불러 총재직을 제안했다. 그는 채식주의 신념과 체포되어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형제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으나, 말렌코프는 이를 묵살했다.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네스메야노프는 18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소련의 화학자이며 과학 조직가다. 1929년 금속 할로겐화물과의 디아조 반응, 즉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아릴수은 할로겐화물을 얻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는 탈륨·주석·납·비소 등 여러 금속의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확장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9)과 정회원(1943)을 거쳐 유기화학연구소 소장(1939–1954)과 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1954–1980)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아카데미 총재로 재임했다. 1961년 이후에는 농업을 우회하는 합성식품 연구를 추진해 인공 블랙 캐비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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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54유기화학연구소 소장 · AN SSSR
  • 1943화학 부문 정회원(아카데미크) · AN SSSR
  • 1946–1951화학 부문 아카데미크-서기 · AN SSSR
  • 1948–1951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
  • 1951–1961과학아카데미 총재 · AN SSSR
  • 1954–1980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
  • 1950–196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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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나움 이사코비치 에이팅곤

Наум Исаакович Эйтингон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899–1981 ○ 자연사, 모스크바

트로츠키 암살과 원자력 첩보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암약 지휘관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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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 1940수도플라토프와 '오리 작전' 공동 지휘 — 멕시코 트로츠키 암살
  • 1941–1945NKVD 제4국 부책임자 — 기만작전 '수도원'·'베레지노' 지휘
  • 1945–1951NKVD/NKGB 'S' 부서 부책임자 — 원자력 첩보; 발트·서우크라이나 반소 파르티잔 제압
  • 1951–1964'MGB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 12년형; 1953년 베리야에 의해 일시 복직 후 재체포
  • 1964–1981석방, 출판사 선임 편집자; 1992년 사후 복권

아르비트 야노비치 펠셰

Арвид Янович Пельше

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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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수르코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рк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젬랸카〉를 썼고 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지휘한 작가동맹 집행자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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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붉은 군대 복무, 내전 참전
  • 1926–1928『세베르니 콤소몰레츠』 편집장
  • 1934–1939『리테라투르나야 우초바』 부편집장, 문학대학 강사
  • 1940–1941『노비 미르』 편집장
  • 1941–1945종군기자, 전선 신문 특파원
  • 1944–1946『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49–1953『오고뇨크』 편집장
  • 1953–1959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56–196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9–1983 ○ 뇌졸중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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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 1949–1950두 차례 총리(임시정부 주석·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외교·국제활동 알바니아 국가기관 알바니아 알바니아인 1899–1984 숙청 · 억류 · 수감, 사망

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1946년 1월 11일 제헌의회 회의에서 그는 20인 위임검증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첫 회의를 폐회했고, 같은 날 정오 두 번째 회의에서 의회는 알바니아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다.

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이집트 파이윰에서 민족운동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베이루트와 하버드를 거쳐 1923~24년 뉴욕 영사, 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1938년 알바니아로 파견되어 1941년 창당에 참여했고, 1943년 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1945년 제헌의회 서기를 지냈다. 1946~47년 모스크바 대사, 외무부 차관, 1954~55년 소피아 대사를 거쳐 당 통제·감사위원장을 맡았으나, 1960년 수정주의 공격 속에 숙청되어 8년 억류와 10년 부렐 형무소 생활 끝에 1980년 석방되었고 198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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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뉴욕 주재 알바니아 영사
  • 1920년대 말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영미부문 교직
  • 1938알바니아로 파견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창당 참여
  • 1943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 1945제헌의회 서기
  • 1946–1947모스크바 주재 대사
  • 1954–1955소피아 주재 대사
  • 1955–1960당 통제·감사위원장
  • 1960숙청: 당 제명, 억류와 수감
  • 1969–1980부렐 형무소 수감, 당시 최고령 수감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그로모프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Гром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9–1985 ○ 자연사

기록비행의 영웅에서 공군 지휘관으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1937년 7월 14일, ANT-25기가 캘리포니아 샌재신토 목장에 착륙하자 현지 목장 주인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소?" 그로모프는 대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전설적 시험비행사이자 공군 지휘관. 1937년 ANT-25기로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무착륙 비행해 세계 거리 기록을 세웠고, 독소전쟁에서는 항공군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이감을 주선해 소련 우주 개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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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NII VVS 시험비행사
  • 1930–1941TsAGI 수석 시험비행사
  • 1941LII 초대 소장
  • 1942–1943제3항공군 사령관
  • 1943–1944제1항공군 사령관
  • 1944–1946VVS 전선항공 전투훈련총국장
  • 1946–1949장거리항공 부사령관
  • 1949–1955항공산업성 비행근무국장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차긴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аг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899–1987 ○ 자연사

숙청당한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련 마르크스주의 철학사 연구의 대부

1930년대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에서 차긴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이 체포되었고, 대다수는 총살되었다.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 동료들이 스탈린 숙청으로 전원 처형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이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그의 철학 저작 선집 편집을 주도했고, 이 공로로 플레하노프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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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남북전쟁 및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전, RKP(b) 입당
  • 1922–1931교편 생활 시작, 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 1930s붉은군대 교육기관·레닌그라드 공산아카데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 1940–1941레닌그라드대학 철학학부 학장
  • 1946철학박사 학위 취득
  • 1956–1967레닌그라드대학 철학사 교수주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닌그라드 철학부문 선임연구원·주임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바르민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рм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87 ○ 자연사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해 망명한 소련 GRU 준장: 극소수 생존자

「내가 책을 쓸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실수처럼 느껴진다」 — 『살아남은 자』(1945)

소련 군사정보국(GRU)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와 그리스 주재 대리대사를 역임했다.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7년, 동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아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처형 소식을 접한 뒤 아테네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OSS에서 복무하고 16년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회고록 『살아남은 자』에서 '내가 집필할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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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군대 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RCP(b) 입당
  • 1920–23보병장교학교·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수학
  • 1921–25투르케스탄 전선 RVS 전권대표, 부하라 총영사, 페르시아 길란 총영사
  • 1929–32파리·밀라노·브뤼셀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34–35아프토모토엑스포르트 청장; 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대표부 1등서기관
  • 1935–37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 그리스 주재 소련 대리대사
  • 1937.7그리스에서 프랑스로 망명 — 초기 고위급 소련 정보장교 망명자
  • 1940–44미국 이주; 미육군 사병 복무 후 OSS(전략첩보국) 근무
  • 1948–64미국의 소리(VO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
  • 1964–72미국 정보국(USIA) 소련 담당 고문

녜룽전

聂荣臻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99–1992 ○ 자연사

진차지 근거지의 사령관에서 「양탄일성」 핵·미사일 계획의 총책임자가 된 원수

1958년부터 국방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중국 핵 계획을 지휘했고, '제국주의의 핵 공격을 받을 때 최소한의 보복 수단을 갖추기 위해' 첨단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벨기에·소련에서 배우고 황푸군관학교 정치교관을 지냈다. 대장정에서 린뱌오의 제1군단 정치위원이었고 항일전쟁기 화베이의 진차지 근거지를 세워 지휘했다. 국공내전 뒤 베이징 시장을 지냈고 1955년 원수가 되었다. 1956년부터 국무원 과학기술 담당 부총리로 소련 원조 철수 뒤에도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이르는 국방과학 계획을 총괄했다. 10대 원수 중 마지막으로 199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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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5진차지 군구 사령관
  • 1958–1975국방과학기술위원회 주임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돌레잘

Николай Антонович Доллежаль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체코 1899–2000 ○ 자연사

소련 원자로 설계의 총설계사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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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MVTU 졸업, 기계기사
  • 1930–1932프롬파르티야 사건으로 수감; OGPU OKB-8 부수석기사
  • 1933–1942볼셰비크 공장(키예프) 수석기사 · 우랄히마쉬 수석기사
  • 1943–1952NIIkhimmash 소장 (1946년부터 원자력 사업 참여)
  • 1952–1986NII-8 / NIKIET 소장
  • 1954오브닌스크 AM-1 원자로 수석설계자 (세계 최초 원전)
  • 1961–1986MVTU '원자력기계' 학과장

야코프 그리고리예비치 블륨킨

Яков Григорьевич Блюмкин

미르바흐를 쏜 좌파 SR, 소련 비밀공작의 선구자

「제국 대사를 쏜 사내가 군중 속에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시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 니콜라이 구밀료프, 「나의 독자들」

오데사 출신 유대인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1918년 체카 소속일 당시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을 주도해 좌파 SR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면 후 OGPU 해외첩보부(INO) 초기 비밀공작원으로 페르시아·팔레스타인·몽골·중동에서 불법 체류하며 소련 정보망을 구축했다. 모스크바 문학계에서 마야콥스키·예세닌 등과 교류한 논란적 인물로, 192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트로츠키를 은밀히 만나 서신을 국내 반대파에 전달하려다 체포되어 OGPU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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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06체카 반국제스파이 분과장 — 좌파 SR 지도부가 배치
  • 1918.07.06니콜라이 안드레예프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 — 좌파 SR 봉기 촉발
  • 1919.05자수 후 VTsIK 사면, 적군·체카 복귀
  • 1920페르시아 파견 — 이란 공산당 합류, 길란 소비에트 공화국 군사참모
  • 1923–1924OGPU INO 비밀체류자 — 팔레스타인(야파) 거점, 세탁소 위장
  • 1926–1927몽골 OGPU 체류자 겸 국가내부경비대(GVO) 수석교관
  • 1928–1929중동 OGPU 체류자 — 콘스탄티노플, 고서적상 위장
  • 1929.10트로츠키 비밀접촉 발각 — OGPU 체포, 콜레기야 사형판결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고레프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Гор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계 1900–1938 ✕ 처형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한 국제주의 군인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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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적군, 러시아 내전 참전 및 지휘관
  • 1925–1927중국 국민혁명군 군사·정보 고문, ‘니키틴’·‘고든’
  • 1930–1933미국 비합법 정보원
  • 1933–1935레닌그라드 군관구 자동차·기갑 부대 지휘부
  • 1935–1936제31독립기계화여단장 겸 정치위원, 콤브리그
  • 1936–1937스페인 공화국군 소련 군사고문 및 군사주재관, ‘산초’
  • 1937스페인 북부 전선 군사고문
  • 1938체포·처형, 1956년 복권

레오 라그랑주

Léo Lagrange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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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시테른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Штер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유대인,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출신, 현 우크라이나) 1900–1941 ✕ 재판 없이 총살

하산·할힌골의 승리자, 숙청된 극동전선 사령관

1939년 7월 5일 국방인민위원 명령으로 시테른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선집단이 편성되어 제1붉은기군, 제2붉은기군, 자바이칼군관구, 제57특수군단을 통제했다. 7월 19일 제57특수군단이 주코프의 제1군집단으로 개편되었다.

1900년 8월 6일(구력 7월 24일) 키예프현 스멜라(현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주)에서 태어나 1941년 10월 28일 사망한 소련 군사지휘관이다.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키예프의 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했다. 1937~38년 '그리고로비치'라는 성으로 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을 지냈고, 1938년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을 지휘했다. 1939년 7월 5일 전선집단 사령관으로 할힌골 전투를 총괄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1941년 체포되어 트로츠키주의 음모와 독일 스파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고, 10월 28일 쿠이비셰프 인근에서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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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4투르키스탄에서 바스마치 토벌
  • 192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졸업, 국방인민위원부 참모
  • 1936제7사마라기병사단장
  • 1937–1938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 (가명: 그리고로비치)
  • 1938극동전선 참모장 →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 지휘
  • 1938–1939제1독립붉은기군 사령관
  • 1939할힌골 전투 전선집단 사령관 —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0제8군 사령관 (겨울전쟁) → 극동전선 사령관, 상장 진급
  • 1941방공총국장 → 6월 체포, 10월 28일 재판 없이 처형

하인리히 히믈러

Heinrich Himmler

나치 인종국가의 핵심 설계자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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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 1925친위대에 가입했다.
  • 1929–1945제국지도자 친위대로서 친위대를 지휘했다.
  • 1936–1945독일 경찰장으로서 경찰과 정치탄압 기구를 장악했다.
  • 1943–1945내무장관을 겸임했다.
  • 1944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도시 파괴와 주민 학살·추방 작전을 지시했다.
  • 1945서방과의 독자 협상 시도로 해임되고 체포 뒤 자살했다.